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화양서원 복주촌
묘라고 해서 봉분이 있는 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당 건물도 화려하거나 크지 않았다. 오히려 협소하고 옹색해 보였다, 저처럼 작은 사당서 제사를 지내면서 전국을 들썩이게 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조차 했다. 그런데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선달님은 왜 저리 가파르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요?”“알죠,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오르면서 감히 두발로 걸어올라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 아니유?”그랬다, 만동묘를 오르는 사람들은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서 개구멍 같은 구멍으로 기어서 들어가게 했다는 것이다.
만동묘 건립은 전적으로 송시열의 유지였다.
송시열은 숙종에 의해 사사되면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제자인 권상하에게 피맺힌 유언으로 남겼다. 조선왕을 건너뛰고 자신들은 명황제의 신하라는 일종의 어깃장이다. 권상하는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 내 언덕위에 만동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강물이 만 구비를 돌더라도 동해로 들어간다는 송나라 시인의 싯구 만절필동에서 따온 친명사대의 적극적 표현이다.
송시열이 신원되고 노론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후 역대 왕들이 융숭하게 만동묘를 예우했는데 영조는 전답과 노비를 내렸고 정조 또한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
서원은 아무래도 소재지역과 배향된 인물의 문중이 중심이 되는 제한이 있지만 만동묘는 그야말로 전국구였다.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정승, 정승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질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각종 제수전의 명목으로 각 군,현에 그 유명한 화양 묵패를 발송해 강제로 돈을 걷었고 춘추제향을 지낸 뒤 거액의 추렴을 강요 했다.
감투팔이 또한 큰 문제였다. 이곳 화양 서원에서 돈푼이나 있는 양민이건 양반이건 간에 장의 혹은 입직 등 적당한 감투를 씌우면 싫어도 토지와 재물을 바치고 받아들여야 했다. 멀리 있는 사람도 상관없었다. 이를 거부하면 고지서이자 체포영장인 묵패가 언제 날아들지 몰랐다. 묵패는 사충서원 서독과 마찬가지로 전국 어디서나 통용됐다.
높디높은 돌 계단 아래 고직실도 떡하니 있었고 일자 기와집 두 채가 서원과는 분리된 만동묘 부속으로 큼지막하게 나란히 서 있었다. 여기도 사람들로 꽤 북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앞쪽 마당을 서성이는 두 사람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경계는 없는 편이다. 가파른 계단 쪽과 뒤채로 가는 길목에는 금줄이 쳐 있었다.
수더분해 보이는 아낙이 대청 아래 마당서 잔풀을 뽑고 있었다.
금원이 다가가 옆에 앉아 같이 풀을 뽑아주며 말을 걸었고 역시 인상대로 친절하게 응해 줬다. 마침 필제가 찾고 있는 김순성이라는 사람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 있기는 있었는데 떠났단다. 얼마 전까지 만동묘 집강소 서리 노릇을 했던 것은 맞는데 여기서도 농간을 부리다 들통이나 쫒겨 났단다.
“듣자니 지금은 제물포의 큰 객주가에 갔다고도 하고 석실서원이라는 곳에 갔다고도 들었는데 거기 가서도 또 농간을 부리고 있을 것이 틀림 없이유, 인간 마음보 어디 가남유.”
아주머니는 그에 대한 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돌계단 위 사당을 구경하고는 싶었는데 그곳은 함부로 올라가지 못한단다. 금줄이 쳐 있는 아래쪽에 검은 옷의 자경단원 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크게 경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필제에게 목례를 해왔다. 저녁에 있을 자경단 회의 참석자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곳에 머물 더 이상의 이유가 없었기에 일단 나오기로 했다.
서원건물 앞 냇가에 암반 위에 구멍이 많은 희고 둥글넓적한 큰 바위가 있었다. 9곡 가운데 하나인 읍궁암(泣弓岩)이다. 효종이 41세에 세상을 떠나자 우암이 한양을 향해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던 바위란다.
그러나 이 부문도 송시열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과장 조작한 혐의가 짙다. 실제로 우암은 번번이 효종의 북벌에 제동을 걸었으며 효종이 죽은 후에는 추호도 북벌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더 올라가자 개울 건너에 송시열이 세운 구곡 최초의 정자 암서재(巖棲齋)가 나왔다. 이곳이 화양구곡의 중심이며 송자 숭배자들의 성지다.
여름이 되기 전이었는데도 암서재 앞 냇가에 물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는 남녀들이 보인다. 남자들은 선비 차림이었고 여자들은 한눈에 보아도 삼패 기생들이었다.
바위벽에는 대낮부터 질펀해진 저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충효절의, 무이산공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두 사람은 계속 계곡을 따라 올랐다.
위쪽 암벽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 크게 암각 되어 있었다. 저 글이 천하의 암군 선조의 필치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비례부동(非禮不動)’도 그 옆에 새겨져 있었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인데 나라 망하게 한 암군의 글을 저리 모시고 사당에 위패를 거는 것은 예의일까 싶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민이라 해도 젊은 사람들에게 이 땅의 모든 제도는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음입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고 일반 양민도 열심히 공부하면 과거에 급제도 하고 세상도 알아주고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희망이 없어진 절망의 땅이 돼 버렸습니다. 아무리 서당에서 성균관에서 공부를 잘해도 장김 아니면 입신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러니 정혁을 해야지요.”
금원이 고산서원 놈들에게 잡혀 가던 날, 천호리에서 토굴로 가면서 생각했던 것을 지금 필제가 얘기하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화양구곡의 마지막이라는 9곡 파천(巴川)에 이르렀다. 길을 따라 가다 오른편 냇가로 내려가야 파천이다. 논 한마지기 쯤이나 되는 꽤 넓은 협곡에 널찍한 반석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물살이 굽이치고 있었다. 물소리가 우렁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