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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42회

안 동일 지음

 보안재 시회

식년시 역과에서 전무후무의 점수로 장원한 신동 역관 변원규가 그, 변광운의 아들이다. 경석과 대치가 가장 아끼는 후배인 그도 말석에 앉아 있었다. 원규의 숙부이자 광운의 동생인 변하운 역관도 그리고 4촌 형 변종운 역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씨 일가들이 금원을 맞는 태도가 역시 남달랐다.
좌중의 인사가 끝나자 시회의 회주이자 좌장인 박규수 대감이 헛기침 몇 번으로 좌중을 잠잠하게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몇 사람 올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구월 시회를 시작 합시다.”
“먼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진영에 다같이 인사들을 드립시다.”
휘호며 서화 때문에 의식을 못했는데 가운데 상석 뒤쪽에 작은 초상과 위패를 모신 목함이 있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반배로 재배 합니다.”
박대감이 일어서 의자 옆으로 나와 위패를 향해 돌아서자 그쪽 편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따라 돌아섰다.
변하운이 우렁찬 소리로 구령을 했다.
‘배례 초배’
초의 스님과 유대치 그리고 금원이 합장을 했고 나머지는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탁자에 갓 테두리가 닿는 소리가 들렸다. 입식으로 하니 이런 점이 걸리는구나 싶다.
꽤 오래 례를 올린다. 자연 추사에 대한 상념이 각자의 마음에 피어오를 터였다.
‘평신’
눈을 뜨고 허리를 폈다. 양방이 터져 있었음에도 훈향이 가득한 듯 했다.

재배가 끝나고 시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모두에는 자연스레 각자 일어서 인사 겸 그날 주제에 대한 소회를 잠깐씩 던지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었다. 박규수대감으로 시작해서 한사람씩 추사선생에 대한 소회와 자신이 겪은 가르침에 대해 소개했다.
모임의 수준을 말해주듯 모두들 추사를 회고 하고 칭송하면서도 세상문제를 비켜가지 않았다. 실사구시를 좌표로 삼는 북학인들의 모임다웠다.
박규수 대감이 추사의 글씨를 언급하면서 글씨 하나에도 애민의 사상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고 해 금원의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했다.
한참 조희룡 노인이 추사가 사민 평등정신에 입각해 중인들의 시회에도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열변을 마무리 할 즈음 보안재 정자로 한 선비가 올라왔다. 40대 초반의 작은 체구의 양반이었다. 뒤로 제껴 쓴 갓은 낡았고 두루마기는 때묻고 구겨져 있었지만 눈빛이 형형했다. 금원은 대뜸 흥선군이 아닐까 생각됐다.

“아이구 제가 또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환재 대감을 필두로 모두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닙니다. 앉아들 계십시오, 송구하게.” 손을 들어 만류는 하고 있지만 그의 행동에는 권위가 배어 있었다.
“이리 앉으시지요 흥선군 대감.”
금원이 짐작한 대로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우선 대감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비어 있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금원은 진작에 그가 그렸다는 난을 보고 그가 장안의 파락호 노릇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은 곡절이 있어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정심이 없이는 그런 난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금원의 생각이 틀림없었다. 그가 그런 파락호라면 이 모임에 결코 함께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흥선군이 자리를 찾아 앉았고 전라도 부안에서 올라 왔다는 전창혁이 말할 차례였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지방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서원의 폐해에 대해 얘기하면서 올곧은 관리, 추사의 제자들이 각계에서 이를 혁파하는데 앞장서 달라고 했다.
”불초 소생도 지난해 화양서원의 묵패를 받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전장의가 자신얘기를 했다.
“아니 우리 살기도 힘든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명나라 황제 제사에 거금을 내라니 말이나 됩니까?”
“그래서 어찌 됐소?”
“못 내겠다고 버티니까 관가에서 끌어가 강상의 도리를 어겼다면서 볼기를 치더군요.”
“그래 볼기 맞았소.?”
“부끄럽지만 절반은 대리 썼습니다.”
“허허”
”허허 거참.“
“도대체 그 패악의 근본적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이라고 전 장의는 생각하시오?”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있던 흥선군 대감이 저쪽에서 물었다.
“다른 무엇보다 군역의 특전입니다. 서원이나 향교의 학인이나 용인으로 들면 군역을 면제 받기 때문이죠. 그러니 너도나도 서원에 들려고 하고 또 너도나도 이 집안 저 집안 이 동문 저 동문 다 서원을 세우려 하지 않겠습니까?”
“흐흠…”
흥선군을 비롯해 모두들 혀를 찼다.

이필제의 차례였다.
이필은 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이 나라의 모든 잘못이 잘못된 신분질서에서 비롯되고 있기에 신분제도를 바로 잡는 길 만이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세우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수 있다고 일갈 했다. 그의 언변은 장내를 찌렁찌렁 울리는 웅변조였다. 사투리 억양 한 점 없었다,
“제 동족을 제 형제를, 다만 어미가 다르다 해서 마소 만큼도 여기지 않는 나라는 이 땅 조선밖에 없소이다. 양반 사대부라는 사람들은 제도에 빌붙어 제 핏줄, 제 누이의 고혈을 빠는 족속들이 돼버린 지 오래입니다. 중국의 명.청도 노비 세습을 오래전에 없앴습니다.”
금원은 온몸의 모공이 다 열리는 듯한 속 시원함을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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