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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46회

안동일 작

 정벌기 – 요동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냐

자신의 궁궐이 난잔팡이 되어 있고 또 자신이 그리 애지중지 하던 보화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풍홍왕은 거의 실성한 사람의 모습을 보였다.
“이를 어쩐단 말이냐, 그것들을 모으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곽생이 이놈, 내 이놈을 잡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겠다.”
어디 숨어 있다 나타났는지 풍홍왕의 시비들이며 친척들 그리고 몇몇 환관 들이 주변에서 함께 훌쩍이고 있었다.
그런데 곽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곽생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고관들은 언제 빠져 나갔는지 시체 속에서도 또 포로 가운데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밝혀진 사실이지만 궁 안에 있었으면 오히려 목숨을 보전 할 수도 있었으련만 곽생 등은 제꾀에 제가 넘어간 폭으로 함께 재보를 빼돌려 싣고 위군 진영으로 투항하려다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 중군과 맞닥뜨려 황천객이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중군은 그들이 누군지 정확히 몰랐지만 위군 진영으로 넘어가는 일단의 무리를 그냥 둘수가 없어 정지를 명했지만 이;들은 제보에 눈이 어두워 저항을 시도 했고 그 저항은 고구려군의 강궁과 방포에 여지없이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장병들에게 휴식을 명한 뒤 아진은 그나마 형체를 갖추고 있는 전각을 찾아내 치우고 임시 지휘소로 삼아 부장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풍홍왕도 얼굴이 벌게져 실성한 사람 같았지만 아진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용성을 장악 했다는 전갈을 받고 중군에서 맹광 장군과 주요 간부들이 달려와 회의가 열렸다.
“공성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하는 것 처럼 우리가 여기서 계속 머물며서 이땅을 차지 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예, 실제 이득도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황폐하게 무너져 있어서야….또 이곳 백성들을 고구려 백성으로 만들기에는 어려운일 이 한둘이 아닙니다.”“그렇소, 대왕 마마의 뜻도 이번 출정에 영토를 늘이는 것보다는 우리의 실력을 위에 알리고 나라의 내실을 기하자는 것에 있었소.”
“위군과 충돌하지 않는 게 상책은 상책이오. 싸워 봐야 서로 이득 될게 없으니 말이오.”
위군과는 계속 내곡하 평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에 있었다.
서로 사자를 수시로 보내 의사를 소통 하고 있다는데 고구려군이 용성을 장악 했다는 소식에 위군이 노기등등해 있다고 했다. 재주는 누가 부리고 이득은 누가 챙긴다고 위군으로서는 대군을 동원해 왔는데 고구려군이 큰 힘도 들이지 않고 냉큼 도성을 차지 했다고 하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떠나올 때의 왕의 지침 대로 위군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고 고구려로 돌아 가는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풍홍왕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용성에 자신을 놔두고 떠날까봐 전전긍긍 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장군, 내 이미 고구려왕과 약조가 되어 있소, 함께 고구려로 갑시다. 더 이상 이곳은 나도 싫어졌소.”
풍홍은 맹광과 아진에게 매달리다 시피 했다.
하지만 한때 황제를 칭했던 일국의 왕을 데리고 귀국하는 일은 그렇게 간당한 문제가 아니었다.
장수들의 회의 가 열렸지만 이 문제는 현지의 장군들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의 범위 밖 이었기에 본국의 지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풍홍이 계속 따라 오겠다고 하면 일단 화룡성에 머물게 합시다. 그리고 지침을 하달 받도록 합시다.”
그 사이 위군은 내곡하 구릉을 우회해 험한 산길로 행로를 택해 용성 지척 까지 진격해 왔다. 저들도 고구려와의 전면전은 원치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길을 우회한 것도 그랬고 진격해 와서는 멈춰 있는 것도 그랬다.
그사이 풍홍은 고구려 군에게 멋진 선물을 안겨 주었다.
성내의 무기고를 열어 쌓여 있는 무기를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던 것이다. 자신은 이제 연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 시키는 의미 였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연은 좋은 철의 생산지였기에 무기의 질이 좋았다. 고구려 장수들은 질좋은 병장기들은 보면서 이좋은 무기들을 썪히고 있었다니 하면서 혀를 찾다.
군사들에게 약탈을 엄금하면서 성내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던 총사도 희색이 만면해서 무기들 만큼은 마차에 다 싣게 했다.
위군 진영으로 갔던 사자가 돌아 왔다.
“사흘의 시간을 벌었습니다. 사람과 양곡이며 재화가 떠나는 것은 자신들이 개의치 말라고 했습니다. 위근 총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결정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 썩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 뜻은 전달 했고 저들도 크게 반대는 않한 그런 분위기 였습니다. 사흘 까지는 기다릴 수 있지만 그 후에는 성을 접수해야 한다는 것만 내세우더구요.”
“수고 했소, 사흘이면 충분 하겠소?”“충분 합니다.”
이리하여 고구려군은 기사년 연 정벌에서 백성 7만과 무기며 재화를 가득 싣고 고구려로 개선했다.
백성 7만이 따라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무렵은 각나라 마다 영토 보다 백성의 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 였다. 특히 요동 지역이야 너른게 땅이기 때문에 땅을 점령 했다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었다. 그땅에 사는 백성들을 복속 시켜 노동력과 군사력으로 이용 할 수 있느냐가 중요 했던 것이다.

사서에는 그때 고구려 군의 귀환 행렬이 80리를 이었으며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위군은 그 위세에 눌려 약속과 다르다며 백성과 재화의 운반을 저지 하고 가로 채려 했던 당초의 계획을 수정해 바라 보기만 했다고 적혀 있다.
장수왕은 국내성까지 마중을 나와 개선하는 군사들을 위로했고 환영 했다.
또 국내성에서 평양에 이르는 연도에서 행군을 했는데 각 마을 마다에서 잔치가 벌어져 온 나라가 떠들썩 했다고 전해 진다.
꼬리표로 따라 온 풍홍왕이 그 후 계속 적지 않은 골치 덩어리 역할을 했는데 그는 심지 깊지 못하면서 탐욕스런 성정을 버리지 못해 자신의 명줄을 단축하는 사단이 일어날 때까지 어쨌든 3년 가까이 고구려 국내성 인근 촌락에서 망명객으로 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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