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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 타계에 엇갈린 평가… 양 진영에서 찬사와 비난

부시 “가장 신뢰 받고 독특한 목소리 잃었다”
주미 중국대사 “가장 소중한 오랜 친구였다”
“전범, 마침내 죽다”…”수십만명 죽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관으로 꼽히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 100세의 나이로  별세하면서 고인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은 키신저 전 장관을 미국 국익을 지키는 ‘유능한 수호자’로 칭송한 반면,  진보게열 소셜미디어 등에선 전 세계에 지속적인 피해를 남긴 ‘전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은 외교 문제에서 가장 신뢰 받고 독특한 목소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나치를 피해 도망친 뒤 미군에서 나치와 싸웠던 그를 난 오랫동안 존경해 왔다”며 “난민 출신인 그가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건 그의 위대함만큼이나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 줬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도 키신저 전 장관이 미국과 세계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전 장관은 엑스(X·옛 트위터)에 “장관 재직 당시 고인이 준 은혜로운 조언과 도움에 항상 감사할 것”이라며 “고인과 한 모든 대화에서 그의 지혜는 날 더 잘하고 준비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딸 트리샤와 줄리는 “아버지와 키신저는 한 세대의 평화를 만들어 낸 파트너십을 누렸다”며 “중국에 대한 역사적인 개방, 소련과 데탕트 진전, 냉전 종식 시작을 알리는 대담한 이니셔티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또 “중동에 대한 ‘셔틀 외교’는 문제가 많은 이 지역의 긴장 완화를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셰펑 주미 중국대사는 키신저 별세에 대해 “깊은 충격과 슬픔을 느낀다”며 “그는 가장 소중한 오랜 친구로서 중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1970년대 미중 ‘핑퐁외교’를 주도한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의 신망을 받아 왔다. 미중 관계가 얼어붙었던 지난 7월 키신저 전 장관은 100세 나이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시 주석은 키신저 전 장관을 ‘옛 친구’라고 표현하며 “중미 관계는 항상 헨리 키신저 이름과 연결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엇갈린 평가도 나오고 있다.
롤링스톤지는 키신저 전 장관의 부고 기사에 “미국 지배층이 사랑한 전범 헨리 키신저, 마침내 죽다”라고 비판했다.
캄보디아 정치 경제를 연구하는 애리조나 주립대의 소팔 이어는 ‘더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 관련 “키신저의 역할은 캄보디아인 수십만명을 죽이고, 크메르루주에게 (인권) 유린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처럼 키신저는 좌우 양 진영에서 찬사와 비난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세력 균형에 입각한 지정학을 무기로 한 레알폴리틱(Realpolitik, 현실정치)으로 미국 대외정책을 이끌었다. 대외정책의 핵심을 타국과의 관계에서 자국에 유리한 세력균형 확보라고 봤다. 미-중 수교는 국제 지정학의 3대 축인 미-중-소 관계를 기존의 반미 중-소 블록 체제에서 반소 미-중 연대로 바꿨다. 소련을 고립시켜 미국에 유리한 세력균형을 조성하자는 그의 외교 철학이 낳은 결정판적 사건이었다.

그는 한반도 문제에도 깊이 관여해왔다. 국무장관 시절인 1970년대 중반 유엔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이른바 ‘교차승인’ 구상과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안한 일이 대표적이다. 1975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북한 및 북한의 동맹국이 대한국 관계개선 조치를 취하면, 한국과 미국도 그것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생각이 엿보인다.
1991년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그가 제안했던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성사됐지만 북미, 북일 수교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일본 납치 사건 발생 이듬해였던 1974년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 김 전 대통령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할 경우 받아들일 것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지시했다는 사실이 1998년 공개된 미국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1923년 5월27일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그는 나치 정권 유대인 박해를 피하려는 부모와 함께 1938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가 평생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쓴 배경이다. 2차 대전에 병사로 참전해 통역과 정보 업무로 능력을 인정받은 키신저는 전역 군인들을 위한 학업 지원을 통해 하버드대에 진학했다.
정치학을 전공해 1954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 박사 학위 논문이 초고인 저서 ‘복원된 세계’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뒤 5대 강국들의 타협과 세력 균형에 입각해 전쟁을 피한 ‘유럽의 화합’ 체제를 분석한 것이다. 이때부터 키신저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대외정책의 핵심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그의 외교 경력의 뼈대는 협상과 막후 조정이었다.

미-중 접근을 통해서 소련을 압박해, 군비축소 등 데탕트를 이끌었다. 중동에서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을 지원해 아랍권의 석유 금수 조처를 촉발하기도 했으나, 그 이후 중동평화협상을 통해서 이집트 등 친소 아랍 국가들의 친미화를 이끌었다. 베트남전 종전 협상인 파리 평화협상을 성공시킨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협상 상대였던 베트남의 레둑토는 베트남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거절했고, 키신저도 2년 뒤 남베트남이 몰락하자 노벨상 반환을 제안하기도 했다. (위 사진)

키신저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미국 대외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컨설팅 회사를 만들어, 각국 정부와 지도자를 자문해 큰돈을 벌었다. 90살이 넘어서도 ‘세계 질서’ 등 저서들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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