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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20회

안 동일 지음

8. 고산서원의 초롱이

잠시 사이를 두고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로 시작되는 시 들어 보았소?”
“들어 보았습니다.”
“누구의 시라고 알고 있소?“
”이곳 서원에 배향된 석탄 선생의 시로 알고 있소.“
놀라는 눈치다. 청구영언에 나와 있는 시였다. 금원은 10여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이존오의 행장비에 적혀 있는 것을 보았었다.
뒷 부분은 이렇게 돼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천에 떠 이셔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난데없이 왜 이 시조를 언급한다는 말인가.
이시조는 이존오가 향리인 공주 석탄에 있을 때 은거 할 때 신돈을 원망하며 지은 시조로 알려져 있었다. 태양은 군주인 공민왕을, 구름은 신돈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나에게는 외가쪽이기는 하지만 선조이신 석탄 선생이야 말로 나라의 기강을 가장 먼저 생각한 유학자요. 그 시가 누구를 탄핵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요?”
금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바로 신돈이요 신돈, 임만성이 그리 존숭한다는 신돈.”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사내가 말을 이었다.
“부용사와 동사의 사람들은 고려조의 요승 신돈을 신봉한다는데 사실이오?“
“금시초문입니다.”
“절에 요승 신돈의 초상과 위패가 있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소?”
“역시 금시초문이로소이다.”
일단 그렇게 답했다. 편조 스님, 신돈의 초상이 동사의 경우 장경각에, 부용사에는 탑전에 걸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편조종사 진영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 석탄공이 요승 신돈 때문에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요절하셨다는 얘기는 알고 있소?”
“석탄 선생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은 나로서는 모르는 일입니다.”
일단은 그렇게 대답했다. 본론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이존오는 한마디로 신돈과는 철천지 원수 사이였다,
그는 공민왕 9년에 실시된 문과에 소년 급제한 신동 유학자였다. 신돈이 공민왕에 발탁되어 욱일승천하던 시기 그의 벼슬은 언관인 우정언(右正言)이었다. 아무도 신돈의 권세에 대항하지 못했지만 25세의 청년 이존오만이 드러내 놓고 반대와 불만을 표출했다.
어느날 신돈이 임금과 더불어 평상에 마주앉아 있었는데 이를 목격한 이존오가 “늙은 중이 어찌 그리 무례하단 말이오?”하고 소리쳐 신돈으로 하여금 황망히 평상에서 내려오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존오는 여러 차례 ‘요승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다’며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끝내 왕의 격분을 사 옥에 갇혔다. 이색 정몽주등의 구명으로 간신히 풀려난 뒤 향리인 공주 석탄(石灘)에 은둔하여 울분 속에서 지내다가 31세의 나이에 홧병을 얻어 죽었다.

“당신이 그리 시침을 뗀다면 우리도 달리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소. ”
총관이란 사내는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신분질서라는 기강 위에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텐데..“
”그 신분질서라는 것을 누가 어떻게 공정하게 정했느냐가 문제가 되겠지요.“
금원이 그렇게 나오자 사내가 멈칫하는 눈치다.

그때 헛간 문이 열리면서 흑의 사내 하나가 들어 왔다. 젊은 축이었다.
그는 총관이란 사내에게 목례를 하더니 무언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척에 있는 금원은 누군가 총관을 급히 찾고 있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총관이란 사내가 일어섰다.
“내 급히 다녀올 곳이 있으니 부용사의 신돈을 좆는 역당무리들의 움직임과 면면을 머릿속에 잘 정리해 놓도록 하시오. 당신이 가르쳤던 해괴한 소리 가사와 함께…”
총관이 돌아온 것은 반 시진쯤 지나서였다.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들어서면서 턱짓으로 수하들에게 금원 결박을 가리켰다. 허리와 의자와의 결박이었다.
“당신 운이 참 좋은 사람이야, 몇 가지만 확인 되면 더 이상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되겠어. 역시 추사대감이야, 세상에 온통 추사 바람 이라는 것이 빈말이 아닌가 보더군.” 모르는 소리를 계속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추사 측 인사, 자신이 태을 스님에게 거명했던 인사 가운데 한사람의 손씀이 이 시각에 절묘하게 통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추사와 불교 얘기 그리고 신돈 얘기가 나왔다. 추사는 신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는 금원으로서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얘기도 나왔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변광운 역관의 얘기가 나왔다. 변역관과 얼마나 친하냐고 물어왔기에 아는 대로 답해줬다.
긴장이 풀리자 요의가 몰려 왔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워낙 요의가 강했기에 측간에 가고 싶다고 모기만한 소리로 얘기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총관이 옆의 수하에게 뭐라고 한다.
잠시 후 열너댓살 짜리 여자 아이 하나가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와 고개를 꾸벅 했다.
“초롱이 왔구나. 이 아주머니 모시고 측간에 좀 다녀와야 겠다.”
“예, 그러지요.”
자다가 나왔는지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눈을 비비고 있었다. 금원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다. 안쓰러울 정도로 옷이 낡고 허름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름처럼 눈이 참 크고 초롱초롱한 아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롱이의 안내를 받아 헛간 밖으로 나오니 꽤 넓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은 조용했다. 길가 쪽에 이층으로 된 큰 건물이 있었고 헛간은 안쪽 단층 기다란 건물의 끝에 있었다. 측간은 50보쯤 떨어진 좌측에 길게 지어져 있었다.
마당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지금 나온 헛간 앞에만 관솔불이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초롱이가 초롱을 들고 앞장을 섰고 금원은 바로 뒤에 따라갔다. 사내 둘이 몇 발짝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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