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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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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미주 뉴욕 뉴스 &#38; 커뮤니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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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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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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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17 Apr 2026 19:53:02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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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1&#62; 안 동일 작   그날 존 캐럴 신부는 여관의 잉크와 펜을 빌려 피에르 보마르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후 보마르세는 확실하게 미국편에 서서 당시 정황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도박을 결행 하게 되고 이 도박은 세계 역사를 바꾼 기폭제가 된다.   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1&gt;</h4>
<p><strong>안 동일 작</strong></p>
<p><span dir="LTR" lang="en-US">  그날 존 캐럴 신부는 여관의 잉크와 펜을 빌려 피에르 보마르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후 보마르세는 확실하게 미국편에 서서 당시 정황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도박을 결행 하게 되고 이 도박은 세계 역사를 바꾼 기폭제가 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 도박이 바로 76년 가을 부터 77년 봄 까지 진행된 미국에 대한 다량의 탄약과 머스킷 장총 해상 공수 작전이었다. 이 방대한 공수 작전의 단초를 존 캐롤의 편지가 열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사일러스 딘이 프랑스 무기 반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루이 16세의 재정 대리인 격인 피에르 보마르세 (아래 사진) 를 처음 만난 때는 76년 7월 초로 되어있다. 3월에 파리에 도착한 딘이 7월에서야 보마르세를 만났다는 것은 의아한 대목인데 이 과정에 존 캐럴 신부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보마르세는 75년 부터 신임왕 루이 16세와 정권 실세 들의 묵인과 비호 아래 소량 이었지만 무기류를 영국의 눈을 피한 밀거래로 스페인령 카리브 연안을 통해 식민지에 반출하고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때문에 딘은 처음부터 보마르세와의 접촉을 염두하고 파리에 갔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착 며칠만에 보마르세에게 접근 할수 있는 루트가 마땅치 않다고 보고를 했고 보마르세와 각별한 사이였던  캐럴 신부가 보고의 현장에 우연히 가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지만 신의 안배 였다고 밖에 설명 할 길이 없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무튼 7월에 처음 만나 의기가 투합해 전폭적인 합의를 이끌어 낸  보마르세와 딘은 이내 머스킷 총 2만 7천 정, 대포 200문, 화약 2만 파운드 에 달하는 방대한 물량의 무기를 수배해 선적 준비를 마쳤고 이 무기들은 차근차근 미 대륙으로 유입됐다. 당초 프랑스 국왕은 보마르세에게 100만 리브르 정도의 예산을 허락 했지만 보마르세와 딘은 무기 공수에 3백만 리브르를 사용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 무기들을 바탕으로 대륙군은 1777년 10월의 뉴욕 사라토가 전투에서 개전이래 최초로 영국 정규군 대 부대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이 퀘백에서 내려온 버고 장군의 연대 규모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사라토가의 대승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 프랭클린의 예지몽 대목에서도 언급 했듯이 사라토가  전투야 말로 독립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전쟁의 향방을 바꿨으며, 망설이고 있었던 프랑스를 참전하게 해 독립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는 토대가 됐다. 이 승리 직후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을 맺었고 스페인은 동맹까지 맺지는 않았지만  함께 대영 선전포고를 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승리의 수훈갑 </span><span dir="LTR" lang="en-US"> 프랑스제 무기들이 다량으로 본격적으로 대륙으로 들어 오게 했던 결정적 단초가 그 한장의 편지였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존 케럴 신부는 그날 &#8216;몽쉘 피에르” (친애하는 벗 피에르)로 시작하는 불어로 쓰여진 편지를 쓰기전  페리 터반 뒷마당에 나가 절절한 기도를 올렸다. 기도라기 보다는 예수회 영신수련을 짧지만 굵게  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실제 예수회 사제들은 기도(Prayer) 라는 말보다 수련(Exercises)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존 캐럴이  18세 때인 1750년 파리에서 수도자로 예수회에 가입한 이래 몸에 밴 이나시오 영성 기도, 예수회식 관상기도 였다.  예수회에는 독특하고 구체적인 관상 기도법이 있었다. 바로 &#8216;영신수련&#8217; 혹은 그 안에서 행해지는 &#8216;관상&#8217;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영신수련 (Spirituall Exercises)은  예수회의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정립한 기도 체계다. 보통 예수회 사제 들이 침묵 속에서 며칠간, 혹은 한 달간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기도를 말할 때 &#8220;영신수련을 한다&#8221;고 표현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수회 관상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8216;상상력&#8217;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눈을 감고 비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 장면으로 직접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를 이냐시오식 관상 (Ignatian Contemplation)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한 장면을 눈앞에 그리듯 상상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의 공기, 냄새,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느끼며 그 현장 속에 자신이 함께 있다고 가정하고 기도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페리 터번의 뒷마당, 델라웨어 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녹음이 막 지기 시작한 수목의 내음을 맡으며 예수회 사제로서 존 캐럴은 &#8216;영신수련&#8217;의 원리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상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사실 사제로서 이런 종류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실 정치 싱황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아닌가. 그리고 무엇 보다 보마르세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그 재기 넘치는 예술가 친구를 피비린내 나는 지금 전쟁의 보급관으로 만들려 하는가? 이것이 사제의 일인가, 아니면 정치인의 일인가?&#8221; 하는 자책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벤자민과 모리스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주님, 저 재기 넘치는 극작가이자 여자 처럼 곱상하게 생긴 나의 친구 보마르세를 이 거대한 불길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그가 파멸한다면 그 죄는 누구의 것입니까?&#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그러나 이 서신이 억압받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자유의 복음이 될 수 있다면, 저의 미안함과 그의 위험마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도구로 쓰소서.&#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주님, 이 잉크로 한 인간의 희생을 담보로 한 자유를 써 내려가려 합니다. 만약 이 서신이 뜻 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그것은 나의 오만일 것이나, 만약 성공하여 새 나라가 선다면 그것은 당신의 섭리입니까?&#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사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듯 한  이 일이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보마르세 개인의 희생을 넘어, 더 큰 인류의 보편적 선을 위한 길임을 맏으면서 펜을 들기로 작정 했기에 이날의 관상 기도는 이를 천주께 아뢰고 힘을 얻기 위한 기도, 수련 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8216;세상 속으로 파견된&#8217; 예수회 사제의 숙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초 캐럴 신부는  마르코 복음 4장 30 절 겨자씨의 비유 대목과 이나 시편 107편 23절 바다를 건너는 자들의 기도 대목을 이날 수련의 본문으로 삼으려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성서를 펼쳐 그 대목들을 읽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기랴&#8230; 그것은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다.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8230;&#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지금 자신이 쓰려는 편지 한 통이 작은 &#8216;겨자씨&#8217;라고 생각했다.  이 종이 한 장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항구에 닿고, 거기서 대포와 화약이라는 &#8216;큰 가지&#8217;가 되어 너무도 어려운 형편의 대륙군들을 덮어주는 모포와 방패가 되는 미래를 시각화 하려 했다. 잉크 냄새 속에서 화약 냄새를 미리 맡는 묵상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시편 107편 이렇게 시작된다.  &#8220;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서 넓은 바다에서 장사하는 이들은&#8230; 주님께서 명령하시어 폭풍을 일으키시니&#8230; 그들이 고요해진 바다를 보고 기뻐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이끄셨도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대서양 횡단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캐럴은 바다를 오가는 전령의 손에 들려 보낼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며, 거친 파도의 차가운 물살과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청각적으로 묵상하려 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인 친구 보마르셰가  &#8216;하느님이 예비하신 항구&#8217;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눈을 감았다. 겨자씨가 바람에 날려 갈릴리 벌판으로 뿌려지는 모습을 상상 하려는데 겨자씨가 날아간 곳은 영롱한  십자고상이 있는 작은 기도실이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어둡고 무거운 목재 향과 촛불 냄새가 밴, 공간이었다.  정면에는 고난 속에서도 평화로운 표정을 지은 상아색 예수 고상이 걸려 있다. 수백 년 동안 닦아온 오크나무 의자의 매끄러운 기름 냄새, 그리고 아침 미사 때 태우고 남은 유향(Frankincense)의 은은한 잔향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이 냄새야 말로 존 캐럴에게는 &#8216;영혼의 안식처&#8217; 냄새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두 소년이 기도실의 앞 쪽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종이를 펴놓고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를 외우고 있었다.  아모, 아마스, 아마트  Amo, Amas, Amat&#8230; 바로 루이 르 그랑 콜레쥬 본관 2층 구석  소 채플룸에서  존 캐럴 자신과 피에르 보마르세가 라틴어 격변화를 외우지 못해 교사 신부로 부터 골방에서 외울 때 까지 나오지 말라는 벌칙을 받고 이를 시행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30년 전의 광경 아닌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광경이다. 문득 캐럴 신부는 보마르세 에게도 지금 이순간 주님의 훈향이 임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두 사람은 자주 라틴어 선생한테 공부 못한다고 혼나면서 벌을 서야 했는데 예수고상이 있는 체플룸에만 들어 가면 그토록 평온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서로에게 몇번이고 다짐하듯 확인한 일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 평온함이 계속되던 어느날 존은 피에르에게 자신의 결심을 고백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피에르, 나는 결심했어, 예수회에 입회해서 수도자의 길을 걸으려 해”</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그렇구나 존, 나도 문득문득 수도자가 되고 싶은데 난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아.  너의 용기가 너무 부럽다 &#8220;</span></p>
<p><span dir="LTR" lang="en-US"> 보마르세도 예수회 신앙에 경도 돼 있었다. 그만큼 예수회 라틴어 학교의 가르침은 수승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루이 르 그랑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명성 높은 예수회 교육기관으로, 학교 건물 안에 독립된 대성당(Grand Chapel)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들이 벌을 서거나 일상적으로 들어가 평온함을 느꼈던 곳은 대성당보다는  더 은밀하고 집중된 기도가 가능한&#8217;학생 전용 소경당(Small Chapel/Oratory)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소 채플룸은 창이 높고 좁아, 오후가 되면 빛이 한 줄기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와 고상의 어깨에 머문다. 낙제점 때문에 혼나고 기가 죽은 두 소년에게 그 빛은 마치 &#8216;괜찮다&#8217;고 말하는 하느님의 손길처럼 보였다.  라틴어 격변화에 서툴러 무릎을 꿇은 두 소년 위로, 낡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먼지 섞인 빛, 그 빛 속에서 존은 장차 자신이 가야 할 좁은 길을 보았고, 보마르세는 그 빛이 빚어내는 극적인 음영 속에서 생의 가장 순수한 막(Scene)을 목격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소년 존 캐럴. 그는 그곳에서 &#8216;순명(Obedience)&#8217;의 원형을 보았던 것이다. 질서 정연한 채플실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세속적 욕망과 예술적 기질이 넘치던 소년 보마르세에게 이 공간은 역설적으로 &#8216;탈출구&#8217;였다. 세상의 복잡한 규칙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과 절대자만이 마주하는 그 순간의 순수함에 경도되었던 것.</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나도 수도자가 되고 싶다&#8221;는 그의 고백은, 그 정적이 주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가적 선망이었을지도 모른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파리 시내의 마차 소리와 복도의 발걸음 소리가 두꺼운 석조 벽에 가로막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오직 두 소년의 고른 숨소리와 낡은 기도서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그 &#8216;절대적 침묵&#8217;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 되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존은 자신의 목소리 마저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듯한 고독 속에서,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 세밀한 음성을 들었다. 처음에는 뜻 모를 음성이었지만 마음이 평온해 지는 음성이었고 나중에는 고요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것은 &#8216;어쩔 수 없이&#8217;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을 듣지 않고는 1초도 더 살아갈 수 없는 갈급함에 가까워 졌고 존은 분연히 수도자 순명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1752년 존 캐롤이 예수회에 정식 가입할 때 4촌인 찰스와 함께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줬던 친구가 보마르세 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추억의 르그랑 소 채플룸에서 시작된 관상은 캐럴의 처음 의도 대로 황의 겨자씨와 바다의 폭풍으로이어졌고 종국에는 십가 소상의 찡그리고 있었지만 온화한 예수의 얼굴로 끝을 맺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러면서 존 캐롤은 편지의 작성이 주님의 음성이라고 식별 했고 차분하게 그날 관상의 내용을 써 내려 갔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은 이날 문제의 편지를 쓰기 전에  영신수련에서 강조 되는 &#8216;영적 식별&#8217;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내친김에 예수회의 영성에 대해 좀더 알아 보가로 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예수회 영성, 좁혀 말하면 영신 수련이야 말로 이 글을 관통하는 수승한 종교 철학이고 기도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천주교, 한국의 천주교 공히 예수회에 의해 전파 됐고 탄압을 겪었으며 융성을 이루기도 했다는 사실은 누차 강조한 바 있다.   한국 예수회 안내 팜프릿을 상당부분 참조 했다는 것을 밝혀 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수회 영성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른 전통적인 기도와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독특한 차별점을 갖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16;가장 큰 특징은 언급 했듯이 머릿속으로 성서의 장면을 생생하며 그리는 상상 기도다. &#8216;이냐시오식 관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단순히 성서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오감을 동원해 성서 속 현장의 소리, 냄새, 풍경을 느끼며 자신을 그 장면 속 인물로 투영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인간의 인지 능력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과 &#8216;친구처럼&#8217; 대화하는 실재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기도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07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Beaumarchais.jpg" alt="" width="550" height="648" /></p>
<p><span dir="LTR" lang="en-US"> 다음은 &#8216;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한다&#8217;는 활동 중의 관상이다.  예수회 영성은 기도를 성당이나 특정 시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관계, 일,  심지어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이 일하고 계심을 찾아내는 활동 중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을 강조한다.  세상을 떠나 고요함을 찾는 &#8216;수도원적 영성&#8217;과 달리, 복잡한 일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8216;현장 중심적 영성&#8217;을 지향한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 다음으로 중시 되는 것이  영적 식별을 위한 &#8216;의식의 성찰&#8217; (Examen)이다. 예수 회원들이 하루에 두 번 반드시 실천하는 성찰 기도(Examen)는 매우 체계적이다.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을 넘어, 하루 동안 내 마음에서 일어난 &#8216;영적 움직임'(위로와 메마름)을 살피며 하느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분별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막연한 은혜를 구하기보다,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Discernment)의 도구로서 기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냐시오 영성에서 &#8216;영적 식별&#8217;은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과 흐름이 &#8216;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선한 영)&#8217; 아니면 &#8216;나를 가로막는 것인지(악한 영)&#8217;를 분별해내는 과정을 말한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냉철하고 이지적인 예수회 철학 (신앙)에서 가장 인간적이 대목이다. 존 캐럴도 여기에 매료 됐다. 착한 영, 악한 영, 로욜라도 하비에르도 이것이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착한 영 나쁜 영의 식별의 유효함은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첫번째로 그 과정을 통해 기도자는  영적 위로 (Spiritual Consolation)를 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위로는 단순히 &#8216;기분이 좋은 상태&#8217;가 아니다. 하느님께 향하는 움직임 속애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열리고 사랑과 희망이 커지는 상태를 말한단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를 들면 사제들은 어려운 사도직 이며 가난한 지역 봉사를 고민할 때, 객관적으로는 힘들고 걱정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한 평화와 용기가 솟아난다고 말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내가 할 수 있을까?&#8221;라는 두려움보다 &#8220;주님이 함께하시니 가보고 싶다&#8221;라는 깊은 확신과 자유로움이 생</span><span dir="LTR" lang="en-US">긴단</span><span dir="LTR" lang="en-US">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에너지가 내면에서부터 차오르는 느낌</span><span dir="LTR" lang="en-US">이랄까.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반대로 </span><span dir="LTR" lang="en-US"> 영적 고뇌</span><span dir="LTR" lang="en-US">와 </span><span dir="LTR" lang="en-US">황폐</span><span dir="LTR" lang="en-US">의 순건을 겪기도 하는데 </span><span dir="LTR" lang="en-US">(Spiritual Desolation) 하느님과 멀어지는 움직임</span><span dir="LTR" lang="en-US"> 이 있게 되면서 </span><span dir="LTR" lang="en-US">마음이 어둡고, 소란스러우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상태다. 이때가 나쁜영이 도래한 때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기도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지루함, 불안, 짜증이 밀려</span><span dir="LTR" lang="en-US">온다.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편하게 살지&#8221;라는 생각이 </span><span dir="LTR" lang="en-US">든다</span><span dir="LTR" lang="en-US">.</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마음이 좁아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span><span dir="LTR" lang="en-US">하면서 </span><span dir="LTR" lang="en-US">과거의 좋은 결심들이 의심스럽게 느껴지고, 무기력함이나 불안한 조급함에 시달</span><span dir="LTR" lang="en-US">리게 된다.  정말 나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진정한 위로의 예는 규율이 엄하고 노동의 강도가 센  입회를 생각하면 떨리기도 하지만, 그 삶을 상상할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8220;가진 것을 놓아도 괜찮겠다&#8221;라는 자유로운 마음이 든다면 이는 선한 영의 이끎일 가능성이 크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거짓 위로</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가짜 기쁨의 예</span><span dir="LTR" lang="en-US">로는</span><span dir="LTR" lang="en-US"> &#8220;내가 수도자가 되면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겠지?&#8221;라는 생각에 흥분되고 우쭐한 기분이 </span><span dir="LTR" lang="en-US">든</span><span dir="LTR" lang="en-US">다. 이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뿌리가 &#8216;자기애&#8217;에 있어 금방 피로해지고 공허해지는 &#8216;악한 영&#8217;의 유혹일 수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너 같은 죄인이 무슨 수도자야? 넌 끝까지 못 버틸걸?&#8221; 같은 비난과 절망적인 생각이 </span><span dir="LTR" lang="en-US">둔다면 이는 </span><span dir="LTR" lang="en-US">황폐함의 예</span><span dir="LTR" lang="en-US">에 해당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이런 생각은 나를 성장시키기보다 주저앉게 만들므로 분별해서 물리쳐야 </span><span dir="LTR" lang="en-US">한</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성 이냐시오(로욜라)는 마음이 어두울 때(황폐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바꾸지 말라고 가르</span><span dir="LTR" lang="en-US">쳤</span><span dir="LTR" lang="en-US">다. 어둠 속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기 때문. 대신 마음이 평온할 때(</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위로기) 내렸던 결심을 꿋꿋이 지키며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span><span dir="LTR" lang="en-US">한</span><span dir="LTR" lang="en-US">다고 강조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이렇게 내 마음의 &#8216;날씨&#8217;를 살피는 법을 익히면, 일상의 사소한 선택부터 인생의 중대한 결정까지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찾아낼 수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영신 수련의  다음은 사도적 열망 &#8216;마지스&#8217; (Magis)다.  예수회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의 더 큰 영광(AMDG)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기도의 결과가 개인의 평안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위한 봉사와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8216;사도적 투신&#8217;으로 연결되도록 돕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하느님의 더 큰 영광 (AMDG &#8211; Ad Maiorem Dei Gloriam) 예수회의 모토인 이 원칙은 선택의 기로에서 &#8220;어떤 것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가?&#8221;를 묻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8216;미국의 독립&#8217;이라는 대의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종교적 자유라는 더 큰 선을 향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를 위험(보마르세의 파산이나 정치적 위협)으로 밀어넣는 것이 과연 &#8216;영광&#8217;에 부합하는지 치열하게 자문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영신수련의 끝은 무관심(Indifference, 번역이 조금 어색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함 정도로 이해 하면 좋다)의 덕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8216;무관심&#8217;은 무책임이 아니라,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을 배제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자신을 열어두는 상태를 말했다. 캐럴의 경우에도  보마르세를 향한 미안함이라는 &#8216;인간적인 정&#8217;과 사명이라는 &#8216;공적인 의무&#8217; 사이에서 자신을 비워내기로 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랬다. 기도를 마친 캐럴은 예수회  &#8216;무관심의 덕&#8217; 상태에 도달해,  &#8216;대의&#8217;를 위한 펜을 들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나의 벗, 피에르(보마르세).</span></p>
<p><span dir="LTR" lang="en-US">지금 자네의 손에 들린 이 종이는 델라웨어 강의 차가운 습기를 머금고 있네. 하지만 이 안에는 불보다 뜨거운 수만 명의 갈망이 담겨 있네.</span></p>
<p><span dir="LTR" lang="en-US">자네는 일찍이 무대 위에서 세상을 조롱하고 정의를 노래했지. 이제 그 무대를 대서양 너머 이 광활한 대륙으로 옮겨보지 않겠나? 로버트 모리스와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네의 그 천재적인 재주가 필요하네. 아니, 재주를 넘어 자네의 &#8216;영혼&#8217;이 필요하네.</span></p>
<p><span dir="LTR" lang="en-US">중략</span></p>
<p><span dir="LTR" lang="en-US">자네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무역이 아니라, 역사가 기록할 가장 거대한 서사시가 될 걸세. 비록 그 길이 가시밭길이고,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도박일지라도 말일세. 사제인 내가 자네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을 용서하게. 그러나 나는 믿네. 자네의 심장이 왕의 금고보다 더 큰 자유를 향해 뛰고 있다는 것을.</span></p>
<p><span dir="LTR" lang="en-US">친구여, 자네의 배에 실릴 것은 화약과 총만이 아니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정의이자, 죽어가는 이 땅의 희망일세. 자네가 이 부탁을 수락하는 순간, 우리는 지상의 친구를 넘어 영원한 대의의 동지가 될 것이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전령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네. 나의 기도가 자네의 결단과 함께하기를.&#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이 편지의 압권은 &#8220;친구를 넘어, 부디 섭리의 도구가 되어주게.&#8221; (프랑스어: &#8220;Plus qu’un ami, soyez l’instrument de la Providence.&#8221;)였다.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자네의 재주를 넘어 자네의 영혼이 필요하네&#8221;라는 대목 뒤에 붙은 이 문장은 보마르세를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8216;신의 계획&#8217; 안에 있는 인물로 격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리고 캐럴은 편지 끝머리에 예수회 모토이자 루이 르 그랑의 교훈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믄구를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크게 썼다.  &#8220;Pour la plus grande gloire de Dieu.&#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분명코  보마르세의 심장을 요동치게 뛰게 할 것이라 확신 하면서&#8230; </span></p>
<p><span dir="LTR" lang="en-US">어린시절 둘은 얼마나 이 말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뿌르 라 플뤼 그랑드 글로아르 드 디외” 무슨 일만 있으면 손을 마주치며 구호처럼 외쳤었다. 프랑스어 운율이 너무도 촣았다. 공식어인  라틴어 Ad Maiorem Dei Gloriam 보다 훨씬 좋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이 보마르세를 만난 것은 10대 중후반 파리의 라틴어 학교 에서 였다.  </span><span dir="LTR" lang="en-US">라틴어 학교(Latin School)&#8217;라는 명칭은 현대의 단일한 학교 이름이라기보다는 당시 중등 교육 기관인 콜레주(Collège)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1750년대 당시 프랑스의 중등 교육은 주로 가톨릭 수도회(특히 예수회)가 운영하는 콜레주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을 &#8216;라틴어 학교&#8217;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육 과정의 핵심이 라틴어였기 때문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단순히 라틴어 회화만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당시의 교육은 자유학과(Liberal Arts)에 기반을 둔 인문학 중심이었다. 고전 언어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여 키케로, 버지릴우스 같은 고대 작가들의 문학을 읽고 분석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수사학(Rhetoric)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이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보마르세의 화려한 대사와 존 캐럴의 설교 능력은 여기서 기초가 닦였다고 볼 수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고학년으로 올라가면 철학 및 신학을 배우는데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다뤘다. 특히 예수회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연극 공연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는 보마르세 같은 극작가에게는 최고의 실습장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말한대로 보마르세와 존 캐럴이 만난  곳은 라틴 스쿨의 정점에 있었던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였다. 찰스 캐럴이 다녔던 그 학교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존 캐럴은  1748년 14살때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북부 지방인 생토메르(St. Omer)에서 공부한 뒤,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으로 진학 했다. 거기서 만난  보마르세는 시계공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상류 사회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그가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고 &#8216;피가로의 결혼&#8217; 같은 지적인 희곡을 쓸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 콜레주에서의 고전 교육이 있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18세기 프랑스에서 성공하려면 &#8216;라틴어를 구사하는 교양&#8217;은 필수였다. 그가 나중에 궁정에서 활약하고 외교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교육 덕분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시 라틴어 학교생활의 특징는 엄격한 규율이었다.  수업은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학교 내에서는 오직 라틴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 곳도 많았다.  귀족 자제들과 재능 있는 중산층 아이들이 섞여 공부했다. 보마르세 같은 인물에게는 인맥을 쌓는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종과 피에르 두 사람은 17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반  계급의 용광로 루이 르 그랑 명문 콜레주에서 학교 복도와 교실을 그리고 기도실과  기숙사를 공유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보마르세에게 그 시절은 &#8220;희곡 작가로서의 언어적 감각을 키운 시절이었고, 존 캐럴에게는 가톨릭 지도자로서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준 시절 었다.  찰스 캐럴은  2-3년 후배 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무리 계급의 용광로 라 해도 저 외국 변방인  영국의 식민지에서 온 불어도 잘 못하는 존과 하층민 출신 보마르세는 가 동변상련의 우정을 쌓았다.    </span><span dir="LTR" lang="en-US">두 사람의 만남은   &#8216;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들의 연대&#8217; 였다. &#8216;이방인&#8217;들의 유대감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존 캐럴은  프랑스어가 서툴렀고, 보마르세는 시계공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계속)</span></p>
<p><span dir="LTR" lang="en-US"> <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span></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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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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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hu, 09 Apr 2026 00:30:51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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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3 안동일 작 독립선언 직전 필라에 불던 팽팽한 긴장감과 이 무렵 숨가쁘게  물밑에서 전개 되던 스파이전을 방불케 하는 파리의 미국 독립운동으로 눈을 돌리기 전 감깐 쉬어 간다는 의미에서 건국 아버지들의 &#8216;속 썩인 아들들&#8217;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우리의 주인공 찰스 캐럴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3</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독립선언 직전 필라에 불던 팽팽한 긴장감과 이 무렵 숨가쁘게  물밑에서 전개 되던 스파이전을 방불케 하는 파리의 미국 독립운동으로 눈을 돌리기 전 감깐 쉬어 간다는 의미에서 건국 아버지들의 &#8216;속 썩인 아들들&#8217;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우리의 주인공 찰스 캐럴도 여기서 비켜서지 못한다. 하늘은 사자에게 날개를 주지 않았다더니&#8230;</p>
<p>조지 워싱턴은 친자식이 없었기에 부인 마사 워싱턴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하지만 그 공들인 보람이 무색했다. 의붓아들 존 파크 커스티스 (John Parke Custis, 1754년생, 일명 &#8216;잭키(Jacky))는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워싱턴의 속을 썩였다. 워싱턴이 &#8220;제발 공부 좀 해라&#8221;며 편지로 타이르고 엄하게 꾸짖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독립전쟁 중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며 워싱턴에게 슬픔을 안겼다.</p>
<p>토머스 제퍼슨이야 말로 자식 운이 매우 박복했다. 아내 마사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오직 딸 마사(Martha)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제퍼슨은 어린 아들들을 모두 병으로 잃으며 가문을 이을 적통 후계자를 두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흑인 하녀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p>
<p>2대 대통령이자 독립 혁명의 기관차 존 애덤스는 아들들 때문에 가장 고통받은 인물 중 하나다. 둘째 아들 찰스 애덤스 (Charles Adams, 1770년생)는 하버드를 졸업했으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심한 불화를 야기했다.  격노한 존 애덤스는 아들을 &#8220;미친 야수&#8221;라 부르며 절연했고, 찰스는 아버지가 현직 대통령이던 1800년, 30세의 나이로 간경화로 사망했다.<br />
셋째 아들 토머스 보일스턴 애덤스 (Thomas Boylston Adams, 1772년생) 역시 알코올 중독과 재정적 무능으로 평생 고생하며 아버지의 평생 근심거리가 되었다.</p>
<p>&#8216;혁명의 불꽃&#8217;이었던 새뮤얼 애덤스 그도 아들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아들인 새뮤얼 애덤스 주니어 (Samuel Adams Jr., 1751년생)는 의사로 활동하며 독립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중 얻은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평생 아버지의 기대만큼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788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p>
<p>&#8216;장로교의 하나님이 미국 독립을 위해 스코트랜드에서 식민지로 보내 주었다&#8217;는 존 위더 스푼 목사(프런스턴대 총장)의 경우도 자식복 만큼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 위더스푼 목사의 아들들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목사는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세 명(제임스, 존, 데이비드)이었다.<br />
위더스푼 목사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학문적 기준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결과는 사뭇 드라마틱하다.</p>
<p>장남 제임스(James Witherspoon)는 비극적인 전쟁 영웅으로 꼽힌다. 가장 전형적인 &#8216;건국 아버지의 아들&#8217;다운 길을 걸으려 했던 아들이었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륙군에 입대하여 나다니엘 그린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1777년 저먼타운 전투(Battle of Germantown)에서 전사했다.  위더스푼 목사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도, 조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p>
<p>차남 존(John Witherspoon Jr ) 의사였다. 형과는 다른 길을 걸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의학을 공부하고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아버지의 엄격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1795년경 선박을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 사건은 노년의 위더스푼 목사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p>
<p>삼남 데이비드(David Witherspoon): 법률가로 정착해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아들이다.<br />
프린스턴을 졸업한 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법률가로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제임스 아델(James Iredell) 밑에서 공부하며 자리를 잡았다. 특이 사항으로는 나중에 맏형 제임스의 미망인과 결혼 한 일이다.</p>
<p>다혈질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의 비극은 자식이 속을 썩였다기 보다, 아버지를 너무 닮아 발생한 참극에 가깝다.  장남 필립 해밀턴 (Philip Hamilton, 1782년생)은  해밀턴이 가장 아끼던 천재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의 명예를 모욕하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19세에 사망했다. 이는 몇 년 뒤 해밀턴 본인이 결투로 사망하는 비극의 복선이 되었다.</p>
<p>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자 최장수 인물이었던 찰스 캐럴 그도 아들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들 찰스 캐럴 주니어 (Charles Carroll Jr., 1775년생)는 일명 &#8216;찰스 캐럴 오브 홈우드&#8217;로 부렸는데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아내를 학대하고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다. 결국 아버지가 죽기 7년 전, 술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p>
<p>또 한번 인용 하지만 &#8220;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8221;는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다.   국가의 기틀을 세우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인지, 아니면 위대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인지, 건국 영웅들의 가정사는 후대에 전해지는 영광만큼이나 어둡고 쓸쓸한 구석이 많다.  역사가들은 건국 아버지들이 국가라는 거대한 &#8216;가정&#8217;을 돌보느라 정작 본인의 자식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거나 소홀했던 면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8220;성인(Saint)의 자식으로 사는 것보다 죄인의 자식으로 사는 게 속 편하다&#8221;**는 당시의 자조 섞인 농담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으면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선다.</p>
<p>참 한가지 빼 먹으면 안될 일이 차남과 삼남 때문에 속썩었던 독립의 기관차 애덤스 선생은 그래도 장남은 잘 두었다는 사실이다.  건국 아버지들의 아들 &#8216;잔혹사&#8217;에서도  그애게 존 퀸시 애덤스(1767년생)라는 걸출한 장남이 있었다는 점은 후인 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p>
<p>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 대통령이 되었으니, 가문의 영광을 제대로 세운 인물이었다.<br />
하지만 존 퀸시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심 이면에 차가운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복합적인 &#8216;엘리트 교육의 부작용&#8217;과 &#8216;부모의 과도한 기대&#8217;가 원인이었다.  퀸시 애덤스가 아버지를 어려워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8220;너는 위대해져야만 한다&#8221;는 압박 때문이었다.</p>
<p>존 애덤스와 아비게일은 장남인 존 퀸시를 아주 어릴 때부터 &#8216;미래의 지도자&#8217;로 찍어놓고 무섭게 몰아붙였다.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 외교 현장을 누벼야 했고, 부모님으로부터 &#8220;네가 잘못하면 가문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한다&#8221;는 식의 편지를 끊임없이 받았다. 그에게 아버지는 따뜻한 &#8216;아빠&#8217;라기보다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자 엄격한 감시자였다.<br />
앞서 언급한 찰스와 토머스, 두 동생이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지는 과정을 보면서 존 퀸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동생들의 타락이 &#8216;아버지의 엄격함을 견디지 못한 결과&#8217;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자신만은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기계처럼 공부와 일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성격이 매우 냉소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p>
<p>존 퀸시는 아버지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해낸 &#8216;건국의 황태자&#8217;였으나, 정작 본인의 일기에는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숨 가빠 했던 고독한 영혼의 기록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위대했으나 아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이름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91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528ec1f8f0226-1.jpg" alt="" width="696" height="410" /></p>
<p>다시 델라웨어 강길로 돌아온다.<br />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까지의 강길은 약 35마일(약 55km) 정도다.  돛을 단 샬럿 바지 범선이 순풍과 썰물(Ebb tide)을 타면 평균 4~5노트(시속 7~9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단순히 계산해도 6~8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br />
이 구간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8216;조석 구간&#8217;이다. 1770년대 선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계보다 물때였다.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썰물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강물 자체의 흐름에 조류의 힘이 더해지면 배가  빠르게 미끄러지듯 내려갔다.<br />
만약 물때를 잘못 맞춰 밀물을 만나면, 배를 강가에 묶어두고 물길이 바뀔 때까지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경우라면 하루가 꼬박 걸리거나 이틀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br />
벤자민과 존 신부를 태운 샬럿도 물때를 맞추기 위해 쿠퍼스 패리에  정박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타는 승객도 있었고 늦은 점심을 해야 했기도 했다.<br />
쿠퍼스 페리 (Cooper&#8217;s Ferry)는  현재의 캠던(Camden) 지역으로, 델라웨어 강을 건너 필라델피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나룻터 바로 앞에는 꽤 좋은 주막(터반, Tavern)이 있었다.<br />
나루터의  페리 터반은 뉴저지 각지에서 온 민병대원, 필라델피아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 영국군의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 반대로 대륙군의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br />
이곳에서 박사와 신부는 우연히 로버트 모리스를 만났다. 필라델피아 출신 대륙회의 맴버로 벤자민의 심복중 심복인 인물이었다. 대륙회의의 비밀 교신 위원회(Committee of Secret Correspondence)를 주도한 인물.</p>
<p>나루에 내리면서 부터 사람들이 박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주막에 들어 섰을 때 깔끔한 정장 신사가 놀란듯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 나왔다. 그가 모리스였다.<br />
“박사님 이게 왠일 입니까?”<br />
그는 와락 안기듯 벤자민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고 벤자민도 반가운 듯 그의 어깨를 안았다.<br />
“바비 자네가 여기 왠 일인가.?”</p>
<p>“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생 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조금 수척해 지신것 같기도 하고&#8230;”<br />
“아무튼 반가우이, 자네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회의 소식이나 들어 봄세.”<br />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보고 급히 드릴께 있습니다.”<br />
그러면서 모리스는 옆의 존 신부에게 아는체를 해 왔다.<br />
“혹시 존 캐럴 신부님 아니십니까?”<br />
벤자민에게 나섰다.<br />
“ 그렇다네, 인사 하시게 이번에 나와 함께 대표단으로 갔던 존 캐럴 신부님 이시네.”<br />
모리스의 표정이 더 환해 졌다.<br />
“ 아주 잘 됐습니다, 이렇게 함께 뵙게 되다니.”<br />
모리스는 존 신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br />
“처음 뵙겠습니다. 대륙회의 밥 모리스 입니다. 신부님 존함은 자주 들었습니다. 4촌 동생 되시는 찰리하고는 막역한 친구 입니다.”<br />
모리스는 찰스 캐럴을 들먹이며 존 신부에게도 깍듯하면서도 친근하게 나왔다. 실제로도 모리스는 찰스와 꽤 교분이 있었고 벤자민에게 보고할 프랑스 일도 찰스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날 존 신부와의 만남은 그 중요한 일에 황금 날개를 달게 되는 일이 된다. 그일은 바로 프랑스로 부터 화약과 무기를 공급 받는 일이었고 종국에는 프랑스 군을 미국 독립운동에 끌어 들이는 중차대한 일이었다.</p>
<p>대륙회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캐럴 형제를 캐나다에 파견하면서 사일러스 딘이라는 인물을 파리로 비밀리에 파견 했다. 딘은 변호사이자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대륙회의 의원 출신 인물이었고. 벤자민이 공식 전권 공사로 부임하기 전에 프랑스의 문을 두드렸던 어찌보면 합중국 최초의 외교관으로 꼽힌다.  그를 발탁, 천거한 인물이 바로 모리스 였다.<br />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734–1806  아래 사진)그는 &#8216;미국 혁명의 자금줄&#8217;이라 불렸던  중요한 인물이다.</p>
<p>모리스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 명이었다. 개인 신용을 담보로 초가 대륙군의 군자금을 마련했을 정도로 재정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추진력이 강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역시 재정력이 막강했던 찰스 캐럴과도 &#8216;자금 운용&#8217;과 &#8216;보급&#8217;이라는 측면에서 말과 뜻이 통했다. 그 또한 찰스 캐럴의 시티 터반 사랑방의 단골 손님이었다.</p>
<p>그는 사일러스 딘을 파리로 보낼 때, 단순히 외교관으로 보낸 게 아니라 &#8216;상업적 대리인&#8217;의 성격도 띠게 했다. 즉, 프랑스의 원조를 끌어내는 동시에 무기 거래를 성사시키는 실무적인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모리스다.<br />
델라웨어 강을 건너기 전, 캠든의 터반에서 존 신부와 모리스가 만난 것은 아주 절묘했다. 후일 따져 보면 이 또한 신의 절묘한 안배 였던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91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robert-morris-min.jpg" alt="" width="727" height="930" /></p>
<p>세 사람은 몇몇 사람들과는 분주한 인사를 나눈 뒤 터반의 구석 자리에 앉아 논의를 시작했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사안이  많아 논의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br />
처음의 안건은 대륙회의 분위기였다.<br />
대륙회의는 그때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라는 견해를 놓고 양분되어 있다고 했다.<br />
모리스는 그때 까지만 해도 온건파의 입장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br />
버지니아의 대표인 리처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빨리 결행 해야 한다는 강경파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는 분위기를 전하면서 아담스, 제퍼슨, 핸콕 , 휫필드 등 여러 이름이 나왔다. 그러면서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br />
“박사님, 떠나시기 전에도 말 씀 드렸지만 독립선언은 시기 상조 아닙니까? 영국과 완전히 갈라서 다른 나라를 만들겠다는 선언인데 우리가 지금 영국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공연히 애꿎은 희생만 엄청나게 더 치루게 되는것 아닙니까?”</p>
<p>“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전쟁은 뭡니까?”<br />
존 신부가 나섰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보니 제퍼슨 이 노인네는 그때 까지 온건파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고 강경파 들에게는 그들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계기로 확실한 강경파로 입장을 굳혔다고 존 신부는 파악하고 있었다. 독립선언 얘기도 나왔기도 했고 무엇보다 대륙군 젊은이들에 대한 보급과 무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전쟁을 빨리 끝낼 요량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온건파들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하는 가 싶어 모리스에게 물었던 것이다.<br />
“우리의 단결과 힘을 과시하고 영국으로 부터 받아낼것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협상을 해야죠, 저쪽이 쥐는 아니지만 쥐를 몰더라도 도망갈 구멍을 내주어야지, 궁지에 몰아 독이 바짝 오르게 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얘기지요.&#8221;<br />
밴자민은 고개만 끄덕이면서 말을 아꼈다.<br />
“그래서 모리스 의원 같은 분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요?”<br />
존 신부가 다시 물었다.</p>
<p>“일단은 내실을 기해 야 하지요 지금의 무기로는 우리 대륙군이 승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공략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 하다는 것 아닙니까?”</p>
<p>실제 모리스는 영국의 강압적인 조세 정책에는 반대했고 저항 했으나, 처음부터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가 대영제국과의 화해와 협상을 선호하는 온건파에 속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륙군의 화력이 너무도 열악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p>며칠 뒤의 이야기이지만 1776년 7월, 독립을 결정하는 투표 당시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완전한 독립 선언이 시기상조라면서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부표를 던지지 않고 기권해 독립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일단 독립 선언이 결정되자 모리스는 &#8220;시민의 의무는 다수결에 따르는 것&#8221;이라는 말을 하면서  8월 2일 미국 독립 선언문에 서명했다.</p>
<p>“박사님 필라에 들어 가시면 저들 강경파들을 다독여 주실거지요? 다른 사람 말은 안들어도 그 사람들이 박사님 말은 들을 테니까요. “<br />
벤자민은 가타부타 말을 않고 따라만 놓고 있었던 마데이라 잔을 들어  들이켰다. 통풍에 술은 금물인데 오늘 같은 날 와인 한잔 쯤이야 싶어 존 신부도 말리지 않았다.</p>
<p>사실 독립선언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식민지의 주인을 자처하는 영국왕과 죽기 살기로 한판 끝까지 붙어 보자는 얘기 아닌가. 벤자민의 표정이 다시 아까의 고뇌에 찬 표정으로 돌아간다.<br />
살살 약을 올리면서 실력을 키워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일격을 날려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밥 모리스 그의 계산적인 생각에 존 신부도 일견 수긍할 점이 있다고 생각 되기는 했다. 그만큼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이기는 일은 당시로서는 요원했기 때문이다.<br />
“박사님, 대답해주세요. 영영 하지말자는 얘기가 아니라 좀더 시간을 갖자는 애기 니까요”<br />
모리스는 마데이라 잔을 내려 놓는 벤자민 노인의 손을 잡으며 응석을 섞어 말했다. 마데이라를 한잔 더 따르려는 그를 존 신부는 눈짓으로 말렸다.<br />
존 신부에게는 왕당파(Loyalist)인 아들 윌리엄과 결별하면서 보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침통한 모습이, 전쟁 승리를 위해 주판알을 튕기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아들 또래 모리스의 응석에 같은 표정이지만 매우 다르게 반응 하는 것이 대비되면서 벤저민의 고독이 더 깊게 느껴졌다.<br />
“마침 프랑스에서 전령이 왔습니다.”</p>
<p>“그렇게나 빨리?”  그말에는 벤자민이 반갑게 대꾸 했다.<br />
“기록적인 편서풍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페킷선의 선장도 유능한 이였고&#8230;”<br />
그러면서 서신 한장을 건넸다.<br />
존 신부는 벤자민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 편지가 사일러스 딘이라는 인물이 파리에서 밥 모리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br />
&#8220;이 서신은 바다 위를 날아온 모양이군!&#8221;<br />
노인은 조끼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더니 편지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p>
<p>18세기 후반, 대서양을 사이에 둔 정보 전달은 오로지 범선에 의존해야 했던 고된 과정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런던이나 파리로 소식을 보내려면 정기 우편선인 패킷선(Packet Ships)이나 일반 상선을 이용해야 했다. 빠른 경로는 대서양의 편서풍(Westerlies)과 멕시코 만류(Gulf Stream)를 이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식민지 → 유럽의 경우 북미 해안에서 멕시코 만류를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면 뒤에서 부는 바람 덕분에 속도가 붙었다. 보통 3~4주 정도 소요됐다.<br />
하지만 반대로 유럽에서 식민지로 돌아올 때는 맞바람과 조류를 거슬러야 해서 훨씬 오래 걸렸다. 남쪽으로 내려가 무역풍을 타고 우회하는 경로를 택하기도 했으며, 보통 6~9주가 걸렸다.<br />
독립전쟁 중에는 영국 해군이 해안을 봉쇄했기 때문에, 미국 특사(벤자민 프랭클린 등)에게 보내는 훈령은 대형 군함보다는 빠르고 작은 쾌속선을 이용해 봉쇄망을 뚫고 야간에 몰래 출항하곤 했다.</p>
<p>사일러스 딘은 1776년 3월 초에 비밀리에 출항했다. 그는 운 좋게 강력한 멕시코 만류와 봄철의 강한 편서풍을 타 25일 만에 프랑스 해안에 닿을 수 있었고 4월초에 파리에 도착 했던 모양이다.<br />
도착 직후 딘은  파리에서 상황 소식을 써서 가장 빠른 사선(Privateer) 편에 보냈던 것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 항로는 6주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지만, 폭풍우를 피하고 항해술이 뛰어난 선장을 만났다면 40~45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5월 하순에 벤자민이 생생한 파리의 상황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p>
<p>편지를 다 읽은 벤자민이 모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br />
“바삐 움직이고 있구만, 수고들 했네. 자네들이야 말로 우리의 동량들 일세,  자네들이 있어 내가 든든해. 사일러스 군이 원하는 것 다 들어 주도록 해야지. 내일 부터러도 급히 움직이세.”<br />
“참 우리 신부님 피에르 보마르세라고 프랑스왕의 측근인사 잘 아시지요?“   벤자민이 존 신부를 쳐다보며 물었다.<br />
“ 보마르세 라고 하셨습니까?”<br />
“ 지난번에 찰스 세뇌르 한테 들었습니다. 파리 라틴어 학교 동창 이라고.”<br />
“ 잘 압니다. 왜 그친구한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br />
“예 그래서 제가 오늘 신부님 만났을 때 그토록 반가와 했던 겁니다.”  모리스가 나섰다.<br />
명석한 존 신부는 모리스가 설명을 다 하기 전에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br />
프랑스왕의 최 측근으로 등극 했다는 시계공 출신 극작가 재주꾼 보마르세가 대륙회의가 프랑스를 공략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맨으로 등장해 있다는 것을&#8230;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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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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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01 Apr 2026 23:20:06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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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2 –  안동일 작   부자의 대화가 평행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자가 이쪽 두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속내를 말 못한다 싶어 신부와 대령이 나가 있으려고 일어 서려는데  당번병이 홍차를 내왔다.  신부와 대령의 차도 가져와 그들이 앉아있는 벽쪽 작은 탁자에 올려 놓았기에 두 사람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2 –</h4>
<h6><span dir="LTR" lang="en-US"> 안동일 작 </span></h6>
<p><span dir="LTR" lang="en-US">  부자의 대화가 평행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자가 이쪽 두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속내를 말 못한다 싶어 신부와 대령이 나가 있으려고 일어 서려는데  당번병이 홍차를 내왔다.  신부와 대령의 차도 가져와 그들이 앉아있는 벽쪽 작은 탁자에 올려 놓았기에 두 사람은 눈짓으로 차만 마시고 일어 나기로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속이 탔던지 우유를 듬뿍 붓더니, 찻잔 바닥을 긁는 스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휘저어 벌컥 들이켰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버지는 아직도 촌티를 벗지 못하고 차 마실 때 달그락 거리고 벌컥 소리를 내고 마십니까? 젠틀맨 답지 않게..”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들아 내가 속이타고 목이 타서 좀 빨리 마셨다. 그런데  젠틀맨은 그런 외형에서 가름 되는 것이 아니란다. 그나저나  이 녀석아 오랜만에 만난 애비 한테 그렇게 면박을 주어야 하겠니?  죽다 살아 온 애비한테&#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러게 그 험지에는 왜 가셨습니까? 고생만 하셨겠죠, 대영제국의 위세는 아직 건재 합니다. 반란의 조짐은 없었지요? 안 봐도 뻔 합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위쪽의 소식을 대충은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다리의 통풍은 좀 어떠십니까?”  </span></p>
<p><span dir="LTR" lang="en-US">처음으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네가 썩이는 속 보다는 덜 아프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제 속만 하겠습니까?”</span></p>
<p><span dir="LTR" lang="en-US">“여기 캐럴 신부님께서 돌봐 주시고 좋은 약을 지어 주셔서 많이 낫기는 했다. 어찌 고마운지&#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말을 듣고 윌리엄 총독이 일어서서 존 신부 쪽을 향해  목례를 보내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어느 교구의 누구신지?”</span></p>
<p><span dir="LTR" lang="en-US">”캐럴 신부는 국교회가 아니라 로만 가톨릭 신부님이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벤자민이 얼른 대답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뭐라구요 천주교라고요?”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의 표정이 단박에 변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버지의 대륙회의는 하다 하다 천주교 미신쟁이, 교황의 꼭두각사들 까지 끌어 들이 셨습니까 ?  하긴 애국적이고 충성스런 국교회 사제 중에는 아버지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겠지요” </span></p>
<p><span dir="LTR" lang="en-US">“허허 자신의 종교가 중하면 남의 종교도 귀한 법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무리 그래도   천주교인 들의 교활한 간계에 놀아 나시면 안됩니다.”</span></p>
<p>&#8220;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로구나.&#8221;</p>
<p><span dir="LTR" lang="en-US">이 대화까지 듣고 신부와 대령은 방을 나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두 부자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예상대로 성과도 전혀 없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허드 대령은 대원들과 나눌 얘기가 있던지 1층으로 내려갔고 존 신부는 복도 한쪽에 있는 쇼퍼에  앉아 묵주 기도를 했다.  7단 쯤 했을 때  붉게 상기된 얼굴로 노인이  방을 나왔고 문을 쾅하고 닫았다. 존 신부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말이 안 통해, 전혀 안 통해”</span></p>
<p><span dir="LTR" lang="en-US">“신부님 내가 아무래도 아들이 아니라 괴물을 키운 것 같소.”</span></p>
<p><span dir="LTR" lang="en-US">침통한 표정의 벤자민은 이 말을 끝으로 트랜튼으로 가는 마차 여정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허드 대령이 오히려 더 미안해 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노인의 표정을 보고 참는 것 같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캐럴 신부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거대한 산이 뿜어낸 광채가 윌리엄에게는 오히려 그늘이 되었고, 그 그늘 속에서 뒤틀린 새로운 권위에 대한 충성심과 비뚜러진 경도가 괴물처럼 자라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관저를 떠날 때 윌리엄은 아버지를 배웅 하지 않았지만 캐럴 신부는 마차에 오르면서 윌리엄이 복도 창가에 서서  이쪽 마차 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으리라. 펄럭이며 마차에 오르는 벤자민의 낡은 외투에는 여전히 몬트리올의 진흙과 약재 냄새가 배어 있어 존 신부의 코를 자극했고 내려다 보고 있는 2층  윌리엄의 총독 제복 단추의 번쩍거림이 눈을 자극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잠시 마차를 내려다 보더니 이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눈길을 바다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라리탄 만 너머에 영국 함대가 오고 있다는 희망을 표현 하는 듯 했다.  벤자민은 그때  마차 창 넘어로 손을 뻗어 따라 나온 청년 민병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두 모습의 대비에 존 신부는 &#8216;윌리엄은 바다 건너에서 영국 대군이 몰려 온다면 대륙군의 좌장인 자신의 아버지를 어찌 해주길 바라고 있을까?&#8217; 하는 생각을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신부는 문득 성경 구절 “어느 집안이나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버텨 내지 못하리라”는 대목(마태오 복음서 12:25) 이 떠올라 간절한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주님, 이들이 서로 다른 깃발을 들었으나 혈연의 끈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니, 정치의 칼날이 부자의 정을 베지 않게 하소서.&#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벤자민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윌리엄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영적 개안(開眼)을 허락하소서.&#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떠나는 마차 안에서 벤자민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눈을 꾹 감고 있을 때, 캐럴 신부가 대신 창밖으로 멀어지는 윌리엄과 그가 갇힌 건물을 향해 조용히 성호(聖號)를 그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허드 대령의 마차는 두사람을 트랜턴 부두 까지 데려다 주고는 돌아 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부두에는 두 사람을 필리까지 데려 다 줄 이번 여행의 마지막 탈것 샬럽 범선이 준비돼 있었다. 트랜턴 까지 말이 없던 벤자민이 부두의 유장한 강물 소리를 들으면서 침묵을 깨고 대륙군 청년 들의 함성 같다는 표현을 했던 때가 바로 이때 였다.  필라로 귀환하는 날 아침에 현명옹이 예지력으로 들은 함성이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시의 범선 샬럽(Shallop)을 타고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 마켓 항구(Market Street Wharf)까지 가는 길은 조류와 바람만 잘 맞는다면 하루 안에 충분히 가능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 시기, 델라웨어 강이나 체사피크 만과 같은 연안 및 강 하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일꾼 배들이 바로 샬럽 이었다.  샬럽은 보통 9~15미터 길이로, 선체가 날렵하고 돛대(Mast)가 하나 또는 두 개 달려 있다. 앞뒤가 뾰족한 대칭형 구조가 많아 강물에서 방향 전환이 용이했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다닐 수 있도록 바닥이 비교적 평평하지만, 바다로도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구조를 가졌다. 바람이 없을 때는 노(Oar)를 저어 갈 수도 있었다. 필라와 트렌튼 같은 거점을 오가며 승객을 실어 나르거나, 가벼운 화물(밀가루, 술통 등)을 운반하는 &#8217;18세기의 택시이자 소형 트럭&#8217;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물때 때문에 오전에 배에 오른 벤자민과 존 캐럴 신부는 갑판 위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오전의 침울함을 벗어난 벤자민이 의외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물어 왔기 때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지녀 교육, 자식 양육의 고충과 희망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어떻게 나와 있냐는 질문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침에 떠올랐던 마태오 복음서 구절을 전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싸우면 망하게 돼 있다는 얘기를 어찌 하는가.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신명기 6 장에 나오는 구절이  가장 근본적인 구절입니다. 부모의 역할이 단순히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새기는 작업임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지요. &#821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8230;&#8217;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span></p>
<p>어쩐지 오늘의 박사에게 불리한 구절이기는 하다.</p>
<p><span dir="LTR" lang="en-US"> &#8220;박사님,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의 마음에 아무리 정성껏 진리를 새겨 넣어도, 결국 그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오직 주님과 그 아이 자신만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심는 자는 우리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니까요.&#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에페소서 6장은 효도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약 구절입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의 절제를 강조하는 부분이 박사님의 의 상황과 맞물릴 수 있습니다.  &#8216;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8230;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8217; 아렇게 되어 있습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고개를 끄덕이는 벤자민의 얼굴 위로 강바람 훈풍이 불었고 흰 머리가  보기좋게 날렸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성경은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부모에게도 &#8216;노엽게 하지 말 것&#8217;을 명하셨지요. 아드님과의 갈등은 어쩌면 두 분 모두가 서로에게 품은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서 생긴 생채기일지도 모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자책하는 벤자민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인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을 더 산란하게 만들지 않는가 싶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사야서를 들려 주는 것으로 신부는 성경 강좌를 끝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한 이사야서의 구절입니다. &#8216;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8217;&#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세상에 자식을 포기할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설령 그 자식이 아버지를 등지고 왕의 편에 섰다 해도, 박사님 당신의 가슴 속엔 여전히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 긍휼함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형벌이자 축복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벤자민은 무슨 뜻에서 인지 이렇게 말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더군요. 자식 놈은 제 갈 길을 가버렸고&#8230; 내 자식 농사는 흉년인 모양이오.   정작 제 자식은 어쩌지 못하고서 다른 집 아들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이 늙은이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 지겠지요 신부님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으렵니다.&#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지력으로 들은 대륙군 청년 장병들의 함성이 그를 다시 강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사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 신부가 물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박사님, 성서에는 &#8216;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8217;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드님이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여도, 결국 당신이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언젠가는 기억하게 될 겁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지, 입을 보고 자라지 않으니까요. 지금 당신이 가려는 독립의 길이 곧 아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박사님, 아드님은 지금 자신이 믿는 &#8216;왕에 대한 순명&#8217;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의 법은 그를 반역자라 부르겠지만, 아버지로서 당신이 하신 마지막 설득은 이미 하늘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아들을 놓아주는 것 또한 박사님이 짊어지셔야 할 십자가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지도자의 길은 고독한 법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굴복시키지 못하면서 남의 자식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그 모순이 바로 이 혁명의 가장 아픈 가시겠지요. 하지만 박사님의 정직한 고통이 오히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울림이 될 것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샬럽선 갑판 위로 물새가 날아들어 앉았다. 갈매기였다,  강 이지만 하구였기에 그랬다.  노란 주둥이가 유난히 햇빛에 반사 됐다. 존 신부는 아침의 윌리엄 황금단추 반사가 떠올랐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16;황금은 인간을 꼭 황페하게 하거늘&#8230;&#8217;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잠시 </span><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span><span dir="LTR" lang="en-US">의 추후 행적에 대해 알아본다. 앞으로는 기회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말한대로  며칠 뒤 그는 </span><span dir="LTR" lang="en-US"> 애국파 군대에 의해 체포되</span><span dir="LTR" lang="en-US">어</span><span dir="LTR" lang="en-US"> 코네티컷의 감옥에서 2년 동안 독방에 갇혀 가혹한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윌리엄이 투옥된 동안 그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대륙회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벤자민은 그때 프랑스에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77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Washington_Crossing_the_Delaware_by_Emanuel_Leutze_MMA-NYC_1851.jpg.webp" alt="" width="500" height="287"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 프랭클린 총독의 체포는 독립 선언 직전 뉴저지가 &#8216;중도 관망&#8217;에서 에서 &#8216;독립&#8217;으로 급격히 선회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뉴저지 지방 의회(Provincial Congress)는 1776년 6월 15일 체포령을 발령한다. 그를 &#8220;민중의 자유에 대한 적&#8221;으로 선포했다.  6월 17일 나다니엘 허드 대령이 이끄는 민병대가 퍼스 엠보이 주지사 관저에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고  6월 21일 에는 벌링턴(Burlington)으로 이송해 지방 의회 에서 심문을 받게 했다. 그때도 그는 의회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맞섰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1776년 6월 25일  대륙회의는 윌리엄이 뉴저지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그를 코네티컷으로 이송해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선언이 채택되던 날, 윌리엄은 뉴저지를 떠나 코네티컷의 감옥으로 향하는 압송 길에 있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2년여의 혹고한 옥고를 치룬 그는 1778년 대룩군과의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된다. 영국 왕실이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영국군이 점령 중이던 뉴욕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흩어져 있던 왕당파들을 규합해 왕당파 연합 위원회(Board of Associated Loyalists) 를 창설하고 의장직을 맡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 조직은 영국 정규군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준군사 조직이자 유격대 성격을 띠었다.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등지에서 독립 애국파(Patriot) 거점을 습격하고 물자를 탈취하는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밤새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의 농장, 철공소 등을 습격했다. 이들은 &#8216;베이컨의 난민들(Bacon&#8217;s Refugees)&#8217;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들 왕당파 게릴라들은 애국파의 공격에 대해 똑같이 폭력으로 맞대응해야 한다는 &#8216;보복(Retaliation)&#8217; 원칙을 고수했다. 특히 1782년  애국파 장교 조슈아 허디(Joshua Huddy)를 생포해 교수형에 처한 사건은 큰 논란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미-영 간 평화 협상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윌리엄의 왕당연합은 유격전뿐만 아니라 뉴욕을 중심으로 전역에 비공식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변절 계획을 사전에 감지하고 이를 영국측에 전달하는 과정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 프랭클린은 이러한 강경한 활동으로 인해 독립 후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당파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으며, </span><span dir="LTR" lang="en-US">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국으로 망명</span><span dir="LTR" lang="en-US">해야 </span><span dir="LTR" lang="en-US">했</span><span dir="LTR" lang="en-US">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이 </span><span dir="LTR" lang="en-US">1785년 영국 근처에서 그를  만났으나, 이는 주로 재산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사무적인 만남이었을 뿐 감정적인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span><span dir="LTR" lang="en-US">고 사가들은 적고 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때 1785년 7월,  80세의 고령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8년여간의 프랑스 공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는 길이었다. 이때 영국 해협을 건너는 도중,  아들 윌리엄과의  만남이 성사됐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정확한 장소는 영국 남부 해안의 항구 도시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벤자민은 7월 24일부터 27일 까지 약 3일간 체류했다.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윌리엄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왔고, 두 사람은 &#8216;스타 인(Star Inn)&#8217;이라는 여관에서 만났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사가들은 이 만남이 화해의 장이라기보다는, 냉정한 비즈니스적 정리에 가까웠다고 적는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관계 회복을 원했으나, 벤자민의 태도는 차가웠고 주로 윌리엄이 미국에 남겨두고 온 부동산과 개인 자산의 처리 문제, 그리고 윌리엄의 아들이자 벤자민의 손자인 윌리엄 템플 프랭클린의 장래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끝내 윌리엄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적는다. 그는 7월 27일  배에 올랐고,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본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들 윌리엄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영국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13년 11월 1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영국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에 의지해 살았으며 1790년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유산 상속에서도 거의 제외 돼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쓸모없는 땅 일부만 상속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기록 된다.  그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구 교회(St Pancras Old Church) 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철도 공사 등으로 인해 정확한 묘소의 위치는 유실되었다고 적혀진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사가들이야 이처럼 냉정하게 기록 했지만 작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 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애틋하게 안타까와 했고 이면적으로는 은밀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span><span dir="LTR" lang="en-US"> 그리고 그 무렵 윌리엄은 자신이 &#8216; 정말 잘못했구나&#8217; 자신이 &#8216;역사의 죄인이 되었구나&#8217; 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후회 하고 있었다.  또  두 사람 사이에는 윌리엄의 아들 탬플이 있었다. 그리고 탬플의 딸 앨렌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템플 프랭클린은 1762년 윌리엄 프랭클린의 사생아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막 뉴저지 총독으로 임명 됐던 때였다. 템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투자 할아버지 편을 들어 파리에 함께 가서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부분은 다시 자세히 다룬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겉으로는 냉담했지만, 사실 아들 윌리엄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사우샘프턴 만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벤자민은 윌리엄에게 미국에 남은 땅과 자산 처리 일부를 맡겼다.  표면적으로는 &#8216;비즈니스&#8217;적 이었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윌리엄이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8216;은근한 배려&#8217;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리고  벤자민은 손자 템플을 영국에 남게 해 윌리엄에게 보내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게 했다. 본인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자존심과 정치적 입장 대신, 자신의 또다른  소중한 분신을 보내 아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했던 부정이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말년에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닫고 자책했다. 이 사실은 여러곳에서 확인된다.  윌리엄은 영국으로 건너간 후,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영국 정부로부터도 뜨뜻미지근한 대우를 받았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번영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지키려 했던 구체제(영국 왕정)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허망함과 회한은 작은것이 아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나중의 얘기지만 이들 프랭클린 부자와 조손은 3대에 걸친 사생아가 등장해 집안 화해의 뜨끈한 난로로 등장한다. 바로 탬플 프랭클린의 딸인 엘렌 이다.  엘렌 프랭클린은 1798년     템플이 런던 시절 사귀었던  프랑스계 여인 블랑슈와  라파예트(Blanchette de La Fayette)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증조부인 벤자민 사후 였기에 증조부를 보지는 못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템플이 파리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낼 때, 그의 딸 엘렌은 런던에 있는 할아버지 윌리엄이 키웠고 엘렌은 할아버지와 깊은 유대감을 가졌다.  윌리엄의 아내(엘리자베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그는 영국에서 재혼했지만 말년은 고독했다. 이때 손녀 엘렌이 그의 곁을 지키며 그를 간호했던 것이다. 프랭클린 가문의 끊어질 듯 이어진 혈연의 끈을 보여주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대를 하나씩 건너 뛴 사생아들의 효성과 효도.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실제로 앨렌은 윌리엄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고 윌리엄의 유언장에는 엘렌에게 유산 대부분을 남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그녀가 윌리엄의 말년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날 델라웨어 강을 따라 내려 가면서 윌리엄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노 정객과 젊은 신부는  돛이 펄럭이는 소리와 물살 가르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대화를 이어 갔지만 이같은  끝은 몰라도 중간 과정은 너무도 참혹하고 극단적인 대립이 계속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일행이 탄 배 옆으로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화물 플랫보트 바지선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덩치 큰 플랫보트들이 강 한 가운데를 갈리치는 물길을 내며 내려갔지만 물길은 어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벤자민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 터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이 무렵 부터 14년을 더 살아 1790년도에 84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때 였다면 분기 탱천해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음직 하지 않은가.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살아 보니 인생 별것 없더라, 너무 애쓰고 살지 말아라.”   </span></p>
<p>세상 떠나기  5년 전인 1785년  귀국 길에  영국의 외지고 작은 항구 마을로 아들을 불러  남들이 들을새라 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 얘기 아닌가 싶다. 그때는, 10년 전에는,  20년 전에는, 왜 이 이야기를 못 했을까 싶었을 게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보면 그때도 최선의 선택이었고 당시도 최선의 선택 이었다.  델라웨어 강 위에서 존 캐롤 신부가  성서를 인용하며 들려준  <span dir="LTR" lang="en-US">하늘의 책에 기록된 설득과 판단 이었고  박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였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거대한 제국, 위대한 제국을 세운 &#8216;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8217;이 짊어 져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에 정작 자기 가정의 울타리 무게는 제대로 올려지지 못했거나 하나같이 자식 복이  없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실은 우리의 주인공 예수회 으뜸 종 찰스 캐럴도 이 아이러니에서 비켜가지 못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계속)</span></p>
<p><span dir="LTR" lang="en-US">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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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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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25 Mar 2026 16:24:17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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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1 –   안동일 작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프랭클린 부자의 갈등과 비극적인 파경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높고도 깊게 충격과 반향을 던진 일이었다. 그런데 워낙 벤자민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인지, 당시에도 또 지금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벤자민을 비난하고 매도하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1 –</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프랭클린 부자의 갈등과 비극적인 파경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높고도 깊게 충격과 반향을 던진 일이었다. 그런데 워낙 벤자민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인지, 당시에도 또 지금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벤자민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의 편에 서서 얼마나 고통 스러웠겠냐고 자식농사 처럼 힘든게 어디 있냐며 그를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네 &#8216;청문회 문화&#8217;로는 당장 낙마감인데도 그렇다.</p>
<p>두 사람의 파경은 개인적인 성향과 이념, 성격의 차이, 그리고 종교의 차이를 넘어, 한 가정이 국가적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으로 평가받고 있다.<br />
딩초 읠리엄은 벤자민의 자랑거리인 맏 아들이었다. 그런데 윌리엄은 출생 부터 사연이 있었다. 바로 혼외자, 사생아 였던 것이다. 벤자민은 처음부터 윌리엄을 외면하지 않았다. 윌리엄이 벤자민의 친자(Biological son)라는 사실은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8216;과정&#8217;은 공식적인 법적 절차보다는 실질적인 양육과 사회적 인정을 통해 이루어졌다.<br />
윌리엄은 1730년 (혹은 1731년 초)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당시 부인 데보라 리드(Deborah Read)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하기 직전, 혹은 직후에 &#8216;혼외자&#8217;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윌리엄의 생모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역사적 수수께끼다. 하녀였다는 설, 거리의 여인이었다는 설 등 분분하지만 벤자민은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br />
1730년 9월, 데보라 리드와 결합하면서 벤자민은 갓 태어난 윌리엄을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키울 것을 제안했다. 데보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윌리엄은  자연스럽게 프랭클린  가문의 일원이 됐다.<br />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혼외자를 자신의 집에서 직접 키우고 이름을 물려주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친자 인정의 행위였다.</p>
<p>기록에 따르면 윌리엄은 체격이 좋고 지적인 면모 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단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는 우리네 옛말이 18세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그대로 통용됐던 셈이다. 윌리엄은 외모부터 기질까지 아버지 벤자민을 쏙 빼닮아, 혈액 검사는 물론 유전자 검사는 생각도 못했던 그 시절 당대 사람들도 그가 벤자민의 친자임을 의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br />
벤자민은 윌리엄에게 자신과는 달리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고 아들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잘 성장 했다. 1740년대 후반, 윌리엄은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군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고 이후 아버지가 전기 실험을 할 때(그 유명한 연 날리기 실험,  위 삽화) 곁에서 돕는 가장 신뢰받는 조수 이기도 했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 인쇄기를 직접 돌릴 정도로 어깨가 벌어지고 힘이 좋은 체격이었다. 윌리엄은 그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키는 아버지보다 더 컸다고 전해진다.<br />
벤자민이 특유의 유머와 친화력으로 필라는 물론 파리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윌리엄 또한 런던 상류사회에서 &#8216;매력적인 신사&#8217;로 통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상당했다.<br />
외모는 닮았지만, 그 외모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 벤자민은 소박한 갈색 코트를 입고 시민으로서의 실용적인 모습을 고수했지만 윌리엄은 아버지가 물려준  외모에 화려한 영국식 정장과 가발을 더해 &#8216;영국 귀족&#8217;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애썼다. 자신의 출생(혼외자)에 대한 결핍을 완벽한 외모 가꾸기와 귀족적 태도로 보상받으려 했다고도 분석 된다. .</p>
<p>벤자민 프랭클린의 자녀 관계는 생각보다 단출하면서도 그 운명은 사뭇 달랐다. 벤자민에게는 공식적으로 2남 1녀가 있었지만, 성인으로 성장하여 이름을 남긴 자녀는 윌리엄(장남)과 막내딸 샐리(Sarah &#8220;Sally&#8221; Franklin) 둘 뿐 이다. 애칭이 &#8216;프랭키&#8217;였던. 차남 프랜시스 (Francis 1732~1736)는 4살 때 천연두로 요절해 벤자민이 평생 가슴에 묻었다. 당시 벤자민은 &#8220;아이에게 예방접종(인두법)을 하지 않은 것이 내 평생의 한&#8221;이라며 자책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br />
장녀 사라 &#8216;샐리&#8217; (Sarah Franklin Bache) 1743~1808) 는 벤자민이 가장 아꼈던 딸로, 독립 전쟁 당시 부상병들을 돕는 등 아버지를 극진히 보필한 효녀로 꼽힌다. 윌리엄과 샐리는 무려 13살 차이가 나는데 윌리엄이 영국 귀족적인 화려함과 권력을 지향했다면, 샐리는 아버지 벤자민의 &#8216;실용주의&#8217;와 &#8216;애국심&#8217;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프랑스 사절로 가 있을 때 필라델피아에서 살림을 도맡고 독립군을 위해 옷을 짓던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br />
윌리엄은 자라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사생아 라는 사실을 알았다는데  벤자민의 부인 데보라를 늘 엄마라고 불렀고 샐리도 그를 친 오빠로 알고 컸다. 집안은 화목한 편이었다.<br />
필라의 명문 유팬을 나온 윌리엄은 아버지의  &#8216;연 실험&#8217;등 과학 실험을  돕는 등 조수 역할을 충실히 했고  벤자민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는 비서로서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p>
<p>1750년대 후반 부터 밴자민은 외교관으로서 런던을 자주 방문 했고 더러는 장기간 머물기도 했는데 그때 마다 윌리엄을 동반했다. 이때 그는 단순히 아들로서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좌관 역할을 잘 수행하며 영국의 고위층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br />
윌리엄은 런던에서 명문대에 입학해  법학등 을 공부하며 신사로서의 소양을 갖췄다. 그가 법학을 공부한 학교가 미들 템플 대학(원) (Middle Temple) 이다. 찰스 캐럴과 동문이다.  벤자민은 아들을 여봐란 듯 &#8216;영국 신사&#8217;로 키우고 싶어 했고, 애써 당시 영향력 있는 귀족 정치가였던 뷰트 백작(Earl of Bute) 등과 교류하게 했다.<br />
1762년, 윌리엄은 불과 31세의 젊은 나이에 뉴저지 왕실 주지사(Royal Governor)로 임명된다. 이 파격적인 인사의 이면에는 몇 가지 절묘한 이유와 맞아 떨어진 상황이 있었다.<br />
당시 벤자민은 영국 정부 내에서 매우 존경받는 학자이자 식민지 대리인이었다. 영국 정부는 벤자민의 환심을 사고 그를 영국 편으로 확실히 묶어두기 위한 &#8216;당근&#8217;으로 그의 아들에게 주지사 자리를 내 줬던 것이다.  식민지 전역의 젊은 인재들에게  던지는 긍정 효과도 십분 기대 했을 게다. 벤자민의 친구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던 당시의 정가 최고 실력자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br />
윌리엄이 혼외자(사생아)라는 사실은 당시 상류 사회에서 이는 큰 약점이었으나, 벤자민의 명성과 정치적 줄대기가 이를 덮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프랭클린 집안의 사생아 전통은 그후 3대에 걸쳐 계속 된다. 윌리엄도 사생아 탬플을 낳았고 탬플도 사생녀 엘렌을 낳았다.<br />
아무튼 당시 벤자민은 아들의 주지사 임명을 당연히 무척 기뻐 했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아들이 영국 체제 내에서 성공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사실 빈한한 가정 출신에 무학에 가까운 프랭크린으로서는 기적을 만든 셈 아닌가.</p>
<p>그때 윌리엄의 총독 임명은 영국 본토와 식민지 전역에 커다란 반향과 화제를 몰고 오게 했고, &#8216;역시 닥터 프랭클린&#8217;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했으며 식민지 사람들은 장원급제한 동리 청년을 축하하듯 저마다 &#8220;그럴줄 알았다&#8217; 며  윌리엄을 칭송 했던 일대 사변이었다.   벤자민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을 게다.<br />
&#8220;내 아들이 영국 국왕의 대리인 총독이 되었으니, 이제 식민지와 본국 사이를 잇는 훌륭한 가교가 되겠지?&#8221;</p>
<p>그런데  벤자민은 아들을 &#8216;영국 시스템의 핵심&#8217;에 앉혀 놓았는데, 정작 본인은 나중에 그 시스템을 부수려는 &#8216;혁명가&#8217;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장 견고한 &#8216;충성파의 굴레&#8217;를 씌워준 사람이 역설적으로 아버지였던 셈이다. 산과 골을 만든 아이러니다.</p>
<p>윌리엄은 진심으로 영국식 입헌 군주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통치 형태라고 믿었다. 특히 한 세기 전의 명예 혁명은 세계사를 바꾼 쾌거 였다고 기염을 토했다.<br />
뉴저지 주지사로 부임한 후, 그는 꽤 유능한 행정가였다. 도로를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식민지인들의 신망을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독립의 기운이 거세지면서, 그는 &#8216;아버지를 따를 것인가&#8217;와 &#8216;국왕에게 한 맹세를 지킬 것인가&#8217;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p>
<p>1764년의 사건은 두 사람의 분열이 시작된 전초전이었고 고랑이 파이기 시작한 사건 이었다.<br />
그때 벤자민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대리인 자격으로 런던을 다시 찾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를 소유하고 있던 펜(Penn) 가문의 특권에 반대하며, 그 식민지를 국왕 직할령으로 바꿔달라고 청원하는 한편 인지세의 부당함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프랭클린의 요청을 냉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거세게 비난했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나서면 본국(영국) 정부가 식민지의 입장을 이해해 악법을 철폐 할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영국에 왔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믿음 과는 달리  오히려 &#8220;건방진 식민지인&#8221; 취급을 받으며 큰 모욕을 당해야 했다. 특히 인지세법(Stamp Act) 문제로 영국 정치인들에게 &#8220;은혜를  모르는 미개한 식민지인의 대변인&#8221;이라며 조롱을 받기도 했다.</p>
<p>벤자민에게 더 큰 문제는 아들 윌리엄의 태도였다. 윌리엄은 당시 뉴저지 총독으로 갓 부임해 뉴저지에 있었다. 벤자민의 기대는 아버지가 영국에서 수모를 당하고 식민지의 권익이 침해받는 상황이니, 아들인 윌리엄도 자신과 뜻을 같이해 영국 정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아버지를  옹호해 주길 바랐다.<br />
하지만 윌리엄은 아버지가 겪는 수모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직무를 유기하거나 영국 정부에 반기를 드는 어떤 행위도 거부했다. 벤자민은 아들에게 자신을 옹호하고 입장을 설명 해주는 편지라도 영국 요로에 보내라고 요청 했지만 윌리엄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윌리엄은 뉴저지에서 영국 정부의 정책(인지세법 타운센드법 등)을 적극 옹호하고 실행 했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이해 하는 척 했지만, 공식 입장과 오고가는 문서 에서는 영국 본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영국에서 겪는 수모를 보며 오히려 &#8220;아버지가 너무 급진적이라 일을 그르치고 있다&#8221;고 언급했고, 자신은 더 더욱 철저히 영국 관료 사회에 편입되려 노력했다.</p>
<p>벤자민은 이를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8216;배신&#8217;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아들을 위해 쌓아온 인맥과 배경이 결국 아들을 영국 편에 서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노여워했다.<br />
그런 반목이 10년  지속 되었고 1774년 칵핏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br />
칵핏(The Cockpit)은 원래 런던 화이트 홀 궁전 내에 있는 방으로, 과거 헨리 8세가 닭싸움(Cockfighting)을 구경하던 장소였다. 18세기에는 영국 국왕의 자문기구인 추밀원(Privy Council)이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던 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역시 정치적인 &#8216;난도질&#8217;을 당하게 된다. 1774년 1월 29일 공포의 1시간 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br />
사건의 발단은 런던에 상주하고 있던 펜주 대리인 프랭클린이 매사추세츠 주지사 토머스 허친슨의 비밀 편지(식민지를 탄압해야 한다는 내용)를 입수해 폭로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반역 행위로 간주하고 프랭클린을 칵핏으로 소환했다.<br />
35명의 추밀원 의원들과 구경꾼들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마치 닭싸움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처럼 프랭클린이 망신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0년 대 중반 이후 영국내 벤자민의 신망은 양쪽으로 극명하게 갈려지기 시작 했다. 그를 시기 질투하는 적들이 많아지기 시작 했던 것이다.<br />
공격수로 법무상 알렉산더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나섰다. 그는 1시간 동안 프랭클린을 향해 &#8220;도둑&#8221;, &#8220;선동가&#8221;, &#8220;신뢰할 수 없는 인간&#8221;이라며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퍼부었다.<br />
프랭클린은 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그 모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당시 그가 입었던 푸른색 벨벳 코트는 훗날 그가 독립 전쟁의 승리를 확정 짓는 조약에 서명할 때 다시 입음으로써 복수를 완성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p>
<p>이 사건 전까지 프랭클린은 어떻게든 영국과 식민지를 화해시키려 했던 온건파였다. 하지만 칵핏에서의 수모를 겪은 후, 그는 영국 제국 내에서 식민지인은 결코 평등한 대접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8220;그는 칵핏에 영국인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미국인이 되어 걸어 나왔다.&#8221; 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이 사건은 그를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모시켰다.</p>
<p>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들 윌리엄 (아래 사진)은 여전히 뉴저지 주지사로서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대중 앞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인격 살인을 당했는데도, 아들 윌리엄은 영국 정부의 편에 서 있었다. 벤자민은 윌리엄이 총독직을 던지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함께 싸워주길 바랐지만, 윌리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65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William_Franklin_painting_attributed_to_Mather_Brown.jpg" alt="" width="299" height="361" /></p>
<p>칵핏 사건 직후 프랭클린은 명예직에 가까웠던 13개 식민지  통합 우체국장직에서도 해임된다. 영국에서의 모든 사회적 지위가 박탈된 것이다. 펜주 의원직도 펜 가문 총독에 의해 박탈 된 때였다.  반면 아들은 여전히 영국의 왕실 총독으로 남아 있었으니, 두 사람의 길은 이때 사실상 완전히 갈라진 셈이다.<br />
두 사람 사이를 봉합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1775년 8월에 있었다. 벤자민이 영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뉴저지의 사우스 햄프턴에서 부자가 만났다. 독립의 기운이 사방에서 활활  불 붙고 있었고 전쟁은 이미 시작된 때였다.<br />
벤자민은 아들에게 &#8220;이제 영국과의 관계는 끝났다. 총독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에 합류하라&#8221;고 설득했다.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총동원해 아들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br />
윌리엄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8220;저는 국왕과 교회에  충성을 맹세한 몸이며, 반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8220;고 맞섰다.  그러면서 당시 막 결성된 대륙군은 오합지졸이며 부랑아 들의 집합이라고 폄훼 했다.  세계 최강 영국군이 있는 한 결코  독립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맞섰다. 이 만남은 화해가 아니라 결별이 되었다. 벤자민은  유언장에 윌리엄에 대해 &#8220;그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그에게 줄 유산이  없다&#8221;고 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캐럴신부의 영향을 받은 벤자민은 후일 유언장을 고쳐 캐나다의 황폐한 땅을 아들에게 물려 주기는 한다.</p>
<p>그런데 윌리엄의 이런 완고한 입장에는 그가 빠져든 영국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 성공회, 종교도 크게 한 몫했다.<br />
윌리엄은 편지 마다 특히 초기편지에는 성공회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곤 했다.  어린시절에는 청교도 회중교회 신자였고 중 장년에 이르러서는 이신론자를 자처했던 벤자민이 필라에서 기반을 닦은 뒤 성공회 교회에 출석 했던 이유도 물론 영국 정가를 의식한 속내도 있었겠지만 아들의 적극적인 권유도 한몫 했다고 보인다.</p>
<p>영국 성공회는 (Anglican Church)는 카톨릭의 전통과 개신교의 신학을 동시에 수용하는 &#8216;개혁된 카톨릭(Reformed Catholic)&#8217;이자 중도(Via Media)를 걷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적 전례를 중시하면서도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주요 특장으로 꼽힌다. 성공회는 &#8220;교황 없는 천주교&#8221;이자 &#8220;전례가 있는 개신교&#8221;의 형태를 띤, 전통과 개혁이 조화된 보편교회라는 것이다.  내부자들의 긍정적인 주장이다.</p>
<p>윌리엄은 벤자민에 보낸 편지에서 특히 성공회의 3대 근거, 전통, 성서, 이성을 들면서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두되, 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신앙을 풍성하게 한다는 얘기였다. 프랭클린 답게 이성에 방점이 찍힌다. .<br />
사도적 계승을 유지 중시하는 보편교회라면서 말씀과 성사의 균형이 이루어 져 있다고 했다. 설교와 성찬례를 동등하게 중요시한다는 얘기다. 구원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되, 인간의 협력(책임)을 강조하는 신인 협력설을 따르고 있어 온건한 칼뱅 주의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꽤 조리있는 분석이다.<br />
윌리엄은 성공회가  중도(Via Media) 중용을 지키며, 교리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정직하게 신앙을 고민하고 사유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열린 토론을 지향한다고 자랑했다.  공동체와 사회 변혁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꼭 맞는 믿음이라고 강조 했다. (69년 켄터베리 주교로 부터 성공회 훈장을 받은 직후의  편지)<br />
이렇듯 읠리엄은  성공회에  열렬하게 빠져 들었고 계속 &#8216;신의 기호&#8217;  &#8216;국왕 폐하의 안녕&#8217;을 되뇌었다.</p>
<p>그 사이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편지가 오갔다 윌리엄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공경하는 어조를 유지하지만, 행간에는 &#8220;아버지는 현실을 모른다&#8221;는 오만한 자기 생각과 &#8220;나는 이제 국왕을 대리하는 뉴저지의 통치자다&#8221;라는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br />
1764년 총독 관저(Perth Amboy)에서 아버지가 런던에서 모욕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윌리엄은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그 순간  부관을 시켜 총독 제복을 가져오라했고 영국왕의 초상화 앞에서 화려한 총독 제복의 단추를 채우며 &#8220;나는 아버지처럼 무시당하지 않겠다&#8221;고 다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칵핏 사건 때도 대동소이 했다.<br />
이랬던 그는 세월과 상황이 변해 연금 당해 있었고 조만간 체포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장원급제의 영광이 역모의 위험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아버지가 지역 민병대 대장과 막 서로 마음을 연 천주교 젊은 신부의 권유로 마지막으로 찾아 갔던 것이다.</p>
<p>그날 허드 대령이 이른 아침 여관으로 마차를 몰고 와 벤자민과 캐럴은 함께 퍼스 앰보이로 향했다.<br />
퍼스 앰보이 총독 관저는 &#8216;프로프라이어터리 하우스(Proprietary House)&#8217;라 불리우는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8216;왕실 총독 전용 관저&#8217;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규모의 육중한 조지아풍(Georgian) 저택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였다<br />
관저에는 적지 않은 대륙군 민병대원들이 꽤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정문 뿐 아니라 현관 그리고 복도며 집무실 앞에 까지 총을 멘 민병대원들이 서 있었다. 윌리엄의 출입이 극도로 제한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관저는 이미 &#8216;금칠한 감옥&#8217;이 되어 있었다.<br />
허드 대령과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벤자민과 존 케럴,  박사와 신부의 출입은 매우 까다로왔을 것이 틀림 없었다.</p>
<p>현관 문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과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지만, 그 화려함이 오히려 벤자민의 낡은 코트와 대비되어 윌리엄의 &#8216;고립&#8217;을 부각하고 있었다. 캐럴 신부도 로만 칼라를 매고 있었지만 그의 양복도 매우 낡고 더러워져 있었다.<br />
“신부님, 내가 무리해서 아들에게 안겨준 &#8216;지위&#8217;와 &#8216;명예&#8217;가 결국 아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구료.”<br />
벤자민은 화려한 저택 내부와 벽 한면을 거의 채우고 있는 영국왕 초상화를 를 보며 &#8220;내가 너를 왕의 종으로 키웠구나&#8221;라는 자책 섞인 분노가 서늘하게 깔렸던지 옆의 캐럴 신부에게 나직히 말했다.</p>
<p>윌리엄은 2층 집무실에 있었다. 서재를 겸한 관저내 그의 공간 이었다.<br />
병사 한사람의 안내로 벤자민과 캐럴, 그리고 허드가 방에 들어 섰다. 관저의 집무실도 꽤 넓은 편이었다. 호화로운 마호가니 큰 책상과 여섯개의 의자가 있는 타원형 태이불이 있었고 벽쪽으로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br />
&#8220;반역자들의 수장께서 내 집에 웬일이십니까?&#8221;<br />
번쩍 번쩍 빛나는 총독 제복을 입은 윌리엄은 벤자민 일행이 들어서자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걸어 오기는 했지만 첫 언사는 너무도 무례하고 가시가 돋혀 있었다.<br />
&#8220;얼굴은 보기 좋구나 빌리야&#8221;<br />
하지만 벤자민은 부드럽게 응대 하며 테이블로 걸어 가 앉았다.<br />
&#8220;그럼 제가 뭐 죽을 상을 하고 있어야 됩니까?&#8217;<br />
윌리엄도 맞은편에 앉았다. 캐럴과 허드는 아직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상황을 보아 두 부자의 시간을 주기 위해 나가기로 했었다.<br />
“집에 있으면서도 늘 이렇게 차려 입고 있냐?”<br />
“반란의 세력 들에게 대영제국과 국왕 폐하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입었습니다.”</p>
<p>“아직도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영국은 이미 우리 부자를 버렸다. “<br />
“아버지를 버렸겠지요.”<br />
&#8220;다시 생각해 볼수 없겠니?”<br />
“그런 말씀 하시려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8217;<br />
&#8220;나도 오고 싶어서 온게 아니라 허드 대령이 하도 졸라서 왔다.”<br />
“대령은 무슨 대령 입니까? 부랑자 집단의 두목이지.”<br />
“허허, 조만간 너에 대한 체포가 있게 된다는 구나, 체포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br />
&#8220;지금도 놈들은 불경하게 저를 감금하고 있습니다.&#8221;</p>
<p>&#8220;체포 되면 감옥으로 가야 하는데 네가 감옥생활을 견딜 수 있겠니?&#8221;<br />
“두렵지 않습니다. 당장 처형만 시키지 않는다면 저는 감옥에서도 국왕 폐하의 함대를 기다릴 것입니다.”<br />
“망나니 같은 불효자식 . 말이 소용이 없구나&#8221;<br />
&#8220;마음대로 생각 하십시오&#8221;   (계속)</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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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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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hu, 19 Mar 2026 03:24:35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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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비숍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닥터 프랭클린’ 2 –  안동일 작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함께 여행을 떠나 보라는 말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는 몬트리올 에서 필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서로를 잘 알수 있게 되었다. 특히 존 캐럴 신부는 벤자민을 향한 평소의 존경심에 더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비숍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닥터 프랭클린’ 2 –</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함께 여행을 떠나 보라는 말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는 몬트리올 에서 필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서로를 잘 알수 있게 되었다. 특히 존 캐럴 신부는 벤자민을 향한 평소의 존경심에 더해  그의 인간미에 매료되어 호감이 급상승했다. 사람들이 왜 그를 그리 아끼고 존경하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br />
당시의 관심사가 그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치유와 각오의 정적 속에서도 계속 나눈 대화는 독립전쟁에 관한 대화 였다. 과연 이 전쟁이 가당한가. 그리고 이길 수 있는가 그런 얘기들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후일 따져보면  현명한 노인의 예지력이라고 할까 전쟁과 관련해 너무도 절묘한 예언이 여행중 두 군데서 극명하고 구체적으로  나왔다. 바로 사라토가와 트렌턴에서 였다. 존 캐럴 대주교의 회고록에 극적으로 언급 된다.</p>
<p>여행 초반 조지 호수를 빠져나와 허든슨 강을 따라 올비니로 향하려면 사라토가를 지나야 했다. 그곳도 강이 굽어지면서 유장한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이때 벤자민 노인은 사라토가(Saratoga), 이곳이 미국 독립 전쟁의 &#8216;적벽대전&#8217;이 될 것을 암시하는 복선 깔린 언급을 했던 것이다.<br />
그 무렵 사라토가는 온천이 발견돼 막 개발이 진행되면서 질병 치유의 효과 때문에 각광을 받는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왕당파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고 개발도 그곳의 땅 주인들인 영국 출신 귀족들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었다. 백작 작위를 받은 이곳 영주 윌리엄 더글라스와 당시 이 일대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던 필립 스카일러 영국군 장군이 그 중심이었다. 1770년대 초반, 이들은 이곳의 광천수가 유럽의 스파(Spa)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개발을 시작했고 1775년 무렵에는 이미 작은 콜로니얼 주택과 통나무집 형태의 숙박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p>
<p>온천장(Saratoga Springs)은 사라토가 강변(Hudson River)에서 약 12~15km (8~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숲이 우거진 습지 였는데 그 숲속에서 신비로운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br />
캐럴 신부로서는 잠시 정박 해 온천에 들러 노인에게 휴식과 치유를 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정상으로나 안전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p>
<p>마침 저멀리 숲에서  솟아오르는 증기를 바라보며 캐럴이 말했다.<br />
&#8220;박사님, 저기 숲 너머 샘솟는 온천의 연기가 보이십니까? 왕당파들이 저곳을 유럽의 궁정 휴양지 처럼 꾸미려 한답니다. 세월이 좋았으면 박사님 모시고 온천욕이라도 한번 하는 건데 아쉽습니다.”<br />
“우리 신부님도 쓸데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군 그래. 이 엄혹한 시국에 온천욕이 가당키나 한가?”<br />
그러면서 프랭클린이 지팡이를 짚으며 갑판에서 일어나 강변의 험준한 지형을 살폈다.<br />
“나는 이 유장한 물소리와 저 연기가 우리 대륙군 청년들의 함성이며 그들이 쏜 대포에 영국군 진지가 포화에 허물어지는 모습으로 보인다네.&#8221;<br />
“그런가요. 역시 박사님 답습니다.”<br />
&#8220;신부님, 보시요, 저 숲숙 샘물이 치유의 물이라지만, 이 강변에 큰 일이 일어 날 것 같소. 지형을 보시오. 만약 북쪽의 영국군이 내륙으로 내려온다면, 바로 이곳이 그들의 발목을 잡을 천혜의 덫이 될 것이오.&#8221;<br />
마치 1년 뒤의 새러토가 승리를 예견하는 제갈량 같은 프랭클린의 모습 이었다..</p>
<p>실제 1년 여 뒤인 1777년 10월, 이 강변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격돌했고 대륙군이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 대륙군으로서는 개전 후 가장 큰 승리였다. 더욱이 이 새러토가 전투는 몬트리올에서의 패배를 갚아주는 복수전이었다. 몬트리올에서 대거 내려온 존 버고인의 영국 대군을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과 베네딕트 아놀드 준장의 대륙군이 유인 포위 작전을 펼쳐 6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영국의 명장이라는 버고인의 항복을 받아 내는 대첩을 거뒀던 것이다. (바로 아래사진, 당시의 항복 모습을 그린 역사화)<br />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열강들은 이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북미 식민지 독립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프랑스에 가 있던 프랭클린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프랑스 인들을 자신있게 대륙군도 승리 할 수 있다며 설득 할 수 있었다.</p>
<p>영국 귀족들이 &#8216;치유와 휴양&#8217;을 위해 공을 들여 꾸민 이 온천장이, 불과 1년 뒤 자신들의 가장 비참한 항복의 땅이 됐던 것이다. 캐나다 사절단과 대륙군이  몬트리올과 퀘백에서 맛본 외교적·군사적 실패의 쓴잔이, 바로 이곳 사라토가 치유의 샘물가 에서 개전이래 최대의 대륙군 승리라는 단잔으로 바뀐 것이다.<br />
5월 말의 신록이 우거진 새러토가 강변을 지나며 , 존 캐럴 신부는 노인을 위한 온천욕의 바람이 성사 될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면서도 노인의 예지력이 실제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올렸다.<br />
&#8220;지금은 우리가 쫓겨 내려가지만, 주님의 때가 이르면 이곳의 물줄기가 거꾸로 흘러 승리의 소식을 실어 나를 것을 믿습니다&#8221;<br />
이 영적 예감의 기도는 적중 해 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대첩이 이곳에서 일어 났던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1wSe55ScI2G43UwGSgjjVmI5ANL5sUHOYikcuw9gGA-hIcazCC73B1Bu8kfjxHE5X-iPGfJzVgo_OegneGIFURHFsNTNVr9Gv7VVta80yDQ-wsK8TLgSn48pmlicZmIuFdprVu_1C27J8Jz5hL_sktGNlQVaVRBuNEXPI8NtqS4-1-1.webp" alt="" width="1000" height="662" /></p>
<p>이같은 군사적 예언은 보름 쯤 뒤 일행의 고난 행군이 끝나가던 트렌턴의 강가에서 재현 된다. 델라웨어 강의 거친 물살이 부두의 말뚝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수만 명의 발소리 같기도, 혹은 누군가의 절규 같기도 하다며 노인은 잠시 귀를 막았던 것이다.<br />
말 한대로 트랜턴 부두는 델라웨어 강의 &#8216;폭포선(Fall Line)&#8217;이다. 강물이 암반 지대를 지나며 급해지는 구간이라 실제로 물살이 거세고 부두에 부딪히는 소리가 큰 곳이었다.<br />
이때 벤자민이 듣는 물소리는 단순히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곧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강을 건널 젊은 병사들의 환청처럼 들렸던 것이다. 실제 노인의 놀라운 예지력은 그해 76년 12월 크리스 마스,날 연전 연패 하던 워싱턴 장군의 대륙군이 얼어붙은 이강을 건너 영국군 대군을 습격 공격 해 대승를 거두는 결과로 나타 난다. 대단한 일이다. 워싱턴 장군 군대의 첫 승리였고, 집에 돌아 가겠다고 아우성 치던 대륙군 병사들을 붙잡아 둘수 있었던 최후의 묘수가 되었다.</p>
<p>당시에도 그랬지만 개전 초기 부터 프랭클린이며 워싱턴, 아담스, 제퍼슨, 등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 들이 가장 크게 신경 쓴 것은 모병이었다. 영국에 맞서는 군대의 모집이 가장 큰 관건이었던 것이다.<br />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군(Redcoats)에 맞서 농기구를 던지고 총을 든 젊은이들의 대륙군과 민병대 참여는 인류사적 기적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대륙군이 창설 되면서 민병대가 대륙군으로 편입 됐다고 생각 하는데 독립 전쟁 당시 *민병대(Militia)와 대륙군(Continental Army)은 명확히 구분되는 조직이었으며, 민병대가 모두 대륙군으로 흡수된 것은 아니었다.<br />
왜 민병대가 대륙군으로 흡수되지 않았을까? 시스템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각 식민지는 하나의 &#8216;국가&#8217;처럼 행동했다. 자기 지역을 지키는 민병대를 중앙 정부(대륙회의)의 통제 아래 완전히 넘겨주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br />
민병대원들은 생업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었기에 짧은 기간 자기 마을 근처만 지키고 싶어 했지, 멀리 타 주로 원정을 가는 대륙군에 입대하는 것을 꺼렸다.<br />
따라서 민병대는 정면승부보다는 게릴라전, 보급로 차단, 지역 내 충성파(Loyalists) 감시 등에 특화되었다. 워싱턴은 민병대의 무질서함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역 방어를 맡아주었기에 대륙군이 주력 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br />
요크타운이나 사라토가 전투 같은 큰 전투 에서는 대륙군이 중앙을 맡고, 양 날개나 후방 지원을 민병대가 맡는 식으로 협력했다. 전쟁 초기 &#8216;렉싱턴-콩코드 전투&#8217; 등에서 활약한 민병대 중 크게는 연대 단위 집단, 혹은 개인 단위로 대륙군에 정식 입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민병대는 &#8216;자기 집 앞마당을 지키는 사람들&#8217;이었고, 대륙군은 &#8216;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군대&#8217;였다.</p>
<p>당시 식민지 법에 따르면, 보통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백인 남성은 민병대에 소속되어야 했다. 국가가 총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머스킷 총과 화약통(Powder horn), 탄환을 구비해서 집에 두고 있어야 했다.<br />
평소에는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종사하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지정된 날(Training Day)에 마을 광장에 모여 제식 훈련과 사격 연습을 했다. (이 날은 마을의 축제 같은 분위기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유명한 조직이 미닛맨 (Minutemen)이었다. 민병대원 중에서도 젊고 발 빠른 정예 요원들로, &#8220;1분(Minute) 안에 출동할 준비가 된 사람들&#8221;이다. 이들이 초동 대응을 맡았다.</p>
<p>모든 장정이 민병대 대상이긴 했지만, 전쟁이 터졌을 때 모두가 동시에 전장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관리와 학생, 전문직 종사자는 병적에서 빠져 있었고 소집령이 내려졌을 때 가기 싫은 부유한 집 자제는 돈을 주고 대리인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퀘이커교도처럼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총 들기를 거부해 벌금을 내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당시 차별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이 있었다.</p>
<p>대륙군이 75년 6월 창설될 초기 징집자들에게 봉급 이외에 &#8216;현금 보너스(Bounty)&#8217;와 &#8216;종전 후 토지 지급&#8217;을 약속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들에게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은 가치가 있는 매력적이 제안이었다. 민병대 명부에 있는 사람 중, 더 큰 뜻이 있거나 생계가 막막한 이들이 &#8216;급료&#8217;를 받고 정규군인 대륙군에 정식 입대(Enlistment)를 한 것이다.<br />
하지만 이 약속은 개전 초기부터 어그러 졌다. 대륙회의는 돈이 없었다. 종이화폐(Continental Currency)를 찍어냈지만 초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폭락해 &#8220;한 푼의 가치도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8221;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br />
워싱턴과 아담스등이 청년들을 설득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이같은 &#8216;현실&#8217;이었다.<br />
농번기에 집을 비우면,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가족이 굶어 죽는다. &#8220;조국을 위해 굶어 죽으라&#8221;고 말해야 하는 지도자들의 입술이 얼마나 무거웠겠는가?</p>
<p>초기의 복무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겨우 훈련시켜 놓으면 연말에 &#8220;집에 가겠다&#8221;며 짐을 싸는 병사들을 보며 워싱턴은 &#8220;이것은 군대가 아니라 유령들의 모임이다&#8221;라며 탄식했다.<br />
1776년 뉴욕 전투에서 패배하고 뉴저지로 퇴각하던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br />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병사들이 밤마다 사라졌다. 워싱턴은 &#8220;매일 아침 점호 때마다 부대가 줄어들어 있다&#8221;고 기록했다. 제대로 된 방한화 군화가 없었기에 눈 위에 병사들이 흘린 피 발자국을 보고 부대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몰골의 군대에 합류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거의 &#8216;사기&#8217;에 가까운 설득이었을지도 모른다.<br />
워싱턴은 그무렵 대륙회의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곤 했다.<br />
&#8220;만약 내가 이런 고통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이 직책을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8221;<br />
정치인(대륙회의)들은 뒤에서 말만 많고 보급은 안 해주는데, 현장의 병사들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 사이에서 &#8216;신의&#8217; 그리고 신에 대한 기도로 신의 뜻을 물으면서 버텼다.<br />
76년 말, 많은 대륙군 병사들이 그해 계약이 만료 되면 밀린 봉급을 받고 집에 가려 했다. 대륙군의 와해가 눈앞에 어른 거리던 그 무렵에 트렌턴의 기적과 같은 승전보가 울렸고 이를 기화로 워싱턴의 눈물어린 호소와 설득에 병사들과 의회(대륙회의)가 함께 움직여 3년 혹은 전쟁 종료 시까지 복무하는 장기 계약으로 바뀌었다.</p>
<h4><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3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28012_52307_4413.png" alt="" width="446" height="308" /></h4>
<p>이처럼 모병은 너무도 지난하고 힘든 일이었다. 76년 겨울을 고비로 모병은 만족 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상승 곡선을 그리며 이어 지고 있었고, 프랑스가 참전 하면서 부터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br />
이같은 기적의 모병에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이 대단했다. 당시 전역의 기독교 설교자들은 열에 여덟 아홉 &#8220;영국 왕에 대한 저항은 곧 신에 대한 순종&#8221;이라고 가르쳤다. 하느님의 역사 하심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성공회 목사들 까지도 절반 이상 독립파로 돌아섰다.<br />
&#8216;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8217;는 구호는 단순한 정치 선동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가까웠기에, 식민지의 젊은이들이 신을 의지 하고 전장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p>
<p>다시 트랜턴 부두가로 돌아온다. 델라웨어 강물이 바위와 방파제에 부딪는 소리가 대륙군 청년 병사들의 함성과 같다고 말하는 벤자민이 눈은 게속 유장한 강물을 바라 보면서 옆에 서있는 신부에게 말했다.<br />
“전쟁은 60대 노 정치인들의 탐욕 때문에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 이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신부님.”<br />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죠, 이 세상 어느나라 치고 전쟁없이 건국된 나라는 없습니다. 성서에도 그렇게 나옵니다.”<br />
“그런가요?<br />
“남의 아들들은 감언이설로 사지로 몰아 대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어쩌지 못하는 내 꼴을 비웃는 말 같아서 그러네. 신부님.”</p>
<p>“감언 이설 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br />
트랜턴 강가에 섰을 때 실은 벤자민 프랭클린으로서는 인간적 고뇌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 이었다. 젊은 들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라고 요구 하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어쩌지 못하는 인간적 부끄러움이 그를 한창 엄숩했던  시점이었다.<br />
바로 아들 윌리엄 프랭클린과의 일 때문이었다.<br />
트렌턴으로 오기 전 노인과 신부는 퍼스 엠보이에 총독 관저에 연금돼 있는 총독 윌리엄 프랭클린을 만나고 왔다. 말한대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장남 이다.<br />
필라로 가는 마지막 노선인 바지선 배를 타기 위해선, 트랜튼 부두로 와야 했는데 길목에 버스 엠보이가 있었다. 버스엠보이는 뉴저지 주도의 하나로 총독관저가 있는 곳이었다.</p>
<p>1776년 당시 뉴저지는 아직 동저지(East Jersey)와 서저지(West Jersey)의 전통이 남아 있어 주도가 두 곳이었다. 퍼스 앰보이(Perth Amboy)와 벌링턴(Burlington)이 번갈아 가며 수도 역할을 했다. 두 도시의 중간, 강가에 있는 트렌턴이 뉴저지의 단독 주도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인 1790년이다.<br />
1776년 5월 그날은 그들 부자가 &#8216;돌아올 수 없는 강&#8217;을 건넌 날이었다.</p>
<p>아들 윌리엄은 그때 1월부터 이미 뉴저지 애국파 세력에 의해 가금(House Arrest, 연금) 상태였다. 그가 갖혀 있다는 소식은 몬트리올로 떠나기 전 알았지만 올바니에서 본 신문에는 그의 처지가 연금이 아니라 본격 구금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기사가 있었다. 윌리엄은 연금 상태에서도 비밀리에 영국 왕실에 첩보를 보내려다 적발됐다는 것이었다. .</p>
<p>일행이 퍼스 엠보이를 지난 때는 5월 25일이었다. 존 신부가 길가의 퍼스 엠보이 이정표를 보며 “잠깐 들러 아드님을 만나보시지 않으렵니까?” 하고 조심스레 운을 떠 봤지만 &#8216;그는 내 아들이 아닌지 오래 됐다며 말도 꺼내지 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br />
그때 뉴저지는 뉴욕과는 달리 안전상의 문제는 없었다. 어쨌든 독립파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 이었기 때문이다.<br />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덜컹 거리면 달렸고 트랜턴으로 가기전 마지막 유숙지인 우드 브릿지에 도착해 여관에 들었다. 우드브리지는 퍼스 앰보이와는 바로 이웃으로 당시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잇는 길목이자 트랜턴으로 가는 마지막 타운 이었다.<br />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 그리고 벤자민의 몸에서 나는 여전한 약재 냄새. 70세 노정객이 통풍으로 부어오른 다리를 올리고 낡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을 때, 밖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br />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무사히 우드브릿지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br />
“어서 오시오, 대령, 굳이 이렇게 오지 않아도 될텐데&#8230;”<br />
문에 들어서 프랭클린에게 거수 경례를 했고 박사가 엉저주춤 일어서 손을 잡아 준 중년의 군복 남자는 이지역 민병대 대장 허드 나다니엘 대령이었다.<br />
이곳에도 자주 강연을 왔던 프랭클린 박사와는 구면 이었다.   타운 입구에서 민병대원을 만났는데 그가 급히 달려가 박사의 우드브릿지 도착을 알린 모양이다.</p>
<p>우드브리지 출신 허드 대령은 독립전쟁 전에는 상인(Merchant)이자 지역 사회의 유력 인사였다. 당시 민병대 간부들은 대개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 상인이나 지주 출신이 많았는데, 나다니엘 허드 역시 그중 하나였다.<br />
그는 전형적인 독립파 &#8216;시민 군인&#8217;이었다. 독립 열기가 고조되자 뉴저지 민병대(Militia)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고, 그 공로와 지도력을 인정받아 얼마 뒤 대륙군 준장(Brigadier General)의 지위까지 올랐다.<br />
허드는, 실제로  윌리엄 프랭클린 총독을 체포하고 연금하는 임무를 직접 수행한 인물이다. 이날 만남 얼마 뒤인 1776년 6월 뉴저지 주 의회의 명령을 받은 나다니엘 허드는 무장한 민병대를 이끌고 퍼스 앰보이의 총독 관저로 가 윌리엄을 체포 했고 얼마 뒤에는 커네티컷 감옥에 수감 시킨 주역이 된다.<br />
프랠클린 박사의 건강에 대한 안부 인사가 끝나고 뉴저지 정세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허드는 윌리엄 주지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가 굳이 찾아온 용건이었다.<br />
정식 군복이라기엔 어딘가 투박한, 하지만 정갈하게 닦인 상인 시절의 장화와 그 위에 덧입은 민병대의 푸른 코트. 나다니엘 허드는 이제 장부 대신 머스킷 총을 들고 왕실 총독의 문을 막아서고 왕당파 총독을 압박하고 있는 독립의 선봉군이었다.</p>
<p>“박사님, 저는 우드브리지에서 잡화를 팔던 상인이었지만, 이제는 이 땅의 자유를 지키는 군인입니다. 아드님이신 윌리엄 총독 관저 주변은 제 부하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습니다만, 총독 께서는 여전히 런던에서 올 함대만 기다리며 요지부동입니다. 며칠전 만해도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의회를 소집 한다는 밀서를 몇 안되는 왕당파들에게 반출하려 했습니다. 이건 반역입니다. 이제 저희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br />
마침 의회도 독립파 리더인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박사를 중심으로 새로 결성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뉴저지가 독립 선언에 &#8220;가장 늦게 참여한 주&#8221;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내부의 강온파 정치적 교체 작업 때문이었다.<br />
1776년 초까지만 해도 뉴저지 의회의 주류는 영국과의 화해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뉴저지는 지리적으로 영국 왕당파의 본거지였던 뉴욕과 혁명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매우 조심스러웠고, 주민들의 의견도 갈려 있었다. 경제적으로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퀘이커교도나 성공회 신자들이 많아 급진적인 독립보다는 영국 체제 내의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가 컸었던 것이 사실이다.<br />
그때 독립파 (Patriots)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이 나서 소극적이던 뉴저지 여론을 독립 지지로 돌려세웠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자 목사였던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는 &#8220;독립을 위해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8221;며 분연히 일어선 뉴저지 독립 운동의 결정적 인물이다. 독립선언서 서명자이기도 하다.</p>
<p>실제 얼마 뒤 프랭클린이 필라에 도착한 직후인 1776년 6월 초, 그를 중심으로 한 강경인 독립파들이 주도해 새로운 &#8216;뉴저지 지방 의회&#8217;를 구성했다. 이들은 기존의 미온적인 대륙회의 대표들을 해임하고, 존 위더스푼을 포함한 강경 독립파 5명을 필라델피아로 새로 보냈다. 이 새로운 대표단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것이 6월 28일이었고, 이들이 합류하면서 뉴저지는 비로소 독립 선언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되었다.</p>
<p>아무튼 이는 며칠 뒤,  몇 주 뒤의 일로 나다니엘 허드 대령이 프랭클린 박사를 찾아온 때는 아직 혁명파가 완전히 주정부를 장악하기 전으로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아무리 반역자라 하더라도 독립진영의 좌장 벤자민 플랭클린의 친아들이 이었기 때문에 그의 대한 최종 처분을 박사와 상의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br />
&#8216;박사님의 아들이지만 더 이상 왕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둘 수는 없다.&#8217;는 대령의 말에 70세의 노정객은 이미 아들과 정치적으로 절연한 상태였지만, 친아들을 체포하겠다는 군인 앞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답했다.<br />
&#8220;법대로 집행하시오 (Do your duty according to the law) 대령. &#8221;</p>
<p>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존 캐럴 신부는 &#8216;가족의 해체&#8217;와 &#8216;국가의 탄생&#8217;이 충돌하는 비극의 최단 거리 목격자가 된 셈이었다.<br />
존 신부는 문득 &#8216; 자유를 위해 아비가 아들을 내주어야 하는 이 땅의 운명이 성경 속 아브라함의 시험 만큼이나 가혹하구나&#8221; 고 느껴야 했다.<br />
&#8220;이것이 진정 천주께서 원하시는 공의로운 나라의 모습인가&#8221; 하는 내면의 독백이 솟아 올랐다.<br />
그런데 박사는 단호 했지만 오히려 대령이 유화적으로 마지막 만남을 요청해 왔다.</p>
<p>“박사님, 저희들은 박사님의 열변을 듣고 대륙군에 합류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을 감동시킨 그 열변으로 마지막으로 아드님을 한번만 더 설득해 주십시오. 박사님의 친아드님을 반역자로 체포하기는 저희들도 정말 싫습니다.”<br />
“이사람 참 내 아픈 곳을 너무도 깊이 찌르는 구먼,  글쎄 소용이 없대두&#8230;  대령, 나는 몬트리올의 얼어붙은 강가에서 여기 이 천주교 신부님의 등에 업혀 살아 돌아왔다네. 그런데 정작 내 아들은 따뜻한 관저 안에서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구료. 자네의 총보다 무서운 것이 그 아이의 고집이라네.&#8221;<br />
&#8220;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보시고 최후의 설득을 해 주십시오. 내일 아침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8221;<br />
이 말을 듣고 박사가 옆의  신부를 쳐다 봤다.  신부는 상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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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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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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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hu, 12 Mar 2026 03:00:1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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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진흙탕의 세뇌르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8216;닥터 프랭클린&#8217;  – 안동일 작 1776년 5월11일, 세인트로렌스 강가 몬트리올 부두(피어)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필라로 돌아가는 밴자민 프랭클린을 배웅 하기 위해서 였다. 5월 인데도 날이 흐렸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존 캐럴 신부가 벤자민 프랭클린 노인을 부축하고 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진흙탕의 세뇌르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8216;닥터 프랭클린&#8217;  –</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1776년 5월11일, 세인트로렌스 강가 몬트리올 부두(피어)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필라로 돌아가는 밴자민 프랭클린을 배웅 하기 위해서 였다. 5월 인데도 날이 흐렸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존 캐럴 신부가 벤자민 프랭클린 노인을 부축하고 서 있었고 찰스 캐럴, 사무엘 체이스, 리빙스턴 대령, 루이 고슬랭 그리고 예수회 조나단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p>
<p>찰스 캐럴이 프랭클린에게 &#8220;박사님께서는 필라델피아로 먼저 돌아가 이 비참한 현장을 의회에 보고해 전면 철수의 불가피성을 알리고 추후 방도를 빨리 마련해야 하며 더 화급하고 중차대한 일에 매진해야 한다.&#8221;는 명분을 만들어 그를 서둘러 피신시기는 것이었다. 사실 프랭클린으로서는 이곳에서 더 할일이 없었다. 그리고 천연두가 없었다 하더라도 길어야 보름 정도 머물겠다고 생각 하고 온 방문이었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이 서둘러 몬트리올을 떠나는 이면에는 단순한 그의 노환과 천연두 이상의 사절단 전체의 전략적 판단과 공포가 함께 서려 있었다. 가뜩이나 통풍으로 고생 하는 당시 70세의 프랭클린에게 천연두 감염은 곧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몬트리올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사절단이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 천연두가 대륙군을 집어삼키기고 있는 것을 보고, 또 그곳의 민심을 읽기 시작 하면서 프랭클린과 캐럴 등은 직감했다. 이곳은 이미 군사적으로나 위생적으로 지옥이 되었음을&#8230; 해결책은 피해를 최소화한 전면 철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대륙군 형편에 다른 곳 제쳐 두고 전면적인 대량 지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p>
<p>이같은 상황에서 미국 독립 운동의 좌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프랭클린이 여기서 혹시나 천연두 때문에 변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막 피어오른 독립 혁명의 불꽃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위기가 초래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전언에 의하면 독립선언의 내용과 시기를 놓고 대륙회의 내에서 막바지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어 좌장 벤자민의 역할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br />
천연두와의 싸움에서 둘째 아들을 어릴 때 천연두로 잃어 남다른 식견이 있는 벤자민은 작으나마 도움을 주려 했지만 케럴 등은 노인을 회색 수녀원 마당에 세워진 병동 막사에는 접근도 못하게 했다. 늦은 저녁 멀찌기 서서 보고만 했을 뿐이다.</p>
<p>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두법과 제수이트 치료법이 효과를 보여 이제 이래 밖에 지나지 않았는 데도 차도가 있는 이들이 많이 나타 났다는 점이다. 바늘 끝을 구부려 실시하는 인두법에는 벤자민의 아이디어도 한몫 했다. 공연히 &#8216;닥터 프랭클린&#8217;이 아니었다.</p>
<p>정규 교육이라곤 2년 밖에 받지 못했지만 프랭클린은 대륙에서 가장 박학하고 깊이 있는 이로 통했다. 독학으로 미국 계몽주의 철학의 비조가 됐을 뿐더러  피뢰침을 발명 해  극심했던 벼락의 피해를 막았고 열효율 높은 스토브를 발명 해 혹독한 북동부 식민지의 겨울을 이기게 했으며 다촛점 안경렌즈로 노안의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그의 이런 실제적인 공로를 들어 영국의 옥스포드며 미국의 하바드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로 보답했기에 그는 박사가 틀림없었다. 대륙회의 내에서도 그에 대한 호칭은 &#8216;닥터 프랭클린&#8217; 이었다. 그는 박사라는 호칭을 계면쩍어 하면서도 은근히 즐겼다.</p>
<p>프랭클린이 돌아가는 길에는 존 캐럴 신부가 동행했다. 캐럴 형제는 프랭클린을 보호하기 위해 이번 귀경길에 자신들의 인맥과 재력을 총 동원했다. 존 캐럴은 자신도 남아 천연두 환자를 돕겠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노인을 보필해야 했고 지난한 눈치 끝에 회색 수녀회 병동에 합류한 몬트리올의 예수회 사제들 마저도 &#8216;자네가 여기 있으면 나중에 주교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된다&#8217; 면서&#8217; 그를  1차 귀환 대열에 합류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신의 한수가 된다. 이 귀경길에서 존은 벤자민 노인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고 몇 달 뒤 당시로서는 대통령 보다 더 중요한 자리였던 초대 프랑스 전권 대사로 부임할 수 있을 만큼으로 건강을 회복 시켰다.<br />
프랭클린은 이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미국 독립 후 존 캐럴이 미국 최초의 가톨릭 주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추천을 하게된다. 몬트리올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 이 &#8216;우정의 생존 작전&#8217;이 미국 종교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것이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을 태운 루이 고슬랭의 신형 개량 바투 배가 세인트로렌스 강가에서 떠날 때, 찰스 캐럴은 강풍에 코트 깃을 세우며 그를 배웅했다. &#8220;닥터 프랭클린, 이곳의 지옥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가셔서 우리의 독립을 굳건하게 세상에 알려주십시오.&#8221;<br />
프랭클린의 마른 손을 잡았던 캐럴의 손에는 이미 병사들을 돌보느라 묻은 약재 냄새와 석회 가루가 배어 있었다.<br />
&#8220;여보게 찰스, 부디 몸조심하시게, 공연히 자네를 끌어 들여 이 고생을 하게 만들고 나만 먼저 떠다는 구료, 내가 평생 성당 근처에도 안 가던 늙은이였는데, 자네와 존 신부가 내미는 따뜻한 수프와 헌신적인 간호를 받다 보니&#8230; 내 몸의 절반은 이미 가톨릭 신자가 된 것 같네. 나머지 절반은 이 지독한 통풍이 가져갔고 말이야! 크크크.&#8221;  몹시  아픈 상태 였지만 벤자민의 목소리에는 아직 찌렁찌렁 힘이 있었다.</p>
<p>프랭클린은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신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 자기 가족의 예배석(Pew)을 가지고 있었다.<br />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이신론자(Deist)였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기적이나 계시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이였다. 특정 교리에 얽매이는 것을 질색했던 인물이다.<br />
하지만 &#8220;반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8221;고 한 말이 역사적으로 참 절묘한 농담인 것이, 실제로 몬트리올 원정 실패 이후 프랭클린의 가톨릭에 대한 태도는 180도 바뀐다. 바로 몬트리올의 그 지옥 같은 추위와 질병 속에서 자신을 극진히 간호하고, 필라델피아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해 준 캐럴 형제의 영향 때문 이었다.<br />
프랭클린은 이 경험을 통해 캐럴 형제에 대한 개인적, 인간적 고마움을 넘어서  &#8220;가톨릭 신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헌신적이고 애국적인 시민&#8221;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파리에 전권 대사로 갔을 때, 교황청 사절과 애써 협상하며 &#8220;미국 가톨릭의 수장은 반드시 미국인(존 캐럴)이 되어야 한다&#8221;고 강력히 밀어붙여 미국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 했던 것이다.</p>
<p>당초에는 귀경길 묘사를 생략하고 시간을 뛰어 넘어 미국 천주교사의 최대 경사이자 큰 분수령 이었던 교구 설립과 주교 장립의 감격적  광경을 먼저 묘사하려 했는데 이때 , 76년 5월 초순, 베자민과 존 신부의 몬트리올 필라의 여정 또한 많은 의미와 감동을 던져 주는 일이었기에 먼저 전하도록 한다.</p>
<p>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하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회심에 가까운 심경의 변화를 겪었을까? 그 매개와 종착점은 프랑스다.<br />
사실 그때 떠나기 전날, 벤자민은 진작 부터 올라오면서도 그랬지만 &#8220;작은 문이 닫히면, 더 큰 문을 보라&#8221;는 얘기로 프랑스를 직접 공략 하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쳤다.<br />
&#8220;찰스, 그리고 존, 퀘벡의 주교가 우리를 외면하는 것은 그가 영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해서 일세. 하지만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은 다르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은가.&#8221;<br />
캐나다라는 &#8216;작은 문&#8217;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벤자민은 대서양 건너 프랑스라는 &#8216;거대한 문&#8217;을 열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br />
&#8220;찰스, 존, 자네들 두 사람이 프랑스에서 배운 것은 신학과 법학 뿐만이 아니었네. 그들의 자존심과 영국에 대한 해묵은 원한을 배우지 않았나? 우리는 기필코 이를 이용해야 하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도 그것이지만 프랑스를 끌어 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 전쟁을 이길 방도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닥터 프랭클린이 기필코 솔본느에 가야 겠는데 자네들도 함께 가려나? “<br />
“ 물론이죠 가야하면 가야 겠죠. 박사님 파리 솔본느 에서도 명예 학위 받으셨지요?”<br />
“얘기만 있었지 정작 받지는 못했네.”<br />
그랬다. 하바드와 옥스포드 뿐 아니라 예일 메리엔 퀸 ,유팬 등 명문교에서 그에게 명예 학위를 주려 애써서 성사 시켰고 파리의 솔본느와 프랑스 왕립학회도 마찬가지였다.  벤자민은 67년 런던에 머물던 중 친구인 경 린드(Sir John Pringle)와 함께 약 한 달간 파리를 여행했다. 이때 루이 15세를 만나기도 했고,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과학적 명성을 확인했다. 1769년에 두 번째 방문을 했는데 이때는  경제학자들과 과학자들을 만나 교분을 나눴다.<br />
이 두 번의 짧은 방문 덕분에 1776년 그가 &#8216;미국 전권대사&#8217;로 다시 나타났을 때, 프랑스인들은 그를 낯선 이방인이 아닌 &#8220;이미 검증된 철학자이자 친구&#8221;로 열렬히 환영할 수 있었다.</p>
<p>프랭클린의 불어 실력은 한마디로 &#8216;독학으로 이룬 실용적인 수준&#8217;이었다.  20대 때에 필라에서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와 함께 프랑스어를 독학했다. 주로 읽기 위주로 공부했기 때문에 프랑스 서적을 탐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br />
정식 대사 부임 당시 그의 말하기 실력은 다소 서툴렀고 발음도 미국인 특유의 억양이 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서툰 불어를 숨기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8216;소박하고 정직한 미국 농부&#8217; 같은 이미지로 메이킹하는 데 활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불어로 편지를 쓸 수 있었지만, 격식 있는 문서나 중요한 편지는 항상 주변의 도움을 받아 문법을 교정했다.<br />
프랭클린이 파리에 가기 전부터 지인이 많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과학적 성취 때문이다.  그의 번개 실험 보고서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프랑스의 지식인들(Philosophes)은 프랭클린을 &#8216;계몽주의의 살아있는 상징&#8217;으로 여겼다. 덕분에 1776년 부임했을 때, 이미 파리의 사교계와 학술계에는 그를 도울 준비가 된 지지자들이 가득했다.</p>
<p>이같은 파리행을 결정적으로 결심하게 한것이 몬트리올의 고난이었던 것이다.<br />
안타깝게도 인구에 회자하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lt;자서전(The Autobiography)&gt;에는 몬트리올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프랭클린이 자서전 집필을 1757년(그의 중년 시절)까지만 자세히 기록하고, 그 이후의 혁명기 활동은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br />
하지만 당시 그가 쓴 서신과 보고서에는 몬트리올에서의 고생이 생생히 담겨 있다. 그는 찰스 캐럴에게 보낸 편지에서 &#8220;그 지옥 같은 여정에서 당신 형제(존과 찰스)가 보여준 헌신적인 간호가 아니었다면 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8221;이라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p>
<p>한편 기록에 따르면 존 캐럴은 자신의 몬트리올 임무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일찍 깨달았다. 믿었던 캐나다 사제들이 한자리에 같이 앉는 것 조차 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간호하며 동행하는 것을 신이 부여한 자신의 또 다른 사명으로 여겼다.<br />
존이 남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때 벤자민이 &#8220;존, 자네는 여기 남아서 벽에 대고 설교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이 노인을 살려서 필라델피아로 데려가는 게 천주께 더 큰 봉사를 하는 걸세&#8221;라고 설득 했는데 천주께 봉사라는 말에 마음을 궅혔단다.   존 캐롤 대주교(후일)의 회상록에 나온다.</p>
<p>찰스와 체이스를 남겨 두고 배 난간에 오를 때 프랭클린은 통풍과 종창으로 거의 걷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존 신부는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꼭 잡고 한손은 노인의 겨드랑이에 끼어 옆에서  안듯이 부축해야 했다. 그 꼭 잡은 따스한 손은 여행 일정 내내 노인의 가슴에 훈풍을 불게 했다.</p>
<p>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의 귀경길(필라가 당시 수도) 은 당시의 교통 수단과 프랭클린의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매우 고되고도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다.<br />
몬트리올의 세인트 로렌스 강을 타고 내려가 리슐리외 강(Richelieu River) 을 거쳐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   위 사진) → 조지 호수(Lake George) → 허드슨 강(Hudson River) 상류 → 알바니에 도착하는 수로 여행이 앞부분의 일정이었다.  당시 이 수로 체계는 북미의 핵심 전략 요충지였다.</p>
<p>루이 고슬랭 같은 현지 사정에 밝고  고향서부터 바다와 친한 인물이 제공한 &#8216;첨단 배&#8217; 덕분에, 70세의 병든 프랭클린은 험난한 육로 대신 물길을 이용해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특히 챔플레인 호수에서 허드슨 강으로 넘어가는 구간의 고생을 이 배가 덜어주었다.<br />
이들의 여정은  후반부인 올바니, 나약, 트렌튼, 필라 여정을 합쳐 도합 3주 가까이 소요되었다. 올라 올때 보다는 열흘 이상 단축 시켰다.<br />
일행이 탄 바투선 고슬랭호는 두개의 돛이 달려 있고 선실도 마련돼 있는 중형 어선급으로 개량된 배였다. 평평한 바닥이었지만 이물(배 앞부분)과 선저에 삼각 철판을 장착해 얼음을 부술 수 있었고 속력을 빨리 낼 수 있었다.</p>
<p>호수와 강을 건너며 존 캐럴 신부는 프랭클린의 곁을 지키며 약을 달이고 식사를 챙겼다.  그런데 캐럴의 제수이스트 탕은 통풍의 통증에도 큰 효험이 있었다.  프랭클린은 고통 속에서도 고슬랭이 구해준 배의 효율성을 관찰하며 &#8220;역시 과학이 인간의 고통을 줄여주는군&#8221;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배들이 움직이는 원리는 오직 세 가지였다. 바람과 물흐름 그리고 인력 이었다. 범선은 돛을 달아 바람의 힘을 이용했고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갈 때는 강의 흐름을 탔다. 바람이 없거나 거슬러 올라갈 때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젓거나(Oars), 얕은 곳에서 긴 장대로 강바닥을 밀어(Polling) 이동했다.</p>
<p>선원 4명과 승객 두명이 탄 고슬랭호는 물살의 출렁임과 노 젓는 소리, 그리고 펄럭이는 돛 소리가 가득한 , 그리고 재수이스트 다리는 냄새와 레몬향이 풍기는  정적인 공간이자 힐링의 공간이  되었다. 배안의 공용어는 불어 였고 그 배의 종교는 단연 천주교 였다. 세명의 천주교 인은 성모 마이아의 숨결이 고슬렝호에 와 있다고 믿었다.</p>
<p>네명의 노꾼은 모두 고슬랭이 소개한 같은 고향의 프랑스인 민병대원들이었다. 두 사람은 알바니 까지만 동행 했고 두 사람은 육로에서는 마부 노릇을 해 가면서 필라 까지 일정을 함께 했다.<br />
일행은 알바니 까지 고슬랭호를 이용했고 배는 다시 몬트리올로 되돌아 갔다. 알바니에서는 리빙스턴 대령의 안배로 그의 고향 친지들로 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하루를 쉬었다. 거기서 부터는 역시 리빙스턴 가에서 준비한 범선을 타고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 나약 강변 까지 내려 왔다.<br />
뉴욕주는 당시 아직 영국군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뉴욕시와 대서양 연안을 막강한 수륙 양군 병력으로 위협하던 시기라, 이들은 허드슨 강을 따라 조심스레 나약 부근 까지 내려온 뒤 그곳에서 내륙으로 올라 우회로를 이용해 마차로 뉴저지 트랜턴으로 남하했다. 노꾼이자 마부였던 고슬랭(루이의 사촌)과 드골의 성호 긋는 숫자가 매우 늘었다.<br />
트렌턴부터는 다시 중형 카누형 범선을 이용해 델라웨어 강을 타고 내려가 필라델피아 동쪽 관문 마켓 스트리트 부두를 최종 기착지로 했다.<br />
필라델피아 동쪽을 흐르는 델라웨어 강 하류는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은 더 남쪽이지만, 마켓 스트리트 부두를 포함해 몇몇 피어가 도시의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피어는 델라웨어 강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는 도시의 중심이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41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Joseph_Siffrein_Duplessis_-_Benjamin_Franklin_-_Google_Art_Project-scaled.jpg" alt="" width="2099" height="2560" /></p>
<p>벤자민 프랭클린(위 사진)이 1723년, 17세의 나이로 고향 보스턴에서 가출해 뉴욕을 거쳐  처음 필라델피아에 발을 디뎠을 때 도착한 곳도 바로 이 마켓 스트리트 부두였다. 당시 그는 주머니에 빵 세 덩이를 찌른 남루한 모습으로 이 친선의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내렸었다.<br />
53년이 흘러, 이제는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노정치가가 되어 죽음의 문턱 까지 갔다가 살아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다시 이 부두로 돌아오는 장면은  본인 뿐 아니라 옆에서 보는이, 나중에 얘기를 듣는 이 모두에게 감격 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br />
배가 델라웨어 강의 물살을 가르며 마켓 스트리트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강물에 비춰 질 때 프랭클린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존 캐럴에게 말했다.<br />
&#8221; 신부님,  결국 우리가 돌아왔구려. 50년 전 저 길을 걷던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소?&#8221;<br />
존 캐럴 신부의 부축을 받으며 배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부두 근처의 인부 들이며 시민들이 달려와 모자를 벗으며 깍 듯이 인사를 던졌다.<br />
“박사님 이제 돌아 오셨군요. 수고 하셨습니다.”<br />
친근한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존경의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눈가에 이슬이 맺혀 저 멀리 그가 평생을 보낸 마켓 스트리트의 자신 집 방향을 응시하면서 존 신부의 손을 다시 꼭 잡는  모습은 큰 울림을 던져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br />
그 사이 벤자민이 존 신부를 부르는 호칭이 존에서 신부님으로 바뀐 것에서 시사하듯 천주교 신앙에 대한 그의 심경은 엄청나게 변모했다. 존 신부의 미사와 기도 때문이었다.</p>
<p>존 신부는 일정 내내 매일 새벽 미사를 올렸다. 어떨 때는 고슬랭, 드골과 함께 였고 어떨 때는 혼자서도 미사를 올렸다.  혼자서도 미사를 올릴 수 있는지 궁금한데 교법에는 그렇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법상 미사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당한 이유(여행, 질병, 고립 등)가 있을 때는 사제 혼자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이를 사적 미사(Missa Privata)&#8217;라고 부른다.  신심 깊은 사제들은 &#8220;비록 눈에 보이는 신자는 없어도, 미사 중에는 천사들과 모든 성인이 함께하며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8221;이라고 믿기 때문이란다.<br />
여행하는 신부들에게는 &#8216;휴대용 미사 도구 세트&#8217;가 필수였다.  18세기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나 여행하는 사제들은 작은 상자에 성배(Cup), 성반(Plate), 작은 미사 경본, 그리고 축성된 &#8216;제대포(Altar Stone/Cloth)&#8217;를 넣어 다녔다.<br />
마땅한 장소가 없다면 숙소의 깨끗한 탁자나, 심지어 야외의 평평한 바위 위에 제대포를 깔고 미사를 올렸다. 북미 대륙을 개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기록을 보면, 카누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아침이면 강가에 내려 거친 돌을 쌓아 제대를 만들고 미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많다.</p>
<p>캐럴(John Carroll) 신부는 이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일행들이 깨기 전이나 이동 준비를 마칠 즈음 숙소 한쪽에서 경건하게 미사를 올렸다.<br />
이른 새벽, 여관방의 낡은 탁자 위에 하얀 리넨 천을 깔고, 손때 묻은 은제 성배를 꺼내는 존 신부의 뒷모습은 플랭클린에게 특별히 경이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br />
창밖으로는 말들의 울음소리와 마부들의 고함이 들려오는 세속적인 공간이, 나지막한 라틴어 기도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8216;거룩한 성소&#8217;로 변했다. 자신을 지극히 간호하고 위하는 신부가 이런 사적 미사를 게을리 않는 것을 보고 벤자민의 심정에는 변화가 오기 시작 했음은 틀림 없다.<br />
프랭클린처럼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지성을 가진 인물에게도 누군가의 &#8216;변함없는 경건함&#8217;은 새로운 경험 이었던 것이다.<br />
젊은 시절 깊은 교분을 맺었던 조지 휫필드 목사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휫필드는 벤자민에게 경탄과 놀램을 던져 주었지만 경건함과 진정성은 존 신부를 따라올 수 없었다. 대각성 운동의 불길을 몰고온 휫필드는 이신론자인 벤자민에게 계속 불같은 성령을 던져 주려 했지만 벤자민은 빙긋이 웃기만 했었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은 평생 종교적 도그마(교리)에는 회의적이었지만, &#8216;덕행&#8217;과 &#8216;선행&#8217;에는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인물이다.<br />
고된 여행길에서도, 심지어 아픈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피로함 속에서도 이른 새벽 홀로 미사를 올리는 모습은 벤자민에게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8216;지독할 정도의 성실함과 자기 절제&#8217;로 비쳐졌다.<br />
&#8220;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을 저토록 움직이게 하는가?&#8221;라는 경외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p>
<p>특별히 종교,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부터 존 신부가 곁에서 나직하게 올리는 기도 소리는 벤자민에게 심리적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신앙을 넘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Agapē)이 그 미사와 기도 속에 녹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존의 사촌 동생인 찰스 캐럴이 몬트리올에서 대륙군 병사 환자 들에게 보였던 아가페도 마찬가지였다.</p>
<p>벤자민은 열병으로 뜬눈을 지새우다 새벽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라틴어 소리에 눈을 떳다. 희미한 촛불 하나에 의지해 작은 빵과 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은 신부의 뒷모습.<br />
자신을 밤새 간호하느라 퀭해진 눈을 한 신부가 &#8216;세상의 평화와 이 병든 노인&#8217;을 위해 정성을 다해 미사를 올리는 그 뒷모습&#8230;<br />
벤자민은 그때 깨달았을지 모른다. &#8220;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사람의 마음속에는 분명 신이 살아 숨 쉬고 있구나.&#8221; 벤자민은  &#8220;나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스러운 영역&#8221;을 인정하게 됐던 것이다.</p>
<p>당시 미국 식민지인들에게 가톨릭은 &#8216;타락한 교황청의 종교&#8217;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존 캐럴 신부를 보며 가톨릭의 사제가 누구보다 애국적이고, 누구보다 헌신적이며, 누구보다 지적일 수 있음을 목격했다. 그런 사제를 진심으로 따르는 천주교 신자의 모습을 고슬렝과 드골 에게서 여실히 보았다.</p>
<p>애국과 헌신 그리고 지성과 인긴미는  두 사람의  여정 가운데 트랜튼 에서  또 한번 빛난다.</p>
<p>트렌턴(Trenton)은 뉴욕 뉴저지를 가로질러 내려와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해 다시 배를 타기에 가장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였다.  트렌턴은 델라웨어 강의 &#8216;폭포선(Fall Line)&#8217;이라 불리는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까지는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깊어지며 조수의 영향을 받는 구간이라, 큰 배가 원활하게 다닐 수 있었다.<br />
트렌턴과 델라웨어 강이야 말로  같은 해(1776년) 크리스마스에 조지 워싱턴이 얼음 강을 건너 역사적인 승전보를 울리게 될 바로 그 장소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42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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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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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ue, 03 Mar 2026 03:24:30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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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8217; 캐럴  3 – 안동일 작  진심과 진실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다. 1776년  봄 대륙군에 합류한 캐나다 몬트리올의 민병대원들이 천연두에 걸려 다수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때마침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타나 그들을 병마의 신음에서 구한 찰스 캐럴의 기적 같은 헌신은 주변을 감동 시키기에 충분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8217; 캐럴  3 –</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진심과 진실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다.<br />
1776년  봄 대륙군에 합류한 캐나다 몬트리올의 민병대원들이 천연두에 걸려 다수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때마침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타나 그들을 병마의 신음에서 구한 찰스 캐럴의 기적 같은 헌신은 주변을 감동 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br />
가장 먼저 당사자인 민병대원들이 감동했고 그들의 감동은 몬트리올의 사제와 수녀들에게 전해졌고 캐나다에 함께 간 독립의 좌장 벤자민 프랭클린이 감동했고 또 이 감동은 프랑스 국왕과 총리와 그리고 교계 지도자들 에게도 가감없이 전달 돼 2년 뒤 프랑스의 전격적인 미국 독립전쟁 참전의 밑걸음 으로 이어진다. 이 또한 우연이라고 보기엔 그 전개 과정이며 그 결과가 너무도 극적이며 절묘하다. 파면 팔 수록 찰스 캐럴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p>
<p>그때 찰스 캐럴이 루이 고슬랭을 부관역 조력자로 맞아 들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몬트리올 시내에 있는 회색 수녀회(Grey Nuns, Soeurs Grises)를 찾은 일이었다. 천연두와의 싸움에는 그 수녀원의 도움이 너무도 절실 했기 때문이다.<br />
실은 천연두 일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꼭 찾고 싶은 곳이었다. 1770년대 당시 영국령 식민지(메릴랜드, 필라델피아 등)에는 수녀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가톨릭이 불법이거나 억압받던 시기였기에 수녀원 설립은 불가능했기에 수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당시 식민지의 가톨릭 집안 딸들이 수녀가 되려면  유럽(주로 벨기에나 프랑스)으로 건너가 그곳 수녀원에 입회하는 길 밖에 없었다.   미국 최초의 수녀원(가르멜 수녀회)은 독립 전쟁이 끝난 후인 1790년에야 메릴랜드 포트 토바코에 세워진다. 이 또한 찰스 캐럴의 역할이 지대했다.</p>
<p>이에 반해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프랑스령 퀘벡, 몬트리올에는 그 무렵 수녀회가  있었다. 우르술라 수녀회, 노트르담 수녀회, 그리고 회색 수녀회가 이미 자리를 잡고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br />
특히 회색 수녀회는 당시 북미 대륙에서 여성이 주도적으로 사회 복지와 선교를 담당했던 거의 유일한 형태의 조직이었다. 정식 명칭이 몬트리올 회색 수녀회(Grey Nuns of Montreal, Soeurs de la Charité de Montréal)로 명명돼 있는 이 수녀회는 1737년 몬트리올의 여장부 마르그리트 데 유빌(Marguerite d&#8217;Youville)에 의해 설립됐다.</p>
<p>설립 부터 당시 기준으로 매우 파격적이었다. 초기에는 정식 수녀회가 아닌 자선 단체로 시작했는데, 몬트리올 사람들의 냉소와 조롱이 이 여성들을 종교적으로 더욱 단결하게 만들었고 &#8216;봉쇄&#8217;되지 않은 수녀원 으로 발전 하게 했다. 당시 대부분의 수녀원은 담장 안에서 기도만 하는 &#8216;봉쇄 수녀원&#8217;이었으나, 회색 수녀회는 거리로 나가 가난한 이, 환자, 유기견, 심지어 죄수들 까지 돌봤다.  회색 수녀회의  큰 특징은 &#8216;삶의 풍파를 겪은 여인들&#8217;의 공동체였다는 점이다. 설립자 유빌 부인(Madame d&#8217;Youville) 자체가 두 아이를 키운 과부였다. 그녀의 영어식 이름이 마가렛 유빌이다.</p>
<p>일반적인 처녀 수녀들이 &#8216;순결한 신부&#8217;의 이미지라면, 회색 수녀들은 &#8216;세상의 고통을 아는 어머니&#8217;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들은 자식을 잃어보았고, 가난을 겪어보았기에&#8230;<br />
지금 들어도 어색한 &#8216;회색(Grises)&#8217;이라는 이름은 원래 &#8220;술에 취한(tipsy)&#8221;이라는 뜻의 속어로 비난과 조롱이 담겨있는 이름 이었다. 설립자 마르그리트 유빌의 죽은 남편이 밀주 사업을 했던 것을 비웃으려 사람들이 붙인 멸칭이었다. 당시 몬트리올 사람들은 그녀와 동료들을 불어로  &#8216;술 취한 여자들(Les Grises)&#8217;이라고 불렀다.  마르그리트는 이 모욕적인 단어(Grises, &#8216;회색&#8217;이라는 뜻도 있음)를 겸허히 받아들여, 수녀복 색깔을 회색으로 정하고 단체 이름도 &#8216;회색 수녀회&#8217;로 공식화했다. 비난을 영광으로 바꾼 셈이다.</p>
<p>회색 수녀회는 자급자족하는 여성 공동체였다. 정부와  중앙 교단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에 수녀들은 농사, 바느질, 심지어 군대 납품용 의복 제작과 비스킷 제조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수녀원을 운영했다. 그후  몇몇 굵직한 여성 독지가들의 희사와 유산 상속으로 커다란 농장과 저택을 넘겨 받아 운영하게 되면서 유빌 원장과 동료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독립적인 &#8216;여성 경영인&#8217;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br />
당시 몬트리올 사람들에게 이들은 &#8216;도시의 어머니&#8217; 같은 존재로 떠 올랐다.  법적으로는 여성의 권리가 제한되었지만, 이 수녀회는 거대한 토지를 관리하고 사업을 운영했기에 지역 상권과 정치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p>
<p>주로 신심 깊은 가문의 딸들이 입회했지만, 전쟁 중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나 갈 곳 없는 여성들이 공동체에 합류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들에게 수녀원은 종교적 귀의처이자, 전쟁 통에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요새였다.<br />
당시 회색 수녀회의 수녀가 되는 길은 엄격하면서도 전략적이었다. 지참금(Dowry) 제도를 택했는데 원칙적으로 입회 시 수녀원의 생활비로 쓰일 일정 금액의 지참금을 내야 했다. 이는 수녀원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br />
회색 수녀회는 서민층 여성들도 대거 받아들였다. 교육을 받은 수녀들은 행정과 교육을 맡고, 기술이 있는 수녀들은 실질적인 노동을 담당하며 공동체를 유지했다.</p>
<p>당시 여성에게 이 수녀원은 결혼 이외에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직 경로이기도 했다. 전쟁 (영불 7년 전쟁) 중에는 헌신적인 간호 인력으로서 군 지휘관들에게도 존경받는 위치로 자리 매김 했다.  1747년부터 유빌 수녀는 경영난에 처한 몬트리올 종합병원(Hôpital Général) 을 맡아 운영했던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치열하던 때에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적군인 영국군 부상병들까지 차별 없이 치료해  찬사를 받았다.<br />
1765년 병원에 큰 불이 났을 때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 병원을 세웠다.</p>
<p>이런 남달리 찬란한 역사를 지닌 이들의 &#8216;몬트리올 총제 병원(Hôpital Général de Montréal.  맨위 사진) 은  1776년 당시 에도  몬트리올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복지 및 의료 기관 이었지만 주교의 엄명 때문에 대륙군 천연두 치료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p>
<p>그날 새벽 찰스는 깨끗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고슬랭과 함께 마차를 타고 수녀원으로 향했다.<br />
“사람은 처음 만날 때는 옷차림으로 판단 되고 헤어질 때는 그의 지성으로 기억 되는 법”이라는 부친의 평생 조언에 따른 일이었다. 찰스 옹은 특히 무언가 부탁하러 갈때는 추레한 몰골로 가서는 안되다고 누누히 강조 하곤 했다.<br />
회색 수녀회는 캐럴의 숙소에서 그리 먼곳이 아니었다. 센트루이스 거리를 따라 가면 15 분 쯤 걸리는 거리였다. 예상한 대로 노틀담 성당 처럼 문전 박대를 하지는 않았다.  병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기다리라고 했다.</p>
<p>수녀원의 부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병원의 운영 책임을 지고 있는 마리-안 코테(Marie-Anne Coiteux) 수녀는 매우 강단 있고 실무적인 인물 이었지만 브리앙 주교를 매우 따르는 인물이어서 일이 쉽지 많은 않을 것이라고 했다.</p>
<p>수녀회는 가브리엘 멘션이라 불렸던 큰 병원 건물을 앞에 두고 뒷쪽에 예배소과 학교, 주거공간으로 이루어진 실용적인 공동체의 모습에 가까웠다.<br />
병원 이자 수녀원 입구인 현관에 들어 서면 병원은 왼쪽에서 시작 됐고 수녀원 쪽 공간으로 격자무늬 나무 창살이 달린 작은 접견실이 있었다. 봉쇄 수녀원은 아니었지만, 외부인과 수녀들이 대화하는 공식적인 장소였다. 은은한 약초 향과 갓 구운 빵 냄새가 섞여 났다. 찰스와 고슬랭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현관 앞 공터가 매우 넓은 것을 보고 서로 뒤 고개를 끄덕였었다. 병원 막사를 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p>
<p>잠시 그곳에 앉아 기다리자 두명의 나이 든 수녀가 나왔다. 안내를 맡은 젊은 수녀가 급히 달려가 메릴랜드의 찰스 캐럴이 왔다고 전한 모양이다. 안내 수녀는 고슬랭과는 아는 사이 인듯 싶었다.<br />
“미국서 누군가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찰스 영주 형제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장을 맡고 있는 테레스 쿠쟁 수녀입니다. 어서 오십시오.”<br />
“병원을 맡고 있는 마리 코테 수녀 입니다. 캐럴 영주님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br />
병원장 수녀 뿐 아니라 수녀원 원장까지 함께 나온 것이다. 나쁜 일은 결코 어니다. 두 노 수녀는 진심으로 찰스 캐럴을 반겼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br />
실은 몇년 전 세상을 떠난 유빌 원장이 운영난에 허덕이던 병원을 인수할 때도, 찰스가 파리 유학 시절인 1765년 병원에 큰 불이 나 전소된 뒤 다시 재건 해야 했을 때도 아나폴리스 캐럴옹의 손 큰 쾌척은 매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br />
“큰 영주님도 안녕 하지지요?”<br />
영주 세뇌르 라는 표현은 너무도 쉽게 전염이 된 모양이다. 당초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텐데 고슬랭이 안내 수녀에게 영주님이 오셨다고 했고, 안내 수녀가 달려가 그렇게 말했기에 두 원장 수녀도 &#8216;세뇌르&#8217; 라고 호칭했고 급기야 아나폴 캐럴옹은 &#8216;그랑 세뇌르&#8217;가 되었다.<br />
“예, 안녕 하십니다. 다 천주님의 덕 이지요.”<br />
“그래야지요, 아메리카 대륙 천주교의 대들보와 같으신 분인데 성모님의 가피가 있으시겠지요.”<br />
“그나저나 어쩌면 그렇게 아버님하고 모습이 똑 같으십니까? 저기서 오면서 보려니 큰 영주님이 오신 줄 알았습니다. 30년전의 큰 영주님 모습 그대로 이십니다.”<br />
30여년 전에 젊은 시절의 캐럴옹이 몬트리올에 온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노틀담 성당 준공일에 맞춰서 였을 게다. 수녀님 들은 그때를 기억 하는 모양이다. 회색 수녀회 사제 삼총사로 불리웠던 그들이다.  유빌 수녀는 1701년 생(캐럴 옹과 동년배), 쿠쟁, 코테 수녀는 모두 1717년 생 동갑이다. 유빌 수녀는 70세 였던 1771년 뇌졸중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고,  그 후 남은 두 동지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수녀회와 병원을 지켰다. 유빌 수녀는 후일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된다.</p>
<p>두 수녀의 환대와 지극히 협조적인 태도로 이날 아침 찰스의 용건은 일사천리로 해결 됐다.<br />
두 수녀도 주교의 명령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찰스가 절묘한 해결책을 제시했기에 오히려  마음을 놓는 듯 했다.<br />
찰스는 대륙군과 민병대를 위해서 병원 건물의 병실 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고 마당 저쪽에 병동 막사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고 암암리에 약재나 제약 시설 그리고 인력의 편의만 제공해 달라고 했더니 수녀들은 그런 것이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 한다고 했다. 주교 한테도 점령군이 와서 공터에 막사를 짓는데 어쩔거냐 하면 되기 때문이다.</p>
<p>찰스는 용건이 쉽게 해결 됐지만 냉큼 병원을 나오기 뭣해 병원과 수녀원을 둘러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p>
<p>병실은 역시 넓었다. 천연두 환자들이 있다고 들어가지는 못하게 했다. 이곳에도 천연두 환자가 꽤 있었다.  원래 찰스가 도착 하기 전에도 암암리에 군인 천연두 환자를 돌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구석에서 대륙군 군복을 태우고 있었고  젊은 환자들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있으면 입실이 안돼 탈영했던 것이다.</p>
<p>접견실 뒷쪽은 공동 작업실 이었다. 회색 수녀회의 핵심 공간이란다. 수녀들이 모여 군복을 수선하거나, 양초를 만들고, 약초를 말리는 곳이라는데 벽에는 화려한 성상 대신 소박한 나무 십자가와 함께 &#8216;가난한 이들을 위한 노동&#8217;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br />
대단한 신심들이 아닐 수 없다.</p>
<p>&#8220;영주님 메릴랜드에는 우리 같은 여인들이 모여 기도할 집 조차 없다고 들었습니다. 영국 국왕의 법이 참으로 서슬 퍼런가 봅니다.&#8221;<br />
&#8220;그렇습니다. 신부님들도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시는데, 수녀원이란 건 꿈도 꿀 수 없지요. 그런데 이곳 수녀님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깁고, 장터에서 약초를 파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이곳 수녀님들을 &#8216;술 취한 여인들(Grises)&#8217;이라 비웃기도 한다던데요. 어떻게 참으십니까? &#8221;<br />
&#8220;처음엔 모욕이었으나 지금은 훈장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건 높은 제단 위의 기도가 아니라, 진흙탕 속으로 뻗는 손길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우리가 술에 취했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에 취한 것일 테지요.&#8221;</p>
<p>찰스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천주교와 수녀에 대해 생각 했다.<br />
수녀님들이야 말로 천주교 신앙의 한떨기 꽃이었다. 자신을 모두 버리고 봉사와 순명에 바친 삶. 신부님들 처럼 세속의 대우를 받고 권위를 인정 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수녀들은 유럽 대륙의 이편 저편에서 연꽃 같은 삶과 행적을 이어가고 있었다. 쉬운 마리아님과 천당의 기도 얘기를  들려준 이도 수녀님이었고 실은 며칠뒤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개량 인두법과 천연두 특효약의 비법을 전해준 이도 수녀님 이었다.<br />
성벽 안쪽 공터에 대륙군 병원 막사를 지을 것을 확인 하면서 노 원장 수녀님이 한 말이 귓가에 쟁쟁 하다.<br />
&#8220;이제 이 성벽 안에서는 국왕의 병사도, 의회의 병사도 없습니다. 오직 고통받는 육신만 있을 뿐이죠. 그것이 우리 회색 수녀들이 가 이곳 몬트리올에서 &#8216;순명(Obedience)&#8217;하는 방식입니다.&#8221;</p>
<p>막사는 일사천리로 지어졌고 사방에 흩어져 있던 환자들을 한데 모았다. 막사는 3개가 지어 졌는데   경증, 중증, 그리고 가망없는 환자 셋으로 구분 해 수용했다.<br />
존 캐롤 신부는  가망없는 환자 막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멘자민 프랠클린과 사무엘 체이스 등 사절단 일행도 극구 말리는 데도 입 수건을 하고 현장에 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27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unnamed.jpg" alt="" width="372" height="512" /></p>
<p>이 병원 막사를 중심으로 찰스의 본격적인 활약이 이어진다.  6월 초순 필라로 귀국하기 까지 몬트리올에서의 찰 스 캐럴 행적은 이곳 병원 막사에서의 일이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p>
<p>1776년 5월 초, 퀘벡과 몬트리올 인근의 미군 병력 2,200 중 약 1100명이 감염된 상태였다. 군대의 거의 절반이 전투 불능 상태였던 셈이다.  당시 천연두의 평균 치사율은 30%에 달했다. 생존하더라도 심각한 흉터(곰보 자국)나 실명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br />
&#8220;병사들이 헛간에 가득 차 있었고, 귀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올 정도로 비참한 상태였다&#8221;는  증언이 남아 있을 만큼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다.   당시 몬트리올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천연두는 퍼졌다. 다만, 미군 내 상황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비극적이었기에 군사 기록에 가려진 면이 있다.   몬트리올의 프랑스계 주민(Canadiens)들은 미군을 &#8216;해방군&#8217;이 아닌 &#8216;전염병을 옮기는 침략자&#8217;로 보았다. 찰스 캐럴 일행이 몬트리올 포섭에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전염병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었다.<br />
수녀회와 찰스가 운영하던 막사에는 군인뿐 아니라 가난한 민간인 환자들도 수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회색 수녀회 기록에 따르면, 수녀들은 &#8220;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막사안의 모든 침대와 바닥이 며칠만에 찼고 마땅한 얃재가 없어 너무도 안타까왔다&#8221;고 고통을 호소했다.</p>
<p>찰스는  막사가 지어지자 자신이 솔선해서 환자들을 날랐다. 피고름이 손에 묻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함께 움직이는 고슬랭이 기겁을 할 정도 였다.</p>
<p>찰스 캐럴의 눈부신 활약은 가장 먼저 &#8216;개량된 인두법&#8217;을 펼친 일로 시작된다.  개량된 인두법 (Suttonian Method)은 1760년대 중반 유럽에서 유행한 방식이다. 기존처럼 깊게 절개하는 것이 아니라, 바늘 끝에 환자의 고름을 살짝 묻혀 피부를 아주 얇게 긁는 방식. 절개 부위가 작아 흉터가 덜 남고 회복이 빨랐다. 찰스는 벨기에 유학 시절 이 최신 기법을 배웠다</p>
<p>&#8220;원장 수녀님, 이 병사의 팔을 잡으십시오. 벨기에의 수녀님께 배운 방식입니다. 크게 째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살짝 긁어내어 독(毒)으로 독을 다스릴 뿐입니다.&#8221;<br />
찰스 캐럴이 막사 귀퉁이에서  인두법을 시술하는 장면이다. 코테 원장은 경외의 눈으로 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찰스의 인두법은 거의 마법이었다.</p>
<p>루이 고슬랭이 호스피스 천막 문을 들치며 경악해며 소리쳤다.<br />
&#8220;영주님,  여기 있으면 위험 합니다. 전염됩니다! 귀한 분이 어찌 이런 곳에&#8230;&#8221;<br />
캐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가져온  금색 통을 열며 답했다.<br />
&#8220;필라델피아의 서류 뭉치에는 이들의 고름 냄새가 적혀 있지 않더군. 루이, 내가 이들의 고통을 닦아주지 않는다면, 훗날 내가 선언서에 적을 &#8216;자유&#8217;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할 것이오. , 한번 만이라도 이 약을 이들에게 주고 싶으이 &#8221;    그러면서 정신을 잃고 있는 환자의 얼굴을 거즈로 닦고 가져온 약을 발랐다.</p>
<p>실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고슬랭이 기겁을 했던 날 저녁 찰스는  인두법을 자신이 먼저 자신에게 시술했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 그렇게 바늘을 찍었고 꼬박 이틀을 열에 시달렸지만 자신이 만든 &#8216; 제수이트 마데이라 &#8216; 특효약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환자들에게 달려 가 품에 안고 그 약을 먹였다. 그리고는 고슬랭에게도 존 신부 에게도 인두법을 시술했다. 고슬랭과 존은 찰스의 셔츠아래 손목의 핏자욱과 상처를 보면서 서슴없이 팔을 내밀었다.</p>
<p>이런 모습들은  치료를 넘어, 가톨릭 지식인이 식민지의 고통받는 민중(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적으로 연결되는 &#8216;치유의 연대&#8217;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p>
<p>다음으로 그의 활약은 특효약  &#8216;제수이트 마데이라&#8217;를 만들어 낸 일이다.</p>
<p>이 특효약에 가장 필요했던 주요 약재는 제수이트 껍질(Jesuit&#8217;s Bark)이라 불렀던  기나나무 껍질(Cinchona Bark ,키니네) 이었다.  키니네는 본래 말라리아(열병) 치료제였지만, 당시 천연두로 인한 고열을 내리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예수회(Jesuit)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약재다.  제수이트 껍질은  말라리아와 각종 고열에 특효약 이었기에 남미 등 오지  전교에 니섰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필수 품목이었고. 각 예수회 지부 마다 이를 보관해 두고 있었다. 몬트리올  구 예수회 지부에도 선교사들이 남미에서 가져온  약재가 있었다.    .</p>
<p>몬트리올의 일반 약국이나 상점에는 키니네가  벌써 떨어졌지만, 캐럴은 잠시 폐교된 몬트리올 예수회 신학교의 깊숙한 약고(藥庫)를 열게 했던 것이다. 그곳 사제들은  예수회 가문의 형제&#8217;인 캐럴의 간곡한 청과 거액의 기부금 앞에 결국 비장의 약재를 내어놓았다.</p>
<p>이 제수이트 껍질은 찰스의 비방과 함께 합쳐져  합병증으로 오는 고열을 다스려 생존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캐롤은 병원의 절구와 약탕기를 빌려와 대량으로 특효약을 밤낮없이 생산해 냈다.</p>
<p>예수회 창고에서 가져온 짐  속에는 붉은빛이나 갈색을 띤 딱딱한 키니네 껍질 뭉치가 들어있었다. 아를 한번 약탕기에 넣어 쪄낸 뒤 말려서 아주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절구에 넣고 빻았다. 가루가 고울수록 성분이 잘 우러나며, 당시에는 &#8220;비단천을 통과할 정도로 곱게 가루 내라&#8221;는 지침이 있었단다.</p>
<p>키니네 성분은 물보다 알코올에 훨씬 잘 녹는다. 벨기에의 수녀님은  브랜디, 혹은 독한 증류주가  사용했지만 찰스는 마데이라 와인을 여기서도 활용했다.</p>
<p>분쇄한 가루를 마데이라에 넣고 잘 섞는다. 성분이 충분히 우러나도록 따뜻한 물에 중탕하거나, 급할 때는 가루째 와인에 타서 환자에게 마시게 했다.  키니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맛이 썼다. 환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꿀이나 설탕, 혹은 오렌지 껍질 같은 향료를 섞어 맛을 중화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p>
<p>찰스는 환자가 열이 오르기 직전에 이 &#8216;마데이라 약제&#8217;를 마시게 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8220;열이 내릴 때까지 4시간마다 한 스푼씩&#8221; 복용하도록 권장했다.   빻아놓은 가루는 짙은 붉은색이나 황토색을 띠며, 와인에 섞으면 탁한 갈색 액체된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쓴맛과 와인의 달콤한 향이 섞인 독특한 냄새가 병동에 진동했고 병사들은 하나둘 원기를 회복 했다.</p>
<p>찰스는 마데이라 와인 한 잔에 붉은 기나나무 가루를 조심스레 털어 넣었다. 금보다 귀한 가루였다. 그는 떨고 있는 병사의 머리를 받쳐 들고 잔을 입술에 대어 주며 나직이 속삭였다.</p>
<p>&#8221; 이것은 페루의 산맥에서 온 예수회의 선물이라네.  맛은 소태처럼 쓰겠지만, 곧 불길 같은 열을 잠재워 줄 것이네&#8221;</p>
<p>&#8220;이 가루는 피 속의 &#8216;나쁜 기운&#8217;을 씻어내고 심장을 강하게 만든다네 &#8221;</p>
<p>당시에는 미생물 이론이 없었으므로 이런 식의 설명이 일반적이었다.</p>
<p>환자가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캐럴은 프랑스계 상인들과의 인맥을 동원해 고급 보르도 와인과 설탕, 레몬 그리고 천연 꿀 을 다량 구해왔다.   몬트리올의 약제상들이 대륙군의 종이돈을 거부하며 문을 걸어 잠갔을 때, 찰스 캐럴은 밤중에 루이-조제프 고슬랭과 몇몇 민병대를 이끌고 은밀히 움직였다.  캐럴은 프랑스 귀족 가문의 문장을 닮은 &#8216;아나폴리스 캐럴 가문의 문장&#8217;이 찍힌 어음을  내밀었다.  유럽 천주교 인맥을 동원해 프랑스 본국 교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8216;부드러운 협박&#8217;과 &#8216;간절한 호소&#8217;가 섞인 지략이었다.</p>
<p>신부들과 영국 상인들인들로 부터  귀한 기나나무며 약재, 꿀 주정강화 와인 등을  손에 넣은 캐럴은  코트와 자켓을 벗어 던지고 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직접 약탕기를 돌렸다. 고슬랭과 수녀들이 그의 지시를 주교의 지시보다 훨씬 중하게 여겼음은 물론이다.</p>
<p>천연두 환자들이 내뿜는 악취 때문에 직속 상관인 장교들조차 코를 막고 접근하지 않는 그곳에서 찰스는  자신의 흰 린넨 셔츠를 찢어 환자들의 얼굴에 맺힌 고름을 닦아내고 또 닦에 냈다.</p>
<p>병사들에게 &#8216;성스러운 치료제&#8217;라며 와인에 약재를 타서 마시게 하는 그의 모습은  성인(聖人)처럼 보였다.</p>
<p>루이와 같은 신심 깊은 민병대원들은 그 광경을 보며 &#8220;메릴랜드의 영주가 프란시스코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피고름을 온몸으로 덮어 닦아 주고 있다 &#8221; 며 눈물을 흘렸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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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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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ue, 24 Feb 2026 21:55:11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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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8217; 캐럴  2 – 안동일 작 캐럴이 캐나다행을 결행 한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들 독립 민병대의 존재 였다. 캐나다에는 그 무렵 대륙군과 노선을 같이 하는 민병대가 결성돼 있었다.  캐나다라는 말은 원주민 이로쿼이족의 언어인 &#8216;카나타(kanata)&#8217;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본래 &#8216;마을&#8217;...]]></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8217; 캐럴  2 –</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캐럴이 캐나다행을 결행 한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들 독립 민병대의 존재 였다. 캐나다에는 그 무렵 대륙군과 노선을 같이 하는 민병대가 결성돼 있었다.  캐나다라는 말은 원주민 이로쿼이족의 언어인 &#8216;카나타(kanata)&#8217;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본래 &#8216;마을&#8217; 또는 &#8216;정착촌&#8217;을 뜻하는 일반 명사였는데 그 지역 일대를 일컫는 말로 당시부터 쓰여지고 있었다.<br />
캐나다 퀘벡도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영국 령이 되면서 총독의 군사력으로 민병대를 두었다. 당연히 총독의 명에 따라 영국왕에 충성하는 민병대 였다. 그런데 대륙에서 독립의 기운이 불타 오르면서 각지의 민병대가 총독과 영국왕에 반기를 든 것과 마찬 가지로 캐나다 에서도 식민지의 독립을 원하는 민병대가 결성 됐던 것이다.</p>
<p>이들 민병대는 영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천주교도 들이 중심이었다. 독립이 이루어지면,  미국이 승리하면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고 미국 쪽에 줄을 대고 섰던 것이다.   대륙회의에서 그리 큰 힘을 쓰지 않았는 데도 독립 전선에 합류한  민병대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고 사절단을 보내 격려하고 후원 하면  이를 크게 확장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p>
<p>1763년,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캐나다(퀘벡)를 빼앗았을 때, 캐나다 가톨릭교도들은 절망에 빠졌다. 당시 영국은 국교회(성공회) 국가였고, 가톨릭교도가 공직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가톨릭을 억압하고 성공회로 개종시키려 했다. 가톨릭 학교를 폐쇄하거나 성직자 보충을 막는 등 &#8216;고사(枯死) 작전&#8217;을 썼다.</p>
<p>당시의 몬트리올과 퀘벡은  밀도가 높은 공동체였다. 그 무렵의 도시 인구는 몬트리올이 약 1 만명 내외였고 행정 중심지였던 퀘벡은 몬트리올과 비슷하거나 약간 적은 수준이었다.  도시를 제외한 주변 농촌 지역까지 합치면 퀘벡 전체에 약 9만명 ~ 10만 명 정도의 프랑스계 캐나다인(Habitants)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 캐나다인들에게 가톨릭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8216;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8217; 그 자체였다. 이들은 거세게 저항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종교를 지켰다.   갈등은 한동안 계속 됐고  그러면서 미국 독립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기 직전, 영국은 아주 영리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퀘백법을 발효시킨 것이다.  미국 식민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북쪽의 캐나다인들만이라도 자기 편으로 묶어두려 한 것이다.</p>
<p>영국은 1774년 퀘벡법을 통해 가톨릭교도의 종교적 권리를 인정하고, 가톨릭 교회가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거둘 법적 권한까지 보장했다.   이로 인해 가톨릭 수뇌부(브리앙 주교 등)는 영국 왕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8220;가톨릭을 지켜준 고마운 영국 국왕 폐하&#8221;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br />
영국 정부와 결탁한 가톨릭 수뇌부는 신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8220;영국 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는 성사를 받을 수 없다&#8221;는 식의 종교적 협박이 시작됐다.</p>
<p>이런 즈음에 캐나다 일부 민중 들은 영국이 준 &#8216;종교의 자유&#8217;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들을 통제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 일부 천주교도들이  찰스 캐럴 등이 주창하는  &#8216;미국식 자유&#8217;에 호응하면서 그 길에 동참했던 것이다.</p>
<p>하지만 미국에 동조해 독립의 길에 나선 숫자는 찰스 캐럴등이 기대 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소수였다.  민병대만 하더라도 영국에 충성한 부대가 다수였고 실제 그들은 퀘백 성으로 들어가 영국군 수하에서 활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p>
<p>&#8220;독립하자는 미국인들은 가톨릭을 게속 박해하고 인정하지 않는데   오히려 개신교 국가인 영국이 가톨릭을 보호해주는 척하는 기묘한 상황&#8221;이 전개 되면서 후자가 대세가 된 형국 이었다.</p>
<p>독립파 캐나다 민병대는 두개의 연대가 결성 됐는데 하나는 1775년 가을, 제임스 리빙스턴(James Livingston)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제1 연대(1st Canadian Regiment) 였고 다른 하나는 1776년 초에 모세스 헤이즌(Moses Hazen)이 중심이 돼서 결성한 제2 연대였다. 각 연대의 부대원의 수는 현재의 연대 규모에 훨씬 못 미치는 800 여명 수준이었지만 연대로 불렀고 지휘관을 연대장으로 불렀다. 두사람 다 대령으로 계급장을 달았다.<br />
두 연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불어를 쓰고 천주교를 믿는 캐나다인 청 장년들 이었으나 두 부대의 창설자인 연대장은 모두 미국인 개신교도들 이었다.<br />
1연대의 제임스 리빙스턴은  알바니 출신의 전형적인 뉴욕 인물로. 몬트리올에 거주하며 상업에 종사하다가 혁명이 터지자 대륙군에 가담했다. 그는 개신교(Dutch Reformed계열) 배경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뉴욕의 리빙스턴 가문은 뉴욕의 강력한 개신교 엘리트 가문이었다.</p>
<p>2 연대의 모세스 헤이즌은 매사추세츠 출신의 뉴잉글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7년 전쟁 당시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이후 퀘벡 지역에 정착해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br />
그는 청교도(Puritan) 가문 출신이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부 기록(James Thompson의 일기 등)에서 그를 이름 때문인지 &#8216;유대인&#8217;으로 오해해 소개한 경우도 있지만 와전이다.<br />
미국인 개신교도 들이 이끈 캐나다 연대&#8217;에는 프랑스계 가톨릭 신자(Habitants)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부대원 들은 지휘관들과는 종교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여 있었다.  지휘관들은 높은 봉급을 제시했었다.</p>
<p>캐럴은  몬트리올에 도착 하던 날 사령관 베네딕트 아늘드에 이어  헤이즌 대령을 만났다. 그때 리빙스턴은 퀘벡쪽 전선에 나가 있었다.  헤이즌은  아놀드 보다 더 초조해 하고 있었고  격앙돼 있었다.  그는 사령관인  아놀드와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먼저 토로 했었다. 갈등이 상당히 심각했다.  역시 보급과 처우에 대한 불만이었다.</p>
<p>그럴 법 했다.  헤이즌 연대야 말로 퀘백 전투가 대륙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베네딕트 아놀드의 약속을 믿고 그 무렵에 급히 결성한 부대로 아놀드 부대가 몬트리올로 돌아올 때  퇴로를 뚫고 보급품을 나르고 정찰 업무를 수행하며 몬트리올 치안 확립에  적극 개입했는데   약속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이었다.  저들은 이미 대륙군 편에 서서 영국군과 싸웠기 때문에, 영국군이 다시 캐나다를  장악하면 당장 &#8216;반역자&#8217;로 처형될 위기였다. 영국군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다고 했다.</p>
<p>병사들 처우와 보급문제는 캐럴로서도 당장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이날 헤이즌과의 만남에 캐럴의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혔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가톨릭 신자인 캐나다인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그는  찰스 캐럴과 그의 사촌 존 캐럴신부에게, &#8220;병사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당신들의 종교적 도움이 절실하다&#8221;며 종교적 가교 역할을 부탁했던 것이다.</p>
<p>천연두에 걸린 캐나다 민병대원들이 육체의 고통보다, &#8220;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8221;는 종교적 심리적 공포에 더 떨고 있다고 했다.  퀘벡의 사제들이 성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찰스 형제는 그러마고 흔쾌히 대답했다.  리빙스턴이나 헤이즌의 부대에 소속된 캐나다인 가톨릭 병사들은 &#8220;나는 가톨릭 신자인데, 왜 우리 교구 신부님은 나를 반역자라고 하는가?&#8221;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p>
<p>후일의 이야기지만  1776년 6월, 영국 증원군이 퀘벡에 도착하면서 대륙군이 캐나다에서 완전히 퇴각할 때, 이들 캐나다 민병대원들도 가족을 이끌고 남쪽(미국)으로 내려왔다.<br />
이들은 이후 요크타운 전투를 포함해 독립 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대륙군의 일원으로 끝까지 열심히 싸웠다. 전쟁이  승리로 끝났지만, 이들은 끝내 고향인 캐나다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뉴욕주 북부(현재의 클린턴 카운티 등)에 땅을 나누어 주어 천주교 촌으로 만들어 정착하게 했다.  찰스 캐럴이 적극 나섰음은 물론이다.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16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24941_71479_3735-1.jpg" alt="" width="480" height="640" /></p>
<p>캐럴의 숙소였던 사토 드 라메제 역시 낮고 긴 석조 건물이었다. 웅장하기보다는 차갑고 습한 느낌이 강했으며, 바닥의 돌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신발 밑창을 타고 캐럴의 뼈마디까지 전달되었다.</p>
<p>밤이 으슥해서 편지지를 펼치고 잉크병을 연 캐럴은 편지를 쓰기 전에 생각에 잠겼다.</p>
<p>그날 4월 마지막 날,  찰스가 돌아 본   몬트리올 거리는 스산함과 처량함 그리고 역한 냄새가 가득찬  &#8216;회색의 도시&#8217;였다.  실제로도  몬트리올은  화재를 막기 위해 나무 대신 인근에서 채취한  회색 석회암(Limestone)으로 집을 지었다.<br />
그래서 거리의 집들은 두꺼운 돌벽과 가파른 은색 주석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p>
<p>캐럴은 거리를 걸으면서 이 두꺼운 회색 돌벽들이 마치 고집스런 요새처럼 느껴졌다.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도로는 깊은 진흙탕(Quagmire)으로 변했다.  하수 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녹아내린 오물과 말의 분뇨, 그리고 대륙군이 버린 쓰레기가 섞여 코를 찔렀다. 메릴랜드의 깔끔한 농장주였던 캐럴에게 이 냄새는 &#8216;실패의 냄새&#8217;처럼 다가왔다.</p>
<p>그 무렵  몬트리올 도시 인구는 약 1 만명 내외였다.  1만 명 중 대다수는 프랑스어를 쓰는 가톨릭 신자였고,  소수의 영국인 상인과 관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1만 명 규모의 타운에서는 상류층 가문이나 주요 신부들, 군 간부들끼리는 서로의 행적을 훤히 꿰고 있었다. 찰스 캐럴 같은 거물급 인사가 나타났을 때 그 소문이 도시 전체에 퍼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찰스는 건물들의   닫힌 창문 너머로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적개의 눈초리를 느꼈다.</p>
<p>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은 당시 몬트리올의 심장부였지만, 캐럴이 본 풍경은 처참했다.  한쪽에서는  예복을 입은 현지 가톨릭 귀족들이 차가운 표정으로 성당을 드나들고, 광장 건너편에는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짓무른 대륙군 병사들이 더러운 담요를 뒤집어쓴 채 구걸하거나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은 점령군이 아니라 완연한 도시의 천덕구러기 였다.</p>
<p>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아래로는 굶주린  병사들의 거친 욕설과 베네딕트 아놀드의 기병들이 내는 말발굽 소리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수천 명의 미국 대륙군 병사들이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하더니 저들은 전투에도 졌고 거기에 다수가 역병 까지 걸려 있는 모습&#8230;</p>
<p>도시 북쪽 성벽 너머로 보이는 강물은 캐럴에게 그나마의  &#8216;탈출구&#8217;였지만 역시  &#8216;공포&#8217;였다.   강물에는 집채만한 얼음 덩어리들이 떠내려 가고 있었다. 영국 함대가 이 얼음을 부수면서 강을 거슬러 오고 있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고  캐럴은 얼음 섞인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이 이곳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p>
<p>거리를 걸을 때,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프랑스계 주민들의 차가운 시선이나, 자신을 피하는 신부들이며 안면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인구가 적은 도시였기에 더욱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진흙탕 위로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신음하는 병사들과 시신들이 즐비한 도시의 풍경은 그가 필라델피아에서 꿈꿨던 &#8216;자유의 원정&#8217;이 비극적인 참사로 변하고 있음을  이내 깨닫게 하는 지옥도였다.  같은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자신들을 &#8216;해방군&#8217;이 아닌 &#8216;침략자&#8217;로 보고 영국군이 오기를 기다린다니&#8230;  캐럴은 자신이 추구해 온 가톨릭 연대에 깊은 회의를 느껴야 했다.</p>
<p>대륙군 절반 이상이 천연두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곳 몬트리올에서는 썩어가는 시신과 병자들의 악취를 피할 곳이 없었다.  더욱이 천주교 병사들이 고해성사도 못하고 종부 성사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캐럴은 &#8220;하느님은 왜 이 고통을 방관하시는가?&#8221;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제단 앞에 서서 &#8220;반역의 냄새가 나는 자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8221;고  문을 닫아버리던  사제는  &#8216;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8217;가 아니라 &#8216;영국 왕의 충견&#8217;으로 보였다.</p>
<p>찰스는 그날  마주쳤던 주요 인물들을 떠올렸다.  가톨릭 상인들의 리더였던  조제프 플레시 (Joseph Plessis) 는 당시 몬트리올의 유력한 가톨릭 상인이자 시민 대표 격인 인물이었고 찰스와도 안면이 있는 이였다.<br />
찰스 캐럴은  제일먼저 그를 찾아  대륙군에 대한 보급품 지원을 호소했다. 플레시는 매우 예의 바르고 격식 있게 캐럴을 대 했지만  정작 돈이나 물자 이야기가 나오자  &#8220;우리는 이미 영국 법률(퀘벡법) 아래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데, 왜 불확실한 도박(미국 독립)에 우리 가문의 운명을 걸어야 하느냐&#8221; 며 냉정하게 거절했다.</p>
<p>샤를 장-바티스트 샤부아예 (Charles-Jean-Baptiste Chaboillez) 역시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몬트리올의 부유한 모피 상인이었다.  그의 저택은 대륙군 장교들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륙군이 몬트리올을 점령했을 때 강제로 그의 집을 징발했기 때문에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모양이다.<br />
캐럴은 길을 걷다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그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눈을 부릅뜨고 찰스를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p>
<p>.그나마  영적 위로가 되었던 유일한 통로는 피에르 르네 플로케 (Pierre-René Floquet) 신부였다. 그는 몬트리올에 남아있던 마지막 예수회(Jesuit) 신부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사제들과 달리 그는 대륙군과 캐럴 일행에게 활짝 마음을 열였고 협조적 이었다. 동창인 존 캐럴 신부에게 자신의 집을 숙소로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나중에 브리앙 주교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게 된다.</p>
<p>몬트리올 노트르담 성당 앞의 진흙탕 길에서의 성사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존 신부와 자신이 어제 오늘 사이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유일한 잘한 일이지 싶다.<br />
캐럴과 존이 노틀담 성당  벨푀유 신부에게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서려는데 조금 뒤쪽에 서 있던 한  병사가 성큼 다다와  존 신부의 옷깃을 잡았다.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짓무른 대륙군 병사였다.<br />
&#8221;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 해 주십시오.'&#8221;   병사는 &#8216; 몽 페르&#8217;   라고 정확히 프랑스어로 발음 했다. 보아하니 그도 문전 박대 당한 모양이었다.</p>
<p>존은 아직 계단에  서 있던 노틀담 성당의 젊은 신부를 흘낏 한번 보고는 병사의 손을 덥석잡고 저쪽으로 이끌었다. 긴 게단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신부와 병사는 진흙 투성이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성사가 시작됐다.</p>
<p>신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는 성사를  흔히 &#8216;마지막 성사(Last Rites)&#8217;라고 부르는데 보통 고백성사와 종부성사 그리고 마지막 영성체인 노자 성사로 이어진다.<br />
환자가 의식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영혼을 깨끗이 하는 고백성사를 먼저 하고 그 다음은 사제가 고통받는 환자의 이마와 양손에 성유를 바르며 치유와 위로, 죄의 용서를 청하는 병자성사 (Anointing of the Sick)를 한다. 과거에는 &#8216;죽기 직전&#8217;에만 한다고 해서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 불렀으나, 요즈음에는 종부성사라는 말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br />
마지막  노자성쳬(사) (Viaticum)는  임종 성사로서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8216;노자(路資)&#8217;는 문자 그대로 길을 떠날 때 필요한 돈이라는 뜻으로, 죽음을 앞둔 신자가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힘을 얻도록 모시는 마지막 영성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날 찰스 형제의 성사 때는 준비가 되지 않아 약식 손동작 으로만  이루어져야 했다.</p>
<p>존 캐럴 신부는 병사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고름이 흐르는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 갔다.</p>
<p>그리고는  신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8220;Mon enfant, n&#8217;aie pas peur. Dieu est miséricorde.&#8221; (내 아들아, 두려워 마라. 하느님은 자비이시다.) :</p>
<p>예수회의 선교 철학 &#8216;적응주의(Accommodation)&#8217;와 실용주의에 투철한  신부는  병사가  프랑스계 라는 점을 생각해 불어로 성사를 집전했다.  병사가 뭐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서너발짝 떨어져 있는 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숨이 가쁜 병사는 모국어인 불어를 잘 이해하는 신부에게 자신의 마지막 고백 할 때 깊은 평화를 느끼는 듯 했다.</p>
<p>종부성사는 마지막 기름 부음이라는 뜻으로 환자의 병든 부위에 성유를 바르는 예식이다.  다행히 작은 성유병 하나가 수단 안 주머니에 있었던 모양이다.<br />
신부는  병사의 눈에  성유 바르며 성구를 읊었다.  &#8220;Par cette sainte onction&#8230; que le Seigneur te pardonne tes fautes par la vue.&#8221; (이 거룩한 도유로&#8230; 주님께서 네가 눈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기를.)<br />
그리고는 성체를 쥔 손을  들어 올리며  &#8220;Voici l&#8217;Agneau de Dieu&#8230;&#8221;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8230;)하고 외쳤다.  성체가 없었기에 존 신부는 빈 손을 모아 허공에 올렸다.<br />
그리고는 그 손을 병자에게 건네며: &#8220;Reçois le Corps du Christ, pour qu&#8217;il te garde et te mène à la vie éternelle.&#8221;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라, 그분께서 너를 지켜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 라고 읊었다.  병사는 손을 올리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악취가 찰스가 있는 곳까지 퍼져 나왔다. 하지만  신부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모아진 두 손을 그 입안으로 집어 넣었다.   &#8220;Que Dieu notre Père vous montre sa miséricorde&#8230;&#8221;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어&#8230;)</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17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john_carroll.jpg" alt="" width="488" height="585" /></p>
<p>존은 괞찬으려나 싶다. 어쩌면 감염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날 존은  예수회 플로케 신부의 관사에서 얘기도 나눌 겸 자고 오겠다고 해서 오후에 헤어졌었다.</p>
<p>당시 천연두는 단순히 &#8216;아픈 병&#8217;이 아니라 &#8216;저주&#8217;에 가까웠다.<br />
아직 &#8216;종두법(백신)&#8217;이 나오기 전이었다. 유일한 예방책은 인두법이었는데, 이는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건강한 사람의 상처에 문질러 가볍게 앓고 지나가게 하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당시 대륙군 사령부는 군 전체가 동시에 앓아누울까 봐 인두법을 엄격히 금지했다. 캐럴은 유럽 유학 시절 벨기에의 시골에서 이 인두법의 효과를 목격했고  그 독특한 비방도 알고 있었다.  몬트리올 기적의 발아점이었다.</p>
<p>안개 낀 세인트로렌스 강바람이 숙소의 돌벽을 때리는 새벽,  찰스 캐럴은 걱정과 추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어슴프레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덩치 큰 군인이 그 앞에 나타났다.</p>
<p>그가  루이 조제프 고슬랭이 었다. 대륙군 본부의 그날 불침번 경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참에 찰스의 모습이 보이자  나섰던 것이다.<br />
자신의 이름이며 리빙스턴 연대 소속의 사관 으로 지금은 대륙군 본부 쪽에 배속 돼 있다는 대충의 관등성명 소개가 끝나고  루이가 거친 프랑스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찰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작정하고 달려온 참이었다.</p>
<p>&#8220;캐럴 영주님 .. 당신은 성모의 땅  메릴랜드의 주인이시니 묻겠습니다. 리빙스턴 대령님은 우리가 영국군과 싸워 이기면 &#8216;자유&#8217;를 얻을 거라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 집 마당의 십자가를 부수고 간 영국군과, 우리를 이단이라 부르는 필라델피아의 개신교 병사들 사이에서&#8230;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8221;<br />
의외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잘문 아닌가.  캐럴은  고뇌에 찬 눈빛으로 답했다.</p>
<p>&#8220;루이, 나 역시 같은 질문을 하느님께 던지고 있소. 나는 메릴랜드에서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참정권을 잃었었지요. 우리가 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천주 신앙이 당신과 나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8221;</p>
<p>루이-조제프 고슬랭(Louis-Joseph Gosselin)은  제1 캐나다 연대(리빙스턴 연대) 소속 중위 (Lieutenant)였다. 나이는 30세.   모피 사냥꾼 출신으로,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졌으나, 목에는 낡은 은색 십자가 묵주를 항상 걸고 다녔다.  대대로 퀘벡 농토를 일구던 가문이었으나, 영국의 지배 아래서 &#8216;가톨릭은 이등 시민&#8217;이라는 굴욕을 견디다 못해 대륙군에 투신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 사용했다.</p>
<p>그는 찰스를  &#8220;Mon Seigneur&#8221; (몽 세뇌르)라 불렀다. 영어의 &#8216;Lord&#8217;에 해당하는 단어다.  프랑스의 평민이 찰스 캐럴처럼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을 마주했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존칭이다. &#8216;영주님&#8217;, &#8220;대인님&#8221;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호칭이다.  실제 루이 등 퀘백의 신자들은 신대륙 최초의 천주교 타운인 성모 마리아의 땅 메릴랜드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어 일종의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많이들  캐럴 가문과 볼티모어 가문을 혼동하고 있었다.</p>
<p>&#8220;캐럴 옹(Annapolis Carroll)의 아드님이신 젊은 영주님. 저희 리빙스턴 대령은 용감하지만 우리의 &#8216;아베 마리아&#8217;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퀘벡의 주교님은 우리를 반역자라며 성사를 거부하고 사탄의 자식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국 국왕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 앞의 자유인이 되고 싶어 이 총을 들었습니다.&#8221;</p>
<p>&#8220;너무도 잘한 일이오 너무도 자랑스럽소, 그래서 내가 멀리서 부터 이를 치하하고 격려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오&#8221;<br />
&#8220;그런데 천주의 영주님 ,우리 캐나다 천주교 민병대원들은 매일 밤 천연두로 죽어가는 동료의 눈을 감겨주며 울고 있습니다. 신부님도 없고, 고해성사도 없는 이 진흙탕에서 우리는 버려진 군대입니까? 영주님과 친구분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말한 &#8216;자유&#8217;에 우리 퀘백의 가톨릭 신자들의 자리도 정말 있는 것입니까?&#8221;<br />
찰스는 격분하는 루이를 보며 자신의 &#8216;정치적 대의&#8217;가 현지 가톨릭 민중, 특히 독립의 대열에 함께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처절한 &#8216;생존의 문제&#8217;인지를 새삼 깨달았다.</p>
<p>&#8220;그럼 있고 말고, 가장  높은자리에  올려 놓도록 내 노력 하리다. &#8221;</p>
<p>루이가 가슴의 묵주를 꽉 쥐며 다짐하듯 말했다.  &#8220;그럼 약속해 주십시오. 우리가 만약 패배해서 이 진흙탕 속에 묻히더라도, 영주님은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우리 같은 캐나다 가톨릭교도들의 이름도 &#8216;자유의 문서&#8217;에 적어 넣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말이오.&#8221;</p>
<p>&#8220;내 하비에르 성인의 이름으로 약속 함세&#8221;</p>
<p>&#8220;루이, 자네의 억양이 독특하군. 노르망디 쪽인가?&#8221;<br />
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8220;아닙니다, 영주님. 제 조상은 브르타뉴의 바닷가 바위 틈에서 태어났지요. 프랑스 놈들은 우리를 &#8216;야만인&#8217;이라 불렀고, 영국 놈들은 &#8216;짐승&#8217;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 브르타뉴 놈들은 고집 하나는 바위보다 세답니다.&#8221;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가장 낙후된 시골이었지만 천주교 신앙 만은 최고 높은 곳이었다.</p>
<p>&#8220;루이 그나저나 천연두가 문제 아닌가? 자네가 나좀 도와 줘야 겠네.&#8221;</p>
<p>&#8220;마리아의 영주님,   마리아 님의 은총을 걸고 신명을 다해 돕겠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8221;</p>
<p>이렇게해서 운명의 1776년 봄, 천연두균이 창궐하던 몬트리올 진흙 땅을 성모 마리아의 은총이 내린 안온한 곳으로 바꾼 찰스의 몬트리올 기적의  허큘레스, 루이 고슬랭과의 도원 결의가 그날 신새벽에 이루어 졌던 것이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p>&nbsp;</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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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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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ue, 17 Feb 2026 23:50:40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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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몬트리올 진흙탕의 &#8216;몽 세뇌르'(영주님) 캐럴 – 안동일 작 찰스 캐럴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등 대륙회의 지도부 인사들에게 자신들 가톨릭을 인정하면 프랑스와 캐나다의 가톨릭을 독립전선에 끌어 들일 수 있다고 내세웠고 대륙회의 측은 이를 매우 매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일의  첫 단추가 76년 봄,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한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몬트리올 진흙탕의 &#8216;몽 세뇌르'(영주님) 캐럴 –</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찰스 캐럴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등 대륙회의 지도부 인사들에게 자신들 가톨릭을 인정하면 프랑스와 캐나다의 가톨릭을 독립전선에 끌어 들일 수 있다고 내세웠고 대륙회의 측은 이를 매우 매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일의  첫 단추가 76년 봄,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한  캐나다 방문이었다.</p>
<p>1775년 봄부터 76년 독립 선언 직전까지 대륙회의가 열리고 있던  필라델피아는 그야말로 &#8216;거대한 용광로&#8217;였다.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 직후 75년 4월말 소집된 회의는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br />
&#8216;충성과 반역&#8217; 사이의 위태로운 재소집이었던 것이다.  독립을 지지하는 급진파는 존 아담스와 사무엘 아담스가 주도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 영국과의 화해를 지지하는 온건파는  존 딕킨슨(펜실베이니아)가 수장이었다. 급진파는  이미 영국과의 결별을 결심했고, 대륙군 창설과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 임명을 밀어 붙히고 있었다.  온건파들은  여전히 영국 국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8220;조금만 더 협상하면 평화를 찾을 수 있다&#8221;고 말했다. 온건파가  주도해 낸 마지막 카드가 그 유명한 &#8216;올리브 가지 청원(Olive Branch Petition)&#8217;이었다.</p>
<p>찰스 캐럴의 위치는 메릴랜드 대표의 막후 실세로서 온건파의 정서를 이해하면서도,  영국의 변덕스러운 박해를 경험했고 또 독립만이 천주교의 입지를 마련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급진파의 편에 서서 주변을 온건하게 설득하는 입장이었다.  2차 대륙회의 때도 캐럴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아나폴과  필라를 오가면서 시티터반을 무대로 의원들을 대접하면서 친분을 쌓아 갔다. 이때 친분을 쌓아 동지의 연을 맺은 중요 인물이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p>
<p>76년 초가 되면서 회의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된다. 영국왕 조지 3세가 &#8216;올리브 가지 청원&#8217;을 거부하고 식민지를 &#8216;반역 상태&#8217;로 규정했기 때문이다.<br />
독립의 기관차 존 아담스는 &#8220;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8221;며 매일같이 연설하며 반대파를 몰아세웠고 존 딕킨슨는 “성급한 독립은  자살 행위&#8221;라며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그 목소리는 작아졌고 이미 여러 곳에서 총성이 빵빵 울리고 있었다.</p>
<p>이때 혁명의 불을 지핀 &#8216;떠돌이 지식인&#8217;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등장한다. 페인은 대륙회의의 엘리트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br />
영국의 실패한 세관원이자 코르셋 제조공 출신으로, 1774년 벤지만 프랭클린의 추천장을 들고 무작정 아메리카로 건너온 신규 이민자였다. 페인은 1776년 1월 출간한 &#8216;상식&#8217; (Common Sense) 이라는 소책자에서 &#8220;섬나라(영국)가 대륙(아메리카)을 다스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8221;며, 국왕을 &#8216;왕관을 쓴 괴수&#8217;라고 조롱했다.</p>
<p>엘리트들이 라틴어와 법률 용어로 논쟁할 때, 그는 시장터의 언어로 &#8220;독립은 상식이다!&#8221; 고 외쳤던 것이다. 이 책은 1776년 봄 식민지 전역에 수십만 부가 팔리며 민심을 독립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찰스 캐럴과 프랭클린이 캐나다로 떠나기 직전, 필라델피아의 모든 광장과 선술집은 페인의 글로 들끓고 있었다.</p>
<p>캐럴이 2차 회의 부터 대륙회의에 합세한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 케나다로 외교 여행을 떠난 것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신의 한수 였고 캐럴을 완연한 독립 투사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벤자민은 1차 회의 때는 영국에 머물고 있었기에 참여 할 수 없었다.<br />
1706년 생으로 캐럴이며  아담스 보다 20여살 연상의 노장인 밴자민은 노련한 외교 능력과 해박한 지식,  실용적인 지혜로 이내 대륙회의의 실질적 좌장 역할을 했다. 그도 급진파의 손을 들어주는 축이었다.</p>
<p>2차 회의 시작 무렵 회의장인 펜주 의회 의사당 에서 캐럴을 만난 벤자민은 사무엘 아담스 만큼이나 캐럴을 반겼고 둘은 굳은 포옹으로 단박에 동지의 연을 맺었다.  벤자민은 캐럴이 스승으로 받들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티 터반에서의 정성스런 접대는 벤자민을 적잖이 감동 시켰고  벤자민은  캐럴의 열정과 그 막강한 재력이 독립전선의 최고 자산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으 면서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했다.  독립의 기관차 존 아담스의 강력한 천거도 한몫 했다.</p>
<p>대륙회의가 캐나다를 설득 하자면서  프랭클린에게 부탁 했을 때 그는 이를 수락 하면서   캐럴을 주저 없이  여정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대륙회의가 이 시점에 두 사람을 캐나다로 보낸 것은 일종의 &#8216;우회 전술&#8217;이었다. 내부에서 독립 찬반으로 싸울 때, 외부(캐나다)의 가톨릭 세력을 끌어들여 형세를 뒤집으려 했던 것이다.  찰스 캐럴의 언변과 종교적 배경은 &#8216;특수 임무를 띤 민간 외교관&#8217;으로 발탁 위촉 되기에 충분했다.  당시 70세 고령, 외교의 대가와 유창한 프랑스어 구사하는 30대 중반의 가톨릭 명망가는 이 일에 환상적인 조합 이었다.</p>
<p>그때 캐나다에서는 대륙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한창 진행 된 후 교착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br />
1775년 4월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으로 시작된  독립 전쟁은 초기 몇 달간 예상을 뛰어넘는 급박한 전개 과정을 거쳤다.  콩코드 전투에서 영국군을 보스턴 시내로 몰아넣은 식민지 민병대는 보스턴 외곽을 완전히 포위했다. 당시 영국군은 바다를 통해서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고립된 상태에 빠졌고  민병대들의 사기는 올라갔다.<br />
5월 10일 에단 앨런과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민병대가 뉴욕주의 요충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기습 점령했다. 이곳에서 확보한 대포와 군수물자는 이후 보스턴 포위전의 결정적 무기가 된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위명이 이때 알려진다.</p>
<p>이에 고무된 대륙회의는 각자의 민병대를 정규군인 대륙군(Continental Army)으로 개편하기로 최종 결의했고 6월 15일,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워싱턴은 이 회의에 정장 코트 밑에 낡은 군복을 입고 와 준비된 사령관임을 알렸다.<br />
사흘 뒤인  6월 17일에  벌어진 벙커힐 전투는 초기 전쟁의 흐름을 바꾼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민병대가 보스턴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벙커 힐에 참호를 파자, 영국군이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영국군은 진지를 탈환했지만, 전체 병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야 했다.   이때 &#8220;영국 정규군은 무적&#8221;이라는 신화가 깨졌고,  대륙군과 식민지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p>
<p>7월 3일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워싱턴은일단  대륙군인 된 민병대를 훈련시키고 규율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 워싱턴은 영국군을 공격할 충분한 화력이 부족했기에 포위망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p>
<p>그런데 진작 부터  식민지 지도부는 영국군이 캐나다(퀘벡)를 병참 기지로 삼아 뉴욕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또, 캐나다인들이 14번째 주로 독립 전쟁에 동참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식민지의 기대 일 뿐이었다.<br />
75년 가을이 되면서  방어에 머물지 말고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캐나다로 전선을 확장하는 공격적인  구상이 제기 됐다.  결국 대륙군은  영국군의 병참 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캐나다를 포섭하거나 점령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실행에 옮겼다.</p>
<p>대륙군은 캐나다의 중심지인 퀘벡(Quebec)을 함락시키기 위해 군대를 둘로 나누어 진격했다.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가 이끄는 부대는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츨발해 샴플레인 호수를 거챠 몬트리올로 진격 했다. 약 1,200명의 병력이 북상해 몬트리올 전방 세인트존스 요새를 포위 공격했고. 2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요새를 함락시킨 후, 11월 13일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br />
한편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의 부대는  메인주의 켄네벡 강을 건너 황무지를 헤치고 퀘벡으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다. 이 경로는 &#8220;지옥의 행군&#8221;이라 불릴 만큼 가혹했다. 지도에도 없는 늪지대와 험한 산을 넘으며 식량이 떨어져 군화를 끓여 먹고 개를 잡아먹는 지경 이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출발 당시 2천여 명이었던 병력은 퀘벡에 도착했을 때 겨우 1천여 명만 남았다.<br />
12월 초, 두 부대는 퀘벡 성벽 앞에서 합류했다. 하지만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매서운 겨울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병사들의 복무 기간이 12월 31일로 끝날 예정이라 두 부대 지휘관은  해가 가기 전 공격 명령을 내렸다.</p>
<p>눈보라 속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나, 견고한 성벽과 영국군의 화력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타이컨 부대 지휘관 리처드 몽고메리는 전사했고 베네딕트 아놀드는 다리에 중상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대륙군은  400명의 포로를 남겨야 했다.<br />
전투 후에도 아놀드는 남은 병력으로 퀘벡을 포위하며 버티고 있다가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자 몬트리올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벤자민과 캐럴이 그곳으로 파견된 것이었다.</p>
<p>1776년 3월 29일 캐나다로 떠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찰스 캐럴이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한 민중 연사가 토마스 페인의 &#8216;상식&#8217; 을 한 손에 들고 독립을 역설 해 군중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는 모습을 목격 하면서  힘찬 박수를 치고 있는  마부에게 웃음을 던지며 북쪽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글을 제대로 모르는 마부들까지 페인의 문장을 입에 담는 것을 보며, 캐럴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혁명의 파도가 시작 되었음을 직감하면서 희망에 가득찼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번 여정이 그토록 힘든 고난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이 고난의 여정에서 찰스 캐럴은 몬트리올 천주교 청년들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진흙탕의 &#8216;몽 세뇌르&#8217; 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뇌르는 불어로 영주라는 말이다.  몽은 나의(my) 라는 뜻을 가지면서 앞에 붇는 경칭.</p>
<p>벤자민 프랭클린의 캐나다 파견 팀에는 찰스 캐럴 이외에도 캐럴의 측근인 메릴랜드 출신 법률가이자 웅변가인 사무엘 체이스와 찰스 캐럴의 사촌이자 예수회 신부인 존 캐럴이 가세 해 있었다.  존은 지금은 친영파로 돌아섰다는  퀘벡 교구의 브리앙 주교와도 안면이 있었고 몬트리올에는 그와 동문 수학한 예수회 신부들이 여럿 있었기에 그의 합세는 천군 만마와도 같은 것이었다.</p>
<p>고난 여정의 장도가 시작된 날짜는  3월 26일 . 1776년의 봄은 유난히 추웠고, 여정은 말한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3월 말이면 달력상으로는 봄의 길목이지만, 당시 북동부와 캐나다 접경 지역의 체감 기온은 &#8216;뼈를 파고드는 냉기&#8217; 그 자체였다. 그 무렵  18세기는 이른바 &#8216;소빙기(Little Ice Age)&#8217;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평균 기온이 더 낮고 겨울이 길었다. 당시의 4월 역시 여전히 겨울의 꼬리가 길게 늘어진 시기였다.<br />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지 호수(Lake George)와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를 건너는 루트였다. 얼음이 덜 녹은 호수를 배로 건너고, 진흙탕 길을 마차와 썰매로 이동해야 했다.</p>
<p>조지 호와 챔플레인 호 에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이 떠다녔다. 사절단이 탄 밑이  평평한 목선 바투(Batteau) 는 이 얼음을 피해 이리저리 저어가야 했고, 때로는 얼음이 배를 짓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떨어야했다.<br />
육로도 마찬가지였다. 땅이 녹기 시작하면서 길은 깊은 진흙탕(Mud Season)이 되었고,  진흙탕  위로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리면 마차 바퀴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p>
<p>70세의 고령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혹독한 추위의 험난한 여정 때문에 심한 통풍과 건강 악화를 겪어, 여정 동안 죽음을 예감하며 친지들에게 작별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이때 찰스 캐럴은 지극 정성으로 그를 간호해  두 사람 사이에 더욱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다. 프랭클린은 나중에 &#8220;찰스 캐럴이 없었다면 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8221;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05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nHMY1MbBQfKt20cjnmHGXFJDDsH4qu4yjmrPwSjoqiomhojqG93qclYJIz0aY70U4CWoKsuh1QKJInQ9CFYkEp-CzHYMDoMZyH1YIMZ07BgXBLk5HS15J1lf3V78pSIwqnrTJ4yET5fxIUSl0nJP_8LG44egNuSNE3nExjdWpFs.webp" alt="" width="1000" height="640" /></p>
<p>찰스 캐럴은 당시 심리적으로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꽤 많은 개신교측 인사들로 부터 &#8220;교황의 앞잡이&#8221;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이번 선발을 용인하면서도 &#8216;어디 한번 두고 보자&#8217;는 냉소와 비협조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8220;거봐라, 내가 뭐랬냐? 가톨릭은 안 된다니까” 하고 나설 것이 뻔 했다. 또 정황을 보면 퀘벡의 가톨릭 주교며 성직자들은 비 협조를 넘어 격렬한 반대를 하며 &#8220;반역자들과 손잡은 배교자&#8221;로 매도 할 공산이 컸다.</p>
<p>칠흑 같은 밤, 바토(Bateau) 위에서 얼음이 배를 긁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8216;영국 국왕을 배신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신앙을 배신하는 것인가.&#8217;<br />
&#8216;안개 낀 얼음 호수 위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배”. 양쪽 기슭  영국과 혁명군, 혹은 개신교와 가톨릭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떠 있는 그의 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p>
<p>얼음이 녹으면서 뿜어내는 습한 냉기와 밤마다 텐트 안으로 스며드는 서리는 사절단이 느꼈던 절박함 이기도 했다.<br />
&#8221; 여러분들, 냉기는 우리를 얼리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제련하는 중입니다. 캐나다가 우리와 손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함대를 불러와 이 바다 전체를 뒤 흔들면 됩니다.&#8221;<br />
일행의 극진한 간호에 어느정도 몸을 추스린 벤자민은 캐럴과  일행을 격려하는 호기로운 소리를 해서 침체된 분위를 바꾸려 애썼다.<br />
찰스와 존 두 가톨릭 사촌 형제는 그럴수록 묵주를 굴리며 성모송을 암송했다.<br />
이처럼 1776년의 퀘벡 여정은 찰스 캐럴에게 &#8220;차가운 얼음 호수를 건너는 고통스러운 순례&#8221;이자 &#8220;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영적인 시험대&#8221; 였던 것이다.</p>
<p>프랭클린은 철저한 실용주의자였고, 캐럴은 원칙적 박애주의자였다. 이 여행에서 나눈 두 사람의 많은 대화와 영혼의 공감 교류는 는 &#8216;새로운 국가&#8217;의 청사진의  핵심이 된다. 이 여행은 독립투쟁 공간에서 벤자민이 찰스를 얻었고 찰스는 종교는 다르지만 벤자민을 확실한 스승으로 얻었던 것이다. 이 여행 이후 벤자민은 거의 개종했다고 할 정도로 친 가톨릭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역시 종교적 배경은 영국 성공회 였다.</p>
<p>캐나다 몬트리올에 도착한 날짜는 4월 29일. 꼬박 한달 하고도 사흘이 더 걸렸다.<br />
몬트리올의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고 절망적이었다. 음산한 회색빛 도시에 들어서면서 부터 일행은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br />
사절단이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 미 대륙군의 패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것으로  보였다. 시내에 들어 서자 마자 여기 저기 널부러져 있는 대륙군의 시신과 엉망인 막사들을 목격 할 수 있었고 지나는 주민들의 표정도 &#8216;또 미국인들이 왔어?&#8217; 하는 테가 결코 우호적이 아니었다.<br />
“이럴수가, 박사님,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된것 같은데요.”<br />
군 막사에서 신음소리가 나는 데도 아무도 그곳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br />
“그러게 말 일세 아무튼 천연두라니 조심들 하게 “</p>
<p>일행은 시내에 들어서면서 부터 수건으로 입을 가려 묶고 있었다. 인근 부락에서 시내에 전영병이, 특히 군인들 막사에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br />
어렵사리 물어 물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숙소 샤토 드 라메제(Château Ramezay) 에 당도 했다. 몬트리올의 부유한 상인 가문인 라메제 집안의 저택으로 대륙군이  징발해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베네딕트 아놀드가 퀘벡 전투 패배 이후 후퇴해  이곳에서 몬트리올 대륙군의  사령관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br />
아놀드는 절뚝이는 다리로 현관 까지 나와 일행을 맞이했으나 그의 행색과 표정도 추레하기 이를 데 없었다.<br />
아놀드는  즉각 현지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했다. 보급은 끊겼고, 군인들은 천연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캐나다인들의 민심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고 했다.<br />
그러면서 캐럴 일행이 빈손으로 온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 하고 언짢아 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매우 신경질적인 상태였다. 현지 천주교 상황을 묻는 캐럴에게 대뜸 &#8221; 종교가 무슨 소용이냐, 당장 보급품과 약품이 필요한 판국에&#8230;&#8221;하며 몰아세웠다.  캐럴은 정치가로서의 무력감과 신앙인으로서의 모멸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아무튼 이 당시 까지만 해도 베네딕트 아놀드는 퀘벡을 공격하다 부상당한 &#8216;불굴의 영웅&#8217; 이었고 프랭클린과 캐럴은 그를 용감한 지휘관으로 신뢰했다.  그가 나중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p>
<p>정작 냉대와 절망감은 도착 다음날 부터 날부터 실제적으로 엄습해 왔다. 캐럴과 일행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동안 연통하던 교계 지도자 들이며 유지들을 만나보고자 했지만 전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나같이 외면 했고 문전 박대 였다.</p>
<p>기장 큰 걸림돌은  이 지역 천주교 수장 장 올리비에 브리앙(Jean-Olivier Briand) 주교였다.<br />
가톨릭계의 협력을 얻고 그들을 돌아서게 하려면 퀘벡의 그를 반드시 만나야 했지만 그의 코빼기도 볼수 없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캐럴 일행은 퀘벡에는 발도 들여 놓지 못했다. 퀘백과 몬트리올은 250KM 떨어진 꽤 먼 곳이기는 했다.</p>
<p>당시 몬트리올 까지 관장하는 퀘벡 천주 교구의 수장이었던 브리앙 주교는 확고한 친영파로 돌아서 있었다. 그는 영국 정부가 &#8216;퀘벡법&#8217;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인정한 것에 감읍하면서 미국 대륙군에 협력하는 신자는 성사를 거부(파문)하라는 엄명을 내렸단다.</p>
<p>몬트리올의 신부들은 브리앙 주교의 명령에 따라 미국 사절단을  &#8216;영혼을 사냥하러 온 이단자&#8217;로 취급했다.<br />
존 캐럴 신부는 도착 이튿날 새벽 부터 동료 사제들을 만나려 했으나, 몬트리올의 사제들은 그가 &#8216;반역자들과 함께 왔다&#8217;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br />
심지어 캐럴 일행이 미사를 드리러 몬트리올의 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곳 현지 신부들은 성당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도 않았다.<br />
문을 열고 나온 젊은 신부 한 사람이 몬트리올의 대리 교구장인 플로리몽 르페브르 드 벨푀유(Florimond Lefebvre de Bellefeuille) 신부가  존 캐럴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8220;반역자들과 동행한 사제에게는 제단을 내줄 수 없다&#8221;며 미사 집전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을 뿐 아니라 사제로 인정 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br />
“존 캐럴 선생,  당신이 이곳에서 로만칼라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불법입니다. 아시겠습니까?”<br />
아무리 잘 봐줘도 20대 초반을 넘지 않았을 젊은 신부는 존 캐롤에게 이런 모욕을 던져 줬다.</p>
<p>찰스 캐럴은  동생 신부가 젊은 사제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깊은 당혹감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잘못 돌아 가고 있는 것은 직감 했지만 이정도 일것 이라고는 상상도 않았기 때문이다.<br />
&#8216;가톨릭 형제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홀대하지는 않을 것&#8217;이라는 기대가 완전히 틀렸음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천주님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싶었다.</p>
<p>찰스 캐럴은 도착 이틀째 였던 이날 저녁 처참해진 군대의 현실을 목격하고 대륙회의에 비관적인 보고서를 써 보냈다. 전염병 퇴치가 급선무이며 전면 철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br />
그러면서 내쳐 함께 쓴 부친 (아나폴리스 캐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심경을 토로했다. 보고서에는 차마 쓸수 없었던 하소연이었다.<br />
&#8221; 아버지, 군대에는 돈이 한 푼도 없고, 신용은 바닥났으며, 주민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륙군은 종이돈을 강요해 민심을 잃었다.)<br />
&#8220;이곳의 사제들은 영국 국왕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며, 우리의 대의를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개신교 보다 못하다합니다. 신앙이 오히려 우리를 막는 장벽이 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br />
“ 그런데 아버지, 대륙군을 가장 처참하게 무너뜨린 것은 영국군의 총칼보다 무서운 천연두였습니다. 병사들의 절반 쯤이나 감염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 지혜를 주십시오. ”<br />
편지를 쓰던 중 잉크가 얼어붙을 만큼 추운 방 안에서, 그는 자신이 메릴랜드에서 가졌던 부와 명예가 이곳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부친의 지혜를 기다리리기로 했고 묵주를 돌렸다.</p>
<p>다음날 부터 캐럴은 가장 화급한 일인 천연두와의 싸움을 시작 했다.<br />
몬트리올 근처 대륙군 병영은 거대한 시체 안치소와 같았다. 너무도 딱했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br />
그런데 대륙군 병사 모두가 케럴 등 에게는  아들 같고 조카 같은 청년들 이었지만 유독 신경이 쓰이는 청년들이 있었다. 바로 불어를 사용하는 천주교 신자 캐나다 민병대 청년들 이었다.<br />
그때 대륙군에는 몬트리올 출신인 연대 규모의 캐나다인 민병대가 배속 돼 있었다.<br />
영국 국왕이 아무리 사탕발림으로 유혹했어도, 주교가 엄명을 내렸어도 영국군 치하에는 살 수 없다면서 총을 든 천주교 청년들이었다. (게속)</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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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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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11 Feb 2026 18:51:42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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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대륙회의  부호 마부 찰스 캐럴 4  –  안동일 작   &#8216;도허레건 매너&#8217; (Doughoregan Manor,  위 사진)는  영지라고 까지 불렸던 찰스 캐럴의 광활한 사유지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8216;가톨릭 성지였다.  겉으로는 찰스 캐럴의 화려한 저택이지만, 그 안의 사설 경당(Private Chapel)은 박해 시대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처 였고 안식처 였다.    75년 4 월 16일  도허레건 매너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pan dir="LTR" lang="en-US">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span></h4>
<h4><span dir="LTR" lang="en-US"> – 대륙회의  부호 마부 찰스 캐럴</span><span dir="LTR" lang="en-US"> 4</span><span dir="LTR" lang="en-US">  –</span></h4>
<h5><span dir="LTR" lang="en-US"> 안동일 작</span></h5>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8216;도허레건 매너&#8217; (Doughoregan Manor,  위 사진)는  영지라고 까지 불렸던 찰스 캐럴의 광활한 사유지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8216;가톨릭 성지였다.  겉으로는 찰스 캐럴의 화려한 저택이지만, 그 안의 사설 경당(Private Chapel)은 박해 시대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처 였고 안식처 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75년 4 월 16일  도허레건 매너에서 열린 부활절  미사는 어느때 보다 화려하고 성대한  분위기 속에 열렸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미사를 집전하는 존 캐럴 신부는 몇달 전과는 달리 화려한 금색 장식이 달린  흰  제의를 입었고 남녀 신도들도 정장에 미사포를 쓰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사제 조차도 평 신사복에 로만 칼라만을 착용한 채 제대에 올라야 했고 신도들은 일요일 농장을 돌보는 차림으로 미사에 참여 해야 했었다. 워낙에도 천주교 탄압 국면에서는 주일날 조심스레 모여 미사를 올렸지만 더 위축 됐던 것은 1773년에  돌연 발령된 교황의 예수회 해산령 때문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그런데 이날은 찰스 캐럴의 각고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일신 됐기에  신도들은 여봐란 듯이 성대한 부활절 미사를 올리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Victimae paschali laudes immolent Christiani. (파스카의 희생을 찬미하라, 그리스도인들아.)</span></p>
<p><span dir="LTR" lang="ko-KR">Mortem tuam annuntiámus, Dómine, et tuam resurrectiónem confitémur, donec vénias.  </span><span dir="LTR" lang="ko-KR">(주님, 저희는 당신의 죽음을 알리고 당신의 부활을 고백하나이다,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span></p>
<p><span dir="LTR" lang="ko-KR">부활의 축문이 라틴어로 낭송 되었고, 벅찬 감격의 기도가 계속 올려 졌다.   </span><span dir="LTR" lang="ko-KR">부친 캐럴옹, 그리고 부인 메리 다날 여사와 함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찰스 캐럴은 절절한 기도 속에 식민지 천주교의 부활을 새삼 다짐했다. 이날 미사에는 성공회 신자인 혁명위원회 주역 윌리엄 파카 까지 초대돼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캐럴의 기도는 언제나 천주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간구의 기도가 아니라 무슨 일을 어떻게 하기로 했다는 아룀과 각오를 피력 하는 기도 였다. 물론 그 일이 자신의 뜻 보다는 천주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지게 해 달라는 겸손의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8230;</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사실 그동안 애써 태연한 척 상황을 달래고 있었지만 1973년 엄청난 일이 일어 났다. 그해 </span><span dir="LTR">7월 21일, 로마 교황청의  클레멘스 14세 교황이</span><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예수회에 대한 공식적인 해산 명령</span><span dir="LTR" lang="ko-KR">을 내렸던 것이다.  </span><span dir="LTR">교황 칙령인 &#8216;주님이요 구세주(Dominus ac Redemptor)&#8217;를 발표해 전 세계 예수회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시켰다.  </span><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당시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가톨릭 군주들은 예수회의 강력한 영향력과 독립적인 성격을 경계했다. 이들은 교황청에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교황은 저들의 압력에 굴복해 교회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해산을 결정하게 됐</span><span dir="LTR" lang="ko-KR">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 이 명령으로 인해 전 세계의 예수회 학교와 선교지가 폐쇄되었으며, 당시 </span><span dir="LTR" lang="ko-KR">예수회 수장(</span><span dir="LTR">총장</span><span dir="LTR" lang="ko-KR">)</span><span dir="LTR">이었던 로렌초 리치(Lorenzo Ricci)는 감옥에 갇혀</span><span dir="LTR" lang="ko-KR"> 얼마 뒤</span><span dir="LTR"> 옥사했다.</span><span dir="LTR" lang="ko-KR"> 그 무렵 캐럴턴에 돌아와 있던 찰스는 그 이전 6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했던 프랑스 왕실의 예수회 탄압의 피해 당사자의 하나 였기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망연 속에 전의가 불타 올랐다.   예수회가 해산 돼야 한다니.. 예수회가 불법 단체라니&#8230; 찰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예수회 사제로 유럽에 있던 4촌 존 캐럴이 허름한 평복을 입고 초췌하게 볼미모어 항에 내리던 모습을  찰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예수회를 근간으로 설립됐던 식민지 천주교 로서도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당초 미국 천주교야 말로 예수회가 세운 교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span><span dir="LTR" lang="ko-KR"> 예수회는  영국에서 성공회가 왕권에 의해 국교로 전환 됐을 때 다른 천주교 교파와는 달리 왕권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버틴 유일한 교파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메릴랜드 식민지의 창시자인 제1대 볼티모어 경, (조지 칼버트)도 예수회에서 셰례를 받은 이였고  칼버트 가문 전체가 영적인 지도와 교육을 위해 예수회와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내에서 계속 정통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은 정치적·경제적 탄압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예수회 소속 인사들만이 거의 유일하게 이를 감수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1634년, 메릴랜드에 정착민들을 실은 아크(Ark)호와 도브(Dove)호가 도착했을 때, 그 배에는 볼티모어 경의 동생인 레너드 칼버트뿐만 아니라 앤드루 화이트(Andrew White) 신부를 포함한 예수회 사제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메릴랜드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 포교뿐만 아니라 땅을 일구고 식민지 행정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 1634년 3월 25일,  화이트 신부가 집전한 성 클레멘스 섬 미사 미사는 영미권 가톨릭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일로 기록되어 있다.  </span><span dir="LTR" lang="ko-KR"> 당시 영국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메릴랜드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내세웠지만, 내부적으로 예수회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볼티모어 경(2대 세실 칼버트)과 예수회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는데  볼티모어 경은 식민지의 통치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고, 예수회는 교회의 자치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뒤 이같은 갈등 위에 개신교도들의 대거 유입으로 천주교는 메릴랜드에서 소수파가 되어 탄압을 받게 됐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 탄압 속에서도 메릴랜드 신자들은 사설 경당에서 미사를 올리며 단합하고 더욱 깊이 신앙했다. 그 중심에 캐럴가가 있었다. 캐럴가는 도허레건 매너 말고도 보위 타운에 미국 예수회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하는  &#8216;화이트 마쉬(White Marsh)&#8217;를 운영 했고 찰스 카운티에는 &#8216;세인트 토마스 마노(St. Thomas Manor)&#8217; 장원을 운영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토마스 마노는 1641년에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적 예수회 거주지 (예수회 특성상 수도원은 아니었다) 중 하나다.  1741년에 지어진 벽돌 저택이 1780-90년대에도 건재했다.   1794년 존 캐럴이 이곳에서 미국 최초의 주교 예복을 입고 서품식을 가졌을 정도로 상징성이 큰 곳이다.  강가에 위치해 있어 배를 타고 드나들기 좋았고, 외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8216;천연의 요새&#8217;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보위 카운티의 화이트 마쉬는 1783년  이곳에서 역사적인 &#8216;화이트 마쉬 회의(General Chapters)&#8217;가 열린 곳이다.  존 캐럴과 전직 예수회 신부들이 모여 미국 가톨릭의 자치권을 논의하고, 조지타운 대학 설립을 결정한 역사적 장소다.  이곳은  캐럴가가 예수회에 기증한 땅이다. 웅장한 수도원 건물 대신, 투박한 벽돌집과 농장 건물이 늘어선 이곳에서 사제들과 신자들이  흙을 묻히며 노동하고 밤에는 라틴어로 토론하는  곳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그무렵 </span><span dir="LTR" lang="ko-KR"> 상황은 본국 영국도 마찬가지 였다.  </span><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당시 영국은 성공회 국교화 이후  형벌법(Penal Laws)을 통해 천주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다. 천주교도는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교육을 받거나 사제가 되는 것조차 불법이었</span><span dir="LTR" lang="ko-KR">다</span><span dir="LTR">.</span><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이 때문에 영국과  천주교 엘리트들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유럽 대륙(벨기에, 프랑스 등)의 예수회 학교로 비밀리에 유학을 보냈다.</span><span dir="LTR" lang="ko-KR">  </span></p>
<p><span dir="LTR" lang="ko-KR">처음에는 프랑스가 첫 손에 꼽혔지난 왕실과의 불화 때문에  </span><span dir="LTR">벨기에</span><span dir="LTR" lang="ko-KR">의 </span><span dir="LTR">생토메르 대학 (College of St. Omer)</span><span dir="LTR" lang="ko-KR"> 과  </span><span dir="LTR">리에주 (Liège)</span><span dir="LTR" lang="ko-KR"> 신학교가  <span dir="LTR">영국 천주교도들의 지적·영적 중심지로 꼽혔다. 이 학교들은 </span> </span><span dir="LTR">영국 예수회가  세운 학교로 </span><span dir="LTR">  </span><span dir="LTR" lang="ko-KR">존 캐럴(찰스 캐럴의 사촌,  훗날 미국 최초의 주교)과  </span><span dir="LTR">로버트 몰리뉴</span><span dir="LTR">가 수학했고 사제 서품을 받은 곳</span><span dir="LTR" lang="ko-KR">이</span><span dir="LTR">다.  몰리뉴 신부</span><span dir="LTR" lang="ko-KR">와 존 캐럴 등은 이곳에서 </span><span dir="LTR">  서품된 후 메릴랜드 등 북미 식민지로 파견됐다. 당시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는 영국 예수회의 관할 구역이었</span><span dir="LTR" lang="ko-KR">다. </span><span dir="LTR">찰스 캐럴 역시 한때 이학교에 적을 두었기 때문에 몰리뉴, 존 등과의 유대감은 더욱 특별했</span><span dir="LTR" lang="ko-KR">다.  </span><span dir="LTR" lang="ko-KR"> 이처럼  </span><span dir="LTR">영국 본토 내에서 예수회 활동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8216;영국 관구(English Province)&#8217;는 구주대륙에 거점을 두고 계속 어렵사리  운영되고 있</span><span dir="LTR" lang="ko-KR">었</span><span dir="LTR">다.</span><span dir="LTR" lang="ko-KR">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이렇게 어렵사리 지켜온 찰스 캐럴과 식민지  신자들의  예수회에 대해 </span><span dir="LTR"> 교황</span><span dir="LTR" lang="ko-KR">이 </span><span dir="LTR">해산령을 내렸</span><span dir="LTR" lang="ko-KR">던 것이다. 해산령(Dominus ac Redemptor)은 당시 식민지 뿐 아니라 전 세계 예수회원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 없었지만 </span><span dir="LTR"> </span><span dir="LTR" lang="ko-KR"> 결과적으로 찰스 캐럴이 예수회 해산이라는 거대한 풍랑을 헤쳐 나간 방식은 정말 영리하면서도 굳건했다.   메릴랜드에서 찰스 캐럴과 그의 사촌인 존 캐럴 신부가 보여준 행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미국 가톨릭의 기틀을 새로 짜는 신의 한 수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예수회 해산령이 내려지자, 메릴랜드의 예수회 신부들은 명목상 &#8216;교구 신부&#8217;로 신분을 전환했다. 이때 찰스 캐럴은 법학자이자 대지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예수회의 방대한 토지와 자산이 영국 정부나 타 교단에 몰수되지 않도록 법적인 보호막을 쳤다. 겉으로는 사적 소유인 것처럼 보여지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가톨릭 공동체와 교육 사업을 위한 자금줄을 유지한 것. 캐럴의 할아버지인 개척자 찰스가 등기소장을 역임하면서 정립한 메릴랜드의 선진적 재산 등기법은 이때 큰 도움이 되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그러면서 찰스 캐럴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영국법과 식민지 법 아래서 예수회가 살아남을 길은 오직 &#8216;종교의 자유&#8217;가 보장되는 독립국가 건설뿐임을 이내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독립 전쟁에 쏟아붇다 시피 하겠다며 독립 운동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대륙회의에서 종교 자유화 선언이라는 큰 소득을 올리고 돌아온 찰스 캐럴에게  이 행보를 더욱 매진 하도록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 총독 로버트 이든의 엉뚱한 획책 때문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이빨 빠진 호랑이 메릴랜드 이든 총독</span><span dir="LTR" lang="ko-KR">은</span><span dir="LTR"> 어디서 들었는지 </span><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예수회 재산은 해당 정부에 귀속 되는 것이라며 그 방대한 메릴랜드 내 천주교 재산을 강탈 하려 </span><span dir="LTR" lang="ko-KR">했던 것이다.  물론 혼자 독식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주 정부에 귀속 시킨다는 명분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대륙회의서 돌아온 74년 10월 말 부터 찰스는 이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급히 찾아온 혁명위 인사가 찰스에게 귀뜸 해준 일인데 이든의 충동질에 컨밴션 의원 다수가 주정부의 재산이 크게 늘어나는 고무적인 일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span></p>
<p><span dir="LTR" lang="ko-KR">캐럴은 격분해서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언제 부터 자신들이 로마 교황을 인정하고 그의 명령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를일 아닌가.  </span><span dir="LTR" lang="ko-KR"> 당시 이든은 손발이 묶인 상태였지만 찰스 캐럴의 천주교 재산을 강탈해 자신의 입지를 마련 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메릴랜드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영국 본토 출신 로버트 이든은 사실 인망도 꽤 있었고 수완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메릴랜드 혁명위는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기보다 &#8216;그가 통치할 수 없는 환경&#8217;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span><span dir="LTR" lang="ko-KR"> 1774년 6월 실질적 권력 이동이 일어나 제1차 대륙회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메릴랜드 결의회, 민중의회(Maryland Convention) 가 소집됐다.   메릴랜드 주민들은 총독의 명령 대신 이 결의회의 결정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한 바 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총독은 여전히 아나폴리스의 총독 관저에 살고 있었지만, 실제 행정·군사 명령은 찰스 캐럴이 속한 안전위원회(Council of Safety)에서 나왔다. 총독은 그림자 처럼 관저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span><span dir="LTR" lang="ko-KR">이런 상황에 이든이 예수회의 재산은 몰수 돼야 한다고 혁명위를 들 쑤시고 나섰던 것이다.  다음날  찰스는 이든을 찾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500px-Writing_the_Declaration_of_Independence_1776_cph.3g09904.jpg" alt="" width="500" height="667" /></span></p>
<p><span dir="LTR" lang="ko-KR">“ 어서오시오 메릴랜드 예수회 캡틴 나리. 이번에 필라에서는 활약이 대단 했다지만 예수회 일 때문에 심려가 크시겠소?”</span></p>
<p><span dir="LTR" lang="ko-KR"> 이든은 처음부터 비아냥 조로 나왔다.   </span><span dir="LTR" lang="ko-KR">그는  듣던대로 소식이 늦어 최근에야 알게 됐는데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예수회 재산이 모두 국고에 귀속 됐다며 이곳도 그래야 한다고 나섰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이든경, 당신의 뜻이 관철 될 것이라고 생각 하시오? 언제 부터 메릴랜드 행정부가 교황을 뜻을 헤아렸는지 모르겠소.”</span></p>
<p><span dir="LTR" lang="ko-KR">“모든 것은 의회에서 결정 될 것이오. 기다려 보시오.”</span></p>
<p><span dir="LTR" lang="ko-KR"> &#8220;</span><span dir="LTR" lang="ko-KR">의회라면 컨벤션을 말하는 것이오?</span></p>
<p><span dir="LTR" lang="ko-KR">&#8220;그렇소.&#8221; </span></p>
<p><span dir="LTR" lang="ko-KR">&#8220;언제부터 총독께서 컨벤션을 인정하고 그 결정을 따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려.&#8221;</span></p>
<p><span dir="LTR" lang="ko-KR">&#8220;나는 민중의 공복이오, 민중의 뜻을 따르는게 공복의 도리요.&#8221;</span></p>
<p><span dir="LTR" lang="ko-KR">말이 더는 안 통했다. 나름 몇가지 안배를 해 놓기는 했지만 의회에서 결정을 내린다면 이를 되돌리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등기소의 일이 그 안배 였는데 할아버지 정착자 찰스가 만든 등기소 법 보다는 의회의 결정이 웃길이었기 때문이다.  </span><span dir="LTR" lang="ko-KR">그래서 찰스는 의회, 컨벤션에 정식 의원으로 합류하기로 결정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컨벤션을 이끌고 있던 윌리엄 파카가 진작 부터 권해 왔던 일이다. 찰스는 그때 까지 세이프티 위원회에만 이름을 걸어 두고 있었다. </span><span dir="LTR" lang="ko-KR">캐럴은 1774년 12월 초에  민중 의회인 메릴랜드 결의회(Maryland Convention) 에 정식 합류한다.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메릴랜드의 실질적인 자치 정부 역할을 하던 결의회의 위원으로 위촉 선출 된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 컨벤션 뿐 아니라  안전 위원회(Council of Safety) 의 중추였던  윌리엄 파카(William Paca)가  적극 나서 줬다. 그는 천주교도가 아니었지만 종교적 관용에 투철했던 인물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ko-KR">역사적으로 매릴랜드 내에서 캐럴의 &#8216;가장 완벽한 파트너&#8217;로 꼽히는 이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1740년 생으로 캐럴 보다 몇살 어린  윌리엄 파카는 메릴랜드 출신의  법률가로, 찰스 캐럴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4인의 메릴랜드 대표 중 한 명이다.  </span><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그는 성공회(Anglican) 배경을 가졌지만, 당시 영국 국교회의 특권에 반대하고 일찍 부터 모든 시민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1770년대 초, &#8216;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8217;이 정부의 부당한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글을 썼을 때,  파카는 지근에서 법적·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찍 부터 함께 애나폴리스의 권력층에 맞서 싸운 말하자면 &#8216;혁명 동지&#8217;였다.</span></p>
<p><span dir="LTR" lang="ko-KR"> 총독이 컨벤션을 추동해  &#8216;교황령&#8217;을 빌미로 재산을 몰수하려 할 때, 파카는 영국 관습법(Common Law)을 들이대며 &#8220;교황의 명령은 메릴랜드 법정에 효력이 없으며, 재산권은 오직 메릴랜드 시민의 권리로서 보호받아야 한다&#8221;고 논리적 방어막을 쳐 커벤션 내의 분위기를 일순 바꿨다.  예수회 재산을 탐낸  컨벤션 일부 세력이  이든 총독과의 야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파카는 &#8220;이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재산 침해이며, 이런 선례를 남기면 우리 모두의 재산이 위험해진다&#8221;는 논리로 위원들을 설득했다.  </span><span dir="LTR" lang="ko-KR"> 윌리엄 파카는 이든 총독과 대립하면서도, 무질서한 폭동보다는 &#8216;법치에 근거한 혁명&#8217;을 원했다. </span><span dir="LTR" lang="ko-KR"> </span></p>
<p><span dir="LTR" lang="ko-KR"> 부유한 가톨릭 귀족인 캐럴과,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법률가인 파카. 두 사람은  애나폴리스의 시티 터반(그곳애도 같은 이름의 선술집이 있었다.) 과 도히건 매너에서  그해 봄 부터  거의 매일 같이  마데이라 와인을 마시며 이든 총독의 음모를 분쇄할 계책을 꾸몄고 메릴랜드 헌법을 구상했고 민병대를 굳세게 재건할 방책을 논의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1년 뒤의 일 이지만  캐럴을 도발했던 이든 총독은  명목상 </span>자진 퇴임을 내세운 추방을 당하게 된다.  1776년 4월  영국 정부가 이든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혁명군에게 압수 되는데  이 편지에는 &#8220;영국군이 오면 도울 준비를 하라&#8221;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에 이든이 충성을 맹세한 답을 보냈다고 밝혀 지면서 &#8216;반역&#8217;의 증거가 됐다.    찰스 캐럴과 윌리엄 파커등  혁명 지도부는 이든에게 &#8220;신변을 보장해 줄 테니 지금 떠나라&#8221;고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든은 결국 그해 6월 21일  영국 군함 &#8216;포이(Fowey)&#8217;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간다. 메릴랜드에서 총독 정치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한 순간이었다.</p>
<p><span dir="LTR" lang="ko-KR"> </span><span dir="LTR" lang="ko-KR"> 파카는 사무엘 아담스의 &#8216;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8217; 활동에도 관여했기에, 찰스와 더 긴밀해 질수 있었다.   파카 외에 찰스의 편에 서서 시티 터반과 도허건 매너에 자주 초대 받았던  유력한  다른 인물로는 사무엘 체이스(Samuel Chase)가 있었다.  &#8216;불타는 태양&#8217;이라는 별명을 가진 다혈질 정치인이다.  파카가 세련된 법률가라면, 체이스는 컨벤션에서 고함을 지르며 반대파를 제압하는 &#8216;행동파&#8217; 동지 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또 훗날 메릴랜드의 첫 주지사가 되는 토마스 존슨(Thomas Johnson)이 있는데 그는 매우 신중하고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캐럴의 재산 문제를 &#8216;공공의 이익&#8217; 관점에서 중재해 주는 역할을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찰스 캐럴은 1775년 3월 메릴랜드 안전위원회(Committee of Safety)내에서 치안및 군수위원회의  주역으로 나서  아나폴리스 지역의 치안과 군수품 조달을 담당하며, 종교적 차별을 넘어 실질적인 성과를 크게 올리는 행정력을 발휘해 성가를 높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75년 부활절은 4월 16일 이었고, 이날 찰스 캐럴과 메릴랜드 천주교도 들은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오랜 겨울잠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듯 부활절 미사를 여봐란듯 올렸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그런데 부활 미사 바로 며칠 뒤 (4월 19일) 마침내   렉싱턴-콩코드 전투 가 벌어졌고 이내 이 소식이 메릴랜드에도  전해졌다.  캐럴은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무력 저항과 민병대 조직 대폭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해 의원들의 전폭적인 찬동을 이끌어 냈다.   캐럴은 &#8216;가톨릭  민병대&#8217;를 따로 조직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일반 민병대에  입대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그는  주변의  가톨릭 교도들에게  애국자(Patriots)로서 피를 흘려야만 전쟁 후 종교적 자유를 요구할 명분이 생긴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 했다. 그러면서  캐럴은 군수품 조달과 민병대 무장을 위해 거액의 사재를 기부했다. 거의 이든과 일부 컨벤션 모리배 들이 노렸던 그 수준 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ko-KR"> 캐럴은 &#8220;우리는 종교를 넘어선 자유를 위해 싸운다&#8221;는 논리로 가톨릭에 배타적이었던 개신교 지주들을 설득했다.  특정 부대 이름이 가톨릭은 아니었으나, 캐럴의 영지(Carrollton Manor)에서 일하던 가톨릭 청장년들과 이웃들이 대거 입대하며 특히 민병대 1연대는 사실상의 &#8216;캐럴 부대&#8217; 역할을 했다. (계속)</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694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2/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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