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실직주 출정과 중원 고구려비
“그래 내 진작부터 생각은 했는데 너도 이제 사해동포로서의 우리식 이름을 갖도록 하자꾸나, 네가 쓰고 있는 이름은 정체불명이 아니더냐?”
그렇기는 했다.
니르아이진은 문자로 적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자로 굳이 쓰려면 아진이라 썼는데 왕이 이를 두고 얘기하는 것이다.
“우락 부락한 네 숙신 동무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만 이번에 궁에 가면 내 너에게 확실한 성명을 내리도록 하마.”
사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대가들은 성을 만들고, 또 이를 왕에게 하사 받은 것으로 하려고 긍긍하고 있는 터였다.
그 무렵까지 성과 이름을 정확하게 쓰고 있는 이가 많지 않았는데 문물이 발전 하면서 성에 대한 관심과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중원 고구려비 건립에 대한 왕의 보답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 마을에 세워진 비석으로 1979년 충주 지방의 문화재 애호 단체인 예성문화연구회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이 세워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비석의 모양과 글씨의 모양이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며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어 423년 장수왕 때 만들어진 비석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는 광개토대왕비 이후 가장 큰 고구려비이며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
높이 203cm, 폭 55cm의 중원고구려비는 마치 모진 세월의 풍파로 인해 닳은 듯 비석의 모양이 둥글고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인다. 특이한 점은 돌기둥 4면에 각각 글이 새겨져 있으며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의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자의 글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원고구려비각 바로 앞에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 풀이가 되어 있는데 대강 읽어보면 고구려와 신라가 형님 아우 사이로 형제처럼 지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신라에게 의복을 전해주는 내용도 있으며 이 외에도 관리의 명칭이나 제도에 대하여도 쓰여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유일무이한 고구려비인 중원 고구려비는, 크기는 다소 작지만 만주땅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 대왕비와 그 생김새가 무척 비슷하다. 한편 고구려비의 금석은 남아 있는 것이 상당히 드문데, 중원 고구려비에는 약 400자의 예서체 글씨가 앞 뒷면에 걸쳐 빽빽이 새겨져 있다. 앞 면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 좋게 지내던 때의 일들이, 그리고 뒷면에는 그러던 두 나라의 관계가 험악해진 이후 백제의 개로왕과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에 대항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5. 왕의 사돈이 되다.
< 54년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나라 문명태후가 현조의 육궁이 갖추어지 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후가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 (安樂王) 진,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어떤 사람이 왕에 게 권하여 말하였다.
“위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하고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정벌하였습니다. 사신을 통해서 그나라 지형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 례가 멀지 않으니 적당한 구실로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위나라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아우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만약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고 하였으나 마침 현조가 죽자 중지하였다. >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 본기 장수왕)
아진, 이제는 왕이 하사한 고구려 이름 대 창하로 어엿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물길인 니르 아이신에게 또 한번의 영예가 왔으니 바로 왕의 사돈이 된 일이다. 왕은 실직주와 탄금에서의 약속대로 평양에 돌아와 아진에게 대 창하 라는 이름을 하사 했다.
사해동포의 광변무대를 뜻하는 큰 대자와 사해로 가는 강물이 번창 하고 창성하라는 창하라는 이름을 내렷던 것이다. 大 昌河.
사돈이 된 이야기는 엄밀히 따지면 왕의 친자식인 왕자나 공주를 자신의 사위나 며느리로 맞은 것이 아니라 왕실이 급조해서 맞아들인 양녀를 며느리로 맞았으니 진짜 사돈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공주로 불리우는 처자를 며느리로 맞았으니 사돈은 사돈인 셈 아닌가.
그 공주가 바로 역사에도 등장하는 경문 공주였다.
사실 거련왕 장수왕에게는 자식이 1남 1녀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