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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물탐방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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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미주 뉴욕 뉴스 &#38; 커뮤니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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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물탐방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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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20;탈북민 북송 문제와  6.25 유해 송환,  꼭 얘기 할 겁니다&#822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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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지영 기자]]></dc:creator>
		<pubDate>Wed, 03 Dec 2025 14:06:04 +0000</pubDate>
				<category><![CDATA[여성생활]]></category>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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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60;인터뷰&#62;   트럼프 대통령 또 만나는  마영애 총재  11일,  워싱턴서 열리는 대통령 갈라 디너에 초청 받아 꿀벌은 슬퍼 할 틈이 없단다. 열심히 꿀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꼭 해야 할일이 있는 사람이 그렇다. 북한 인권 활동가 마영애 국제 북한 인권 연맹 총재는 요즘 적잖이 들떠 있다. 오는 11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로 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lt;인터뷰&gt;   트럼프 대통령 또 만나는  마영애 총재</h4>
<h4> 11일,  워싱턴서 열리는 대통령 갈라 디너에 초청 받아</h4>
<p>꿀벌은 슬퍼 할 틈이 없단다. 열심히 꿀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꼭 해야 할일이 있는 사람이 그렇다. 북한 인권 활동가 마영애 국제 북한 인권 연맹 총재는 요즘 적잖이 들떠 있다. 오는 11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로 돼 있기 때문이다. 마총재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것은 몇 차례 되지만 이번은 특별하다. 꼭 해야 할일이 있기 때문이다.</p>
<p>마 총재는 최근 이스라엘 동맹 재단 (Israel Allies Foundation)이 여는 갈라 어워즈 디너(Gala Awards Dinner) 에 초청 받았다. 이 행사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을 네트워킹하고 후원하는 미국 기반 단체가 매년 여는 고급 기부 모금 갈라(fundraising gala)다. 특히 올해(2025년) 행사는 트럼프 대통령을 주최자이자  초청자(Honoree)로 세운 디너 이벤트다. 마총재는 그간 미국에서 받은 은혜를 보답한다는 의미로서 소정의 액수의 기부금을 기꺼이 준비했다.<br />
오는 12월 11일 워싱턴의 메리옷 호텔서 열리는 것으로 돼 있지만 보안상 확정은 아니란다.</p>
<p>이스라엘 동맹 재단 (IAF)은 2007년 워싱턴 D.C.에서 설립된 국제 비영리단체로, 전 세계 정치 지도자들을 연결하여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의회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IAF는 미국과 유럽·남미 등 50개국 이상에서 의원 연대체(Caucus)를 운영하며, 이스라엘 안보·예루살렘 문제·종교 자유 등 핵심 정책을 지지하는 외교·정책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인 유태인 재단이다.<br />
대통령이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신원조회가 필수 인데 신원조회가 끝났기에 이제 입고 갈 옷만 고르면 된다.</p>
<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562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5/12/KakaoTalk_20251202_171833319.jpg" alt="" width="801" height="1182" /></p>
<p>&#8220;나의 옷차림은 한복입니다. 태극기 문양이 있는 한복을 입고 입장할 겁니다. 독재의 땅을 탈출한 마영애, 자유대한에서 마영애를 받아주셨던 논산 금당을 잊지못하는 충청도의 딸 마영애가 한복을 입고  12월11일 미국 대통령  행사장에 당당히 들어섭니다.&#8221;</p>
<p>그녀가 이번 행사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탈북민 문제와 625 참전 용사들의 유해 반환 문제다.   중국이  탈북민 북송을 더 못하도록 트럼프 대통령이 도와달라는 것과 아직도 북녁 땅에 산재 돼 있는 참전 용사들의 유해 송환에 더 힘을 써 달라는 얘기다.</p>
<p>트럼프대통령을 만나면 이 얘기를 꼭 하겠다고 한다.</p>
<p>&#8221;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나셨고 또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있으시다는데, 중국의 탈북민 강제 북송을 꼭 막아 주십시오, 대통령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노벨 평화상도 한층 가까와 지십니다. &#8221;</p>
<p>잘 아는 대로 탈북민에 대한 그녀의 걱정과 성원, 그리고 후원은 진심이다.  지난 7월  17일  오전 버겐카운티  클로스터 헤링턴 에브뉴와 니커보코 로드 교차로 소 공원에 탈북 과정 중 희생된 1만여 명의 탈북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마침내 건립 됐다.  이 프로젝트는 해외 최초로 진행된 탈북자 추모비 사업으로, 그 의미와 상징성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br />
이 추모비는 단지 과거를 기리는 상징을 넘어, 현재도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건 여정을 이어가는 수많은 탈북자들, 그리고 북한 내부에서 고통 받는 2천5백만 동포의 인권 회복과 국제사회의 각성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다.</p>
<p>마 총재에 따르면 현재  약 30만~40만 명의 탈북자가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에서 신분을 숨긴 채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단다. 반면, 대한민국에 입국해 공식적인 신분을 회복하고 정착한 탈북자, 새터민은 약 3만5천 명 정도.  인권 단체와 주요 언론의 보고서에는 자유를 찾아 탈북을 시도했으나 중국, 몽골,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 제3국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망했거나 강제 북송 후 처형된 사례는 약 1만 건에 달한다고 기록 되어 있단다. 이번 추모비는 바로 이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탈북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기억하기 위한 상징이다.</p>
<p>이 기념비 건립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후원이 컸다.  마박사는 트럼프 대통령과도 몇 차례 만나 격려를 받는 등 인연이 깊은데 트럼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던 지난 2021년에도 그의 마라라고 별장에 초청을 받아 두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마박사는  이 기념비 제작 프로젝트도 트럼프 대통령의 격려와 지지에 큰 힘을 받아 추진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추모비는 탈북민 인권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각별한 당부와 탈북민들의 염원과 눈물로 제작됐다”며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기에 이 프로젝트가 이루어져 그 의미는 이루말 할 수 없다”고 마 박사는 말했었다.</p>
<p>추모비 건립 프로젝트에는 많은 비용이 투입되었는데 이 모든 비용은 국제 북한 인권 연맹 단체와 마박사 본인의 사비를 함께 출연했다. 추모비는 한국에서 제작되어  뉴욕 항만 세관 통관 절차를 밟았다.</p>
<p>마박사는 제막식에서 “반북 극좌 성향의 단체와 일부 개인의 방해와 음해, 그리고 민원 제기로 인해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에 불구하고 국제 북한 인권 연맹의 핵심 멤버들과 뉴욕·뉴저지의 구국동지회, 지역 한인회 관계자, 지역 공무원, 미국인 유명 정치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이 일이 가능했다”고 소회를 밝혔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562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5/12/KakaoTalk_20250718_082906937_06-scaled-1.jpg" alt="" width="1920" height="2560" /></p>
<p>그녀가 참전용사 유해 발굴에 진심을 쏟고 있는 것은 자신이 군 출신 이라는 이유 말고도 개인적으로는 시아버지가 국군 참전 용사이기 때문이다.</p>
<p>&#8221; 대한민국 국군의  많은 6.25 참전 용사  유해가 아직 북에 있습니다.  포로가 된 뒤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시아버님의 아픔을 절감하고 있기에  트럼프 대통령님을 만나 악수하게되면 , 그분의 손을 꼭 잡고 대한민국 6.25참전용사들과, 포로들의 유해, 그리고 미군 청년들의 유해와 UN 참전 용사들의 유해를 꼭 자국의 고향 (대한민국과 미국, UN 참전국)으로 올 수있게 북한 김정은에게 강요해 달라고, 노력 해달라고 꼭 말씀드릴 것 입니다.&#8221;</p>
<p>마총재는  활동하는 한인들 중에 자기만큼 트럼프 대통령을 많이 만나고 소통하는 사람은 또 없을거라며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 하다.  트럼프 1기 때 마라라고에 초대받아  격려를 받았고  2기 때 트럼프 타워에 초대 받았었고 취임식에도 초대 받아 밖이 아닌 안에서 행사에 참여했다.</p>
<p>그리고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최자가 되는 이스라엘 행사에 초대 받아 대통령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게 된다.. .</p>
<p>“지역사회와 미국 국민을 위해 봉사해 주신 귀하의 지속적인 헌신에 감사드린다.  귀하께서는 미국과 미국 국민을 위한 더 강한 미래를 위해 계속 봉사하고 헌신해 줄 것으로 믿는다.”</p>
<p>마영애 총재가 지난 2018년 12월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평생 공로상’과 상패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그녀의 활동이 강한 미국을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 유난히 눈에 뜨인다.</p>
<p>마영애 총재는 탈북 난민인권협회 미주대표, 미주탈북자선교회 대표 뉴욕 구국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자유,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투쟁해 오고 있다.</p>
<p>마영애 박사는 도미 후  2004년  종교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1천8백회 이상의 찬양, 간증 집회를 열고 탈북 인권 선교사로활동 해 왔다. 동시에 사업가로도 성공적인 길을 걸었는데 (주)마스 코리안 소세지를 설립하여 “평양순대” 라는 브랜드를 런칭, 미주 약 30여개의 거래처 에 납품하여 탄탄한 강소기업으로 우뚝 서 탈북민 자립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다.</p>
<p>2007년에는 ‘미주 탈북자 선교회’를, 2015년에는 ‘국제 탈북민 인권연대’를 설립했고, 기업 수익 일부를 탈북자 구출과 한인 2세 장학 사업에 꾸준히 사용해 왔다.<br />
그 결실로 2024년 8월 14일,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비영리단체  지위를 공식 승인받아 ‘국제 북한 인권 연맹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으며, 도전한국인 운동본부 에서 제정한 국제 인권상을 비롯해 탈북민 최초로 한미동맹 70주년 여성포럼 연맹 단체에서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p>
<p>인민군 예술단으로 9년여 복무한 그녀는 지금도 북한에서의 군 생활을 자신 인생의 변곡점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한다.</p>
<p>마영애씨와 기자의 인연은 묘하다.   1990년대 중반 기자는 전방 철책 사단의 대북 방송 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 마영애 씨도 북쪽 철책 사단에 한시적으로 시찰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전연 지대에서 근무하는 인민군 하전사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 밤, 추위 속에서 전연 지대 경계근무를 서느라 오빠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요. 잠깐이지만 옥희(기자의 당시 가명)의 목소리와 함께 하며 고생과 시름 잊으시길 바래요.” 로 시작되는 내 방송을 분명히 들었다고 우긴다.</p>
<p>그러면서 자신의 후일 탈북에 내 책임도 일정 부분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군 생황의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서 불굴의 투지와 난관을 극복하는 용기를 준 터닝포인트 였다는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562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5/12/KakaoTalk_20251202_171710027-scaled.jpg" alt="" width="2560" height="1592" /></p>
<p>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연도 마찬가지이다. 2004년 그녀는 공화당 의원들의 초청으로 미국 의회에 북한의 인권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서울서 만나 재혼한 탈북민 출신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다. 그 무렵은  북한과의 관계를 신경 많이 쓰던 한국의 진보 정권 시절로 북한의 인권 상황을 규탄하는 미 의회 보수계 청문회에 참석차 떠나는 그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극력 만류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녀는 북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 가지 쓰고 오게 됐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질리 없었고 그녀는 동행한 정부요원과 대판 싸운 끝에 여권을 집어던지고 미국에 주저 앉았다.</p>
<p>“그렇게 되고 나니 하릴 없는 무국적자에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내 여권이 말소돼 신분을 증명 할 수 없으니 미국 내에서 무슨 수속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나를 초청했던 공화당 의원들도 너무나 안타가워했죠. ”</p>
<p>그 뒤로 그녀는 뉴욕 플러싱에서 시작해 버지니아 LA등 미 전역을 남편과 함께 떠돌며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 신학교를 다녔던 것이 인생의 나침반이 됐다고 그녀는 말한다.</p>
<p>그러던 사이 한국엔 보수 정권이 들어서 마침내 그녀의 신분 문제가 해결이 됐다. 이명박 정부 때는 직권으로 대한민국 여권을 재발급 받았고 박근혜 정권땐 미국 내에서의 신분 문제가 완전 해결 됐단다.</p>
<p>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매일 같이 유엔 북한 대표부 앞에서 1인 시위하며 최고 존엄을 타도하라고 외쳤던 ‘독종, 마영애’.</p>
<p>그녀가 순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LA에서부터 시작해 연원이 있다. 처음부터 호평을 받아 비즈니스가 잘됐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정통 평양식으로 멥쌀과 찹쌀을 넣어 순대를 만들었는데 맛은 있다면서도 사람들이 사먹지는 않았다고 한다.</p>
<p>“그러다가 동부 쪽으로 다시 와 사업을 확장하면서 서울식으로 당면을 넣어봤더니 이게 먹힌겁네다.”</p>
<p>그렇다고해서 무조건 당면만 넣었다고 호평 받은 건 아니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해주지 않은 네 가지 비밀 레시피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뉴욕 뉴저지에서 그녀의 순대를 안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전설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하나, 그녀의 사업 번창의 비밀.</p>
<p>“우리 마 사장님 같은 사람 또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30년 살면서 식당일 등 안해 본 일 없는데 이런 사장님 못봤어요.”</p>
<p>한남 마트 순대 매장에서 수 년째 일하고 있는 한 이모의 증언이다.  “우리 사장님이요, 단 한번도 급여 날짜 어긴 적 없고 월급만 딸랑 준적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순대집에서는 파는 것 보다 사장님이 전화해서 누구 오면  순대 좀 넉넉히 썰어주라고 한게 더 많습니다.”</p>
<p>퍼주면 퍼줄수록 하나님이 더 주신다는 마 사장의 얘기는 우리는 실천을 못할 뿐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p>
<p>특히 탈북민들이야 우리가 상상도 못한 고생을 했겠지만 그중에서도 미국 까지 와서도 계속된 그녀의 고생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누구보다도 크다. 특히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 대해선 인종도 국적도 정치성향도 불문인 것이 그녀의 철칙이다.</p>
<p>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곤 한다. 특히 같은 탈북민들이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그럴 때면 더 서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다 같이 돕고 살아야죠’ 하며 활짝 웃는다.</p>
<p>손도 큰 그녀는 이제는 탈북민들을 돕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국 내 우리 동포뿐만 아니라 타민족 가운데서도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이 마음 놓고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학재단 설립을 준비 하고 있다.</p>
<p>“아무것도 없던 무국적자, 신분도 안정적이지 않았던 내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엄지척 하는 ‘노스코리안 영애마, 넘버원 비즈니스 우먼’이 되기까지는 미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겁니다. 이제는 내가 미국으로 받은 은혜를 사회에 환원할 때입니다.”</p>
<p>&#8221; 탈북자 중국 소환 문제와 6.25참전  국군 포로, 미군 유해 송환문제는 놓칠수 가 없는 겁니다. 안기자님 정말 기사에 관심을 넣어주시리요. 영애 마 언니가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8221;  철책선 언니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p>
<p>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할  편지도 작성 중에 있단다.  행사장에서의 독대 시간도 갖게 되도록 작업 중이란다.</p>
<p>그녀에 의하면 이번 갈라에는 미국 내에서도 보수계  인권 운동을 하는  박사들 중심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자기도 이번에는 목청 큰 거리의 탈북민 활동가 보다는 인정받는 ‘마영애 박사‘로 초대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엔 통일 조국을 꿈꾸며  화려하게 태극기가 디자인 된  한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할거라고…</p>
<p>그녀의 건투를 독자들과 함께 진심으로 빈다.   <strong>(안지영기자)</strong></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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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교황청 첫 한국인 장관 유흥식 추기경 방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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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지영 기자]]></dc:creator>
		<pubDate>Thu, 03 Jul 2025 16:10:35 +0000</pubDate>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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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8220;레오 14세 교황, 남북 위해 큰일 하실 것&#8221; &#8220;콘클라베 멋있는 모임…아주 재미있었다&#8221; &#8220;레오 14세 교황님에게 그동안 프란치스코 교황과 북한 관계에 관해 설명해 드렸더니 잘 들으셨어요. 잘 들으셨다고 한 건 마음에 새기셨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8221; 한국인 최초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3일 서울 광진구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기자들과 만나 교황 선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8220;레오 14세 교황, 남북 위해 큰일 하실 것&#8221;</h4>
<h4>&#8220;콘클라베 멋있는 모임…아주 재미있었다&#8221;</h4>
<p>&#8220;레오 14세 교황님에게 그동안 프란치스코 교황과 북한 관계에 관해 설명해 드렸더니 잘 들으셨어요. 잘 들으셨다고 한 건 마음에 새기셨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8221;</p>
<p>한국인 최초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3일 서울 광진구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기자들과 만나 교황 선출 과정과 교황 레오 14세와의 인연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p>
<p>유 추기경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한국인 추기경으로는 고(故)김수환 추기경 이후 약 47년 만으로, 유 추기경은 유력한 교황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p>
<p>유 추기경은 &#8220;이번 콘클라베는 굉장히 재미있고 거룩하고 단순하고 웃음도 많고 아주 정말 멋있는 그런 모임이었다&#8221;며 &#8220;기대하는 분의 표가 조금 늘어나면 놀라기도 하고 서로 웃으면서 아주 재미있었다&#8221;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br />
유 추기경은 새로 뽑힌 교황 레오 14세와 인연도 소개했다.</p>
<p>그는 &#8220;교황님은 저보다 1년 늦게 주교부 장관으로 오셨는데 주교 직무와 사제 직무는 굉장히 관련이 있어서 한달에 두번 정기회의 때 만날 뿐만 아니라 통화도 자주하면서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교황님이 한국에도 오셨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말하신 적 있다&#8221;며 &#8220;교황님은 굉장히 조용하고 대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으시는 분&#8221;이라고 했다.</p>
<p>이어 &#8220;프란치스코 교황과 레오 교황님은 성격이 굉장히 다르다&#8221;라면서 &#8220;프란치스코 교황은 굉장히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강하신 분이었는데, 레오 교황님은 좀 조용하시면서 특별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으신다&#8221;라고 말했다.</p>
<p>레오 14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 두 사람 모두 북한과 한반도 평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p>
<p>유 추기경은 &#8220;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남북이 같은 민족인데 1950년 전쟁 이후 서로 보지도 못하고 지내는 이런 고통이 세상에 어디있느냐고 이야기 하셨다&#8221;며 &#8220;북한에 가서 이런 어려움을 덜어주는데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8221;고 전했다.</p>
<p>이어 &#8220;현재 레오 교황님도 이를 마음에 새기고 계시다. 레오 14세 교황님이 선출됐을 때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8216;아, 이 분이 우리나라, 남과 북을 위해 큰 일을 하실 수 있겠다&#8217;는 생각이었다&#8221;며 &#8220;교황님이 조용히 계시지만 충분히 이전 교황님처럼 저와 같이 이 같은 당신의 업무를 충분히 하실 거라고 믿는다&#8221;고 말했다.</p>
<p>그러면서 &#8220;그래서 이재명 대통령께 가능하면 올해 중에 교황청을 방문하셔서 교황을 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드렸다&#8221;며 &#8220;오는 2027년 서울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리고, 교황님이 임기 중에 그런 면에서 북미 관계나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역할을 하실 거란 생각이 든다&#8221;라고 밝혔다.</p>
<p>또 &#8220;이재명 대통령께서 후보자 시절에 교황이 선출됐을 교황님께 편지를 하나 드렸고, 교황이 됐을 때도 서신을 드렸다&#8221;며 &#8220;한국과 교황청이 연계가 되어서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에 대해 얘기했다&#8221;고 말했다.</p>
<p>2027년 레오 14세 교황의 방한이 예정된 서울 세계 청년대회는 전 세계 청년들이 모여 신앙과 문화를 교류하는 대규모 국제 행사다. 이 대회에 전 세계에서 약 100만 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p>
<p>유 추기경은 북한 청년 초청 가능성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p>
<p>그는 &#8220;세계 청년대회 때 우리 모두 북한에서 청년들이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대방(북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하지 상대방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불쑥불쑥 얘기하는 건 결코 올바른 협상 태도가 아니다&#8221;라며 &#8220;지금 이제 핫라인을 열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들어오고 하면서 일도 이뤄지는 거지 그냥 내 주장만 내세워서 절대로 안 된다&#8221;라고 강조했다.</p>
<p>올해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이 된지 4년 차가 된 유 추기경의 임기는 1년여년 남았다.</p>
<p>그는 &#8220;세상 모든 신부님이 기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8221;라며 &#8220;저한테는 세상에 어느 신부님도 슬픈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매우 크게 들려서 이걸 항상 마음 깊이 새기고 어디 가서도 웃는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한다&#8221;고 말했다.</p>
<p>교황 레오 14세의 새 추기경 임명 가능성에 대해서는 &#8220;올해 말쯤이나 가을쯤 적당한 때 분명히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리라 생각한다&#8221;라고 했다. (본보 제휴 뉴시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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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20;전주 비빔밥의 진짜 원산지 재료를 만나보세요&#822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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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지영 기자]]></dc:creator>
		<pubDate>Wed, 11 Oct 2023 12:31:26 +0000</pubDate>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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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전라북도,  H마트서 농수산식품 판촉…공격 마케팅 박차 서부지역 10월11~22일 12일간  ,  12월에는 뉴욕 일원 동부 지역서  김관영 지사,  H마트 권일연 회장과 전북 농식품 수출 논의 전라북도와 전북 바이오 융합산업 진흥원은  오늘, 10월 11일 부터 올해 말까지 미국 전역 H마트 매장에서 &#8216;우리도 농수산식품 수출 확대를 위한 홍보·판촉 행사&#8217;를 펼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5><strong>전라북도,  H마트서 농수산식품 판촉…공격 마케팅 박차</strong></h5>
<h5><strong> 서부지역 </strong><strong>10월11~22일 12일간  ,  12월에는 뉴욕 일원 동부 지역서 </strong></h5>
<h5><strong> 김관영 지사,  H마트 권일연 회장과 전북 농식품 수출 논의</strong></h5>
<p>전라북도와 전북 바이오 융합산업 진흥원은  오늘, 10월 11일 부터 올해 말까지 미국 전역 H마트 매장에서 &#8216;우리도 농수산식품 수출 확대를 위한 홍보·판촉 행사&#8217;를 펼친다고 밝혔다.</p>
<p>이는 지난해 김관영 전북지사의 미국 방문 시 미 최대 한인 유통기업인  H 마트와  체결했던 전북 농수산식품 수출 확대를 위한 업무협약에 대한 후속조치로, 올해 총 4회의 판촉행사 진행이 예정된 가운데, 지난 7월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로 진행하는 미국 판촉행사다.</p>
<p>이번 행사는  우선적으로  미국 내 최대 한인식품  매장을 운영 중인 H마트의  서부지역 10개 매장에서, 도내 44개 업체의 185개 제품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게 되는데 대표적 상품으로는 김치, 젓갈, 김·다시마, 전통장류,  나물류 등  비빔밥 고명,  박대, 추어탕, 떡, 선식류, 기능식품, HMR간편식, 약과 등이 이번 판촉행사를 위해 지난 9월에   30 만달러 규모로 선적 수출됐다.</p>
<p>또한  10월 미서부 H 마트에 이어 12월에는 뉴욕을 중심으로한 동부지역 H마트 매장에서 대대적  판촉행사를 진행해 미국 시장개척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p>
<p>이번 판촉행사는 주력 수출시장의 권역별 거점 유통망을 활성화 해 미국 등 주요 수출국 현지 소비자와 지속적 교류 확대를 통한 전북 도내 농식품 수출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으로 전북도가 올해부터 추진하는 ‘해외 거점 유통망 활용 농식품 수출지원사업’의 일환이다.</p>
<p>맨위 사진은 민선 8기 취임 후 첫 해외 세일즈에 나선 김관영 전북지사가 지난해 9월   한인행사인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 및 농수산엑스포 개막식 참석해 테이프커팅 후 전북 농수산물 부스를 찾아 참가업체를 격려하며 전라북도 홍보활동을 갖고 있는 모습</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228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10/NISI20220927_0001094516_web.jpg" alt="" width="720" height="396" /></p>
<p>위 사진은 김관영 전북지사가 지난해 9월 26일(미국 현지시간) 미국 최대 한국 농식품 유통체인 H 마트 서부지역본부를 방문해 이상철 H 마트 서부지역 총괄부사장과 전북 농수산식품 수출 확대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p>
<p>한편  다시 미국을 방문 중인 김관영 전라북도지사는 오는 13일 판촉행사 현장을 찾아 H마트 행사장을 찾은 내방객들을 대상으로 전북 농식품을 소개하는 홍보 활동을 직접 펼칠 예정이며, 이날 전라북도 농수산식품의 미국 수출 확대를 위해 H마트 권일연 회장과 전략적 협력 관계 구축을 위한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권회장은 10일 LA로 향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229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10/KakaoTalk_20231011_084207131_02kj.jpg" alt="" width="1284" height="876" /></p>
<p>&lt;지난번 티타임 때의 권일연 회장과 기자.  앞에 나서기를 극구 사양하는  권회장은 최근 40년 전 자신의 H 마트 출발지 였던  퀸즈 우드사이드 &#8216;한아름&#8217;을 새롭게 단장,  &#8216;H 마트 프레쉬&#8217;로 재개장 해,  PIX 11 TV 뉴욕이며  레딧 닷 컴 등 지역 미국언론에 &#8216;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무척 뜻깊은 일&#8217;이라고 소개 되기도 했지만 동포언론과의 더 이상의 인터뷰는 또 사양했다. &gt;</p>
<p>한편 김관영 전북  지사는 “현재 미국 내 한류 열풍으로 한국 농수산식품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이번 시식·홍보 활동을 통해 전북 농식품에 대한 인지도를 더욱 높이는데 노력하겠다”며 “앞으로도 농수산식품의 수출 확대를 위해 더 공격적으로 해외 홍보·판촉행사를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기사 본문,  제휴사 뉴스원 제공)</p>
<p>안지영기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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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커피 한잔과   H 마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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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지영 기자]]></dc:creator>
		<pubDate>Thu, 13 Jul 2023 19:58:20 +0000</pubDate>
				<category><![CDATA[명사칼럼]]></category>
		<category><![CDATA[여성생활]]></category>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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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영화 &#8216;에치마트에서 울다&#8217;속 의 &#8216;커피 한잔&#8217;을 기다리며&#8230;  안지영기자 &#8216;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8230; 그대 오기를 기다려 봐도&#8230;&#8217;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에서 대 히트했다는 펄 시스터즈의 &#8216;커피한잔&#8217;이다. 이 노래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올드타이머들이 의외로 많다. 이 노래 &#8216;커피한잔&#8217; 하면 지금은 덴버리에 가 있는  닥터 주,  엘리스 언니가  생각난다.  류마티즘 최고 전문의인 엘리스 언니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5><strong>영화 &#8216;에치마트에서 울다&#8217;속 의 &#8216;커피 한잔&#8217;을 기다리며&#8230; </strong></h5>
<p><strong>안지영기자</strong></p>
<p>&#8216;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8230; 그대 오기를 기다려 봐도&#8230;&#8217;<br />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에서 대 히트했다는 펄 시스터즈의 &#8216;커피한잔&#8217;이다. 이 노래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올드타이머들이 의외로 많다.</p>
<p>이 노래 &#8216;커피한잔&#8217; 하면 지금은 덴버리에 가 있는  닥터 주,  엘리스 언니가  생각난다.  류마티즘 최고 전문의인 엘리스 언니는 재주도 많다. 피아노를 연주자 급으로 치는가 하면 노래도 잘한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작은 언니가 또래 친구였던 조영남 윤형주 같은 가수들을 집에 불러와 자신에게 긴 드레스를 입혀놓고 자랑스레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데 그 노래가 바로 커피한잔 이라는 얘기를 몇번이나 하면서  흥얼거리곤 했었다.  그런날이면 남편은 돌아오는 차속에서 계속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p>
<p>이 &#8216;커피한잔&#8217; 노래가 한국계 미국 뮤지션이 중심이 돼서 만드는 영화의 주제곡으로 등장하게 된단다.<br />
며칠 전 기자로서는 엄청난 인물일 수 밖에 없는 한아름, 에치 마트의 권일연 회장을 만났는데 그에게 들은 얘기다.<br />
한국계 뮤지션 미셀 자우너가  쓴 베스트셀러 ‘H마트에서 울다’가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는 것이다.<br />
&#8220;가만히 있어도, 묵묵히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처럼 우리 에치마트 광고 선전을 해줍디다.&#8221; 권회장은 이 소식을 이렇게 전하면서 껄껄 웃었다. 커피 한잔의 기다림은 그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다.</p>
<p>‘H마트에서 울다’는 유명 인디 팝 밴드인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한국계 미셸 자우너의 사연을 담은 에세이다.</p>
<p>자우너는 지난달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누가 미스 브렉퍼스트를 연기하길 원하는가”라는 게시물을 올리며 자신의 책이 영화로 제작되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18~25세 한인 여성 배우를 캐스팅 중이라고 밝히면서 “자기소개 영상과 거주지를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이메일 주소도 &#8216;에치마트 오픈 콜 케스팅&#8217;이다. (hmartopencallcasting@gmail.com) 영화는 ‘더 화이트 로투스’의 이든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윌 샤프가 감독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p>
<p>에세이집 ‘H마트에서 울다’는 한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우너가 25살 때 엄마를 갑작스럽게 암으로 떠나보낸 뒤 H마트와 한국음식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쓴 글이다.<br />
지난 2021년 4월 책으로 출판되자마자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같은 해 뉴욕타임스의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67주간 이나 머물렀다.</p>
<p>이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8220;엄마를 암으로 떠나보낸 뒤 에치 마트에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글을 쓴다'&#8221; 하고는 “전화해서 우리가 예전에 에치 마트에서 사 먹었던 그 맛있던 김이 어느 브랜드냐고 물어볼 사람이 없다면, 내가 아직도 한국인일까?”라고 다짜고짜 묻는다.</p>
<p>이 책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확인하는 과정, 세상을 떠난 엄마를 기억하려는 노력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br />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디아스포라적 삶이 현기증을 불러 일으킨다”고 평가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대부분의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는 얘기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61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7/941661097532477.jpg" alt="" width="970" height="547" />  H마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우너의 혼란스러웠던 성장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와 함께 한 유년 시절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어머니는 본인뿐만 아니라 딸의 외모에도 집착했고, 자녀의 주체적인 삶을 독려했던 미국의 부모들과 달리 자우너의 장래에 집착했다. 딸도 엄마도 때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날카로운 말을 내뱉는다. 미화되지 않은 보통의 날것 그대로인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p>
<p>록밴드를 하겠다는 딸에게 어머니는 “가난한 예술가”를 하겠다는 것이냐며 극력 반대한다. 보통의 자녀들처럼, 자우너도 성인이 되자 지루한 고향과 갑갑한 부모를 떠난다. 하지만 독립 이후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던 화려한 미래는 어디에도 보장돼 있지 않았다. 그의 밴드는 생각보다 유명해지지 않았고, 어느덧 스물다섯이 된다. 도시의 생활에 지쳐갈 때쯤 어머니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고향으로 향한다. 모녀는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이제야 서로를 이해할 여유를 가진다. 에치마트에서 구입한 식재료로 만든  한국음식이 그 중요한 매개다.</p>
<p>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자우너는 미국에 온 한국의 이모와 사촌 오빠에게 대접할 된장찌개를 끓인다. 유튜브에서  끓이는 법을 검색한다. 어머니의 샌들을 신고 H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고, 평생 어머니가 그를 위해 밥을 했을 솥에 밥을 지었다. 그날 이후 그는 종종 유튜브에서 한국 음식을 검색해 요리한다. 그녀의 책에는 떡국, 동치미, 김, 미역국, 만둣국, 삼겹살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이 나열돼 있어 반갑다.</p>
<p>음식을 통해 그렇게 어머니의 온기는 다시 딸의 곁에 남는다. 물론 자우너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자우너는 어머니에게 온 편지 한 통을 집에서 발견한다. 편지에는 그림을 배우며 즐거워했던,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있다. 딸은 어머니가 떠난 뒤에야 자신이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야 하는 처지”가 됐음을 깨닫는다.</p>
<p>어느덧 자우너의 밴드는 여러 나라에 투어 공연을 갈 만큼 유명해졌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맛본 성공이다. 실제 그녀는 그래미 후보에도 올랐고 빌보드에도 소개 됐다. 성대한 한국 공연을 마친 어느 날, 그는 어머니 이정미씨가 그토록 좋아하던 노래, 틈나면 흥얼거리던 그 노래 ‘커피 한잔’을 떠올린다. 노래방 반주에 맞춰 ‘커피 한잔’을 부르며, 자우너는 그렇게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남겨진 또 하나의 비밀을 해독해 나간다. 기다림의 미학을 역설적으로 담은 그 커피한잔이 바로 자신의 영화 주제곡이다.</p>
<p>영화의 스토리가 어떻게 각색 되어질런지는 아직 모르지만 문득, 하필이면 왜 음식을 통해서 엄마를 추억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br />
음식은 단순히 생명 유지를 위한 먹거리만은 아니다.<br />
나만의 취향과 선호를 나타내고, 우리 가족만의 밥상문화로 우리식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한다. 어떤 냄새만 맡아도 인상적인 한 순간의 식탁과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게 한다. “밥 한번 먹자”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고,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나라마다 다른 식탁 매너로 예절과 교양까지도 표현한다.<br />
식 문화라고 표현할 정도로 음식이야말로 문화의 핵심이다.<br />
한국의 음악과 춤, 영화와 드라마, 휴대폰과 자동차가 세계에서 인정받은 가운데, 다음은  한국의  음식문화 차례가 아닌가 싶다.</p>
<p>한국의 식문화를 이곳 미국땅에 알리고 있는 일등 공신이 바로 H 마트 아닌가. 82년 우드사이드 작은 골목에서 시작한 한아름은 이제 미전역에 90여개의 지점을 운영 중이다. 연매출은 20억달러로 중남미, 아프리카 소국의 연 수출액을 웃돈다.</p>
<p>권회장은 자신들  에치마트 사람들로서는 기특하고 고마운 미셀 자우너를  지 지난해 자랑스런 한국인상 수상식에서 잠깐 스쳤을 뿐  에세이집 출간에도 영화에도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고, 않고 있다고 말했다.</p>
<p>부지런하면 먹고는 살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 틀린 말이 아니었다. 40년 이민 동기로 형 아우로 지낸다는 남편 안동일 기자 덕에 어쩌다 보니 이날 처음 만나 식사를 함께 한 권일연 회장은 자신감 넘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근검하면서도 쓸때는 쓸 줄 아는 그런 부자였다. 진득한 기다림은 찬스를 불러오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공은 물들어 올때 열심히 노를 젓는다고 했다.</p>
<p>그는 결코 앞에 나서는 법이 없다. 지난해 리틀페리 매장을 오픈했을 때 작업복에 목장갑을 끼고 스피커 설치를 하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야 했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다시금 놀랬다고 했었다. 그날도 커팅 테이프는 아들인 브라이언 사장이 했단다.<br />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감사하고 감탄하라고 만드셨다는데 권회장과 에치마트는 미국에 온 순간부터 나를 늘 감탄하게 만들었다. 첫째 그 규모 때문이었고, 둘째 변하지 않는 종업원들 때문이었다. 좋은 기업은 종업원이 만드는 법이다.</p>
<p>자우너의 경우 십수 년이 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의 음식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을 때,  H마트에만 가면 운다고 했는데&#8230; 큼직한 통에 담긴 깐 마늘은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데, 한국 음식 요리에 마늘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그곳 뿐임을 알게 됐다는데&#8230;  그래서  H마트는 한국계 미국인에게 늘 기다리게 되는 ‘고향의 맛’을 찾게 해주는 보물창고다.<br />
H마트에서 장을 보고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자우너는 이곳에서 “모두가 기다리던 고향의 한 조각을, 우리 자신의 한 조각을 찾고 있다”는 걸 깨닫는단다.</p>
<p>나는 이날 권회장과 &#8216;밥&#8217;을 함께 먹고 이어진 티타임을 함께 하면서 그의 &#8216;커피한잔&#8217;은 진득한 기다림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p>
<p>권회장과 만나고 돌아온 오후, 기다리던 엘리스 언니의 전화가 덴버리에서 왔다. 엘리스도 이제는 기다림에 익숙해 졌단다. 오히려 그곳에서 기다리니 &#8220;스트레스 프리&#8221;라고 했다.<br />
엘리스의 구명운동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권회장과 함께 엘리스의 커피한잔을 듣고 싶다.<br />
아무리 봐도 기자와 기자의 엄마 얘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 한  영화 &#8216;에치마트에서 울다&#8217;의  개봉이 몹씨도 기다려 진다.  (7/13 지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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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특별연재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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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05 Jul 2023 13:00:55 +0000</pubDate>
				<category><![CDATA[여성생활]]></category>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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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그의 묘비는 많은 것을 웅변하는 큰 자료 유상규(1897~1936)는 경성의전 재학 중 3.1운동 주동자로 수배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도산의 비서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부자지간과 다름없는 관계로 맺어졌다. 몇년 후 상해 임정을 떠나는 도산은 명석하고 성실한 유상규에게 귀국하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trong>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strong></h4>
<h6><strong>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strong></h6>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38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1.jpg" alt="" width="480" height="320" /></p>
<p><strong>그의 묘비는 많은 것을 웅변하는 큰 자료</strong></p>
<p>유상규(1897~1936)는 경성의전 재학 중 3.1운동 주동자로 수배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도산의 비서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부자지간과 다름없는 관계로 맺어졌다. 몇년 후 상해 임정을 떠나는 도산은 명석하고 성실한 유상규에게 귀국하여 의학공부를 계속해 민족을 위해 일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유상규는 우여곡절 끝에 귀국해 경성의전에 복학했고 동기보다 7년 늦게 졸업했다. 그후 경성제대부속병원의 외과의사가 됐는데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활동에 열심인 한편 의학을 통한 민족계몽에 헌신하다가 세균 감염으로 별세해 40세의 나이에 망우리로 왔다.</p>
<p>도산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대부속병원에서 서거해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고향 평남 강서군에 선산이 있었지만, 장지가 망우리로 정해진 것은 이태전인 1936년에 먼저 이곳에 들어온 제자 유상규 옆에 묻히기를 유언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잡지 《삼천리》 「1938년 5월호, 도산의 유언」, 선우훈의 『민족의 수난』(1948), 등 복수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br />
유상규에게는 33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옹섭 인데 당시에도 아이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옹(翁)’자를 넣은 것은 도산의 다른 아호 ‘산옹(山翁)’에서 따온 것이었다. 3살때 부친을 여의고 유복자처럼 컸지만 부친을 닮아 영특한 수재였던 옹섭은 경기중학 서울공대를 거쳐 공군에 학사 장교로 입대해 장성인 준장에 까지 오른 뒤 예편 했다.</p>
<p>효심 또한 강한 그는 경기중학 시절부터 도산 선생의 간곡한 뜻으로 부친이 그분과 나란히 뭍혀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면서 틈만나면 부친과 도산선생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곤 했다. (아래사진)<br />
그런데 73년 서울시가 강남을 개발하면서 청담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도산로를 건설하면서 도산의 묘만 달랑 도산공원으로 옮겼다. 초급 장교 였던 유옹섭으로서는 너무도 섭섭한 일 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몇몇 언론이 이를 보도하고 그의 처지를 옹호했지만 도산공원 측은 두분 모두를 모실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고 당국은 정 그러면 유상규지사를 국립묘지로 옮길 것을 제시 했다. 히지만 유옹섭은 도산의 엣 비석을 가묘 앞에 남겨 두기만 하면 된다고 대답했고 일은 그렇게 처리됐다. 그래서 도산의 가묘는 아직 유지사 묘소 옆에 있다.</p>
<p>자유기고가 김명식 (62년생, 중대 일문과 졸업)이 유옹섭에게 질문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랬더니 유옹섭은 망우리 이곳에는 부친이 존경하던 선배 박희도선생의 묘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김명식의 당시 발표된 글에는 그얘기와 박희도가 정훈학교에서 강의 했다는 사실 까지만 간략히 나왔지만 그 글의 발표 이후 현경이 부랴부랴 유옹섭에게 연락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br />
옹섭은 58년 여름, 서울공대 재학 시절 박희도의 묘소에 비석이 건립되는 과정을 목격 했던 것이다. 처음엔 위관급 장교가 인부들을 지휘하면서 비석을 세우기 전 기단을 설치 하는 광경을 보았기에 그 장교에게 영문을 물었더니 그 박희도 선생의 비석을 건립하고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단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7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7/200802110500033_5.jpg" alt="" width="250" height="320" /></p>
<p>그때까지 옹섭은 그 묘소가 박희도의 묘소인 줄 몰랐다. 묘소앞에 낡은 판자로 된 표식만 있었기에 무심히 지나쳤다는 것이다. 박희도라면 그 이름을 어머니에게서 자주 들었고 아버지의 유품 사진에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친일 변절자로 알고 있었는데 현역 군인들이 나서서 비석을 건립하는게 특이 하게 여겨져 더 관심을 가졌고 며칠 뒤 거행된 건립제 때는 학교를 빼먹으면서 까지 직접 참석했다.<br />
제막제 때 묘소에는 별단 장군도 있었고 영관급 위관급 장교들이 먾았다는 기억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서 박희도 선생이 49년 부터 공산침략이 있을 가능성을 대비해 군인들의 정신 교육에 매진 해야 한다면서 정훈학교 설립을 강하게 주장 했고, 불철주야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를 똑똑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3.1운동의 역사를 다시 보고 아버지의 유품을 다시 봤더니 박희도 선생이야 말로 다시 평가해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고 했다.<br />
박희도와 유상규, 유옹균과 박현경 , 망우리를 휘감아 감싸는 엄청난 우연이고 신기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유상규 지사 애기는 3.1운동을 다루면서 다시 나온다.<br />
그랬다. 친일의 불명예 때문에 그 누구도 고인에 대해 비석 하나 제대로 세워주지 않았지만 육군정훈학교는 그의 사후 7년 만에 한국 기독교계의 큰 인물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이었고 말년에는 묵묵히 백의종군하며 하릴 없는 교육자로 생을 마친 인물이었다고 그를 추념하며 이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 비석이야 말로 그의 진정한 이름이 아닐까.<br />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관뚜껑 못을 박을 때 나오게 돼 있다는 말이 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 성시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상가는 쓸쓸하다는 말도 있다. 박희도에 대한 평가는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p>
<p><strong>변절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 이대로 좋은가</strong></p>
<p>사실 박희도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 있어 33인에 대한 평가는 야속할 만큼 야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요 몇해전 TV 강의로 유명해진 한 역사강사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으며, 대부분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다’며 민족대표 33인을 적나라하게 비판해 논란이 일었다.<br />
결국 법정까지 간 이 논란의 진위와 명예훼손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그간 우리 국민들이 민족대표 33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 헤프닝이었고 할 수 있다.<br />
진보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한국 역사학계가 상당 기간 민족대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여왔던 것이 그 원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br />
3·1운동 70주년이 되던 1989년, 벌써 30여년 전 이기는 하다. 그때 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학회인 &#8216;역사학회&#8217;는 학회 명의로 33인을 ‘민족대표’가 아니라고 선언했었다. .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을 선택하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뒤 경찰에 자진해서 끌려감으로써 스스로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했다는 이유에서다.<br />
“ 33인의 한계는 첫째, 일본과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등 타협적이고 외세 의존적인 독립방법론에 입각해 있었고 둘째, 외세에 의존하면서도 국제정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셋째, 민중에 대해 심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성보, ‘3·1운동에서 33인은 ‘민족대표’가 아니다’, &lt;역사비평&gt; 1989년 겨울호). 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전반적 분위기가 그랬다.<br />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학계의 연구 흐름도 바뀌기는 했다. 독립 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민족대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도 점점 무뎌졌던 것이다. 그들이 엄혹한 일제의 무단통치하임에도 1919년 3월1일 서울만이 아니라 평양, 진남포, 선천, 의주,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사전에 주도한 행위에 대해 종전보다 더 높은 평가가 이뤄졌다.<br />
첫날 앞서 언급한 도시에 안주를 보태 모두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가 다음날부터 인근 지역에 확산되면서 3·1운동의 전국화에 토대를 놓았다는 점이 주목됏다. 3월1일의 조직적 만세시위가 전국적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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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0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26_83131.jpg" alt="" width="730" height="487" /></p>
<p>물론 1989년의 시점에도 ‘33인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3인이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전제는 깔려 있었다.<br />
하지만 그무렵에는 이들이 운동의 지도권을 포기한 결과 지도권이 민중에게 넘어간 사실에 더 주목했기에 33인 보다 유관순이 더 추앙되는 뷴위기 였다면 최근엔 33인의 민족대표가 만세시위를 기획했던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평가를 받이야 한다고 얘기되고 있다.<br />
이같은 흐름을 잘알고 있는 한 학자는 최근 33인 가운데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변절자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 했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p>
<p>&lt;지난 시절의 역사학계의 영향 탓인지 대중들도 민족대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민족대표가 대부분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오해가 자리잡고 있다. 33인 민족대표 중 &lt;친일인명사전&gt;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최린, 박희도, 정춘수 세 사람뿐이다. 민족대표 중에 친일파가 많다는 오해는 독립시위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기독교 지도자 박희도의 변절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주모자인 두 사람의 친일행위를 33인 민족대표 전체의 변절로 받아들인 것이다.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의 친일도 ‘민족대표=친일파’라는 오해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gt;<br />
그 조차도 박희도는 변절자의 대명사로 운위하고 있다. 최린 정춘수와는 달리 박희도는 아무런 친일의 댓가를 받은바 없는데도 그렇다. 최린은 총독부로 부터 세계 일주 여행의 후원을 받기도 했고 신문사 하나를 할양 받기도 했다. 정춘수는 조선 감리교의 총독격인 통리에 올라 전횡을 한바 있다.</p>
<p>‘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짐이다/ 살아서 흘린 피/ 살아서 남긴 욕/ 살아서 피운 꽃/ 모두 짐이다’ (남태식 ‘짐’).<br />
시인 남태식의 시처럼, 독립군이 흘린 피와 한용운이 피운 꽃뿐만 아니라 최린 정춘수등이 남긴 욕(辱) 또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다. 그런 짐은 비난하고 욕한다고 해서 가벼워지지 않는다.</p>
<p>친일파 연구로 평생을 바친 임종국(1929~1989)이야 말로 죽창을 꼬놔 쥔 반일의 선봉격인 인물이다. 그 조차도 자신의 저서 ‘실록 친일파’(돌베개, 1996) 중 ‘일제 말 친일군상의 실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br />
“…친일행위를 인신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은 분명히 시효가 지났다. 또한 이런 자에게 묻노니, 그대는 저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전비(前非)로써 현재의 지위를 위협당할 사람도 없겠거니와, 이로써 위협을 하려는 자 있다면, 그 비열함이야말로 침을 뱉어 마땅한 일일 것이다.”<br />
그는 또 같은 책 ‘민족대표 33인 중의 훼절’ 대목에서는 이렇게 밝혔다.<br />
“민족대표 33인 중 10%의 변절이 한국인에게 수치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 민족의 한 시대의 비극이 그들의 추문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친일자의 전부에 해당할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족대표 중의 4명( 박희도, 최린, 정춘수, 최남선. (최남선은 33인에 속하지 않으나 3·1독립선언서를 기초)만큼은 한 시대의 민족의 비극을 고뇌하면서 살다간, 변절을 했을망정 그래도 조선의 양심이었다. 이들 4명의 죄상보다는 식민정략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p>
<p>그렇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파 문제가 여전히 논란에 휩싸여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종교의 마음’ 그것도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가 강조되는 군에서는 고인(故人) 박희도에게 생전의 공(功)을 비석에 새겨 주고 부모 밑에 고이 잠들게 했던 것이다.<br />
다시 마태 복음을 인용한다. 우리 모두는 너나 할것 없이 용서받아 할 죄인 아닌가.<br />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의 천부께서도 너의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14절)<br />
일단 박희도 일생에 대한 개괄 소개는 이쯤에서 접고 3.1운동, 민족 개조론 개량론 자치론 등에 대해 탐구해 보기로 하면서 잠시 박희성 지사에게로 시선을 옮겨 본다.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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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특별연재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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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03 Jul 2023 12:29:18 +0000</pubDate>
				<category><![CDATA[여성생활]]></category>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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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160; 광복 당일 생전 처음으로 아들 볼에 뽀뽀까지 대한 독립이 이루어졌던 45년 8월 15일, 박희도는 너무도 기뻐 했단다. 그때 모처럼 집에 있었는데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소년 이었던 셋째 아들 승두를 번쩍 안아 올려 생전 처음으로 볼에 뽀뽀까지 했었다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trong>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strong></h4>
<h5><strong>-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strong></h5>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3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7/00504202_20190227.jpg" alt="" width="627" height="451" /></p>
<p><strong>광복 당일 생전 처음으로 아들 볼에 뽀뽀까지</strong></p>
<p>대한 독립이 이루어졌던 45년 8월 15일, 박희도는 너무도 기뻐 했단다. 그때 모처럼 집에 있었는데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소년 이었던 셋째 아들 승두를 번쩍 안아 올려 생전 처음으로 볼에 뽀뽀까지 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행형 생활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허리 통증이 심해 아들을 안는 일도 절대 안했던 그가 그랬다는 것이다. 알려진 것과는 너무도 다른 얘기다.</p>
<p>해방 후 박희도는 반민특위에 불려갔다. 1949년 2월 21일 서울 신설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조사관의 출두요청을 받고 이튿날 특위에 출두해 하루종일 취조를 받았고 이후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몇차례 더 조사를 받았으나 재판에 까지 회부되지 않았다.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이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인데 실상은 반민특위가 중도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 됐기 때문이다.<br />
이 반민특위 출두 문제에 있어서도 세간의 오해와 곡해는 상당하다. 언급 했듯이 박희도는 총독부로 부터 작위를 받았다 던지 토지와 현금을 받은 사실이 없다. 당시 제정된 특위법은 무엇보다 친일의 반대급부에 주목해서 죄의 경중을 따졌다. 그 때문에 최린도 정춘수도 이광수도 최남선도 체포되어 구금돼 특위가 해체되는 날까지 갇혀 있어야 했지만 박희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그의 출두사실, 취조사실을 다른 이 보다 더 크게 다뤘고 박희도의 죄상이라 하여 특집기사까지 실었다.<br />
49년 당시 혁신계로 분류되던 연합매일신문 2월27일자를 보면 이런 사실이 두드러진다.</p>
<p>&lt;“독립선언에 서명까지 하고” / 변절한 박희도/ 반미특위서 불구속 취조&gt;<br />
1면 3단크기로 이같은 세줄의 큰 제목을 뽑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br />
&lt;민족의 성전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사람인 박희도(62)가 반민 피의자로 22일 부터 &#8216;특위&#8217;에서 불구속으로 문초를 받고 있다. 즉 지난 21일 하오에 열린 특위 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시내 신설동 에 거주하는 박희도를 반민피의자로 문초하게 되었는데 6시경 동인의 집을 찾은 김계선 조사관은 위원회의 결의의 시달과 22일 특위에 출두할 것을 면령 하였든 바 22일 상오 9시반 경 특위에 출두하여 조사관의 문초를 받었다고 한다. 한편 알려져 있는 그의 죄상은 절조가 굳어야 할 민족 영도자의 한사람으로서 3.1정신을 저버리고 일제에 부응하야 민족의 갈 바를 어지럽힌 그의 언동은 다른 변절자와 더부러 엄격한 민족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한다.&gt;</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3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7/1-1.jpg" alt="" width="400" height="436" /></p>
<p>그러면서 3면에 박희도의 변절 친일 행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lt;1934년 11월 친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조직한 시중회(時中會)의 발기인 및 이사로 1937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인 1939년 1월 《동양지광》창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파로 전향했다. 1936년 11월 &#8216;조선인 징병제도 실시요망&#8217;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선인에 대한 징별제를 촉구하였으며, 이후 1942년 5월 징병제가 시행되자, 이를 환영하고 감격해하는 감사장을 일본 내각총리, 육해군 대신, 조선총독, 조선군 사령관에게 보내기도 하였다.</p>
<p>1938년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연합지부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lt;동양지광사&gt;는 내선일체실현을 목적으로 창설된 단체로 기관지인 &lt;동양지광&gt;을 발행하였다. 이 기관지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많은 친일 논설을 게재한 것은 물론, 최린, 윤치호, 장덕수 등 친일 인사들을 동원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전쟁 협력을 주장하는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 잡지에 실린 친일 논설들은 매우 노골적인 것들로, 박희도는 〈총후 국민의 급선무〉(1941년),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1942년), 징병제 실시에 대한 공개 감사장(1942년), 〈진심을 헌납하라〉(1943년), 〈결전 비상의 때 &#8211; 궐기하라 반도 청년〉(1944년) 등을 직접 집필했다. 잡지사 전속으로 극단 협동예술좌를 창단하여 친일 연극의 순회 공연도 주선했다.<br />
전쟁이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으며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평의원(1939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1940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으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고, 전시 체제 확보를 위한 친일 언론인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다. 또한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의 참여로 활동하였다. &gt; (문책 필자)&gt;</p>
<p>이는 후일 그대로 친일 인명사전등에 원용 된다. 이며 말한 대로 다른 친일 인사들과는 달리 총독부로 부터 입은 승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특위 조사위원회도 감찰위원회도 처리 곤란 이었던 것이다<br />
그런데 박희도는 경찰이 주동이 된 반민 특위 난입사건에 오히려 크게 분개 했으며 특위의 와해는 민족과 국가의 슬픈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 가족들의 전언이다. 반민특위 재판까지 진행됐던 최린의 경우 자신은 해방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모르고 그랬다면서 일벌 백계로 자신을 “광화문 네거리에 네 마리의 소에 매달아 죽여 달라”고 했고, 이광수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는 유명한 사실과 맞물려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br />
반민특위가 총독부가 제공한 친일 반대급부에 대해 유독 신경을 썼던 관련 법적 이유를 위시해 특위에 관한 이런저런 사실들은 역시 후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p>
<p>그동안 1949년 9월 특위 해체 이후 박희도의 행적은 그동안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들 승두도 “무언가 바쁜일이 있는지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일찍 나가 늦게 돌아 오시곤 했다.” 고 증언할 뿐 이다. 박희도는 한국 전쟁 기간 중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일자를 두고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우선 그의 제적등본에는 1952년 9월 25일로 돼 있다. 그러나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소 묘비에는 &#8216;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8217;로 기록돼 있다. 가족들은 묘비에 있는 51년이 맞다고 말한다.<br />
이처럼 그의 묘비는 많은 것을 알려주는 큰 자료이기도 하다.</p>
<p>당연히 현경도 이 묘비를 몇번이나 찾았다. 그때 마다 비석에 손을 대고 고인의 명복과 사필귀정을 염원 했는데 비석는 웅웅 대며 무언가 그녀의 손바닥에 이야기를 간넸다고 했다.<br />
언급한 대로 비석 건립일자와 주체는 &#8216;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8217;으로 돼 있다.<br />
다시 확인하면 “고(故)선생은 단기 4222년(1889) 6월 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운동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 이렇게 돼있다.</p>
<p>그를 추적한 적지 않은 이들이 박희도 최후반부 인생의 공백을 메우는 단서가 바로 고인의 비석에 나타난 육군정훈학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학교의 후신인 육군종합학교에 문의한 바, 비석이 세워진 1958년 당시의 이 학교 교장은 윤태호 준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학교는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근자에 까지 알려진 바였다.</p>
<p>그러다 한 자유 기고가( 김명식 62년생, 중대 일문과 졸업)가 2008년도에 신동아 잡지에 연재하던 &#8216;망우리 별곡&#8217;이라는 시리즈 가운데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편을 쓰면서 만난, 유상규의 장남 유옹섭(당시 준장 예편)에게서 박희도가 사망 전까지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를 했다는 확실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br />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상규는 3.1운동때 경성의전 학생 대표로 박희도와 여러차례 만나 거사를 논의했던 동지 아닌가. 그 동지가 바로 옆애 묻혀 있다가 그의 아들을 통해 많은 이의 의문과 한을 풀어 줬다는 얘기다. 언급했듯이 도산과 유상규는 망우리 묘지에 나란히 묻혀 었었다. 그래서 망우리 별곡에서도 함께 다뤄졌던 것이다.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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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특별연재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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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Sun, 02 Jul 2023 02:10:09 +0000</pubDate>
				<category><![CDATA[여성생활]]></category>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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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8230; 박희도는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해주 부친의 전답을 판 돈)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했다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5><strong>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strong></h5>
<h5>-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h5>
<h5></h5>
<h5><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2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7/3169c928-83f1-4996-b99e-4992166f6c02.jpg" alt="" width="211" height="350" /></h5>
<h5>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8230;</h5>
<p>박희도는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해주 부친의 전답을 판 돈)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br />
그런데 출발부터 암초에 부닥쳤다. 창간호부터 발매금지를 당하였는데 그 후로도 몇 차례 기사삭제와 압수처분을 당하였다. 결정적 문제가 된 것은 1922년 11월 14일 발행된 제11호였다. 일제 당국은 러시아 혁명 5주년 특집을 문제 삼고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신문지법을 위반했다며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마루아먀(丸山) 경무국장은 이례적으로 직접 나서 발매금지 사유를 밝히면서 &#8220;처음부터 과격한 사회주의적 선동기사를 실어 왔다&#8221;고 밝혔다.</p>
<p>단순히 발매금지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장 박희도는 물론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 등 6명이 구속됐고 인쇄기도 압수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8216;신생활 필화사건&#8217;이다.<br />
이들은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듬해 1월 17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박희도는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 재판을 두고 &#8216;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8217;이라고 부른다. 박희도는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5년 1월 1일자로 만기출옥 하였다. 1919년에 이어 두 번째 감옥살이였다.</p>
<p>출옥 후 그는 평생의 본업이라고 할수 있는 교육사업을 위시해 문화사업, 사회사업, 종교운동 등 각방변에 걸쳐 무척 분주하게 활동한다. 출옥 직후, 1924년에 어렵사리 재건된 중앙유치원 사범과 교사로 부임했다. 중앙보육원은 그의 평생 직장이었던 셈이다. 출옥 두달 만인 1925년 3월에는 위장 독립운동 그룹인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7년 1월에는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지냈으며, 같은 시기 동경에 잠깐 머물렀을 때는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또 그해 9월 신간회 회보 편집위원을 맡았으며, 10월에는 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br />
1928년 중앙유치원 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그는 초대 교장에 취임했고 1934년 모종의 치욕적인 스캔들로 임영신에게 교장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이자리 만큼은 보전했다. 그 무렵 그는 만주동포 구호를 위한 단체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 고아 구제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했다.</p>
<p>많은 이들이 1930년대 들어서면서 박희도의 삶은 이전과는 180도 뒤바뀌었다고 얘기 한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했고 한때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그가 이른바 자치론에 빠져 들면서 친일로 접어들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경은 다른 견해를 갖고있다. 박희도는 처음부터 온건한 비폭력 노선의 독립운동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무장투쟁등 적극적 독립운동을 배척하고 폄하 하지는 않았지만&#8230;<br />
그의 행적이 친일, 변절로 평가 되는 그 정점은 최린이 회장으로 있던 시중회(時中會) 발기인으로의 참여였다. 33인 출신의 최린 등이 &#8216;신흥조선의 건설&#8217;을 내걸고 발기한 시중회는 1934년 11월 5일 조선호텔에서 성대한 창립식을 열었다.(매일신보, 1934.11.6.) 이날 행사에서 박희도는 경과보고를 맡았는데 당일 임원선거에서 뽑힌 7명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 이기도 했다. 시중회 참가는 최린의 권유가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린은 33인 시절부터 유난히 박희도를 아끼고 신임했고 박희도 역시 최린을 따랐다.</p>
<p>또 박희도가 자치론으로 경도 된 것에는 일생 선배인 동석기 정춘수 두 목사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개량론에 빠져 있었다. 동석기는 자신의 터전인 감리교를 떠나 환원운동에 열심이었고 정춘수는 총독부 후광으로 조선 감리교를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동석기는 조선에서 추방돼 만주 길림에서 온건 독립노선을 따르는 목회 활동과 초기교회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을 펼치고 있었다.<br />
그런데 최린의 시중회는 출발 직후 최린 스스로와 박희도의 성추문 스캔들로 시쳇말로 스타일 완전 구기면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사생활 관련 스캔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미투, 성폭력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p>
<p>최린 이야기는 뒤로 하고 박희도로 집중하면 그는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지탄 위에 &#8216;제자 정조유린 사건&#8217;이라는 스캔들로 치욕적인 위기에 빠지게 됐던 것이다.<br />
&lt;조선중앙일보&gt;는 1934년 3월 17일자에서 박희도가 제자를 유인하여 정조를 유린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이 신문은 이후로도 10여 차례에 걸쳐 관련 기사를 실었다. 사태가 커지자 교계와 교육계의 민간 조사위원회 까지 구성돼 조사를 벌였으나 도중에 피해여성이 애초의 주장을 번복하는 등 논란만 가중된 채 유야무야 됐지만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얼마 뒤 중앙보육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br />
당시에도 &lt;조선중앙일보&gt;의 박희도 스캔들 관련 보도는 다분히 정치적이며 과도하게 선정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왔었다. 민족지사에서 자치론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박희도가 언론의 표적이 됐다는 지적이다. 당시 &lt;조선중앙일보&gt; 사장은 몽양 여운형이었다.</p>
<p>민족대표 33인 중에 자치론으로 기운 박희도와 최린 등에 대한 민족의 시선은 늘 따가웠다. 자치론은 적극적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일제의 정책에 놀아난 것으로 간주됐으며, 따라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변절자’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시절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특히 경향성 있는 언론들이 더 그랬다.<br />
“ ‘자치론=비겁한 민족주의’라는 논리는 너무나 단정적인 견해다. 만약 이 논리만이 바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진보세력을 무조건 친북좌파라고 매도하고 보수를 수구꼴통이라고 매도하는 독단적 흑백논리와 다를 바 없다.” 현경의 목청높은 견해다. 민족 개량론에서 출발한 자치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떠로 탐구해보기로 한다.</p>
<p>시중회 이후 해방 때까지 박희도의 행적은 표면적으로 보면 친일행각으로 일관 하고 있었다. 1936년 11월 징병제 실시 상임준비위원을 맡아 징병제 찬양에 나섰으며, 이듬해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에는 총독부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했다. 1939년 5월에는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인전보국단 평의원 등을 지냈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햇다고 거의 모든 기록이 말하고 있다.</p>
<p>세인들은 박희도의 대표적 친일행각으로 친일잡지 &lt;동양지광(東洋之光)&gt; 창간을 들고 있다. 1939년 1월 1일 창간된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그는 &#8220;필경 내선일체의 구현에 대한 일본정신 앙양의 수양도장(修養道場)을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8221;며 내선일체 구현을 적극 표방했다고 알려져 있다.<br />
자료에 따르면 박희도는 &lt;동양지광&gt;에 여러 차례 칼럼을 썼으며, 수많은 친일 인사들에게 지면을 제공했다. 그런데 당시 단골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용제(金龍濟)는 &lt;한국문학&gt; 1978년 8월호에 기고한 &#8216;고백적 친일문학론&#8217;에서 &#8220;동양지광은 항일 지하단체의 본거지였다&#8221;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용제는 제1회 &#8216;국어(國語)문예총독상&#8217;을 수상한 이른바 1급 친일문인이다. 여기서 국어는 일어를 말한다. 이 때문에 당시에 이 발언은 냉소 속에 오히려 지탄을 더 받았을 뿐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구체적인 것도 있기에 자초지종은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p>
<p>현경을 비롯한 가족들은 박희도가 썼다는 많은 글들이 일제의 농간과 협박에 의해 쓰여 졌거나 다른 사람이 쓴것에 이름만 빌려 줬다고 말하고 있다. 박희도는 글보다는 연설을 잘하는 사람인데 아들 박승두는 어바지가 다른 사람이 쓴 일본어 글을 들고 와서 침통한 표정으로 밤새 노려보곤 하는 광경을 여러차례 목격 했다고 말한다. 동양지광은 일본어로 발행되던 잡지였다. 박희도의 소위 변절행각을 기독교회사(史) 연구가인 김승태는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나온 일반적인 박희도에 대한 평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p>
<p>&#8220;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 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8221;<br />
현경씨를 위시한 가족들로서는 예단에 가득차 너무도 쉽게 결론과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할 법 하다. 이글이 끝나 발표 됐을때 저런 평가들이 어떻게 달라지려나 자뭇 궁금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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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특별연재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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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30 Jun 2023 16:31:24 +0000</pubDate>
				<category><![CDATA[여성생활]]></category>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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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박희도의 간략 2  YMCA 회원부 간사로 위촉, 영향력을 끼치는 선배급 인사로 그 무렵 박희도는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통해서도 국제정세며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1월 중순경 그는 도쿄 유학생들이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는데. 그에게 이 사실을 전해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trong> 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strong></h4>
<h5>-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h5>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0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1-3.jpg" alt="" width="400" height="431" /></p>
<p><strong>박희도의 간략 2 </strong></p>
<p><strong>YMCA 회원부 간사로 위촉, 영향력을 끼치는 선배급 인사로</strong></p>
<p>그 무렵 박희도는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통해서도 국제정세며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1월 중순경 그는 도쿄 유학생들이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는데. 그에게 이 사실을 전해준 사람은 평양 태생으로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중이던 송복순(宋福順)이었다. 언제 부턴가 민족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었던 그는 송복순의 말을 듣고 한층 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br />
박희도는 1월 23일 경성 (서울) YMCA 회원부 위원인 학생들을 소집했다.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 유상규 등이 모였다. 이날의 모임은 후일 엄청난 인연으로 박희도와 그 후손들에게 다가서게 된다. 박희도 생전이 아니라 죽은 후 망우리에서 이어지는 신기하고 반가운 인연이다.</p>
<p>박희도는 이들 서울시내 전문학교의 학생대표들과 시국문제를 토론하면서 독립선언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며칠 뒤 이들이 동경 유학생들처럼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자 박희도는 이들을 다시 만나 천도교, 기독교와 함께 할 것을 강력 권고하면서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했다. 후일 일본 정부문서 보관소에서 이와 관련한 총독부 문서와 계보도가 발견돼 이를 자세히 입증하고 있다. (아래 사진)<br />
2월 18일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가 YMCA로 박희도를 찾아왔다. 그는 박희도에게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로 교계의 지도자인 이승훈 선생이 독립운동 건으로 천도교 측과 상의를 하기 위해 상경했다며 만나 볼 것을 권해 왔다. 이튿날 박희도는 소격동에 머물고 있는 이승훈을 찾아가 만났다. 이승훈은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 건으로 상경한 것이 맞다면서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같이 하던지 아니면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p>
<p>일단 기독교 내부의 의견조율이 급선무였다. 이들은 그날 밤 다시 박희도 집에 모였는데 이승훈을 빼고는 전부 감리교파였다. 이튿날에는 장로교 소속 이갑성 집에 모여 장로교파 인사들의 참여 문제를 논의했다. 이날(2.20) 모임에서 이승훈을 위시, 기독교측은 천도교 측과 합동으로 거사를 치르기로 결정 했다. 박희도는 이후로 김창준과 최성모를 만나 민족대표로 합류할 것을 권했고 두 사람 모두 찬동했다. 원산에 있던 협성신학교 절친 선배 정춘수 목사에게는 인편과 전보를 통해 승락을 받아 냈다.</p>
<p>27일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선언서 문안을 검토해 기독교 측의 의견을 최종 확정했고, 기독교 측 민족대표 16인을 정했다. 이때 박희도는 자신이 아직 민족대표로 까지 나설 연배와 역량이 안된다고 겸양의 뜻을 표했으나 장로교 쪽에서 박희도가 빠지면 이갑성도 낄 수 없게 된다고 강력 주장했고 또 천도교와의 안배를 위해 대표를 수락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지도자 15명, 기독교 지도자 16명, 불교 지도자 2명으로 최종 구성됐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0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26_83131.jpg" alt="" width="730" height="487" /></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1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4148894_20.jpg" alt="" width="1280" height="720"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박희도는 이날 이른 아침을 먹고 아내에게 &#8220;일본 대학에 유학을 가게 됐으니. 부디 아이들을 잘 보살펴달라&#8221;는 부탁을 한 후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 (경향신문, 1966.2.28.)<br />
33인 가운데 태화관 모임 참석자는 29인이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쳐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취조는 연행 당일부터 시작되었다.<br />
박희도는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으며, 또 조선독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그는 &#8220;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8221;는 물음에 대해 &#8220;그렇다&#8221;고 잘라 말했다.</p>
<p>3월 9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취조내용 가운데 몇 대목을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br />
문: 이번 독립운동에 있어서 피고 등은 각 방면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는가.<br />
답: 그렇다.<br />
문: 어떠한 방면과 연락을 하였는가.<br />
답: 학생과 기타 여러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br />
문: 학생 측과 연락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라.<br />
답: 근년 1월 6일경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 한위건이 나를 찾아와 오늘밤에 청년 몇 명이 대관원에서 모이는데 같이 가자고 하여 갔더니 연희전문학교 생도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생도 강기덕,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 3명이 와 있었다. 주익이 오늘 지기(知己)끼리 모였으니 앞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였고, 강기덕은 파리에서 세계 평화회의를 개최하는데 만일 조선인으로서 관계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학생들은 그와 연락하여 무슨 일이든지 서로 긴밀히 연락하자고 하였다. 그날 다들 공감하였다.<br />
2월 10일경 김원벽이 각 전문학교 생도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였다. 2월 19일 이갑성 집에서 모이던 날 그 집 옆에서 김원벽을 만났는데 그가 내게 야소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게 사실이냐고 묻기에 오늘 그 일로 이갑성 집에서 모여 상의하는데 결과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20일 오전 11시경 강기덕이 나를 찾아와 학생들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야소교와 천도교에서도 한다면 우리는 그대들이 독립선언을 한 후에 하겠다고 하므로 나는 그에게 우리는 야소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할 뜻을 말했다. 장소와 시일을 묻기에 국장 2일 전이나 2일 후에 될지 모르는데 확실한 시간과 장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26일 밤 김원벽이 내게 왔기에 나는 3월 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니 학생들을 소요 하게 하지 말라고 했더니 학생들은 그 후에 학생끼리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이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을 중지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리 하겠다고 했다. 우리와 학생들의 관계는 그것뿐이다. (학생들의 연루를 최소화 하려는 증언으로 여겨 진다.)<br />
문: 피고 등은 결국 학생들과 같이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닌가.<br />
답: 그런 일은 없다. 독립선언서 발표 당일 학생들이 소요한 것은 어찌 된 것인지, 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일을 말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br />
문: 이번에 이태왕 전하가 훙거(薨去)하심에 때해 어떠한 감상을 가지고 있는가.<br />
답: 단지 슬플 뿐이지 별로 감상을 가지지 않았다.<br />
문: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할 줄로 생각하였는가.<br />
답: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br />
문: 어째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는가.<br />
답: 그것은 천도교 측에서 정한 것이므로 우리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br />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br />
답: 그렇다.<br />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최종판결에서 박희도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년 3월1일 체포 됐으니까 1년 7개월 이상을 끌어온 재판이었다. 그는 초기에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는데 그를 포함해 최린, 오세창 등 17명은 독방에서 생활했다. 그 후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돼 옥살이를 하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소했다.</p>
<p>이날 함께 풀려난 사람은 17명이었는데 동아일보 등 당시 언론은 특별히 박희도를 주목했다. 박희도는 옥중생활과 출옥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br />
&#8220;무슨 별 감상이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칠십 먹은 부모와 철모르는 동생들을 버리고 감옥에 들어올 때 가족 생각을 하면 이 일을 했겠습니까. 나의 가슴에 쌓인 정성은 오직 가련한 우리 동포를 조금이라도 구원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올시다. 나도 사람이라 칠십 먹은 부모가 나를 옥중에 들여보내신 후에 형편을 생각하는 나의 가슴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8221; (동아일보, 1921.11.5.)</p>
<p>박희도는 출옥 후 한때 용두리 교회에서 목사로 교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미 감리회 조선 연회에서 박희도 교역을 두고 &#8220;교역에 종사치 못할 형편 임으로 계속치 않기로 가결&#8221;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정식 안수를 받지 않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후 그는 교역자의 길을 접고 교육 육영사업,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br />
그는 1922년 3월에 잡지 &lt;신생활(新生活)&gt;을 창간했다. 사장은 자신이 맡고 편집인 겸 발행인은 베커 선교사로 하였다. 이는 당국의 원고검열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부터 조선인이 발행한 신문 잡지는 죄다 검열받아야 했지만 외국인이 발행하는 그것들은 검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
<p>여담이지만 1904년 7월에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은 어니스트 베델이라는 영국인이었다. 그가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게재하고, 황무지 개간권의 부당함을 고발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보도해 범국민 운동을 이끌었다. 때문에 영국과 가까웠던 일본은 지속적으로 베델의 행동을 멈춰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했다. 영국 정부도 일본과 관계를 악화시켜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그를 재판에 회부했고 결국 상해까지 추방하는 데는 성공했다.<br />
물론 3주 뒤 더 강한 반일 감정으로 꼭꼭 채워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베델은 복귀 1년도 지나지 않아 심장병으로 사망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대한매일신보가 독립에 큰 힘이 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언론이 가진 힘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역사나 세계 역사를 돌아봐도 기사 하나가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많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40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103768852.1.jpg" alt="" width="640" height="393" /></p>
<p>이같은 사실을 일찍부터 인지한 박희도가 창간한 &#8216;신생활&#8217; 이 잡지는 &#8216;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8217;이라는 기치를 내건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고 얘기된다. 1920년대 초중반 조선에는 사회주의가 풍미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계속)</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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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20;굳건한 커뮤니티로 만들어  주류 사회에 우뚝 서도록 하겠습니다.&#822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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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05 Jun 2023 21:29:31 +0000</pubDate>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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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뉴욕 한인회장 기호 2번 강진영 후보 인터뷰 5일 오후 이곳 한인타운 한인 시니어들의 사랑방인 펠팍 &#8216;웬디스&#8217;에서 강진영 후보를 만났다. 뉴저지 쪽 후원자들과의 점심 만남을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자와 만나고 싶어 한다길래 급히 달려 나가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강 후보와의 인터뷰는 진작부터 얘기되고 있었다. 김경화 뉴욕한인회 전 수석부회장,...]]></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5><strong> 뉴욕 한인회장 기호 2번 강진영 후보 인터뷰</strong></h5>
<p>5일 오후 이곳 한인타운 한인 시니어들의 사랑방인 펠팍 &#8216;웬디스&#8217;에서 강진영 후보를 만났다. 뉴저지 쪽 후원자들과의 점심 만남을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자와 만나고 싶어 한다길래 급히 달려 나가 이루어진  만남이었다.<br />
강 후보와의 인터뷰는 진작부터 얘기되고 있었다.<br />
김경화 뉴욕한인회 전 수석부회장, 배시영 전 뉴욕 체육회회장을 필두로 김영환 전 이사장, 배광수 재향군인회 회장, 임마철 민화위 뉴욕회장, 박윤용 권익위 위원장 등 기자와  친한 분들이 모두 강후보를 지지 하고 있었고 한번 만나 인터뷰 기사를 쓰라고 권해 왔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10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KakaoTalk_20230605_172149947.jpg" alt="" width="1050" height="1400" /></p>
<p>사나이의 첫정은 8초안에 가늠된다고 했다. 강진영 후보의 손은 다소 작고 부드러운듯 했지만 힘이 있었다. 결코 큰 눈은 아니지만 눈에는 온기와 냉철함이 잘 섞여 있었다. 기자의 오랜 감각으로는 합격점 이상이었다.</p>
<p>&#8220;평소에 한인회를 어떻게 생각해 왔습니까?&#8221;<br />
이곳 미국에서 태어난 2세 청년이 어릴적에는 한인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서 던진 기자의 첫 질문이었다.<br />
대답이 진솔했고 걸작이었다.<br />
&#8220;태어나 보니 한국인 이었고 초등학교 무렵 사리분별을 할 즈음에는 세탁소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인 세탁협회 일에 참 열심이셨습니다. 그때 세탁소 설비 기준과 관련해서 당국과 큰 마찰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세탁협회 아저씨들이 협심해서 일을 원만히 해결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 한인 동포들이 힘을 모아  단체를 만들어 힘을 합친 일을 하면 못해낼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한인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84년 제가 태어 난 그해 지금의 한인회관을 구입했다고 아버지가 말씀해 주셔서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거기에 힘을 보태셨다고 하셨고, 그래서 찰스 윤 회장이 이사로 일하라고 했을때 망설임 없이 수락 했던 것입니다.&#8221;<br />
이보다 더 절절한 이유가 또 있을까?<br />
그의 우리말은 막힘이 없었다. 그 또래인 기자의 아들과 딸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거린다.<br />
&#8220;이번에 열심히 배운 결과 입니다. 아직 밤마다 연습하고 있습니다.&#8221;</p>
<p>뉴저지 한인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 할것이냐고 물었다. 사실 뉴욕 한인회가 &#8216;대 뉴욕지구 한인회&#8217;로 출범 했을때는 뉴저지 한인회도 코네티컷 한인회도 없었을 때였다. 이번에도 뉴저지에 투표소를 두는 문제로 이사회와 선관위에서 격론이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br />
&#8220;결코 상하관계가 아닙니다. 힘을 합쳐 일을 도모하는 형제 관계라고 생각 합니다. 뉴저지에서의 일은 뉴욕이 뒤에서 후원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해서 모든 성과와 공은 뉴저지 한인회 또는 지역 한인회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성과를 내려면 힘은 합쳐야 합니다.&#8221;<br />
우문에 현답이자 법을 다루는 변호사 다운 탁견이다.</p>
<p>그는 출마의 변에서 이렇게 말했다.<br />
&#8220;강진영 (Gene kang)입니다. 저는 이민자의 자녀로서 세탁소를 운영하시던 정직하고 성실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며 교회에서 청년 활동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 이이내 님을 만나 아들 아론, 딸 에밀리 를 두고 있으며 뉴저지 클로스터에 살고 있습니다.&#8221;<br />
그의 직업은 변호사다.<br />
&#8220;저는 맨해턴의 한 법률 사무소의 소송 파트너로 있는 변호사입니다. 전에는 낫소 카운티 지방검사실에서 검사로 재직했습니다.&#8221;<br />
언급한대로 84년 미국 태생인 그는 뉴욕에서 고교를 졸업했고 NYU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뒤 포담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됐다.<br />
&#8221; 지금 한인동포 사회는 1세대 새 이민이 거의 없는 가운데 1.5세, 2세대들이 한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생각합니다.&#8221;<br />
새로운 차원의 세대교체를 이야기 하고 있다.<br />
&#8220;지금은 1세대 리더쉽을 바탕으로 한인2세들이 한인커뮤니티를 이끌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금이 그 시기라 생각합니다.&#8221;<br />
본격적인 출마의 변이 이어진다.<br />
&#8220;지난 4년간 한인변호사 협회장을 역임하고 한인회 이사로 재직 하면서 제가 저를 이만큼 이나 키워준 한인커뮤니티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한인사회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고 한인 커뮤니티를 더욱 굳건히 만드는 역활과 우리 한인이 미주류 사회 중심에 서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제가 받은 소명이라 여기고 출마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8221;</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10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6/KakaoTalk_20230530_102014212.jpg" alt="" width="475" height="937" /></p>
<p>그의 포부는 자못 크다.<br />
&#8220;우리 한인동포 1세대와 2세대 간에 정기적 소통할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차세대 인재 양성 시스템구축을 하여 주류사회에서 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한인회 차원의 폭넓은 지원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1세대 2세대가 단합되어 강력하고 멋진 , 긍지와 자부심이 넘치는 한인커뮤니티 반드시 만들겠습니다.&#8221;<br />
유난히 강조되는 1세대와 2세대의 단합이다.</p>
<p>시간이 없어 이날 만남은 일찍 접어야 했지만 왜 기자의 지인들이 그의 주변에서 그를 돕고 있는지 많은 것을 웅변한 짦은 만남이었다.</p>
<p>언급한 대로 기자와 비교적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이 모두 강후보를 지지하고 있으면서 선거본부에 이름을 올리고 힘을 보태고 있다.  중앙 장의사 하봉호 회장만 빼고, 기자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하회장은 김광석 후보 지지자다. 5일 오전 통화에서 자신은 10여년 동안 한인 봉사센터 이사로서 김광석 회장과 함께 일을 했던 인연이 있다면서 요즘 문제로 불거진 KCS 회계와 관련해서는 회계사와 함께 제반 서류를 검토 했는데 부정은 전혀 없었다고 강조 했다.  묘하게도 기자와 직접 일면식은 없는 김광석 후보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충분히 훌륭한 분이고 역량이 있는 분이라는 것은 익히 인지하고 있는 바다. 당연히 김후보도 기회가 닿으면 만나볼 생각이다.</p>
<p>어쩐지 모범 답안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 2세들에게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강진영 후보,  그의 부모님 이야기며 인생 스토리 전반을 다룰 차기 인터뷰를 준비하는 것은 기자만의 성부른 바람일까?<br />
김영환 이사장과 함께  한창 바쁘게 뛰고 있는 애마 SUV에 오르면서 그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독자들에 대한 인사와 지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br />
&#8220;기호2번 강진영에게 한표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82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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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16;과거 백년 미래 백년 , 고래싸움과 대한민국&#82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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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29 May 2023 22:57:34 +0000</pubDate>
				<category><![CDATA[인물탐방]]></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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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박영선 전 장관,  동포간담회 갖는다.  오는 6월 17일 &#8216;아침&#8217;  포트리서  백팩 메고 공부,  본국과 언로는 열어 두고 있는  “모범 정치 유학생” 보스턴 하버드 대학 공공정책 전문 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의 선임 연구원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위 사진)이 오는 6월 17일 오전, 뉴저지 포트리 더블트리 호텔서 동포간담회를 갖는다. 이날...]]></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5><strong> 박영선 전 장관,  동포간담회 갖는다.  오는 6월 17일 &#8216;아침&#8217;  포트리서</strong></h5>
<h5> 백팩 메고 공부,  본국과 언로는 열어 두고 있는  “모범 정치 유학생”</h5>
<p>보스턴 하버드 대학 공공정책 전문 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의 선임 연구원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위 사진)이 오는 6월 17일 오전, 뉴저지 포트리 더블트리 호텔서 동포간담회를 갖는다.<br />
이날 모임은 오전 8시 조찬에 이은 오전 9시 강연 및 간담회로 동포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조찬 모임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박장관의 모교인 경희대학교 뉴욕 뉴저지 동문들과 후원 지지자들이 중심이 돼 마련한 이번 간담회에서 박 전장관은 &#8216;과거 백년 미래 백년, 고래싸움과 대한민국&#8217; 이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 미래의 활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게 된다.</p>
<p>이날 모임의 사회는 동포 변호사 출신으로 영화 메가폰을 잡아 쿠바 이민자의 삶을 다룬 &#8216;제로니모&#8217;와 엔디 김 의원등 동포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다큐 형식으로 담은 &#8216;초우즌&#8217; 으로 잔잔한 울림과 호평을 받은 전후석 감독이 맡기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p>
<p>박전장관의 미국 체류, 하버드 연구 활동은 지난 달 28일 방미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하버드대 연설을 했을때 그 현장에 참석했고  이를 한국의 언론들이 주목해 보도하는 통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야당 출신 인사가 결이 다른 대통령의 행사에 참석 했기 때문이다. 이날 강연장에선 박 전 장관의 옆 자리에는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대사가 앉은 모습도 포착돼 눈길을 끌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00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5/2023042914071492032_1682744834_0018212117.jpg" alt="" width="640" height="637" /></p>
<p>또 이영 현 중기벤처부 장관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연설 현장에서 박 전 장관과 찍은 사진을 올려 더 화제가 됐는데 이 장관은 &#8220;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을 만났다. 바로 박 전 장관이었다&#8221;고 소개했다. 이어 &#8220;중기부라는 공통점이 참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다&#8221;며 &#8220;학업에 정진 중이셔서 그런지 참 편한 복장에 백팩(배낭)을 메고 계셨는데 건강하게 지내시다 오시길 소망한다&#8221;고 덧붙였다.(위 사진)</p>
<p>박 전장관은 윤 대통령 강연 참석에 대해 “대통령실 초청을 받았고, 케네디스쿨에서도 참석해 줬으면 했다”고 말했다는데 여러 정황을 보면 그는 그냥 형식적이 외유가 아닌 실제적이며 실용적인 연구 활동을 꽤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겨 진다.</p>
<p>이날 박 전 장관은 한국에서 온 기자들이 미국에서의 생활을 묻자 지난달 (3월) 18일 케네디스쿨에서 자신이 행했던 강연(세미나)을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단다.<br />
그는 “‘디지털 민주주의와 정치에서의 인공지능(AI)’을 주제로 세미나를 주재했다”며 “강의실이 꽉 찰 정도로 학생들이 많이 왔고, 하버드대 학보 크림슨에도 다음 날 기사가 크게 났더라”고 했다. 이를 보고 “디지털과 대한민국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이 있구나 느꼈다”고 말했다.<br />
AI와 정치를 접목하게 된 이유를 묻자 그는 “한미 모두 정치의 양극화가 심해지는 가운데 중도의 목소리를 정치 여론에 포함시킬 수 있는 도구로 AI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강성 분자들 때문에 중도층이 아예 투표를 안 할 때 AI가 실시간으로 투표율을 집계해 투표를 독려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예로 들었다.</p>
<p>그는 이날  한 발짝 떨어져 지내며 느낀 한국 정치에 대한 소회도 밝혔다는데   “미국에서 보니 한국 정치는 진짜 가장 낙후된 분야인 것 같다”며 “내가 2004년에 국회에 들어갔다. 그런데 2004년과 2023년을 비교하면 수준이…”라며 말을 흐렸단다.</p>
<p>윤 대통령의 이번 국빈 방미와 관련해서는 “한미 동맹이 냉전 시대 군사 동맹의 1기, 소련 붕괴 후 경제 동맹의 2기를 지나 포괄적 동맹의 3기로 접어든 것 같다”며 “한미 동맹의 새로운 영역 확대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문화·예술 분야와 우주가 언급됐다”고 평가했다.  미국 정가에 대해선 “의회 연설 때 (미국) 의원들의 태도나, 백악관 만찬 분위기를 보며 느낀 것이 많다. 충분히 예우를 해주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완벽하게 충분히 가져가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미국 정치권인 것 같다” 면서 “사실은 미국이 우리한테 청구서를 내밀어야 되는 순서가 아니라 한국이 오히려 미국에게 청구서를 내밀어야 하는 입장”이라고 밝히기도 했다.</p>
<p>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한국 언론과의 언로를 열어 두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큰 연구나 책속에 파뭍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본국 일에 오불관언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니었던가.</p>
<p>박 전 장관은 지난 3월 13일 에도 KBS 라디오에 전화로 출연해 &#8220;공천권을 당 대표가 쥐고 있기 때문에 지금 국민의힘에서 저 난리가 나고 있는 것&#8221;이라며 &#8220;민주당에도 총선 리스크가 있는데 바로 공천권&#8221;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두고 &#8220;총선 공천권을 내려 놓으라&#8221;고 조언했다. 그렇게 된다면 &#8216;사법 리스크&#8217;에서 탈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총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br />
그러면서 박 전 장관은 &#8220;미국처럼 공천권을 국민이 행사하는, 오픈프라이머리 제도를 도입하면 이런 당대표도 필요가 없게 되고 당 대표를 뽑기 위해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된다&#8221;며 &#8220;그것이 곧 정치 선진화의 길&#8221;이라고 미국에서의 현장 학습을 통해 체득한 소회를  설명 하기도 했다. 박전장관은 지지자들에게는 소셜미디어로 &#8216;백문 불여 일견 , 하바드 리포트&#8217; 를  보내고 있는 모양인데 기자와 잠깐 통화를 한 뒤 그 번호로 리포트 35회 분에서 38회 분 &#8216;제이크 설리번&#8217; 안보보좌관 브루킹스 세미나 발표 원고에 대한 요약과 장문의 해석을 보내 주기도 했다.  열독해 검토한 뒤 우리 &#8216;하뉴코&#8217; 독자들과도 나눌 생각이다.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00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3/05/KakaoTalk_20230528_115114105.jpg" alt="" width="996" height="1440" /></p>
<p>이처럼 중량감있는 정치인으로서 미국 외유 연수 기간을 잘 보내고 있는 박 전장관의 동포 간담회는 이런 점에서 적지않은 기대가 쏠리는 대목이다. 6월 17일 간담회에  참석 신청은 일단 간담회 포스터의 QR 코드로 할 수있게 돼 있다.      (안동일 기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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