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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제 1회

안 동일 지음

1. 추사와 묵패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언덕에 있는 부용사는 가파른 터에 자리 잡고 있어 마당이 위아래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큰 법당과 석탑이 있는 윗마당은 조용하고 근엄 했지만 행랑과 장승이 있는 아랫마당은 늘 분주하고 흥겨웠다.
그 아랫마당서 까끼춤을 추는 말뚝이의 널직한 등판으로 초여름 새벽 풍경 소리가 흐르고 있었고 거들먹 춤을 추는 소무의 주름진 이마와 이를 바라보는 選上(선상)의 아직 고운 뺨 위로 강물에 반사된 아침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곤지곤지 곤지요, 봉지봉지 봉지요, 계수나무 요분 틀 너도 타고 나도 타고 에 해 네것도 받고 내것도 받고 얘~얘~ 그만하면 쓰겠다.’
키들키들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제 그만 됐어.” 선상 金錦園(금원)은 말뚝이의 소리를 멈추게 했다. 더 나가면 더욱 민망한 대목이다.
모처럼 두물머리 상두계 별산대 놀이패들의 소리와 춤을 봐주고 있는 중이다. 놀이패 동패들은 다들 ‘금원행수’ 혹은 ‘선상누님’이라 하면서 금원을 살갑게 대했다. 저들의 까끼춤과 거들먹춤이 유난히 멋들어지게 된 까닭도 저들이 목청껏 읊어대는 여덟 과장 대사의 운율이 찰 지게 된 것도 금원이 손봐주고 나서 부터였다.
송파의 산대와 구분해 별산대라 부르면서 풍자는 더 신랄해졌고 해학이 더 넘쳐 났기에 잘못된 세상, 켜켜이 억눌려 사는 이들에게 탈춤은 청량의 들숨과 날숨이었고 세상 바로세우는 鼎革(정혁)의 바람이며 연습이기도 했다.
미륵을 기리는 용화종 에서는 신도회를 郎家契(낭가계)라고 했다. 상두계 놀이패는 부용사 낭가계의 중추였는데 그 꼭두가 바로 금원의 고향 이웃인 덕배 아재였다.
“잘됐구먼 이젠 금앵 선상님이 우리 패를 봐주면 꼭 되겠네.”
덕배 아재가 지난해 사월 보름, 낭가계회서 금원과 십수년 만에 만났을 때 손을 덥석 잡고 한 첫마디 였다. 선상은 생각시들을 가르치는 일패 행수기생을 말했다. 아재는 원주 홍루의 북잡이로 일한 적 있었다.
흔히 상여꾼으로 불리는 상두는 상여를 메고 품을 받는 이들이다. 두물머리 상두계는 양주 목을 대표하는 큰 계 였는데 계원 가운데 끼 있는 이들이 나서 만든 놀이패가 바로 양주 별산대 두물머리패 였다.
오늘도 이 탈패는 별내촌 오일초상의 대도둠과 소어뜸에 지칠 법도 했는데 금원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 새벽에 부용사로 몰려온 참이다.

“해동은 조선국이라. 이씨 마마 출입 하옵신다. 어떤 배를 잡아타나, 종이배를 잡아타니 종이라고 미어지고, 나무라고 잡아타니 나무라고 썩어지고 흙이라고 풀어지고 무쇠라고 녹이 솟네 어허.”
이씨 왕조가 무너지고 있다는 풍자다. 팔목중 놀이 가운데 염불놀이 대목의 말뚝이의 수작이다.
이때였다. 맨 위쪽 정근각에서 나온 태을 노스님이 마당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스님은 빠른 걸음으로 아랫마당 까지 왔다. 연습하던 대목이 스님에게 민망한지라 자연 소리가 잦아들었다. 스님은 상두계원들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하는 사내들이라고 추어주곤 했다.

“이보게 박 존위 나 좀 보시게.” 스님이 저만큼 에서 덕배 아재를 불렀다. 금원이나 동패들은 이무럽게 대했지만 남들은 꼭두인 덕배 아재를 각별히 예우했다. 조선 땅에서 상례는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왕가의 종친도 정승 판서도 자신 존속의 초상 때면 상두계의 눈치를 봐야 했다. 특히 尊位(존위)라고 부르는 꼭두에게는 누구도 하대하지 못했다. 상놈이 대접 받는 거의 유일한 예였다.
하기는 운구뿐이 아니라 하관도 봉분도 상두꾼의 손이 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간혹 심사 틀린 상두가 몽니를 부려 상주의 애를 먹이는 일도 왕왕 있었다.
전국 웬만한 지역에는 군현 단위로 상두계가 조직돼 있었는데 두물머리패의 위세는 전국에서도 손꼽혔다. 상두계는 품앗이 계였기에 품앗이 한 일이 없는 양반들은 꽤 비싼 삯을 주고 이들을 불러야 했다. 남들이 꺼리는 것 만져야 해서 그렇지 동무들과 어울려 저 좋아하는 소리하고 춤추면서 얻는 용채가 명목상 본업인 농사에서 얻는 소출 저리가라였다. 이들이야 말로 애들 굶기지 않았다. 그리고 양반네들은 몰랐다. 중인환시리에 가장 상스러운 말로 한껏 고상한척하는 저들을 냅다 욕해주는 凌上(능상)의 그 쾌감을.
아랫 마당 행랑채 앞에서 얘기를 나누는 스님과 덕배 아재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스님이 그쪽을 쳐다보는 금원을 손짓으로 불렀고 금원이 냉큼 달려갔다.

병진년(1856, 철종 7년) 늦은 여름.
과천 주암리에서 송파나루 아래 봉원사로 가려면 구룡재 언덕을 넘어야 했다. 구룡산 산자락 앞쪽 언덕으로 작은 길이 나 있었다. 말죽거리 까지 나가면 우면산 앞 큰길이 있기는 했지만 우마차 먼지 때문에 사람들은 구룡재 길을 택하곤 했다.
이 구룡재 소롯길에 샌님의 행차가 보였다. 행차라고 해야 흰 수염을 휘날리고 앞장서 걷는 깨끗한 차림의 노 선비 뒤로 바랑을 짊어지고 광주리 하나를 든 총각 한 사람이 일행의 전부였다.
“같이 가요. 샌님, 왠 노인네가 걸음이 그리 빨라요. 귀신처럼 먹고 장승처럼 간다더니…”
“녀석아 네 걸음이 청년답지 않게 굼떠 그렇지.”
주종 간의 대화가 꽤 친밀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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