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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43회

안 동일 지음

 보안재 시회

하지만 박규수 대감이며 남공철, 이상적, 변광운 대감 등 신분이 높고 나이든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맞는 이야기이지만 대놓고 젊은이가 대감들 앞에서 말 소, 족속 이란 말을 쏟아 낼 일은 아니다.
다행히 이필은 그쯤에서 발언의 수위를 낮췄다. 추사야 말로 신분혁파에 앞장섰던 선각자로 알고 있다고 추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피력 했다.
“일찍이 서애 유성룡선생을 위시해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선생 같은 분과 추사 대감이 잘못된 신분제도를 개탄하고 혁파를 위해 애쓰셨던 선각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정신을 따르겠다고 이렇게 모이신 여러분들께서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 주십사고 부탁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는 가망이 없습니다,”그러면서 필은 의자에서 옆으로 나가 좌중들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허허“
대감들이 미소를 띠며 헛기침을 했다.
“이선달이 이렇습니다. 완당의 젊은 시절이 이렇지 않았나 싶군요. 신분제도혁파 문제는 생전에 완당과 소승이 많은 얘기 나눴지요.”
초의당이 분위기 수습차원에서 한마디 덧 붙였다.
앉은 자리로 보아 금원의 차례였다.
박규수 대감이 금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적잖이 떨린다.
금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는 천출 기생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세상을 다시 보게 한 분이 바로 은사이신 추사 어르신입니다.”
모두들 눈이 동그래 금원을 쳐다본다. 이 땅에서 먼저 천출임을 먼저 고백하는 이는 없다. 우봉 조희룡이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께서는 저에게 살아 숨 쉬는 학문, 살아 숨 쉬는 예술을 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사람의 일이 라는 것도 아울러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 어르신, 동도님들 앞에 이렇게 서서 말씀 올리는 것도 스승의 안배에 따라 저 같은 사람도 이 땅에서 법고창신 이용후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세상얘기 안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밖의 민초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합니다. 추사 어르신께서는 처음 가르침을 받았을 때 백성이 제일이라면서 사무사의 가르침을 제게 주셨고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망징을 발본하는 숭정금실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상징적인 표현이었지만 다행히 사람들의 표정이 흐뭇해하는 듯 했다.
“어른께 제일은 늘 백성 이었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아랫사람들에게는 봄 바람 같은 분이셨습니다. 제 천한 재주가 쓰일 수 있는 곳, 징소리로 저를 불러주시면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 하는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부친 무덤가에서 징을 치던 노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감정은 전해지는 법인지 몇몇 사람의 눈가에는 습기가 어려 있었다. 경석과 변역관의 눈도 벌게져 있었지만 흐뭇한 표정이었다.
“스승님께서 패옥의 사관이라 하시더니 차륜을 옥구슬처럼 굴리시는구료. 환희 보살인줄 알았는데 어사화를 꽂아도 될 분이시군 그래.”
흥선군이 한마디 했기에 모두들 이내 왁자하게 웃었다. 전에 완당이 금원의 글을 보고 ‘움직임은 패옥소리에 맞고 면목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과 그것과도 같다.’고 한 얘기를 기억하는 모양이다.
기가 승하고 운세가 길한 날이 있게 마련이다. 금원에게 이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17. 보안재의 쑥대머리

사랑채에 주안을 겸한 석식이 준비돼 있었다.
본격 시회는 지금부터란다. 술을 곁들이면서 시도 읊고 서화도 친다는 것이다.
사랑채 큰방 또한 눈이 휘 둥그래 질 정도로 넓었지만 정갈하게 치장돼 있었다.
인원수에 맞춰 일인용 팔각 통영 호족반이 두 줄로 마주 보며 놓여 있었고 양편 벽쪽에는 군데군데 지필묵 책상이 펴져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공간이 남았다.
소반 위의 음식은 주안상과 다과상을 적당히 안배 했는데 그 안목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흥선군과 환재 대감이 정면 상석에 나란히 앉았고 금원은 초의스님의 눈짓에 따라 노장과 함께 가운데 문 쪽에 앉았다. 두 개의 소반에는 너비아니와 족편 같은 육식을 뺀 정갈한 채소 와 부침 위주의 상이 차려져 있었다.
“참 오늘 술은 오경석 서장관이 지난번 연경에 가서 가져온 모태주와 저희 가양주인 송엽주로 준비했습니다.”주인 변역관이 오경석을 치하하면서 술 소개를 했다
“부잣집에 오니 다르긴 뭔가 다르군.”누군가 그랬다. 그 사람도 금원처럼 이 방에 처음 오는 사람인가 보다.
“자 좌정들 하셨으면 한 순배 합시다. 우리 집에서 모였으면 면장(국수)에 탁배기 였을텐데 우선대감님 말씀대로 부잣집에 오니 다르긴 다릅니다. 자 옆 사람 잔을 채워들 주십시오.” 그러면서 환재 대감은 옆자리 흥선군의 잔을 채웠다.
“곡차라면 우리 보채님도 일가견 있겠는데…”초의선사가 금원의 잔을 채우면서 농을 던졌다.
“자 한잔씩 듭시다.”
박규수대감이 잔을 눈높이로 올렸고 모두들 따라 했다.
술은 무척 독했다. 중국의 모태주 였기에 그랬다.
왁자지껄 흥겨운 가운데 술이 몇 순배 돌았고 흥이 오른 우봉 조희룡 선생이 뒤쪽 필대로 나가 붓을 잡았다.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담묵으로 매화를 그려내는 솜씨가 역시 우봉이다. 그런데 모두들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데 매화 나무아래 사람을 그렸다. 홀로선 여자였다. 그런데 여자의 복색이 예사롭지 않다. 금원이 입은 승복이다. 우봉은 금원을 그린 것이다.
제발을 보면 그의 뜻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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