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녹번정 시대
두물머리 바로 아래인 양주군 미호리에 있는 석실서원은 대표적인 안동 김가의 문중사당 이었다. 사람들은 과천의 사충서원이 안동 김문을 대변하는 재경 서원으로 알고 있어 그 서원의 횡포에 뒤에서 종 주먹을 들이 대고 있지만 실제는 석실서원이 김문에는 더 중요한 곳이고 권위 있는 곳이었다.
그럴것이 사충에는 영조 때의 김창집이 배향돼 있다면, 석실에는 한참 윗대인 인조 때의 김상헌이 배향돼 있기 때문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하면서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병자호란의 척화파 김상헌 바로 그이다. 나라에서는 그를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했고 그의 순국이후 안김은 명문으로 대접받았다. 김문에서는 상헌의 고택이자 사당이었던 석실사(司)를 확장해 서원으로 만들었다. 임금이 사액을 내렸고 송시열이 묘정과 현판을 썼다.
장원 급제자도 여럿 나왔고 청직의 꽃이라는 文衡 (문형, 대제학)도 여럿 배출한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서원이었다. 그랬던 석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안동 김문의 외척 족벌 세도와 나라 안 서원 전체의 타락과 맞물려 있었다.
석실은 자경단을 처음으로 만든 서원이었다. 석실에 오르는 산길에서 아들 뒷바라지를 하러 오던 가난한 양반네들이 좀 강도를 만나 푼돈과 떡이며 음식 등속을 빼앗긴 것을 빌미로 만든 것이 자경단이었는데 그 규모가 이제는 감영의 군사 보다 커졌다. 엊그제 필제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패들도 그들이었다.
결사의 지재에 따르면 요즘 자경단에는 중국인들도 들락거린단다. 저들 서원들이 경쟁적으로 백성들 수탈에 나서 돈을 긁어모으는 것과 무관치 않은 일 인 듯 싶은데 그 내막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20. 두물머리 석실서원
사흘 뒤 행장을 꾸린 금원과 필제는 길을 떠났다, 서원 동네에 가는데 승복은 어울리지 않아 입성을 보부상 부부로 꾸몄다. 양주 석수리 가는 길은 금원도 익숙한 길이었다. 부용사 가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성을 가로질러 흥인문, 동대문으로 나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는 길로 가기로 했다.
두물머리나 수석리 미호는 많은 이들이 뱃길을 이용하기도 한다지만 지난번의 나쁜 기억도 있고 보는 눈이 의식돼 뭍길로 돌아 들어가기로 했다.
도성 안은 평온해 보였다. 사람들의 입성이나 표정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종로통 육의전 은 일견 흥청대는 모습이기도 했다. 금원은 혹여 이 모습을 놓고 저 위에 상감이나 대갓들은 태평성대라고 할 것인가 조바심이 났다.
도성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이 땅의 백성들이 얼마나 주리며 고생하고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늦은 춘궁기 늦 보릿고개를 넘고 있었기에 더 했다.
아이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뛰 놀기는 하는데 하나같이 맨발이었고 힘들이 없었다. 논 밭에 나가있는 농부들도 얼굴에 핏기하나 없이 누렇게 떠 있었다.
도성을 벗어나면 광주부가 먼저 나오고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면 거기서부터 양주 땅이다.
구지리에 들어섰을 때는 중참 무렵이었다.
혼자였다면 누룽지나 씹으며 내쳐 갔겠지만 장정이 있었기에 주막에 들러 국밥을 한 그릇 먹기로 했다.
두 사람이 앉은 바로 옆 평상에서 눈물겨운 광경이 벌어졌다.
팔려가는 딸과 부모의 이별 장면이었다.
열너댓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국밥 그릇에 숟가락은 꽂았는데 꺼이꺼이 우는 통에 먹지 못하고 있었다. 소리도 크게 못 내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헤져서 기운 보퉁이가 옆에 놓여 있다.
아버지와 엄마는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고기국밥이니 어서 먹으라고 성화다. 옆에 투실한 중년 아낙은 여자아이를 데려 갈 침모인 모양이다. 사람 수더분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도 안됐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부지 저 안가면 안돼요,?”
“이것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거기 가면 주리지도 있고 입성도 깨끗해진다니까…”
“그래도 저는 아부지하고 엄마하고 명식이 명구하구 그냥 살고 싶어요.”
“이것아 에미, 그만 울리고 어여 먹고 가, 어디 죽으러 가?”
옆에 있던 엄마가 한마디 하며 그녀의 등을 툭 때리자 막혔던 둑이 툭 터지듯 ‘엄니’ 하며 품에 안겨 대성통곡을 한다.
엄마의 울음소리도 높아졌고 온 식구가 같이 부둥켜 앉고 눈물바다를 이뤘다.
어찌나 슬피들 우는지 금원과 필제도 목이 메는 통에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