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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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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미주 뉴욕 뉴스 &#38; 커뮤니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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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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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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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Sat, 30 May 2026 15:29:5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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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6&#62; 안동일 작  혁명의 광풍 속에서 &#8216;망명자(Émigré)&#8217; 명단에 올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던 보마르세가 1796년 3월, 삐걱거리는 마차를 타고 고향 파리로 돌아왔을 때의 그 쓸쓸하고도 처량한 순간은 그의 생애를 다루면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6&gt;</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혁명의 광풍 속에서 &#8216;망명자(Émigré)&#8217; 명단에 올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던 보마르세가 1796년 3월, 삐걱거리는 마차를 타고 고향 파리로 돌아왔을 때의 그 쓸쓸하고도 처량한 순간은 그의 생애를 다루면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는 기지를 발휘 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br />
파리로 돌아온, 그는 친척집에서 눈치밥 먹으며 기거 하고 있던 부인 탕레드(Thérèse)와 금쪽같은 딸 외제니(Eugénie)를 먼저 찾아 눈물의 해후를 한 후 그들을 태우고 혁명위원회로 갔다.</p>
<p>다른 사람 같으면 지레 겁을 먹고 움추렸을 법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갈데가 없으니 옛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통보 했고 혁명위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져 딱한 듯 그러라고 했다. 기실 보마르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혁명위 초급 간부로 일하고 있는 청년 안드레 들라뤼가 진작부터 그의 편에서서 많은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br />
그가 말한 옛 집은 그가 혁명 직전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지었던 바스티일 광장 맞난 편, 생탕투안 대로(Boulevard Saint-Antoine)에 있던 그의 전설적인 대저택, &#8216;비야 보마르세(Villa Beaumarchais)&#8217;였다.</p>
<p>그의 이 저택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기괴한 명물이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정원사들을 고용해 만든 웅장한 신고전주의 풍 저택이었고, 정원에는 인공 폭포, 비밀 동굴, 중국식 정자까지 갖추어 파리 귀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곳이다.<br />
하지만 1796년, 백발이 성성하고 가는 귀까지 먹은 64세의 보마르세가 아내와 19세 방년 딸의 손을 잡고 돌아왔을 때, 그 저택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궁궐이 아니었다.</p>
<p>그가 망명한 사이 혁명 정부는 이 저택을 국가 자산으로 압류했고, 성난 군중들이 들어와 가구와 벽을 부수고 값나가는 모든 것을 약탈해 간 상태였다. 저택의 그 아름답던 창문들은 다 깨져서 쓸쓸한 바람만 통과하고 있었고, 거울과 벽지마저 뜯겨 나가 내부가 뼈대처럼 앙상했다.<br />
세 가족은  창문도 제대로 없고 가구도 다 부서진 차가운 저택의 구석 방을 치우고 들어 가 다시금 서로를 껴안고 살아 돌아왔음에 눈물을 흘렸다. 비야 보마르세의 헛간으로 쓰이던 오두막 이었다.</p>
<p>보마르세가 미국 대륙의회에 &#8220;제발 내 무기 값을 돌려달라&#8221;고 마지막 피맺힌 탄원서를 보낸 곳이 바로 이  헛간 오두막 이었다. 비가새는 오두막 이었지만 부인과 딸이 큰 힘 이었다.  보마르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는데, 마지막 아내인 마리 테레즈(Marie-Thérèse)는 그가 망명지에서 고생하는 동안 파리에 홀로 남겨져 혁명 재판소에 체포당하고 사형 직전까지 가는 감옥 고초를 겪었다. 딸 외제니 역시 아버지가 남긴 부채 때문에 빚더미 속에 사기꾼, 빈혁명분자의 딸 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가족 세 사람의 우애는 남 달랐다.</p>
<p>보마르세는 귀가 먹어 대화가 힘들었지만, 이튿날 아침 딸 외제니의 손을 잡고 폐허가 된 정원을 거닐며 &#8220;내 전 재산과 명예는 다 날아갔지만, 너희들만 곁에 있다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8221;며 특유의 낙천성으로 딸과 부인을  위로했다.<br />
보마르세는 부서진 저택을 눈물겹게 조금씩 수리해 갔으며 한편으로 딸 외제니를 번듯하게 결혼시키기 위해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 냈다.<br />
다행히 외제니의 결혼은 성사 시켰지만 결국 그는  명예회복과 배상을  이루지 못한 채, 3년 뒤인 1799년 5월 18일, 이  오두막 낡은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p>
<p>그런데 이 전설적인 저택과 정원은 1818년, 파리 시가 생마르텡 운하(Canal Saint-Martin)를 확장하고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철거됐다. 지금은 그 자리에 보마르세 대로(Boulevard Beaumarchais)가 시원하게 뚫려 있고, 인근 마레 지구에 그의 이름을 딴 호텔이나 동상만이 옛 주인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br />
화려한 궁정 음악가 얐으며 최고의 극작가이자 대담한 무기 밀수업자였던 보마르세가, 인생의 황혼기에 부서진 저택에서 아내와 딸을 껴안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장면은 애잔하기 이를데 없다.</p>
<p>그래도 그 시기 보마르세가 매운 잘한 일이 있었다. 바로 외제니를 건실한 청년 앙드레 들라뤼와 결혼 시킨일이다.<br />
무남독녀 외제니와 사위 앙드레 투생 들라뤼(André Toussaint Delarue, 1768~1863)의 결혼은 보마르셰가 말년에 행한 가장 평온하고도 훌륭한 선택 중 하나였다.<br />
앙드레 투생 들라뤼는 보마르셰보다 36살 연하였고, 외제니보다는 9살 연상이었다. 그는 혁명 정부에서 금융 관계 행정 관료(정부 금고의 행정관 등)로 일하던 전도유망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도 루이 르 그란 출신이었다.<br />
당시 혁명 정부의 &#8216;망명자 명단(Émigré list)&#8217;에 올라 재산을 압류당하고 전전긍긍하던 보마르셰 가문에게, 정부 내부 사정에 밝고 청렴한 행정가였던 들라뤼는 가문을 구원해 줄 가장 이상적인 신랑감이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 후 보마르셰의 복잡한 재정 문제와 사후 유산 분쟁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p>
<p>이 결혼을 둘러싼 에피소드에도  역시 보마르세의 글이 갑의 자리에 있다. 바로 함부르크 망명지에서 보낸 &#8216;눈물의 편지&#8217;다.<br />
1794 년 무렵, 보마르셰는 독일 함부르크 에서 비참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남겨진 아내와 딸 외제니는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풀려나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였다.<br />
이때 외제니를 지켜보며 호의를 베풀었던 청년이 바로 들라뤼였다. 보마르세 희곡의 팬 이었기에 보마르세를 흠모 하던 들라뤼는 계속해서 외제니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고, 외제니도 고맙게 받아 들이며 두 청춘 남녀는 사랑에 빠진다. 이 사정을 알게 된 보마르셰는 함부르크의 차가운 다락방에서 파리의 들라뤼에게 편지를 보냈다.<br />
&#8220;내게 남은 유일한 보물인 딸을 자네에게 맡기네. 지금은 비록 내가 알거지 신세라 딸에게 지참금 한 푼 줄 수 없지만, 자네가 내 딸의 손을 잡아준다면 훗날 내 명예와 권리를 되찾아 반드시 보답하겠네.&#8221;</p>
<p>들라뤼는 보마르셰 가문의 몰락이나 위험에 개의치 않고, 외제니에 대한 사랑과 보마르셰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 청혼을 받아들였다.<br />
1796년 초, 보마르셰가 망명자 명단에서 조건부로 제외되어 파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저간에는 사위가 될 들라뤼의 막후 노력도 큰 작용을 했다. 들라뤼는 정부 내 자신의 인맥과 행정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장인의 귀국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br />
보마르셰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추진 했고 1796년 6월 5일 마침내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당시 보마르셰는 경제사정도 그렇고 여전히 감시를 받던 처지였기에, 결혼식은 가족과 측근들만 모인 가운데 조용하지만 매우 감격스럽게 치러졌다.</p>
<p>보마르셰는 결혼식 당시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 사위에게 제대로 된 지참금을 주지 못했다. 대신 그는 들라뤼에게 &#8216;미국 정부의 거액 채권(로데리크 오르탈레즈 회사의 대금)&#8217; 서류를 넘겨주었다.<br />
당시로서는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한 유령 채권에 가까웠지만, 행정가였던 사위 들라뤼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한대로 보마르셰가 사망한 이후에도 들라뤼와 외제니 부부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법정 투쟁과 외교적 교섭, 청원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보마르셰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1835년, 미국 의회로부터 80만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장인이 준 &#8216;종이조각&#8217; 같던 지참금을 사위가 마침내 황금으로 바꿔낸 셈이다.</p>
<p>보마르셰는 사위를 얻고 난 후인 1797년,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br />
&#8220;자네는 내 딸에게는 최고의 남편이고, 나에게는 가장 충실한 아들이라네. 내 말년에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네일세.&#8221;<br />
실제로 들라뤼는 장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으며, 사후에는 보마르셰의 방대한 저작권과 가문의 명예를 완벽하게 지켜냈다. 들라뤼는 1863년, 95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8216;보마르셰의 사위&#8217;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전호에 언급 한 대로 그들의 후손은 오늘날까지 보마르셰의 혈통을 자랑스레 이어오고 있다.<br />
말년의 보마르셰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파리에서 이 정직하고 유능한 청년을 사위로 맞이한 것은, 그의 희곡 대본 속 피가로의 기지 못지않은 최고의 신의 한 수였던 것 이다.</p>
<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57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licensed-image-1.jpg" alt="" width="2032" height="2048" /></p>
<p>지금 부터 189년 전인 1835년 3월 2일, 워싱턴 캐피털 힐 (지금의 노스 윙) 미 연방 의사당서는 행정부와 의회가 반세기 동안 부려온 억지와 &#8216;국가적 수치&#8217;를 입법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결짓는 법안 통과를 위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br />
법안 제안자 중 한사람인 에드워드 에버릿(Edward Everett, 1794~1865)의원이 단상에 올랐다.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인 그는 당대 미국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이었다. 훗날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기 바로 직전, 단상에서 2시간 동안 장엄한 서두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p>
<p>&#8220;의원 여러분! 우리가 50년 전 맨발로 눈 위를 걸으며 영국군과 싸울 때, 우리 가슴에 따뜻한 군복을 입히고 손에 화약을 쥐여준 이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파리의 시계공이자 극작가였던 보마르세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3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재무부는 &#8216;프랑스 왕이 준 선물&#8217;이라는 주불 공사 아서 리의 낡은 보고서 한 장을 방패 삼아 채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화국의 수치이자, 벤자민 프랭클린 박사가 다져놓은 대서양 외교의 신의를 우리 스스로 깨부수는 짓입니다!&#8221;<br />
그때 반대파 의원 한사람 소리쳤다.<br />
&#8220;하지만 그가 국왕에게 받은 100만 리브르(프랑의 옛 단위)의 영수증이 버젓이 존재하지 않소! 그 돈은 미국을 위해 쓰여져야 했던 돈 이었소!&#8221;<br />
에버릿 의원의 명징한 답변이 이어졌다.<br />
&#8220;그 100만 리브르는 보마르세가 제 목숨을 걸고 정보망을 가동하기 위해 프랑스 왕실로부터 받아낸 &#8216;작전 자금&#8217;이었음을 프랑스 외무부가 공식 보증했습니다. 게다가 그 돈은 바로 로마 교황청 의심의 눈을 피해 존 캐럴 신부를 미국의 초대 주교로 세울 수 있었던 막후의 자금으로 쓰여 졌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존경하는 의원 동지 여려분. 이제 이 지루하고 부끄러운 거부의 역사를 끝내야 합니다. 우리가 법안을 통과 시키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서명하는 순간, 미국은 비로소 구체제의 빚을 털어내고 도덕적 공화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대륙의 자유와 평등은 한낱 사기꾼들의 슬로건으로 전락할 것 입니다. &#8221;</p>
<p>에버릿의 웅변은 의원들의 양심을 거세게 흔들었고 압도적인 표차로 법안을 통과 시키게 했다.<br />
가톨릭 신자는 아니 었지만 존 캐럴 대주교(선종 당시)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독립의 아버지 찰스 캐럴 형제와 각별한 교분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미국 천주교의 발흥에 보마르세의 역할이 지대 했음을 굳이 거론 했다. 3년전 세상을 떠난 독립의 마지막 원로 찰스 캐럴의 유지를 상기 시키기 위해서 였다.<br />
이날 통과된 법안의 정확한 공식 법안명은 &lt;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세 유족 구제를 위한 법안&gt; (An Act for the relief of the heirs of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lt;미국 연방 법률(Statutes at Large) 아카이브, 제4권 793항 (4 Stat. 793) 제23대 하원 (23rd Congress) 세션&gt;이었다.<br />
미 의회가 특정 개인 ,그것도 외국인의 이름을 명확히 거명하면서 채택한 초유의 법안이다.<br />
에버릿 의원의 연설 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에는 정부와 의회 내에서 유족들의 편에 서서 &#8220;미국이 신용을 지켜야 한다&#8221;고 외친 당대 미국의 쟁쟁한 양심 정객, 행정가, 독립 원로, 종교계 인사 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br />
기록을 보면, 당시 국무장관 에드워드 리빙스턴이 의회에 보낸 강력한 행정부 의견서가 &#8216;마지막 스트로&#8217; 처럼 큰 몫을 했다. 리빙스턴은 과거 진작 부터 보마르세의 주장을 옹호했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계열의 법률적 시각을 이어받고 있었다.<br />
&#8220;계약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큰 돈을 선물로 제공할 만큼 당시 프랑스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또 더욱이 당시의 미국 재무부가 프랑스 국왕의 100만 리브르를 공제(상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억지&#8221;라는 강력한 행정부 의견서를 의회에 제출했던 것이다.<br />
상대적 소수였지만 반대파 의원들은 계속 “선물이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8220;여전히 사라진 100만 리브르의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8221;며 돈을 줘서는 안된다고 버텼다. 그러나 찬성파 의원들은 &#8220;당시 프랑스 대사였던 벤자민 프랭클린 박사의 장부와 프랑스 베르젠 백작의 외교적 상호 확약이 있음에도 미국이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신생 공화국의 대외적 신용과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점&#8221;이라며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br />
토론 끝에 구제 법안은 하원과 상원을 차례로 통과했고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자 최초의 흙수저 군인 출신 정치가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며칠 뒤 이 법안에 최종 서명했다.</p>
<p>당시 수십 년간의 소송 비용으로 고초를 겪던 보마르세의 사위 들라뤼와 외손자들이 이 &#8216;눈물의 삭감안&#8217;을 수용했고 실무 정산을 거쳐 1837년 최종 지급이 완료됐다.<br />
이 법안이 기념비 적이라는 것은 미국 의회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한 최초의 법안 이라는 점이었다. 19세기 미국 연방의회에는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결의안이 &#8216;단 한 건&#8217;도 없었다.<br />
당시 미국의 국가적 분위기와 법적 구조가 &#8216;사죄&#8217;라는 개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
<p>19세기 미국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8216;명백한 운명&#8217;이라는 기독교적 예정론에 입각한 선민론이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북미 대륙을 개척하고 영토를 넓히는 것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임무라는 믿음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전쟁(미-멕시코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은 &#8216;과오&#8217;가 아니라 &#8216;문명의 진보&#8217;이자 &#8216;신의 뜻&#8217;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 한것이야 말로 &#8216;언덕 위의 하얀집&#8217;을 지으라는 신의 뜻이 었다고 믿었다.<br />
이처럼 스스로 정의롭다고 굳게 믿는 오만한 성장기 국가였기에, 과거사를 &#8216;반성&#8217;한다는 개념 자체가 의회 내부에서 싹틀 수 없는 토양 이었다.<br />
흑인 노예제와 관련해서도 19세기에 &#8216;사죄&#8217;는 없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수정헌법 제13조)될 때도, 의회의 기류는 &#8220;과거의 잘못을 사죄한다&#8221;가 아니라, &#8220;전쟁의 결과로 제도를 폐지한다&#8221;였다. 전쟁 전후로 링컨 대통령과 의회가 고려했던 것은 &#8216;노예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8217;이 아니라, 오히려 &#8216;노예를 잃어버린 남부 백인 지주들에게 국가가 돈을 물려주는 보상(Compensated Emancipation)&#8217;이었다. 국가가 인간을 재산으로 인정했던 법적 모순 때문에 생긴 일이었는데, 19세기 미국 의회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재산권 침해를 더 고민했다.<br />
법적인 이유도 컸다. 영미법계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8220;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The King can do no wrong)&#8221;, 즉 주권면책(Sovereign Immunity) 특권이다. 국가(정부)는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법정에서 기소되거나 소송을 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p>
<p>19세기 미국 정부는 의회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8220;우리가 과거에 잘못했다&#8221;고 선언(사죄)하는 순간, 그것이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수많은 소송과 천문학적인 재정적 배상 책임으로 이어질까 봐 극도로 몸을 사렸다.<br />
결국 미국의 과거사 결의안들이 20세기 후반(특히 1980년대이후)에야 쏟아져 나온 것은, 미국이 양심적인 국가로 갑자기 변해서라기보다는 &#8216;흑인 민권 운동(1960년대)&#8217;을 거치며 인권의 기준이 통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br />
민권 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원주민, 흑인, 아시아계 등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표밭(정치적 영향력)이 되었고, 의원들도 그제야 표를 얻기 위해, 혹은 달라진 국제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결의안을 내놓기 시작한 것.<br />
19세기의 침묵은 &#8216;성장과 팽창&#8217;에 눈이 멀었던 제국주의 시절 미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좌다.<br />
1835, 3, 2, ‘4 Stat. 793’이라는 메마른 법률 번호 뒤에는 미국 독립의 물질적 기초를 닦아준 한 천재 극작가에 대한 신생 미국의 뒤늦은, 그러나 전무후무한 &#8216;법적 굴복&#8217;이 숨어 있었지만 이 법안도 유쾌하게, 속 시원하게 통과된 것이 아니었다.<br />
&#8220;줄 돈은 주되, 끝까지 미국이 잘못했다는 문구는 넣지 않겠다&#8221;는 미국의 자존심과 &#8220;이 지루한 외교적 분쟁을 끝내야 한다&#8221;는 실리주의가 맞선 끝에 나온 &#8216;정치적 타협&#8217;이 법 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br />
의회는 80만 프랑(당시 미국 달러로 약 14만 4천 달러~15만 달러 선)을 예산으로 배정하면서 법안에 아주 냉혹한 독소 조항을 삽입했다. 받거나 말거나 (&#8220;Take-it-or-leave-it&#8221; 받든가 말든가) 라는 조항이 서두에 있었다. 그러면서 &#8220;이 돈을 수령하는 즉시, 보마르세 유족은 미국 정부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추가 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고 이를 최종 정산으로 인정한다&#8221;는 조건이었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57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08005337.jpg" alt="" width="650" height="417" /></p>
<p>그럼에도 보마르세 배상 결의(Beaumarchais claim)는 독립 전쟁 이후 건국 초기 시기의 중대한 도덕적. ·재정적 매듭이었고 &#8216;언덕 위의 하얀집&#8217; 건설을 이심전심으로 목표했던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일이다. .<br />
언급한 대로 미 연방의회는 후일 원주민(인디언) 탄압, 흑인 노예제 및 차별, 그리고 전시(戰時) 인권 침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결의안들을 통과시켰다. 모두 20세기 후반의 일이다.<br />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국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한 대표적인 연방의회 결의안들을 간략 하게 나마 정리해 본다. 언덕위의 하얀집 모토와 관련이 많은 사안이기 때문이다.</p>
<p>먼저 원주민(인디언) 학살 및 강제 이주에 대한 사죄다. 미국 영토 확장기 동안 자행된 원주민 탄압은 미국의 가장 깊은 원죄 중 하나로 얘기된다. 하지만 2009년이 되서야 미국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죄 결의안 (Native American Apology Resolution)이 채택된다.<br />
연방정부와 의회가 과거 원주민 부족들에게 저지른 폭력, 학살, 강제 이주(눈물의 길 등), 그리고 문화적 말살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내용이다. 당시 국방법안(Defense Appropriations Act)의 부속 조항으로 슬그머니 끼워 넣어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다.<br />
더욱이 공식 사과를 하긴 했으나, 국가를 상대로 한 법적 배상 소송의 근거로 쓰이지 못하도록 &#8220;이 결의안이 법적 배상 요구의 근거가 될 수 없다&#8221;는 면책 조항을 넣는 비겁한 타협이 있어 논쟁이 됐었다.</p>
<p>다음이 흑인 노예제 및 인종차별(짐 크로우 법)에 대한 사죄다. 이 사죄 역시 세기를 넘겨 21세기인 2008년 하원, 2009년 상원의 결의안으로 채택 된다.<br />
미국 경제 성장의 어두운 기반이었던 노예제와 그 이후의 합법적 차별(짐 크로우 법)에 대한 의회의 반성인데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 노예화하고, 해방 이후에도 수십 년간 분리주의 법률(Jim Crow laws)로 흑인들을 2등 시민 취급하며 린치 등을 방관했던 과거를 공식 사죄했다. 미 의회 역사상 &#8216;노예제&#8217;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첫 결의안이었다. 상·하원이 각각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역사적 과오를 인정했다. 역시 배상은 없다는 것을 명문화 했다.</p>
<p>기실 노예 무역은 미국만의 잘못과 과오는 아니다.   가톨릭교회만 해도 과거 역사 속에서 자행된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대해 교황청 차원의 제도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특히 근자에 교황에 오른 레오 14세는 지난 5월 자신이 새로 반포한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통해 과거 교황청이 유럽 군주들의 요청에 응해 비기독교인을 노예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던 역사를 전면 인정하고 진심 어린 용서를 구했다.<br />
회칙은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와 주교들에게 전하는 최고 권위의 사목 교서로, 다른 교황 문헌인 교서·권고·담화·연설 등과 비교해 구속력이 가장 강하다.<br />
교황은 &#8220;노예제가 인간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음을 교회가 완전히 인식하는 데 수 세기가 걸렸다&#8221;고 지적하며 &#8220;기독교 기억 속의 상처&#8221;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8220;교회 이름으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8221;며 노예로 고통받은 이들의 고난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했다.<br />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3년 바티칸 공식 성명을 통해 식민지 시대 노예제와 토지 강탈을 정당화했던 교황 문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는 교황청 역사상 가장 명확한 문서적 거부 선언으로 평가되지만, 교황청 자체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br />
그러나 레오 14세는 교황청이 직접 노예화 승인 칙령을 내려 정당성을 부여했던 구조적 본질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교황청의 제도적 책임을 가장 명확히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교황은 레오 14세가 처음이다.</p>
<p>다시 미 의회의 과거사 반성 문제로 돌아오면 20세기 말에 이루진 1988년의 전시(戰時) 인권 침해 및 강제 수용에 대한 반성을 먼저 들게 되는데 이는 유일하게 배상이 이루어진 법안이다. 이 시민자유법 (Civil Liberties Act of 1988 ,일본계 시민 수용소 사죄)의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권자를 포함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몰아 강제 수용소에 격리한 것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면서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br />
단순한 &#8216;말뿐인 결의안&#8217;을 넘어 실질적인 국가 배상(Reparation)까지 이루어진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과거사 청산 사례다. 배상 받는 당사자인 일본의 힘이 작용 헸다는 얘기다. &#8216;언덕위의 하얀집&#8217;을 여러차례 강조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했다.</p>
<p>1993년에는 하와이 왕국 전복에 대한 사죄 결의안 (Apology Resolution)이 있었다. 1893년 미국인 설탕 밀농장주들과 미 해병대가 공모하여 하와이 왕국의 리리우오칼라니 여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하와이를 불법 병합한 사건에 대해, 100년이 지난 1993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과 의회가 공식 사죄한 결의안이다. 타국의 주권을 불법으로 침탈하고 전복했던 &#8216;제국주의적 침공&#8217; 행위를 미국 스스로 인정한 보기 드문 사례다.<br />
2011년 상원 그리고 2012년 하원은 중국인 배제법 사죄 결의안을 채택했다. 내용은 1882년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잔뜩 부려 먹은 뒤, 정작 이들의 이민과 시민권 취득을 원천 봉쇄했던 &#8216;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8217;에 대해 의회가 뒤늦게 공식 유감을 표명하고 사과한 결의안이다. 역시 배상은 없었다.</p>
<p>보마르세 배상 결의가 미국이 국가 형성기에 진 &#8216;도덕적·신용적 부채&#8217;를 갚은 사건이라면, 후대의 결의안들은 미국이 스스로 내세운 &#8220;자유와 인권&#8221;이라는 헌법 가치를 스스로 배신했던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 과오를 뒤늦게 수습해 나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수습이 됐고 여전히 &#8216;언덕위의 하얀집 모토는 이 미국땅에서 유효 할까?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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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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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22 May 2026 23:46:01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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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5&#62; 안동일 작  미국 독립전쟁이 독립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보마르세의 삶의 길은,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언덕길, 아찔한 산악도로로 변하게 된다. 기실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면서 부터다. 전 호에 보마르세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5&gt;</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미국 독립전쟁이 독립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보마르세의 삶의 길은,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언덕길, 아찔한 산악도로로 변하게 된다. 기실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면서 부터다. 전 호에 보마르세와 미국 정부와의 실랑이를 다루면서 미국 독립군을 지원 하려다 빚더미에 앉았고 파산 위기에 몰렸다고 했는데 이는 과장이다. 그의 평전을 썼던 작가들이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그렇게들 썼다.<br />
독립전쟁이 끝난 1783년 이후에도 보마르셰의 재력은 상당했다. 더욱이 이듬해인 84년 피가로의 결혼의 공전의 히트로 이 작품으로 번 인세와 판권 수입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 했다 할 정도로 대단 했다. 그는 그 무렵 사비를 털어 볼테르의 금서들을 인쇄·출판하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 역시 엄청난 자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br />
또 이듬해 건축한 바스티유의 그의 저택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 중 하나로 꼽혔으며, 정원을 꾸미고 가구와 예술품을 들여놓는 데만 수십만 리브르를 아낌없이 썼다.</p>
<p>미국에 떼인 돈 약 300만 리브르가 뼈아프긴 했지만, 당장 그를 파산하게 만들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약 미국 새 정부가 의리를 지켜 1780년대 중후반에 300만 리브르를 순순히 황금이나 현물로 상환했다면, 그 돈은 몇년 뒤 고스란히 프랑스 혁명 정부의 국고로 들어갔거나 군중에게 약탈당했을 확률이 거의 100%였다는 사실이다.</p>
<p>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의 일이다. 83년 미국 독립전쟁 승리 이후 그 6년 동안 보마르세는 흔들리는 프랑스 왕정과는 달리 나름  승승장구를 계속 했고 미국과 관련 특히 존 캐럴의 주교 임명과 관련해 큰 일을 해냈다.   혁명이 일어난 직후에는  파리의 자치 정부 역할을 했던 ‘파리 코뮌 대표단(Assemblé des représentants de la commune de Paris)’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사업가이자 온건파였던 그는 곧 과격해지는 혁명의 흐름 속에서 이내 저들의 타깃이 되고 만다.</p>
<p>혁명기 과격파(자코뱅 파)가 득세 하면서 저들은 보마르셰의 바스티유 저택을 보며 &#8220;백성의 피를 빨아먹은 자의 집&#8221;이라며 분노했다. 실제로 그가 망명길에 오르자마자 혁명 정부는 그의 모든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재산을 국유화했다. 미국이 준 돈이 계좌에 있었다면 그대로 혁명 자금으로 몰수되었을 것이다.</p>
<p>물론 보마르셰 입장에서 미국 정부가 야속했던 것은 사실일 게다. 말한대로  미국은  &#8220;우리가 보마르셰와 맺은 계약은 ‘상거래’가 아니라, 프랑스 왕실이 보마르셰를 앞세워 우회 지원한 ‘비공식 원조(선물)’였다&#8221;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지급을 미뤘다. 억지였다.</p>
<p>그런데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의 이같은 모르쇠는 새옹지마가 된다.  보마르셰를 비참한 망명객으로 만들고, 아내와 딸을 감옥에 가두고, 전 재산을 몰수한 진짜 ‘가해자’는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 정치였고 미국정부의 50년이 걸린 추후 배상은 보마르세 라는 이름이 창창히 존속 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던 것이다.</p>
<p>보마르셰는 미국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피가로와 볼테르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프랑스에 소개 했다가, 그 이념이 폭주한 혁명의 부메랑을 맞아 본국에서 파멸한 자가 부르주아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정황 분석일 듯 싶다.</p>
<p>따지고 보면 보마르세는 물심 양면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 일 수 있다. 물적으로는 프랑스 왕정의 재정을 파탄나게 했고 심적으로는 피가로 라는 인물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소개해 그들을 각성하게 했기 때문이다.</p>
<p>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면서 그야말로 ‘재정적 파산’에 가까운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그에 비해 손에 쥔 지정학적·경제적 실익은 허무할 정도로 미미했다.<br />
보마르세의 간언에 설복 당한 루이왕괴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샤를 그라비에(베르젠 백작)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참전은  ‘영국에 대한 복수와 견제’라는 정치적 명분에 치우쳐 있었다. 프랑스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실익이 아닌 &#8216;심리적 만족감&#8217; 영국의 독주를 막았다는 정신승리였다.</p>
<p>1783년 파리 조약 결과,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강 유역과 카리브해의 토바고 섬, 그리고 뉴펀들랜드 연안의 어업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는 투입한 전비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한 전리품이었다.</p>
<p>20년 전인 1763년에 끝난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북미 대륙(캐나다 등)의 영토를 통째로 빼앗기는 굴욕을 당해야 했던 프랑스는 적국 영국의 가장 소중한 식민지였던 미국을 분리해 냄으로써 영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륙의 세력 균형을 되찾았다는 점에  만족 해야했다.<br />
또  프랑스 수뇌부는 참전해  승리 한다면 막대한 경제적 보상을 기대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br />
프랑스는 미국이 독립하면 영국과의 무역을 끊고 프랑스의 최대 무역국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독립 직후 부터 미국인들은 익숙한 언어, 오랜 신용 관계, 그리고 우수한 품질을 가진 영국 상품과 다시 거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막대한 차관을 대주었지만, 정작 경제적 과실은 전쟁에서 진 영국이 따먹는 황당한 결과가 벌어졌다.</p>
<p>프랑스는 캐나다나 루이지애나 등 과거 잃어버렸던 북미의 핵심 영토를 단 한 평도 되찾지 못했다. 미국 역시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 다시 거대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벤자민 프랭클린을 중심으로 한 미국 외교단의  능숙하고 노회한 외교력에 감탄 하게 되는 대목이다.</p>
<p>프랑스가 미국을 돕기 위해 보낸 육·해군 군사력과 무기, 그리고 현금 차관을 모두 합치면 당시 가치로 약 13억 리브르에 달했다. 이 엄청난 재정 지출은  프랑스 왕정에 치명타였다.  전쟁 직후 프랑스 연간 세입의 절반 이상이 미국 독립전쟁으로 진 빚의 이자를 갚는 데만 쓰였다고 할 정도다.</p>
<p>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 귀족 (특권층)에게 세금을 걷으려 했으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왕실은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5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8216;삼부회&#8217; (평민 참여)를 소집하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이 폭발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p>
<p>루이 왕은  미국 독립을 돕기 위해 왕정의 전재산을 털어 넣었으나, 그 결과로 생긴 재정 파산과 미국에서 싸우며 &#8216;자유와 평등&#8217; 사상을 배워온 귀족·군인들(라파예트侯작 등)에 의해 결국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p>
<p>한마디로 프랑스는 영국의 뺨을 한 대 때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기 집 기둥뿌리를 뽑아버린 극단적인 &#8216;상처뿐인 영광&#8217;이었다.</p>
<p>미국 독립전쟁 당시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현대 역사학자들과 프랑스 군부의 방대한 군적부 조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집계되어 있다. 프랑스는 지상군(로샹보 백작의 육군)뿐만 아니라 대서양, 카리브, 아프리카 해안 등 전 세계 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대규모 해전을 벌였기 때문에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br />
프랑스는 미국 독립을 돕기 위해 북미 대륙에 보낸 군대 중 2,112명의 전사·병사자를 냈으며, 카리브해 등 전 세계 해전까지 모두 합산하면  최대 1만 5천 명에 달하는 귀중한 청년들의 목숨을 잃었다.</p>
<p>미국 독립전쟁 전체를 통틀어, 미국 독립군(대륙군) 중 &#8216;순수 전투 중 전사자&#8217;는 약 6,800~8,000명 수준이다.  순수 전투 사망자 수는 미국인보다 프랑스인이 더 많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분석.<br />
여기에 말한대로 10억 리브르가 넘는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까지 지출하면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은 파산 직전에 몰렸고, 이는 결국 몇 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게는 가혹한 대가의 악수였던 것이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42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5f317078.avif" alt="" width="863" height="575" /></p>
<p>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다. 보마르셰는 군중들이 바스티유를 철거하는 모습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지켜볼수 있었다. (맨위 삽화)   (위 사진은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 콜라쥬 전경)<br />
1789년 8월 그는 파리 코뮌(자치 위원회) 의원으로 지명된다. 피가로에 열광했던 군중들의 천거에 따른 일어었다.<br />
그러나 워낙 막대한 부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혁명 세력 내부에서 이내 &#8220;구체제의 결탁자 아니냐&#8221;, &#8220;무기를 숨겨둔 것 아니냐&#8221; &#8220;아직도 왕과 내통하고 있다&#8221;는 의심과 모함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실제로 참여 직후 인  9월 중순에  김찰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으나 예의 뛰어난 수사학적 웅변으로 무죄를 입증하고 복귀 했다.<br />
그후 3년간 분주하게 이리저리 다니며 개혁에 동참 하려 했으나 타고난 온건파 이자 사업가인 그와 혁명 수뇌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p>
<p>1792년 초  혁명 정부가 오스트리아 등 외국 세력의 침공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무기가 부족해졌다. 무기 중개상 경력이 있던 보마르셰는 명예 회복과 돈벌이를 위해 네덜란드에서 소총 6만 정을 구해오겠다며 혁명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대금 지불 문제가 게속 꼬이고 배달이 지연되자,  8월말 과격파들에 추동된 성난  군중이 &#8220;보마르셰가 루이왕과 내통해 적들에게 주려고 무기를 숨겨두었다&#8221; 며 그의 저택을 습격해 약탈하고 그를 라베이(L&#8217;Abbaye) 감옥에 수감했다.<br />
다행히 그의 빼어난 글 솜씨로 쓴 호소문이 발표 되고 묘한 친분 관계 였던   시민군 간부 여성 마뉴엘의 극적인 도움으로 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가 풀려 난 사흘 뒤, 감옥에 남아있던  죄수 수천 명이 불문곡직 학살당한 ‘9월 학살’이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천운이었다.</p>
<p>1793년, 무기 조달 임무를 완수하겠다면 어렵사리 다시 유럽 대륙으로 나갔으나, 프랑스 내부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서 그는 졸지에 &#8216;망명 귀족(반혁명 도망자)&#8217; 명단에 오르게 된다. 루이 16세 국왕이 파리 혁명광장(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1793년 1월 21일의 일이다.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전역을 뒤 흔든다.  그는 몇년 동안  영국(스코트랜드)과 독일 (함부르크) 등을 전전하며 비참하고 가난한 망명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의 대 저택과 전 재산은 혁명 정부에 압류되었고, 그의 아내와 딸 또한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br />
그는 1796년  공포 정치가 끝나고 5인 총재 정부가 들어서자 겨우  파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재산은 날아가고 청각까지 거의 상실한 비참한 상태였다. 그때 그가 매달렸던 일이 미국 정부에 대한 소송과 청원 이었다.<br />
1799년 5월  그는 소송을 완결 짓지 못하고, 파리의 쓸쓸한 오두막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67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p>
<p>그사이, 기실은 초반 상승 국면에 있던 시기.  그가 한 일 가운데 우리에게 기장 울림을 주는 일은 자신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존 캐럴을 미국 최초 주교로 만든 일이다.</p>
<p>아다시피 가톨릭은 주교를 중심으로 꾸려져 있는 교단이다.<br />
&#8220;교황도 결국 로마의 주교일 뿐&#8221;이라는 표현은  주교를 중심으로 교구의 신행과 교회행정 이 이루어지는 것을 규정한 가톨릭 교회법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다.</p>
<p>그런데 어떻게 예수회가 공중분해 된 암흑기에, 미국이라는 신대륙의 초대 주교로 예수회 출신인 존 캐럴이 임명 되었을까?  이  놀랍고도 역설적인 사건의 막후에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피에르 보마르세라는 두 걸출한 능력가가  파리에서 함께 짠 고도의 외교적 ‘체스 판’이 존재했다.</p>
<p>1783년 파리 협정으로 미국의 독립이 확정되자, 미국 가톨릭교회는 막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꽤나 충격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미국 가톨릭은 영국 런던 대목구(Vicar Apostolic)의 관할 아래 있었다. 독립한 미국이 영국의 종교적 지배를 계속 받는 것은 심정적으나  정치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p>
<p>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에게 &#8220;미국 주교를 임명하고 싶은데,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대리인을 추천해달라&#8221;고 요청했다. 사실상 프랑스 주도의 미국 교회를 만들려 한 것이다.</p>
<p>미 의회,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격분했다. &#8220;우리가 영국 왕에게서 겨우 벗어났는데, 이제 프랑스 왕이나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는 외국인 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8221;며, 미국 주교는 반드시 &#8216;미국인&#8217;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p>
<p>당시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사제는 존 캐럴이었지만, 그는 전 세계적으로 탄압받아 해산된 &#8216;예수회&#8217; 출신이었다. 프랑스 궁정과 로마 교황청 모두 예수회 출신을 미국의 수장으로 앉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p>
<p>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해 파리의 몽마르뜨르 아지트에서 프랭클린과 보마르세가 머리를 맞댔다. 보마르세는 프랑스 궁정(루이 16세와 베르젠 외무장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당발이었고, 프랭클린은 예의 친화력과 존캐럴의 감화로 언은 천주교 지식을 바탕으로  교황 대사(Nuncio)였던 도리아 팜피일리(Doria Pamphili) 대주교와 꽤 돈독한 친분을 쌓아놓은 사이였다.</p>
<p>&#8221; 피에르군 ,  로마 교황청이 캐럴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네. 그놈의 예수회 낙인 때문이지. 프랑스 국왕도 잔뜩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있고.&#8221;</p>
<p>보마르세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 했다.</p>
<p>&#8220;박사님, 신을 섬기는 자들이나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나 마음속에 두려움이 존재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교황청은 예수회가 신대륙에서 부활할까 봐 무서운 것이고, 국왕은 통제 안 되는 사제가 무서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캐럴을 &#8216;예수회의 생존자&#8217;가 아니라, &#8216;독립 미국의 성자&#8217;로 포장하는 겁니다. 베르젠 백작의 입은 제가 막을 테니, 박사님은 교황 대사의 잔에 와인을 채우십시오. 구체제가 부순 예수회의 씨앗이, 신대륙의 벌판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로 자라나는 모습을… 이 피가로가 대본을 짜 보이겠습니다.&#8221;</p>
<p>&#8220;허허 기대가 되는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작가님.&#8221;</p>
<p>보마르세는 외무장관 베르젠을 찾아가 특유의 정세 분석으로 설득했다. 팔랑귀 국왕의 내락을 받은 후 였다.<br />
&#8220;장관 각하, 프랑스가 미국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프랑스인 주교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 영국의 개신교도들보다 더 독한 미국의 반가톨릭 정서가 폭발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 자체가 흔들립니다. 차라리 프랭클린박사가 미는 &#8216;친프랑스파 미국인&#8217;을 앉히는 게 상책입니다.&#8221;<br />
보마르세의 이 정밀한 조언 덕분에 프랑스 왕실은 미국 주교 임명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8216;불간섭 선언&#8217;을 하게 된다. .<br />
프랭클린은 파리 주재 교황 대사에게 존 캐럴을 추천하는 유명한 외교 각서를 보낸다.  이때 보마르세는 자신의 정보망을 가동해 교황청 내부의 분위기를 프랭클린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했다.<br />
보마르세는 예수회 해산령(1773년)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황청의 &#8216;예수회 복권&#8217;을 두려워하면서도 신대륙의 교세를 확장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간파했다. 그는 프랭클린에게 &#8220;존 캐럴이 예수회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8216;미국 시민이자 훌륭한 사제&#8217;라는 점을 부각해야 교황청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8221;는 출구 전략을 제공했다.</p>
<p>존 캐럴이야 말로  왕권과 이성주의자, 얀세니스트들에 의해 자신이 몸담았던 예수회가 파괴되는 피눈물 나는 역사를 온 몸으로 겪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신을 박해했던 구체제(프랑스 왕정)의 핵심에 있던 보마르세와, 이성주의자인 프랭클린의 막후 도움으로 1784년에 미국 가톨릭 고위 성직자(Superior)로 임명 됐다.   &#8216;수퍼리에&#8217;는 프랑스어 Supérieur 에서 온 말로, 가톨릭에서 특정 지역의 &#8216;상급 장상(총대리 혹은 지부장)&#8217;을 뜻한다.  그리고 마침내  1789년 초대 볼티모어 주교로 임명된다.   교회가 버린 예수회 사제를, 세속의 정치가들이 구해내  미국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것이다. 고위 성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과 평소의 신조가 마음에 걸렸지만 대의를 위해 존 캐럴은 주교직을 수락했다. 그의 주교 서품식은 의외로 영국에서 거행된다. 이 부분은 따로 전한다.</p>
<p>보마르세가 존 캐럴을 돕기 위해 분주히 뛴 이유는 개인적 친분과 미국측의 외교적 청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마르세 본인이 바로 &#8220;예수회의 제자로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 사람&#8221;이었다. 비록 해산되어 추레한 평복을 입고 있지만 그 정신 만큼은 도도했던 존 캐럴에게서, 보마르세는 구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자신의 분신(피가로)을 보았던 것이다. &#8220;억압 받고 탄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 있는 예수회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8221;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민중 극작가 특유의 오기였던 것이다. .</p>
<p>예수회 해산이라는 거대한 불행이, 신대륙 미국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주춧돌이 되는 &#8220;화가 굴러 복이 되는&#8221; 이 매혹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를  신은 어떻게 설계 했을까?</p>
<p>존 캐럴의 주교 서품과 프랑스 혁명 격동의 순간 순간의 에수회 회원 보마르세와 프랑스 천주교의 모습은 다음호에  알아 보기로 한다. 그 정중앙에 우리로서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파리 외방 전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교회만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p>
<p>다시 정산금 문제로 돌아 온다.</p>
<p>보마르세 유족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정산금을 받아낸 과정은 무려 50년 넘게 이어진 법적·외교적 공방전이었다.<br />
이 사건은 미국 정부가 대외적인 채무이자 자신들의 행정적 실책(혹은 억지)을 결국 인정하고 대금을 지급한 역사적인 첫 번째 청구권 해결 케이스 중 하나로 꼽힌다. 그게 미국 다운 일이다.<br />
지급 합의는 1835년에 이루어 졌고 정산 절차 및 최종 지급 완료는 1837년까지 이어졌다.  보마르세와 그 유족들이 원래 요구했던 금액은 이자를 제외하고도 약 300만 리브르에 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80만 프랑을 받고 모든 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는 조건(Take-it-or-leave-it)으로 합의됐다.</p>
<p>왜 지급이 50년이나 걸렸나? 우여곡절이 많았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은  종전 직후인 1783년 가을,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 백작과 정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가 1778년 조약 이전에 미국을 위해 총 300만 리브르를 지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의회에 알렸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 대리인이었던 그랜드(Grand)의 장부에는 200만 리브르만 기록되어 있었다.  &#8221; 그렇다면 나머지 100만 리브르는 어디로 갔는가?&#8221; 라는 의문이 생겼고, 이후 구버너 모리스(Gouverneur Morris)  라는 미국 외교관이 프랑스 외무부 장부에서 1776년 6월 10일, 보마르세가 국왕으로부터 수령한 100만 리브르의 영수증을 찾아냈다.<br />
미국 재무부는 즉시 태세를 전환 해 보마르세에게 타전 했다.<br />
&#8220;당신(보마르세)이  프랑스 왕에게 받은 그 100만 리브르는 우리(미국)에게 주라고 준 돈이니, 우리가 당신 에게 줄 물자 대금에서 그 100만 리브르만큼은 까고(상쇄하고) 주겠다.&#8221;<br />
이에 보마르세는 격렬히 반박했다.<br />
&#8220;그 100만 리브르는 미국에 그냥 주라는 돈이 아니라, 내가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무역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내게 준 &#8216;사업 자본금(Bounty)&#8217;이다. 나는 이미 이 돈의 사용처를 프랑스 국왕에게 완벽히 소명했다. 미국 정부가 관여할 돈이 아니다!&#8221;<br />
하지만  미국 의회는 아서 리와 헌터 등의 주도를 거쳐 1787년, 오히려 보마르세가 미국 의회에 돈을 토해내야 한다는 적반하장식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백만 리브르를 깎자고 했다가  나중에는 200만 불은 선물이었으니 그렇다는 논리였다.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계산법이다.</p>
<p>보마르세가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과 딸(Eugénie)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19세기 초 들어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마르세 유족의 편에 서서 미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8220;보마르세가 받은 100만 리브르는 미국에 준 선물이 아니며, 그는 프랑스 정부에 책임을 다했다&#8221;고 공식 보증했다.</p>
<p>그사이 미국 정치권에서도 일종의  양심 선언이 계속 나오기는 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해 법률가 출신의 미국 정객들도 &#8220;미국 재무부의 정산 방식은 법적 근거가 없으며, 국가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수치스러운 일&#8221;이라며 유족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독립의 아버지 찰스 캐럴도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신의를 위해 그 돈을 해결해야 한다고 후배 정치인 의원들을 설득했다.</p>
<p>1835년 앤드루 잭슨 행정부 시절, 미국과 프랑스 간의 해상 노획물 배상금 등 여러 외교적 채무 정산이 맞물리면서 미국 의회는 마침내 보마르세 유족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의회는 유족들에게 80만 프랑을 최종 제안했고, 수십 년간 고통받던 유족들이 이를 수용하면서  1837년 지급 완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p>
<p>이 사건은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이 국가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 신용과 외교적 압박에 밀려 자신들의 행정적 과오와 억지 주장을 사실상 철회하고 배상(위로금의 형태를 빌린 타협적 정산)을 진행한 기념비적인 첫 케이스다. 당시 프랑스의 외교적 압박이 없었다면 찰스 캐럴이나 알렉스 헤밀턴 같은 양심가의 충언이 없었다면 미국 정부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높은, 국제 정치의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45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123544_148932_3852-1.jpg" alt="" width="600" height="399" /></p>
<p>80만 프랑은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1795년 프랑스 혁명 정부는 복잡한 구체제 리브르를 폐지하고 10진법 기반의 &#8216;프랑(Franc)&#8217;을 새 화폐로 도입했다.  이때 기존의 1 리브르를 거의 1대 1 비율로 교환해 주었기 때문에, 당대 문헌이나 19세기 정산 기록에서는 리브르와 프랑을 사실상 같은 가치의 단위로 혼용해서 표정하고 있다.</p>
<p>과거의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단순 물가상승률(CPI)만 계산하는 방식과, 당시의 실질 구매력(노동 가치, 금·은 현물 가치)을 기준으로 보는 방식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크다.<br />
미국 정부가 보마르세 유족에게 지급한 80만 프랑은 당시 환율로 약 15만 달러였다. (당시 1달러 = 약 5.3프랑) 1835년의 15만 달러를 2026년 현재 미국 달러의 가치로 인플레이션만 단순 계산하면 약 5백70만 달러가 된다.<br />
하지만 인플레이션 계산기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공산품 가격이 폭락한 현대의 착시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당대인들이 체감한 &#8216;노동 가치와 생활 물가&#8217;로 환산하는 것이 역사 서술에서는 훨씬 사실적이다.<br />
18세기 후반~19세기 초 프랑스의 물가 지표를 기준으로 보면 80만 리브르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대 숙련된 석공이나 목수 같은 기술자의 하루 임금이 약 2~3 리브르였다. 80만 리브르는 기술자 한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약 800년~1,000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 당대 프랑스나 미국의 중상류층 가정이 1년 동안 하인을 두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연간 3,000~5,000 리브르 수준이었다. 80만 리브르는 자산가 가문이 대를 이어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막대한 재산이었다.<br />
보마르세가 독립전쟁 당시 미국에 쏟아부은 원금(수백만 리브르)에 비하면 1835년에 유족들이 받아낸 80만 리브르(프랑)는 일종의 &#8216;눈물의 삭감 합의안&#8217;이었지만 이 돈을 기반으로 보마르세의 후손들은 현대 프랑스의 명문가 반열에 어를 수 있었다.</p>
<p>보마르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후손들의 역사는 &#8220;미국을 상대로 한 끈질긴 법적 투쟁의 승리&#8221;이자 &#8220;프랑스 문화·정치 주류 사회로의 화려한 안착&#8221;으로 요약된다.</p>
<p>보마르세의 외동딸인 아멜리 외제니(Amélie-Eugénie)와 그녀의 후손들이 걸어간 길은  19~20세기 프랑스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보마르세에게는 세 번의 결혼이 있었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세 번째 아내인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아멜리 외제니 카롱 드 보마르세(1777~1832)가 유일했다.</p>
<p>아버지가 파산 상태로 사망하고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 재산이 압류당했을 때, 외제니는 어머니와 함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녀는 1796년 관료 출신인 앙드레 투생 들라뤼(André Toussaint Delarue)와 결혼했는데, 남편 역시 아내를 도와 평생을 미국 정부와의 채권 싸움에 바치게 된다.</p>
<p>외제니는 평생을 미국의 오리발과 싸우며 수십번 청원서를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미국 의회에서 80만 프랑 지급 법안이 최종 통과(1835년)되기 불과 3년 전인 1832년에 눈을 감았다. 결국 미국이 지급한 거액의 정산금은 그녀의 자녀들(보마르세의 외손자들)에게 돌아갔다.</p>
<p>이 시기 그  후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속권을 설득력 있게 받기 위해서 라도 &#8216;보마르세&#8217;라는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모계 성씨 계승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외손자 샤를 에두아르 (1799~1878)는 프랑스 군 영관급 고위 장교 이자 레지옹 도뇌르 훈장(Commandeur)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법원에 청원을 넣어 자신의 성씨를 들라뤼에서 &#8216;들라뤼 카롱 드 보마르세(Delarue Caron de Beaumarchais)&#8217;로 공식 확정하는 왕실 법령(1853년 나폴레옹 3세 칙령)을 받아냈다.  이로써  보마르세의 이름은 끊기지 않게 되었다.</p>
<p>그후 보마르세의 후손들은 대대로 학계, 문학계, 그리고 정·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 거족으로 성장했다.</p>
<p>보마르세는 비록 말년에 억울함과 파산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지만, 그의 아내와 딸이 미국 정부로부터 끝내 받아낸 80만 프랑의 정산금은 후손들이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재기하고 도약하는 든든한 경제적 발판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br />
그 후손들은 2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유수의 문학 가문이자, 대사(大使)를 배출한 외교 가문, 그리고 세계 최고급 와인 제국을 이끄는 명문가로 당당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 속 주인공처럼, 어떤 역경 속에서도 유쾌하게 살아남아 승리하는 보마르세 특유의 DNA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위 사진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 중에서)</p>
<p>그중 대표적인 이가  외교관  장 드 보마르세 (1912~1981)다. 그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전설적인 외교관으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에서 활약했고, 이후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 주영국 프랑스 대사 등 외교관의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외할아버지가 스파이이자 비밀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재능을 직계 후손이 그대로 물려받은 셈.<br />
장-피에르 드 보마르세 (Jean-Pierre , 1944~현재)는 오늘날 프랑스 문학계의 거두 중 한 명이다.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으로, 자신의 선조인 보마르세의 전기를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학 사전》, 《프랑스 극문학 걸작선》 등을 편찬한 저명한 서지학자이자 교수다.  게다가 장-피에르는 세계적인 부호이자 와인 명가인 무통 로스차일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가문의 여주인이었던 필리핀 드 로스차일드  남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인 줄리앙 드 보마르세 드 로스차일드(Julien de Beaumarchais de Rothschild, 1971~현재)는 현재 보르도 와인 제국의 핵심 경영자이자 예술 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p>
<p>시계공 출신 평민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이  얻어낸 귀족의 성씨 &#8216;드 보마르세(de Beaumarchais)&#8217;는 그가 위조하거나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특유의 매력과 기지로 ‘쟁취’한 것이었다.<br />
20대 초반 궁정에 드나들던 평민 미남 청년 이었던 그는  한 부유한 미망인(프랑수아 가르디)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왕실 방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땅의 이름이 바로 &#8216;보마르세(Bosc Marchais, 아름다운 숲)&#8217;였다.</p>
<p>카롱은 결혼하자마자 이 땅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8220;카롱 드 보마르세&#8221;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결혼 후 불과 10개월 만에 아내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점이다. 일부  귀족 사회는 그를 &#8220;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성을 훔친 사기꾼&#8221;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법적으로 그 이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굳혔다.<br />
귀족들은 그를 평생 &#8216;시계공 카롱&#8217;이라 비하했지만, 그는 스스로 창조한 &#8216;보마르세&#8217;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았다. 혈통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신분을 창조한  것이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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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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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15 May 2026 20:03:50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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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4&#62; 안동일 작  그런데 예수회는 몇번 언급 했듯이 1760년대 들어서  프랑스에서 부터 호된 서리를 맞는다. 프랑스 내 예수회(Jesuits)의 해산 과정은 단순히 종교적 사건을 넘어,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교황권 사이의 복잡한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4&gt;</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그런데 예수회는 몇번 언급 했듯이 1760년대 들어서  프랑스에서 부터 호된 서리를 맞는다.<br />
프랑스 내 예수회(Jesuits)의 해산 과정은 단순히 종교적 사건을 넘어,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교황권 사이의 복잡한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과정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볼테르 등)들이 주도한 반교회 정서와 절대왕정의 중앙집권화가 맞물린 결과였다. 또 예수회의 교만도 힌 몫했다.</p>
<p>프랑스에서 예수회는 강력한 교육적 영향력과 국왕의 고해신부로서 갖는 정치적 입지 때문에 오랫동안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프랑스 왕권과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갈리카니즘(Gallicanism)에 경도 돼 있던 주류 세력은 교황을 중심으로 일사 분란하게 뭉쳐있는 예수회를 &#8216;국가 속의 국가&#8217;로 간주하며 비난 하고 때로는 적대시했다.<br />
에수회 해산 명령의 결정적인 계기는 1760년에 일어난 라 발레트 선교사 사건 이었다.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예수회 선교사 라 발레트 신부의  선교회가 파산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예수회가 무오류가 아니라는 것과 과유불급,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일깨우는 사건이었다.</p>
<p>앙투안 라 발레트 신부는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예수회 선교단 책임자로,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상업 및 무역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설탕 무역, 노예 매매, 농장 경영 등 대규모 상업적 투자를 진행해 &#8216;아시엔다'( 부락형 대형 농장)를 꾸려넸다. 하지만  해적선의 준동과  7년 전쟁(1756~1763) 중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760년 초 파산을 신청하면서 그가 속한 프랑스 예수회 본회가 이 부채를 떠안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br />
예수회는 라 발레트의 개인적인 일탈이라며 채무 이행을 거부했으나, 채권자들은 이를 예수회 전체의 사업으로 보고 소송을 제기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회의 재정과 운영 실태를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예수회의 불법적인 상업 활동과 독자적인 조직 운영이 드러났다.</p>
<p>이 스캔들은 예수회를 혐오하던 얀센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명분을 주었고, 결국 1762년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자산을 압수하고 프랑스 내에서 조직을 해체하는 판결을 내렸다.   더욱이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회헌(Constitutions)을 정밀 조사했고, 이를 &#8220;왕권에 반하는 위험한 문서&#8221;로 판정했다.<br />
1762년 4월 6일 프랑스 법원은 판결문에서 예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br />
&#8220;위 단체는 문명국가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단체이다. 그것은 위 단체의 본질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모든 권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 단체는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 완성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은밀하고 사악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추구해온 단체이다. &#8230; 그리스도의 정신을 모독하고 시민사회에 유해하며 국민의 권리와 왕권을 무시했고 통치 질서를 위협하였고 국가적 소요를 조장하였으며 종교적이며 기본적인 모든 윤리를 파괴한 조직으로서 그들 가슴 속에는 극악한 부패를 담고 있다.&#8221;</p>
<p>루이 15세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고등법원의 강력한 압박과 여론에 밀려 1764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예수회의 활동을 금지하고 단체를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br />
이후 프랑스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스페인 등 가톨릭 열강들의 압력이 거세지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결국 1773년 칙서 &#8216;주님이시요 구세주&#8217; (Dominus ac Redemptor)를 발표해 전 세계적으로 예수회를 공식 해산했다.<br />
많은 예수회 신부들이 교구 신부로 흡수되거나 다른 수도회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부는 비밀리에 공동체를 유지하며 복권의 때를 기다렸다.  캐럴 신부가 추레한 평복을 입고 볼티모어 항에 내려 찰스 캐럴과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던 때가 바로 이때 였다.</p>
<p>예수회는 1814년이 되어서야 복권 재건 되는데 예수회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약 40년 동안 예수회는 전통 가톨릭 국가가 아닌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프로이센(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예수회의 뛰어난 교육 역량을 높이 평가해 교황의 해산 칙령 집행을 거부하고 예수회 신부들이 학교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보호막을 제공했다.<br />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보수 회귀적인 &#8216;메테르니히 체제&#8217;가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의 권위 회복과 교육 정상화가 시급해졌다. 교황 비오 7세는 칙서 &#8216;모든 교회에 대한 배려&#8217; (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통해 예수회의 전 세계적인 복권을 선언했다.<br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붕괴되었던 교육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예수회 신부들이 다시 초빙되었다. 이후 왕정복고기 동안 이들은 다시 강력한 교육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예수회의 일관된 목표는 교육과 선교를 통한 예수 일꾼 양성이었다. <strong>(사진 설명,  맨위 예수회와 존 캐럴이 세운 미국의 조지 타운 대학교, 가운데, 프랑스 해변의 예수회 수도원, 맨 아래, 카리브해의 아시엔다)    </strong></p>
<p>1760년대 중반 예수회의 해산은 특히 프랑스 가톨릭 교육 시스템에 공백을 가져왔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근대적인 국가 주도 공교육 체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br />
그런데 보마르세와 캐럴 형제가 비교적 자유 분방하게 활동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예수회가 해산 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선 천주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세상사는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굴러 복이 되는 법이다.</p>
<p>참, 지난번에 보마르세가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 이후에는 진학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다시 살펴 보니 그가 파리의 보베 대학(Collège de Beauvais)을 청강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회 학교들이 폐쇄 된 이후의 시기였다. 그곳 에서 그는 논리학과 수사학, 희곡 작법을 심층적으로 배웠다고 첫 희곡 외제니 (미국 발음 유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br />
보베 대학 (Collège de Beauvais)은 18세기 프랑스의 엘리트 배양소였다. 14세기(1347년)에 보베의 주교였던 장 드 도르망(Jean de Dormans)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파리 대학(소르본)의 중심지인 &#8216;라탱 지구(Quartier Latin)&#8217;에 있었다.</p>
<p>보베 대학은 파리 대학교(Universitas Parisiensis)를 구성하던 수십 개의 &#8216;콜레주(Collège)&#8217; 중 하나였다. 당시의 소르본 역시 그 콜레주 중 하나(신학 특화)였다. 1762년 예수회가 해산 추방당하면서 파리 학정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63년 보베 대학을 비롯한 파리의 수많은 소규모 콜레주들이 루이 르 그랑(당시 예수회에서 몰수되어 파리대 본부가 됨)대학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옛 보베 대학의 역사적 문서, 판화, 서적 등 수많은 아카이브는 &#8216;파리 소르본 대학교 종합도서관(Bibliothèque de la Sorbonne)&#8217;의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인 NuBIS에서 보존 및 관리하고 있다.</p>
<p>당시 보베 대학의 교육은 예수회의 교육 철학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루이 르 그랑 출신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 수사학, 논리학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당초 예수회는 파리 대학(소르본) 교수들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통합 되면서 보베의 교수진은 많은 인원이 예수회 소속 학교에서 온 이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실력과 성가는 어디 가지 않는법.<br />
수사학(Rhetoric)은 상대를 설득하고 논리로 제압하는 일종의 기술이다. 보마르셰가 훗날 법정에서 보여준 화려한 변론술이 여기서 닦였던 것이다.<br />
보베와 파리대학 동문들의 면면을 보면 보마르셰뿐만 아니라, &lt;마농 레스코&gt;를 쓴 아베 프레보, 그리고 공포정치의 대명사  맥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온건파 카미유 데물랭. 혁명의 법학자 루이 생쥐스트 등 혁명기의 거의 모든 정치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꼭 이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보마르세도 혁명 초기, 혁명위원회 위원 한자리를 차지했다.</p>
<p>한 마디로 &#8216;구체제의 학문을 배우지만, 그 학문으로 구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칼날&#8217;을 갈아주던 곳이었다.<br />
보마르셰가 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아마도 시계공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묘한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논리학 수사학을 발휘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br />
&#8220;너희는 가문을 배우지만, 나는 세상을 이기는 기술을 배운다.&#8221;</p>
<p>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이었다는 것은 보마르셰의 자유분방함과 &#8216;피가로&#8217;다운 경계인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귀족 자제들 틈에서 그들의 지식을 &#8216;훔쳐 배우는&#8217; 천재적인 시계공 아들의 모습은 바로 파가로의 모습이었다.<br />
예수회는 &#8216;세상 속의 수도회&#8217;를 지향하며 정치,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8220;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8221;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강조했다. 보마르셰가 보여준 &#8216;기지(Wit)&#8217;와 &#8216;막후 외교&#8217;는 예수회의 교육적 학풍과 매우 잘 어우러진다. 당시 프랑스의 엘리트 교육은 해산 이전에는 물론, 해산 이후에도 예수회가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br />
보마르셰가 이런 예수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8216;피가로&#8217;라는 혁명적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은 구체제의 지식을 습득해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아주 매력적인 아이러니 였다.</p>
<p>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인들의 가톨릭 신앙은 &#8216;신비주의&#8217;보다는 &#8216;사회적 계약&#8217;에 가깝다고 운위된다. 프랑스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종교는 에티켓이자 사회적 신분이었지, 금욕적인 삶을 뜻하지 않았다. 보마르셰가 수많은 연애 사건과 소송에 휘말리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것이 그 증좌다.<br />
&#8220;하나님은 경외하지만, 정치에 개입하는 교회는 혐오한다&#8221;는 반성직자주의(Anticlericalism)정서가 만연해 있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종교적 권위를 비웃는 장면들이 나오는 이유도, 프랑스인들이 신앙과 교회의 권력을 분리해서 보았기 때문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2024050921440543180_1715258645_1715146637.jpg" alt="" width="600" height="364" /></p>
<p>보마르셰는 후일 &#8220;나는 예수회의 제자로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웠고, 피가로로서 그 세상을 뒤집는 법을 실천한다&#8221; 고 기염을 토했다.<br />
존 캐럴은 젊은 보마르셰가 루이 르 그랑의 복도에서 신학교로 떠나기전의 자신과 마주치며 &#8220;존, 신을 섬기는 법과 세상을 속이는 법은 결국 한 끗 차이가 아니겠니?&#8221; 하는 깜짝 놀랄 농담을 건네는 장면을 여러 차례 회고 했다.</p>
<p>프랑스인들의 신앙관은 대로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묘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흔히 &#8216;갈리아주의(Gallicanisme)&#8217;라고 부르는데, 신앙은 로마 가톨릭을 따르되 세속적인 통치와 권력은 프랑스 국왕(혹은 국가)이 독자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아주 독특한 태도다. 그러면서 가톨릭 에서 가장 교조적이고 금욕 경건을 내세웠던 얀세니즘이 기장 발흥했던 곳도 프랑스였다.<br />
역사적으로 프랑스 출신 교황은 총 16명으로 집계된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14세기 &#8216;아비뇽 유수&#8217; 시기다. 이 시기에는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렀고, 이때 선출된 7명의 교황은 전원 프랑스인이었다.<br />
999년에 선출된 실베스테르 2세가 프랑스 출신 첫 교황 이었다. 그는 수학과 천문학에 능했던 학자 교황으로 꼽힌다. 그후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제창한 어반 2세가 프랑스 출신 교황.<br />
아비뇽 시기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까지. 이 시기는 사실상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교황권이 놓였던 시기로, 프랑스인들이 교황청을 &#8216;자신들의 것&#8217;으로 여겼던 자부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p>
<p>프랑스인들에게 가톨릭은 영혼의 구원인 동시에, 유럽의 패권을 다투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했다. 이런 &#8216;현실적인 신앙관&#8217;이 보마르셰 같은 인물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br />
보마르세의 피가로 3부작(정확히는 앞의 두 작품)이 프랑스 혁명 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얘기된다. 피가로는 보마르세의 분신이기도 하면서 당시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 했던 캐릭터다.  작가는  위트 와 기지 넘치는 저항정신 그리고 자유사상 평등 정신을 뭉뚱그려 &#8216;피가로 정신&#8217;이라고 명명 하고 싶다.<br />
실제로 역사학자들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그를 단순한 희극 캐릭터가 아닌, &#8216;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을 고한 나팔수&#8217;로 평가하고 있다.</p>
<p>피가로 정신 (L&#8217;Esprit de Figaro)은 단순히 &#8216;똑똑한 하인&#8217;의 재치를 넘어,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다. 피가로는 신분적 열세를 폭력이 아닌 오직 지력과 말솜씨로 극복한다. 위트와 기지 (L&#8217;Esprit)다.<br />
&#8220;백작님은 태어나는 수고만 하셨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지혜를 짜내야 했습니다&#8221;는 그의 독백은 특권층의 무능을 날카롭게 비웃는 피가로 정신의 정수다.<br />
그의 저항 정신 (La Résistance)은 부당한 권력에 대해 순종하는 대신, 판을 짜고 상황을 통제한다. 이는 수동적인 민중이 능동적인 주체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징한다.</p>
<p>자유와 평등 (Liberté et Égalité)을 내 세우는 그는 혈통이 아닌 능력과 노력에 따른 가치를 주장한다. 기회 균등과 &#8220;능력 위주의 사회&#8221;를 꿈꿨던 당시 부르주아와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계몽주의 사상을 에수회 적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러려니 난관도 많았다.<br />
보마르셰는 평생 수많은 송사에 휘말리며 기득권과 싸웠는데, 피가로가 극 중에서 내뱉는 울분과 논리적인 반박은 그가 법정에서 실제로 겪었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p>
<p>피가로의 결혼 제5막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독백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폭탄과도 같았다.<br />
&#8220;귀족이라니! 당신은 그저 태어나는 수고만 했을 뿐이야. 그 외에 당신이 한 일이 뭐가 있지?&#8221;<br />
(Noblesse, fortune, un rang, des places : tout cela rend si fier ! Qu’avez-vous fait pour tant de biens ? Vous vous êtes donné la peine de naître, et rien de plus.)<br />
이 구절은 피가로 정신의 핵심인 &#8216;평등&#8217;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런 노력 없이 혈통만으로 권력을 쥐는 귀족 계급의 허상을 꼬집은 것이다.  . &#8220;나는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야 했는데, 당신은 운 좋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를 지배하려 드느냐&#8221;는 일침은 당시 관객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p>
<p>&#8220;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그 어떤 찬사도 의미가 없다.&#8221;<br />
(Sans la liberté de blâmer, il n&#8217;est point d&#8217;éloge flatteur.)<br />
유명한 문장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절, 피가로(혹은 보마르셰)는 &#8216;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사회라야 비로소 그 사회가 건강하다&#8217;는 사실을 역설했다. &#8220;무조건적인 찬양은 아부일 뿐&#8221;이라는 냉철한 인식이 돋보이는 구절이다.</p>
<p>&#8220;나만큼의 생존 능력을 갖춘 하인을 백 명만 모아도, 지난 백 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던 모든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8221;<br />
피가로는 단순히 화만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알고 있었다. 실무 능력은 물론 도덕성도 없는 통치자 귀족들 보다, 밑바닥에서 구르고 깨지며 단련된 민중의 지혜가 훨씬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는 시민 사회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p>
<p>당시  공연 대본을 본 루이 16세는 &#8220;이 연극이 상연된다면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려야 할 것&#8221;이라며 격분해 상연을 금지 했다. 하지만 피가로의 이 날카로운 위트들은 이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p>
<p>&#8216;피가로 정신&#8217;은 바로 &#8220;말 한마디로 거대한 성벽을 허무는 유쾌한 파괴력&#8221;이었던 것이다.<br />
&#8220;피가로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8221; 후일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말이다.</p>
<p>오늘날의 프랑스인들도 여전히 피가로를 사랑할까?<br />
결론부터 말하면, &#8220;프랑스인의 DNA에는 여전히 피가로가 흐르고 있다&#8221;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br />
진보 성향의 르몽드와 더불어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도 일간지가 바로 &lt;르 피가로(Le Figaro)&gt;다.  &#8220;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찬사에도 의미가 없다&#8221;는 보마르셰의 대사를 제호 아래 새겨두고 있다.</p>
<p>프랑스인들은 권력에 대한 냉소와 풍자(Satire)를 지적 유희이자 시민의 의무로 여긴다. 파업이나 시위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거침없는 자기표현 방식은 현대판 &#8216;피가로 정신&#8217;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br />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 덕분에 피가로는 클래식한 이미지까지 더해져, 세대를 불문하고 &#8216;가장 매력적인 프랑스적 인간상&#8217;으로 추앙받고 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3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images.jpg" alt="" width="259" height="194" /></p>
<p>그런데 미국에서는 너무도 다르다.<br />
보마르셰는 미국 독립전쟁의 &#8216;숨은 일등 공신&#8217;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역할을 했다. 사라토가 전투의 무기 지원은 그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br />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이 불가능했던 초기, 보마르셰는 &#8216;로드리그 오르탈레스와 동료들&#8217;을 통한 대규모 지원으로은 사라토가 전투 이후 미국 독립군의 &#8216;체계화&#8217;에 기여했다.<br />
사라토가 승리 이후 1778~1779년의 대규모 수송 으로 보마르셰는 미국이 정규군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군복 3만 벌과 신발 수만 켤레를 보냈다. 당시 미군은 맨발로 눈 위를 걷는 처참한 상황이었는데, 보마르셰의 보급품이 도착하며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br />
그는 단순히 무기만 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선진적인 포병 기술 교본을 번역해 보냈고, 유능한 기술자들을 직접 고용해 미국으로 밀항시켰다. 이는 미국 국방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br />
총기뿐만 아니라 대포, 화약, 군복, 심지어 신발과 텐트까지 보급했다. 특히 프랑스산 고성능 화약은 미군이 사용한 화약의 약 90%에 육박했다는 기록도 있다.</p>
<p>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10여 척의 대형 상선을 구입해 함대를 운영했다. 보잘것 없었던 독립군 해군력 증강의 수훈갑이다. 그의 함대에는 6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열함 &#8216;르 피에르 로드리그(Le Fier Rodrigue)&#8217;호도 있었다. 이 배들은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군수품을 실어 날랐으며, 때로는 영국함과 직접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br />
그는 슈토이벤(Steuben) 남작이나 라파예트(Lafayette) 장군 같은 유능한 유럽 장교들이 미국으로 건너 와 군사 고문 을 맡고 전장을 지휘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p>
<p>또 벤자민 프랭클린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보마르셰는 단순한 무기 상인이 아닌 정치적 조언자이자 정보원이었다.<br />
보마르셰는 스파이망을 가동해 영국 내부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를 프랭클린에게  즉각 전했다. 프랭클린이 프랑스 외교부 장관 베르젠(Vergennes) 백작의 신뢰를 얻도록 막후에서 여론을 조성한 것도 보마르셰였다.<br />
보마르셰의 화려한 저택은 프랭클린과 프랑스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미국 독립의 당위성을 논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그는 특유의 기지로 미국 독립이 프랑스의 국익(영국 견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퍼뜨렸다.</p>
<p>보마르셰와 프랭클린은 겉으로는 &#8216;극작가&#8217;와 &#8216;철학자&#8217;로 만났지만, 실제로는 영국 정보국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가짜 뉴스(Disinformation) 전략은 매우 돋보인다. 보마르셰는 프랭클린과 짜고 영국 스파이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8220;미국 독립군은 곧 항복할 것&#8221;이라거나 &#8220;프랑스는 무기 지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8221;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영국이 방심한 사이 비밀리에 함대를 출항시키기 위함이었다.</p>
<p>두 사람은 무기 대금이나 수송 일정을 논할 때 철저히 암호를 사용했다. 보마르셰는 프랭클린을 &#8220;나의 사랑하는 철학자&#8221;라고 불렀고, 프랭클린은 보마르셰의 유령 회사(로드리그 오르탈레스)를 정부가 아닌 &#8216;민간 독지가의 자선 활동&#8217;으로 포장하여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 부담을 덜어주었다.</p>
<p>1783년 협상 국면에서 그는 베르젠 백작과의 끝장 토론으로 미국의 편을 들었다. 보마르셰는 파리 협정 전후로 궁정의 루이 15세와  외무장관 베르젠을 끈질기게 찾고 또 찾아가 , 미국과의 동맹을 끝까지 유지해야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설득했다.  &#8216;비폭력적 기지&#8217;의 관점에서 볼 때, 보마르셰의 미국 독립 전쟁 참여는 &#8220;총칼보다 무서운 물류와 외교의 승리&#8221;라고 정의할 수 있다.</p>
<p>산이 깊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1783년 파리 협정으로 미국 독립이 확정되자 보마르셰는 환희에 찼으나, 곧 대륙회의의 냉담함에 직면해 너무도 당혹해야 했다. 이때 그가 프랭클린과 미 대륙회의에 보낸 서신에는 &#8216;피가로&#8217;다운 당당함과 처연함이 공존하고 있다.<br />
&#8220;나는 당신들을 위해 내 재산과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의 배들을 &#8216;선물&#8217;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기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내 가족의 생계까지 드릴 수는 없습니다.&#8221;</p>
<p>실제로 보마르셰는 미국에 약 500만 리브르라는 거액을 청구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사였던 아서 리(Arthur Lee)는 보마르셰를 &#8216;사기꾼&#8217;으로 몰아세우며 무기와 군수품 들은 프랑스 정부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조차 정치적 입장이 난처해져 보마르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우정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p>
<p>보마르셰는 폭력이 아닌 &#8216;계약과 기지&#8217;로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그 대가로 가장 가혹한 경제적, 정치적 배신을 당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희곡을 더 써냈던  그의 모습이야말로 &#8216;피가로 정신&#8217;의 가장 고결한 완성이 아닐까 싶다.</p>
<p>작가 에게는 두 장면이 유난히 떠오른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이 트레이드 마크인 너구리 털모자와 어딘지 1% 부족한 화려한 귀족 복장의 보마르세의 모습이 대비되는 가운데, 두 사람이 파리 몽마르뜨르의 카페에서 체스판을 바탕 삼아 식민지 해상과 육지에거의  군대의 이동과 보급 경로를 논하는 장면.</p>
<p>그리고 미국 독립을 축하하는 파리의 센 강변의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정작 자기 배들은 압류당할 위기에 처한 보마르셰가 혼잣말로 &#8220;피가로,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농담을 하겠나?&#8221; 읊조리는 모습.</p>
<p>미국이 최종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이 신대륙에서 실현된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자신이 창조한 &#8216;피가로&#8217;가 구 체제를 비웃었듯, 미국의 승리는 왕정에 대한 시민의 승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가끔은 흔들렸던 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다시 정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br />
그런데 승리 직후, 영광의 주역들이 축배를 들 때 정작 뒤편에서 파산 위기에 몰려 빚 독촉을 받는 보마르셰의 모습은 &#8216;피가로 정신&#8217;이 가진 고독한 이면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닐까?</p>
<p>“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때 그가 외쳤던 말이 아닐까? 실제로 그의 고단한 역정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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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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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08 May 2026 02:51:2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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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3&#62; 안동일 작 &#8211; 보마르세의 &#8216;피가로의 결혼&#8217;- 작가의 생각으로는 피에르 보마르세 만큼 평가절하 돼 있는 인물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전천후의 만능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냥 다재 다능한 재주꾼, 영리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인식해 그를 폄하하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5>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3&gt;</h5>
<h5>안동일 작</h5>
<h5>&#8211; 보마르세의 &#8216;피가로의 결혼&#8217;-</h5>
<p>작가의 생각으로는 피에르 보마르세 만큼 평가절하 돼 있는 인물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전천후의 만능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냥 다재 다능한 재주꾼, 영리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인식해 그를 폄하하곤 한다. 시계공ㆍ발명가, 음악선생, 관리, 첩보원, 투기꾼, 노예상, 무기상, 출판업자, 극작가, 망명객 등 다양한 직업과 인생의 부침을 섭렵, 경험한 독특한 인물이라는 평이 꼭 따른다. 미국내의 경우 특히 그렇다.</p>
<p>그런데 그는 시계공으로서도 일류 기술자였고 음악선생으로서는 궁중 교사였으며 관리로서도 매우 유능한 수완을 발휘한 이였다. 첩보원 으로서는 프랑스를 위헤 영국과 스페인을 적절하게 요리했고 투기꾼, 노예상 이란 표현은 그를 전적으로 폄하하는 이들의 표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뿐 아니라 스페인과 서인도 제도에 방대한 부동산과 선단을 소유했고 이를 불렸던 부호이기도 했다. 무기상 으로서 그는 역사에 남는 일을 해냈다.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수세에 몰려 있던 미국 독립군 대륙군에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만큼의 다량의 무기를 제공해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p>
<p>극작가로서는 더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저 유명한 모짜르트의 오페라 &#8216;피가로의 결혼&#8217; 과 로씨니의 &#8216;세빌리아(세비아)의 이발사&#8217;가 그의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오페라로 만들어 지기 전 희곡으로 읽혔고 연극으로 파리에서 공연 됐는데 귀족 사회의 허위 의식과 부패를 실랄하게 고발하면서도 경쾌함을 잃지 않았던 한 작품이다.  루소와 볼테르의 저작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의 밑바탕이 된 문서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대단하지 않는가?</p>
<p>그는 파리에서 1732년 시계 제조업자인 아버지 앙드레 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여섯 자녀 중 유일한 사내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시계, 특히 개인용 회중시계는 첨단의 정밀 과학 제품이었고 평민들은 구경도 못하는 고가품이었다. 때문에 보마르세의 가정은 평민 계급이었지만 부유한 편이었고.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 플루트, 하프 등 여러 가지 악기 연주법을 배웠고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0대 초반 부터 보마르셰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고 시계에도 큰 관심을 보여 틈틈이 아버지 밑에서 시계 만드는 일을 도왔다.</p>
<p>18세가 되던 1750년, 다른 학셍들보다는 두어살 많은 나이에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르 그랑은 예수회가 세운 명문으로 주로 귀족 상류층 자제들이 다녔지만 개방적인 학풍으로 평민 자제들 가운데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문호를 열었다. 보마르세가 그곳에 진학했던 것은 귀족 상류층 학생들과 교분을 갖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르 그랑을 나온 뒤 그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를 도와 시계 제작에 전념했던 모양이다.  르 그랑에서의 예수회식 교육은 그의 인생관과 문학관에 큰 영향을 끼쳐 일생을 관통하는 지침과 철학이 된다.</p>
<p>1753년 7월, 21살에 보마르셰는 더욱 정확하고 작은 시계 제조법을 발명했다. 바로 시계추의 제어장치다.  왕실로부터 특허를 받아  제어장치 시계가 궁정에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보마르셰의 신분은 점차 격상됐다. 그 발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던 국왕의 시계 기술자와 논쟁이 벌어졌지만  과학 아카데미에 의해 자신의 기술을 인정받게 되면서 보마르셰는 유명인사가 되었다.<br />
루이 15세의 애인 퐁파두르(Pompadour) 부인을 위해 반지에 장착된 시계를 만들어 왕의 눈에 크게 들었고 궁중을 자주 출입 하는 측근이 되었다.  궁정의 고급 정보를 활용, 부동산과 채권에 투자해 돈도 벌었다. 1755년 보마르셰는 연상 의 부유한 귀족 미망인 마들렌(Madeleine Catherine Aubertin)을 만나 그 다음 해에 결혼했고 마들렌 소유의 땅 이름인 ‘Le Bois Marchais’를 따서 자신의 이름을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라는 귀족의 이름으로 바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름앞에 귀족을 뜻하는 드 자를 붙혀 부르지는 않았다. 마들렌은 결혼한 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죽었고 많은 유산이 돌아왔다. 이후에 보마르셰는 궁정에 들어가 루이 15세의 네 딸들에게 하프를 가르치게 되었다.</p>
<p>1759년, 보마르셰는 루이 왕의 최측근 재경 대신이자 부유한 사업가 뒤베르네(Joseph Paris Duverney)를 만났고 그의 지원으로 왕의 비밀 재정 비서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왕실 심장부에 진출했다. 1764년에는 왕과 뒤베르네의 사업을 도와 스페인의 식민지들에 대한 각종 독점 계약과 노예수입권을 취득하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파견된다. 그러나 사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그는 열 달 동안 스페인에 머물며  풍광을 즐기고 공기를 마시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때의 경험이  그가 쓴 &lt;세비야의 이발사&gt; 등의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p>
<p>타고난 글쟁이였던 보마르셰는 1765년 3월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 바쁜 와중에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지 희곡을 쓰는 일에 골몰 했다. 그의 첫 희곡 &lt;외제니&gt;를 1767년에 발표했고 1770년에는 두 친구(Les Deux amis)를 발표했다. 두 작품은 나름 호평을 받았다.<br />
후견인 뒤베르네가 죽자 뒤베르네의 조카인 라 블라슈 백작과 재산 문제로 소송을 벌여 패소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그 재판을 맡았던 검사 고에즈망을 다시 고소하는 한편 재판의 부패를 다룬 &lt;비망록(Mémoires)&gt;을 출판해 부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귀족 사회 풍자와 고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 이었다.</p>
<p>그 후 보마르셰는 새로 즉위한 루이 16세의 밀사로 유럽을 돌아다녔고,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며 무기를 공급하고, 저작권법 제정에 앞장서고, 볼테르 전집의 간행을 주관하고, 토목 공사를 벌이는 등 여러 가지 일에 관계했다.<br />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보마르세는 영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미국을 돕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게 되고 루이 왕과 외무장관 베르젠을 설득해 1776년 5월, 100만 리브르를 지원 받는다. 보마르셰는 이를 기반으로 가공의  무역 회사인 &#8216;로드리그 오르탈레즈&#8217;를 설립했다. 서류상으로는 스페인의 민간 무역사 였지만, 실상은 프랑스 군기고의 구식 무기를 가져와 미국에 넘기는 국가 차원의 &#8216;세탁&#8217; 작업이었다.</p>
<p>그는 단순히 자금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선박을 구하고 선원을 모집하며 무기를 검수하는 실제 물류 총책임자였다.  미국 대륙회의가 파리로 보낸 최초의 외교관 사일러스 딘(Silas Deane)이 보마르셰를 만난 것은 1776년 7월이었다. 딘은 벤저민 프랭클린, 존 캐럴 등과 연결된 인맥을 통해 보마르셰를 알게 됐다. 가톨릭 인맥을 활용한 정보망은 예수회 꾸루실료 였던 보마르세와 당시 비밀 협상의 중요한 윤활유였다.</p>
<p>보마르셰는 딘을 만난 후  존캐럴 찰스 캐럴 형제의 당부에 따라 확신을 얻고, 당초 계획했던 소규모 지원을 넘어 대규모 수송 함단을 조직했다. 1777년 초까지 그는 8척의 대형 수송선에 대포 200문, 소총 25,000정, 화약 수만 파운드를 실어 보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인 새러토가 전투(1777년 10월)에서 미군이 사용한 무기의 90%가 보마르셰가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그의 공로는 절대적이었다.</p>
<p>이때 보마르셰는 &lt;피가로의 결혼&gt; 대본을 쓰면서 동시에 무기 목록을 검토했다. 무대 위에서는 귀족을 조롱하고, 현실에서는 그 귀족(국왕)의 돈으로 영국의 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군을 지원했던 것이다.<br />
그런데 후일의 이야기지만 보마르셰는 이 사업에 자신의 전 재산과 신용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미국 대륙회의는 이를 &#8216;프랑스 정부의 무상 원조 였다&#8217;고 강변하면서 짐짓 외면했다.  사일러스 딘은 보마르셰의 손을 들어줬지만 , 후에 파견된 아서 리(Arthur Lee) 등이 딘과  보마르셰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며 대금 지급을 거절했다. 채권의 한 당사자이자 결정권자 였던  프랑스 국왕은 처형되고 없던 상황.<br />
보마르셰는 평생 이 대금을 받기 위해 싸웠고, 결국 그가 죽은 뒤인 1835년에야 미국 정부는 찰스 캐럴 등의 유지에 따라 그의 후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하며 빚을 청산했다. 그것도 당초 청구금액의 10분의 1수준에서&#8230;그래서 미국내 그의 평판은 바닥이다.</p>
<p>하지만 그사이 1775년에 보마르셰는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뒀고 1784년에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혁명 전야의 시민 정신에 부합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br />
하지만 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오히려 투옥되었고 어렵사리 외국으로 도피해  런던, 함부르크, 스위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 시기에 ‘피가로 3부작’을 이루는 희곡 &lt;죄를 저지른 어머니(La Mère coupable)&gt;(1792)를 썼다. 이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보마르셰는 1796년 집정관 시대의  파리로 돌아와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1799년에 사망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07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Beaumarchais.jpg" alt="" width="550" height="648" /></p>
<p>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는데 그의 희곡 작품이야 말로  지금도 최고의 성가를 구가하고 있다. 그의 희곡 작품들을 살펴 본다.<br />
피가로(Figaro)야 말로  18세기 말 이후 프랑스 최고의 캐릭터다. 보마르셰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의 주인공 이다. 극중 피가로는 순발력과 재치 넘치는 언변으로 귀족의 부패와 탐욕을 고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br />
이 희곡을 원작으로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라 폰테가 각색한 부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본 나폴레옹이 ‘피가로 야 말로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말했을 만큼 피가로는 사람들을 깨웠다. 이 오페라는 지금도 음악인들 사이에는 역사상 최고의 오페라로 꼽힌다. 라트라비아타, 마담 버터플라이를 훨씬 뛰어 넘는다.<br />
프랑스 최고(最古),최대 일간지 ‘르 피가로’지의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최고 명소의 하나였던 카페 &#8216;르 피가로&#8217; 역시 기억에 새롭다.</p>
<p>그가 작가 초기에 집중했던 것은 사실 ‘드람 부르주아(Drame bourgeois, 시민극)’라는 진지한 장르였다 초기의  작품&#8217;외제니&#8217;와 &#8216;두친구&#8217;는  평범한 시민들의 도덕적 갈등과 가정 내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보마르세는 &#8216;외제니&#8217; 서론에서 자신이 디드로의 문학관을 따른다고 적었다.<br />
문학가의 작품에는 그의 인생관이 들어 나기 마련이다.</p>
<p>외제니 ((Eugénie ou la Vertu au diséespoir, 1767)는 보마르세의 첫 희곡으로, 당시 유행하던 &#8216;눈물을 짜내는 희극(comédie larmoyante)&#8217;의 영향을 받았다.<br />
젊고 순진한 여주인공 외제니는 클라랑동 백작과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믿고 그의 아이까지 가진다. 하지만 사실 백작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꾸민 것이었고, 이미 다른 부유한 귀족 여성과 정략결혼을 앞둔 상태였다.<br />
이 사실이 밝혀지며 외제니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위기에 처한다. 외제니는 절망(Vertu au désespoir, 절망에 빠진 미덕)하지만, 결국 백작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녀를 진정한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신분 차이와 남성의 기만 속에서도 여성의 정조와 미덕이 승리한다는 도덕적 메시지를 강조했다.</p>
<p>두 친구 (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 1770)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정과 상업적 신뢰를 주제로 하고 있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인 오렐리와 세무 관리인 멜라크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어느 날 오렐리가 갑작스러운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멜라크는 친구를 돕기 위해 자신이 관리하던 공금을 몰래 꺼내어 빌려준다. 공금을 유용한 사실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면서 멜라크는 큰 고초를 겪게 되지만, 오렐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오해와 위기가 겹치지만, 결국 두 사람의 희생적인 우정이 빛을 발하며 상황이 해결된다.<br />
당시 상인 계급의 정직함과 우정을 찬양하며, 경제적 신용이 곧 인간의 도덕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p>
<p>두 작품 모두 당시에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현대에는 &#8220;너무 교훈적이고 신파적이다&#8221;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훗날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가 살아있는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셈이다.</p>
<p>그전에 보마르세는 귀족사회 고발장인 &#8216;비망록&#8217;을 써내 필명을 떨쳤다.<br />
1774년 일종의 동업 관계였던 뒤베르네 재무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조카인 라 블라슈 백작과 재산 문제로 소송이 벌어져 그는 패소했다. 그러자 그는 그 재판을 맡았던 검사 고에즈망(Goëzman)을 고소하는 한편 재판의 부패를 다룬 희곡식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lt;비망록(Mémoires)&gt;(1774~1775)이었다. 이 출판으로 그는 부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귀족 사회 풍자와 고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 이었고 이 비망록을 쓰면서 피가로 3부작을 구상했던 것으로 여겨 진다.</p>
<p>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오늘날 로시니와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더 친숙하지만, 두 작품 모두 본래 연극용 희곡으로 쓰였고 당대에 연극으로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 들이다.<br />
세비야의 이발사는 1775년 2월 23일, 파리 최고의 극장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 졌다. 초기에는 5막짜리 구성으로 초연되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보마르셰가 단 48시간 만에 4막으로 수정하여 다시 올렸고,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프랑스 연극계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원래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 형식으로 기획되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연극 희곡으로 다시 집필한 사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집필이 진행 됐단다.</p>
<p>스페인의 도시 세비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비야의 이발사는 알마비바 백작이 아름다운 로지나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로지나의 후견인으로 그녀와 결혼하려는 늙은 의사 바르톨로가 방해한다. 길에서 우연히 자신의 하인이었던 이발사 피가로를 마주친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피가로는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로 알마비바 백작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해피 엔딩이지만 귀족 중심 사회를 비판과 풍자하는 이야기다.</p>
<p>피가로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은 9년 뒤인 1784년 4월 27일, 역시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막을 올렸다.<br />
전편에 이어 더욱 실랄해진 귀족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수년간 상연 불가 처분을 받았다. 금지가 풀린 뒤 열린 초연 날에는 인파가 너무 몰려 극장 문이 부서지고 사람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로 대흥행을 기록했다. 68회 연속 공연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나폴레옹은 이 연극을 두고 &#8220;이미 실행된 혁명&#8221;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p>
<p>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가 결혼 후 3년 뒤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발사였던 피가로는 혼인을 성사시킨 공로로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준비한다. 한편 로지나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와 결혼하게 될 하녀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백작은 이미 폐지했던 영주의 권리인 초야권(처녀가 시집가게 되면 첫날밤을 영주와 동침)을 은근히 부활시키려 하고, 하녀 마르첼리나가 피가로의 작은 실수를 들고 나와 결혼을 요구하는 등 수잔나와 피가로의 결혼에 여러 장애물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피가로는 꾀를 내어 백작부인과 수잔나와 함께 공모하여 백작을 궁지에 몰아넣고 수잔나와 결혼에 성공한다.</p>
<p>피가로의 결혼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보마르셰는 작품의 배경을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으로 하는등.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1784년 가까스로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뒀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lt;피가로의 결혼&gt;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786년 프랑스가 아닌  빈에서 초연되었다.</p>
<p>시리즈 세번째 죄지은 어머니 (La Mère coupable)는 한참 뒤인 1792년 6월 26일, 파리의 테아트르 드 마레(Théâtre du Marais).에서 무대에 올려졌는데 앞선 두 작품이 경쾌한 희극이었다면, 이 3편은 프랑스 혁명기의 암울한 분위기가 반영된 진지한 &#8216;모랄 드라마(drame moral)&#8217;였다.<br />
피가로와 수잔나가 중년이 된 시점을 다루며, 알마비바 백작 부부의 가정사 비극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렸다. 앞선 두 편만큼의 파괴력은 없었지만, 당대 관객들에게 보마르셰의 마지막 드라마로서 꾸준히 공연되었다.</p>
<p>알마비바 백작 부부는 큰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차남 레옹이 있지만 백작의 태도는 냉담다. 사실 레옹은 백작이 긴 출장을 가있는 동안 백작부인이 셰르뱅(Chérubin)과 하룻밤을 보내었을 때 임신한 아이다. 백작부인이 그들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고 셰르뱅에게 말하자 그는 전쟁으로 떠났고 의도적으로 전장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백작부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서 보냈고, 백작부인은 특별한 상자 안에 그 편지를 보관했다.<br />
백작도 레옹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해 왔지만 부인을 추궁하거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백작에게도 플로레스틴(Florestine)이라는 이름의 사생아가 있었는데 베기아르스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녀를 백작의 유일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백작부인의 비밀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br />
한편 백작 부부의 불화를 지켜보던 피가로는 여기에 모종의 사연과 음모가 있다는 것 알아차리고 수잔나와 함께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플로레스틴과 레옹이 사랑에 빠진다는 막장 요소 였다.  피가로는 이번에도 기기묘묘한 수를 써서 둘이 결혼할 수 있는 길을 튼다. 이과정에서 피가로는 생모를 찾게 된다. &#8216;죄지은 어머니&#8217;에는 얄궂게도 ‘모럴 드라마(Drame Moral)’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의 작품에는 통속 막장 요소가 잔뜩 들어 있다. 영어로는 레디컬 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아 하는지 모른다.  &#8216;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8216;이란 말처럼.</p>
<p>보마르셰가 자신의 이 연극들, 특히 앞의 두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벌였던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첩보 영화나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을 둘러싼 일화들은 18세기 프랑스의 검열 제도와 사회적 역동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br />
루이 16세는  대본을 직접 읽고 분노하며 상연을 금지했다. 하인(피가로)이 주인(백작)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지략으로 이기는 설정이 왕권과 신분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마르셰는 &#8216;게릴라식 마케팅&#8217;으로 맞섰다.<br />
공연이 금지되자 보마르셰는 파리의 유력한 귀족 부인들의 살롱을 돌아다니며 대본을 낭독했다. &#8220;왕이 금지한 금서&#8221;라는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귀족들 사이에서 &#8220;이 연극을 못 보면 유행에 뒤처진다&#8221;는 심리가 확산되었다.<br />
심지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이 연극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여론에 밀린 루이 16세는 몇 차례의 대본 수정을 조건으로 공연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말한대로 3년여의 수정 작업 끝에 상연 허가가 떨어지자 파리 시민들은 환호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25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unnamed.jpg" alt="" width="512" height="341" /></p>
<p>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파가 몰려 코메디 프랑세즈의 철제 정문이 부서졌다. 당시 극장은 신분에 따라 좌석이 엄격히 나뉘어 있었으나, 이날만큼은 공작부인과 요리사가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br />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 극장 안의 온도가 치솟자, 여성 관객들이 일제히 부채질을 하는 바람에 극장안에 부채소리가 요동쳐 극 진행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p>
<p>보마르셰는 단순히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지적 재산권을 위해 싸운 투사이기도 했다. 당시 극단(코메디 프랑세즈)은 작가에게 정당한 수익을 배분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br />
보마르셰는 이에 분개하여 1777년에 &#8216;극작가 협회(SACD)&#8217;를 창립했다. 이는 오늘날 저작권법의 근간이 되는 활동으로, 그는 연극이 성공할수록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도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p>
<p>재미있는 점은 그가 이 연극 대본을 집필하고 수정하고 무대에 올리던 시기가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던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br />
그는 낮에는 루이 16세의 신하로서 비밀 첩보 활동(로드리그 오르탈레즈 공사 운영 등)을 하고, 밤에는 그 국왕이 금지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귀족들을 포섭했고 머리를 싸매 대본을 수정했던 것이다.<br />
연극 속 피가로가 보여주는 기만술과 변장, 기지는 실제 보마르셰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사용하던 수법들과 닮아 있다.<br />
당대 프랑스인들은 무대 위 피가로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하며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해소했다.</p>
<p>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예수회와 천주교 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대사들은 단순한 연극 대사가 아니었다. 보마르세가 존 캐럴과 함께  르 그랑을 다니면서 체득한 &#8216;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8217;와 &#8216;인간의 자유&#8217;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교감이 깊게 깔려 있었전 것이다.  당시 보마르세가 평생을 깊은 소속감을 지니고 “꾸루실료”로 참여했던 예수회가 불법단체로 지정 되면서 갈곳을 잏었던 심정이 희곡에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p>
<p>예수회의 교육 철학이 보마르셰의 문학, 특히 &#8216;피가로&#8217;라는 인물에 어떻게 투영되었을까?<br />
예수회 교육의 핵심 지침인 &#8216;라티오 스투디오룸&#8217; (Ratio Studiorum)은 학생들의 수사학적 능력과 대중 앞에서의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 학교 연극(School Drama)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br />
피가로의 그 유명한 긴 독백(Monologue)들은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청중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회 교육이 강조한 &#8216;설득의 수사학&#8217;과 궤를 같이한다.</p>
<p>&#8220;인생은 연극이다&#8221;라는 관점은 예수회 교육의 특징 중 하나였다. 보마르세가 복잡한 인물 관계와 변장, 반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그가 예수회식 &#8216;무대 중심 교육&#8217;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훌륭한 복선이다.<br />
예수회는 인간의 원죄와 함께 자유의지(Free Will)와 인간의 능력을 통한 신의 영광을 강조했다.<br />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로서 피가로는 신분이라는 &#8216;주어진 운명&#8217;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지능과 노력으로 길을 만들어갔다. &#8220;태어나는 수고만 한 귀족&#8221;에 대비되는 피가로의 역동성은 &#8220;인간의 구원에는 자신의 행동이 많은 부분 책임져야 하는 측면이 반드시 존재한다&#8221;는 예수회적 인본주의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p>
<p>예수회는 엄격한 율법주의보다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최선의 도덕적 선택을 고민하는 &#8216;결의론(Casuistry)&#8217;으로 유명했다. 피가로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발휘하고 작은 선의의 거짓말로 더 큰 정의(사랑의 결실, 약자 보호)를 이루는 모습은 이런 철학적 배경과 맞닿아 있었다.<br />
보마르세의 작품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관찰이 담겨 있다. 이는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8216;활동 중의 관상&#8217;이라는 예수회적 태도가 문학적으로 승화된 모습이다.<br />
바로 &#8216;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8217;과 내면의 탐구였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장면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행을 강조한다.</p>
<p>존 캐럴이야 말로 그 관상기도에 빠져 있었다.</p>
<p style="text-align: left;">&#8220;찰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기도실에서 기도 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어. 내 기도 속에서 펼쳐지는 갈릴리 호스가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생생한 모습은  이세상 그 어떤 것 보다도 나를 차분하면서 도 그윽한 만족감에 휩쌓이게 했었지, 그러니 내가 이 길 사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겠니?&#8221;</p>
<p style="text-align: left;"> 그랬다. 4촌 동생인 찰스 뿐 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 신부의 길을 걷게 되었느냐고 묻곤 했었다. 그때만다 존은 관상기도를 내 세웠다.   존은 기도 하면서 식민지의 현실에서 특히 자신의 고향 메릴랜드의 현실에서 천주의  가르침이 고단한 현실을 개선하고 개척해 나가는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회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고 안배였다.  그의 줄기찬 기도는 신앙은 개인차원에서 출발하지만 이내 공동체를 이루고 종국에는 그 공동체가  현실에서 천주의 일을 해나간다는 개안의 기도 였던 것이다.</p>
<p>존 캐럴이 신앙적 성찰을 통해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찾았다면, 보마르셰는 같은 교육의 뿌리에서 &#8216;인간의 평등과 자유&#8217;라는 세속적 결론을 이끌어냈고 자신이 그길에 보탬을 주는 것이 자신 존재의 이유라고 여겼던 것이다.</p>
<p>보마르셰와 존케럴은 루이 르 그랑의 복도에서 창밖을 보면서 인간의 자유를 생각했고 라틴어 고전 호메로스의 시, 키케로의 수사학 세네카의 비극을 공부하면서 역사에 대해 그리고  권력과 도덕에 대해 또 진정한 신앙에 대해 논쟁하곤 했다.</p>
<p>거기에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견하던 예수회의 특성상, 선교사 출신이 꽤 있었던 교수진의 수업에는 이국적인 문물과 정보가 넘쳤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보마르세가  대서양 건너 미국의 독립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고 존 과 찰스가 국제적 안목을 폭 넓게 가질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p>
<p>존 캐럴과 피에르 보마르세, 두 인물이 비록 나이와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교육 커리큘럼(고전 문학, 수사학, 변증법)을 거치면서  그들이 &#8216;자유&#8217;라는 가치 아래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강력한 정신적 유대감이 형성 됐던 것이다.  루이 르 그랑의 공기는 두 사람을 양 측면에서 서서히 변화 시켰지만 종국에는 하나로 굳건해 졌던 것이다. 그런점에서 보마르세가 창조해낸 독특한 캐릭터 피가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p>
<p>(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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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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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27 Apr 2026 00:00:11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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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2&#62; &#160; 안 동일 작 &#160; 부흥이 한때 강성했거나 찬란했던 과거가 다시 일떠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캐럴 형제가 미국 가톨릭에 끼친 공헌은 발흥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싶다.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소수였음에도 독립대열에 앞장섰고 대륙군에 적극...]]></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2&gt;</h4>
<p>&nbsp;</p>
<h5>안 동일 작</h5>
<p>&nbsp;</p>
<p>부흥이 한때 강성했거나 찬란했던 과거가 다시 일떠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캐럴 형제가 미국 가톨릭에 끼친 공헌은 발흥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싶다.<br />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소수였음에도 독립대열에 앞장섰고 대륙군에 적극 참여했다. 식민지 전체 인구의 2% 정도 밖에 안되는 숫자였지만 그 기여도는  막강했다.</p>
<p>특히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가톨릭 신자 찰스 캐롤의 종교적 영지 라고도 할 수 있었던  메릴랜드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은 혁명 대의에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캐럴과 교분을 맺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 등 혁명의 지도자들이 나서  이들의 동참을 장려했다.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 등지의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세력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이들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지역 민병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륙군에서 복무했는데  그들은 혁명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 으로써 영향력과 발언권을 증대 시켰던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1775년 당시 만연했던 반가톨릭 축제인 &#8216;가이 포크스 데이&#8217;를 군대내에서 엄격 금지하며 가톨릭 신자들을 혁명군으로 포용했다. .</p>
<p>당시 가톨릭 신자들이 독립 대열에 뛰어든 큰 이유는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과 함께 영국 본국과 식민지 정부들의  억압적인 종교 정책에서 벗어나는 종교적 자유를 바랐던 측면이 강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p>
<p>실제로 이들의 바람은 희생과 헌신으로 뜻을 이루게 된다.<br />
독립전쟁이 승리로 귀결된 직 후  존 캐롤이 미국 최초의 토착 가톨릭 주교가 되면서 미국 가톨릭 교회의 쳬계적 토대가 마련된다. 그무렵 제정된 미국 헌법에 따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면서, 가톨릭은 개신교 위주의 미국 사회에서 제도적 종교 자유를 인정받게 된다.<br />
미국 독립 전쟁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8216;영국의 피지배자&#8217;라는 위치에서 &#8216;새로운 민주 공화국의 시민&#8217;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br />
이같은 가톨릭의 발흥 중심에 캐럴 가문이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p>
<p>특히 미국 최초의 주교였으며 이후 대주교가 된 존 캐럴의 인생 여정은 신앙과 교육, 그리고 남다른 , 애국 애민 정신의 결합이었다.<br />
그는 1735년 메릴랜드주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술한대로 당시 메릴랜드 식민지는 가톨릭 교육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부친은 그를 유럽으로 건너가 가톨릭 교육을 받게 했다. 찰스 캐럴도 마찬가지다.</p>
<p>존 캐럴과 그의 사촌 찰스 캐럴이 명문 루이-르-그랑(Louis-le-Grand)에 입학하기 전, 프랑스 북부에서 라틴어와 기초 학문을 닦았던 곳은 바로 생토메르(St. Omer)다. 그곳에서 그들이 다녔던 학교는 영국 예수회가 설립한 생토메르 콜라쥬(College of St. Omer)였다. 존과 찰스가 이 학교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5~6년 정도다.<br />
기록에 따르면 1748년 존 캐럴이 13세 때,  찰스 캐럴이 11세때 함께 메릴랜드를 떠나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 지방의 생토메르에 도착해 그해 가을에  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생토메르 콜라쥬는 당시 영국계 가톨릭 엘리트들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위치가 그랬고 교수진이 그랬다.</p>
<p style="text-align: left;">이곳에서 두 사람은  예수회 교육 시스템 아래서 라틴어 수사학, 고전 문학, 그리고 가톨릭 철학의 기초를 다졌다.<br />
1753년 존 캐럴은 생토메르에서의 과정을 마치고 더 높은 수준의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파리의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이태 뒤 찰스 캐럴도 뒤 따른다.  이곳에서 이들은 예수회 교육의 정수를 체득하고 운명의 벗 피에르 보마르세를 만난다. 이곳에서 특히 존은  한단계 높은 신학적 믿음과 철학적 사유와 논리학을 익히며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 하게 됐고 그  자질을 갖추게 된다.<br />
존 캐럴은 1761년 벨기에의 세인트 오메르로 떠나 예수회 신학교로 진학해  수사가 되었고, 1769년 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존 이 다녔던 학교가  벨기에의 와튼(Watten)신학교다. 이곳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반면, 사촌 찰스 캐럴은 파리에 계속 머무르다  몇년 뒤 영국으로 가 법학과 정치학 등을 공부하며 훗날 정치인이 될 준비를 하게 된다.<br />
존이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결심에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감을 넘어, &#8220;자유로운 국가에서의 가톨릭&#8221;이라는 비전이  자신 내에서 싹텄던 것도 큰 몫을 했다.<br />
존 캐럴은 신앞에서의 만인 평등이란 예수회의 철학을 바탕으로 &#8216;신앙의 제도화&#8217;를 꿈꿨던 지성인이었다. 그의 고향 메릴랜드의 사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p>
<p style="text-align: left;">&#8220;찰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기도실에서 기도 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어. 이세상 그 어떤 것 보다도 나를 차분하면서 도 그윽한 만족감에 휩쌓이게 했었지, 그러니 내가 이 길 사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겠니?&#8221;</p>
<p style="text-align: left;">4촌 동생인 찰스 뿐 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 신부의 길을 걷게 되었느냐고 묻곤 했었다.  존은 기도 하면서 식민지의 현실에서 특히 자신의 고향 메릴랜드의 현실에서 천주의  가르침이 고단한 현실을 개선하고 개척해 나가는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회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고 안배였다.  그의 줄기찬 기도는 신앙은 개인차원에서 출발하지만 이내 공동체를 이루고 종국에는 그 공동체가  현실에서 천주의 일을 해나간다는 개안의 기도 였던 것이다.<br />
한편 이들의  프란스인 친구 보마르세는 같은 교육을 받았으나 이를 &#8216;정치적 수완과 예술&#8217;로 승화시켜 왕실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어 자신의 조국 프랑스와 친구의 나라 미국을 뒤 바꾼 풍운아의 길을 걸었다.<br />
세 사람이 공유했던 &#8216;예수회 철학&#8217;은 논리적 사고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강조했기에, 한 명은 사제로, 한명은 정치인으로 한 명은 책략가이자 극작가로 각기 다른 꽃망울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br />
존 캐럴과 찰스 캐럴의 두 4촌의 이야기는 파도파도 흥미진진하다, 여기에 보마르세까지 가세하면 그 깊이가 더 해진다.</p>
<p> 엄밀히 따지면 존의 아버지와 찰스의 아버지는 6촌(Second Cousins) 관계다. 하지만 당시 캐럴 가문의 유대감이 워낙 강했고, 유난히 두 집안이 절친 했기에 대부분 &#8216;사촌&#8217;으로 이해 하고 있고 그렇게 통용 된다.<br />
존 캐럴의 아버지 대니얼 캐럴 (Daniel Carroll I, 1696–1751)은 아일랜드에서 메릴랜드로 이주했던 캐럴 가문의 방계 혈통이다. 찰스 캐럴의 아버지 &#8216;아나폴리스의 찰스 캐럴&#8217; (Charles Carroll of Annapolis, 1702–1782)이 우리로 말하면 나이는 몇살 어렸지만 가문의 장손 이었다. 종가 집인 찰스의 직계를 &#8216;도허래건(Dohoregan)&#8217; 가문으로 지칭하는데 알다시피 메릴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다.</p>
<p>두 사람의 할아버지들이 형제 관계였기에, 존과 찰스는 항렬상으로는 8촌(Third Cousins)이 되지만, 실제로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함께 유학을 떠났고 평생을 함께 했다.</p>
<p>존의 아버지인 대니얼 캐럴은 찰스의 집안처럼 거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는 아니었지만, &#8216;성공한 상인&#8217;이자 신망받는 가톨릭 신사&#8217;였다. 그는 어퍼 말보로(Upper Marlboro) 지역에서 큰 상점을 운영하며 부를 쌓았다. 당시 가톨릭 신자로서 정치적 제약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상거래를 통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p>
<p>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공직에 나가지 못하는 한계를 자식들이 신앙과 교육을 통해 극복하기를 원했다. 존과 그의 형 대니얼(훗날 미국 헌법 제정 위원)을 어린 나이에 유럽으로 유학 보낸 결단력을 발휘 했다.</p>
<p>가톨릭 박해 속에서도 집안에서 은밀히 미사를 드리고 신앙을 지켰던 독실한 인물이었다. 존 캐럴이 훗날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1751년 사망), 그가 심어준 신앙적 뿌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br />
존과 다니엘의 집안은 &#8216;실용적이고 성실한 중산층 가톨릭&#8217;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부와 권력욕을 숨기지 않았던 가진 찰스의 아버지 &#8216;아나폴리스의 찰스&#8217;와 대비되어 존은 아버지로부터는 &#8216;세상과 소통하는 법과 겸손함&#8217;을, 찰스는 아버지로부터 &#8216;가문과 신앙을을 지켜야 한다&#8217;는 현실적  수완과 &#8216;정치적 야망&#8217;을 물려 받았다고 얘기된다.</p>
<p>잠깐 이름이 언급 됐는데 여기서 또한 명의 걸출한 캐럴이 등장 한다. 바로 존 캐럴의 친형 대니얼 캐럴(Daniel Carroll II, 1730–1796)이다.<br />
그 역시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데 그래서 대니얼은 &#8216;록 크리크의 대니얼(Daniel Carroll of Rock Creek)&#8217;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존 캐럴이 종교계의 거물이 라면 대니얼은 세속 정치권의 거물로서 아주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p>
<p>대니얼 역시 동생 존보다 앞서 생토메르 콜라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742년부터 1748년까지 생토메르에서 공부했다. 동생 존 캐럴과 사촌 찰스 캐럴이 생토메르에 막 도착했을 때, 대니얼은 공부를 마치고 막 메릴랜드로 돌아가려던 시기였다. 다니엘은 더 이상의 천주교 스쿨 유학을 하지 않았고 메릴랜드로 귀국했다.<br />
대니얼 캐럴 그는 미국 건국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br />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문서인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과 미국 헌법(U.S. Constitution) 모두에 서명한 단 5명 중 한 명 으로 건국 주역 (Founding Father)의 한사람으로 꼽힌다.<br />
가톨릭 신자로서 공직 진출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온건한 성품 덕분에 메릴랜드 대표로 대륙회의에 참여 했고 후일  제1차 연방 하원의원에도 선출되었다. 그는 급진적인 혁명가라기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정치인이었다. 동생 존 캐럴이 종교적 자유를 위해 싸울 때, 그는 법적·정치적 테두리 안에서 가톨릭교도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다.</p>
<p>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대니얼은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아 번창시켰고, 동생 존 캐럴이 사제 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정치적 뒷배가 되어주었고 역시 4촌으로 통용 되는 동생 찰스를 위해서도 많은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br />
찰스가 뜨거운 열정과 친화력을 지닌 가진 혁명가라면, 형 대니얼은 차분하고 치밀한 설계자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행정가 이기도 했다.</p>
<p>대니얼 그는 수도 워싱턴 D.C. 탄생의 주역이기도 하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 수도(District of Columbia) 건설을 담당하는 3인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워싱턴 D.C.의 많은 부지가 당시 캐럴 가문의 소유이기도 했다. 존 캐럴이 루이-르-그랑에서 철학적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이미 메릴랜드에서 가문의 사업과 정치를 챙기던 형 대니얼로부터 오는 편지속의 조언들은 그를 키운 자양분 이었다.</p>
<p>찰스 캐럴이 변호사 교육을 받았고 대니얼과 함께 대륙회의서 법률쪽 입범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법률가라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대니얼 캐럴의 공식적인 이력은 변호사보다는 &#8216;정치인(Statesman)&#8217;이자 &#8216;사업가(Merchant)&#8217;였다.<br />
그는 생토메르 유학 시절에 인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가문의 거대한 상업 제국과 토지를 관리하는 상인(Merchant)이자 지주(Planter)로서의 삶에 먼저 집중했다.</p>
<p>반면 찰스는 런던의 명문 &#8216;이너 템플(Inner Temple)&#8217;에서 본격적인 법률 공부를 한 법률 전문가였다. 또한, 캐럴 가문 중에 변호사로 활동한 동명이인들이 많아 기록이 섞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p>
<p>하지만 대니얼은 헌법 제정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의 위원이었고, 법을 만들고 심의하는 입법가로서 평생을 살았기에 법률적 지식은 당대 어느 변호사 못지않게 해박했다. 그는 변호사라는 자격증 이상의 &#8216;법적 사명감&#8217;을 가진 인물이었다.</p>
<p>이른바 &#8216;법을 배운 상인 출신 정치가&#8217;였던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91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original.jpg" alt="" width="600" height="344" /></p>
<p>그는 상업을 통해 다진 실리적인 감각과 역시 예수회 교육으로 다진 논리력을 갖춘 인물이다. 찰스가 원칙에 충실한 법률가라면, 대니얼은 정치적 타협과 중재에 능한 노련한 조력자의 모습이었다.</p>
<p>대니얼 역시 &#8220;가톨릭은 공직에 나갈 수 없다&#8221;는 당시의 법적 금기를 몸소 겪으며 그 벽을 허물기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p>
<p>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다.<br />
&#8220;존, 네가 하느님의 법을 수호한다면, 나는 인간의 법을 새로 써서 우리 가문과 신앙이 숨 쉴 땅을 만들겠다.&#8221;</p>
<p>언젠가 언급 했는데 캐럴가에 정식 변호사가 있기는 하다.<br />
바로 &#8216;배리스터 찰스 캐럴&#8217; (Charles Carroll, Barrister, 1723–1783)이다.<br />
그는 캐럴 가문의 방계이자 아주 독특한 선택을 한 인물.<br />
같은 이름의 찰스 캐럴이 &#8216;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택한 주인공 이라면 그는 &#8216;세속적 성공을 위해 개종을 택한 인물&#8217;이다.<br />
배리스터 찰스의 아버지인 닥터 찰스 캐럴(Dr. Charles Carroll) (그 집안 사람들 찰스라는 이름 너무 좋아 한다.)이 먼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로 개종했다.<br />
언급한 대로 가톨릭교도는 땅은 가질 수 있었지만, 법을 집행하거나 공직에 나갈 수 없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가문의 사회적 상승을 위해 개종을 결심했고,(이 과정에서 4촌 형제들인 찰스와 다니엘과 상의 했다고 알려져 있다.) 개종 덕분에 아들 찰스는 영국 이튼(Eton)과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p>
<p>그는 이후 런던의 &#8216;미들 템플(Middle Temple)&#8217;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정식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당시 메릴랜드에 &#8216;찰스 캐럴&#8217;이라는 이름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다른 친척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 뒤에 항상 &#8216;배리스터(Barrister)&#8217;를 붙였다. 배리스터(Barrister)는 법정 변호사를 뜻한다.</p>
<p>주인공 찰스 캐럴과의 와는 먼 친척 사이였다. 배리스터 찰스는 주인공 찰스보다 14살이 많았고, 주인공이 유럽에서 귀국했을 때 이미 메릴랜드 정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배리스터 찰스는 개종 덕분에 의회 의원이 될 수 있었지만, 주인공인 &#8216;캐럴턴의 찰스&#8217;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남으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받아 &#8216;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8217;이라는 필명으로 활약 할때 그의 은근한 뒷배가 되어 줬다.</p>
<p>베리스타 캐럴, 그는 훗날 메릴랜드의 첫 번째 주 헌법을 기초하는 데 참여했다. 신앙을 버린 대가로 얻은 &#8216;법률적 권력&#8217;을 그는 사제인 친척 존 캐럴과 독립운동가인 찰스 캐럴을 은밀히 돕는 신의 도구로 활용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과 확실한 승리와 독립을 보지 못한채 83년 세상을 떠났다. 베리스타 찰스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회 신자였지만 그역시 가톨릭 특히 예수회의 신앙을 높이 평가 하면서 존 캐럴의 목회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예수회 철학은 캐럴가 전체의 제의 이기도 했던 것이다.</p>
<p>말 한대로 존과 찰스가 대서양을 건너 독립운동이라는 거대한 불길에 뛰어든 것은, 단순한 정치적 결단이 아니라 그들이 체득한 예수회적 사유의 발현으로 보아야 한다.<br />
예수회 적 사유의 핵심은 &#8216;세상 속의 관상가 (Contemplative in Action)&#8217;라는 표현에 함축돼 있다.<br />
수도원 안에 숨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8220;가장 치열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8221;이다. 이런 예수회의 철학이 다소 극단적으로 발현 됐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20세기 남미의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에 예수회의 영향력과 참여가 거의 전부 였다는 말에서 쉽게 이해 될 수 있다.</p>
<p>존 캐럴에게 독립 전쟁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8216;자유의지&#8217;가 억압받는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길(Ad Maiorem Dei Gloriam, AMDG)이라고 믿었던 것이다.</p>
<p>한마디로 존은 성체 조배를 할때 마다, 관상 기도를 할때 만다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압제 소식이 귓전을 맴돌았고 그것을 &#8216;세속의 소음&#8217;이 아닌 &#8216;응답해야 할 부르심&#8217;으로 느꼈던 것이다.</p>
<p>그는 성신 수련의 핵심인 &#8216;식별&#8217; (Discernment)을 통해서도 이것들이  선한 영의 인도라는 것을 확신했다. 식별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무엇이 선한 영의 인도인지 분별하는 과정이다. 신이 부여한 양심의 자유다.</p>
<p>찰스 캐럴 역시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조차 없던 메릴랜드의 현실이 예수회 교육을 통해 배운 &#8216;양심의 우위&#8217;에 입각한 식별로 단연코 신의 뜻에도 위배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잃을 위험(반역죄)을 무릅쓰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만든 동력도 거기에서 찾았다.</p>
<p>그만큼 루이 르 그랑의 가르침은 이들에게 일생을 관통하는 신앙적 철학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루이-르-그랑의 지적 토양은 한마디로&#8217;인문주의적 가톨릭&#8217;이라는 말로 집약 된다.<br />
그곳에서 그들 찰스 존 그리고 보마르세는 라틴어와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며 &#8216;폭정에 저항할 권리&#8217;를 가르친 토마스 아퀴나스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사상을 접했다.</p>
<p>보마르세와의 접점은 무얼까?  보마르세의 자유분방함과 존 캐럴의 경건함은 극단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8220;기존 체제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눈&#8221;이라는 뿌리는 같다. 보마르세가 연극을 통해 구체제를 풍자했다면, 존 캐럴은 교회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셈이다.</p>
<p>그들이 &#8220;왜 편안한 귀족의 삶이나 평온한 사제의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했는가&#8221;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p>
<p>&#8220;자네는 하느님이 성당의 제대 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분은 지금 보스턴 앞바다의 차가운 물결 속에도, 자유를 갈망하는 식민지 청년의 거친 숨결 속에도 계신다네.&#8221;<br />
젊은 시절 존이 보마르세에게 한 말이다.</p>
<p>보마르세에 대해  대해 조금더  알아보자.<br />
피에르 보마르세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는 시계공의 아들에서 국왕의 최측근이자 혁명가로 변신한 드라마틱한 삶의 인물이다.   그는 1732년 파리의 시계공 가문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손재주로 시계의 &#8216;탈진기(Escapement)&#8217;를 발명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루이-르-그랑에서 존 캐럴과 같은 시기에 교육을 받으며 상류 사회의 언어와 철학, 그리고 권력의 생리를 배웠다. 이는 훗날 그가 극작가로서 사회를 풍자하는 밑거름이 됐다.</p>
<p>시계 발명으로 국왕의 눈에 띄어 궁정에 출입하게 되었고, 뛰어난 하프 연주 실력으로 국왕의 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입지를 굳혔다.  루이 16세가 등극하자 비밀 회계 관리인이자 정보원으로 하면서 국왕의 전퍽적인 신뢰를 얻었다.</p>
<p>미국 독립 전쟁 당시, 그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 왕실의 의중을 읽고 &#8216;로드리그 오르탈레스 공사&#8217;라는 유령 회사를 세워 미국에 무기를 공급하는 막후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루이 16세의 실질적인 대미 정책 자문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p>
<h4><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h4>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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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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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17 Apr 2026 19:53:02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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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1&#62; 안 동일 작   그날 존 캐럴 신부는 여관의 잉크와 펜을 빌려 피에르 보마르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후 보마르세는 확실하게 미국편에 서서 당시 정황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도박을 결행 하게 되고 이 도박은 세계 역사를 바꾼 기폭제가 된다.   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1&gt;</h4>
<p><strong>안 동일 작</strong></p>
<p><span dir="LTR" lang="en-US">  그날 존 캐럴 신부는 여관의 잉크와 펜을 빌려 피에르 보마르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후 보마르세는 확실하게 미국편에 서서 당시 정황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도박을 결행 하게 되고 이 도박은 세계 역사를 바꾼 기폭제가 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 도박이 바로 76년 가을 부터 77년 봄 까지 진행된 미국에 대한 다량의 탄약과 머스킷 장총 해상 공수 작전이었다. 이 방대한 공수 작전의 단초를 존 캐롤의 편지가 열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사일러스 딘이 프랑스 무기 반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루이 16세의 재정 대리인 격인 피에르 보마르세 (아래 사진) 를 처음 만난 때는 76년 7월 초로 되어있다. 3월에 파리에 도착한 딘이 7월에서야 보마르세를 만났다는 것은 의아한 대목인데 이 과정에 존 캐럴 신부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보마르세는 75년 부터 신임왕 루이 16세와 정권 실세 들의 묵인과 비호 아래 소량 이었지만 무기류를 영국의 눈을 피한 밀거래로 스페인령 카리브 연안을 통해 식민지에 반출하고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때문에 딘은 처음부터 보마르세와의 접촉을 염두하고 파리에 갔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착 며칠만에 보마르세에게 접근 할수 있는 루트가 마땅치 않다고 보고를 했고 보마르세와 각별한 사이였던  캐럴 신부가 보고의 현장에 우연히 가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지만 신의 안배 였다고 밖에 설명 할 길이 없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무튼 7월에 처음 만나 의기가 투합해 전폭적인 합의를 이끌어 낸  보마르세와 딘은 이내 머스킷 총 2만 7천 정, 대포 200문, 화약 2만 파운드 에 달하는 방대한 물량의 무기를 수배해 선적 준비를 마쳤고 이 무기들은 차근차근 미 대륙으로 유입됐다. 당초 프랑스 국왕은 보마르세에게 100만 리브르 정도의 예산을 허락 했지만 보마르세와 딘은 무기 공수에 3백만 리브르를 사용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 무기들을 바탕으로 대륙군은 1777년 10월의 뉴욕 사라토가 전투에서 개전이래 최초로 영국 정규군 대 부대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이 퀘백에서 내려온 버고 장군의 연대 규모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사라토가의 대승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 프랭클린의 예지몽 대목에서도 언급 했듯이 사라토가  전투야 말로 독립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전쟁의 향방을 바꿨으며, 망설이고 있었던 프랑스를 참전하게 해 독립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는 토대가 됐다. 이 승리 직후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을 맺었고 스페인은 동맹까지 맺지는 않았지만  함께 대영 선전포고를 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승리의 수훈갑 </span><span dir="LTR" lang="en-US"> 프랑스제 무기들이 다량으로 본격적으로 대륙으로 들어 오게 했던 결정적 단초가 그 한장의 편지였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존 케럴 신부는 그날 &#8216;몽쉘 피에르” (친애하는 벗 피에르)로 시작하는 불어로 쓰여진 편지를 쓰기전  페리 터반 뒷마당에 나가 절절한 기도를 올렸다. 기도라기 보다는 예수회 영신수련을 짧지만 굵게  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실제 예수회 사제들은 기도(Prayer) 라는 말보다 수련(Exercises)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존 캐럴이  18세 때인 1750년 파리에서 수도자로 예수회에 가입한 이래 몸에 밴 이나시오 영성 기도, 예수회식 관상기도 였다.  예수회에는 독특하고 구체적인 관상 기도법이 있었다. 바로 &#8216;영신수련&#8217; 혹은 그 안에서 행해지는 &#8216;관상&#8217;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영신수련 (Spirituall Exercises)은  예수회의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정립한 기도 체계다. 보통 예수회 사제 들이 침묵 속에서 며칠간, 혹은 한 달간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기도를 말할 때 &#8220;영신수련을 한다&#8221;고 표현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수회 관상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8216;상상력&#8217;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눈을 감고 비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 장면으로 직접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를 이냐시오식 관상 (Ignatian Contemplation)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한 장면을 눈앞에 그리듯 상상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의 공기, 냄새,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느끼며 그 현장 속에 자신이 함께 있다고 가정하고 기도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페리 터번의 뒷마당, 델라웨어 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녹음이 막 지기 시작한 수목의 내음을 맡으며 예수회 사제로서 존 캐럴은 &#8216;영신수련&#8217;의 원리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상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사실 사제로서 이런 종류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실 정치 싱황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아닌가. 그리고 무엇 보다 보마르세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그 재기 넘치는 예술가 친구를 피비린내 나는 지금 전쟁의 보급관으로 만들려 하는가? 이것이 사제의 일인가, 아니면 정치인의 일인가?&#8221; 하는 자책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벤자민과 모리스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주님, 저 재기 넘치는 극작가이자 여자 처럼 곱상하게 생긴 나의 친구 보마르세를 이 거대한 불길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그가 파멸한다면 그 죄는 누구의 것입니까?&#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그러나 이 서신이 억압받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자유의 복음이 될 수 있다면, 저의 미안함과 그의 위험마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도구로 쓰소서.&#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주님, 이 잉크로 한 인간의 희생을 담보로 한 자유를 써 내려가려 합니다. 만약 이 서신이 뜻 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그것은 나의 오만일 것이나, 만약 성공하여 새 나라가 선다면 그것은 당신의 섭리입니까?&#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사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듯 한  이 일이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보마르세 개인의 희생을 넘어, 더 큰 인류의 보편적 선을 위한 길임을 맏으면서 펜을 들기로 작정 했기에 이날의 관상 기도는 이를 천주께 아뢰고 힘을 얻기 위한 기도, 수련 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8216;세상 속으로 파견된&#8217; 예수회 사제의 숙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초 캐럴 신부는  마르코 복음 4장 30 절 겨자씨의 비유 대목과 이나 시편 107편 23절 바다를 건너는 자들의 기도 대목을 이날 수련의 본문으로 삼으려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성서를 펼쳐 그 대목들을 읽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기랴&#8230; 그것은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다.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8230;&#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지금 자신이 쓰려는 편지 한 통이 작은 &#8216;겨자씨&#8217;라고 생각했다.  이 종이 한 장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항구에 닿고, 거기서 대포와 화약이라는 &#8216;큰 가지&#8217;가 되어 너무도 어려운 형편의 대륙군들을 덮어주는 모포와 방패가 되는 미래를 시각화 하려 했다. 잉크 냄새 속에서 화약 냄새를 미리 맡는 묵상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시편 107편 이렇게 시작된다.  &#8220;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서 넓은 바다에서 장사하는 이들은&#8230; 주님께서 명령하시어 폭풍을 일으키시니&#8230; 그들이 고요해진 바다를 보고 기뻐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이끄셨도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대서양 횡단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캐럴은 바다를 오가는 전령의 손에 들려 보낼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며, 거친 파도의 차가운 물살과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청각적으로 묵상하려 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인 친구 보마르셰가  &#8216;하느님이 예비하신 항구&#8217;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눈을 감았다. 겨자씨가 바람에 날려 갈릴리 벌판으로 뿌려지는 모습을 상상 하려는데 겨자씨가 날아간 곳은 영롱한  십자고상이 있는 작은 기도실이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어둡고 무거운 목재 향과 촛불 냄새가 밴, 공간이었다.  정면에는 고난 속에서도 평화로운 표정을 지은 상아색 예수 고상이 걸려 있다. 수백 년 동안 닦아온 오크나무 의자의 매끄러운 기름 냄새, 그리고 아침 미사 때 태우고 남은 유향(Frankincense)의 은은한 잔향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이 냄새야 말로 존 캐럴에게는 &#8216;영혼의 안식처&#8217; 냄새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두 소년이 기도실의 앞 쪽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종이를 펴놓고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를 외우고 있었다.  아모, 아마스, 아마트  Amo, Amas, Amat&#8230; 바로 루이 르 그랑 콜레쥬 본관 2층 구석  소 채플룸에서  존 캐럴 자신과 피에르 보마르세가 라틴어 격변화를 외우지 못해 교사 신부로 부터 골방에서 외울 때 까지 나오지 말라는 벌칙을 받고 이를 시행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30년 전의 광경 아닌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광경이다. 문득 캐럴 신부는 보마르세 에게도 지금 이순간 주님의 훈향이 임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두 사람은 자주 라틴어 선생한테 공부 못한다고 혼나면서 벌을 서야 했는데 예수고상이 있는 체플룸에만 들어 가면 그토록 평온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서로에게 몇번이고 다짐하듯 확인한 일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 평온함이 계속되던 어느날 존은 피에르에게 자신의 결심을 고백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피에르, 나는 결심했어, 예수회에 입회해서 수도자의 길을 걸으려 해”</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그렇구나 존, 나도 문득문득 수도자가 되고 싶은데 난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아.  너의 용기가 너무 부럽다 &#8220;</span></p>
<p><span dir="LTR" lang="en-US"> 보마르세도 예수회 신앙에 경도 돼 있었다. 그만큼 예수회 라틴어 학교의 가르침은 수승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루이 르 그랑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명성 높은 예수회 교육기관으로, 학교 건물 안에 독립된 대성당(Grand Chapel)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들이 벌을 서거나 일상적으로 들어가 평온함을 느꼈던 곳은 대성당보다는  더 은밀하고 집중된 기도가 가능한&#8217;학생 전용 소경당(Small Chapel/Oratory)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소 채플룸은 창이 높고 좁아, 오후가 되면 빛이 한 줄기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와 고상의 어깨에 머문다. 낙제점 때문에 혼나고 기가 죽은 두 소년에게 그 빛은 마치 &#8216;괜찮다&#8217;고 말하는 하느님의 손길처럼 보였다.  라틴어 격변화에 서툴러 무릎을 꿇은 두 소년 위로, 낡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먼지 섞인 빛, 그 빛 속에서 존은 장차 자신이 가야 할 좁은 길을 보았고, 보마르세는 그 빛이 빚어내는 극적인 음영 속에서 생의 가장 순수한 막(Scene)을 목격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소년 존 캐럴. 그는 그곳에서 &#8216;순명(Obedience)&#8217;의 원형을 보았던 것이다. 질서 정연한 채플실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세속적 욕망과 예술적 기질이 넘치던 소년 보마르세에게 이 공간은 역설적으로 &#8216;탈출구&#8217;였다. 세상의 복잡한 규칙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과 절대자만이 마주하는 그 순간의 순수함에 경도되었던 것.</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나도 수도자가 되고 싶다&#8221;는 그의 고백은, 그 정적이 주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가적 선망이었을지도 모른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파리 시내의 마차 소리와 복도의 발걸음 소리가 두꺼운 석조 벽에 가로막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오직 두 소년의 고른 숨소리와 낡은 기도서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그 &#8216;절대적 침묵&#8217;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 되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존은 자신의 목소리 마저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듯한 고독 속에서,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 세밀한 음성을 들었다. 처음에는 뜻 모를 음성이었지만 마음이 평온해 지는 음성이었고 나중에는 고요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것은 &#8216;어쩔 수 없이&#8217;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을 듣지 않고는 1초도 더 살아갈 수 없는 갈급함에 가까워 졌고 존은 분연히 수도자 순명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1752년 존 캐롤이 예수회에 정식 가입할 때 4촌인 찰스와 함께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줬던 친구가 보마르세 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추억의 르그랑 소 채플룸에서 시작된 관상은 캐럴의 처음 의도 대로 황의 겨자씨와 바다의 폭풍으로이어졌고 종국에는 십가 소상의 찡그리고 있었지만 온화한 예수의 얼굴로 끝을 맺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러면서 존 캐롤은 편지의 작성이 주님의 음성이라고 식별 했고 차분하게 그날 관상의 내용을 써 내려 갔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은 이날 문제의 편지를 쓰기 전에  영신수련에서 강조 되는 &#8216;영적 식별&#8217;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내친김에 예수회의 영성에 대해 좀더 알아 보가로 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예수회 영성, 좁혀 말하면 영신 수련이야 말로 이 글을 관통하는 수승한 종교 철학이고 기도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천주교, 한국의 천주교 공히 예수회에 의해 전파 됐고 탄압을 겪었으며 융성을 이루기도 했다는 사실은 누차 강조한 바 있다.   한국 예수회 안내 팜프릿을 상당부분 참조 했다는 것을 밝혀 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수회 영성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른 전통적인 기도와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독특한 차별점을 갖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16;가장 큰 특징은 언급 했듯이 머릿속으로 성서의 장면을 생생하며 그리는 상상 기도다. &#8216;이냐시오식 관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단순히 성서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오감을 동원해 성서 속 현장의 소리, 냄새, 풍경을 느끼며 자신을 그 장면 속 인물로 투영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인간의 인지 능력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과 &#8216;친구처럼&#8217; 대화하는 실재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기도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07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Beaumarchais.jpg" alt="" width="550" height="648" /></p>
<p><span dir="LTR" lang="en-US"> 다음은 &#8216;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한다&#8217;는 활동 중의 관상이다.  예수회 영성은 기도를 성당이나 특정 시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관계, 일,  심지어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이 일하고 계심을 찾아내는 활동 중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을 강조한다.  세상을 떠나 고요함을 찾는 &#8216;수도원적 영성&#8217;과 달리, 복잡한 일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8216;현장 중심적 영성&#8217;을 지향한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 다음으로 중시 되는 것이  영적 식별을 위한 &#8216;의식의 성찰&#8217; (Examen)이다. 예수 회원들이 하루에 두 번 반드시 실천하는 성찰 기도(Examen)는 매우 체계적이다.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을 넘어, 하루 동안 내 마음에서 일어난 &#8216;영적 움직임'(위로와 메마름)을 살피며 하느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분별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막연한 은혜를 구하기보다,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Discernment)의 도구로서 기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냐시오 영성에서 &#8216;영적 식별&#8217;은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과 흐름이 &#8216;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선한 영)&#8217; 아니면 &#8216;나를 가로막는 것인지(악한 영)&#8217;를 분별해내는 과정을 말한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냉철하고 이지적인 예수회 철학 (신앙)에서 가장 인간적이 대목이다. 존 캐럴도 여기에 매료 됐다. 착한 영, 악한 영, 로욜라도 하비에르도 이것이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착한 영 나쁜 영의 식별의 유효함은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첫번째로 그 과정을 통해 기도자는  영적 위로 (Spiritual Consolation)를 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위로는 단순히 &#8216;기분이 좋은 상태&#8217;가 아니다. 하느님께 향하는 움직임 속애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열리고 사랑과 희망이 커지는 상태를 말한단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를 들면 사제들은 어려운 사도직 이며 가난한 지역 봉사를 고민할 때, 객관적으로는 힘들고 걱정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한 평화와 용기가 솟아난다고 말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내가 할 수 있을까?&#8221;라는 두려움보다 &#8220;주님이 함께하시니 가보고 싶다&#8221;라는 깊은 확신과 자유로움이 생</span><span dir="LTR" lang="en-US">긴단</span><span dir="LTR" lang="en-US">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에너지가 내면에서부터 차오르는 느낌</span><span dir="LTR" lang="en-US">이랄까.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반대로 </span><span dir="LTR" lang="en-US"> 영적 고뇌</span><span dir="LTR" lang="en-US">와 </span><span dir="LTR" lang="en-US">황폐</span><span dir="LTR" lang="en-US">의 순건을 겪기도 하는데 </span><span dir="LTR" lang="en-US">(Spiritual Desolation) 하느님과 멀어지는 움직임</span><span dir="LTR" lang="en-US"> 이 있게 되면서 </span><span dir="LTR" lang="en-US">마음이 어둡고, 소란스러우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상태다. 이때가 나쁜영이 도래한 때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기도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지루함, 불안, 짜증이 밀려</span><span dir="LTR" lang="en-US">온다.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편하게 살지&#8221;라는 생각이 </span><span dir="LTR" lang="en-US">든다</span><span dir="LTR" lang="en-US">.</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마음이 좁아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span><span dir="LTR" lang="en-US">하면서 </span><span dir="LTR" lang="en-US">과거의 좋은 결심들이 의심스럽게 느껴지고, 무기력함이나 불안한 조급함에 시달</span><span dir="LTR" lang="en-US">리게 된다.  정말 나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진정한 위로의 예는 규율이 엄하고 노동의 강도가 센  입회를 생각하면 떨리기도 하지만, 그 삶을 상상할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8220;가진 것을 놓아도 괜찮겠다&#8221;라는 자유로운 마음이 든다면 이는 선한 영의 이끎일 가능성이 크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거짓 위로</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가짜 기쁨의 예</span><span dir="LTR" lang="en-US">로는</span><span dir="LTR" lang="en-US"> &#8220;내가 수도자가 되면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겠지?&#8221;라는 생각에 흥분되고 우쭐한 기분이 </span><span dir="LTR" lang="en-US">든</span><span dir="LTR" lang="en-US">다. 이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뿌리가 &#8216;자기애&#8217;에 있어 금방 피로해지고 공허해지는 &#8216;악한 영&#8217;의 유혹일 수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너 같은 죄인이 무슨 수도자야? 넌 끝까지 못 버틸걸?&#8221; 같은 비난과 절망적인 생각이 </span><span dir="LTR" lang="en-US">둔다면 이는 </span><span dir="LTR" lang="en-US">황폐함의 예</span><span dir="LTR" lang="en-US">에 해당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이런 생각은 나를 성장시키기보다 주저앉게 만들므로 분별해서 물리쳐야 </span><span dir="LTR" lang="en-US">한</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성 이냐시오(로욜라)는 마음이 어두울 때(황폐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바꾸지 말라고 가르</span><span dir="LTR" lang="en-US">쳤</span><span dir="LTR" lang="en-US">다. 어둠 속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기 때문. 대신 마음이 평온할 때(</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위로기) 내렸던 결심을 꿋꿋이 지키며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span><span dir="LTR" lang="en-US">한</span><span dir="LTR" lang="en-US">다고 강조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이렇게 내 마음의 &#8216;날씨&#8217;를 살피는 법을 익히면, 일상의 사소한 선택부터 인생의 중대한 결정까지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찾아낼 수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영신 수련의  다음은 사도적 열망 &#8216;마지스&#8217; (Magis)다.  예수회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의 더 큰 영광(AMDG)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기도의 결과가 개인의 평안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위한 봉사와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8216;사도적 투신&#8217;으로 연결되도록 돕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하느님의 더 큰 영광 (AMDG &#8211; Ad Maiorem Dei Gloriam) 예수회의 모토인 이 원칙은 선택의 기로에서 &#8220;어떤 것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가?&#8221;를 묻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8216;미국의 독립&#8217;이라는 대의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종교적 자유라는 더 큰 선을 향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를 위험(보마르세의 파산이나 정치적 위협)으로 밀어넣는 것이 과연 &#8216;영광&#8217;에 부합하는지 치열하게 자문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영신수련의 끝은 무관심(Indifference, 번역이 조금 어색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함 정도로 이해 하면 좋다)의 덕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8216;무관심&#8217;은 무책임이 아니라,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을 배제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자신을 열어두는 상태를 말했다. 캐럴의 경우에도  보마르세를 향한 미안함이라는 &#8216;인간적인 정&#8217;과 사명이라는 &#8216;공적인 의무&#8217; 사이에서 자신을 비워내기로 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랬다. 기도를 마친 캐럴은 예수회  &#8216;무관심의 덕&#8217; 상태에 도달해,  &#8216;대의&#8217;를 위한 펜을 들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나의 벗, 피에르(보마르세).</span></p>
<p><span dir="LTR" lang="en-US">지금 자네의 손에 들린 이 종이는 델라웨어 강의 차가운 습기를 머금고 있네. 하지만 이 안에는 불보다 뜨거운 수만 명의 갈망이 담겨 있네.</span></p>
<p><span dir="LTR" lang="en-US">자네는 일찍이 무대 위에서 세상을 조롱하고 정의를 노래했지. 이제 그 무대를 대서양 너머 이 광활한 대륙으로 옮겨보지 않겠나? 로버트 모리스와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네의 그 천재적인 재주가 필요하네. 아니, 재주를 넘어 자네의 &#8216;영혼&#8217;이 필요하네.</span></p>
<p><span dir="LTR" lang="en-US">중략</span></p>
<p><span dir="LTR" lang="en-US">자네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무역이 아니라, 역사가 기록할 가장 거대한 서사시가 될 걸세. 비록 그 길이 가시밭길이고,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도박일지라도 말일세. 사제인 내가 자네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을 용서하게. 그러나 나는 믿네. 자네의 심장이 왕의 금고보다 더 큰 자유를 향해 뛰고 있다는 것을.</span></p>
<p><span dir="LTR" lang="en-US">친구여, 자네의 배에 실릴 것은 화약과 총만이 아니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정의이자, 죽어가는 이 땅의 희망일세. 자네가 이 부탁을 수락하는 순간, 우리는 지상의 친구를 넘어 영원한 대의의 동지가 될 것이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전령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네. 나의 기도가 자네의 결단과 함께하기를.&#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이 편지의 압권은 &#8220;친구를 넘어, 부디 섭리의 도구가 되어주게.&#8221; (프랑스어: &#8220;Plus qu’un ami, soyez l’instrument de la Providence.&#8221;)였다.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자네의 재주를 넘어 자네의 영혼이 필요하네&#8221;라는 대목 뒤에 붙은 이 문장은 보마르세를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8216;신의 계획&#8217; 안에 있는 인물로 격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리고 캐럴은 편지 끝머리에 예수회 모토이자 루이 르 그랑의 교훈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믄구를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크게 썼다.  &#8220;Pour la plus grande gloire de Dieu.&#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분명코  보마르세의 심장을 요동치게 뛰게 할 것이라 확신 하면서&#8230; </span></p>
<p><span dir="LTR" lang="en-US">어린시절 둘은 얼마나 이 말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뿌르 라 플뤼 그랑드 글로아르 드 디외” 무슨 일만 있으면 손을 마주치며 구호처럼 외쳤었다. 프랑스어 운율이 너무도 촣았다. 공식어인  라틴어 Ad Maiorem Dei Gloriam 보다 훨씬 좋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이 보마르세를 만난 것은 10대 중후반 파리의 라틴어 학교 에서 였다.  </span><span dir="LTR" lang="en-US">라틴어 학교(Latin School)&#8217;라는 명칭은 현대의 단일한 학교 이름이라기보다는 당시 중등 교육 기관인 콜레주(Collège)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1750년대 당시 프랑스의 중등 교육은 주로 가톨릭 수도회(특히 예수회)가 운영하는 콜레주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을 &#8216;라틴어 학교&#8217;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육 과정의 핵심이 라틴어였기 때문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단순히 라틴어 회화만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당시의 교육은 자유학과(Liberal Arts)에 기반을 둔 인문학 중심이었다. 고전 언어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여 키케로, 버지릴우스 같은 고대 작가들의 문학을 읽고 분석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수사학(Rhetoric)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이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보마르세의 화려한 대사와 존 캐럴의 설교 능력은 여기서 기초가 닦였다고 볼 수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고학년으로 올라가면 철학 및 신학을 배우는데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다뤘다. 특히 예수회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연극 공연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는 보마르세 같은 극작가에게는 최고의 실습장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말한대로 보마르세와 존 캐럴이 만난  곳은 라틴 스쿨의 정점에 있었던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였다. 찰스 캐럴이 다녔던 그 학교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존 캐럴은  1748년 14살때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북부 지방인 생토메르(St. Omer)에서 공부한 뒤,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으로 진학 했다. 거기서 만난  보마르세는 시계공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상류 사회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그가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고 &#8216;피가로의 결혼&#8217; 같은 지적인 희곡을 쓸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 콜레주에서의 고전 교육이 있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18세기 프랑스에서 성공하려면 &#8216;라틴어를 구사하는 교양&#8217;은 필수였다. 그가 나중에 궁정에서 활약하고 외교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교육 덕분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시 라틴어 학교생활의 특징는 엄격한 규율이었다.  수업은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학교 내에서는 오직 라틴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 곳도 많았다.  귀족 자제들과 재능 있는 중산층 아이들이 섞여 공부했다. 보마르세 같은 인물에게는 인맥을 쌓는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종과 피에르 두 사람은 17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반  계급의 용광로 루이 르 그랑 명문 콜레주에서 학교 복도와 교실을 그리고 기도실과  기숙사를 공유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보마르세에게 그 시절은 &#8220;희곡 작가로서의 언어적 감각을 키운 시절이었고, 존 캐럴에게는 가톨릭 지도자로서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준 시절 었다.  찰스 캐럴은  2-3년 후배 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무리 계급의 용광로 라 해도 저 외국 변방인  영국의 식민지에서 온 불어도 잘 못하는 존과 하층민 출신 보마르세는 가 동변상련의 우정을 쌓았다.    </span><span dir="LTR" lang="en-US">두 사람의 만남은   &#8216;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들의 연대&#8217; 였다. &#8216;이방인&#8217;들의 유대감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존 캐럴은  프랑스어가 서툴렀고, 보마르세는 시계공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계속)</span></p>
<p><span dir="LTR" lang="en-US">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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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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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hu, 09 Apr 2026 00:30:51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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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3 안동일 작 독립선언 직전 필라에 불던 팽팽한 긴장감과 이 무렵 숨가쁘게  물밑에서 전개 되던 스파이전을 방불케 하는 파리의 미국 독립운동으로 눈을 돌리기 전 감깐 쉬어 간다는 의미에서 건국 아버지들의 &#8216;속 썩인 아들들&#8217;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우리의 주인공 찰스 캐럴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3</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독립선언 직전 필라에 불던 팽팽한 긴장감과 이 무렵 숨가쁘게  물밑에서 전개 되던 스파이전을 방불케 하는 파리의 미국 독립운동으로 눈을 돌리기 전 감깐 쉬어 간다는 의미에서 건국 아버지들의 &#8216;속 썩인 아들들&#8217;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우리의 주인공 찰스 캐럴도 여기서 비켜서지 못한다. 하늘은 사자에게 날개를 주지 않았다더니&#8230;</p>
<p>조지 워싱턴은 친자식이 없었기에 부인 마사 워싱턴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하지만 그 공들인 보람이 무색했다. 의붓아들 존 파크 커스티스 (John Parke Custis, 1754년생, 일명 &#8216;잭키(Jacky))는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워싱턴의 속을 썩였다. 워싱턴이 &#8220;제발 공부 좀 해라&#8221;며 편지로 타이르고 엄하게 꾸짖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독립전쟁 중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며 워싱턴에게 슬픔을 안겼다.</p>
<p>토머스 제퍼슨이야 말로 자식 운이 매우 박복했다. 아내 마사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오직 딸 마사(Martha)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제퍼슨은 어린 아들들을 모두 병으로 잃으며 가문을 이을 적통 후계자를 두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흑인 하녀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p>
<p>2대 대통령이자 독립 혁명의 기관차 존 애덤스는 아들들 때문에 가장 고통받은 인물 중 하나다. 둘째 아들 찰스 애덤스 (Charles Adams, 1770년생)는 하버드를 졸업했으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심한 불화를 야기했다.  격노한 존 애덤스는 아들을 &#8220;미친 야수&#8221;라 부르며 절연했고, 찰스는 아버지가 현직 대통령이던 1800년, 30세의 나이로 간경화로 사망했다.<br />
셋째 아들 토머스 보일스턴 애덤스 (Thomas Boylston Adams, 1772년생) 역시 알코올 중독과 재정적 무능으로 평생 고생하며 아버지의 평생 근심거리가 되었다.</p>
<p>&#8216;혁명의 불꽃&#8217;이었던 새뮤얼 애덤스 그도 아들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아들인 새뮤얼 애덤스 주니어 (Samuel Adams Jr., 1751년생)는 의사로 활동하며 독립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중 얻은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평생 아버지의 기대만큼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788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p>
<p>&#8216;장로교의 하나님이 미국 독립을 위해 스코트랜드에서 식민지로 보내 주었다&#8217;는 존 위더 스푼 목사(프런스턴대 총장)의 경우도 자식복 만큼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 위더스푼 목사의 아들들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목사는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세 명(제임스, 존, 데이비드)이었다.<br />
위더스푼 목사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학문적 기준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결과는 사뭇 드라마틱하다.</p>
<p>장남 제임스(James Witherspoon)는 비극적인 전쟁 영웅으로 꼽힌다. 가장 전형적인 &#8216;건국 아버지의 아들&#8217;다운 길을 걸으려 했던 아들이었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륙군에 입대하여 나다니엘 그린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1777년 저먼타운 전투(Battle of Germantown)에서 전사했다.  위더스푼 목사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도, 조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p>
<p>차남 존(John Witherspoon Jr ) 의사였다. 형과는 다른 길을 걸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의학을 공부하고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아버지의 엄격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1795년경 선박을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 사건은 노년의 위더스푼 목사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p>
<p>삼남 데이비드(David Witherspoon): 법률가로 정착해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아들이다.<br />
프린스턴을 졸업한 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법률가로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제임스 아델(James Iredell) 밑에서 공부하며 자리를 잡았다. 특이 사항으로는 나중에 맏형 제임스의 미망인과 결혼 한 일이다.</p>
<p>다혈질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의 비극은 자식이 속을 썩였다기 보다, 아버지를 너무 닮아 발생한 참극에 가깝다.  장남 필립 해밀턴 (Philip Hamilton, 1782년생)은  해밀턴이 가장 아끼던 천재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의 명예를 모욕하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19세에 사망했다. 이는 몇 년 뒤 해밀턴 본인이 결투로 사망하는 비극의 복선이 되었다.</p>
<p>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자 최장수 인물이었던 찰스 캐럴 그도 아들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들 찰스 캐럴 주니어 (Charles Carroll Jr., 1775년생)는 일명 &#8216;찰스 캐럴 오브 홈우드&#8217;로 부렸는데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아내를 학대하고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다. 결국 아버지가 죽기 7년 전, 술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p>
<p>또 한번 인용 하지만 &#8220;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8221;는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다.   국가의 기틀을 세우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인지, 아니면 위대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인지, 건국 영웅들의 가정사는 후대에 전해지는 영광만큼이나 어둡고 쓸쓸한 구석이 많다.  역사가들은 건국 아버지들이 국가라는 거대한 &#8216;가정&#8217;을 돌보느라 정작 본인의 자식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거나 소홀했던 면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8220;성인(Saint)의 자식으로 사는 것보다 죄인의 자식으로 사는 게 속 편하다&#8221;**는 당시의 자조 섞인 농담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으면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선다.</p>
<p>참 한가지 빼 먹으면 안될 일이 차남과 삼남 때문에 속썩었던 독립의 기관차 애덤스 선생은 그래도 장남은 잘 두었다는 사실이다.  건국 아버지들의 아들 &#8216;잔혹사&#8217;에서도  그애게 존 퀸시 애덤스(1767년생)라는 걸출한 장남이 있었다는 점은 후인 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p>
<p>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 대통령이 되었으니, 가문의 영광을 제대로 세운 인물이었다.<br />
하지만 존 퀸시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심 이면에 차가운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복합적인 &#8216;엘리트 교육의 부작용&#8217;과 &#8216;부모의 과도한 기대&#8217;가 원인이었다.  퀸시 애덤스가 아버지를 어려워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8220;너는 위대해져야만 한다&#8221;는 압박 때문이었다.</p>
<p>존 애덤스와 아비게일은 장남인 존 퀸시를 아주 어릴 때부터 &#8216;미래의 지도자&#8217;로 찍어놓고 무섭게 몰아붙였다.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 외교 현장을 누벼야 했고, 부모님으로부터 &#8220;네가 잘못하면 가문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한다&#8221;는 식의 편지를 끊임없이 받았다. 그에게 아버지는 따뜻한 &#8216;아빠&#8217;라기보다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자 엄격한 감시자였다.<br />
앞서 언급한 찰스와 토머스, 두 동생이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지는 과정을 보면서 존 퀸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동생들의 타락이 &#8216;아버지의 엄격함을 견디지 못한 결과&#8217;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자신만은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기계처럼 공부와 일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성격이 매우 냉소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p>
<p>존 퀸시는 아버지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해낸 &#8216;건국의 황태자&#8217;였으나, 정작 본인의 일기에는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숨 가빠 했던 고독한 영혼의 기록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위대했으나 아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이름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91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528ec1f8f0226-1.jpg" alt="" width="696" height="410" /></p>
<p>다시 델라웨어 강길로 돌아온다.<br />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까지의 강길은 약 35마일(약 55km) 정도다.  돛을 단 샬럿 바지 범선이 순풍과 썰물(Ebb tide)을 타면 평균 4~5노트(시속 7~9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단순히 계산해도 6~8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br />
이 구간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8216;조석 구간&#8217;이다. 1770년대 선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계보다 물때였다.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썰물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강물 자체의 흐름에 조류의 힘이 더해지면 배가  빠르게 미끄러지듯 내려갔다.<br />
만약 물때를 잘못 맞춰 밀물을 만나면, 배를 강가에 묶어두고 물길이 바뀔 때까지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경우라면 하루가 꼬박 걸리거나 이틀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br />
벤자민과 존 신부를 태운 샬럿도 물때를 맞추기 위해 쿠퍼스 패리에  정박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타는 승객도 있었고 늦은 점심을 해야 했기도 했다.<br />
쿠퍼스 페리 (Cooper&#8217;s Ferry)는  현재의 캠던(Camden) 지역으로, 델라웨어 강을 건너 필라델피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나룻터 바로 앞에는 꽤 좋은 주막(터반, Tavern)이 있었다.<br />
나루터의  페리 터반은 뉴저지 각지에서 온 민병대원, 필라델피아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 영국군의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 반대로 대륙군의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br />
이곳에서 박사와 신부는 우연히 로버트 모리스를 만났다. 필라델피아 출신 대륙회의 맴버로 벤자민의 심복중 심복인 인물이었다. 대륙회의의 비밀 교신 위원회(Committee of Secret Correspondence)를 주도한 인물.</p>
<p>나루에 내리면서 부터 사람들이 박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주막에 들어 섰을 때 깔끔한 정장 신사가 놀란듯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 나왔다. 그가 모리스였다.<br />
“박사님 이게 왠일 입니까?”<br />
그는 와락 안기듯 벤자민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고 벤자민도 반가운 듯 그의 어깨를 안았다.<br />
“바비 자네가 여기 왠 일인가.?”</p>
<p>“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생 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조금 수척해 지신것 같기도 하고&#8230;”<br />
“아무튼 반가우이, 자네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회의 소식이나 들어 봄세.”<br />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보고 급히 드릴께 있습니다.”<br />
그러면서 모리스는 옆의 존 신부에게 아는체를 해 왔다.<br />
“혹시 존 캐럴 신부님 아니십니까?”<br />
벤자민에게 나섰다.<br />
“ 그렇다네, 인사 하시게 이번에 나와 함께 대표단으로 갔던 존 캐럴 신부님 이시네.”<br />
모리스의 표정이 더 환해 졌다.<br />
“ 아주 잘 됐습니다, 이렇게 함께 뵙게 되다니.”<br />
모리스는 존 신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br />
“처음 뵙겠습니다. 대륙회의 밥 모리스 입니다. 신부님 존함은 자주 들었습니다. 4촌 동생 되시는 찰리하고는 막역한 친구 입니다.”<br />
모리스는 찰스 캐럴을 들먹이며 존 신부에게도 깍듯하면서도 친근하게 나왔다. 실제로도 모리스는 찰스와 꽤 교분이 있었고 벤자민에게 보고할 프랑스 일도 찰스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날 존 신부와의 만남은 그 중요한 일에 황금 날개를 달게 되는 일이 된다. 그일은 바로 프랑스로 부터 화약과 무기를 공급 받는 일이었고 종국에는 프랑스 군을 미국 독립운동에 끌어 들이는 중차대한 일이었다.</p>
<p>대륙회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캐럴 형제를 캐나다에 파견하면서 사일러스 딘이라는 인물을 파리로 비밀리에 파견 했다. 딘은 변호사이자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대륙회의 의원 출신 인물이었고. 벤자민이 공식 전권 공사로 부임하기 전에 프랑스의 문을 두드렸던 어찌보면 합중국 최초의 외교관으로 꼽힌다.  그를 발탁, 천거한 인물이 바로 모리스 였다.<br />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734–1806  아래 사진)그는 &#8216;미국 혁명의 자금줄&#8217;이라 불렸던  중요한 인물이다.</p>
<p>모리스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 명이었다. 개인 신용을 담보로 초가 대륙군의 군자금을 마련했을 정도로 재정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추진력이 강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역시 재정력이 막강했던 찰스 캐럴과도 &#8216;자금 운용&#8217;과 &#8216;보급&#8217;이라는 측면에서 말과 뜻이 통했다. 그 또한 찰스 캐럴의 시티 터반 사랑방의 단골 손님이었다.</p>
<p>그는 사일러스 딘을 파리로 보낼 때, 단순히 외교관으로 보낸 게 아니라 &#8216;상업적 대리인&#8217;의 성격도 띠게 했다. 즉, 프랑스의 원조를 끌어내는 동시에 무기 거래를 성사시키는 실무적인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모리스다.<br />
델라웨어 강을 건너기 전, 캠든의 터반에서 존 신부와 모리스가 만난 것은 아주 절묘했다. 후일 따져 보면 이 또한 신의 절묘한 안배 였던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91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robert-morris-min.jpg" alt="" width="727" height="930" /></p>
<p>세 사람은 몇몇 사람들과는 분주한 인사를 나눈 뒤 터반의 구석 자리에 앉아 논의를 시작했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사안이  많아 논의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br />
처음의 안건은 대륙회의 분위기였다.<br />
대륙회의는 그때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라는 견해를 놓고 양분되어 있다고 했다.<br />
모리스는 그때 까지만 해도 온건파의 입장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br />
버지니아의 대표인 리처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빨리 결행 해야 한다는 강경파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는 분위기를 전하면서 아담스, 제퍼슨, 핸콕 , 휫필드 등 여러 이름이 나왔다. 그러면서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br />
“박사님, 떠나시기 전에도 말 씀 드렸지만 독립선언은 시기 상조 아닙니까? 영국과 완전히 갈라서 다른 나라를 만들겠다는 선언인데 우리가 지금 영국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공연히 애꿎은 희생만 엄청나게 더 치루게 되는것 아닙니까?”</p>
<p>“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전쟁은 뭡니까?”<br />
존 신부가 나섰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보니 제퍼슨 이 노인네는 그때 까지 온건파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고 강경파 들에게는 그들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계기로 확실한 강경파로 입장을 굳혔다고 존 신부는 파악하고 있었다. 독립선언 얘기도 나왔기도 했고 무엇보다 대륙군 젊은이들에 대한 보급과 무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전쟁을 빨리 끝낼 요량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온건파들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하는 가 싶어 모리스에게 물었던 것이다.<br />
“우리의 단결과 힘을 과시하고 영국으로 부터 받아낼것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협상을 해야죠, 저쪽이 쥐는 아니지만 쥐를 몰더라도 도망갈 구멍을 내주어야지, 궁지에 몰아 독이 바짝 오르게 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얘기지요.&#8221;<br />
밴자민은 고개만 끄덕이면서 말을 아꼈다.<br />
“그래서 모리스 의원 같은 분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요?”<br />
존 신부가 다시 물었다.</p>
<p>“일단은 내실을 기해 야 하지요 지금의 무기로는 우리 대륙군이 승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공략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 하다는 것 아닙니까?”</p>
<p>실제 모리스는 영국의 강압적인 조세 정책에는 반대했고 저항 했으나, 처음부터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가 대영제국과의 화해와 협상을 선호하는 온건파에 속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륙군의 화력이 너무도 열악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p>며칠 뒤의 이야기이지만 1776년 7월, 독립을 결정하는 투표 당시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완전한 독립 선언이 시기상조라면서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부표를 던지지 않고 기권해 독립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일단 독립 선언이 결정되자 모리스는 &#8220;시민의 의무는 다수결에 따르는 것&#8221;이라는 말을 하면서  8월 2일 미국 독립 선언문에 서명했다.</p>
<p>“박사님 필라에 들어 가시면 저들 강경파들을 다독여 주실거지요? 다른 사람 말은 안들어도 그 사람들이 박사님 말은 들을 테니까요. “<br />
벤자민은 가타부타 말을 않고 따라만 놓고 있었던 마데이라 잔을 들어  들이켰다. 통풍에 술은 금물인데 오늘 같은 날 와인 한잔 쯤이야 싶어 존 신부도 말리지 않았다.</p>
<p>사실 독립선언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식민지의 주인을 자처하는 영국왕과 죽기 살기로 한판 끝까지 붙어 보자는 얘기 아닌가. 벤자민의 표정이 다시 아까의 고뇌에 찬 표정으로 돌아간다.<br />
살살 약을 올리면서 실력을 키워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일격을 날려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밥 모리스 그의 계산적인 생각에 존 신부도 일견 수긍할 점이 있다고 생각 되기는 했다. 그만큼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이기는 일은 당시로서는 요원했기 때문이다.<br />
“박사님, 대답해주세요. 영영 하지말자는 얘기가 아니라 좀더 시간을 갖자는 애기 니까요”<br />
모리스는 마데이라 잔을 내려 놓는 벤자민 노인의 손을 잡으며 응석을 섞어 말했다. 마데이라를 한잔 더 따르려는 그를 존 신부는 눈짓으로 말렸다.<br />
존 신부에게는 왕당파(Loyalist)인 아들 윌리엄과 결별하면서 보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침통한 모습이, 전쟁 승리를 위해 주판알을 튕기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아들 또래 모리스의 응석에 같은 표정이지만 매우 다르게 반응 하는 것이 대비되면서 벤저민의 고독이 더 깊게 느껴졌다.<br />
“마침 프랑스에서 전령이 왔습니다.”</p>
<p>“그렇게나 빨리?”  그말에는 벤자민이 반갑게 대꾸 했다.<br />
“기록적인 편서풍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페킷선의 선장도 유능한 이였고&#8230;”<br />
그러면서 서신 한장을 건넸다.<br />
존 신부는 벤자민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 편지가 사일러스 딘이라는 인물이 파리에서 밥 모리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br />
&#8220;이 서신은 바다 위를 날아온 모양이군!&#8221;<br />
노인은 조끼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더니 편지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p>
<p>18세기 후반, 대서양을 사이에 둔 정보 전달은 오로지 범선에 의존해야 했던 고된 과정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런던이나 파리로 소식을 보내려면 정기 우편선인 패킷선(Packet Ships)이나 일반 상선을 이용해야 했다. 빠른 경로는 대서양의 편서풍(Westerlies)과 멕시코 만류(Gulf Stream)를 이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식민지 → 유럽의 경우 북미 해안에서 멕시코 만류를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면 뒤에서 부는 바람 덕분에 속도가 붙었다. 보통 3~4주 정도 소요됐다.<br />
하지만 반대로 유럽에서 식민지로 돌아올 때는 맞바람과 조류를 거슬러야 해서 훨씬 오래 걸렸다. 남쪽으로 내려가 무역풍을 타고 우회하는 경로를 택하기도 했으며, 보통 6~9주가 걸렸다.<br />
독립전쟁 중에는 영국 해군이 해안을 봉쇄했기 때문에, 미국 특사(벤자민 프랭클린 등)에게 보내는 훈령은 대형 군함보다는 빠르고 작은 쾌속선을 이용해 봉쇄망을 뚫고 야간에 몰래 출항하곤 했다.</p>
<p>사일러스 딘은 1776년 3월 초에 비밀리에 출항했다. 그는 운 좋게 강력한 멕시코 만류와 봄철의 강한 편서풍을 타 25일 만에 프랑스 해안에 닿을 수 있었고 4월초에 파리에 도착 했던 모양이다.<br />
도착 직후 딘은  파리에서 상황 소식을 써서 가장 빠른 사선(Privateer) 편에 보냈던 것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 항로는 6주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지만, 폭풍우를 피하고 항해술이 뛰어난 선장을 만났다면 40~45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5월 하순에 벤자민이 생생한 파리의 상황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p>
<p>편지를 다 읽은 벤자민이 모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br />
“바삐 움직이고 있구만, 수고들 했네. 자네들이야 말로 우리의 동량들 일세,  자네들이 있어 내가 든든해. 사일러스 군이 원하는 것 다 들어 주도록 해야지. 내일 부터러도 급히 움직이세.”<br />
“참 우리 신부님 피에르 보마르세라고 프랑스왕의 측근인사 잘 아시지요?“   벤자민이 존 신부를 쳐다보며 물었다.<br />
“ 보마르세 라고 하셨습니까?”<br />
“ 지난번에 찰스 세뇌르 한테 들었습니다. 파리 라틴어 학교 동창 이라고.”<br />
“ 잘 압니다. 왜 그친구한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br />
“예 그래서 제가 오늘 신부님 만났을 때 그토록 반가와 했던 겁니다.”  모리스가 나섰다.<br />
명석한 존 신부는 모리스가 설명을 다 하기 전에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br />
프랑스왕의 최 측근으로 등극 했다는 시계공 출신 극작가 재주꾼 보마르세가 대륙회의가 프랑스를 공략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맨으로 등장해 있다는 것을&#8230;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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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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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01 Apr 2026 23:20:06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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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2 –  안동일 작   부자의 대화가 평행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자가 이쪽 두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속내를 말 못한다 싶어 신부와 대령이 나가 있으려고 일어 서려는데  당번병이 홍차를 내왔다.  신부와 대령의 차도 가져와 그들이 앉아있는 벽쪽 작은 탁자에 올려 놓았기에 두 사람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2 –</h4>
<h6><span dir="LTR" lang="en-US"> 안동일 작 </span></h6>
<p><span dir="LTR" lang="en-US">  부자의 대화가 평행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자가 이쪽 두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속내를 말 못한다 싶어 신부와 대령이 나가 있으려고 일어 서려는데  당번병이 홍차를 내왔다.  신부와 대령의 차도 가져와 그들이 앉아있는 벽쪽 작은 탁자에 올려 놓았기에 두 사람은 눈짓으로 차만 마시고 일어 나기로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속이 탔던지 우유를 듬뿍 붓더니, 찻잔 바닥을 긁는 스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휘저어 벌컥 들이켰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버지는 아직도 촌티를 벗지 못하고 차 마실 때 달그락 거리고 벌컥 소리를 내고 마십니까? 젠틀맨 답지 않게..”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들아 내가 속이타고 목이 타서 좀 빨리 마셨다. 그런데  젠틀맨은 그런 외형에서 가름 되는 것이 아니란다. 그나저나  이 녀석아 오랜만에 만난 애비 한테 그렇게 면박을 주어야 하겠니?  죽다 살아 온 애비한테&#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러게 그 험지에는 왜 가셨습니까? 고생만 하셨겠죠, 대영제국의 위세는 아직 건재 합니다. 반란의 조짐은 없었지요? 안 봐도 뻔 합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위쪽의 소식을 대충은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다리의 통풍은 좀 어떠십니까?”  </span></p>
<p><span dir="LTR" lang="en-US">처음으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네가 썩이는 속 보다는 덜 아프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제 속만 하겠습니까?”</span></p>
<p><span dir="LTR" lang="en-US">“여기 캐럴 신부님께서 돌봐 주시고 좋은 약을 지어 주셔서 많이 낫기는 했다. 어찌 고마운지&#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말을 듣고 윌리엄 총독이 일어서서 존 신부 쪽을 향해  목례를 보내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어느 교구의 누구신지?”</span></p>
<p><span dir="LTR" lang="en-US">”캐럴 신부는 국교회가 아니라 로만 가톨릭 신부님이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벤자민이 얼른 대답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뭐라구요 천주교라고요?”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의 표정이 단박에 변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버지의 대륙회의는 하다 하다 천주교 미신쟁이, 교황의 꼭두각사들 까지 끌어 들이 셨습니까 ?  하긴 애국적이고 충성스런 국교회 사제 중에는 아버지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겠지요” </span></p>
<p><span dir="LTR" lang="en-US">“허허 자신의 종교가 중하면 남의 종교도 귀한 법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무리 그래도   천주교인 들의 교활한 간계에 놀아 나시면 안됩니다.”</span></p>
<p>&#8220;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로구나.&#8221;</p>
<p><span dir="LTR" lang="en-US">이 대화까지 듣고 신부와 대령은 방을 나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두 부자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예상대로 성과도 전혀 없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허드 대령은 대원들과 나눌 얘기가 있던지 1층으로 내려갔고 존 신부는 복도 한쪽에 있는 쇼퍼에  앉아 묵주 기도를 했다.  7단 쯤 했을 때  붉게 상기된 얼굴로 노인이  방을 나왔고 문을 쾅하고 닫았다. 존 신부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말이 안 통해, 전혀 안 통해”</span></p>
<p><span dir="LTR" lang="en-US">“신부님 내가 아무래도 아들이 아니라 괴물을 키운 것 같소.”</span></p>
<p><span dir="LTR" lang="en-US">침통한 표정의 벤자민은 이 말을 끝으로 트랜튼으로 가는 마차 여정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허드 대령이 오히려 더 미안해 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노인의 표정을 보고 참는 것 같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캐럴 신부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거대한 산이 뿜어낸 광채가 윌리엄에게는 오히려 그늘이 되었고, 그 그늘 속에서 뒤틀린 새로운 권위에 대한 충성심과 비뚜러진 경도가 괴물처럼 자라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관저를 떠날 때 윌리엄은 아버지를 배웅 하지 않았지만 캐럴 신부는 마차에 오르면서 윌리엄이 복도 창가에 서서  이쪽 마차 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으리라. 펄럭이며 마차에 오르는 벤자민의 낡은 외투에는 여전히 몬트리올의 진흙과 약재 냄새가 배어 있어 존 신부의 코를 자극했고 내려다 보고 있는 2층  윌리엄의 총독 제복 단추의 번쩍거림이 눈을 자극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잠시 마차를 내려다 보더니 이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눈길을 바다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라리탄 만 너머에 영국 함대가 오고 있다는 희망을 표현 하는 듯 했다.  벤자민은 그때  마차 창 넘어로 손을 뻗어 따라 나온 청년 민병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두 모습의 대비에 존 신부는 &#8216;윌리엄은 바다 건너에서 영국 대군이 몰려 온다면 대륙군의 좌장인 자신의 아버지를 어찌 해주길 바라고 있을까?&#8217; 하는 생각을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신부는 문득 성경 구절 “어느 집안이나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버텨 내지 못하리라”는 대목(마태오 복음서 12:25) 이 떠올라 간절한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주님, 이들이 서로 다른 깃발을 들었으나 혈연의 끈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니, 정치의 칼날이 부자의 정을 베지 않게 하소서.&#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벤자민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윌리엄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영적 개안(開眼)을 허락하소서.&#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떠나는 마차 안에서 벤자민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눈을 꾹 감고 있을 때, 캐럴 신부가 대신 창밖으로 멀어지는 윌리엄과 그가 갇힌 건물을 향해 조용히 성호(聖號)를 그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허드 대령의 마차는 두사람을 트랜턴 부두 까지 데려다 주고는 돌아 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부두에는 두 사람을 필리까지 데려 다 줄 이번 여행의 마지막 탈것 샬럽 범선이 준비돼 있었다. 트랜턴 까지 말이 없던 벤자민이 부두의 유장한 강물 소리를 들으면서 침묵을 깨고 대륙군 청년 들의 함성 같다는 표현을 했던 때가 바로 이때 였다.  필라로 귀환하는 날 아침에 현명옹이 예지력으로 들은 함성이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시의 범선 샬럽(Shallop)을 타고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 마켓 항구(Market Street Wharf)까지 가는 길은 조류와 바람만 잘 맞는다면 하루 안에 충분히 가능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 시기, 델라웨어 강이나 체사피크 만과 같은 연안 및 강 하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일꾼 배들이 바로 샬럽 이었다.  샬럽은 보통 9~15미터 길이로, 선체가 날렵하고 돛대(Mast)가 하나 또는 두 개 달려 있다. 앞뒤가 뾰족한 대칭형 구조가 많아 강물에서 방향 전환이 용이했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다닐 수 있도록 바닥이 비교적 평평하지만, 바다로도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구조를 가졌다. 바람이 없을 때는 노(Oar)를 저어 갈 수도 있었다. 필라와 트렌튼 같은 거점을 오가며 승객을 실어 나르거나, 가벼운 화물(밀가루, 술통 등)을 운반하는 &#8217;18세기의 택시이자 소형 트럭&#8217;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물때 때문에 오전에 배에 오른 벤자민과 존 캐럴 신부는 갑판 위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오전의 침울함을 벗어난 벤자민이 의외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물어 왔기 때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지녀 교육, 자식 양육의 고충과 희망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어떻게 나와 있냐는 질문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아침에 떠올랐던 마태오 복음서 구절을 전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싸우면 망하게 돼 있다는 얘기를 어찌 하는가.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신명기 6 장에 나오는 구절이  가장 근본적인 구절입니다. 부모의 역할이 단순히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새기는 작업임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지요. &#821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8230;&#8217;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span></p>
<p>어쩐지 오늘의 박사에게 불리한 구절이기는 하다.</p>
<p><span dir="LTR" lang="en-US"> &#8220;박사님,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의 마음에 아무리 정성껏 진리를 새겨 넣어도, 결국 그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오직 주님과 그 아이 자신만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심는 자는 우리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니까요.&#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 “에페소서 6장은 효도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약 구절입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의 절제를 강조하는 부분이 박사님의 의 상황과 맞물릴 수 있습니다.  &#8216;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8230;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8217; 아렇게 되어 있습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고개를 끄덕이는 벤자민의 얼굴 위로 강바람 훈풍이 불었고 흰 머리가  보기좋게 날렸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성경은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부모에게도 &#8216;노엽게 하지 말 것&#8217;을 명하셨지요. 아드님과의 갈등은 어쩌면 두 분 모두가 서로에게 품은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서 생긴 생채기일지도 모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자책하는 벤자민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인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을 더 산란하게 만들지 않는가 싶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사야서를 들려 주는 것으로 신부는 성경 강좌를 끝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한 이사야서의 구절입니다. &#8216;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8217;&#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세상에 자식을 포기할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설령 그 자식이 아버지를 등지고 왕의 편에 섰다 해도, 박사님 당신의 가슴 속엔 여전히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 긍휼함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형벌이자 축복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벤자민은 무슨 뜻에서 인지 이렇게 말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더군요. 자식 놈은 제 갈 길을 가버렸고&#8230; 내 자식 농사는 흉년인 모양이오.   정작 제 자식은 어쩌지 못하고서 다른 집 아들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이 늙은이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 지겠지요 신부님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으렵니다.&#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예지력으로 들은 대륙군 청년 장병들의 함성이 그를 다시 강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사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 신부가 물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박사님, 성서에는 &#8216;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8217;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드님이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여도, 결국 당신이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언젠가는 기억하게 될 겁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지, 입을 보고 자라지 않으니까요. 지금 당신이 가려는 독립의 길이 곧 아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박사님, 아드님은 지금 자신이 믿는 &#8216;왕에 대한 순명&#8217;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의 법은 그를 반역자라 부르겠지만, 아버지로서 당신이 하신 마지막 설득은 이미 하늘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아들을 놓아주는 것 또한 박사님이 짊어지셔야 할 십자가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8220;지도자의 길은 고독한 법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굴복시키지 못하면서 남의 자식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그 모순이 바로 이 혁명의 가장 아픈 가시겠지요. 하지만 박사님의 정직한 고통이 오히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울림이 될 것입니다.&#8221;</span></p>
<p><span dir="LTR" lang="en-US">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샬럽선 갑판 위로 물새가 날아들어 앉았다. 갈매기였다,  강 이지만 하구였기에 그랬다.  노란 주둥이가 유난히 햇빛에 반사 됐다. 존 신부는 아침의 윌리엄 황금단추 반사가 떠올랐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16;황금은 인간을 꼭 황페하게 하거늘&#8230;&#8217;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잠시 </span><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span><span dir="LTR" lang="en-US">의 추후 행적에 대해 알아본다. 앞으로는 기회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말한대로  며칠 뒤 그는 </span><span dir="LTR" lang="en-US"> 애국파 군대에 의해 체포되</span><span dir="LTR" lang="en-US">어</span><span dir="LTR" lang="en-US"> 코네티컷의 감옥에서 2년 동안 독방에 갇혀 가혹한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윌리엄이 투옥된 동안 그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대륙회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벤자민은 그때 프랑스에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 프랭클린 총독의 체포는 독립 선언 직전 뉴저지가 &#8216;중도 관망&#8217;에서 에서 &#8216;독립&#8217;으로 급격히 선회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뉴저지 지방 의회(Provincial Congress)는 1776년 6월 15일 체포령을 발령한다. 그를 &#8220;민중의 자유에 대한 적&#8221;으로 선포했다.  6월 17일 나다니엘 허드 대령이 이끄는 민병대가 퍼스 엠보이 주지사 관저에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고  6월 21일 에는 벌링턴(Burlington)으로 이송해 지방 의회 에서 심문을 받게 했다. 그때도 그는 의회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맞섰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1776년 6월 25일  대륙회의는 윌리엄이 뉴저지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그를 코네티컷으로 이송해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선언이 채택되던 날, 윌리엄은 뉴저지를 떠나 코네티컷의 감옥으로 향하는 압송 길에 있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2년여의 혹고한 옥고를 치룬 그는 1778년 대룩군과의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된다. 영국 왕실이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영국군이 점령 중이던 뉴욕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흩어져 있던 왕당파들을 규합해 왕당파 연합 위원회(Board of Associated Loyalists) 를 창설하고 의장직을 맡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 조직은 영국 정규군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준군사 조직이자 유격대 성격을 띠었다.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등지에서 독립 애국파(Patriot) 거점을 습격하고 물자를 탈취하는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밤새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의 농장, 철공소 등을 습격했다. 이들은 &#8216;베이컨의 난민들(Bacon&#8217;s Refugees)&#8217;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들 왕당파 게릴라들은 애국파의 공격에 대해 똑같이 폭력으로 맞대응해야 한다는 &#8216;보복(Retaliation)&#8217; 원칙을 고수했다. 특히 1782년  애국파 장교 조슈아 허디(Joshua Huddy)를 생포해 교수형에 처한 사건은 큰 논란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미-영 간 평화 협상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윌리엄의 왕당연합은 유격전뿐만 아니라 뉴욕을 중심으로 전역에 비공식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변절 계획을 사전에 감지하고 이를 영국측에 전달하는 과정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 프랭클린은 이러한 강경한 활동으로 인해 독립 후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당파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으며, </span><span dir="LTR" lang="en-US">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국으로 망명</span><span dir="LTR" lang="en-US">해야 </span><span dir="LTR" lang="en-US">했</span><span dir="LTR" lang="en-US">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이 </span><span dir="LTR" lang="en-US">1785년 영국 근처에서 그를  만났으나, 이는 주로 재산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사무적인 만남이었을 뿐 감정적인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span><span dir="LTR" lang="en-US">고 사가들은 적고 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때 1785년 7월,  80세의 고령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8년여간의 프랑스 공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는 길이었다. 이때 영국 해협을 건너는 도중,  아들 윌리엄과의  만남이 성사됐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정확한 장소는 영국 남부 해안의 항구 도시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벤자민은 7월 24일부터 27일 까지 약 3일간 체류했다.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윌리엄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왔고, 두 사람은 &#8216;스타 인(Star Inn)&#8217;이라는 여관에서 만났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사가들은 이 만남이 화해의 장이라기보다는, 냉정한 비즈니스적 정리에 가까웠다고 적는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관계 회복을 원했으나, 벤자민의 태도는 차가웠고 주로 윌리엄이 미국에 남겨두고 온 부동산과 개인 자산의 처리 문제, 그리고 윌리엄의 아들이자 벤자민의 손자인 윌리엄 템플 프랭클린의 장래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끝내 윌리엄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적는다. 그는 7월 27일  배에 올랐고,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본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들 윌리엄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영국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13년 11월 1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영국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에 의지해 살았으며 1790년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유산 상속에서도 거의 제외 돼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쓸모없는 땅 일부만 상속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기록 된다.  그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구 교회(St Pancras Old Church) 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철도 공사 등으로 인해 정확한 묘소의 위치는 유실되었다고 적혀진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사가들이야 이처럼 냉정하게 기록 했지만 작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 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애틋하게 안타까와 했고 이면적으로는 은밀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span><span dir="LTR" lang="en-US"> 그리고 그 무렵 윌리엄은 자신이 &#8216; 정말 잘못했구나&#8217; 자신이 &#8216;역사의 죄인이 되었구나&#8217; 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후회 하고 있었다.  또  두 사람 사이에는 윌리엄의 아들 탬플이 있었다. 그리고 탬플의 딸 앨렌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템플 프랭클린은 1762년 윌리엄 프랭클린의 사생아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막 뉴저지 총독으로 임명 됐던 때였다. 템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투자 할아버지 편을 들어 파리에 함께 가서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부분은 다시 자세히 다룬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겉으로는 냉담했지만, 사실 아들 윌리엄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사우샘프턴 만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벤자민은 윌리엄에게 미국에 남은 땅과 자산 처리 일부를 맡겼다.  표면적으로는 &#8216;비즈니스&#8217;적 이었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윌리엄이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8216;은근한 배려&#8217;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리고  벤자민은 손자 템플을 영국에 남게 해 윌리엄에게 보내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게 했다. 본인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자존심과 정치적 입장 대신, 자신의 또다른  소중한 분신을 보내 아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했던 부정이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윌리엄은 말년에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닫고 자책했다. 이 사실은 여러곳에서 확인된다.  윌리엄은 영국으로 건너간 후,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영국 정부로부터도 뜨뜻미지근한 대우를 받았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번영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지키려 했던 구체제(영국 왕정)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허망함과 회한은 작은것이 아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나중의 얘기지만 이들 프랭클린 부자와 조손은 3대에 걸친 사생아가 등장해 집안 화해의 뜨끈한 난로로 등장한다. 바로 탬플 프랭클린의 딸인 엘렌 이다.  엘렌 프랭클린은 1798년     템플이 런던 시절 사귀었던  프랑스계 여인 블랑슈와  라파예트(Blanchette de La Fayette)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증조부인 벤자민 사후 였기에 증조부를 보지는 못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템플이 파리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낼 때, 그의 딸 엘렌은 런던에 있는 할아버지 윌리엄이 키웠고 엘렌은 할아버지와 깊은 유대감을 가졌다.  윌리엄의 아내(엘리자베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그는 영국에서 재혼했지만 말년은 고독했다. 이때 손녀 엘렌이 그의 곁을 지키며 그를 간호했던 것이다. 프랭클린 가문의 끊어질 듯 이어진 혈연의 끈을 보여주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대를 하나씩 건너 뛴 사생아들의 효성과 효도.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실제로 앨렌은 윌리엄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고 윌리엄의 유언장에는 엘렌에게 유산 대부분을 남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그녀가 윌리엄의 말년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날 델라웨어 강을 따라 내려 가면서 윌리엄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노 정객과 젊은 신부는  돛이 펄럭이는 소리와 물살 가르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대화를 이어 갔지만 이같은  끝은 몰라도 중간 과정은 너무도 참혹하고 극단적인 대립이 계속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일행이 탄 배 옆으로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화물 플랫보트 바지선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덩치 큰 플랫보트들이 강 한 가운데를 갈리치는 물길을 내며 내려갔지만 물길은 어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벤자민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 터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벤자민은 이 무렵 부터 14년을 더 살아 1790년도에 84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때 였다면 분기 탱천해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음직 하지 않은가.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살아 보니 인생 별것 없더라, 너무 애쓰고 살지 말아라.”   </span></p>
<p>세상 떠나기  5년 전인 1785년  귀국 길에  영국의 외지고 작은 항구 마을로 아들을 불러  남들이 들을새라 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 얘기 아닌가 싶다. 그때는, 10년 전에는,  20년 전에는, 왜 이 이야기를 못 했을까 싶었을 게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보면 그때도 최선의 선택이었고 당시도 최선의 선택 이었다.  델라웨어 강 위에서 존 캐롤 신부가  성서를 인용하며 들려준  <span dir="LTR" lang="en-US">하늘의 책에 기록된 설득과 판단 이었고  박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였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거대한 제국, 위대한 제국을 세운 &#8216;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8217;이 짊어 져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에 정작 자기 가정의 울타리 무게는 제대로 올려지지 못했거나 하나같이 자식 복이  없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실은 우리의 주인공 예수회 으뜸 종 찰스 캐럴도 이 아이러니에서 비켜가지 못한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계속)</span></p>
<p><span dir="LTR" lang="en-US">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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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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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25 Mar 2026 16:24:17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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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1 –   안동일 작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프랭클린 부자의 갈등과 비극적인 파경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높고도 깊게 충격과 반향을 던진 일이었다. 그런데 워낙 벤자민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인지, 당시에도 또 지금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벤자민을 비난하고 매도하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1 –</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프랭클린 부자의 갈등과 비극적인 파경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높고도 깊게 충격과 반향을 던진 일이었다. 그런데 워낙 벤자민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인지, 당시에도 또 지금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벤자민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의 편에 서서 얼마나 고통 스러웠겠냐고 자식농사 처럼 힘든게 어디 있냐며 그를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네 &#8216;청문회 문화&#8217;로는 당장 낙마감인데도 그렇다.</p>
<p>두 사람의 파경은 개인적인 성향과 이념, 성격의 차이, 그리고 종교의 차이를 넘어, 한 가정이 국가적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으로 평가받고 있다.<br />
딩초 읠리엄은 벤자민의 자랑거리인 맏 아들이었다. 그런데 윌리엄은 출생 부터 사연이 있었다. 바로 혼외자, 사생아 였던 것이다. 벤자민은 처음부터 윌리엄을 외면하지 않았다. 윌리엄이 벤자민의 친자(Biological son)라는 사실은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8216;과정&#8217;은 공식적인 법적 절차보다는 실질적인 양육과 사회적 인정을 통해 이루어졌다.<br />
윌리엄은 1730년 (혹은 1731년 초)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당시 부인 데보라 리드(Deborah Read)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하기 직전, 혹은 직후에 &#8216;혼외자&#8217;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윌리엄의 생모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역사적 수수께끼다. 하녀였다는 설, 거리의 여인이었다는 설 등 분분하지만 벤자민은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br />
1730년 9월, 데보라 리드와 결합하면서 벤자민은 갓 태어난 윌리엄을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키울 것을 제안했다. 데보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윌리엄은  자연스럽게 프랭클린  가문의 일원이 됐다.<br />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혼외자를 자신의 집에서 직접 키우고 이름을 물려주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친자 인정의 행위였다.</p>
<p>기록에 따르면 윌리엄은 체격이 좋고 지적인 면모 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단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는 우리네 옛말이 18세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그대로 통용됐던 셈이다. 윌리엄은 외모부터 기질까지 아버지 벤자민을 쏙 빼닮아, 혈액 검사는 물론 유전자 검사는 생각도 못했던 그 시절 당대 사람들도 그가 벤자민의 친자임을 의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br />
벤자민은 윌리엄에게 자신과는 달리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고 아들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잘 성장 했다. 1740년대 후반, 윌리엄은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군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고 이후 아버지가 전기 실험을 할 때(그 유명한 연 날리기 실험,  위 삽화) 곁에서 돕는 가장 신뢰받는 조수 이기도 했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 인쇄기를 직접 돌릴 정도로 어깨가 벌어지고 힘이 좋은 체격이었다. 윌리엄은 그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키는 아버지보다 더 컸다고 전해진다.<br />
벤자민이 특유의 유머와 친화력으로 필라는 물론 파리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윌리엄 또한 런던 상류사회에서 &#8216;매력적인 신사&#8217;로 통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상당했다.<br />
외모는 닮았지만, 그 외모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 벤자민은 소박한 갈색 코트를 입고 시민으로서의 실용적인 모습을 고수했지만 윌리엄은 아버지가 물려준  외모에 화려한 영국식 정장과 가발을 더해 &#8216;영국 귀족&#8217;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애썼다. 자신의 출생(혼외자)에 대한 결핍을 완벽한 외모 가꾸기와 귀족적 태도로 보상받으려 했다고도 분석 된다. .</p>
<p>벤자민 프랭클린의 자녀 관계는 생각보다 단출하면서도 그 운명은 사뭇 달랐다. 벤자민에게는 공식적으로 2남 1녀가 있었지만, 성인으로 성장하여 이름을 남긴 자녀는 윌리엄(장남)과 막내딸 샐리(Sarah &#8220;Sally&#8221; Franklin) 둘 뿐 이다. 애칭이 &#8216;프랭키&#8217;였던. 차남 프랜시스 (Francis 1732~1736)는 4살 때 천연두로 요절해 벤자민이 평생 가슴에 묻었다. 당시 벤자민은 &#8220;아이에게 예방접종(인두법)을 하지 않은 것이 내 평생의 한&#8221;이라며 자책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br />
장녀 사라 &#8216;샐리&#8217; (Sarah Franklin Bache) 1743~1808) 는 벤자민이 가장 아꼈던 딸로, 독립 전쟁 당시 부상병들을 돕는 등 아버지를 극진히 보필한 효녀로 꼽힌다. 윌리엄과 샐리는 무려 13살 차이가 나는데 윌리엄이 영국 귀족적인 화려함과 권력을 지향했다면, 샐리는 아버지 벤자민의 &#8216;실용주의&#8217;와 &#8216;애국심&#8217;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프랑스 사절로 가 있을 때 필라델피아에서 살림을 도맡고 독립군을 위해 옷을 짓던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br />
윌리엄은 자라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사생아 라는 사실을 알았다는데  벤자민의 부인 데보라를 늘 엄마라고 불렀고 샐리도 그를 친 오빠로 알고 컸다. 집안은 화목한 편이었다.<br />
필라의 명문 유팬을 나온 윌리엄은 아버지의  &#8216;연 실험&#8217;등 과학 실험을  돕는 등 조수 역할을 충실히 했고  벤자민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는 비서로서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p>
<p>1750년대 후반 부터 밴자민은 외교관으로서 런던을 자주 방문 했고 더러는 장기간 머물기도 했는데 그때 마다 윌리엄을 동반했다. 이때 그는 단순히 아들로서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좌관 역할을 잘 수행하며 영국의 고위층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br />
윌리엄은 런던에서 명문대에 입학해  법학등 을 공부하며 신사로서의 소양을 갖췄다. 그가 법학을 공부한 학교가 미들 템플 대학(원) (Middle Temple) 이다. 찰스 캐럴과 동문이다.  벤자민은 아들을 여봐란 듯 &#8216;영국 신사&#8217;로 키우고 싶어 했고, 애써 당시 영향력 있는 귀족 정치가였던 뷰트 백작(Earl of Bute) 등과 교류하게 했다.<br />
1762년, 윌리엄은 불과 31세의 젊은 나이에 뉴저지 왕실 주지사(Royal Governor)로 임명된다. 이 파격적인 인사의 이면에는 몇 가지 절묘한 이유와 맞아 떨어진 상황이 있었다.<br />
당시 벤자민은 영국 정부 내에서 매우 존경받는 학자이자 식민지 대리인이었다. 영국 정부는 벤자민의 환심을 사고 그를 영국 편으로 확실히 묶어두기 위한 &#8216;당근&#8217;으로 그의 아들에게 주지사 자리를 내 줬던 것이다.  식민지 전역의 젊은 인재들에게  던지는 긍정 효과도 십분 기대 했을 게다. 벤자민의 친구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던 당시의 정가 최고 실력자 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br />
윌리엄이 혼외자(사생아)라는 사실은 당시 상류 사회에서 이는 큰 약점이었으나, 벤자민의 명성과 정치적 줄대기가 이를 덮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프랭클린 집안의 사생아 전통은 그후 3대에 걸쳐 계속 된다. 윌리엄도 사생아 탬플을 낳았고 탬플도 사생녀 엘렌을 낳았다.<br />
아무튼 당시 벤자민은 아들의 주지사 임명을 당연히 무척 기뻐 했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아들이 영국 체제 내에서 성공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사실 빈한한 가정 출신에 무학에 가까운 프랭크린으로서는 기적을 만든 셈 아닌가.</p>
<p>그때 윌리엄의 총독 임명은 영국 본토와 식민지 전역에 커다란 반향과 화제를 몰고 오게 했고, &#8216;역시 닥터 프랭클린&#8217;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했으며 식민지 사람들은 장원급제한 동리 청년을 축하하듯 저마다 &#8220;그럴줄 알았다&#8217; 며  윌리엄을 칭송 했던 일대 사변이었다.   벤자민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을 게다.<br />
&#8220;내 아들이 영국 국왕의 대리인 총독이 되었으니, 이제 식민지와 본국 사이를 잇는 훌륭한 가교가 되겠지?&#8221;</p>
<p>그런데  벤자민은 아들을 &#8216;영국 시스템의 핵심&#8217;에 앉혀 놓았는데, 정작 본인은 나중에 그 시스템을 부수려는 &#8216;혁명가&#8217;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장 견고한 &#8216;충성파의 굴레&#8217;를 씌워준 사람이 역설적으로 아버지였던 셈이다. 산과 골을 만든 아이러니다.</p>
<p>윌리엄은 진심으로 영국식 입헌 군주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통치 형태라고 믿었다. 특히 한 세기 전의 명예 혁명은 세계사를 바꾼 쾌거 였다고 기염을 토했다.<br />
뉴저지 주지사로 부임한 후, 그는 꽤 유능한 행정가였다. 도로를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식민지인들의 신망을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독립의 기운이 거세지면서, 그는 &#8216;아버지를 따를 것인가&#8217;와 &#8216;국왕에게 한 맹세를 지킬 것인가&#8217;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p>
<p>1764년의 사건은 두 사람의 분열이 시작된 전초전이었고 고랑이 파이기 시작한 사건 이었다.<br />
그때 벤자민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대리인 자격으로 런던을 다시 찾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를 소유하고 있던 펜(Penn) 가문의 특권에 반대하며, 그 식민지를 국왕 직할령으로 바꿔달라고 청원하는 한편 인지세의 부당함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프랭클린의 요청을 냉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거세게 비난했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나서면 본국(영국) 정부가 식민지의 입장을 이해해 악법을 철폐 할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영국에 왔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믿음 과는 달리  오히려 &#8220;건방진 식민지인&#8221; 취급을 받으며 큰 모욕을 당해야 했다. 특히 인지세법(Stamp Act) 문제로 영국 정치인들에게 &#8220;은혜를  모르는 미개한 식민지인의 대변인&#8221;이라며 조롱을 받기도 했다.</p>
<p>벤자민에게 더 큰 문제는 아들 윌리엄의 태도였다. 윌리엄은 당시 뉴저지 총독으로 갓 부임해 뉴저지에 있었다. 벤자민의 기대는 아버지가 영국에서 수모를 당하고 식민지의 권익이 침해받는 상황이니, 아들인 윌리엄도 자신과 뜻을 같이해 영국 정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아버지를  옹호해 주길 바랐다.<br />
하지만 윌리엄은 아버지가 겪는 수모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직무를 유기하거나 영국 정부에 반기를 드는 어떤 행위도 거부했다. 벤자민은 아들에게 자신을 옹호하고 입장을 설명 해주는 편지라도 영국 요로에 보내라고 요청 했지만 윌리엄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윌리엄은 뉴저지에서 영국 정부의 정책(인지세법 타운센드법 등)을 적극 옹호하고 실행 했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이해 하는 척 했지만, 공식 입장과 오고가는 문서 에서는 영국 본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영국에서 겪는 수모를 보며 오히려 &#8220;아버지가 너무 급진적이라 일을 그르치고 있다&#8221;고 언급했고, 자신은 더 더욱 철저히 영국 관료 사회에 편입되려 노력했다.</p>
<p>벤자민은 이를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8216;배신&#8217;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아들을 위해 쌓아온 인맥과 배경이 결국 아들을 영국 편에 서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노여워했다.<br />
그런 반목이 10년  지속 되었고 1774년 칵핏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br />
칵핏(The Cockpit)은 원래 런던 화이트 홀 궁전 내에 있는 방으로, 과거 헨리 8세가 닭싸움(Cockfighting)을 구경하던 장소였다. 18세기에는 영국 국왕의 자문기구인 추밀원(Privy Council)이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던 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역시 정치적인 &#8216;난도질&#8217;을 당하게 된다. 1774년 1월 29일 공포의 1시간 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br />
사건의 발단은 런던에 상주하고 있던 펜주 대리인 프랭클린이 매사추세츠 주지사 토머스 허친슨의 비밀 편지(식민지를 탄압해야 한다는 내용)를 입수해 폭로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반역 행위로 간주하고 프랭클린을 칵핏으로 소환했다.<br />
35명의 추밀원 의원들과 구경꾼들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마치 닭싸움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처럼 프랭클린이 망신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0년 대 중반 이후 영국내 벤자민의 신망은 양쪽으로 극명하게 갈려지기 시작 했다. 그를 시기 질투하는 적들이 많아지기 시작 했던 것이다.<br />
공격수로 법무상 알렉산더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나섰다. 그는 1시간 동안 프랭클린을 향해 &#8220;도둑&#8221;, &#8220;선동가&#8221;, &#8220;신뢰할 수 없는 인간&#8221;이라며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퍼부었다.<br />
프랭클린은 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그 모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당시 그가 입었던 푸른색 벨벳 코트는 훗날 그가 독립 전쟁의 승리를 확정 짓는 조약에 서명할 때 다시 입음으로써 복수를 완성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p>
<p>이 사건 전까지 프랭클린은 어떻게든 영국과 식민지를 화해시키려 했던 온건파였다. 하지만 칵핏에서의 수모를 겪은 후, 그는 영국 제국 내에서 식민지인은 결코 평등한 대접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8220;그는 칵핏에 영국인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미국인이 되어 걸어 나왔다.&#8221; 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이 사건은 그를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모시켰다.</p>
<p>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들 윌리엄 (아래 사진)은 여전히 뉴저지 주지사로서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대중 앞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인격 살인을 당했는데도, 아들 윌리엄은 영국 정부의 편에 서 있었다. 벤자민은 윌리엄이 총독직을 던지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함께 싸워주길 바랐지만, 윌리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65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William_Franklin_painting_attributed_to_Mather_Brown.jpg" alt="" width="299" height="361" /></p>
<p>칵핏 사건 직후 프랭클린은 명예직에 가까웠던 13개 식민지  통합 우체국장직에서도 해임된다. 영국에서의 모든 사회적 지위가 박탈된 것이다. 펜주 의원직도 펜 가문 총독에 의해 박탈 된 때였다.  반면 아들은 여전히 영국의 왕실 총독으로 남아 있었으니, 두 사람의 길은 이때 사실상 완전히 갈라진 셈이다.<br />
두 사람 사이를 봉합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1775년 8월에 있었다. 벤자민이 영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뉴저지의 사우스 햄프턴에서 부자가 만났다. 독립의 기운이 사방에서 활활  불 붙고 있었고 전쟁은 이미 시작된 때였다.<br />
벤자민은 아들에게 &#8220;이제 영국과의 관계는 끝났다. 총독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에 합류하라&#8221;고 설득했다.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총동원해 아들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br />
윌리엄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8220;저는 국왕과 교회에  충성을 맹세한 몸이며, 반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8220;고 맞섰다.  그러면서 당시 막 결성된 대륙군은 오합지졸이며 부랑아 들의 집합이라고 폄훼 했다.  세계 최강 영국군이 있는 한 결코  독립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맞섰다. 이 만남은 화해가 아니라 결별이 되었다. 벤자민은  유언장에 윌리엄에 대해 &#8220;그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그에게 줄 유산이  없다&#8221;고 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캐럴신부의 영향을 받은 벤자민은 후일 유언장을 고쳐 캐나다의 황폐한 땅을 아들에게 물려 주기는 한다.</p>
<p>그런데 윌리엄의 이런 완고한 입장에는 그가 빠져든 영국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 성공회, 종교도 크게 한 몫했다.<br />
윌리엄은 편지 마다 특히 초기편지에는 성공회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곤 했다.  어린시절에는 청교도 회중교회 신자였고 중 장년에 이르러서는 이신론자를 자처했던 벤자민이 필라에서 기반을 닦은 뒤 성공회 교회에 출석 했던 이유도 물론 영국 정가를 의식한 속내도 있었겠지만 아들의 적극적인 권유도 한몫 했다고 보인다.</p>
<p>영국 성공회는 (Anglican Church)는 카톨릭의 전통과 개신교의 신학을 동시에 수용하는 &#8216;개혁된 카톨릭(Reformed Catholic)&#8217;이자 중도(Via Media)를 걷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적 전례를 중시하면서도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주요 특장으로 꼽힌다. 성공회는 &#8220;교황 없는 천주교&#8221;이자 &#8220;전례가 있는 개신교&#8221;의 형태를 띤, 전통과 개혁이 조화된 보편교회라는 것이다.  내부자들의 긍정적인 주장이다.</p>
<p>윌리엄은 벤자민에 보낸 편지에서 특히 성공회의 3대 근거, 전통, 성서, 이성을 들면서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두되, 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신앙을 풍성하게 한다는 얘기였다. 프랭클린 답게 이성에 방점이 찍힌다. .<br />
사도적 계승을 유지 중시하는 보편교회라면서 말씀과 성사의 균형이 이루어 져 있다고 했다. 설교와 성찬례를 동등하게 중요시한다는 얘기다. 구원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되, 인간의 협력(책임)을 강조하는 신인 협력설을 따르고 있어 온건한 칼뱅 주의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꽤 조리있는 분석이다.<br />
윌리엄은 성공회가  중도(Via Media) 중용을 지키며, 교리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정직하게 신앙을 고민하고 사유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열린 토론을 지향한다고 자랑했다.  공동체와 사회 변혁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꼭 맞는 믿음이라고 강조 했다. (69년 켄터베리 주교로 부터 성공회 훈장을 받은 직후의  편지)<br />
이렇듯 읠리엄은  성공회에  열렬하게 빠져 들었고 계속 &#8216;신의 기호&#8217;  &#8216;국왕 폐하의 안녕&#8217;을 되뇌었다.</p>
<p>그 사이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편지가 오갔다 윌리엄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공경하는 어조를 유지하지만, 행간에는 &#8220;아버지는 현실을 모른다&#8221;는 오만한 자기 생각과 &#8220;나는 이제 국왕을 대리하는 뉴저지의 통치자다&#8221;라는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br />
1764년 총독 관저(Perth Amboy)에서 아버지가 런던에서 모욕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윌리엄은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그 순간  부관을 시켜 총독 제복을 가져오라했고 영국왕의 초상화 앞에서 화려한 총독 제복의 단추를 채우며 &#8220;나는 아버지처럼 무시당하지 않겠다&#8221;고 다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칵핏 사건 때도 대동소이 했다.<br />
이랬던 그는 세월과 상황이 변해 연금 당해 있었고 조만간 체포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장원급제의 영광이 역모의 위험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아버지가 지역 민병대 대장과 막 서로 마음을 연 천주교 젊은 신부의 권유로 마지막으로 찾아 갔던 것이다.</p>
<p>그날 허드 대령이 이른 아침 여관으로 마차를 몰고 와 벤자민과 캐럴은 함께 퍼스 앰보이로 향했다.<br />
퍼스 앰보이 총독 관저는 &#8216;프로프라이어터리 하우스(Proprietary House)&#8217;라 불리우는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8216;왕실 총독 전용 관저&#8217;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규모의 육중한 조지아풍(Georgian) 저택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였다<br />
관저에는 적지 않은 대륙군 민병대원들이 꽤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정문 뿐 아니라 현관 그리고 복도며 집무실 앞에 까지 총을 멘 민병대원들이 서 있었다. 윌리엄의 출입이 극도로 제한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관저는 이미 &#8216;금칠한 감옥&#8217;이 되어 있었다.<br />
허드 대령과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벤자민과 존 케럴,  박사와 신부의 출입은 매우 까다로왔을 것이 틀림 없었다.</p>
<p>현관 문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과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지만, 그 화려함이 오히려 벤자민의 낡은 코트와 대비되어 윌리엄의 &#8216;고립&#8217;을 부각하고 있었다. 캐럴 신부도 로만 칼라를 매고 있었지만 그의 양복도 매우 낡고 더러워져 있었다.<br />
“신부님, 내가 무리해서 아들에게 안겨준 &#8216;지위&#8217;와 &#8216;명예&#8217;가 결국 아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구료.”<br />
벤자민은 화려한 저택 내부와 벽 한면을 거의 채우고 있는 영국왕 초상화를 를 보며 &#8220;내가 너를 왕의 종으로 키웠구나&#8221;라는 자책 섞인 분노가 서늘하게 깔렸던지 옆의 캐럴 신부에게 나직히 말했다.</p>
<p>윌리엄은 2층 집무실에 있었다. 서재를 겸한 관저내 그의 공간 이었다.<br />
병사 한사람의 안내로 벤자민과 캐럴, 그리고 허드가 방에 들어 섰다. 관저의 집무실도 꽤 넓은 편이었다. 호화로운 마호가니 큰 책상과 여섯개의 의자가 있는 타원형 태이불이 있었고 벽쪽으로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br />
&#8220;반역자들의 수장께서 내 집에 웬일이십니까?&#8221;<br />
번쩍 번쩍 빛나는 총독 제복을 입은 윌리엄은 벤자민 일행이 들어서자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걸어 오기는 했지만 첫 언사는 너무도 무례하고 가시가 돋혀 있었다.<br />
&#8220;얼굴은 보기 좋구나 빌리야&#8221;<br />
하지만 벤자민은 부드럽게 응대 하며 테이블로 걸어 가 앉았다.<br />
&#8220;그럼 제가 뭐 죽을 상을 하고 있어야 됩니까?&#8217;<br />
윌리엄도 맞은편에 앉았다. 캐럴과 허드는 아직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상황을 보아 두 부자의 시간을 주기 위해 나가기로 했었다.<br />
“집에 있으면서도 늘 이렇게 차려 입고 있냐?”<br />
“반란의 세력 들에게 대영제국과 국왕 폐하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입었습니다.”</p>
<p>“아직도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영국은 이미 우리 부자를 버렸다. “<br />
“아버지를 버렸겠지요.”<br />
&#8220;다시 생각해 볼수 없겠니?”<br />
“그런 말씀 하시려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8217;<br />
&#8220;나도 오고 싶어서 온게 아니라 허드 대령이 하도 졸라서 왔다.”<br />
“대령은 무슨 대령 입니까? 부랑자 집단의 두목이지.”<br />
“허허, 조만간 너에 대한 체포가 있게 된다는 구나, 체포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br />
&#8220;지금도 놈들은 불경하게 저를 감금하고 있습니다.&#8221;</p>
<p>&#8220;체포 되면 감옥으로 가야 하는데 네가 감옥생활을 견딜 수 있겠니?&#8221;<br />
“두렵지 않습니다. 당장 처형만 시키지 않는다면 저는 감옥에서도 국왕 폐하의 함대를 기다릴 것입니다.”<br />
“망나니 같은 불효자식 . 말이 소용이 없구나&#8221;<br />
&#8220;마음대로 생각 하십시오&#8221;   (계속)</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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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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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Thu, 19 Mar 2026 03:24:35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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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비숍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닥터 프랭클린’ 2 –  안동일 작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함께 여행을 떠나 보라는 말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는 몬트리올 에서 필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서로를 잘 알수 있게 되었다. 특히 존 캐럴 신부는 벤자민을 향한 평소의 존경심에 더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비숍 캐럴과  이성과 계몽의  ‘닥터 프랭클린’ 2 –</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함께 여행을 떠나 보라는 말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신부는 몬트리올 에서 필라로 향하는 여정에서 서로를 잘 알수 있게 되었다. 특히 존 캐럴 신부는 벤자민을 향한 평소의 존경심에 더해  그의 인간미에 매료되어 호감이 급상승했다. 사람들이 왜 그를 그리 아끼고 존경하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br />
당시의 관심사가 그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치유와 각오의 정적 속에서도 계속 나눈 대화는 독립전쟁에 관한 대화 였다. 과연 이 전쟁이 가당한가. 그리고 이길 수 있는가 그런 얘기들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후일 따져보면  현명한 노인의 예지력이라고 할까 전쟁과 관련해 너무도 절묘한 예언이 여행중 두 군데서 극명하고 구체적으로  나왔다. 바로 사라토가와 트렌턴에서 였다. 존 캐럴 대주교의 회고록에 극적으로 언급 된다.</p>
<p>여행 초반 조지 호수를 빠져나와 허든슨 강을 따라 올비니로 향하려면 사라토가를 지나야 했다. 그곳도 강이 굽어지면서 유장한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이때 벤자민 노인은 사라토가(Saratoga), 이곳이 미국 독립 전쟁의 &#8216;적벽대전&#8217;이 될 것을 암시하는 복선 깔린 언급을 했던 것이다.<br />
그 무렵 사라토가는 온천이 발견돼 막 개발이 진행되면서 질병 치유의 효과 때문에 각광을 받는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왕당파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고 개발도 그곳의 땅 주인들인 영국 출신 귀족들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었다. 백작 작위를 받은 이곳 영주 윌리엄 더글라스와 당시 이 일대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던 필립 스카일러 영국군 장군이 그 중심이었다. 1770년대 초반, 이들은 이곳의 광천수가 유럽의 스파(Spa)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개발을 시작했고 1775년 무렵에는 이미 작은 콜로니얼 주택과 통나무집 형태의 숙박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p>
<p>온천장(Saratoga Springs)은 사라토가 강변(Hudson River)에서 약 12~15km (8~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숲이 우거진 습지 였는데 그 숲속에서 신비로운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br />
캐럴 신부로서는 잠시 정박 해 온천에 들러 노인에게 휴식과 치유를 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정상으로나 안전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p>
<p>마침 저멀리 숲에서  솟아오르는 증기를 바라보며 캐럴이 말했다.<br />
&#8220;박사님, 저기 숲 너머 샘솟는 온천의 연기가 보이십니까? 왕당파들이 저곳을 유럽의 궁정 휴양지 처럼 꾸미려 한답니다. 세월이 좋았으면 박사님 모시고 온천욕이라도 한번 하는 건데 아쉽습니다.”<br />
“우리 신부님도 쓸데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군 그래. 이 엄혹한 시국에 온천욕이 가당키나 한가?”<br />
그러면서 프랭클린이 지팡이를 짚으며 갑판에서 일어나 강변의 험준한 지형을 살폈다.<br />
“나는 이 유장한 물소리와 저 연기가 우리 대륙군 청년들의 함성이며 그들이 쏜 대포에 영국군 진지가 포화에 허물어지는 모습으로 보인다네.&#8221;<br />
“그런가요. 역시 박사님 답습니다.”<br />
&#8220;신부님, 보시요, 저 숲숙 샘물이 치유의 물이라지만, 이 강변에 큰 일이 일어 날 것 같소. 지형을 보시오. 만약 북쪽의 영국군이 내륙으로 내려온다면, 바로 이곳이 그들의 발목을 잡을 천혜의 덫이 될 것이오.&#8221;<br />
마치 1년 뒤의 새러토가 승리를 예견하는 제갈량 같은 프랭클린의 모습 이었다..</p>
<p>실제 1년 여 뒤인 1777년 10월, 이 강변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격돌했고 대륙군이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 대륙군으로서는 개전 후 가장 큰 승리였다. 더욱이 이 새러토가 전투는 몬트리올에서의 패배를 갚아주는 복수전이었다. 몬트리올에서 대거 내려온 존 버고인의 영국 대군을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과 베네딕트 아놀드 준장의 대륙군이 유인 포위 작전을 펼쳐 6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영국의 명장이라는 버고인의 항복을 받아 내는 대첩을 거뒀던 것이다. (바로 아래사진, 당시의 항복 모습을 그린 역사화)<br />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열강들은 이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북미 식민지 독립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프랑스에 가 있던 프랭클린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프랑스 인들을 자신있게 대륙군도 승리 할 수 있다며 설득 할 수 있었다.</p>
<p>영국 귀족들이 &#8216;치유와 휴양&#8217;을 위해 공을 들여 꾸민 이 온천장이, 불과 1년 뒤 자신들의 가장 비참한 항복의 땅이 됐던 것이다. 캐나다 사절단과 대륙군이  몬트리올과 퀘백에서 맛본 외교적·군사적 실패의 쓴잔이, 바로 이곳 사라토가 치유의 샘물가 에서 개전이래 최대의 대륙군 승리라는 단잔으로 바뀐 것이다.<br />
5월 말의 신록이 우거진 새러토가 강변을 지나며 , 존 캐럴 신부는 노인을 위한 온천욕의 바람이 성사 될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면서도 노인의 예지력이 실제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올렸다.<br />
&#8220;지금은 우리가 쫓겨 내려가지만, 주님의 때가 이르면 이곳의 물줄기가 거꾸로 흘러 승리의 소식을 실어 나를 것을 믿습니다&#8221;<br />
이 영적 예감의 기도는 적중 해 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대첩이 이곳에서 일어 났던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1wSe55ScI2G43UwGSgjjVmI5ANL5sUHOYikcuw9gGA-hIcazCC73B1Bu8kfjxHE5X-iPGfJzVgo_OegneGIFURHFsNTNVr9Gv7VVta80yDQ-wsK8TLgSn48pmlicZmIuFdprVu_1C27J8Jz5hL_sktGNlQVaVRBuNEXPI8NtqS4-1-1.webp" alt="" width="1000" height="662" /></p>
<p>이같은 군사적 예언은 보름 쯤 뒤 일행의 고난 행군이 끝나가던 트렌턴의 강가에서 재현 된다. 델라웨어 강의 거친 물살이 부두의 말뚝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수만 명의 발소리 같기도, 혹은 누군가의 절규 같기도 하다며 노인은 잠시 귀를 막았던 것이다.<br />
말 한대로 트랜턴 부두는 델라웨어 강의 &#8216;폭포선(Fall Line)&#8217;이다. 강물이 암반 지대를 지나며 급해지는 구간이라 실제로 물살이 거세고 부두에 부딪히는 소리가 큰 곳이었다.<br />
이때 벤자민이 듣는 물소리는 단순히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곧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강을 건널 젊은 병사들의 환청처럼 들렸던 것이다. 실제 노인의 놀라운 예지력은 그해 76년 12월 크리스 마스,날 연전 연패 하던 워싱턴 장군의 대륙군이 얼어붙은 이강을 건너 영국군 대군을 습격 공격 해 대승를 거두는 결과로 나타 난다. 대단한 일이다. 워싱턴 장군 군대의 첫 승리였고, 집에 돌아 가겠다고 아우성 치던 대륙군 병사들을 붙잡아 둘수 있었던 최후의 묘수가 되었다.</p>
<p>당시에도 그랬지만 개전 초기 부터 프랭클린이며 워싱턴, 아담스, 제퍼슨, 등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 들이 가장 크게 신경 쓴 것은 모병이었다. 영국에 맞서는 군대의 모집이 가장 큰 관건이었던 것이다.<br />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군(Redcoats)에 맞서 농기구를 던지고 총을 든 젊은이들의 대륙군과 민병대 참여는 인류사적 기적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대륙군이 창설 되면서 민병대가 대륙군으로 편입 됐다고 생각 하는데 독립 전쟁 당시 *민병대(Militia)와 대륙군(Continental Army)은 명확히 구분되는 조직이었으며, 민병대가 모두 대륙군으로 흡수된 것은 아니었다.<br />
왜 민병대가 대륙군으로 흡수되지 않았을까? 시스템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각 식민지는 하나의 &#8216;국가&#8217;처럼 행동했다. 자기 지역을 지키는 민병대를 중앙 정부(대륙회의)의 통제 아래 완전히 넘겨주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br />
민병대원들은 생업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었기에 짧은 기간 자기 마을 근처만 지키고 싶어 했지, 멀리 타 주로 원정을 가는 대륙군에 입대하는 것을 꺼렸다.<br />
따라서 민병대는 정면승부보다는 게릴라전, 보급로 차단, 지역 내 충성파(Loyalists) 감시 등에 특화되었다. 워싱턴은 민병대의 무질서함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역 방어를 맡아주었기에 대륙군이 주력 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br />
요크타운이나 사라토가 전투 같은 큰 전투 에서는 대륙군이 중앙을 맡고, 양 날개나 후방 지원을 민병대가 맡는 식으로 협력했다. 전쟁 초기 &#8216;렉싱턴-콩코드 전투&#8217; 등에서 활약한 민병대 중 크게는 연대 단위 집단, 혹은 개인 단위로 대륙군에 정식 입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민병대는 &#8216;자기 집 앞마당을 지키는 사람들&#8217;이었고, 대륙군은 &#8216;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군대&#8217;였다.</p>
<p>당시 식민지 법에 따르면, 보통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백인 남성은 민병대에 소속되어야 했다. 국가가 총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머스킷 총과 화약통(Powder horn), 탄환을 구비해서 집에 두고 있어야 했다.<br />
평소에는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종사하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지정된 날(Training Day)에 마을 광장에 모여 제식 훈련과 사격 연습을 했다. (이 날은 마을의 축제 같은 분위기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유명한 조직이 미닛맨 (Minutemen)이었다. 민병대원 중에서도 젊고 발 빠른 정예 요원들로, &#8220;1분(Minute) 안에 출동할 준비가 된 사람들&#8221;이다. 이들이 초동 대응을 맡았다.</p>
<p>모든 장정이 민병대 대상이긴 했지만, 전쟁이 터졌을 때 모두가 동시에 전장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관리와 학생, 전문직 종사자는 병적에서 빠져 있었고 소집령이 내려졌을 때 가기 싫은 부유한 집 자제는 돈을 주고 대리인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퀘이커교도처럼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총 들기를 거부해 벌금을 내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당시 차별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이 있었다.</p>
<p>대륙군이 75년 6월 창설될 초기 징집자들에게 봉급 이외에 &#8216;현금 보너스(Bounty)&#8217;와 &#8216;종전 후 토지 지급&#8217;을 약속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들에게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은 가치가 있는 매력적이 제안이었다. 민병대 명부에 있는 사람 중, 더 큰 뜻이 있거나 생계가 막막한 이들이 &#8216;급료&#8217;를 받고 정규군인 대륙군에 정식 입대(Enlistment)를 한 것이다.<br />
하지만 이 약속은 개전 초기부터 어그러 졌다. 대륙회의는 돈이 없었다. 종이화폐(Continental Currency)를 찍어냈지만 초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폭락해 &#8220;한 푼의 가치도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8221;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br />
워싱턴과 아담스등이 청년들을 설득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이같은 &#8216;현실&#8217;이었다.<br />
농번기에 집을 비우면,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가족이 굶어 죽는다. &#8220;조국을 위해 굶어 죽으라&#8221;고 말해야 하는 지도자들의 입술이 얼마나 무거웠겠는가?</p>
<p>초기의 복무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겨우 훈련시켜 놓으면 연말에 &#8220;집에 가겠다&#8221;며 짐을 싸는 병사들을 보며 워싱턴은 &#8220;이것은 군대가 아니라 유령들의 모임이다&#8221;라며 탄식했다.<br />
1776년 뉴욕 전투에서 패배하고 뉴저지로 퇴각하던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br />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병사들이 밤마다 사라졌다. 워싱턴은 &#8220;매일 아침 점호 때마다 부대가 줄어들어 있다&#8221;고 기록했다. 제대로 된 방한화 군화가 없었기에 눈 위에 병사들이 흘린 피 발자국을 보고 부대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몰골의 군대에 합류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거의 &#8216;사기&#8217;에 가까운 설득이었을지도 모른다.<br />
워싱턴은 그무렵 대륙회의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곤 했다.<br />
&#8220;만약 내가 이런 고통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이 직책을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8221;<br />
정치인(대륙회의)들은 뒤에서 말만 많고 보급은 안 해주는데, 현장의 병사들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 사이에서 &#8216;신의&#8217; 그리고 신에 대한 기도로 신의 뜻을 물으면서 버텼다.<br />
76년 말, 많은 대륙군 병사들이 그해 계약이 만료 되면 밀린 봉급을 받고 집에 가려 했다. 대륙군의 와해가 눈앞에 어른 거리던 그 무렵에 트렌턴의 기적과 같은 승전보가 울렸고 이를 기화로 워싱턴의 눈물어린 호소와 설득에 병사들과 의회(대륙회의)가 함께 움직여 3년 혹은 전쟁 종료 시까지 복무하는 장기 계약으로 바뀌었다.</p>
<h4><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3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28012_52307_4413.png" alt="" width="446" height="308" /></h4>
<p>이처럼 모병은 너무도 지난하고 힘든 일이었다. 76년 겨울을 고비로 모병은 만족 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상승 곡선을 그리며 이어 지고 있었고, 프랑스가 참전 하면서 부터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br />
이같은 기적의 모병에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이 대단했다. 당시 전역의 기독교 설교자들은 열에 여덟 아홉 &#8220;영국 왕에 대한 저항은 곧 신에 대한 순종&#8221;이라고 가르쳤다. 하느님의 역사 하심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성공회 목사들 까지도 절반 이상 독립파로 돌아섰다.<br />
&#8216;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8217;는 구호는 단순한 정치 선동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가까웠기에, 식민지의 젊은이들이 신을 의지 하고 전장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p>
<p>다시 트랜턴 부두가로 돌아온다. 델라웨어 강물이 바위와 방파제에 부딪는 소리가 대륙군 청년 병사들의 함성과 같다고 말하는 벤자민이 눈은 게속 유장한 강물을 바라 보면서 옆에 서있는 신부에게 말했다.<br />
“전쟁은 60대 노 정치인들의 탐욕 때문에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 이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신부님.”<br />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죠, 이 세상 어느나라 치고 전쟁없이 건국된 나라는 없습니다. 성서에도 그렇게 나옵니다.”<br />
“그런가요?<br />
“남의 아들들은 감언이설로 사지로 몰아 대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어쩌지 못하는 내 꼴을 비웃는 말 같아서 그러네. 신부님.”</p>
<p>“감언 이설 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br />
트랜턴 강가에 섰을 때 실은 벤자민 프랭클린으로서는 인간적 고뇌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 이었다. 젊은 들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라고 요구 하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어쩌지 못하는 인간적 부끄러움이 그를 한창 엄숩했던  시점이었다.<br />
바로 아들 윌리엄 프랭클린과의 일 때문이었다.<br />
트렌턴으로 오기 전 노인과 신부는 퍼스 엠보이에 총독 관저에 연금돼 있는 총독 윌리엄 프랭클린을 만나고 왔다. 말한대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장남 이다.<br />
필라로 가는 마지막 노선인 바지선 배를 타기 위해선, 트랜튼 부두로 와야 했는데 길목에 버스 엠보이가 있었다. 버스엠보이는 뉴저지 주도의 하나로 총독관저가 있는 곳이었다.</p>
<p>1776년 당시 뉴저지는 아직 동저지(East Jersey)와 서저지(West Jersey)의 전통이 남아 있어 주도가 두 곳이었다. 퍼스 앰보이(Perth Amboy)와 벌링턴(Burlington)이 번갈아 가며 수도 역할을 했다. 두 도시의 중간, 강가에 있는 트렌턴이 뉴저지의 단독 주도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인 1790년이다.<br />
1776년 5월 그날은 그들 부자가 &#8216;돌아올 수 없는 강&#8217;을 건넌 날이었다.</p>
<p>아들 윌리엄은 그때 1월부터 이미 뉴저지 애국파 세력에 의해 가금(House Arrest, 연금) 상태였다. 그가 갖혀 있다는 소식은 몬트리올로 떠나기 전 알았지만 올바니에서 본 신문에는 그의 처지가 연금이 아니라 본격 구금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기사가 있었다. 윌리엄은 연금 상태에서도 비밀리에 영국 왕실에 첩보를 보내려다 적발됐다는 것이었다. .</p>
<p>일행이 퍼스 엠보이를 지난 때는 5월 25일이었다. 존 신부가 길가의 퍼스 엠보이 이정표를 보며 “잠깐 들러 아드님을 만나보시지 않으렵니까?” 하고 조심스레 운을 떠 봤지만 &#8216;그는 내 아들이 아닌지 오래 됐다며 말도 꺼내지 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br />
그때 뉴저지는 뉴욕과는 달리 안전상의 문제는 없었다. 어쨌든 독립파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 이었기 때문이다.<br />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덜컹 거리면 달렸고 트랜턴으로 가기전 마지막 유숙지인 우드 브릿지에 도착해 여관에 들었다. 우드브리지는 퍼스 앰보이와는 바로 이웃으로 당시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잇는 길목이자 트랜턴으로 가는 마지막 타운 이었다.<br />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 그리고 벤자민의 몸에서 나는 여전한 약재 냄새. 70세 노정객이 통풍으로 부어오른 다리를 올리고 낡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을 때, 밖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br />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무사히 우드브릿지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br />
“어서 오시오, 대령, 굳이 이렇게 오지 않아도 될텐데&#8230;”<br />
문에 들어서 프랭클린에게 거수 경례를 했고 박사가 엉저주춤 일어서 손을 잡아 준 중년의 군복 남자는 이지역 민병대 대장 허드 나다니엘 대령이었다.<br />
이곳에도 자주 강연을 왔던 프랭클린 박사와는 구면 이었다.   타운 입구에서 민병대원을 만났는데 그가 급히 달려가 박사의 우드브릿지 도착을 알린 모양이다.</p>
<p>우드브리지 출신 허드 대령은 독립전쟁 전에는 상인(Merchant)이자 지역 사회의 유력 인사였다. 당시 민병대 간부들은 대개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 상인이나 지주 출신이 많았는데, 나다니엘 허드 역시 그중 하나였다.<br />
그는 전형적인 독립파 &#8216;시민 군인&#8217;이었다. 독립 열기가 고조되자 뉴저지 민병대(Militia)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고, 그 공로와 지도력을 인정받아 얼마 뒤 대륙군 준장(Brigadier General)의 지위까지 올랐다.<br />
허드는, 실제로  윌리엄 프랭클린 총독을 체포하고 연금하는 임무를 직접 수행한 인물이다. 이날 만남 얼마 뒤인 1776년 6월 뉴저지 주 의회의 명령을 받은 나다니엘 허드는 무장한 민병대를 이끌고 퍼스 앰보이의 총독 관저로 가 윌리엄을 체포 했고 얼마 뒤에는 커네티컷 감옥에 수감 시킨 주역이 된다.<br />
프랠클린 박사의 건강에 대한 안부 인사가 끝나고 뉴저지 정세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허드는 윌리엄 주지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가 굳이 찾아온 용건이었다.<br />
정식 군복이라기엔 어딘가 투박한, 하지만 정갈하게 닦인 상인 시절의 장화와 그 위에 덧입은 민병대의 푸른 코트. 나다니엘 허드는 이제 장부 대신 머스킷 총을 들고 왕실 총독의 문을 막아서고 왕당파 총독을 압박하고 있는 독립의 선봉군이었다.</p>
<p>“박사님, 저는 우드브리지에서 잡화를 팔던 상인이었지만, 이제는 이 땅의 자유를 지키는 군인입니다. 아드님이신 윌리엄 총독 관저 주변은 제 부하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습니다만, 총독 께서는 여전히 런던에서 올 함대만 기다리며 요지부동입니다. 며칠전 만해도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의회를 소집 한다는 밀서를 몇 안되는 왕당파들에게 반출하려 했습니다. 이건 반역입니다. 이제 저희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br />
마침 의회도 독립파 리더인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박사를 중심으로 새로 결성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뉴저지가 독립 선언에 &#8220;가장 늦게 참여한 주&#8221;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내부의 강온파 정치적 교체 작업 때문이었다.<br />
1776년 초까지만 해도 뉴저지 의회의 주류는 영국과의 화해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뉴저지는 지리적으로 영국 왕당파의 본거지였던 뉴욕과 혁명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매우 조심스러웠고, 주민들의 의견도 갈려 있었다. 경제적으로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고, 퀘이커교도나 성공회 신자들이 많아 급진적인 독립보다는 영국 체제 내의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가 컸었던 것이 사실이다.<br />
그때 독립파 (Patriots)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이 나서 소극적이던 뉴저지 여론을 독립 지지로 돌려세웠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자 목사였던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는 &#8220;독립을 위해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8221;며 분연히 일어선 뉴저지 독립 운동의 결정적 인물이다. 독립선언서 서명자이기도 하다.</p>
<p>실제 얼마 뒤 프랭클린이 필라에 도착한 직후인 1776년 6월 초, 그를 중심으로 한 강경인 독립파들이 주도해 새로운 &#8216;뉴저지 지방 의회&#8217;를 구성했다. 이들은 기존의 미온적인 대륙회의 대표들을 해임하고, 존 위더스푼을 포함한 강경 독립파 5명을 필라델피아로 새로 보냈다. 이 새로운 대표단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것이 6월 28일이었고, 이들이 합류하면서 뉴저지는 비로소 독립 선언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되었다.</p>
<p>아무튼 이는 며칠 뒤,  몇 주 뒤의 일로 나다니엘 허드 대령이 프랭클린 박사를 찾아온 때는 아직 혁명파가 완전히 주정부를 장악하기 전으로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아무리 반역자라 하더라도 독립진영의 좌장 벤자민 플랭클린의 친아들이 이었기 때문에 그의 대한 최종 처분을 박사와 상의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br />
&#8216;박사님의 아들이지만 더 이상 왕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둘 수는 없다.&#8217;는 대령의 말에 70세의 노정객은 이미 아들과 정치적으로 절연한 상태였지만, 친아들을 체포하겠다는 군인 앞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답했다.<br />
&#8220;법대로 집행하시오 (Do your duty according to the law) 대령. &#8221;</p>
<p>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존 캐럴 신부는 &#8216;가족의 해체&#8217;와 &#8216;국가의 탄생&#8217;이 충돌하는 비극의 최단 거리 목격자가 된 셈이었다.<br />
존 신부는 문득 &#8216; 자유를 위해 아비가 아들을 내주어야 하는 이 땅의 운명이 성경 속 아브라함의 시험 만큼이나 가혹하구나&#8221; 고 느껴야 했다.<br />
&#8220;이것이 진정 천주께서 원하시는 공의로운 나라의 모습인가&#8221; 하는 내면의 독백이 솟아 올랐다.<br />
그런데 박사는 단호 했지만 오히려 대령이 유화적으로 마지막 만남을 요청해 왔다.</p>
<p>“박사님, 저희들은 박사님의 열변을 듣고 대륙군에 합류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을 감동시킨 그 열변으로 마지막으로 아드님을 한번만 더 설득해 주십시오. 박사님의 친아드님을 반역자로 체포하기는 저희들도 정말 싫습니다.”<br />
“이사람 참 내 아픈 곳을 너무도 깊이 찌르는 구먼,  글쎄 소용이 없대두&#8230;  대령, 나는 몬트리올의 얼어붙은 강가에서 여기 이 천주교 신부님의 등에 업혀 살아 돌아왔다네. 그런데 정작 내 아들은 따뜻한 관저 안에서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구료. 자네의 총보다 무서운 것이 그 아이의 고집이라네.&#8221;<br />
&#8220;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보시고 최후의 설득을 해 주십시오. 내일 아침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8221;<br />
이 말을 듣고 박사가 옆의  신부를 쳐다 봤다.  신부는 상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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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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