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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74회

안동일 작

 에필로그, 장수왕 그리고 만주땅

나는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이기도 한 백암 박은식의 소설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꿈 속에서 금 태조를 만나다)의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려 주었다.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 ‘무치생’(無恥生;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란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서생이 만주로 떠나갔다가 꿈 속에서 금 태조 아골타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오호라. 우리 조선족과 만주족(滿洲族)은 모두 다 단군대황조의 자손으로 오랜 옛날에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또 서로 통하기도 했는데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리(分離)되면서 두만(豆滿)과 압록(鴨綠)을 경계로 이루어 양쪽의 인민(人民)이 왕래도 하지 못하고 각기 살은 지가 천여년이 되었다. 이에 따라 풍속이 같지 않게 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남같이 생각하면서 다른 종족처럼 되었다.

… 대개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의 평주(平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金國)의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부락으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렇게 한탄하는 무치생을 금 태조 아골타가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다.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시간이 꽤 흘렀다. 언제 그렇게 마셨는지 상위에 빈 술병이 적잖이 쌓여 있었다.
“그래 안박사 네 말대로 방향을 장수왕 쪽으로 돌려 보도록 하지.”
신해가 결심했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의 프로젝트 성사를 위해 힘을 기울이겠다고 내심으로 힘을 주었다. 빠르면 내념 쯤
각광을 받으며 장수왕과 니르아이신이 친근한 스크린을 통해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될 것을 믿으면서.

저자 주 수수께기의 존재, 말갈 (靺鞨)

중국사와 한국사에 있어서 말갈족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 화두이다. 고대사에서 부터 고구려와의 복속 관계를 통해 한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래로 발해에 이르기 까지는 한국사의 일부로서, 또 이후에는 여진족으로 이어지면서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하는 주체로서 중국사의 중심에 자리잡는 존재가 바로 이 말갈족이기 때문이다.

6 ∼7세기무렵 중국 수·당시대에 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렀다. 본디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들 부족 중 대표적인 것은 예맥 계통으로 농업을 주로 하던 속말(粟末), 백산(白山)과 순수 퉁구스계로 수렵에 의존하던 백돌·불녈(拂涅)·호실(號室)·흑수(黑水)·안차골(安車骨) 등 7개 부족이었다. 그중 속말과 백산 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영주(營州;遼寧省 朝陽)로 이주하였고, 나중에 발해가 성립되자 대부분의 말갈족이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흑수부족만은 쑹화강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고, 발해 멸망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女眞)이라 불렀으며, 그 뒤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었다가 생여진은 금(金)나라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

이러한 말갈족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에 있어서나 중국사에 있어서나 동일하다. 만주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야만 종족으로서 일찌감치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주력 전투 세력으로 활용되었던 존재이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 유민 세력의 지배하에 발해를 구성하며 만주 일대에 자리 잡은 종족. 이게 바로 일반적인 말갈족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쉽게 인식하기에는 말갈족이 고대사에 남긴 흔적이 애매모호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말갈족은 그 존재 조차 불분명할 정도의 정체 불명의 종족이라는 것이다.
말갈족에 대한 사서의 인식부터 살펴 보면 우리 사서에 있어서 말갈의 존재를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말갈의 존재는 고구려의 건국과 함께 이미 언급되고 있을 정도인데, 추모왕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후로는 백제와 신라측의 기사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 때의 말갈은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끊임없이 침입하는 침략세력이다.
중국측의 기록은 애매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 사서의 말갈에 대한 인식은 물길의 후예라는 것인데, 물길 역시 존재 인식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만주 남동부에 걸쳐 존재하던 수렵 민족이라는게 흔한 설이지만, 공식적인 물길의 문서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건 6세기에 접어 들어서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점과 때를 비슷하게 하여 말갈의 문서가 중국에 등장한다.

일단 국내의 기록을 살펴 봤을 때의 문제점 부터 살펴 보자. 가장 중요한건 백제와 신라의 기사이다. 백제와 신라의 기사에서 말갈은 끊임없이 북방을 침입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고대 국가 시기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괴롭힐 정도의 세력이라면 적지 않은 전투력을 가져야 정상이다. 일단 말갈은 상당한 수준의 전투 세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립 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측 사서의 어디에도 말갈이 독자적인 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북방의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이라면 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백제와 신라의 북변은 현재 비정되고 있는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틀리지 않는 한 산악지대이며, 유목민족이 이동하며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군다나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도 말갈의 기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말갈이 독립세력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괴롭힐 정도의 독립적인 전투 세력이 남부에 근거하도록 놔둘리도 없을 뿐더러, 이 정도의 세력을 정벌을 했다면 당연히 정벌 기사가 고구려 기사에 등장해야만 정상이기 떄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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