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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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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38회

안동일 작

-천도, 그 험난한 여정

아진은 그날 환나부의 객사에서 긴장은 됐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을 묶었고 다음날 환나부로 돌아온 도혁만을 통해 소노의 일이 잘 해결 되었음을 상세히 들었고 왕의 도량과 사람 부리는 기술에 다시 한번 감복해야 했다.
소노부에서는 염태온이 정병 2백을 앞세워 자신들의 저택으로 쳐들어오듯 밀려오자 망연자실 문을 열었고 왕의 뜻에 따르겠다고 약조를 했다는 것이다.
철석 같이 믿었던 환나부가 왕쪽으로 기울어 자신들의 병력을 내주는 마당에 어찌 자신들만 남아 왕의 뜻에 저항 할 수 있겠냐며 소노의 제가와 가신이 모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마차에 태워 소노로 가는 짧은 시간에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염태온은 순한 양이 되어 왕의 옆에 서서 충직한 장수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도혁만이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신바람이 나서 들려준 얘기였다.

 

주: 고구려 5부
고구려를 구성한 5개의 정치집단.  또는 고구려 지배세력을 편제한 수도의 행정 단위였다. 고구려의 5부는 그 성격상 전기의 5나부(那部)와 후기의 5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기의 5나부 명칭은 〈삼국지〉에 의하면 계루부(桂婁部)·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인데, 〈삼국사기〉에는 비류부(沸流部)·연나부(椽那部)·관나부(貫那部)·환나부(桓那部) 등 4부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서로 다르게 전하는 고구려 5부는 왕실을 구성한 계루부를 제외하면,
소노부와 비류부, 절노부와 연나부, 관노부와 관나부, 순노부와 환나부 등으로 대응하는 동일한 실체이다. 이들 나부는 압록강 유역에 존재했던 여러 나국(那國)이 상호 통합과정을 거쳐 5개의 정치체를 이루고, 다시 이들이 고구려 연맹체를 구성한 뒤 계루부 왕권에 의해 부(部)로 편제된 것이다. 이들 5부를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국가체제는 늦어도 1세기경인 태조왕대에는 성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5부 중에서도 왕실을 구성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 그리고 이전에 연맹장의 지위에 있었던 소노부의 3부가 세력이 강대했으며, 관노부와 환노부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다. 각 부는 독자성을 지닌 단위 정치체로서 대내적인 자치권은 어느 정도 인정받았으나, 대외적인 무역권과 교섭권은 계루부 왕권에 의해 박탈당했다. 나아가 각 부는 자체적으로 관리를 임명했으나, 그 명단을 중앙정부에 보고해야 하는 등의 통제를 받았다. 이러한 5부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의 정치체제는 중앙집권력이 강화된 3세기 이후에는 점차 변모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됨에 따라 각 부의 자치력이 약화되어 갔고, 이러한 추세로 각 부의 고유한 명칭도 단순히 방위를 표현하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각 부의 수장층도 중앙귀족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점차 5부의 성격도 변화했다. 후기의 5부는 동·서·남·북·중의 방위명 또는 전·후·상·하·중의 명칭을 갖는 수도의 행정구역이었다. 따라서 후기의 5부는 중앙귀족들의 거주지나 출신지를 가리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또 수도 평양성 이외에 국내성과 한성도에 5부의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 후기에는 지방 행정구역으로서의 5부의 존재도 상정할 수 있으나, 아직 그 성격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어려운 결단, 파병

 

“일단 마마의 뜻은 군을 동원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병부를 책임지고 있는 병부대로 을밀우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마마 역시 마음을 정하시지 못했기에 병부 회의에서 논의하라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대말객 주천나가 반론을 냈다. 그는 소노 출신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번 출병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마마 께서도 그점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 더러 논의 해보라 하신 것으로 사료 됩니다.” 대말객 연충무가 나섰다. 그는 환나 출신 이었다.
“그렇지 않소 이번 출병은 잘 만 하면 우리 고구려의 기상을 떨치고 영토를 크게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이오”
수도 평양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패수군의 총사 대장군 갈로맹광이 한마디 했다.
“대왕 께서 회의를 하라고 하신 것은 어느 장수가 어떻게 나가 충성과 기개를 떨치겠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 하라는 분부시지 근본을 다시 논의하라는 뜻은 아닌 것으로 사료되오.”
병부 대형 나밀운이 나섰다. 그는 계루 출신 충성파 였다.
“그렇지 않소 아무리 왕의 뜻이 그러 하다 하다 할 지라도 득보다 실이 많은 출병은 막도록 간하는 게 신하된 도리 아니겠소?”
환나의 대사자 연도우가 나섰다.
“출병을 하느냐 않느냐 하는 근본의 문제는 어전과 제가 회의의 몫이오 우리는 그저 명을 받아 나가 싸우는 장수들이오.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소. ”
나밀운이지지 않고 한마디 더 했다.
병부 안은 설왕설래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출병을 해야 한다는 쪽과 적당히 구실을 대 출병을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거의 반분 돼 있었다. 그러나 출병 쪽의 목소리가 컸다. 왕의 직계로 분류되는 신진 세력들이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 달라진 모습의 하나였다. 환나 소노의 권신들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왕의 직속이라 할 수 있는 신진 세력 들의 목소리가 커져 있었던 것이다.
아진도 회의 말석에 앉아 있었다. 아진은 굳이 왕이 회의를 하란 것에서 이미 왕의 뜻은 파병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만 했고 또 이번 파병 건으로 각 나부며 군부의 성향을 다시 파악해 재 장악 하려는 심모를 견지하고 있겠다 싶었지만 자신이 나설 개제는 아니었기에 좌상들이 의견을 물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병부만의 결정 이라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사단은 연나라의 새로운 왕족 풍씨들에게 있었다. 당초 연나라는 선비족인 모용씨가 세운 나라 였다.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요동의 패권을 놓고 다투면서 은원이 점철 돼 있는 나라였다. 50여년 전에는 고구려 환도성을 유린해서 선왕의 무덤 까지 파헤쳐간 흉폭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중원의 패자가 바뀌어 사정이 어려울 때는 고구려에 손을 벌리기도 했고 정변이 있을 때는 왕족이 피신해 와 몸을 의탁 하기도 했었다.
지난번 왕이었던 모용연 만 하더라 아비인 모용수가 고구려에 의탁해 있을때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자식으로 고구려인을 자처 하고 이름도 고연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또다른 정변이 본국에 일어나면서 귀국해 왕위에 올랐었다. 모용연이 왕위에 있을 때 양국의 사이는 좋았다. 장수왕은 모용연에게 요동 장군 제태 연왕 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었고 연왕도 고구려 왕에게 동북 호태 평강 고구려왕이라는 시호를 선사하기도 했다. 당시 시호란 일종의 명예 훈작과도 같은 것이어서 꼭 상국이 복속국에 내리는 시혜의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워낙 불안한 연나라의 정세는 한족 인사로 등용 했던 풍발이 정변을 일으켜 연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황제를 칭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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