안 동일 지음
두물머리 석실서원
마침 대장간이 보이길래 필제의 횃대 손 장도를 손 보고 다시 길을 나섰더니 아까 주막의 여자아이와 침모가 저 만큼에 가고 있었다.
그녀들의 옆을 지나치려니 여자아이가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한다.
금원도 그냥 지나치기 뭣했다.
“응 너로구나 아까는 그렇게 서럽게 울더니…”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다. 재대로 먹지 못했다면서도 볼이 탱탱한 게 귀염성 있는 얼굴이다.
“그래 어디로들 가는 겁니까?”
금원이 침모에게 물었다.
“네, 미호리 석실원에 갑니다.”
“그래요?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데…”
묘한 인연 이었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순정이였고 침모는 양평사람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정확히는 서원촌 객점으로 가는 길이었다. 순정이는 쌀 세섬에 팔려가는 신세였다. 쌀은 벌써 지난 가을에 건네졌단다. 왠지 순정이 남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꼭 저 나이에 자신은 혼자 금강산 여행에 나섰는데… 실은 녹번정에도 잔심부름 할 순정이 같은 아이가 필요 했다. 쌀 세섬이라면 그리 큰 부담도 아닌데…
일행은 걸음을 재촉해 아직 해가 있을 때 수석리에 당도 했다.
듣던대로 수석리는 완전히 석실서원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었다. 서원은 강이 바라보이는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 동촌과 서촌으로 부른단다.
양주네와 순정이는 서촌 객주집으로 가고 필제와 금원은 일단 서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갈마재라 부르는 언덕을 올라섰다. 서원은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행상들이 있어 대문과 홍살문 앞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안쪽에는 서재 건물 이며 누각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안에는 고지기의 공간이 있어 거드름을 피우고 앉아있는 초로의 고지기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굳이 안으로 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대문 앞쪽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탁트인 강 경치는 역시 일품이었다. 지난 시기의 빼어난 화가 겸재도 진경산수의 일환으로 이곳 석실서원을 그려서 호평을 받았었다.
정문과 홍살문 옆으로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작은 출입문이었는데 사람들이 작은 수레와 지개 등으로 연실 물건을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주로 과일 생선 떡 고기 등 음식류였다.
착해 보이는 청년이 마침 빈 지게를 메고 나온다. 서원 표식이 있는 잠뱅이를 입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서원 노비다. 금원이 다가가 물었다.
“오늘 서원에 무슨 제사 있나요? 총각.”
“제사는 무슨 제사. 내일 아침에 죽은 사람 생일잔치 한답니다. 산사람 먹지도 못하는데, 이런 생일이 일년이면 스무날은 된답니다.”
총각이 울고 싶은데 뺨때려 줬다는 식으로 폭포수처럼 불만을 털어 놓는다.
“생일이요?”
듣고 보니 참 한심했다. 다 안동 김문에 빌붙으려는 아첨꾼들 때문이었다.
제사는 봄가을 정기적으로 지내는 향사 말고는 중복해서 지낼 수 없다 해서 시제는 선산에서, 기제사는 안동의 안김 종가집에서 기일마다 지낸단다. 그런데 어떤 아첨꾼이 청음의 생일날 떡과 술을 보냈는데 그 뒤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이 배향돼 있는 인물의 생일날을 귀신같이 알아내서 음식이며 돈을 보내오는 통에 관례로 굳어 졌다는 것이다.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음식이야 총각을 포함해서 서원 식구들이 같이 나눠 먹게 되지 않나요?”
금원이 순진하게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쇼? 어느 아가리로 들어가는 재물인데 나눠진답니까. 어디로 싹 다 가는지 우리 같은 아랫것은 약과 하나, 산자 한조각도 구경 못합니다.”
“그것 참…”
필제도 혀를 찼다.
거칠매를 따라 나루 쪽 서촌으로 내려오려니 길이 양편으로 나뉜다. 예전에는 서책과 문방사우를 파는 책방 거리였다는 언덕길이다. 지금은 청국 잡화를 파는 만화점과 고급주루 거리로 변해 있었다. 소문이 정말이었다. 청음서국이라 간판이 붙어있는 서점은 문이 닫혀 있었다. 벌써 오래 됐는지 거의 폐허 수준이다. ‘허 참’ 금원은 쓴웃음만 나왔다.
더 내려오니 왼쪽에 양평댁의 말대로 작은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옆으로 좁은 골목이 나왔다. 골목으로 들어가니 솟을 대문에 꽤 큰 집이 눈에 띄었다. 마당이 유난히 넓었다. 대문이 열려 있어 안이 들여다보였다.
솟을 대문에 ‘자경통문 비호방’이라는 꽤 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이 나라 서원 자경단의 발원지다.
마침 골목 저쪽 끝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둘이 잔뜩 겁먹은 표정의 중년 사내의 양옆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붙잡혀 오는 모양새다.
검은 옷 사내들은 금원과 필제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이내 대문으로 들어섰다. 별 꺼리길 것이 없다는 테다.
금원과 필제가 문 쪽으로 다가서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어찌되나 보자 하는 심산이었다. 고직실이 있기는 했는데 마침 비어 있었다. 마당에 사람들이 여럿 나와 웅성이고는 있었다. 대문 안에 들어서 몇 발작 움직이자 안쪽에 있던 그제야 사내 하나가 이쪽으로 오면서 제지를 한다. 그의 검은 저고리 소매에는 짧은 흰술이 두 줄이었다. 다른 사내들이 하나였는데 비해 조금 높은 모양이다.
”뭐요? 여기 그렇게 막 들어오는데 아니요.”
두 사람의 아래 위를 훑어보는 눈이 곱지는 않았지만 다짜고짜 몰아낼 분위기는 아니다.
그런데 필제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