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6 F
New York
September 20, 2024
hinykorea
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제5회

안 동일 지음

송파나루

금원은 따끔거리는 손끝을 내려다 보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잊었던 따끔거림이 다시 나타났다. 까만 점이 보였다. 아무래도 바늘로 파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우리 계회 대단혀.”
탁배기를 입에 털어 넣은 덕배 아재가 한마디 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어떻게 딱 그 시간에 구룡재 언덕에서 놈들이 일을 벌일 것이라고 알아낸단 말이여? 그러니까 그 살벌한 놈들 사이에도 우리 동패가 떡 하니 있다는 얘기 아니겠어?”   금원은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녀석들이 그래도 손속에 여유를 둔 것 같더군.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게여”  덕배 아재가 계속 추사 대감 걱정이다.
“당초부터 김 대감을 크게 위해하고 해코지 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끌고 가서 단단히 망신을 주려 했을 겝니다.”
“그놈들이 통문계 놈들이면 하바리 놈들인겨. 손 매서운 축들이 왔었더라면 우리도 애를 좀 먹을 뻔 했는데…”
통문계는 서원의 무력인 자경단의 정예들이 모여 결성했다는 조직이다.
“아닙니다, 우리 동패님들 아주 대단했어요, 언제들 그렇게 무예들을 익혔는지 정말 든든해요.”
“그럼, 나름대로는 다들 한 가닥 하던 이들이니까.”

“아재만 할라구요.”  덕배는 원주 기방에서 어린 생 각시와 3패 관기들을 괴롭히던 악덕 마름집사를 흠씬 두들겨 패고 그길로 종적을 감췄던 그런 전력이 있었다. 금원이 당시 상황의 생생한 목격자였고 동조자였다.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 전의 일이다.

덕배 아재는 아버지가 가끔씩 들르는 금원의 집에서 남정네 일을 도맡아 해주었던 친근한 이웃사촌이었고 동리 농악대원 이었다. 금원이 원주 기방에 입적하고 보니 그곳에서 고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지만 그 역시 동향인 현봉 때문에 부용사 신도가 되었고 낭가계에 든 모양이다.
“참 아까 텁석부리 초립 청년 하고는 무슨 말씀 하셨어요?”

그 시각 역시 절묘하게 나타났던 초립동 청년의 부리부리한 눈이 떠오른다.  대감을 맡기고 돌아 서면서 금원도 도저히 더위를 참을 수 없어 탈을 벗었었다. 머리 뒤부터 탈을 벗고 비오듯 흐른 땀을 씻으려는데 털복숭이 청년의 얼굴이 몇 발자국 앞에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눈이 빤히 마주쳤는데 빙긋이 웃는 눈매가 어울리지 않게 순박하고 선량했다. 그런데 금원은 자신의 얼굴이 젯상의 돼지머리처럼 퉁퉁 불어 있을 것 같다는 점이 먼저 신경 쓰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여자의 감정, 내외의 감정이었다. 얼른 얼굴을 돌려 뒤에서 땀을 씻었다.

“응, 왜 그리 서원 놈들을 싫어하냐고 물었더니 꽤 많은 얘기를 해주더군.”
“그랬어요?”
“사연이 만만치 않았지만 재밌는 청년이야, 충청도 진천에서 왔다는데 그 사람 아버지가 화양 서원 자경단 패의 농간으로 역당으로 몰려 치도곤을 당한 끝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짧은 사이에 많은 얘기를 하셨네요,”
“그런 셈이지 사람이 서글서글한 게 붙임성이 꽤 좋아.”
잠시 틈이 있었고 금원이 다시 물었다.
“이름은 안 알려 주던가요?”
“왜 내가 알려주니까 저도 알려 줬어. 외자로 필, 성은 이가. ”
“이 필 이군요, 그런데 아재 이름까지 알려 주셨다고요?”
“그 청년 보아하니 굳이 숨길 것 없어 그랬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앞으로 볼일이 꽤 있을 것이라면서 모른 척 말자고 하던데.”
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기억하기 쉬웠다. 이 필이라… 어쩐지 그와의 인연이 간단한 것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우리 놀이패 다시 보게 됐습니다. 아재가 수고 하셨어요.”
“수고는 뭐, 참 추사 그 어르신 직접 뵈니 체구가 아주 작으시데.”
“네, 크진 않으시죠.”
“그 양반의 서화 재주가 그렇게 뛰어나다면서?”
“네 그래요, 아재도 어르신을 잘 아시네요.”
“그럼 천하의 추사를 모르는 이 나라 백성이 어디 있나? 청나라 황제도 인정해서 글씨 한점 갖기를 그렇게 원했다면서? 그 때문에 시샘을 당해 두 번이나 귀양가고….” 막힘이 없었다.
“하기는 그런 재주가 문제가 아니지. 지금 이 나라 안에서 안동 김가 들에게 그래도 바른 소리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시라지 않은가?” 닥배 아재가 다시 보였다. 하긴 그는 한다하는 상두패의 존위이자 계회의 기둥이었다.
“다 현봉 덕이지, 얻어 들은 말이네, 내가 무슨 아는 게 있나.”
자신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는 금원의 의중을 읽기라도 한 듯 한마디 보탰다.
“그렇긴 하죠, 현봉스님이 그간 애를 많이 쓰셨지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시네요.”
덕배의 고향 친구인 현봉스님 그가 없었으면 계회의 오늘은 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사람이 그만큼 중요했다. 그때 주모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떠난데유, 어서들 나서세유.”
덕배 아재가 두 손으로 가슴을 한번 찍고 손을 모으는 편조 합장을 하면서 배에 올랐고 금원도 같은 합장으로 동패들을 배웅했다. (계속)

 

Related posts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7회

안동일 기자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11회

안동일 기자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39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