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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제 2회

안 동일 지음

  추사와 묵패

노 선비는 이 길을 걸을 때면 우리도 청국처럼 수레를 상용화해야 한다던 북학 선배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과천에서 송파로 이어지는 꽤 중요한 길인데도 수레하나 다니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길이 있어야 수레가 다닐 수 있지 않냐고 반문 했을 때 그 선배 연암은 수레가 다니면 길이 생긴다고 했던가. 그 말이 나온 지 벌써 반백년. 언제쯤에나 이 땅의 물산이 청국의 절반 아니 반에 반이라도 따라간단 말인가. 이젠 그런 청국마저 무릎 꿀린 구라파 양인들의 흑선이 바로 코앞에 있는 형국 아닌가.
하기는 물산이 문제가 아니었다. 백성들의 삶이 더 궁핍해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산지옥 장김조선’ 이란 말이 나오겠는가. 장김, 안동 김씨들의 조선이라는 얘기다.

“덥지 않으십니까? 마님, 찬수건 올릴까요?” 땀을 뻘뻘 흘리며 노인 앞에 선 청년이 노인을 향해 물어 왔다.
노인은 진작부터 자신을 부를 때 대감 자는 떼고 부르라 일렀다. 아니면 샌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벼슬이 자랑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찌 이런 것도 다 준비 했냐?”
총각이 작은 소금 대광주리에서 꺼내 건네는 젖은 명주는 아직 찼다. 그 수건으로 노인은 목덜미를 닦으며 기특하다는 투로 말했다.
“달준이 네 궁량은 아닐텐데…”
“예 아침에 길성어멈이 해준 겁니다. 소금 광주리는 전에 용산아씨가 가르쳐 준 것이고…”
“흠 용산 아씨라….”
아씨라고 부르면 예법에 어긋나는데도 길성네와 달준은 그렇게 불렀다.
두 사람은 내친김에 나무 그늘로 가 잠시 숨을 돌리기로 했다.
“이번에 가시면 경판일 끝날 때 까지 절에 머무시겠다면서요?” 달준이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아예 출가를 해서 집에 돌아가지 않으련다. 왜?” 짐짓 어깃장을 놓는 말투 였지만 영 허투루 던지는 말은 아니었는데 달준은 전혀 믿지 않았다.

“설마요. 마님이 어떻게 스님이 되십니까?”
“왜 나라고 중 되지 말란 법 있는가?”
“동국 최고의 유학자께서 스님이 되신다면 나라에서 난리가 날겁니다..”
“동국 최고라….”
노인은 피씩 웃었다.
“제가 말씀을 안 드려서 그렇지 저도 다 압니다. 마님 먹 간지 벌써 5년입니다.” 하긴 자신이 불문에 귀의하겠다고 나선다면 집안이며 붕우들 심지어 조당까지도 파문이 일 것을 분명했다. 자신이 불교를 가까이 하고 또 이를 굳이 숨기지 않는 까닭은 지금의 조당과 사설 서원으로 대표되는 성리학 무리에 대한 시위의 뜻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뭐 크게 세상이 달라질 것인가, 이미 병노과가 된 터에. 다만 벌떼처럼 달려들 倭(왜), 洋(양), 西勢((서세)의 침탈에 온갖 환난 신고를 겪게 될 이 땅의 백성들이 걸리기는 했다. 경세제민 실사구시를 주창했던 북학자 관료로서 대비책을 마련치 않고 혼자 숨듯이 불문에 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때 초립을 쓴 털보 청년이 땀을 훔치면서 바삐 언덕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청년은 노인 일행을 보더니 얼굴에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이쪽으로 달려올 태세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후두둑 하는 여럿의 기척이 나더니 난데없는 괴한들이 초립 청년보다 먼저 두 사람 앞에 섰다. 창졸간이었다. 덩치 다섯명이었다. 대뜸 괴한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 모두 이 염천에 검은옷, 검은 얼굴 수건을 하고 있었다. 몇은 거기다 삿갓 까지 쓰고 있었다.
“누구요?”달준이 소리쳤다.
“유생 사대부의 도리와 강상의 법도를 어긴 논당의 치욕 완당 노친네는 공맹 성인의 심판, 사충서독을 받으시오.”
일갈과 함께 삿갓은 한지로 된 누런 봉투를 던지듯 노인에게 건넸다.
봉투를 열어 서한의 내용을 확인한 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서한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이런 고연…”
“순순히 따라 나서시겠소, 아니면 우리가 손을 써야만 되겠소?”
“무슨 짝에 사립 서원의 훈도들이 나를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우리들은 도유사 합하의 명을 받드는 별동 자경단 이오, 얘기는 원에 가서 하시오.”
“못 간다, 이놈들아, 어디서 되지 않게…”
사충서원이 이런저런 악폐를 저지르고 있고 그 가운데 서독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실물을 보니 더 분통이 터졌다.
“엄연히 국법이 있는데 이 무슨 해괴한 망동이란 말이냐?”완당 노친네라 불린 노선비 추사 김정희 목소리가 준열했다.
“할 수 없군.”순식간에 괴한이 목검을 수평으로 찔러왔다.
노인은 괴한이 창졸간에 찌른 목검을 명치에 맞고 쓰러졌다. 진검이 아닌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손속에 얼마쯤 여유를 둔 모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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