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ykorea
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70회

안동일 작

노익장의 마지막 전투

전투는 손쉽게 고구려 군의 승리로 끝났다.
흑수 숙신군의 최고 맹장이라는 도루 위강이 아진의 측근 부장인 주을 정한의 환도에 꺾이면서 흑수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던 것이다. 궁궐이라 할 수 있는 노티몰의 장원 앞까지 흑수군이 밀려가 치러진 난전 중에 주을은 도루를 발견했고 벽력같은 기세로 그에게 달려가 환도를 휘둘러 댔는데 피로에 지쳐있던 도루는 몇합 겨루지도 못하고 목을 내줘야 했다. 도루의 목이 떨어지자 노티몰은 눈물을 뿌리며 주을의 면전에서 칼을 던졌다.
아진은 지휘소로 정한 성 내측의 누각 위에서 적군의 백기를 맞았는데 적군이 누각 가까이 왔을 때 잠깐 정신을 잃고 혼절해야 했다.
피가 많이 나오지 않은 것 같았지만 갑옷 안으로 흐른 피는 떡 처럼 응고되어 있었고 오른팔을 들어 올릴 수 조차 없었다. 노티몰이 주을 등에 둘러싸여 누각 쪽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 아진은 걸상에서 일어나려 하다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혼절을 하면서도 아진은 걸상위에서 털썩 앉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동작을 최소화 했다.
아진은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 앞에 서 고개를 숙이는 노티몰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노티몰의 눈매에서 라운의 눈매를 보았다.

아진이 눈을 떴을 때는 반나절쯤이 지난 뒤였다. 지휘소 인근 한 가옥의 침상 위 였다. 침상 주위에는 군의와 부장들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성 접수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정효에게 아진이 물었다.
“참모장께서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진이 정신을 차린 것에 대해 너무도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던 정효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 백성들을 많이 다치게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장군.”
진작 성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진은 부장들에게 양민의 학살은 결코 하지 말라고 일렀었다. 연기가 솟고 말울음이 들려오고 병장기 부딪는 소리, 고함소리 신음소리가 어우러진 곳곳에서 부녀자며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었다. 실은 저들도 돌멩이를 나른다던지 끓는 물을 나른다던지 전투에 참여 했었던 터였다. 처마 밑이며 잔도의 바위 뒤로 몸을 감추는 그들의 겁먹은 눈동자에서 아진은 6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야 했었다.
“노티몰은 어찌 했느냐?”
“한 가옥에 연금시켜 놓았습니다.”
“우리 측 피해는 집계가 되었더냐?”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부장들이 이곳에서 장군의 용태를 지키느라.”
“이런 이런 내가 너희들의 짐이 되었구나.”
“당치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장군, 소장들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진은 오른팔 과 어깨를 움직여 일어나 보려 했지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 하지 마십시오. 실은 위중하십니다.”
군의가 아진의 오른팔을 잡으며 말했다.
“위중하다니? 이렇게 멀쩡한데.”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었습니다. 맹독이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기는 했지만…”
“노티몰이 그렇게 까지 했단 말이냐? 하긴 전쟁이니까…”
활촉은 제거가 된 모양이었다. 어깨와 오른팔에 천이 두툼하게 감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온 전신에 도통 힘이 없는 게 아진에게는 더 딱한 노릇이었다. 온몸에 진기를 추스르려 애를 썼지만 계속 흐트러지는 것 이었다.
“급히 백로편자탕을 조제해 드시게 했습니다. 아무리 천하의 장군님 이시라도 서너 식경은 더 계셔야 움직이실 수 있을 겁니다.”
독을 해독하는 독한 탕재였다.
“그랬군.”
아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일생이 그림처럼 펼쳐지면서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혼절하기 전에 마주쳤던 노티몰, 아니 라운의 눈동자에서 시작해서 채석강에서의 일, 무수한 바위들, 그리고 장수왕을 만나던 광경, 많은 전장터를 달리며 휘둘렀던 단창.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때 노상에서 마주쳤던 만주 일원의 백성들의 모습들, 자신을 태웠던 혈혈노의 기개 높았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울음소리 끝에 잔기침을 하려 했더니 전신으로 통증이 느껴지면서 검은 하늘에 노란 별 하나가 반짝였다. (계속)

필자주: 고구려의 장례 풍속

고구려의 장례 풍속은 고구려 전기와 후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사회상을 기록한 [삼국지]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결혼하자마자 장례 지낼 때 입을 옷을 장만한다고 했다. 또 장례는 아주 후하게 지내,금과 은 ,재물을 모두 쓰며, 돌을 쌓아서 무덤을 만들고 무덤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했다. 이것은 장군총으로 대표되는 적석총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으며, 우씨왕후의 무덤과 고국천왕의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일곱 겹이나 쌓아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또한 고구려의 무덤에 많은 부장품이 있다고 외국인들이 알 정도여서 역대로 도굴꾼들이 기승을 부렸는데, 특히 모용선비족은 296년에 서천왕릉을 도굴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342년에는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과 무덤 속에 있는 역대의 보물을 거두어 가기도 했다. 이런 도굴꾼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고구려 후기의 장례 풍속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지내는 3년상(喪)과 다른 고구려의 3년상의 모습이 특이했다고 기록한다. 시신이 죽은 후 곧 무덤을 만들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고 3년을 지낸 다음에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기후가 중국보다 추웠기 때문에 가능한 풍속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 기간 동안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3년동안 집 안에 시신을 모셨던 것 같다. 상복도 입었는데 부모와 남편의 경우는 3년을 입었지만, 형제간에는 세달을 입었고 그것도 고구려 말기에는 한 달만 입었다고 한다.
고구려 전기에 비해 달라진 점은 부장품에 대한 것인데 [북사]에 의하면 장례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입던 의복과 노리개ㅡ수레ㅡ말 등을 무덤 옆에 놓아두어서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유품을 무덤 속에 넣어두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해 복이 된다고 믿는 풍습으로 바뀐 것 같다.   고구려의 장례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초상을 치를 때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나, 장사를 지낼 때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보낸다고 했다.   이러한 점이 중국과 달랐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계속)

Related posts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73회

안동일 기자

<장편 이민 현장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102회

안동일 기자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47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