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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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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제11회

안 동일 지음

과지초당

“사람이 살아가는 것, 백성이 살아가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네, 그 기반 위에 무엇이 바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아는 게 바른 배움이라고 생각하네. 솔개는 하늘높이 나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 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그해 여름 금원은 과지초당에 열흘가량 머물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실은 원춘도 자신을 다시 추스르면서 스스로의 채찍을 가한 시간이었다. 추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사무사의 정신을 구현할 젊은 인재들을 키워내 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던 것이다. 오래전 자신을 처음보고 단박에 마음을 활짝 열었던 이국의 스승 옹방강, 완원 선생의 마음과 같았다.
이런 추사에게 금원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아듣는 기재였다. 금원은 하다못해 초당의 기둥 대련으로 걸어 놓은 주련과 편액의 숨겨진 뜻까지 갈파해 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
기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 손녀’

“많은 무리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뜻있는 선비는 바른길을 고집한다는 뜻으로 읽혀 집니다.” 놀라운 혜안이다. 어쩌면 추사 자신의 본 뜻보다 더 현묘했다.
마침 초당을 찾았던 환재와 우선 등 제자들에게도 금원의 재주를 자랑해 소개했고 흔쾌히 동문으로 받아들이라는 이런저런 무언의 암시를 꽤 했다.
추사는 금원에게 칼과 돌을 쥐어 줬다. 전각의 오묘함은 자칫 급해지기 쉬운 성정을 다스리는데 제격이었다.
“돌을 칼로 새긴다는 것은 깨끗한 마음에 정확한 가르침을 새기는 일과 같아서 한 치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네.”
칼은 인고가 만들어지고 자형이 돌 위에 떠진 뒤에야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야 하는 법이다. 성급한 한 치의 실수는 침혹한 결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 이치를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 금원이 판 인장이 지금 탁자에 놓여있는 서천 옥돌 ‘소봉래’ 였다.
금원에 대한 회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밖에서 마당 쓰는 소리가 들렸다.

5. 이필의 놀라운 고변

“밖에 누가 와 있느냐?“  추사가 달준에게 물었다.
“참, 탈패 말고도 마님을 도운 선달님이 있어 같이 왔습니다. 일지암 스님 소개로 찾아오던 길이었다고 하던데요.”“초의당이 소개했다고? 들라해라.”

초립 털보 청년이 방에 들더니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만 하시기를 천만 다행입니다유,”
부리부리 했지만 선한 인상이 담겨 있었고 사내다운 무인의 기상과 함께 끈기가 느껴지는 상이었다. 추사의 고향인 내포 지방과는 다른 북부의 억양이었지만 충청도 억양도 정겨웠다.
“고마움이야 두고 표하기로 하고, 그래 초의가 보냈다고?”“여기 스님 편지가 있시유.”
봉서를 열자 낯익은 초의의 필체가 펼쳐졌다.
밑도 끝도 없이 ‘세상에 불만이 많은 이 필이라는 청년이니 잘 달래서 불 쏘시개로 쓰던지 활활 타는 장작 희나리로 쓰던지 원춘께서 알아서 하라’는 내용이었다. 무과에 든 선달이라는 얘기를 덧 붙이고 있었다.
“실은 어르신께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뵈었시유.”

“그것이 무엇인가?”
“어르신은 효명세자의 돌연한 죽음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자네가 어찌 새삼 그 일을 거론하는가?”추사는 격하게 반응했다. 젊은 시절 추사는 개혁을 주도했던 효명세자의 최 측근 신료였다. 정력적으로 대리청정 중이던 약관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난 비운의 세자다.

순조 27년(1827) 2월, 순조는 “과인이 건강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정사를 소홀히 하고 지체시켰다. 이제 세자가 총명하고 영리하니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명했다. 효명세자는 19살이었고 순조는 38세였다.
순조는 안동 김씨를 제압할 정치력이 없는데다 세도정치로 인한 계속되는 민란과 천재지변을 수습할 의욕이 없었다. 그러니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대신들도 없었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동안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왕은 할아버지 정조였다. 세자는 집권하자마자 안동 김씨와 맞섰다. 저들에게 편중된 세력을 약화하려고 권력의 중심이었던 비변사 조직을 개편했고 그곳 당상들 전부에게 감봉 조치를 내려 타격을 주었다.
기존 신료세력인 삼사의 길들이기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맞서는 단호함을 보였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던 소론과 남인, 북인을 등용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보였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다. 지방 방백들이 백성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면 벌을 내렸다.
시를 잘 짓고 궁중무용을 창작할 만큼 예술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만기일력’라는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런 효명세자와 추사의 인연은 각별했다. 과거에 늦게 등과한 추사가 처음 제수 받은 벼슬이 시강원 설서(說書). 세자를 가르치는 직책이었다. 추사는 대리 청정기간 삼사의 실무 요직을 맡아 개혁의 선두에 나섰다. 조인영 성혼 서유구 등이 함께 포진해 있었고 추사의 생부인 노경공이며 남공철 김사목 등 중신들이 후원하고 있었다. 세자와 동년배였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이때 발탁된 대표적 신진 기예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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