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과지초당
“그래 자네는 만성과 함께 있다지?”
“네, 오갈데 없는 저를 거두어주신 은인이시지요.”
“어떻게 그리 인연이 닿았는가?”“태을스님 밑에 현봉이라는 동향 스님이 있어서…”“그랬군. 평소 절집과 인연이 많았는가?”“그런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부처님만이 저를 받아 주시더군요.”
“허허”
금원의 말에 뼈가 있는 듯해서 원춘은 헛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제수씨 자네 시집인가?”추사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바랑 위로 두툼하게 삐져나온 책에 눈길을 갔기 때문이다.
“예, 다행히 몇 권 남아있어 가져오기는 했지만 어르신 앞에 내놓기 정말 부끄럽습니다,”
금원이 바랑에서 필사로 되어 있는 호동서락기 한권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들어보니 두툼했다. 원춘은 책을 주욱 넘겨 훑어 본 뒤 탁자에 다시 올려 놓았다.
“오늘밤 한번 읽어봄세.”
“따끔한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리고 책을 묶고 난 뒤 여러 일을 겪었습니다. 나라 안을 다시 돌아보았는데 그랬더니 더 부끄러워집니다.”
“그건 왜인고?”
“나라 안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고단한 줄 정말 몰랐습니다. 건성으로 지나쳤지요. 소시적이었다고는 하나 경치와 인심 타령만 했으니까요.”
“허허 자네가 만성과 어울리더니 경세가가 다 됐군 그래. 아무튼 자네 말대로 소시적 경험이니까…”원춘이 다시 책으로 눈을 가져갔다.
“이 제목은 자네가 썼는가?”
꽤 공들인 글씨이기는 했다. 湖(호)東(동)西(서)洛(낙)記(기).
호자의 삐침과 동자의 파임 등 예서의 기본인 팔분을 따르려 애쓰고 있었다.
문득 서낙을 강조 변형해 서인들의 몰락을 바란다는 은유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년전 부터 생겨난 일종의 기예며 습관이다.
“아닙니다. 동무가 썼습니다. 아직 저는 예서에 견식이 없어서… 그것도 꼭 한번 어르신께 배우고는 싶습니다.”
“그래, 하지만 서도란 배우는 게 아니지, 깨우치는 것이니까. 가장 중요한 게 담겨진 정신이라고 나는 보네.”
잠시 사이가 있었다.
“아무튼 잘 살펴봄세,”
‘눈으로 산하의 넓고 큼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온갖 세상사를 겪지 못하면 식견이 넓을 리 없다.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여자라서 규방 문밖을 나가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 생활하고 있는 탓에 아무것도 세상에 남기지 못한 채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만다면…’
원춘은 그날 밤 늦도록 금원의 호동서락기 서두부터 발문까지 다 읽었다.
몇 군데 걸리는 부분이 있기는 했어도 그녀의 여로와 역정에 따라 기개와 감수성이 드러나 있어 미소를 머금으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제천 의림지를 뜻하는 호중(湖中) 인근 4군과 관동의 금강산과 팔경, 한양 일대 그리고 관서의 의주를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썼던 모양이다.
금원은 경인년(1830년) 열 네 살 나이에 남장을 하고 여행을 떠났단다. 쉽지 않은 긴 여행 이었을 게다.
금원은 호동서락기를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천지도 한순간이요, 평생의 일도 헛된 것으로, 함께 돌아가는 것은 평생의 꿈이다. 황량(黃梁)의 베개는 평생이 괴상한 꿈임을 깨우쳐준다. 그렇다면 평생의 꿈이 하룻밤의 꿈과 어찌 다르겠는가. 나 역시 꿈속의 사람으로 꿈속의 일을 기록하려 하는 사람이니 이 또한 어찌 꿈속의 일이 아니리.”
원춘에게 이 대목은 次下(차하) 였다. 너무 멋을 낸 문장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권기에 있어서는 크게 빠지지 않았다. 14세에 열자 황제편을 읽었다는 얘기인데 놀라운 일이다. 다른 이 같았으면 이 대목서 대뜸 장자의 호접몽이야기를 인용했을 터였다.
원춘은 금원이 성경현전 고전을 어떤 체계로 공부했는지 궁금해졌다. 또 훈고와 실사의 이치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학문이 학문을 위한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추사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글씨 한 글자를 쓰다라도 난 한폭을 치더러도 경세유표의 뜻을 담으려 했고 질박한 현실을 고발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또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누구도 모르는 그런 혼자만의 몸부림이자 자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었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텐데, 무언가 더 있을 텐데 하면서 벽에 막혀 있던 순간. 그러던 차 금원이 나타났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났는데도 금원은 벌써 부엌에 나와 있었다. 양주네와 이내 친해진 모양이다.
나물 소찬의 아침을 마치고 서탁에 마주 앉았다.
“엊저녁 자네의 시집을 읽었는데 과연 그 재주가 놀랍더군. 자네 시경은 어떻게 읽었는가?”“읽기는 했지만 급히 읽었다는 기억입니다. 하지만 다른 경서와는 달리 흥이 났었습니다. 특히 국풍편의 시들이 그랬습니다…”
“어찌 그랬을꼬?”“천년도 넘은 오랜 시절의 이야기인데도 우리네 현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고 특히 백성과 관의 대비며 풍자가 마음에 들어 왔었다는 기억입니다,”
“그렇지, 왜냐면 거기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백성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일세. 그래서 시경을 한마디로 사무사의 정신, 바를 정(正)을 일깨우는 경전이라고 한다네.”
금원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