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법주사 동패 고생원
사실 향안이야 자기들과 한통속인 향청이나 한가해진 향교에 얘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향안은 향촌 양반 양인들의 명단으로 과거 응시, 합격 여부를 가리기 위한 명단인데 근자에는 재산목록 까지 추가돼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향안을 당사자들에게 만들라고 하면 순진한 농민 양민들은 거짓을 고할 수 없어 숟가락 숫자까지 적어야 했다.
백성들에게는 동헌이라 부르는 관아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향청에 향교 그리고 서원까지, 상전이 너무 많았다. 보은 괴산의 경우 만동묘 화양서원의 위세가 가장 셌다.
거기다 화양서원 자경단은 자체 환곡을 경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강제 고리대금업이다. 봄의 춘궁기에 곡식을 내주고 가을 수확기에 회수 할 때 장리를 부과하는 환곡이 관에서 행하는 봄 환곡이라면 이들의 환곡은 가을 환곡이었다. 가을 수확기에 관의 환곡을 갚는 그 곡식을 대출해 줬던 것이다. 관의 환곡 보다 높은 이자였다.
그래도 민초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향촌계와 동계, 그리고 상두계와 같은 민초들 끼리의 품앗이 조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린 어깨 서로 기대며 동병상련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는 맞서 싸우자는 소리도 나왔지만 아직 그 목소리는 작았다.
아무튼 고생원은 계원들을 불러 모아 자초자종을 설명했다. 불가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지 문제를 따져나 보자고 서원의 유사당으로 몇 명이 찾아 가기로 결정 했단다. 정작 고생원은 계원들이 빠져 계시라 해서 빠져 있었다.
그랬는데 관가에서 그 사단을 벌인 것 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날 새벽같이 포졸이 나와 고생원과 계의 주요 성원들을 잡아가 불온한 능상의 죄를 범 했다고 볼기를 쳐댔다는 것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무조건 잡아다 이렇게 족치는 이 나라 관아의 사또와 아전들. 이러니 묶인 사람은 소싯적 수박서리라도 불어야 할 판이다.
‘다 알고 있으니 바른대로 고하거라.’
이 말은 고생원과 동무들도 들어야 했다.
한양 도성 임금의 국청인 의금부에서 시작된 이 파렴치한 무소불위의 호통은 파발마라도 탄 듯 지방 방백에게로 전파되어 오늘도 이 순간에도 방방곡곡에서 계속 되고 있었다. 이 나라의 법은 항상 가진 자의 편이었다. 늘 때리는 자의 편이었다. 한 번도 없는 자, 맞는 자의 편에 서서 형평을 이룬 적이 없는 법이었다.
고생원은 외유내강의 전형이었다.
“저들에게 고마워 할 일입니다. 망설이는 나를 확실하게 밀어줬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민초 백성들과 함께 싸워 봅시다. ”
금원과 현봉이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고생원이 현봉의 손을 잡고 한 말이다. 이번에도 노스님이 싸준 금암산 하수오가 큰 몫을 했다.
고생원은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잠자고 있던, 망설이고 있던 자신 안의 분노가 확실하게 응집돼 피어올랐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농민 무장단 활빈회를 꾸리는 일에 더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농민 중에도 향촌계원 가운데도 힘쓰는 재인 역사가 꽤 많다고 했다.
금원은 그 말을 옆에서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해 졌고 눈물이 왈칵 솓았다.
고개를 올렸더니 그런 고생원과 현봉의 뒤로 편액 휘호가 보였다.
낯익은 글씨였다.
谿(계)山(산)無(무)盡(진)
“추사 어르신의 글씨 아닙니까?”
“그래요, 가성행님이 그 어르신 인척이 된다고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인연이 닿아 한 장 얻을 수 있었기에 가보로 삼아 걸어 두었지요.”
추사의 예서 글씨 편액 치고도 유난히 골계미가 돋보이는 잘된 글이었다.
계자의 조형미하며 올라간 산자 그리고 한 줄에 내려쓴 무진.
“속리산을 예전에는 계산이라고 했지요. 계산은 다함이 없다. 그 속에 묻혀 때를 보리라. 그런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썩어문드러진 장김의 횡포에 대해 은인자중 하고 있는 은사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웅변을 담고 있는 글로 느끼고 있다는 얘기였다.
실은 그 글에 대해서 금원은 원작자 추사에게 초본을 앞에 놓고 배경과 속뜻을 들은 바 있었다. 대동소이 했기에 더 아는 체 하지는 않았다. 계산은 안동 김가 경화세족 가운데 한명인 김수근의 호였다. 김좌근의 사촌이다. 원래 이글은 그가 외직으로 나가면서 추사에게 부탁해 써준 글로 알고 있는데 또 다른 ‘계산무진’이 있었던 것이다..
“물이 탁하면 발을 씻고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는다 했소, 추사 선생께서는 글자 한자라도 허투루 쓰시지 않고 뜻과 성을 다하셨다고 나는 믿소.“ 고생원이 한마디 보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