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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생활 인물탐방

특별연재 <구술 수기>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5)

 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박희도의 간략 2 

YMCA 회원부 간사로 위촉, 영향력을 끼치는 선배급 인사로

그 무렵 박희도는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통해서도 국제정세며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1월 중순경 그는 도쿄 유학생들이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는데. 그에게 이 사실을 전해준 사람은 평양 태생으로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중이던 송복순(宋福順)이었다. 언제 부턴가 민족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었던 그는 송복순의 말을 듣고 한층 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박희도는 1월 23일 경성 (서울) YMCA 회원부 위원인 학생들을 소집했다.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유상규 등이 모였다. 이날의 모임은 후일 엄청난 인연으로 박희도와 그 후손들에게 다가서게 된다. 박희도 생전이 아니라 죽은 후 망우리에서 이어지는 신기하고 반가운 인연이다.

박희도는 이들 서울시내 전문학교의 학생대표들과 시국문제를 토론하면서 독립선언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며칠 뒤 이들이 동경 유학생들처럼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자 박희도는 이들을 다시 만나 천도교, 기독교와 함께 할 것을 강력 권고하면서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했다. 후일 일본 정부문서 보관소에서 이와 관련한 총독부 문서와 계보도가 발견돼 이를 자세히 입증하고 있다. (아래 사진)
2월 18일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가 YMCA로 박희도를 찾아왔다. 그는 박희도에게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로 교계의 지도자인 이승훈 선생이 독립운동 건으로 천도교 측과 상의를 하기 위해 상경했다며 만나 볼 것을 권해 왔다. 이튿날 박희도는 소격동에 머물고 있는 이승훈을 찾아가 만났다. 이승훈은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 건으로 상경한 것이 맞다면서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같이 하던지 아니면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단 기독교 내부의 의견조율이 급선무였다. 이들은 그날 밤 다시 박희도 집에 모였는데 이승훈을 빼고는 전부 감리교파였다. 이튿날에는 장로교 소속 이갑성 집에 모여 장로교파 인사들의 참여 문제를 논의했다. 이날(2.20) 모임에서 이승훈을 위시, 기독교측은 천도교 측과 합동으로 거사를 치르기로 결정 했다. 박희도는 이후로 김창준과 최성모를 만나 민족대표로 합류할 것을 권했고 두 사람 모두 찬동했다. 원산에 있던 협성신학교 절친 선배 정춘수 목사에게는 인편과 전보를 통해 승락을 받아 냈다.

27일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선언서 문안을 검토해 기독교 측의 의견을 최종 확정했고, 기독교 측 민족대표 16인을 정했다. 이때 박희도는 자신이 아직 민족대표로 까지 나설 연배와 역량이 안된다고 겸양의 뜻을 표했으나 장로교 쪽에서 박희도가 빠지면 이갑성도 낄 수 없게 된다고 강력 주장했고 또 천도교와의 안배를 위해 대표를 수락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지도자 15명, 기독교 지도자 16명, 불교 지도자 2명으로 최종 구성됐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박희도는 이날 이른 아침을 먹고 아내에게 “일본 대학에 유학을 가게 됐으니. 부디 아이들을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한 후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 (경향신문, 1966.2.28.)
33인 가운데 태화관 모임 참석자는 29인이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쳐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취조는 연행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박희도는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으며, 또 조선독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3월 9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취조내용 가운데 몇 대목을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이번 독립운동에 있어서 피고 등은 각 방면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다.
문: 어떠한 방면과 연락을 하였는가.
답: 학생과 기타 여러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 학생 측과 연락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라.
답: 근년 1월 6일경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 한위건이 나를 찾아와 오늘밤에 청년 몇 명이 대관원에서 모이는데 같이 가자고 하여 갔더니 연희전문학교 생도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생도 강기덕,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 3명이 와 있었다. 주익이 오늘 지기(知己)끼리 모였으니 앞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였고, 강기덕은 파리에서 세계 평화회의를 개최하는데 만일 조선인으로서 관계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학생들은 그와 연락하여 무슨 일이든지 서로 긴밀히 연락하자고 하였다. 그날 다들 공감하였다.
2월 10일경 김원벽이 각 전문학교 생도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였다. 2월 19일 이갑성 집에서 모이던 날 그 집 옆에서 김원벽을 만났는데 그가 내게 야소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게 사실이냐고 묻기에 오늘 그 일로 이갑성 집에서 모여 상의하는데 결과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20일 오전 11시경 강기덕이 나를 찾아와 학생들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야소교와 천도교에서도 한다면 우리는 그대들이 독립선언을 한 후에 하겠다고 하므로 나는 그에게 우리는 야소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할 뜻을 말했다. 장소와 시일을 묻기에 국장 2일 전이나 2일 후에 될지 모르는데 확실한 시간과 장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26일 밤 김원벽이 내게 왔기에 나는 3월 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니 학생들을 소요 하게 하지 말라고 했더니 학생들은 그 후에 학생끼리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이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을 중지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리 하겠다고 했다. 우리와 학생들의 관계는 그것뿐이다. (학생들의 연루를 최소화 하려는 증언으로 여겨 진다.)
문: 피고 등은 결국 학생들과 같이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닌가.
답: 그런 일은 없다. 독립선언서 발표 당일 학생들이 소요한 것은 어찌 된 것인지, 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일을 말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문: 이번에 이태왕 전하가 훙거(薨去)하심에 때해 어떠한 감상을 가지고 있는가.
답: 단지 슬플 뿐이지 별로 감상을 가지지 않았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문: 어째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는가.
답: 그것은 천도교 측에서 정한 것이므로 우리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최종판결에서 박희도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년 3월1일 체포 됐으니까 1년 7개월 이상을 끌어온 재판이었다. 그는 초기에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는데 그를 포함해 최린, 오세창 등 17명은 독방에서 생활했다. 그 후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돼 옥살이를 하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소했다.

이날 함께 풀려난 사람은 17명이었는데 동아일보 등 당시 언론은 특별히 박희도를 주목했다. 박희도는 옥중생활과 출옥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슨 별 감상이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칠십 먹은 부모와 철모르는 동생들을 버리고 감옥에 들어올 때 가족 생각을 하면 이 일을 했겠습니까. 나의 가슴에 쌓인 정성은 오직 가련한 우리 동포를 조금이라도 구원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올시다. 나도 사람이라 칠십 먹은 부모가 나를 옥중에 들여보내신 후에 형편을 생각하는 나의 가슴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 1921.11.5.)

박희도는 출옥 후 한때 용두리 교회에서 목사로 교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미 감리회 조선 연회에서 박희도 교역을 두고 “교역에 종사치 못할 형편 임으로 계속치 않기로 가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정식 안수를 받지 않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후 그는 교역자의 길을 접고 교육 육영사업,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22년 3월에 잡지 <신생활(新生活)>을 창간했다. 사장은 자신이 맡고 편집인 겸 발행인은 베커 선교사로 하였다. 이는 당국의 원고검열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부터 조선인이 발행한 신문 잡지는 죄다 검열받아야 했지만 외국인이 발행하는 그것들은 검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은 어니스트 베델이라는 영국인이었다. 그가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게재하고, 황무지 개간권의 부당함을 고발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보도해 범국민 운동을 이끌었다. 때문에 영국과 가까웠던 일본은 지속적으로 베델의 행동을 멈춰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했다. 영국 정부도 일본과 관계를 악화시켜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그를 재판에 회부했고 결국 상해까지 추방하는 데는 성공했다.
물론 3주 뒤 더 강한 반일 감정으로 꼭꼭 채워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베델은 복귀 1년도 지나지 않아 심장병으로 사망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대한매일신보가 독립에 큰 힘이 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언론이 가진 힘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역사나 세계 역사를 돌아봐도 기사 하나가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많다.

이같은 사실을 일찍부터 인지한 박희도가 창간한 ‘신생활’ 이 잡지는 ‘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건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고 얘기된다. 1920년대 초중반 조선에는 사회주의가 풍미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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