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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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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미주 뉴욕 뉴스 &#38; 커뮤니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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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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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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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19 Oct 2026 21:13:12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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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60;5&#62;  안동일 작  1778년 5월 6일, 날씨도 유난히 화창했던 봄날의 밸리포지 대연병장. 1만 2천 대륙군의 보무도 당당한 사열 분열이 거행되고 있었다. 불과 6개월 전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에서 우왕좌왕 숲속에 엉키던 군대가 프로이센 정규군처럼 오와 열을 맞추며 행진했다. 군악대의 취주악...]]></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h4>
<h4>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lt;5&gt;</h4>
<p><strong> 안동일 작 </strong></p>
<p>1778년 5월 6일, 날씨도 유난히 화창했던 봄날의 밸리포지 대연병장. 1만 2천 대륙군의 보무도 당당한 사열 분열이 거행되고 있었다. 불과 6개월 전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에서 우왕좌왕 숲속에 엉키던 군대가 프로이센 정규군처럼 오와 열을 맞추며 행진했다. 군악대의 취주악 연주에 맞춰 번쩍이는 총검(베요넷)을 착검한 머스킷을 메고, 병사들은 사열대 위 마상의 총사령관을 향해 총검 경례를 올렸다.</p>
<p>일사불란했던 분열 행진이 끝나고 이어서 기념 축포 사격이 벌어졌다. 선발된 3천여 병력이 포병대의 13발 축포(13개 주 상징) 신호에 맞춰 2열 횡대로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펼쳤다.</p>
<p>‘사격의 파도(Running Fire)’가 이어졌다. 우익의 첫 번째 머스킷총이 발사되면 바로 옆 병사가 쏘고, 그다음 병사가 쏘며 수천 정의 총성이 2열 횡대를 따라 뱀이 지나가듯 끊김 없이 촤르르륵 번져나가는 고난도의 연속 사격이었다.</p>
<p>첫 번째 줄 끝까지 사격이 도달하면 즉각 두 번째 줄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거꾸로 총성이 파도처럼 흘러갔다. 단 한 번의 불발이나 끊김 없이 완벽한 리듬으로 성공하자 장교들과 병사들은 전율했다.</p>
<p>포병대의 대포 발사와 머스킷 연속 사격이 세 차례 끝날 때마다, 병사들은 모자를 공중에 집어던지며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p>
<p>1차 사격 후에는 &#8220;프랑스 국왕 폐하 만세!(Long live the King of France!)&#8221;를 외쳤고, 2차 사격 후에는 &#8220;유럽의 우호적인 열강들 만세!(Long live the friendly European Powers!)&#8221;를 외쳤다. 그리고 3차 사격 후에는 &#8220;미국 연방 만세!(To the American States!)&#8221;를 외쳤다.</p>
<p>모국 프랑스의 백합 문장(부르봉) 깃발과 새로 제정된 원형 성좌의 성조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대륙군 병사들이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향해 &#8220;비브 르 루아(Vive le Roi)!&#8221;를 외치는 광경을 보며 라파예트는 눈물을 글썽였다.</p>
<p>워싱턴은 프랑스식 예복을 갖춰 입은 라파예트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8220;후작, 그대의 조국과 그대의 헌신이 이 나라를 구하게 되었소&#8221;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p>
<p>마사 워싱턴, 너새니얼 그린의 부인 캐서린(키티) 그린, 헨리 녹스의 부인 루시 녹스 등 사령부 숙소에 머물며 겨울을 함께 견뎌낸 여인들이 사열대 단상에서 양산을 받쳐 들고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었다.</p>
<p>대륙회의 군사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밸리포지 현장에 머물며 보급 개혁을 이끌던 찰스 캐럴은, 몇 달 전 얼어 죽어가던 누더기 병사들이 어엿한 전사들로 거듭난 광경을 바라보며 품속의 묵주를 쥐었다. 파리 유학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프랑스와 신대륙의 결합’,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갈구하던 천주교도들의 기도가 현실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p>
<p>이날 밸리포지에서 열린 프랑스-미국 동맹 비준 기념 열병식은 단순한 축하연을 넘어, 오합지졸 난민군에 불과했던 대륙군이 ‘유럽식 정규군’으로 재탄생했음을 만천하에 과시한 독립전쟁 최고의 대전환점이었다.</p>
<p>이 행사는 공식 용어로 ‘푀 드 조아(Feu de Joie, 환희의 불꽃 / 축포의 연쇄 사격)’라고 불렀다. 프랑스어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1778년 2월 6일 파리에서 체결된 ‘프랑스-미국 동맹조약(Treaty of Alliance)’ 문서가 5월 2일경 대서양을 건너 요크의 대륙회의에 도착했다. 대륙회의는 4일 이를 만장일치로 비준했고, 이튿날 밸리포지 사령부에 공식 전달되었다.</p>
<p>워싱턴은 즉각 이튿날인 5월 6일을 전군의 축일로 지정하면서, 오전 9시 전군이 각 여단별로 군목의 주도 아래 감사의 예배와 기도를 올리고, 오전 11시 30분 그랜드 퍼레이드(Grand Parade) 연병장으로 집결하라는 상세한 훈령을 하달했다.</p>
<p>‘연쇄 파도 사격(Feu de Joie)’은 이날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로, 슈토이벤 남작이 2월 하순부터 밸리포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p>
<p>지휘를 마친 훈련 교관 슈토이벤 남작과 드칼브 남작이 분열 사격 시범을 성공리에 마친 뒤 우수 부대 기수들을 이끌고 워싱턴 총사령관 앞으로 행진해 왔다. 프로이센식 제식 훈련을 완성한 슈토이벤과 유럽 정규군 베테랑인 드칼브가 각 여단 가운데 가장 자세가 흐트러짐 없고 사격 속도가 빨랐던 최우수 연대의 기수들을 인솔해 사령관석 앞으로 행진해 온 것이다.</p>
<p>군기 깃봉에 표창 리본(수술, Cravat/Streamer)을 묶어 달아주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깃봉 끝(창날 바로 아래)에 공로나 명예를 기리는 수술 달린 비단 띠를 매어주는 것은 유럽 군대(특히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최고 영예 의식이었다.</p>
<p>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 메릴랜드, 그리고 라파예트의 ‘경보병 특공 여단(Light Infantry Corps)’이 영예를 안은 부대였다. 기수들이 총사령관 워싱턴을 향해 깃발을 45도로 깊이 숙여 경례(Dipping the Colors)를 바쳤고, 워싱턴이 해밀턴의 도움을 받아 흡족한 표정으로 직접 푸른색과 붉은색 비단 리본을 깃봉 끝에 결연히 묶어주었다.</p>
<p>버지니아 전열부대(Virginia Line)는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공격 태세를 갖춘 치명적인 방울뱀(Rattlesnake)이 그려져 있는 컬페퍼 미닛맨 기(The Culpeper Flag)를 들었고, 라파예트의 특공 부대는 짙은 청색 바탕에 월계관을 문 수탉(골루아의 닭), 그리고 그 아래 &#8220;CUR NON&#8221;이라는 금색 자수가 새겨진 도안의 새로운 깃발을 들었다.</p>
<p>라파예트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이 라틴어 구호는 &#8220;CUR NON?(왜 안 되겠는가? / Why Not?)&#8221;이라는 가문의 모토로, 청년 라파예트의 불꽃같은 모험심과 결기를 상징했다. 실제로 라파예트는 자기 사비를 털어 부하 장교들에게 프랑스산 명품 사벨(군도)과 짧은 망토를 선물했는데, 이때 망토와 단검 손잡이에도 자신의 가문 문양과 독립군의 상징을 결합해 새겨 넣었다.</p>
<p>버지니아 깃발 상단에는 패트릭 헨리의 명언인 &#8220;LIBERTY OR DEATH(자유가 아니면 죽음을)&#8221;, 방울뱀 아래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풍자에서 유래한 &#8220;DONT TREAD ON ME(나를 밟지 마라)&#8221;가 적혀 있었다. 워싱턴의 고향 부대이자 숲속 저격병들(사냥 셔츠를 입은 셔츠맨)의 상징으로 영국군에게 가장 공포를 주었던 깃발이다.</p>
<p>밸리포지 대연병장 사열대에 프랑스 귀족 가문의 푸른 비단 문양이 바람에 번뜩이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p>
<p>깃봉에 수술을 매단 깃발이 다시 봄바람 속에 펄럭이자, 총사령관 워싱턴의 눈길이 자연스레 뒤편의 성조기와 그 옆에 나란히 꽂힌 총사령관기, 그리고 그 밖의 사단·여단기들을 번갈아 훑었다.</p>
<p>기수들은 돌아갔고 슈토이벤과 드칼브는 지휘석에 합류했다. 워싱턴이 감회에 젖은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p>
<p>&#8220;불과 2년 전, 보스턴 프로스펙트 힐에서 우리가 처음 내걸었던 &#8216;그랜드 유니언 기&#8217;를 기억하는가? 그땐 붉고 흰 열세 줄무늬 구석에 아직 영국의 유니언 잭이 버젓이 박혀 있었지. 국왕에게 충성하면서도 의회의 폭정에 맞선다는 어정쩡한 저항이었으니까&#8230; 그때 영국 놈들은 우리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줄 알았다더군.&#8221;</p>
<p>곁에 서 있던 참모 너새니얼 그린이 말을 받았다.</p>
<p>&#8220;하지만 작년 여름 필라델피아 의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그 굴레를 영원히 찢어발겼지요. 영국의 십자가를 뜯어내고 푸른 하늘과 새로운 성좌(星座)를 상징하는 열세 개의 백색 별을 박아 넣었으니 말입니다.&#8221;</p>
<p>&#8220;그렇지. 비록 보급이 턱없이 달려 아직 전군에 똑같은 성조기를 쥐여주진 못했지만&#8230; 저 바래고 찢긴 컬페퍼의 방울뱀 기와 버지니아의 깃발들이야말로 밸리포지의 혹한을 버텨낸 우리 대륙군의 진짜 얼굴이 아니겠소.&#8221;</p>
<p>&#8220;새로 만든 길버트(라파예트의 본명) 장군의 프랑스기 역시 제일 멋집니다.&#8221; 누군가 한마디를 보탰다.</p>
<p>5월 6일 그랜드 퍼레이드 광장에는 규격화된 성조기들이 일렬로 나부낀 것이 아니라, 총사령관 본부의 푸른색 워싱턴 기, 각 주 연대들이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며 간직해 온 낡고 바랜 고유 연대기들, 그리고 당시 막 제작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 형태의 13개 별 성조기가 섞여서 휘날렸다. 프랑스 동맹을 기념하는 날이었던 만큼, 프랑스 국왕을 상징하는 백색 백합 문양(Fleur-de-lis) 깃발이 상징적으로 함께 배치되었다.</p>
<p>전군(全軍)을 하나로 아우르는 단일한 육군 군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군은 각 주(State)와 의용대 단위로 급조된 군대였기 때문에, 연대와 대대마다 고유한 연대기(Regimental Colors)를 자체 제작해 들고 다녔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83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이미지_096.png" alt="" width="298" height="166" /></p>
<p>펜실베이니아 연대는 방울뱀과 &#8220;Don&#8217;t Tread on Me&#8221;가 그려진 깃발을 썼고, 매사추세츠 연대들은 자유의 나무나 솔나무(Pine Tree) 문양 깃발을 휘날렸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초승달 모양의 몰트리 기(Moultrie Flag)를 사용했다. 워싱턴의 상징기는 푸른 비단 바탕에 13개의 백색 6각 별(Star)이 수놓인 사령관기였다. 워싱턴이 머무는 지휘소 텐트와 막사 앞에는 늘 이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p>
<p>1777년 6월 성조기 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군수품과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던 대륙군 육군에 성조기가 즉각 지급되지는 못했다. 초기 성조기는 해군 군함 식별용으로 먼저 쓰였다.</p>
<p>사열이 끝난 뒤, 워싱턴은 사령부 인근 연병장 야외에 대형 천막(마퀴 텐트)을 치고 장교들과 민간 외빈들을 위해 수백 석 규모의 오찬 연회를 열었다.</p>
<p>찬란한 5월의 햇살 아래, 대형 야외 테이블에는 밸리포지 인근 농가에서 구한 신선한 양고기와 쇠고기 바비큐, 갓 구운 빵, 그리고 로버트 모리스와 캐럴의 보급망을 통해 조달된 프랑스산 적포도주와 럼주가 풍성하게 차려졌다.</p>
<p>워싱턴은 병사들을 잊지 않았다. 모든 일반 사병들에게도 1인당 1질(Gill, 약 반 컵/120ml)의 럼주 또는 위스키와 칠면조 고기 등의 특별 배급이 실시되어 전군이 축배를 들었다.</p>
<p>연회가 끝난 뒤 워싱턴과 참모들이 말을 타고 천막을 나설 때, 길가에 늘어선 수천 명의 병사들이 &#8220;워싱턴 장군 만세!&#8221;를 연호하자 워싱턴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병사들을 향해 여러 차례 머리를 숙였다.</p>
<p>위스키와 럼주를 배급받아 각 연대 막사나 모닥불 가에서 축제를 벌이던 오후와 저녁 뒤풀이 시간에, 병사들은 피리를 불며 &#8216;양키 두들&#8217;을 경쟁하듯 돌림노래로 목청껏 떼창했다. 부대마다 부르는 가사가 조금씩 달랐지만 후렴구만은 한목소리였다.</p>
<p>Yankee Doodle keep it up, (양키 두들아, 계속해라,)</p>
<p>Yankee Doodle dandy, (멋쟁이 양키 녀석아,)</p>
<p>Mind the music and the step, (음악에 맞춰 발을 맞추고,)</p>
<p>And with the girls be handy! (아가씨들에게도 싹싹하게 굴어라!)</p>
<p>양키 두들(Yankee Doodle)은 당시 사실상 독립군의 비공식 국가이자 대표 군가였다. 짓궂은 가사 때문인지 공식 열병식 대열에서 다 같이 합창하지는 않았지만, 그 멜로디는 군악대의 피리와 북으로 늘 연주되었다. 원래 영국군이 식민지 촌뜨기들을 조롱하려고 만든 노래였으나, 렉싱턴-콩코드 전투 이래 대륙군이 역으로 승리의 상징으로 삼아 불렀다. 처음엔 매사추세츠 등 뉴잉글랜드 지역 군대들이 주로 불렀으나 이내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이날 공식 행사가 끝난 뒤 열린 장교 만찬이나, 병사들에게 럼주가 배급되어 환호하던 뒤풀이 자리에서도 빠질 수 없는 가락이었다.</p>
<p>열병 분열 사격 시범 때는 혹독한 제식 훈련의 성과를 증명하는 엄숙한 자리였기에 잡담이나 제멋대로의 노래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침묵과 정적 속에서 군악대의 건조하고 날카로운 피리(Fife)와 북(Snare Drum) 소리만이 비장하게 울려 퍼졌지만, 저녁의 분방한 합창 경쟁은 이와 대비되는 또 다른 청춘들의 건강하고 뜨거운 함성이었다.</p>
<p>이날 열병식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이는 찰스 캐럴이었다.</p>
<p>피 묻은 발자국이 찍히던 눈밭 위에 푸른 새싹과 야생화가 만개하고, 그 위로 프로이센식 제식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반짝이는 총검을 세우고 도열한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부터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고 눈가에는 물기가 어렸다.</p>
<p>오른쪽 끝 연대에서 시작된 소총 발사가 좌측 끝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한 바퀴 돌아 나가는 총성과, 대포 13발의 묵직한 굉음 직후 1만여 명의 거친 목소리가 일제히 터뜨리는 &#8220;허자!(Huzza!)&#8221;의 메아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드는 광경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고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p>
<p>개별적인 총성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대열을 타고 굽이쳐 흐르는 연속 사격의 음향과 매캐한 화약 냄새는 대륙군이 마침내 하나의 ‘조직된 정규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승리의 내음이었다.</p>
<p>&#8220;프랑스 국왕 만세!&#8221; 함성이 울려 퍼질 때, 단상 아래서 말을 탄 라파예트가 감격의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마사 워싱턴 곁에 서 있던 찰스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지난겨울 랭커스터 여관 난롯가에서 맞잡았던 묵주와 성 미카엘 기도가 기적의 응답으로 돌아왔음을 눈빛으로 확인했다.</p>
<p>이날의 기적 같은 독립군의 부활은 누가 뭐래도 찰스 캐럴의 지대한 공헌 덕분이었다.</p>
<p>그는 태반의 병사들이 전염병에 신음하던 병영에 인두 접종을 결단하게 하여 저들을 다시 일어서게 한 일등 공신이었고, 병사들의 군복을 그나마 사람 꼴을 갖추게 만든 보급망을 뚫어낸 수훈 갑이었다. 풍전등화 같았던 총사령관 워싱턴의 지휘권을 의회의 음모로부터 확고하게 지켜낸 공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p>
<p>인두 접종을 결정하던 날의 광경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p>
<p>찰스는 결연한 눈빛으로 워싱턴과 군의관들을 돌아보았다.</p>
<p>&#8220;장군, 몬트리올의 참극을 여기서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병사들에게 즉각 인두 접종(Variolation)을 명하십시오. 두려워 떨며 피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병마를 통제해야 합니다.&#8221;</p>
<p>군의관들이 접종 후 찾아올 고열로 병사들이 쓰러질 것이라며 웅성거리자, 찰스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p>
<p>&#8220;열병을 다스릴 방도는 내가 압니다. 파리 예수회 학당 시절, 페루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예수회 나무(Jesuit Bark)’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 껍질 가루에 고열을 내리고 기력을 돋울 레몬과 꿀을 타서 큰 솥에 달여내 병사들에게 마시게 하십시오. 요크와 랭커스터의 약재상에 있는 기나수 껍질과 레몬은 내 은화로 모조리 사들일 것입니다. 병사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도허레건 장원의 꿀벌통을 다 털어서라도 밸리포지로 실어 나르겠습니다!&#8221;</p>
<p>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는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신임 병참총감을 설득하던 날의 진지함도 다시금 떠올랐다.</p>
<p>너새니얼이 병참총감(Quartermaster General) 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하고 의회의 승인을 관철시킨 일은, 찰스 캐럴이 밸리포지에서 이뤄낸 가장 결정적이고 빛나는 정치·행정적 업적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었다.</p>
<p>당시 병참총감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기피 1순위의 독이 든 성배였다. 너새니얼 그린은 워싱턴 휘하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다. 전장에서 군대를 이끌고 무공을 세워 영광을 누려야 할 장군에게, 곡식 자루를 세고 마차 바퀴를 수리하며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는 병참감 자리는 군인으로서 사형 선고와 같았다.</p>
<p>&#8220;역사는 병참장교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명예가 묻히는 무덤입니다.&#8221;</p>
<p>완강히 고사하는 그린에게 찰스는 대승적 설득을 펼쳤다. 지금 군대를 살려내지 못하면 봄날의 전투도, 조국의 독립도 없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했다. 동시에 그린의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8220;전투가 벌어지면 주력의 우익 지휘권을 보장한다&#8221;는 파격적인 야전 투입 조건을 약속했다.</p>
<p>당시 의회(게이츠 일파)는 보급 실패의 책임을 워싱턴에게 뒤집어씌우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워싱턴의 심복인 그린이 병참총감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찰스 캐럴은 군사조사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와 자신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 1778년 3월 초 의회가 그린의 임명을 전격 승인하도록 관철시켰다.</p>
<p>그린은 취임하자마자 찰스가 제공한 은화와 모리스의 신용망을 지렛대 삼아,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 일대에 체계적인 병참 거점 시스템을 구축했다. 마차 징발 체계를 뜯어고치고 강을 통한 수운을 개척해, 불과 몇 주 만에 밸리포지에 식량과 가죽, 의복이 정기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만들었다.</p>
<p>물론 지금 찰스의 곁에 서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는 마사 워싱턴 여사와 장군 부인들의 헌신도 큰 몫을 했다. 거기에 1778년 4월 올버니에서 돌아온 라파예트와 드칼브의 귀환은 밸리포지 봄날의 화룡점정이었다.</p>
<p>올버니에서 밸리포지로 공수해 온 무기와 양질의 화약, 군복용 모직과 면직 보급품은 라파예트의 명성과 재력만큼이나 막대한 양이었다. 백전노장 드칼브 역시 슈토이벤보다도 한층 노련한 군사 훈련의 대가였다.</p>
<p>오네이디족 전사들까지 이끌고 밸리포지로 귀환한 라파예트에게 워싱턴은 다시금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워싱턴은 청년 장군을 기존 버지니아 사단에 묶어두는 대신, 전군에서 가장 날랜 정예병 2천 2백 명을 차출해 총사령관 직속의 ‘독립 기동 군단’ 지휘봉을 맡겼다.</p>
<p>대륙군 전군에서 가장 기동력이 뛰어나고 사격술이 정묘한 정예병 2,200명(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의 경보병 및 모건 라이플 연대 일부)과 야포 5문, 그리고 라파예트가 올버니에서 데려온 오네이디족 인디언 척후병 47명이 배속되었다. 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훗날 5월 배런힐의 포위망을 기적처럼 탈출하고 6월 몬머스의 화염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p>
<p>여기에는 당시 대륙군 지휘부의 미묘한 사정과 워싱턴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었다. 라파예트가 요크와 올버니로 떠나며 사단장 자리를 비운 사이, 원래 그 사단에 속해 있던 윌리엄 우드퍼드(William Woodford) 준장과 찰스 스콧(Charles Scott) 준장이 각자 여단 병력을 수습해 훌륭히 통솔하고 있었다.</p>
<p>이미 대륙회의로부터 ‘소장(Major General)’ 계급을 받은 라파예트에게, 이미 부사령관급 준장들이 장악하고 있던 기존 버지니아 편제를 다시 쪼개어 돌려주는 것은 군내 위계상 불필요한 마찰을 낳을 수 있었다.</p>
<p>워싱턴은 개인적 총애에 앞서 라파예트의 대담한 공격성과 빠른 기동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정된 방어선을 지키는 일반 사단보다, 사령관 직속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해 척후와 선봉 타격을 도맡는 기동 부대의 지휘봉을 쥐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다.</p>
<p>실제로 라파예트는 열병 행사 직후인 5월 18일, 2,200명의 정찰 부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영국군 1만 6천 명의 3면 포위망에 갇혔으나, 침착하게 기만술을 펼치며 병력 손실 없이 전군을 탈출시켜(배런힐 전투) 다시 한번 워싱턴과 전군의 찬사를 받았다. 이 기동 지휘력을 인정받았기에 6월 말 몬머스 전투에서도 워싱턴은 찰스 리 장군에게 전군 선봉을 맡기기 전, 원래 라파예트에게 4천여 명의 선봉 공격 부대를 맡기려 했던 것이다.</p>
<p>그사이 계절은 6월로 접어들었고, 프랑스 해군의 입항이 초읽기에 들어갔다.</p>
<p>마침내 밸리포지에 낭보가 당도했다. 프랑스 함대가 델라웨어만 해상을 봉쇄할 것을 두려워한 영국군 신임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이 6월 18일 새벽 3시, 1만 5천 병력과 1,500대의 마차를 이끌고 필라델피아를 비운 채 델라웨어강을 건너 뉴저지를 거쳐 뉴욕으로 육로 퇴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p>
<p>워싱턴은 필라델피아 수복의 기쁨에 취해 개선식을 여는 대신, &#8220;도망치는 영국군 후미를 쳐서 결단을 낸다&#8221;며 곧바로 뉴저지 추격전을 결단했다.</p>
<p>영국군이 빠져나가자마자 필라델피아로 무혈 입성한 주인공은 워싱턴이나 대륙군 본대가 아니라, 사라토가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야전 지휘가 불가능했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과 그가 이끄는 소규모 소총 분견대였다.</p>
<p>워싱턴은 아놀드를 필라델피아 군정사령관(Commandant)으로 임명해 시내 치안과 왕당파 잔당 청산, 군수 물자 회수를 맡겼다. (이곳에서 아놀드는 왕당파 명문가의 18세 미녀 페기 쉬펀을 만나 결혼하고, 사치와 부패 혐의로 의회와 갈등을 빚다 결국 배신자로 전락하는 비극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p>
<p>대륙군이 6개월 동안 눈물과 굶주림으로 지켰던 밸리포지 목책을 비우고 떠난 날은 1778년 6월 19일이었다.</p>
<p>폭우가 쏟아져 온통 진흙탕이 된 길을 뚫고 워싱턴과 대륙군 본대 1만 2천여 명은 비를 맞으며 환호하는 주민들의 배웅 속에 오두막 야영지를 뒤로하고 행군을 시작했다. 6개월 전 피 묻은 맨발로 절룩거리며 들어왔던 그 패잔병 같던 군대가, 반년 만에 프로이센식 보폭으로 흙탕물을 튀기며 당당하게 캠프를 나서는 모습은 주민들은 물론 병사들 자신에게도 가슴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다.</p>
<p>스쿨킬강을 건너 불과 8~10마일 떨어진 노리턴(Norriton, 현 노리스타운 Norristown 근교)에 첫 텐트를 쳤다. 워싱턴은 현지 의사였던 섀넌 박사(Dr. Shannon)의 저택에 본부를 차렸다. 찰스 리 소장 휘하의 6개 여단 선발대가 먼저 델라웨어강 도하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진발했다.</p>
<p>6월 20일부터 23일까지는 코리엘스 페리 도하 작전이 이어졌다. 버킹엄(Buckingham)을 지나 델라웨어강 북쪽 도하 지점인 코리엘스 페리(Coryell&#8217;s Ferry, 현 펜실베이니아 뉴호프와 뉴저지 램버트빌 사이)에 당도했다.</p>
<p>필라델피아 하류는 영국 해군의 위협이 있었기에 상류인 코리엘스 페리를 건넜다. 나룻배와 평저선들을 징발해 나흘 동안 1만여 병력과 말, 대포를 뉴저지 땅으로 실어 날랐다.</p>
<p>6월 24일과 25일, 프린스턴 북서쪽 호프웰(Hopewell)에 진을 친 워싱턴은 최고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영국군 포로 생활에서 막 풀려나 복귀한 찰스 리(Charles Lee)는 &#8220;세계 최강 영국 정규군을 야전에서 건드리지 말고 뉴욕으로 그냥 보내주자&#8221;며 결전을 완강히 반대했다.</p>
<p>반면 라파예트, 앤서니 웨인, 너새니얼 그린, 존 로렌스 등 청년 장교들은 &#8220;슈토이벤 밑에서 피땀 흘려 훈련한 우리 군대를 시험할 절호의 기회다. 클린턴의 후미를 쳐부숴야 한다&#8221;고 격렬히 주장했다.</p>
<p>워싱턴은 라파예트의 손을 들어주며, 그에게 약 4,000명의 정예 선발대 지휘권을 맡겨 영국군을 요격하도록 명령했다.</p>
<p>&nbsp;</p>
<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83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download-1-1.jpg" alt="" width="504" height="334" /></p>
<p>라파예트는 크랜베리(Cranbury)를 거쳐 몬머스 결전의 전진기지인 잉글리시타운(Englishtown)에 도착해 마을 여관(Village Inn)에 사령부를 차렸다. 이때 물러서 있던 찰스 리가 &#8220;선발대 규모가 커졌으니 서열상 내가 지휘해야 한다&#8221;며 억지를 부려 라파예트의 지휘권을 가로채는 군사적 갈등이 폭발했다. 라파예트는 분통이 터졌지만 군율을 존중해 불평 없이 선봉부대의 2인자 자리를 받아들였다.</p>
<p>6월 28일 드디어 불을 뿜은 몬머스 전투(Battle of Monmouth)는 필라델피아를 버리고 뉴욕으로 퇴각하는 영국군을 추격해 벌인 대회전이었다. 대륙군의 추격을 눈치챈 영국군은 교묘한 반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라파예트의 선봉대는 적의 단순한 후미가 아니라, 양쪽으로 전열을 펼친 영국 정예 본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p>
<p>기온이 38도(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밸리포지에서 단련된 대륙군은 영국 정규군 척탄병들과 총검 백병전을 벌이며 전열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는 역사적인 전투를 치러냈다.</p>
<p>사열식에서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메릴랜드의 노련한 고참병들과 라파예트의 특공여단 사수들이 펼친 사격 시범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곧 닥쳐올 영국군과의 진검승부를 대비한 실전 리허설이었던 셈이다.</p>
<p>찰스 리 장군의 배신에 가까운 무단 후퇴 명령으로 전선이 완전히 붕괴될 뻔했으나, 워싱턴이 직접 전선으로 달려와 리 장군을 격노하여 질타하고 전열을 수습했다. 이때 라파예트는 슈토이벤과 함께 흔들리는 전선을 사수하며 전략적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대륙군의 뜻밖의 저력에 질린 영국군은 어둠을 틈타 뉴욕으로 퇴각을 서둘렀다.</p>
<p>몬머스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뚫고 영국군을 뉴욕으로 몰아넣은 뒤에도, 워싱턴은 환호하는 옛 수도 필라델피아로 개선하지 않았다. 아놀드 장군에게 필라델피아의 치안을 맡긴 총사령관의 시선은 오직 북쪽, 영국군 본진이 웅크린 뉴욕만을 겨누고 있었다. 군대는 허드슨강을 건너 화이트 플레인스에 포위망을 쳤고, 그해 겨울엔 뉴저지 미들브룩의 험준한 산자락 아래 통나무 막사를 지어 대륙의 혹한을 다시 견뎌냈다.</p>
<p>몬머스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륙군은 6월 28일의 격전을 치른 뒤 지친 군대를 이끌고 뉴저지 중부 뉴브런즈윅으로 이동해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며 며칠간 휴식을 취했다.</p>
<p>7월 중순, 군대를 북쪽으로 진군시켜 킹스 페리(King&#8217;s Ferry)를 통해 허드슨강을 건넜고, 7월 말부터 늦가을까지 뉴욕 북부 화이트 플레인스(White Plains)에 거대한 진지를 구축했다. 2년 전(1776년) 쫓겨나듯 후퇴했던 바로 그곳에 다시 진을 치고, 뉴욕 맨해튼에 갇힌 영국군 클린턴 본대를 압박·감시한 것이다.</p>
<p>밸리포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낸 대륙군이 그다음 겨울(1778년 12월 ~ 1779년 6월)을 보낸 공식 동계 숙영지는 바로 뉴저지주 서머싯 카운티의 미들브룩(Middlebrook, 현 바운드 브룩 및 서머빌 일대)이었다. 와충 산맥(Watchung Mountains) 바로 아래 자리 잡아 영국군이 기습하기 어렵고, 산꼭대기 관측소(워싱턴 록)에서 뉴욕과 뉴저지 평야의 영국군 동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p>
<p>조지 워싱턴은 서머빌의 월리스 하우스(Wallace House)를 본부로 사용했고, 슈토이벤 남작은 사우스 바운드 브룩의 스타츠 하우스(Staats House)에 자리를 잡았다. 헨리 녹스 장군은 플러커민(Pluckemin)에 사령부를 두고 미국 최초의 포병 사관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전투하는 병참감’ 너새니얼 그린은 판 벡텐 하우스(Van Veghten House)에 여장을 풀었다.</p>
<p>밸리포지에서 워낙 호되게 고생한 데다 병참감으로 너새니얼 그린이 자리를 잡고 슈토이벤의 군정이 확립되어, 미들브룩 겨울 숙영지는 대륙군 역사상 가장 덜 굶주리고 보급과 위생이 훌륭했던 ‘모범적인 겨울’로 기록되어 있다.</p>
<p>워싱턴은 몬머스 전투가 끝난 뒤 반년이 지난 1778년 12월 말이 되어서야 군대를 미들브룩 동계 막사에 안정적으로 배치해 두고, 군정 보고 및 1779년 작전 예산 협의를 위해 대륙회의가 열리고 있던 필라델피아를 라파예트와 소수 참모만을 대동하고 단독 방문했다.</p>
<p>그때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서 대륙회의 의원들과 만찬을 갖고, 찰스 캐럴이나 헨리 로런스 등 지도자들과 전후 재정과 프랑스 해군 연합 작전을 논의했다. 그렇게 서둘러 논의해야 할 절박한 까닭이 있었다.</p>
<p>7월 말 마침내 도착한 프랑스 함대와의 연합 작전에서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돕기는커녕 오히려 양국 간의 분규만 깊어졌다.</p>
<p>그사이 치른 주요 전투가 바로 로드아일랜드 전투(1778년 8월)였는데, 프랑스 해군의 파행과 에스탱(d&#8217;Estaing) 제독과의 갈등이 정점에 달한 전투였다.</p>
<p>몬머스 이후 첫 대규모 미·불 연합 작전으로 기획된 곳이 영국군 점령지인 로드아일랜드 뉴포트(Newport)였다. 그러나 첫 연합 작전은 문화적 차이, 불신, 그리고 자연재해로 인해 파국으로 치달았다.</p>
<p>프랑스 해군 전열함 12척과 4,000명의 해병대를 태운 에스탱 백작 제독이 뉴포트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들을 맞은 미국 측 지휘관은 다혈질의 존 설리번(John Sullivan) 장군과 너새니얼 그린, 그리고 라파예트였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83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PEP20150705029001003_P4.jpg" alt="" width="935" height="544" /></p>
<p>&nbsp;</p>
<p>에스탱은 프랑스 해군 중장(Lieutenant Général)이자 유서 깊은 귀족 출신으로, 식민지 민병대 지휘관들에 불과한 미국 장군들을 애초부터 깔보았다. 미국의 설리번 장군 역시 독단적이어서 프랑스군과의 약속 날짜보다 하루 일찍 독자적으로 상륙 작전을 개시해 버렸고, 이에 에스탱은 &#8220;프랑스 왕실 군대의 명예를 훼손했다&#8221;며 격노했다.</p>
<p>8월 10일 영국 함대가 나타나 해전이 벌어지려는 찰나, 양측을 집어삼킨 거대한 허리케인급 폭풍이 불어닥쳤다. 함선들이 대파되자 에스탱은 육상 지원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수리를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보스턴 항으로 일방 철수해 버렸다.</p>
<p>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갯벌 위에서, 안개 낀 바다 저편으로 매정하게 돛을 올리고 사라지는 에스탱 제독의 함대를 바라보며 라파예트는 주먹을 피가 나도록 쥐었다. 그간 프랑스 수병들의 &#8220;촌뜨기 식민지인들&#8221;이라는 멸시를 참아왔던 미국 장교들과 병사들은 &#8220;프랑스 놈들이 등을 돌렸다&#8221;며 저주를 퍼부었다.</p>
<p>설리번 장군은 명령서에 &#8220;프랑스인들은 가장 비열한 순간에 동맹을 버렸다&#8221;며 격렬한 비난문을 실었고, 보스턴 거리에서는 미군 장병·시민들과 프랑스 수병들 사이에 유혈 패싸움까지 일어났다. 고립된 대륙군은 8월 29일 버츠힐(Butts Hill)에서 영국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격퇴한 뒤 뉴포트 포위를 풀고 퇴각해야 했다.</p>
<p>이 아수라장 속에서 가장 피눈물을 흘린 사람이 바로 라파예트였다.</p>
<p>설리번과 미국 장교들은 &#8220;프랑스 놈들이 배신했다&#8221;고 소리치고 있고, 에스탱 제독은 &#8220;야만스러운 식민지 놈들이 감히 국왕 폐하의 군대를 모욕한다&#8221;며 길길이 뛰고 있는 상황에서 라파예트는 모국에 대한 모욕에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온 미국 혁명의 동맹이 깨어질까 봐 밤잠을 설쳤다.</p>
<p>어설픈 해군 지원이나 겉핥기식 동맹으로는 대영제국의 숨통을 끊을 수 없었다. 이 신대륙의 땅바닥에서 워싱턴과 함께 뒹굴며 피를 나눌 프랑스 정규 육군 대군, 그리고 국왕의 막대한 금화가 직접 건너와야만 했다.</p>
<p>라파예트는 말을 갈아타며 하룻밤 만에 70마일을 내달려 보스턴의 에스탱을 찾아가 무릎 꿇듯 설득했고, 설리번 장군을 찾아가서는 &#8220;프랑스 모욕 발언을 취소하라&#8221;며 결투까지 불사하겠다는 서슬 퍼런 중재를 펼쳐야 했다.</p>
<p>라파예트는 뼈저리게 절감했다.</p>
<p>&#8220;말로만 하는 동맹이 아닌 진짜 군대가 필요하다. 해군 함대나 몇천 명의 불안정한 해병 지원 따위로는 안 된다. 미국 장군들과 대등하게 손을 잡고, 워싱턴 각하의 지휘를 기꺼이 받들며 헌신할 프랑스 국왕의 정규 육군 대군(Expeditionary Army)과 막대한 현금 차관이 직접 신대륙 땅을 밟아야만 한다!&#8221;</p>
<p>라파예트는 자신이 직접 베르사유 궁정으로 가 루이 16세와 내각을 설득해 프랑스 정규 육군 파병과 대규모 재정·물자 지원을 얻어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워싱턴을 따라 필라델피아로 상경해 워싱턴과 찰스 캐럴을 설득했고, 대륙회의의 정식 승인과 추천서를 받아 1779년 1월 프랑스 프리깃함 얼라이언스(Alliance)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p>
<p>1779년 초 라파예트의 파리 일시 귀환은 한 편의 정치 드라마이자, 미국 독립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외교적 분수령이었다. 밀항하듯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쳤던 탈영병 신분에서, 전 프랑스인의 열광을 받는 국민적 영웅이자 막후 전권 외교관으로 위상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계속)</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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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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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12 Oct 2026 03:39:44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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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60;4&#62; 안동일 작 1777년 9월,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어 펜실베이니아 베들레헴에서 약 두 달간 치료와 요양을 받은 라파예트는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11월 초 전선에 복귀했다. 그때 워싱턴 대륙군은 저먼타운 패전 직후 필라델피아 바로 북쪽...]]></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h4>
<h4>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lt;4&gt;</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1777년 9월,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어 펜실베이니아 베들레헴에서 약 두 달간 치료와 요양을 받은 라파예트는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11월 초 전선에 복귀했다.</p>
<p>그때 워싱턴 대륙군은 저먼타운 패전 직후 필라델피아 바로 북쪽 외곽의 요충지였던 화이트마시(Whitemarsh)에 진지를 구축하고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p>
<p>화이트마시 언덕 위 엠런 하우스(Emlen House)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워싱턴은 다리를 절며 복귀한 아들 같은 청년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아들여 종전처럼 총사령관 참모부에서 복무하도록 배려했다.</p>
<p>당시 화이트마시의 상황은 그야말로 ‘얼어붙은 전선과 굶주림의 서막’이었다.</p>
<p>아직 밸리 포지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이미 11월의 펜실베이니아는 매서운 서리와 찬바람이 몰아쳤다. 병사들은 신발이 없어 피 묻은 맨발로 낙엽을 밟았고, 식량과 텐트가 턱없이 부족해 모닥불 주위에 웅크려 덜덜 떨며 밤을 지새웠다. 밸리 포지의 고난이 이미 이곳 화이트마시에서 예행연습처럼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p>
<p>워싱턴은 돌아온 고마운 프랑스 청년을 와락 힘차게 끌어안기는 했지만, 군내의 복잡한 정치적 시선 때문에 아직 정식 야전 지휘권을 쥐여주지는 못한 상태였다.</p>
<p>바로 이때, 청년 라파예트의 군사적 진가가 폭발하는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p>
<p>11월 하순,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영국군이 병력을 양분하여 콘월리스 산하의 군대가 뉴저지 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자, 워싱턴은 내서니엘 그린 장군의 부대를 경계 겸 차단 임무로 급파했다. 이때 라파예트는 자신이 선봉 정찰대를 이끌겠다고 자원했다.</p>
<p>11월 25일, 뉴저지 글로스터 인근 분지에서 라파예트는 불과 350명 남짓한 대륙군 소총병(모건 라이플 연대 일부)과 민병대를 이끌고, 정예 독일계 헤센 엽병(Jäger) 600여 명을 상대로 대담한 기습을 감행했다.</p>
<p>라파예트는 최전선에서  교차 사격을 지휘하며 헤센 용병대를 매섭게 패퇴시켰다. 아군 사상자는 단 1명에 불과한 반면, 적군 60여 명을 사상 및 포로로 잡는 눈부신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p>
<p>이 승전보는 패배감에 찌들어 있던 화이트마시 사령부에 거대한 한 줄기 빛이 되었다.</p>
<p>워싱턴은 즉각 임시 수도 요크의 대륙회의에 격찬이 담긴 편지를 띄워 &#8220;이 젊은 후작의 용기와 군사적 재능은 정식 사단을 지휘하기에 차고 넘친다&#8221;고 강력히 천거했다. 앞선 브랜디와인에서 보여준 담력과 헌신 그리고 용병술도 빠짐없이 덧붙였다.</p>
<p>12월 1일, 대륙회의는 마침내 라파예트에게 굴욕적인 명예직 꼬리표를 떼고 버지니아 사단의 정식 사단장(소장) 지휘권을 부여했다. 절뚝거리며 복귀한 라파예트가  글로스터로 뛰어나가  승전보를 워싱턴의 품에 안겨줌으로써, 총사령관의 어깨를 펴게 해주고 진짜 야전 지휘관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p>
<p>대륙회의로부터 날아든 버지니아 사단 지휘권 승인 서한을 쥔 라파예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p>
<p>그것은 석 달 전 필라델피아에서 의원들이 마지못해 던져주었던 차가운 명예직 증서가 아니었다. 브랜디와인의 핏자국과 글로스터 눈밭의 화약 연기를 뚫고 제 손으로 당당히 쟁취해 낸 진짜 야전 지휘관의 깃발이었다.</p>
<p>&#8220;나의 사단장, 자네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소.&#8221;</p>
<p>엠런 저택 사령부 집무실에서 워싱턴이 건넨 묵직한 한마디에, 라파예트는 가슴속 성패를 쥐며 다시 한번 순명의 눈물을 삼켰다.</p>
<p>라파예트가 맡은 부대는 버지니아  병력 전체가 아니라, 2개 여단으로 구성된 한 개 정규 사단이었다.병력 수  대륙 최강인 버지니아는 3개 사단을 운용 하고 있었다. 라파예트가 정예 1 사단의 지휘권을 넘겨받게 된 이면에는 전임 사단장의 음주 및 군법회의 파면이라는 뼈아픈 전말이 얽혀 있었다.</p>
<p>원래  버지니아 1사단의 지휘관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백전노장 아담 스티븐(Adam Stephen) 소장이었다. 7년 전쟁 때부터 워싱턴과 함께 싸웠던 전우였으나 치명적인 과오를 범했다. 10월 초 저먼타운 전투 당시, 짙은 안개와 연기 속에서 스티븐 소장의 부대는 같은 대륙군인 앤서니 웨인 장군의 부대를 영국군으로 오인해 등 뒤에서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이 뼈아픈 오인 사격으로 인해 승기를 잡아가던 기습 작전이 대혼란에 빠지며 패배로 이어졌던 것이다.</p>
<p>전투 중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음주 혐의와 아군 오인 사격의 책임을 물어 스티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1777년 11월 20일 불명예 파면되었다. 사단장 공석 사태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글로스터 전공 직후 스티븐이 맡고 있던 사단을 라파예트에게 통째로 넘기기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p>
<p>라파예트가 인수한  1 사단에는 정예  2개 여단(Brigade)이 속해 있었다. 윌리엄 우드퍼드(William Woodford) 준장의 제3 버지니아 여단과 찰스 스콧(Charles Scott) 준장의 제4 버지니아 여단이었다. 두 여단 모두 혁혁한 전공을 자랑하는 정예들이었다. 그레이트브리지 전투의 영웅 우드퍼드 준장은 브랜디와인에서 라파예트와 함께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렸던 전우였고, 스콧 준장의 장병들 역시 저먼타운의 사선을 뚫고 생환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p>
<p>워싱턴이 굳이 자신의 고향 군대인 버지니아 사단을 라파예트에게 맡긴 데에는 세심한 계산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버지니아 연대들은  워싱턴의 직계 부대이자 가장 끈끈한 고향 부대였다. 워싱턴은 스무 살 이방인에게 텃세와 파벌이 극심한 다른 지역(뉴잉글랜드나 펜실베이니아 등) 군대를 맡기면 또다시 반발과 하극상이 일어날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가장 충성스러운 자신의 고향 군대를 소년에게 내어줌으로써, &#8220;이 청년은 내 분신이며, 이 청년을 거역하는 것은 곧 나 조지 워싱턴을 거역하는 것이다&#8221;라는 무언의 선언을 전군에 공표한 셈이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72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image011.jpg" alt="" width="420" height="354" /></p>
<p>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사병들의 반응이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8220;오만했던 늙은 주정뱅이 대신 소년 천사가 나타났다&#8221;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전임 스티븐은 거칠고 독선적이며 병사들에게 군림하던 구시대 유럽풍 인물이었다. 반면 새로 부임한 스무 살 라파예트는 정반대였다.</p>
<p>그는 장교용 천막을 마다하고 흙바닥 텐트에서 병사들과 똑같이 거적을 깔고 지냈으며, 신발도 옷도 없는 버지니아 장병들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두꺼운 셔츠와 외투를 사 왔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매일 아침 진지를 돌며 병사들의 안부를 묻는 이 다정한 프랑스 귀족 청년에게, 거칠기로 소문난 버지니아 촌놈 포수들과 민병 출신 사병들은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p>
<p>이후 밸리 포지의 참혹한 겨울 동안 라파예트의 버지니아 사단은 워싱턴을 지키는 가장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물론, 훗날 독립전쟁의 마지막 결전인 요크타운 전투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된다.</p>
<p>총사령관의 가장 든든한 친위대를 등에 업음으로써, 라파예트는 그 어떤 파벌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군사적 방패를 쥐게 되었다. 만약 라파예트가 여전히 군대 없는 명예직 도련님에 불과했다면, 얼마 뒤 게이츠와 콘웨이가 &#8216;캐나다 원정군 사령관&#8217; 완장을 던져주었을 때 꼼짝없이 이용당하거나 휘둘렸을 것이다. 이미 자신을 목숨 바쳐 따르는 버지니아의 억센 병사들과 정식 사단을 거느린 사령관이었기에, 청년은 저 거대한 정치적 음모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다.</p>
<p>그러나 전선의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병참 보급의 붕괴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p>
<p>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은 불과 13마일 거리에 주둔한 워싱턴의 숨통을 끊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12월 초에는 실제로 영국군 1만여 명이 화이트마시로 쳐들어와 치열한 전초전(화이트마시 전투)이 벌어지기도 했다. 열악한 무기의 대륙군은 가까스로 적을 물리쳤으나, 엄동설한의 진지를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워싱턴은 조금 더 북서쪽의 천연 요새 지대인 밸리 포지(Valley Forge)로 병영을 옮기기로 결단을 내렸다.</p>
<p>그사이 북부에서 게이츠가 사라토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한때 환호가 일었으나, 이는 엉뚱한 정치적 재앙으로 번졌다. 대륙회의, 특히 군사위원회 안팎에서 &#8220;워싱턴은 필라델피아도 뺏기고 저먼타운에서도 패배한 무능한 장군&#8221;이라며 게이츠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의 독버섯(‘콘웨이 음모’ 편지 사건)이 본격적으로 싹텄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밖으로는 영국군의 압박, 안으로는 비열한 정치적 배신에 둘러싸여 가장 고독하고 비통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p>
<p>12월 11일, 화이트마시 진지를 정리한 대륙군은 마침내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겨울 숙영지인 밸리 포지를 향해 피 묻은 눈길 행군을 시작했다. 라파예트의 버지니아 사단은 워싱턴의 지근거리에서 행군했고, 밸리 포지에서도 총사령부와 가장 가까운 명당에 캠프를 차려 사령관을 그림자처럼 호위했다.</p>
<p>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가며 통나무 병영 건설에 안간힘을 쏟고 있던 1778년 1월 22일경, 라파예트와 워싱턴은 군사위원회로부터 뜻밖의 통보를 받았다. 당시 의회 군사위원회를 장악하고 기세등등하던 호레이쇼 게이츠가 라파예트를 ‘북부 캐나다 침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p>
<p>이제 막 전군과 병사들의 신망을 얻어 자리를 잡아가던 라파예트를 워싱턴에게서 떼어놓아, 총사령관의 날개를 꺾어버리려는 교활한 수작이었다.</p>
<p>라파예트는 워싱턴과 긴밀히 상의한 끝에, 의회의 진짜 의도와 전모를 파악하고 결판을 내기 위해 1월 말(28~30일경) 밸리 포지를 떠나 의회가 있는 임시 수도 요크(York)로 말을 달렸다. 워싱턴은 백전노장 요한 드 칼브를 소년의 곁에 동행하도록 붙여주었다.</p>
<p>한편, 찰스 캐럴은 당시 대륙회의의 ‘군사조사위원회(Committee of Conference)’ 위원으로 임명되어, 혹한의 참상을 조사하고 군제를 개혁하기 위해 요크를 떠나 밸리 포지로 동진(東進)하고 있었다.</p>
<p>요크에서 밸리 포지를 오가는 유일한 통로는 랭커스터(Lancaster)를 경유하는 ‘그레이트 왜건 로드(Great Wagon Road)’였다. 랭커스터는 밸리 포지와 요크를 잇는 중간 길목이자 펜실베이니아 내륙 최대의 교통 요충지였다. 물류의 거점이자 의원들과 장교들이 반드시 말을 갈아타고 묵어가던 중심 도시로, 대륙회의 역시 필라델피아를 탈출해 요크로 가기 전인 1777년 9월 27일 이곳에서 하루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랭커스터에서 요크까지는 서스쿼해나강을 건너 약 25마일, 밸리 포지까지는 동쪽으로 약 45마일 거리였다.</p>
<p>1778년 1월 말, 살을 에는 북서풍이 몰아치던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어스름한 저녁.</p>
<p>밸리 포지로 향하던 찰스 캐럴은 말의 피로를 풀고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길목의 유명한 역참 주막인 ‘화이트 호스 여관(White Horse Tavern)’에 여장을 풀었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찰스는 동료 의원들과 함께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p>
<p>그때, 거친 출입문 종소리가 울리며 서쪽 요크를 향해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라파예트가 꽁꽁 얼어붙은 털외투를 털며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p>
<p>난롯가에서 차를 마시던 기품 있는 중년 신사와, 얼음 부스러기를 털어내던 청년 장교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숨을 삼켰다.</p>
<p>&#8220;캐럴 의원님! 이런 눈길에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8221;</p>
<p>라파예트가 반가움에 소리쳤다. 모국어인 프랑스어였다.</p>
<p>&#8220;후작이야말로 이 험한 눈보라 속에 어쩐 일이오?&#8221;</p>
<p>두 사람은 와락 부둥켜안았다. 라파예트는 프랑스식으로 자신의 차가운 뺨을 캐럴의 양 볼에 비벼댔고, 캐럴 역시 청년의 어깨를 힘껏 끌어당기며 온몸으로 꼭 안아주었다. 편지는 몇차례 오갔으나 얼굴을 마주한 것은 저먼타운 전투 직전 이후 거의 반년 만이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피와 시련이 스쳐 지나갔던가.</p>
<p>기적 같은 조우의 인사와 동행자 소개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작은 방의 등불 아래 마주 앉았다. 라파예트가 억누를 길 없는 분노로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p>
<p>&#8220;캐럴 각하, 의회의 늙은 여우들과 게이츠 일당이 저를 흔들고 있습니다. 제게 &#8216;북부 캐나다 원정군 총사령관&#8217; 완장을 던져주며 워싱턴 각하의 곁을 떠나라 합니다. 조국 프랑스의 옛 땅 퀘벡을 되찾으라는 이 화려한 멍에를 씌워 나를 장군님의 곁에서 떼어놓으려는 수작입니다. 거절하자니 명령 불복종이고, 수락하자니 장군님의 등을 찌르는 칼이 되는 것 같아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저는 지금 요크로 가 그 음흉한 임명장을 의원들 면전에 패대기칠 작정입니다!&#8221;</p>
<p>&#8220;진정하시오, 길베르.&#8221;</p>
<p>군사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내막을 이미 꿰뚫고 있던 찰스 캐럴이 유창하고 나지막한 프랑스어로, 그러나 쇠붙이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청년의 등을 두드렸다.</p>
<p>&#8220;적이 판 함정에 스스로 발을 빼는 것은 하책(下策)이오. 의회의 임명을 거절하면 저들은 &#8216;어린 프랑스 귀족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8217;거나 &#8216;대륙회의의 권위를 능멸했다&#8217;며 후작과 워싱턴 장군을 항명죄로 엮어 한 묶음으로 몰아세울 것이오. 피하지 말고 가시오, 후작. 요크로 정면으로 쳐들어가시오!&#8221;</p>
<p>캐럴은 라파예트의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고, 난롯가 의자에 깊숙이 앉히며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와인 한 잔을 쥐여주었다.</p>
<p>&#8220;요크에 가시거든 거절하지 마시고 그 자리를 당당히 수락하시오. 다만, 단 하나의 조건을 결의안에 못 박으시오. &#8216;나의 직속 상관은 오직 조지 워싱턴 장군 한 사람뿐이며, 원정군의 모든 작전 보고는 오직 총사령관 각하께만 올린다.&#8217; 그리고 부사령관으로는 저들이 붙여주려는 토머스 콘웨이를 단칼에 거부하고, 저기 함께 온 든든한 드 칼브 장군을 지명하시오. 저들이 호랑이를 꾀어내려 파놓은 함정에, 거꾸로 저들의 발목을 묶어버리는 족쇄를 채우는 겁니다.&#8221;</p>
<p>찰스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p>
<p>&#8220;내가 알기에 북부의 캐나다 침공군은 결코 온전히 꾸려질 수 없소. 저들이 후작의 조국애를 미끼로 덫을 놓았다면, 후작은 베르사유의 기사도가 무엇인지 그 촌뜨기 모리배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면 되는 것이오. 가서 받으시오! 단, &#8216;워싱턴 총사령관의 휘하로서만 군대를 지휘하겠다&#8217;는 쐐기를 그들의 목구멍에 처박아 넣고 오시오. 내일 아침 나 역시 의회 조사관의 자격으로 밸리 포지로 들어가 그들을 압박할 터이니, 뒤는 걱정 말고 후작 자네의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잔을 드시오!&#8221;</p>
<p>결론은 섰으나 세부적인 정세와 대책을 논의하느라 두 사람의 은밀한 밀담은 자정을 훌쩍 넘겨 이어졌다.</p>
<p>새벽녘, 작별을 앞두고 찰스 캐럴이 품속에서 손때 묻은 묵주를 꺼내 들었다. 라파예트 역시 존 캐럴 신부에게 받았던 묵주를 꺼내 들었고, 두 사람의 거친 손이 십자가 위에서 포개졌다. 이 정치적 담판이 단순한 세속의 암투를 넘어 ‘천주교도들의 순명과 기도가 일궈낸 보이지 않는 섭리의 승리’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p>
<p>&#8220;길베르, 칼과 혀로 싸우기 전에 먼저 무릎으로 싸워야 합니다. 지금 도허레건의  경당에서는 존 형님과 아버님께서, 그리고 베르사유의 저택에서는 당신의 아내 아드리엔이 눈물로 성모의 전구를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간계와 분열의 영이 저 오만한 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으니, 우리의 이 걸음이 공명심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의(義)와 핍박받는 백성을 위한 순명이 되게 해달라고 청합시다.&#8221;</p>
<p>두 사내의 나직한 라틴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눈보라 치는 여관방의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와 섞여 하늘로 피어올랐다. 이날  기도의 마지막은 ‘성 미카엘 대천사의 기도’였다.</p>
<p>&#8220;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간청하오니 그를 굴복시키소서. 천상 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하느님의 힘으로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8221;</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72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EIFZEXHKYS4LESAD6IAIXA2F24.jpg" alt="" width="616" height="449" /></p>
<p>기도를 마쳤을 때, 청년 후작의 눈빛에서는 격한 분노가 씻은 듯 걷히고 차분하고 단단한 영적 평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p>
<p>스쿠킬강과 내륙의 들판 위로 붉은 서리 안개가 피어오를 때, 라파예트가 요크로 향하는 말에 올라탔다. 찰스는 말안장을 고쳐 매는 라파예트의 외투 주머니에 스페인 8레알 은화 한 닢을 쥐여주었다.</p>
<p>&#8220;이건 장군을 향한 자네의 변치 않을 맹세의 징표요. 요크의 회합에서 심장이 떨리거든 주머니 속 이 차가운 은화를 쥐어보시오. 후작의 뒤에 조지 워싱턴과 나 찰스 캐럴, 그리고 하느님의 공의가 버티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8221;</p>
<p>라파예트는 은화를 가슴 깊이 품고 찰스에게 단단한 기마 경례를 올린 뒤, 드 칼브와 함께 눈 덮인 펜실베이니아의 가도를 질주했다.</p>
<p>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워싱턴을 구하기 위해 성모의 안배 아래 이루어진 긴급 막후 밀담이었다. 찰스는 은화와 보급을 싣고 굶주린 밸리 포지로 들어가 실질적인 군대를 살려내고, 라파예트는 서스쿼해나강을 건너 요크로 진격해 정치적 음모를 정면 돌파하는 ‘외교와 보급의 완벽한 양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p>
<p>1778년 2월 3일 밤, 대륙회의 임시 수도 요크에 마련된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공관 저택.</p>
<p>사라토가 전투의 영웅을 자처하는 게이츠, 워싱턴을 비난하며 군사위원회를 장악한 토머스 콘웨이, 그리고 워싱턴을 불신하는 북부 출신 의원들이 길게 늘어선 만찬 식탁을 채우고 있었다.</p>
<p>화려한 은촛대와 고급 와인이 차려진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스무 살의 라파예트가 당당한 기마 장교의 보폭으로 걸어 들어왔다. 게이츠가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들고 맞이했다.</p>
<p>&#8220;오, 우리의 영웅 라파예트 후작! 마침내 대륙회의의 부름에 응해 주셨구려. 프랑스 왕실의 옛 영광을 되찾을 캐나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당신보다 적임자는 없소!&#8221;</p>
<p>콘웨이와 의원들이 번갈아 일어나며 잔을 부딪쳤다.</p>
<p>&#8220;사라토가의 진정한 구원자, 게이츠 장군을 위하여!&#8221;</p>
<p>&#8220;새로운 군사위원회의 영광을 위하여!&#8221;</p>
<p>&#8220;독립을 이끌 대륙회의를 위하여!&#8221;</p>
<p>수 차례의 건배가 오가는 동안, 누구의 입에서도 현재 밸리 포지의 진흙 구덩이에서 피를 말리고 있는 &#8216;총사령관 조지 워싱턴&#8217;의 이름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노골적인 지우기이자 참담한 모욕이었다.</p>
<p>위선적인 웃음과 탐욕의 술잔들이 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라파예트는 옷섶 안쪽에 닿아 있는 은빛 기적의 성패와 찰스가 건네준 차가운 은화를 손가락 끝으로 꾹 쥐었다.</p>
<p>&#8216;천상의 모후이시여, 연약한 당신의 기사에게 다윗의 용기를 주소서. 밸리 포지의 얼어붙은 눈밭에서 피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당신의 의인을 조롱하는 저들의 간계를 꺾을 힘을 제 혀끝에 실어주소서.&#8217;</p>
<p>짧은 화살기도가 청년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일말의 두려움조차 씻은 듯 사라졌다.</p>
<p>라파예트는 천천히 와인잔을 채우더니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만찬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는 청년의 모습에 시끌벅적하던 웃음소리가 일순간 멎었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p>
<p>청년이 잔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렸을 때, 그 자리에 선 것은 혈기 넘치는 스무 살 귀족이 아니라 악의 무리를 향해 미카엘의 검을 겨눈 하느님의 기사였다.</p>
<p>라파예트는 좌중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하고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억양은 다소 어색했지만 서슬 퍼런 영어였다.</p>
<p>&#8220;제너럴 게이츠, 그리고 의원 여러분. 오늘 밤 수많은 영광을 기리는 건배가 오갔으나, 정작 이 나라의 명운을 어깨에 짊어진 채 저 혹한의 천막에서 떨고 계신 단 한 분의 이름이 빠졌습니다.&#8221;</p>
<p>게이츠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고, 콘웨이의 술잔을 쥔 손이 굳어버렸다. 라파예트는 흔들리는 그들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사자후를 토했다.</p>
<p>&#8220;대륙군의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을 위하여!(To General Washington, Commander-in-Chief of the American Army!)&#8221;</p>
<p>만찬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p>
<p>감히 총사령관에 대한 건배를 거부했다간 명령 불복종과 반역을 자인하는 꼴이 되는 외통수였다. 게이츠와 콘웨이는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며, 독약을 들이켜듯 억지로 잔을 입술에 대고 삼켰다.</p>
<p>라파예트는 잔을 단숨에 비워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찰스 캐럴이 일러준 조건문—&#8217;워싱턴 총사령관 휘하의 독립 사단이어야 하며, 부사령관은 드 칼브 장군이어야 한다&#8217;는 서류를 테이블 한가운데 던져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만찬장을 걸어 나갔다.</p>
<p>그 길로 연회는 파장이었다.</p>
<p>찰스 캐럴이 눈 덮인 밸리 포지에 도착해 굶주린 병사들에게 은화와 식량을 풀고 숙소에서 홀로 묵주알을 굴리며 간구하던 바로 그 시각, 요크의 만찬장을 초토화시킨 라파예트 역시 숙소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감사의 성호를 긋고 있었다.</p>
<p>세속의 눈에는 젊은 귀족의 대담한 배짱 하나가 뒤흔든 사건처럼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메릴랜드의 흙바닥과 베르사유의 제단,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의 눈길 위에서 바쳐진 이름 없는 천주교도들의 눈물겨운 기도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p>
<p>라파예트는 1778년 2월 5일, 드 칼브와 함께 요크를 떠나 캐나다 침공 집결지였던 뉴욕주 북부 올바니(Albany)로 올라갔다. 게이츠와 군사위원회는 &#8220;올바니에 가면 2,500명의 정예병과 썰매, 설상화, 방한복, 대포가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8221;고 장담했었다.</p>
<p>그러나 2월 17일, 라파예트와 드 칼브가 도착했을 때 눈앞에 있던 병력은 1,200명도 채 안 되었고, 그마저도 반쯤 헐벗은 채 동상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썰매나 방한 장비, 보급품은 전무했다. 게이츠 파벌이 꾸며낸 원정 계획이 순전한 기만극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p>
<p>라파예트는 현지 지휘관 필립 스카일러(Philip Schuyler) 장군의 보고를 받고 기가 막혀 즉각 워싱턴에게 편지를 띄웠다.</p>
<p>&#8220;각하, 염려하셨던 대로 저는 완전히 함정에 빠졌습니다. 저들은 있지도 않은 군대를 미끼로 저를 이곳 얼음 구덩이에 처박았습니다. 이 상태로 눈 덮인 캐나다로 진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이자 광기입니다. 아무리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이라 할지라도 이는 따를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밸리 포지로 급히 돌아가겠습니다. 다만 결코 빈손으로는 가지 않겠습니다.&#8221;</p>
<p>라파예트는  자신의 말대로 3월 한 달 동안 결코 빈손으로 넋 놓고 있지 않았다.</p>
<p>올바니 서쪽 존스타운(Johnstown)에서 열린 이로쿼이 6개 부족 회담에 참석해 프랑스 가톨릭계 원주민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네이디족은 앳된 프랑스 장군에게 매료되어 그를 &#8216;카예울라(Kayewla, 두려움을 모르는 기수)&#8217;라 부르며 동맹을 맹세했고, 인디언 전사 47명이 훗날 밸리 포지로 향할 때 호위를 자임하며 동행했다.</p>
<p>또한 라파예트는 캐럴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신용장과 찰스 캐럴이 지원한 은화를 동원해 올바니 밀매상들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다량의 프랑스제 샤를빌 머스킷총과 두꺼운 모직 방한복 들을 사들였다. 허드슨강을 끼고 있는 올바니는 네덜란드계 거상들과 북부 밀수업자, 프랑스령 캐나다와의 접경 밀매상들이 암약하던 물류의 암시장이었던 것이다.</p>
<p>한편 대륙회의는 현지 밸리 포지에서 펼친 찰스 캐럴의 끈질긴 설득과 위상을 회복한 워싱턴의 격노 어린 서한에 밀려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3월 13일 공식적으로 캐나다 원정을 취소했다.</p>
<p>라파예트는 3월 하순 올바니를 떠나, 4월 초 밸리 포지의 워싱턴 품으로 귀환했다.</p>
<p>1778년 4월 초 라파예트의 밸리 포지 귀환은 단순한 &#8216;원정 실패자의 복귀&#8217;가 아니었다. 게이츠의 음모를 뚫고 막대한 무기 보급품과 용맹한 인디언 동맹군을 안고 돌아온 위풍당당한 개선이었다.</p>
<p>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혹한의 고통을 딛고, 새 생명이 움트는 밸리 포지의 봄을 워싱턴, 찰스 캐럴과 함께 마주하게 되었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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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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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05 Oct 2026 13:43:34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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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60;3&#62; 안동일 작 대륙회의는 1777년 7월 31일 결의안을 통해 라파예트에게 소장(Major General) 계급을 부여했다. 열아홉 살의 외국인 청년이 실전 경험도 없이 곧바로 최고위 장성 계급을 거머쥔 것은, 당시 대륙회의와 미군 지휘부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과 거센 반발을 부른 파격적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h4>
<h4>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그리고 워싱턴  &lt;3&gt;</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대륙회의는 1777년 7월 31일 결의안을 통해 라파예트에게 소장(Major General) 계급을 부여했다. 열아홉 살의 외국인 청년이 실전 경험도 없이 곧바로 최고위 장성 계급을 거머쥔 것은, 당시 대륙회의와 미군 지휘부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과 거센 반발을 부른 파격적인 사건이었다.</p>
<p>단, 초기에는 직접 지휘할 사단이나 연대가 없는 순수한 ‘명예직(Honorary)’ 소장이었다. 조지 워싱턴 총사령관의 최고 참모진(Aide-de-Camp) 곁에 머물며 지휘를 참관하고 보좌하는 역할이었다.</p>
<p>실제 이는 군사적 역량에 따른 정상적인 임관이라기보다, 프랑스의 공식 참전과 막대한 차관을 이끌어내기 위한 대륙회의의 고도의 정치적·외교적 타협이었다.</p>
<p>라파예트가 필라델피아에 입성했을 때, 대륙회의는 사일러스 딘이 파리에서 추천서를 남발해 건너온 유럽 용병 장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파리 밀사로 파견되어 있던 딘은 프랑스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 군사 원조를 성사시키기 위해, 지원자들에게 프랑스군 계급의 서너 단계 위를 보장하는 서면 계약서를 마구잡이로 써주었다. 라파예트에게도 &#8220;미국에 가면 소장 계급을 준다&#8221;는 증서를 내주었다. 당시 라파예트는 프랑스군 근위대 대위였고, 함께 온 슈토이벤이나 드 칼브는 영관급 내지 베테랑 장교들이었다.</p>
<p>밑바닥 흙탕물에서 피 흘려 싸워온 대륙군의 미국인 야전 장교들은 &#8220;실전 경험도 없는 프랑스 애송이 도련님에게 장성 계급장을 달아준다면 즉각 군복을 벗겠다&#8221;며 거세게 항의했고, 의원들 역시 라파예트의 임관을 극히 탐탁지 않아 했다. 저들의 기세가 워낙 완강했기에 총사령관 워싱턴도, 막강한 재력가 찰스 캐럴도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형국이었다.</p>
<p>문전박대를 당한 라파예트는 오기를 부리는 대신, 대륙회의에 두 가지 파격적인 조건을 담은 각서 형식의 서한을 스스로 제출했다.</p>
<p>&#8220;나는 어떠한 보수(봉급)도 받지 않고 자비로 복무하겠다.&#8221;</p>
<p>&#8220;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야전 지휘관이 아니라, 단순한 자원봉사자(Volunteer)로 백의종군하겠다.&#8221;</p>
<p>이 청년의 결기 어린 서한을 쥐고 찰스 캐럴이 전면에 나섰다. 워싱턴 총사령관 역시 힘을 실었다. 재정 파탄에 직면해 있던 대륙회의 입장에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은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프랑스 궁정의 최고 명문가인 노아이유 공작 가문의 사위이자 막대한 부를 지닌 유력 귀족이라는 사실이 의원들의 계산기를 두드리게 했다.</p>
<p>캐럴과 워싱턴은 재정 총책 로버트 모리스를 통해, 이 청년의 참전을 극진히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프랑스 왕실의 정규군 파병과 차관을 얻어낼 유일한 징검다리임을 설득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대륙군에게 프랑스의 참전만이 살길이라는 묵직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마침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p>
<p>임관 후 라파예트는 워싱턴 사령부에 상근하며 직속 부관 역할을 수행했다.</p>
<p>당시 최고사령관 관저 겸 군사본부로 징발해 쓴 곳은 마켓 스트리트 남쪽 5번가와 6번가 사이(524-30 Market Street)에 자리한 ‘마스터스-펜 저택(Masters-Penn House)’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개척자 윌리엄 펜의 손자이자 전 부지사였던 리처드 펜의 대저택으로, 당대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웅장하고 호화로운 3층 붉은 벽돌 저택이었다.</p>
<p>얼마 후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가 접수해 군정(軍政) 사령부를 차린 곳이며, 1778년 5월 부임한 헨리 클린턴 역시 이곳을 집무실로 물려받아 퇴각 작전을 기획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훗날 1790년부터 1800년까지 필라델피아가 미국의 임시 수도였을 때는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 대통령의 공식 대통령 관저(President&#8217;s House)로 사용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p>
<p>사령부 건물은 웅장하고 화려했으나, 대륙군의 속사정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p>
<p>보급이 최대의 복병이었다. 당시 대륙군은 각 식민지 주(State)별로 연대와 사단을 편성해 유지하고 있었기에 중앙 의회보다 지방 정부의 역량에 휘둘렸다. 지역별 편차가 극심했고, 굶주림과 피로를 견디지 못한 탈영이 우후죽순처럼 번졌다. 병력은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가 가장 많았고 보급 사정은 펜실베이니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으나, 도리어 이탈자 역시 펜실베이니아 출신에서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다.</p>
<p>8월 초 대륙회의 임관 직후부터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 이르는 한 달 남짓은, 라파예트라는 청년의 진면목이 워싱턴 사령부 내부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던 결정적 시기였다. 마켓가 펜 저택에서 무임소 부관으로 일하던 이 시기, 라파예트는 주변의 뼈아픈 시기와 냉대를 겸손과 친화력으로 이겨내며 대륙군 장병들의 마음을 훔쳤다.</p>
<p>마켓가 펜 저택 사령부 2층 복도.</p>
<p>차가운 복도 한구석에서 장교들이 영어가 서툰 라파예트를 곁눈질하며 &#8220;사일러스 딘이 파리에서 낚아챈 또 한 마리의 비단 파리&#8221;라며 쑥덕거리고 있었다.</p>
<p>그때, 영민한 눈빛의 알렉산더 해밀턴 중령이 깃펜을 내려놓고 성큼 다가와 완벽한 파리식 불어로 악수를 청했다.</p>
<p>&#8220;후작, 저들의 질투 어린 쑥덕거림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총사령관 각하와 제 펜은 온전히 후작의 편입니다.&#8221;</p>
<p>그 곁을 지나가던 거구의 지장 내서니엘 그린 장군이 투박한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껄껄 웃었다.</p>
<p>&#8220;후작, 워싱턴 각하의 눈에 든 사내라면 내게도 형제요. 저 친구들의 텃세는 전장에서 적탄 서너 발만 함께 맞고 나면 눈 녹듯 사라질 테니 조금도 괘념치 마시오.&#8221;</p>
<p>해밀턴이 그 투박한 영어를 유려한 불어로 즉각 통역해 주었다.</p>
<p>당시 스물두 살이던 해밀턴은 1777년 3월 워싱턴의 최고 선임 부관으로 발탁되어 사령부의 모든 기밀문서와 작전을 총괄하고 있었다. 서인도제도 네비스섬 출신으로 어머니에게서 불어를 모국어처럼 배운 해밀턴은 참모진 중 라파예트와 유일하게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지적 동반자였다.</p>
<p>로드아일랜드 퀘이커 출신의 명장 그린 장군 역시 파벌 싸움이나 맹목적인 외국인 혐오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그릇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대인이었다. 대륙군 토박이 장군들이 &#8220;장난감 장군이 왔다&#8221;며 수군댈 때, 그린은 워싱턴의 복심을 읽고 라파예트에게 야전 지형과 편제를 자상하게 가르쳐준 든든한 멘토였다.</p>
<p>워싱턴은 라파예트를 펜 저택 관사에 머물게 하고 싶었으나, 군내의 질시를 우려해 고심했다. 이때 찰스 캐럴이 사령부에서 불과 서너 블록 떨어진 정갈한 가톨릭 교우의 저택 별채를 하숙집으로 마련해 주어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었다.</p>
<p>필라델피아 북쪽 캠프로 야전 기동 훈련을 나갔을 때, 라파예트는 장교용  천막을 마다하고 병사들과 똑같이 거적을 깔고 진흙투성이 텐트에서 뒹굴며 딱딱한 옥수수빵을 씹었다. 비웃던 장교들은 혀를 내둘렀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함께 구르는 이 앳된 프랑스 귀족을 보며 사병들은 &#8220;진짜가 나타났다&#8221;며 열광했다.  그때 라파예트는 서툰 영어로 분대 단위 였지만 자신 휘하의 병사들에게 드칼브에게 배웠던 전투시 방향전환과 엄호 요령을 함께 시전 연습 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IW2B0qgJt_6n7-QaWshPZK6JKXr9zhs43eUJTpYw5Opjp1DvW3hfhyNW4zbreXF56aqypq6rddLGQ0pDgdz_kw.jpg" alt="" width="900" height="650" /></p>
<p>1777년 8월 중순,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체서피크만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며 필라델피아는 공포에 휩싸였다.</p>
<p>8월 15일, 워싱턴은 군대를 필라델피아 외곽 네샤미니 캠프로 집결시켜 전열을 가다듬는 긴급 열병식을 거행했다. 워싱턴은 라파예트를 자신의 말 곁에 세우고 함께 사열대를 지켜보았다.</p>
<p>당시 대륙군 1만 1천 명의 행렬은 처참했다. 정규 군복은커녕 누더기 사냥옷이나 해진 셔츠를 걸쳤고, 신발이 없어 맨발에 헝겊을 감은 병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절뚝거렸다. 총기조차 제각각인 낡은 머스킷을 쥔 채 오와 열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p>
<p>베르사유 궁정의 번쩍이는 근위대와 화려한 정규군만 보고 자란 열아홉 소년의 눈에, 이 광경은 군대가 아니라 거렁뱅이 피난민의 행렬처럼 보였을 것이다.</p>
<p>그때, 말 위에 앉은 거구의 워싱턴이 라파예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깊은 비통함이 밴 목소리로 나직하게 털어놓았다.</p>
<p>&#8220;후작, 막 화려한 프랑스 군대를 떠나온 장교에게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군대를 보여주게 되어 실로 부끄럽소(embarrassed). 이게 우리 현실이요&#8221;</p>
<p>총사령관으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솔직하고 아픈 고백이었다.</p>
<p>그 말을 들은 순간, 라파예트의 심장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제 발밑의 병사들이 굶어 죽든 말든 은식기에 송로버섯과 부르고뉴 와인을 즐기며 패배를 감추기 위해 비단과 화약 연기로 분칠하던 베르사유의 귀족 장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더기 병사들의 초라함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그 고통을 자신의 수치로 오롯이 짊어질 줄 아는 신대륙의 거인.</p>
<p>라파예트는 모자를 벗어 가슴에 얹으며 주저 없이 답했다.</p>
<p>&#8220;각하, 부끄러워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뽐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각하와 이 용감한 장병들로부터 인내를 배우고, 이들이 겪는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을 뿐입니다.&#8221;</p>
<p>워싱턴의 엄숙한 얼굴에 깊은 감동의 미소가 번졌다.  라파예트의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평생 보아온 비단옷의 장군들을 뒤로하고, 누더기를 짊어진 참된 지도자에게 자신의 칼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거룩한 항복의 충성 선언이었다.</p>
<p>이 사령관이 사내들의 마음을 얻는 법은 일찍이 입증된 바 있었다. 나서니엘 그린과 알렉스 헤밀턴이 열정적으로 들려준 &#8216;크로스윅스(Crosswicks) 트렌턴 야영지 연설&#8217; 일화는 라파예트의 마음을 뭉클하게 흔들면서 이같은 충성을 맹세하게 한 기저였다.  실은 라파예트 뿐 아니라 독립전쟁사를 통털어 워싱턴의 풍모를 제대로 보여준 일화로 꼽혀 대대손손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극적인 실화다.</p>
<p>1776년 12월 말, 얼어붙은 델라웨어강을 건너 트렌턴을 기습 격파했으나 병사들의 복무 만료일인 12월 31일이 닥쳤을 때였다. 콘월리스의 영국군 대군이 복수를 위해 몰려오는 판에 병사들은 짐을 싸고 귀향하려 했다.</p>
<p>워싱턴은 자신과 밥 모리스가 사재를 털어 1인당 10달러의 보너스를 약속하며 자원 연장을 호소했으나,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 단 한 명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군대가 와해되려던 찰나, 워싱턴은 말을 몰아 돌아선 병사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p>
<p>&#8220;용감한 전우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이미 치렀소.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결코 탓하지 않겠소.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시오. 그대들이 단 한 달만 더 머물러 준다면, 우리는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소. 지금 이 순간, 조국의 운명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자손들의 미래가 오직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8221;</p>
<p>그리고 워싱턴은 말 위에서 누더기를 걸친 사병들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눈물 방울이 눈덮인 장화로 떨어졌다.</p>
<p>총사령관이 명령이 아닌 눈물의 간청으로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병사들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북소리가 다시 울리자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8220;제기랄, 저 양반을 두고 어떻게 발길을 돌린단 말인가.&#8221; 그 진심으로 묶인 군대가 사흘 뒤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며 기적처럼 혁명을 되살려냈다. 진심과 진실은 끝내 어디서나 통하기 마련이다.</p>
<p>교파는 달랐으나, 라파예트는 매일 새벽 무릎으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밤을 닫던 조지 워싱턴의 뒷모습 에서 깊은 경외를 느꼈다. 프랑스 가톨릭 귀족 청년의 눈에 비친 총사령관의 신앙은 형식적인 종교를 넘어선 엄숙한 순명이었다.</p>
<p>언젠가 한 이신론자가 &#8216;영국군도 똑같이 승리를 기도할 텐데, 하늘은 대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겠습니까?&#8217; 하고 묻자, 워싱턴은 조용히 답했다.</p>
<p>&#8216;문제는 하늘이 우리 편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늘의 정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점이네.&#8217;</p>
<p>무모한 돌격을 자제하며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살리고자 고뇌했던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수많은 피를 부를 뻔했던 이 독립전쟁에서, 대륙군은 불필요한 살상을 줄이며 기적처럼 주요 전쟁사에서 가장 적은 피아 전사자를 내면서  끝내 자유의 새 시대를 열어 젖혔던 것이다. 워싱턴은 이를 섭리라고 했다.</p>
<p>마침내 1777년 8월 25일, 신대륙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영국 대함대가 메릴랜드주 북단 체서피크만 가장 깊숙한 포켓인 ‘헤드 오브 엘크(Head of Elk, 현 엘크턴)’에 닻을 내렸다.</p>
<p>육로 진격이 워싱턴의 지연전에 막히자 윌리엄 하우 장군은 뉴욕 샌디훅에서 전열함과 대형 수송선 280여 척에 정예군과 악명 높은 헤센 용병대 1만 8천 명, 수천 필의 군마와 거대한 야포를 싣고 바다를 하얗게 뒤덮으며 우회 상륙한 것이다.</p>
<p>영국군이 메릴랜드 땅에 발을 딛고 필라델피아를 향해 북동진하자, 워싱턴은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 접경의 브랜디와인강(Brandywine Creek)에 방어선을 쳤다.</p>
<p>9월 11일, 안개가 자욱한 새벽.<br />
워싱턴은 영국군이 브랜디와인의 주 여울목인 채즈 포드(Chadds Ford)로 도하할 것이라 판단하고 중앙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책이었다. 하우와 콘월리스는 8천 주력을 이끌고 북쪽 상류 여울목을 멀리 우회해 대륙군의 오른쪽 옆구리(우익)를 기습했다.</p>
<p>버밍엄 예배당 능선을 지키던 설리번 장군의 우익 사단 위로 영국군 정예 경보병대의 일제사격과 포탄이 쏟아졌다. 당시 대륙군은 집단 기동 전술 훈련을 거치지 못한 탓에, 숲속에서 전열을 바꾸려다 자기들끼리 엉켜 극심한 혼란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다.</p>
<p>우익이 붕괴하면 퇴로가 끊겨 전군이 몰살당할 위기였다. 본영에서 급보를 접한 워싱턴은 말에 올랐다.</p>
<p>&#8220;내가 직접 가야 한다! 전열을 수습하지 못하면 오늘로 공화국은 끝이다!&#8221;</p>
<p>워싱턴은 현지 농부의 길 안내를 받으며 버밍엄 숲길을 뚫고 내달렸다. 전선을 수습하느라 호위대마저 뒤처진 채, 백마를 탄 총사령관의 거구가 단신으로 능선 사각지대에 모습을 드러냈다.</p>
<p>자욱한 화약 연기 속 참나무 숲 덤불 뒤편.<br />
세계 최초의 후장식 소총을 개발한 영국군 최고의 명사수, 실험 소총대 지휘관 패트릭 퍼거슨(Patrick Ferguson) 대위가 바위 뒤에 엎드려 있었다. 퍼거슨의 총구 안으로 무방비 상태의 백마 탄 거구 장군이 완벽하게 들어왔다.</p>
<p>단 한 발로 전쟁을 끝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찰나였다.<br />
그러나 퍼거슨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훗날 그가 일기에 남겼듯, 장군이 등을 돌려 부하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8220;비무장 상태로 등을 보인 고결한 장교의 등 뒤를 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unknightly)&#8221;는 기사도적 망설임이 그의 손가락을 멈추게 한 것이다.</p>
<p>“ 화려한 후사르(기병) 복장을 한 프랑스풍 장교를 뒤쪽에 대동하고 백마를 탄 거구의 미국 장교가 유유히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바위 뒤에 엎드려 조준을 마쳤으나, 상대가 말을 돌려 천천히 뒷편의 부하들 쪽으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8220;비무장 상태로 등을 보인 장교의 등 뒤를 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unknightly)&#8221;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p>
<p>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워싱턴의 뒤를 맹렬히 쫓아오던 자원 부관 라파예트의 푸른 눈에 덤불 속에서 번뜩이는 총검과 적탄의 궤적이 포착되었다.</p>
<p>&#8220;총사령관 각하가 위험하다! 전열을 돌려라!&#8221;</p>
<p>서툰 영어였으나 계곡을 뒤흔든 결사의 사자후였다. 퍼거슨이 망설이는 사이 다른 영국 척후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고, 워싱턴을 향해 쏟아지는 탄환의 궤적을 향해 라파예트가 말을 꺾어 자신의 몸을 던졌다.</p>
<p>탕!<br />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라파예트의 왼쪽 종아리가 찢겨 나가며 붉은 피가 부츠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p>
<p>그 장엄한 희생을 목도한 대륙군 병사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숲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오와 열을 맞춰 한쪽이 적진을 향해 사격하고 물러서면 뒤쪽 다시 서는 요령이었다. 찰스턴 연병장의 연습이 주효 했던 것이다.  척후병들이 숫적 열세를 자각해 물러서고 아군의 퇴각로가 온전히 확보될 때까지, 청년은 부츠 속으로 피가 흥건히 차오르는 줄도 모르고 칼을 휘두르며 후퇴 대열을 지휘했다.</p>
<p>포성이 잦아들고 전선이 간신히 안정되자, 말에서 내린 워싱턴이 피투성이가 된 라파예트에게 다가왔다. 장화가 피로 물든 채 총사령관의 무사를 확인하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스무 살 청년의 얼굴. 말로만 자유와 용맹을  떠들던 유럽의 용병들과 달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붉은 피를 쏟아낸 소년의 모습은 거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쐐기로 박혔다.</p>
<p>워싱턴은 급히 달려온 군의관 존 코크런의 손을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p>
<p>&#8220;이 청년을 마치 내 친아들처럼 정성껏 치료해 주시오(Treat him as if he were my own son).&#8221;</p>
<p>부상당한 라파예트는 필라델피아 북쪽의 평화로운 마을, 베들레헴의 모라비안 공동체 요양소로 후송되었다. 9월 21일부터 약 6주 동안 모라비안 교도인 프레더릭 뵈클의 집에 머물며 요양했다. 평화주의와 금욕을 실천하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 이방인 청년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p>
<p>라파예트는 침상에서 프랑스의 임신한 아내 아드리엔에게 안심시키는 편지를 썼다.</p>
<p>&#8220;내 사랑, 걱정하지 마시오. 다리에 살짝 흠집이 난 정도일 뿐이오. 탄환은 뼈를 건드리지 않고 살만 꿰뚫고 지나갔소. 나는 지금 더없이 선량한 이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히 쉬고 있소.&#8221;</p>
<p>다리가 회복되는 동안 라파예트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10월 초, 워싱턴이 짙은 안개 속에서 감행한 저먼타운 기습 작전이 아쉬운 패배로 끝났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 청년은 침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8220;내가 각하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8221; 하고 가슴을 쳤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images-1.jpg" alt="" width="460" height="418" /></p>
<p>1777년 10월 14일, 라파예트는 베들레헴 침상에서 깃펜을 들었다.<br />
평소 해밀턴이나 로렌스 같은 불어가 통하는 부관들을 거치던 관례를 깨고, 스무 살 청년이 오직 총사령관 워싱턴 한 사람을 위해 밤새 사전과 씨름하며 손수 영어로 눌러쓴 역사적인 ‘첫 영어 편지’였다.</p>
<p>&#8220;각하, 제 부족하고 거친 영어로 감히 편지를 올리는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아직 제 영어가 서툴러 가슴속의 진심을 다 담아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총사령관 각하께 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다른 이의 번역을 거치지 않고, 서툴더라도 제 손으로 직접 쓴 영어로 충정을 고백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습니다.</p>
<p>저먼타운에서 각하께서 보여주신 대담한 결단의 전말을 들었습니다. 비록 안개와 불운으로 뜻대로 끝나지 못했으나, 각하의 용기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승리는 머지않아 반드시 각하의 깃발 아래 찾아올 것입니다.</p>
<p>각하와 형제 같은 장병들이 진흙탕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계실 때, 저 홀로 이 따뜻한 침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제 살을 에는 듯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고 있습니다. 각하의 군대에서 단 한 명의 병사라도 통솔할 영광을 허락해 주신다면, 목숨을 바쳐 그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각하의 영광과 이 대륙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8221;</p>
<p>워싱턴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참모들 앞에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br />
철자도 틀리고 프랑스식 어순이 섞인 투박한 문장이었지만, 쉰여섯 살의 과묵한 거인은 스무 살 이방인 청년이 밤마다 촛불 아래서 영단어를 고쳐 쓰며 쏟아부었을 그 지극한 정성과 결기를 단박에 읽어냈다.</p>
<p>워싱턴은 베들레헴으로 따뜻한 답장을 보냈다.</p>
<p>&#8220;후작,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결코 무리하여 말을 타지 마시오. 그대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곧 나와 이 군대를 돕는 길이오. 그대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는 날, 그대에게 걸맞은 명예로운 자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8221;</p>
<p>(계속)</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63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10/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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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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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Sun, 27 Sep 2026 22:34:46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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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8211;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8211;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60;2&#62; 안동일 작 세상사, 사람의 일은 만남과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일의 만남, 그리고 사람과 사물·음식의 만남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 무수한 만남 사이에서 선택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을 바르게 하느냐 그르치느냐에 따라 한 인생의 성패가 갈린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  &#8211;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8211;</h4>
<h4>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lt;2&gt;</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세상사, 사람의 일은 만남과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일의 만남, 그리고 사람과 사물·음식의 만남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 무수한 만남 사이에서 선택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을 바르게 하느냐 그르치느냐에 따라 한 인생의 성패가 갈린다. 그러나 정작 운명적인 만남이란 인간의 얄팍한 의지와 계산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p>
<p>인간의 지혜와 세속의 셈법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역사의 깊은 이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섭리의 손길과 그 뜻에 오롯이 자신을 내맡긴 영혼들의 ‘순명(順命)’이 있었다. 찰스 캐럴과 질베르 라파예트의 만남, 그리고 마침내 성사될 조지 워싱턴과 라파예트의 만남이야말로 바로 그 섭리의 증좌(證左)라고 나는 믿는다.</p>
<p>라파예트와 찰스 캐럴은 1777년 7월 말, 볼티모어 서남쪽 도허레건 장원에서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마차 여정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도허레건 장원에서 필라델피아까지는 ‘한나절이나 하루면 갈 수 있을까’ 싶지만, 18세기 도로 사정으로는 어림없는 꼬박 이틀 반(최소 1박 2일의 강행군)의 길이었다. 장원에서 볼티모어를 거쳐 필라델피아까지는 대략 120마일(약 190km)에 달했다.</p>
<p>포장도로는커녕 진흙과 돌멩이가 가득했던 당시, 귀족들의 4륜 마차는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려도 하루 평균 30~40마일을 주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길목에는 거대한 서스쿼해나강이 버티고 있어, 다리도 없는 넓은 강을 마차째 나룻배(Ferry)에 싣고 건너는 데만 반나절 가까이 지체되곤 했다. 찰스 일행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쥐어짜듯 달리는 특급 강행군을 택했다. 첫날 새벽에 출발해 헤이버디그레이스(Havre de Grace) 부근 여관에서 1박을 하고, 이튿날 밤늦게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p>
<p>사람이란 함께 먼 길을 여행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릇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법이다.</p>
<p>마차가 도허레건 장원의 거대한 참나무 숲길을 벗어나 북동쪽을 향한 거친 흙길로 접어들었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와 덜컹거리는 차체의 진동 속에서, 마차 안은 기이할 정도로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탑승한 세 사내 모두가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p>
<p>자리에 앉자마자 라파예트가 묵주를 꺼내 쥐자, 찰스와 드 칼브도 자연스레 묵주를 손에 쥐었다. 라파예트의 손에 들린 것은 전날 존 캐럴 신부가 축복해 건네준 묵주였고, 드 칼브의 손에 들린 것은 아나폴리스 찰스 옹이 노병에게 새로이 쥐여준 묵주였다.</p>
<p>꽤 긴 시간 이어진 침묵의 기도가 끝나자, 찰스 캐럴이 먼저 완벽한 파리식 프랑스어로 부드럽게 침묵을 깼다.</p>
<p>“후작, 존 형님(존 캐럴 신부)께 영성체를 모시고 나니 마음의 무거운 짐이 조금은 덜어지셨습니까?”</p>
<p>“그렇습니다, 캐럴 의원님. 프랑스를 떠나온 후 제 영혼이 이토록 온전히 안식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국왕의 금지령을 어겼다는 죄책감도, 임신한 어린 아내를 두고 왔다는 번민도… 신부님의 강복과 제단 앞 성모님의 자애로운 눈빛을 마주하며 비로소 천주의 섭리임을 확신했습니다. 지난 사흘간 장원에서 홀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는지 모릅니다.”</p>
<p>지금도 청년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채 맑게 정화되어 있었다. 찰스는 신앙의 동반자로서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p>
<p>“신대륙에 온 것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질베르 형제. 성모님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따뜻한 인도자이시며, 최후의 승리자는 우리 주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마차 밖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이 땅의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도들은 프랑스가 로마 교황의 마술에 놀아난다며 본능적인 경계심을 품고 있지요. 보마르셰의 화약과 프랭클린의 외교는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그 바다를 건너온 후작의 신앙은 끊임없이 의심할 것입니다. 이제 곧 도착할 시티 태번(City Tavern)에서 장군들과 의원들을 마주하면 그 차가운 불신과 마주하게 될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p>
<p>라파예트가 결연하게 고개를 저으며 가슴팍의 묵주와 성패를 굳게 쥐었다.</p>
<p>“두렵지 않습니다. 성모께서 밤마다 환시 속에서 보여주셨던 저 핍박받는 신대륙 백성들의 피눈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들을 구하는 것이 저와 제 아내 아드리엔이 함께 받은 부르심입니다. 다만… 제 일천한 무용(武勇)으로 이 거친 대륙군 사이에서 과연 그 숭고한 사명을 다해낼 수 있을지가 송구할 따름입니다.”</p>
<p>찰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양손으로 라파예트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메릴랜드의 오랜 종교적 박해를 온몸으로 버텨낸 가톨릭 거인 특유의 엄숙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p>
<p>“기억하십시오, 후작. 천주께서는 사명을 맡기실 때 결코 당신의 기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예비하신 이 전쟁의 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을 만나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비록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나,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움과 고결함이 무엇인지 아는 이 대륙의 참된 아비입니다. 후작이 그에게 순명(Obedience)하고 그의 든든한 칼이 되어줄 때, 프랑스의 군대와 아메리카의 자유는 비로소 하나의 거룩한 뜻 안에서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p>
<p>“명심하겠습니다, 의원님.”</p>
<p>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원시림 풍경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면서도, 소년 후작은 조심스럽게 가슴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도허레건에 머무는 동안 찰스 옹의 말벗을 해드리느라, 정작 젊은 찰스와는 깊은 사담을 나눌 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p>
<p>1757년 프랑스 오베르뉴의 유력한 무관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기사도(Chivalry)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뼛속 깊이 새기며 자란 청년이었다. 대대로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고 교회를 수호해 온 골수 가톨릭 무인 가문의 후예에게, 명예와 자유를 위해 칼을 뽑는 것은 신앙의 순결함을 증명하는 성스러운 의무였다.</p>
<p>그의 신앙적 뿌리는 화려한 세례명(본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리 조제프 폴 이브 로슈 질베르 뒤 모티에(Marie-Joseph-Paul-Yves-Roch-Gilbert du Motier).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사도 바오로, 브르타뉴의 수호성인 이브, 흑사병 환자를 돌본 성 로코의 이름을 겹겹이 두른 이 세례명 자체가 그가 호흡했던 유서 깊은 신앙의 토양을 증명하고 있었다.</p>
<p>그의 부친인 미셸 루이 크리스토프 뒤 모티에는 라파예트가 갓난아기였을 때 7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1759년 8월 민덴 전투에서 영국군의 포탄을 맞고 스물여섯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충격 속에 어린 라파예트를 시골 영지에 둔 채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과 친정 리비에르 가문에 머물렀기에, 소년은 기사도에 엄격했던 할아버지의 훈육 아래 성장했다. 그가 유독 찰스 옹이나 드 칼브 같은 노장들을 깍듯하게 따르고 존경하는 깊은 심리적 배경이기도 했다.</p>
<p>그러나 열세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몇 달 간격으로 잇달아 여의면서 소년은 졸지에 홀혈단신 고아가 되었다. 막대한 유산과 오베르뉴의 ‘후작’ 작위가 어린 어깨 위에 쏟아졌다. 사고무친이 된 오베르뉴의 귀족 소년들이 대개 그러했듯, 그는 열네 살에 기댈 언덕을 찾아 프랑스군에 장교로 입대했다. 국왕 근위연대(머스킷티어)에 적을 두면서도, 열한 살 때 입학했던 예수회 학풍의 명문 콜레주 뒤 플레시(Collège du Plessis, 훗날의 루이 르그랑)에서 학업을 이어갔다.</p>
<p>그의 올곧은 성품과 당당한 기품은 궁정 최고의 실력자인 장 드 노아이유 공작의 눈에 띄었다. 공작은 소년을 자신의 직속 기병연대에 배속시켰고, 이내 맏딸 아드리엔과의 혼담을 추진했다. 처음엔 장모의 반대로 혼기가 찰 때까지 미뤄졌으나, 마침내 1774년 4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열일곱, 신부 열다섯 살 때였다.</p>
<p>“처음 파리 저택의 경당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저는 이 여인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영혼으로 직감했습니다.”</p>
<p>라파예트는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도 아내 아드리엔에게 매일같이 사랑과 고백이 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도허레건을 떠나올 때도 장원의 집사장에게 프랑스로 가는 인편에 부쳐달라며 세 통의 두툼한 서신을 맡겨둔 터였다.</p>
<p>노아이유 가문의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를 시작한 것은 청년의 신앙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노아이유 가문은 프랑스 부르봉 왕실의 최측근이자 프랑스 교회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파리 대주교를 지낸 루이 앙투안 드 노아이유 추기경을 비롯해 고위 성직자들을 대대로 배출한 성골 집안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근처에 자리한 거대한 노아이유 저택(Hôtel de Noailles)은 궁정의 사치와 허영 대신 엄격한 수도원의 침묵과 기도가 흐르는 곳이었다. 저택 내 전용 경당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무일도와 묵주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라파예트는 그 거룩한 일상 속에서 영혼의 눈을 떴다.</p>
<p>특히 장모인 앙리에트 다게소(Henriette d&#8217;Aguesseau) 공작부인은 당대 파리 사교계에서 ‘베르사유에 숨어 사는 성녀’로 추앙받던 여인이었다. 명망 높은 대법관 앙리 프랑수아 다게소의 손녀로서 엄격한 절제와 자선을 실천했던 그녀는, 매일 새벽 미사로 하루를 시작했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수수한 옷을 걸친 채 파리의 빈민들을 돌보는 데 지참금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딸 아드리엔에게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순명(Obedience)’의 영성을 뼈에 새겨주었다.</p>
<p>그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아드리엔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맺어진 정략결혼을 숭고한 영적 결속으로 승화시켰다. 남편이 열아홉 살 나이에 국왕의 금령을 어기고, 임신 중인 자신을 남겨둔 채 대서양을 건너겠다고 결단했을 때도 아내는 원망 대신 기도로 축복해 주었다. 남편의 심장에 타오르는 불꽃이 세속의 야망이 아닌 ‘하늘의 소명’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1779년 라파예트가 잠시 귀국해 프랑스 정규군 파병이라는 거대한 결실을 이끌어낼 때, 궁정 막후에서 가장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어준 이 역시 아내 아드리엔이었다.</p>
<p>마차 안에서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요한 드 칼브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p>
<p>“처음 파리에서 브로이 공작의 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저 역시 후작께서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늙은 군인이야 화약 연기 맡으며 용병으로 구르는 게 천직이라지만, 이 안락한 베르사유의 귀공자가 사서 고생길로 뛰어든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보마르셰 경의 몽마르트르 집필실에서 후작과 부인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털어놓던 성모님의 환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낡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더군요.”</p>
<p>보마르셰 역시 처음에는 학교 후배의 무모한 객기를 극구 말렸으나, 부부가 증언한 성모의 계시 앞에 고개를 숙였고, 비밀리에 빅투아르호를 수배하며 믿음직한 호위역으로 드 칼브를 천거했던 것이다.</p>
<p>드 칼브의 존재는 이 은밀한 도미 작전의 핵심 기둥이었다. 바이에른 남부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나 프랑스군 장교로 입지전적인 출세를 거듭했던 쉰여섯의 노장. 1768년 프랑스 외무장관 쇼아죌 공작의 밀명을 받고 아메리카 식민지 구석구석을 상인으로 위장해 정찰했던 그는, 대륙의 지리와 사정에 훤한 당대 최고의 ‘아메리카통’이자 영어가 완벽한 백전노장이었다. 1776년 말 사일러스 딘과 미 대륙군 소장 계약을 맺은 뒤, 브로이 공작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라파예트의 사실상 보호자이자 스승이 되어 대서양의 험난한 항해와 900마일의 남부 황야를 건너왔던 것이다.<br />
1777년 4월 말, 루이 16세의 체포조를 따돌리고 스페인 로사헤스(Los Pasajes) 항구에서 닻을 올린 빅투아르호가 거친 대서양의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 위험천만한 항해 전체를 진두지휘한 실질적인 사령관이자 길잡이는 바로 드 칼브였다.</p>
<p>좁고 습한 선실 안에서 덜컹거리는 등불을 켜두고 보낸 두 달 가까운 항해 기간은, 라파예트에게는 군사 아카데미의 그 어떤 강의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하고 거룩한 수련장이었다.</p>
<p>라파예트는 드 칼브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혀끝이 굳어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던 투박한 영어를 알파벳 기초부터 회화까지 밤마다 익혀 나갔고, 베르사유 궁정의 장식용 검술이 아닌 적의 심장을 찌르는 실전 사격술과 보병 진형 구축, 포병 화력의 집중 원리, 험준한 산악과 늪지대에서의 유격 전술학 개요까지 백전노장의 피와 땀이 밴 군사학의 정수를 고스란히 전수받았다.</p>
<p>혈기만 앞서던 베르사유의 소년 기사가 대양(大洋)의 한가운데서 신대륙의 흙먼지를 버텨낼 진짜 야전 지휘관으로 담금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의 독립을 위해 이 노련한 지략가를 소년의 길잡이로 예비해 두신 것 역시, 하늘의 치밀한 안배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50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CiXjeqxZF022tD-SofP1RgFYl6YLd8tIt2rLWJ52bSSK7vtzCBMirNTxyAGZNUNjI4azJH3N_lDLzpYJGDh_3g.webp" alt="" width="429" height="533" /></p>
<p>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역사는 이 위대한 노장 드 칼브의 충직한 순명을 기막힌 비극과 영광으로 증명하게 된다.</p>
<p>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대륙회의 의원들은 외국인 용병들에게 질려 드 칼브를 문전박대했고, 모욕을 느낀 그는 짐을 싸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무보수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의회를 감동시키자, 드 칼브는 소년의 방패가 되어주기 위해 미련 없이 짐을 풀었다. 이내 의회도 노장의 진가를 알아보고 정식 소장 계급을 부여했다. 혹한의 밸리 포지에서 슈토이벤과 함께 군대의 뼈대를 잡았고, ‘콘웨이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라파예트의 곁을 우직하게 지켰다.</p>
<p>그리고 운명의 1780년 8월, 캄덴 전투.<br />
캐럴 가문의 자제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던 ‘메릴랜드 사단과 델라웨어 연대’를 지휘하던 드 칼브는, 총사령관 게이츠가 도망친 절망적인 포위망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열한 발의 총탄과 총검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메릴랜드의 병사들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했다.<br />
“내 용감한 메릴랜드 병사들에게 감사를 전해주시오.”<br />
적장 콘월리스마저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던 그의 유언은, 도허레건 장원에서 맺어진 메릴랜드와 노장의 인연이 피로 맺은 언약이었음을 영원히 증명했다. 40여 년 뒤인 1825년, 노구가 되어 미국을 다시 찾은 라파예트가 당시까지 유일한 독립선언서 서명자로 살아남아 있던 늙은 찰스 캐럴의 손을 잡고 캄덴의 드 칼브 묘역을 찾아가 머릿돌을 놓으며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씨앗이, 바로 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p>
<p>이틀간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 찰스 캐럴은 라파예트가 뼛속까지 진정한 기사의 품격을 지닌 청년임을 거듭 확인했다.</p>
<p>헤이버디그레이스의 허름한 여관에 묵을 때였다. 방이 모자라 침대가 단 두 개뿐인 좁은 방에 들어서자, 열아홉의 대귀족 후작은 주저 없이 자신이 삐걱거리는 간이침대에서 자겠노라 고집을 부려 두 연장자에게 온전한 침대를 양보했다. 이튿날 아침에는 가장 먼저 일어나 자신의 침구를 반듯하게 정돈해 두었고, 식탁에서는 마부나 하인들을 대할 때처럼 시골 여관의 종업원들에게도 더없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p>
<p>영어를 한마디라도 더 배우겠다며 서툰 발음으로 손수 주문을 도맡았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찰스가 극구 말리는데도 묵직한 스페인 은화(종업원의 한 달 치 품삯에 달하는 거금)를 팁으로 테이블 위에 슬며시 얹어놓았다. 여관 주인과 하인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조아리자, 청년은 찰스를 향해 붉어진 얼굴로 나직이 속삭였다.</p>
<p>“찰스 의원님의 단골 여관이라 들었습니다. 의원님과 도허레건의 어르신께 입은 거룩한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는 처지인데, 이 정도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p>
<p>그 겸손하고 속 깊은 배려에 찰스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어깨가 으쓱해졌다.</p>
<p>그리고 마침내 이튿날 해 질 녘, 마차는 필라델피아 도심의 북적이는 자갈길을 지나 혁명의 심장부인 시티 태번(City Tavern) 앞 광장에 멈춰 섰다. 붉은 벽돌 건물 주변으로 대륙군 장교들의 투박한 고함과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마차 문이 열리자 필라델피아의 붉은 석양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p>
<p>프랑스 최고 명문가의 소년 기사와 신대륙 신앙의 거인이, 마침내 독립전쟁의 거대한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p>
<p>다음 날 오후.</p>
<p>시티 태번 2층, 밀실의 묵직한 오크나무 문이 열리는 순간 라파예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p>
<p>방 한가운데,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나이가 빛바랜 대륙군 제복을 입은 채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조지 워싱턴. 신대륙의 모든 고뇌와 운명을 양어깨에 짊어진 고독한 사령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p>
<p>두 사나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혔다.</p>
<p>사나이들의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는 ‘척정(隻情)’이란 결코 길고 지루한 탐색 끝에 오는 것이 아니다. 찰나의 눈빛,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영혼의 무게를 직감하는 데는 단 8초면 충분했다.</p>
<p>워싱턴의 깊고 엄숙한 눈동자 속으로 무수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청년을 이끌고 문을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찰스 캐럴이었다. 몇 년 전, 개신교도들의 편견에 맞서 필라델피아 성당의 제단 앞으로 자신과 함께 나란히 걸어가 주었던 의리의 정치가. 그리고 불과 얼마 전, 참혹했던 롱아일랜드 전투의 핏빛 진흙 구덩이에서 총사령관인 자신과 주력군을 탈출시키기 위해 영국군의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온몸을 던져 산화해 간 캐럴 영지의 자제들—‘메릴랜드 400인(Maryland 400)’의 거룩한 피……! 그 붉은 피의 부채감이 워싱턴의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p>
<p>찰스 캐럴이 보증하고 데려온 청년이라면, 목숨을 걸고 신뢰할 수 있었다.</p>
<p>라파예트 역시 그 거인의 눈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그럼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대리석 같은 의지를 보았다. 그것은 도허레건의 사설 경당에서 존 캐럴 신부가, 그리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찰스가 누누이 말했던 ‘신의 의인(義人)’의 눈빛이었으며, 환시 속에서 성모께서 손짓하며 가리키셨던 바로 그 ‘대륙의 아비’였다.</p>
<p>청년 후작의 가슴속에서 오만했던 베르사유 귀족의 자존심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오직 섭리를 향한 거룩한 순명의 불꽃만이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p>
<p>운명의 시계추가 8초를 가리키는 순간, 두 사나이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영혼의 동반자임을 직감했다. 장내를 지배하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워싱턴이 먼저 커다란 손을 내밀며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로 침묵을 갈랐다.</p>
<p>“후작, 먼 길을 오셨소. 찰스 캐럴 의원이 당신을 내게 데려왔을 때,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내어줄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소.”</p>
<p>라파예트는 망설임 없이 워싱턴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스무 살 청년의 손아귀에 굳은 힘이 들어갔다.</p>
<p>“장군님, 저는 프랑스 가문의 영광이나 위세를 뽐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찰스 캐럴 의원께서 제게 말씀하셨듯, 저는 그저 장군님의 충직한 칼이 되어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순명하러 왔을 뿐입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p>
<p>두 사나이의 손이 단단히 얽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뒤편에 서 있던 찰스 캐럴은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p>
<p>롱아일랜드에서 피 흘린 메릴랜드 400인의 영혼이, 그리고 천상의 모후께서 엮어주신 거룩한 인연이 마침내 신대륙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p>
<p>실제 그날 이후, 슬하에 자식이 없던 조지 워싱턴은 젊고 이상주의적인 라파예트를 친아들처럼 아꼈고, 라파예트 역시 워싱턴을 평생의 아버지이자 멘토로 모셨다. 훗날 프랑스로 돌아간 라파예트가 자신의 외아들 이름을 ‘조지 워싱턴 라파예트(Georges Washington de La Fayette)’로 명명한 것은, 바로 이 8초의 눈빛 교환에서 시작된 거룩한 언약의 결실이었다.</p>
<p>(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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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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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Sun, 20 Sep 2026 19:27:23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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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8211;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8211;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60;1&#62;  안동일 작 1777년 7월 하순 어느 날, 메릴랜드 캐럴 가문의 장원 도허레건(Doughoregan Manor) 중앙 저택 현관 계단 포치 앞. 붉은 노을을 등진 채, 남루한 여행용 외투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훌쩍 큰 체구의 소년이 삼각모를 벗어 가슴에 품고 긴장된 표정으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8211;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8211;</h4>
<h4>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lt;1&gt;</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1777년 7월 하순 어느 날, 메릴랜드 캐럴 가문의 장원 도허레건(Doughoregan Manor) 중앙 저택 현관 계단 포치 앞.</p>
<p>붉은 노을을 등진 채, 남루한 여행용 외투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훌쩍 큰 체구의 소년이 삼각모를 벗어 가슴에 품고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얼굴엔 긴 여정의 피로와 초조함이 역력했으나 눈빛만은 맑고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p>
<p>잠시 후, 찰스 캐럴이 묵직한 도허레건 저택의 목재 대문을 열고 현관 포치로 급히 걸어 나왔다. 이층 서재에 머물던 중 하인의 다급한 전갈을 받고 내려온 참이었다.</p>
<p>“작은 주인님, 불어를 쓰는 앳된 귀족풍의 청년이 벤저민 프랭클린 박사님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문간에 서 있습니다.”</p>
<p>당시 아무리 프랑스 최고 귀족이라 해도, 예고도 없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낯선 마차를 타고 불쑥 찾아온 이방인을 하인들이 안주인이나 가족이 머무는 저택 안쪽 전실(Vestibule)로 덥석 들여놓는 법은 없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낯선 외국인을 문간인 현관 기둥 앞 포치에 정중히 세워두고, 서재나 경당 쪽으로 기별하러 뛰어가는 것이 가문의 엄격한 철칙이었다.</p>
<p>그 전갈을 듣는 순간 찰스는 찾아온 손님이 대충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서너 달 전, 보마르셰가 존 신부에게 보낸 비밀 서신 구석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지 않았던가.</p>
<p>‘…루이 르그랑의 동문이여, 요즘 파리 사교계에 모교 후배뻘 되는 열아홉 살배기 노아이유 가문의 맹랑한 후작 녀석 하나가 대륙군에 가겠다고 내 집필실 문턱이 닳도록 조르고 있네. 거물 가문의 아이라 왕실이 발칵 뒤집힐까 봐 어르고 달래 쫓아내고는 있네만, 그 눈빛만큼은 불꽃 같더군…’</p>
<p>당시 찰스는 그 편지를 읽고 ‘그저 파리 철부지의 치기 어린 소동이겠거니’ 하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편지 속 불꽃의 주인공이, 몇 달 뒤 남루한 옷차림으로 바다를 건너 도허레건 장원 문전 앞에 기적처럼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p>
<p>찰스를 마주한 소년은 반가운 기색 속에서도 타향의 긴장감에 입술을 달달 떨며, 어눌한 영어 대신 완벽한 파리식 불어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p>
<p>“제가… 대륙회의의 찰스 캐럴 경을 뵈러 온 것이 맞습니까? 저는 오베르뉴의 질베르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입니다. 국왕 전하의 노아이유 기병연대 대위이기도 합니다.”</p>
<p>신대륙의 시골 장원에서, 유학 시절 파리 귀족들의 입에서나 듣던 가장 우아하고 격조 높은 베르사유 궁정 불어가 앳된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찰스는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게다가 소년의 손에 쥐어진 밀서의 붉은 봉랍은 분명 프랭클린 박사의 것이었다. 굳이 지금 뜯어볼 필요조차 없었다.</p>
<p>체면이고 격식이고 따질 틈도 없이, 찰스 캐럴은 현관 돌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타향만리에서 사지를 넘어온 이 어린 동지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p>
<p>“오, 하느님! 바다를 건너 이 오지까지 어찌 홀로 오셨소, 후작!”</p>
<p>찰스는 소년의 어깨를 감아안다시피 이끌며 저택 안쪽 전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저녁 가족 기도를 앞두고 아버지 아나폴리스 찰스 캐럴 옹이 파이프 담배를 문 채 깊숙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p>
<p>실내로 들어서자 청년은 자신의 초라한 꼴이 내심 몹시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손으로 낡은 외투깃을 만지작거리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p>
<p>“너무 다급히 오느라  차림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흙먼지라도 털고 들어섰어야 했는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p>
<p>그러자 찰스 캐럴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유려한 파리식 불어로 화답했다.</p>
<p>“천만에요, 후작. 자유를 위해 바다를 건너온 젊은 기사의 옷에 묻은 흙먼지는, 베르사유 무도회의 그 어떤 비단옷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법입니다. 잘 오셨소, 도허레건에.”</p>
<p>찰스가 의자의 노인을 가리키며 덧붙였다.</p>
<p>“우리 아버님이십니다. 인사하시지요. 아버지, 우리 독립군을 돕겠다며 파리에서 온 라파예트 후작입니다.”</p>
<p>라파예트는 18세기 프랑스 베르사유의 최고급 궁정 예절을 뼈에 새긴 청년이었다. 남의 장원에 불쑥 찾아왔을 때 허락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간에서 예를 갖추는 것은 물론, 첫 대면에서는 상대를 한껏 높인 뒤 자신의 출신 영지와 작위, 직책을 정중히 밝히는 것이 당대 신사의 몸가짐이었다. 라파예트는 한쪽 무릎을 굽혀 정중히 불어로 인사를 건넸다.</p>
<p>“유서 깊은 메릴랜드 캐럴 가문의 어르신을 이렇게 뵙습니다. 저는 오베르뉴의 질베르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국왕 전하의 노아이유 기병연대 대위이기도 합니다.”</p>
<p>노인은 “잘 오셨소” 하고 영어로 짧게 답하며 손을 내밀기는 했으나,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라파예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노인의 눈가에는 ‘또 베르사유의 허파에 바람 든 모험가가 한자리 꿰차러 왔군’ 하는 싸늘한 경계심이 역력했다. 게다가 유난히 시장기를 참지 못하는 노인은 이날 저녁 가족 미사가 예정되어 있어 점심을 물렸던 터라 특유의 짜증까지 섞여 있었다.</p>
<p>노인이 대뜸 아들에게 퉁명스러운 영어로 한마디를 던졌다.</p>
<p>“찰스야, 저 파리 도련님이 대체 뭐라 지껄이는 게냐? 대륙회의에 빌붙어 한자리 해 먹으려는 또 다른 건달 놈 아니냐?”</p>
<p>그 무렵 사일러스 딘이 파리에서 무분별하게 계약해 보낸 외국인 무관들이 물밀듯 밀려들어, 옥석을 가릴 수 없던 대륙회의와 지역 유지들에게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p>
<p>“아버지, 이 청년 후작은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여기 아버지가 그리 신임하시는 벤저민 박사님의 추천장도 가지고 왔습니다.”</p>
<p>찰스는 아버지에게 편지 봉투를 들어 보여준 뒤, 프랭클린과 보마르셰의 소개장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벤자민은 청년의 어린 신부 까지 남편의 미국행에 적극적이어서 너무도 놀랍다고 적고 있었다.</p>
<p>노인의 눈초리가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라파예트를 살피고 있었다.</p>
<p>노인 맞은편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던 라파예트는 흙먼지 묻은 소맷자락을 매만지다 벽난로 위 어둑한 벽면에 걸린 성화를 발견하고는 불현듯 눈빛을 빛내며 탄성을 뱉었다.</p>
<p>“아니, 저 그림은……!”</p>
<p>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달빛처럼 빛나는 성모의 순백 드레스와 푸른 망토, 그리고 그 발치를 감싼 어린 천사들의 깃털. 소년의 젖은 눈동자가 경건하게 떨렸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41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images-3.jpg" alt="" width="252" height="372" /></p>
<p>“세비야의 무리요(Murillo) 화백께서 붓을 든 거룩한 성모님이 아니십니까? 파리의 저희 처가 회랑에도 꼭 같은 성모님이 모셔져 있어, 아침기도를 올릴 때마다 무릎을 꿇곤 했습니다. 이 머나먼 신대륙의 장원에서 어머님의 같은 자애로운 눈빛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p>
<p>소년은 감격에 젖어 자리에서 일어나 성화 앞으로 다가갔다. 편지를 읽다 만 젊은 찰스와 안락의자의 아버지, 두 찰스가 경이로운 눈으로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p>
<p>“망토의 유려한 곡선과 천사들의 명암 처리가 아주 빼어납니다. 노아이유 저택 회랑에 걸려 있던 그림보다 오히려 색감이 더 따뜻하고 생생합니다. 천사들의 표정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하군요. 어쩌면 무리요 화백의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를 이곳에서 마주하게 되다니요……”</p>
<p>소년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모자를 품에 안은 채 성모화를 우러러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지막한 성모송(Ave Maria)이었다.</p>
<p>안락의자의 아나폴리스 찰스 옹이 곰방대를 뻐끔거리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p>
<p>‘허어… 저 녀석 보게? 저 그림이 스페인에서 건너온 무리요의 작품임을 단박에 알아본단 말인가? 저게 우리 집안 3대가 모셔온 보물인 줄을? 눈치로 보아하니 게다가 속 깊은 녀석이 혹여 모작일지도 모를 그림을 두고,   처가의 진품보다 오히려 뛰어나다며 집안의 체면을 한껏 세워주고 있구나……’</p>
<p>당시 식민지의 신흥 부호들은 대개 유명 조상이나 국왕의 초상화를 걸어 과시했으나, 가톨릭 명문인 캐럴 가문은 유럽 거장들의 성화를 모셔 가문의 영적 정체성을 드러내곤 했다. 18세기 중후반 유럽과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칭송받던 가톨릭 화가가 바로 스페인의 무리요였다. 벨라스케스나 미켈란젤로의 대작들은 왕궁과 교황청에 묶여 있어 부호들이 모작조차 구하기 어려웠지만, 무리요의 성모화는 가톨릭 귀족들의 수집 1순위였다. 특히 라파예트의 처가인 노아이유 가문은 파리 대주교를 지낸 노아이유 추기경 저택에 무리요와 르 브룅의 걸작들을 수두룩하게 소장한 예술품의 보고였다.</p>
<p>캐럴 옹은 선친인 개척자 찰스 캐럴이 도허레건을 세우며 스페인 상인을 통해 전실에 걸어둔 저 작품이 훌륭한 모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왔다. 유럽 귀족들이 이런 명화를 식민지 촌구석에 순순히 넘겼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 최고 명문가의 청년이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한 것이다.</p>
<p>이 짧은 순간은 라파예트가 철부지 건달이 아니라, 유럽 최고 명문가의 안목과 성모를 향한 깊은 신심을 겸비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한 방이 되었다. 완고한 노인의 의심이 단숨에 호기심과 호감으로 돌아섰다.</p>
<p>그때 복도 회랑 쪽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존 캐럴 신부가 전실로 들어섰다. 저택 안쪽 경당(Chapel)에서 제의를 갖춰 입고 분향을 준비하던 중 하인의 전갈을 받고 급히 걸어온 길이었다. 그날은 마침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녀 안나 축일(7월 26일) 무렵이었기에, 존 신부는 오랜만에 본가에 들러 일가를 위한 ‘가족 평화와 순명을 위한 봉헌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p>
<p>사제의 로만 칼라를 본 라파예트는 급히 다가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존 신부가 감탄하며 청년을 내려다보았다.</p>
<p>“아니, 자네가… 몇 달 전 보마르셰가 편지에서 말하던 그 불꽃 같은 눈빛의 청년이란 말인가?”</p>
<p>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파예트는 사제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아 입을 맞추었다.</p>
<p>“오베르뉴의 질베르가 존 캐럴 신부님을 뵙습니다.”</p>
<p>소개는 아까와 달리 간략했으나 목소리에는 깊은 감격이 묻어났다.</p>
<p>“평화가 함께하기를(Pax vobiscum). 메릴랜드에 잘 오셨소, 질베르 형제여.”</p>
<p>존 신부는 라파예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강복했다. 나지막하고 유려한 라틴어와 프랑스어였다.</p>
<p>존 신부는 프랑스 생토메르(St. Omer)와 리에주에서 예수회 사제로 20년 가까이 생활하다 귀국한 당대 최고의 가톨릭 지성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상륙한 이래 거친 황야와 음산한 여관을 전전하며, 영국계 개신교도들의 싸늘한 시선과 언어의 장벽에 극도로 지쳐 있던 열아홉 소년 라파예트에게, 완벽한 모국어로 축복을 내리는 사제의 손길은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거룩한 위로 그 자체였다. 낯선 신대륙에서 온갖 의심과 경계에 주눅 들어 있던 소년 귀족은 존 신부의 온화한 눈빛 앞에서 마침내 모든 긴장의 빗장을 풀었다.</p>
<p>“후작, 참으로 수고 많으셨소. 그 험난한 대서양과 황야를 헤쳐 오느라 얼마나 고단했겠소. 자, 차차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앉읍시다.”</p>
<p>타향만리에서 고향 오베르뉴의 사제관을 마주한 듯 울컥한 소년은, 품속에서 낡은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꺼내 쥐며 눈시울을 붉혔다.</p>
<p>“신부님, 어르신… 실은 국왕 전하의 출국 금지령을 어기고 변장을 한 채 스페인 항구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세상의 법으로 따지자면 저는 탈영병이 맞습니다.”</p>
<p>비로소 가장 깊은 속내가 터져 나왔다. 보마르셰의 편지대로 참으로 무모하고도 거침없는 청년이구나 싶어 찰스가 존 신부를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p>
<p>라파예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p>
<p>“캐럴 의원님, 그리고 신부님. 보마르셰 경의 서신과 프랭클린 박사의 소개장은 그저 제 육신을 이곳으로 이끈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지독한 체포령을 뚫고, 어린 아내를 뒤로한 채 이 거친 바다를 건넌 진짜 이유는…….”</p>
<p>청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왈칵 쏟아져 흙먼지 묻은 뺨 위로 흘러내렸다.</p>
<p>“신부님, 사람들은 저를 철없는 도련님의 치기나 영달을 좇는 모험가로 봅니다. 파리의 장인어른과 베르사유의 귀족들은 저를 미치광이라 손가락질하며 국왕을 배신한 역적이라 부르고, 처자식을 버린 파렴치한이라 수군댑니다. 하지만 신부님… 저는 헛된 명예를 바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바다를 건너라 명하셨습니다. 제 영혼은 오직 그분의 부르심에 ‘순명(順命)’했을 뿐입니다! 이곳에 제 뼈를 묻어도 좋습니다. 부디 제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이 거룩한 전장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p>
<p>“성모님의 명이라 하셨소, 후작?”</p>
<p>존 신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p>
<p>“단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고향 오베르뉴의 성당에서 감실의 붉은 등불 아래 밤샘 기도를 드리던 중, 바다 건너 피눈물 흘리는 백성들을 구하라는 성모님의 음성이 제 심장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파리 처가인 노아이유 가문의 경당에서 신혼인 아내 아드리엔과 함께 엎드려 기도할 때도 성모님께서는 같은 계시를 주셨습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바다를 건너 신대륙의 백성들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으니 기쁘게 내조하라는 당부까지 내리셨습니다.”</p>
<p>찰스 캐럴과 존 신부는 깊은 침묵 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 소년의 불가해한 광기가 이해되었다.</p>
<p>실제 역사에서도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대귀족이 막대한 유산과 임신 중인 아내, 베르사유의 안락함을 팽개치고 국왕의 금령까지 어겨가며 사비를 털어 대서양을 건넌 사건은 당대인들에게도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속적인 계몽주의 사상이나 군공(軍功)에 대한 야심만으로는 그 처절한 투신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p>
<p>존 신부는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통달한 예수회 사제였다. 거짓된 충동과 참된 성령의 감화를 분별할 줄 알았던 사제는, 소년의 결연한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단순한 치기가 아니라 거룩한 소명(Vocation)의 징표임을 꿰뚫어 보았다.</p>
<p>“질베르, 그대는 미친 것이 아니오. 하느님께서 광야의 다윗을 부르셨듯, 바다 건너 그대를 이 메마른 대륙의 방패로 부르신 것이오.”</p>
<p>곁에서 지켜보던 찰스 캐럴 역시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이 소년은 단순한 지원병이 아니라, 하늘이 대륙의 자유를 위해 베르사유의 심장에서 빼내어 보낸 섭리(Providence)의 도구였다. 대륙회의의 냉대와 외국인에 대한 불신을 뚫고, 찰스 캐럴이 자신의 모든 정치적 명운을 걸어 라파예트를 워싱턴의 품에 안겨주어야 할 내적 당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p>
<p>두 살 때 아버지를 영국과의 7년 전쟁에서 잃고 고아로 자라며 기사도의 신앙을 뼈에 새겼던 오베르뉴의 후예, 그리고 콜레주 뒤 플레시를 거치며 루이 르그랑의 예수회 학풍을 호흡했던 소년 라파예트는 그렇게 메릴랜드의 가톨릭 거인들과 영적으로 단단히 결속되었다.</p>
<p>이어 찰스가 노인에게 프랑스어로 오간 대화의 전말을 나지막이 영어로 전했다.</p>
<p>“아버지, 이 젊은이는 성모님의 계시를 보았다고 합니다. 신대륙의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에 오직 순명하기 위해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온 것입니다.”</p>
<p>말이 끝나는 순간, 아나폴리스 찰스 옹의 돋보기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부를 일구고 교회를 수호해 온 노부호의 심장에 ‘계시’와 ‘순명’이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꽂힌 것이다. 노인은 말없이 곰방대를 내려놓고, 청년을 향해 깊은 경의의 눈빛을 보냈다.</p>
<p>“숙부님, 오늘 저녁 가족 미사에 이 젊은 후작을 함께 참례시키시지요.”</p>
<p>존 신부의 제안에 아나폴리스 옹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맞장구를 쳤다.</p>
<p>“그럼, 여부가 있겠나! 내 처음 문간에 들어설 때부터 저 청년이 천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미카엘 대천사인 줄 진작에 알아채고 있었지. 천사가 미사에 빠져서야 되겠는가?”</p>
<p>조금 전까지 불란서 건달이라 혀를 차던 노인의 천연덕스러운 호통에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전실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41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8FCxz0UnWUTw.webp" alt="" width="734" height="999" /></p>
<p>&nbsp;</p>
<p>저택 깊숙한 비밀 사설 경당의 문이 열렸다.<br />
존 신부가 제대를 향해 서서 묵직하고 신비로운 라틴어로 기도를 시작했다.</p>
<p>“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p>
<p>흙먼지 묻은 여행복 차림의 라파예트는 그 장엄한 라틴어의 울림 속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격을 맛보았다. 성경 봉독의 순간, 존 신부는 신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따뜻하고 명징한 영어로 말씀을 선포했다.</p>
<p>라파예트는 묘한 경이로움에 눈을 가늘게 떴다.<br />
제대 위에서 존 신부는 로마 교회가 천년 넘게 지켜온 가죽 장정의 라틴어 불가타(Vulgate) 성경을 펼쳐두고 거룩한 제례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 아래 무릎을 꿇은 아나폴리스 옹과 영지의 일꾼들이 쥐고 있는 책은 놀랍게도 런던에서 인쇄된 개신교도들의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이었다.</p>
<p>‘가톨릭의 제대 앞에서 적들의 성경을 쥐고 기도한단 말인가?’</p>
<p>청년 후작의 당혹감을 눈치챈 찰스 캐럴이 나직한 불어로 귓가에 속삭였다.</p>
<p>“후작, 놀라지 마십시오. 신대륙 식민지에서 로마의 영어 성경을 구하기란 바다에서 황금을 낚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껍데기가 누구의 손을 탔든, 천주의 말씀이 백성들의 귓가에 먼저 닿는 것이 참된 구원이라 믿으시는 분입니다.”</p>
<p>교리의 엄격한 형식보다 영혼의 구원을 앞세우는 거친 황야의 신앙. 라파예트는 촛불 아래 빛나는 투박한 성경책을 보며, 자신이 구하러 온 이 땅의 백성들이 얼마나 모진 고난 속에서 믿음의 불씨를 지켜왔는지를 가슴 저리게 깨달았다.</p>
<p>영성체의 시간, 라파예트는 홀린 듯 제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무릎을 꿇었다.<br />
“Corpus Christi (그리스도의 몸).”<br />
사제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성체가 입안에 닿는 순간, 소년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입을 벌리자 “그리스도의 몸” 하는 소리와 함께 정말 천주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 왔다. 얼마만인지 몰랐다. 뜨끈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순간 리피예트의 몸에서 광채가 났다.<br />
그를 바라보며 찰스 캐럴은 눈앞의 청년은 천상의 불꽃에 온몸이 타오르는 ‘천주의 기사’ 그 자체라고 확신했다.<br />
창밖으로 메릴랜드의 거친 바람이 불어닥쳤지만, 경당 안의 촛불은 라파예트의 머리 위를 푸르스름하고 거룩하게 비추고 있었다.</p>
<p>미사가 끝난 뒤, 일동은 중앙 식당의 정찬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br />
그곳에는 뜻밖에도 또 한 사람의 묵직한 손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로 쉰여섯 살의 백전노장, 요한 드 칼브(Johann de Kalb) 남작이었다.</p>
<p>찰스 캐럴은 미사가 시작되기 전, 소년이 간략히 털어놓은 험난한 여정을 듣자마자 “그런 귀한 어른을 어찌 볼티모어 여관방에 홀로 둘 수 있겠는가”라며 곧장 도허레건의 든든한 마차를 볼티모어로 급파했던 것이다. 여관에서 “도련님이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았나” 초조하게 파이프를 태우던 드 칼브는 짐 속에 아껴두었던 단정한 프랑스군 정복으로 갈아입고 찰스의 정중한 마차를 타고 장원에 도착해, 식탁에 합석한 참이었다.</p>
<p>드 칼브는 첫 대면에서부터 자신에게 붙은 ‘남작’이라는 칭호가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사일러스 딘과 브로이 공작이 주선한 명예상의 직함일 뿐, 실은 바이에른 농가 출신의 투박한 군인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아 캐럴 가문 사람들의 깊은 호감을 샀다.</p>
<p>자리가 무르익자 드 칼브는 메릴랜드산 구운 고기와 마데이라 와인을 들이켠 뒤, 와인잔을 쥔 채 라파예트를 바라보며 진솔한 소회를 털어놓았다.</p>
<p>“찰스 경, 사일러스 딘의 임관장을 품에 넣고 파리를 떠날 때만 해도, 제 임무는 그저 브로이 공작의 당부대로 베르사유의 젊은 귀족 한 분을 안전하게 필라델피아 의회까지 호위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서양의 거친 풍랑 속에서,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늪지대를 함께 걸으며 저는 보았습니다. 라파예트 후작은 안락한 궁정으로 돌아갈 다리를 스스로 불살라버린 참된 기사(Chevalier)였습니다. 그 불꽃 같은 헌신을 목도한 순간, 쉰을 넘긴 늙은 군인인 저 역시 이 젊은 후작의 뒤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 거룩한 전장에서 그분의 곁을 지키는 것이, 이제는 제 마지막 군무이자 하늘이 제게 내린 소명이라 믿고 있습니다.”</p>
<p>식탁 건너편에서 라파예트가 얼굴을 붉히며 “장군님, 그만하십시오”라며 어쩔 줄 몰라 손사래를 쳤다.</p>
<p>존 신부가 묵직한 미소를 띠며 드 칼브에게 물었다.</p>
<p>“바이에른 출신이시라 들었는데, 그렇다면 고향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라셨겠군요?”</p>
<p>쉰여섯의 노장이 투박한 손으로 군복 옷깃 안쪽에서 낡은 묵주 하나를 슬며시 꺼내 매만졌다.</p>
<p>“신부님, 저는 평생 전장을 떠돈 거친 군인이라 후작처럼 거룩한 환시를 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바이에른 시골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던 날 어머니가 쥐여주신 이 묵주만큼은, 화약 연기 자욱한 전장을 구르면서도 단 한 번도 품에서 뺀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이 늙은 군인을 이곳 신대륙까지 끌고 오신 데도 분명 깊은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p>
<p>성모의 불꽃을 품은 소년 기사와, 어머니의 낡은 묵주를 품고 전장을 버텨온 독일 노장. 식탁에 마주 앉은 이들의 영적 깊이에 아나폴리스 찰스 옹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술잔을 채워주었다.</p>
<p>더욱이 드 칼브는 과거 아메리카 대륙을 정찰했던 경험 덕에 영어가 대단히 유창했다. 젊은 찰스와 존 신부가 라파예트와 프랑스어로 영적 담론을 나누는 동안, 드 칼브는 그 내용의 요지를 구수한 영어로 통역하며 아나폴리스 옹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소외될 뻔했던 노인은 마음에 쏙 드는 노병 통역관을 얻어 신바람이 났다.</p>
<p>라파예트와 드 칼브는 사흘간 도허레건 장원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의 여독을 온전히 풀었다.</p>
<p>처음엔 “저 불란서 건달 놈”이라 혀를 차던 완고한 노(老) 찰스 캐럴 옹은, 사흘 동안 군더더기 없이 예의 바른 소년의 성품과 제 친손자뻘 되는 아이가 처자식과 대궐을 버리고 대서양을 건너온 기막힌 사연을 곱씹으며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천주와 성모를 향한 소년의 순수한 ‘순명’이, 평생 박해의 풍파를 견뎌온 늙은 부호의 메마른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p>
<p>(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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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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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Sun, 13 Sep 2026 16:03:45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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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여의도에서 벨리포지 까지  안동일 작 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소설 전개에서 잠깐 벗어나 필자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물론 소설과 깊이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쩌다가 왜 이 소설이 미국 독립전쟁에 이처럼 많은 분량을 할애하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는 미리 일러두고, 필자 자신에게는 정리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trong>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strong></h4>
<h4><strong> 여의도에서 벨리포지 까지</strong></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소설 전개에서 잠깐 벗어나 필자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물론 소설과 깊이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쩌다가 왜 이 소설이 미국 독립전쟁에 이처럼 많은 분량을 할애하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는 미리 일러두고, 필자 자신에게는 정리를 통한 구상이 되는 그런 이야기이다.</p>
<p>2026년 9월 2일, 필자는 독립군 삼각모자를 쓰고 밸리 포지 평원에 섰다. 한차례 소나기가 지난 뒤라 유난히도 푸르른 창공 아래, 흰 뭉게구름이 푸짐하게 떠 있는 너른 벌판을 기시감(旣視感) 속에서 걸으며 조지 워싱턴과 찰스 캐럴을 떠올렸다.</p>
<p>250년 세월의 격폐(隔閉)를 넘어 그들의 훈향(熏香)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벌판 저편에서 삼각모자를 쓴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도 했다. 바로 직전에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본 기록 영화의 잔상 때문이기도 했다.</p>
<p>20분 남짓한 영화에 찰스 캐럴은 딱히 등장하지 않았다. 의회 조사단이 도착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근엄한 중년의 의원들이 통나무 막사를 둘러보는 장면은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배우들의 생김새로 보아 내가 아는 캐럴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았다.</p>
<p>방문자 센터에서 상영하는 공식 오리엔테이션 영화의 제목은 《인내의 결단: 밸리 포지 주둔(Determined to Persevere: The Valley Forge Encampment)》이었다. 비교적 근래인 2020년에 제작된 것인데, 출연 배우들과 실제 역사적 인물의 싱크로율에 꽤 많은 신경을 쓴 듯했다.</p>
<p>내용이야 익히 아는 바였지만, 당시 대륙군의 복색과 무기, 그리고 엄혹했던 정황을 다시금 각인시켜 준 시청각 자료였기에 생생한 천연색 잔상으로 뇌리에 깊이 남았다.</p>
<p>영화는 독립군 병사들이 1777년 12월 19일, 밸리 포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부상당하고 병들고 지친 모습들이었다. 그해 가을, 대륙군이 영국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해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를 빼앗기기까지의 과정이 지도와 도표로 간략히 설명되었다.</p>
<p>워싱턴 장군이 겨울 주둔지로 밸리 포지를 선택한 까닭은, 영국군이 점령한 필라델피아를 압박하면서도 기습 공격을 막아내기에 유리한 고지(산등성이)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대륙의회가 피신해 있던 펜실베이니아 내륙(요크)을 영국군으로부터 지켜내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지형적 특성도 잘 설명되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27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People-of-the-Encampment.webp" alt="" width="650" height="366" /></p>
<p>이때부터 몰아친 혹독한 추위와 참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병사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주변 숲의 나무를 베어 약 2,000동에 달하는 통나무 막사(Hut)를 지어야 했다. 보급망의 붕괴로 신발도 없이 맨발에 넝마를 감은 채 눈길을 걸었고, 식량과 옷이 없어 굶주림과 저체온증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군대 내에 장티푸스, 이질, 천연두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병력의 절반 이상이 병상에 눕게 된다.</p>
<p>군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워싱턴 장군은 의회에 강력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영화에서는 의회 조사단이 바로 이 때문에 파견된 것으로 설명된다. 아주 잠깐 두 명의 의원이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데, 앞서 말했듯 이 영화의 장점이 배우와 실존 인물의 높은 싱크로율임에도 아무리 뜯어보아도 찰스 캐럴의 모습은 아니었다. 영화는 찰스 캐럴보다는 워싱턴 장군의 부인에게 희망의 초점을 맞춘다. 가장 엄혹한 시기에 실질적인 거액의 군자금을 들고 찾아온 가톨릭 부호 찰스 캐럴의 결정적 일화는, 아직 대중적인 정사의 영역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p>
<p>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고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1778년 2월 초 마사 워싱턴 여사가 눈길을 뚫고 밸리 포지 본부에 도착한다. 초상화속 실물과 정말 흡사한 마사 여사와 장군 및 장교 부인들이 합류해 병사들의 찢어진 옷을 꿰매고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참혹했던 전반부의 시련을 지나  &#8220;절망&#8217; 병영에 &#8216;희망&#8217;이 불어오는 전환점이 마련된다.</p>
<p>마사 여사의 등장 이후 후반부에는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장군이 병참감을 맡으며 보급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이 역시 찰스 캐럴의 공헌) , 프랑스와의 동맹 소식이 날아들며, 프로이센 출신 슈토이벤 장군의 체계적인 훈련이 시행되면서 오합지졸에 가깝던 대륙군이 강력한 정규군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묘사된다.</p>
<p>그중에서도 나를 전율하게 만든 장면이 있었다. 바로 헨리 녹스 장군의 포병대가 일사불란하게 대포 쏘는 연습을 하는 대목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잠시 후 자세히 전하겠다. 예산 때문이었겠지만 군인 엑스트라가 매우 적었던 점은 옥에 티 였으나 훌륭한 기록물이었다.</p>
<p>영화는 1778년 6월, 밸리 포지를 나선 대륙군이 몬머스(Monmouth) 전투에서 영국군과 당당히 맞서 싸우고 마침내 필라델피아를 수복했다는 자막과 함께 끝을 맺는다. 밸리 포지야말로 대륙군이 고난 속에서 진정한 부활을 일궈낸 요람이자, 현대 미 육군의 실질적 탄생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p>
<p>나는 상영관에서 나와 지하 기념품점으로 가 가죽 삼각모를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아내는 &#8220;그걸 대체 언제 쓰려고 사느냐&#8221;고 핀잔을 주었지만, &#8220;적어도 오늘 밸리 포지에서 쓰고, 또 해마다 독립기념일에 쓰면 된다&#8221;며 호기롭게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모자를 머리에 얹은 채, 밸리 포지 동남쪽 통나무 막사 터 부터 앤서니 웨인(Anthony Wayne) 장군의 기마 동상이 우뚝 선 곳까지 드넓은 평원을 걸었다.</p>
<p>방문자 센터에서 받은 트레일 지도를 펼쳐 든 순간, 나는 불현듯 서울의 여의도를 떠올렸다. 밸리 포지 평원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여의도를 연상시켰다. 공원 전체를 둥글게 도는 순환 도로가 있었고, 차로 도는 데 만도 30분 남짓 걸린다고 했다. 나중에 면적을 자세히 비교해 보니 여의도보다 훨씬 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지 기준의 여의도와 비교하면 거의 5배에 달하는 광활한 규모였다.</p>
<p>서울 여의도는 주거지와 금융·상업지구를 합쳐도 약 2.9㎢(약 88만 평 / 716에이커)이고, 한강 둔치까지 다 합쳐야 4.5㎢(약 136만 평) 수준이다. 강물 수면과 밤섬 일부를 포함하는 법정동(여의도동) 전체를 다 잡아야 8.4㎢ 남짓이다.</p>
<p>반면에 밸리 포지 국립역사공원은 약 14㎢(약 5.4 sq mi / 3,500에이커 / 423만 평)에 이른다. 여의도 실제 육지 면적의 무려 4.8배에 달하는 크기다. 미국인들의 스케일답게 널찍하게도 보존해 놓았다.</p>
<p>벨리포지가 처음부터 이런 평원은 아니었다.</p>
<p>1777년 당시 밸리 포지(Valley Forge)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농촌이자 번창하던 제철 마을이었다. 오늘날 처럼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로 변한 것은 대륙군 1만 2천여 명이 들어와 겨울을 나면서 비롯된 일이다.</p>
<p>본래 이곳은 18세기 초부터 웨일스계 퀘이커(Quaker) 교도 농민들이 정착했던 곡창지대였다. 완만한 언덕마다 밀과 호밀, 옥수수를 재배하는 비옥한 밭과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고, 반경 몇 마일 안팎으로 튼튼한 2층 석조 농가와 육중한 헛간들이 흩어져 있었다.</p>
<p>&#8216;포지(Forge)&#8217;란 골프를 치는 이들에게 &#8216;포지드 아이언(단조 채)&#8217;이라는 단어로 익숙하듯 쇠를 달구고 두드리는 대장간이나 제철소를 뜻한다. 이곳 계곡에 제철 공장(Mount Joy Forge)이 있었기에, 밸리 크릭(Valley Creek)의 &#8216;밸리&#8217;와 제철소의 &#8216;포지&#8217;가 합쳐져 &#8216;밸리 포지&#8217;라는 지명이 탄생한 것이다.</p>
<p>다만 대륙군이 도착했을 당시 마을 중심부는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대륙군이 주둔지로 찾아오기 불과 석 달 전인 1777년 9월, 영국군이 이곳에 있던 대륙군 군수 창고를 급습해 약탈하고 제철소와 주요 건물을 모조리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역사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독립군이 주둔했던 참호선과 대연병장(Grand Parade)의 웅장한 지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후대에 지어진 공장과 민가를 철거하고 거대한 구릉 초원 형태로 복원·보존해 두었기에 오늘날의 대평원이 탄생하게 되었다.</p>
<p>반면 서울의 여의도는 지난 반세기 동안 모래벌판 황무지에서 대한민국 정치와 금융의 최심장부로 탈바꿈했다. 구릉 산이었던 양발산은 동양 최대 규모의 석조 의사당으로  탈바꿈 했고,  갈대밭 자리에는 거대한 마천루들이 숲을 이루었고, 강변은 정비되어 사시사철 불야성을 이루는 도심 공원이 되었다.</p>
<p>한쪽이 역사적 기억을 지키기 위한 &#8216;보존과 회고&#8217;의 공간으로 남았다면, 다른 한쪽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눈부신 압축 성장을 웅변하는 공간이 된 셈이다. 바로 내가 온몸으로 겪었던  모국 한국과 지금 살고 있는 미국 상황의 한 오마쥬다.</p>
<p>아무튼 그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가슴 밑바닥에서 묘한 데자뷔(기시감)가  용솟음쳤다. 바로 소년 시절 여의도 모래벌판을 걷던 그때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반세기도 더 전인, 정확히 52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유년의 기억이 기록 영화 속 대포 쏘는 장면을 계기로 문득 깨어나더니, 밸리 포지의 광활한 평원에 서자 비로소 &#8220;아, 그랬었구나!&#8221; 하는 깊은 탄식과 함께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p>
<p>내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역사에 매혹되어 탐구하며 친미파, 지미파(知美派)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50여 년 전 여의도 벌판에서 비롯되었다. 밸리 포지를 빼닮았던 그 황량한 벌판을 쏘다니던 10대 소년 시절, 길가 헌병부대 막사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대포 모형을 마주한 뒤로 독립전쟁사를 그 시절 나이로서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파고들었던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27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images-1.jpg" alt="" width="250" height="188" /></p>
<p>1974년, 나는 여의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고 고교평준화(속칭 뺑뺑이 1기) 추첨으로 배정받은 학교였다. 그 시절 여의도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p>
<p>이름도 찬란(?)했던 거대한 아스팔트의 &#8216;5·16 광장&#8217;이 막 닦여 버스 정류장이 들어서 있긴 했으나, 동쪽 끝에는 시범아파트와 우리 학교만 덩그러니 서 있었고 서쪽 에는 국회의사당 돔이 한창 올라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두 지점 사이는 온통 잡초와 갈대가 무성한 모래벌판이었고, 저 멀리 몇몇 아파트 단지가 뼈대를 올리던 황량한 풍경이었다. 참 중간에 군 부대 막사가 꽤 너른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p>
<p>방과 후면 콩나물시루처럼 미어터지는 학교 앞 정류장을 피해, 우리는 광장 쪽 버스 정류장까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터덜터덜 걸어가곤 했다. 족히 20분은 걸리는 모래바람 이는 길이었다.</p>
<p>그 길을 언제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단짝 친구가 바로 민철이었다. 1학년과 2학년 때 내리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얼마나 붙어 다녔던지, 2학년 무렵부터는 아예 &#8216;용돈 공동체&#8217;를 결성했다. 각자 집에서 받아오는 한 달 용돈을 한 주머니에 털어 넣고 한 녀석이 번갈아 관리하면서, 하굣길에는 주머니에서 버스 토큰 딱 두 개만 꺼내 쥐고 나란히 버스에 오르곤 했다. 혼자 몰래 빵을 사 먹거나 딴짓을 하며 쏘다니는 건 우리 사이의 불문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집안이 꽤 넉넉했던 민철이가 나보다 두 배나 많은 용돈을 내놓으면서도 군말 없이 그렇게 지냈다.</p>
<p>그 녀석이야말로 어려서부터 뼛속까지 &#8216;친미&#8217; &#8216;미국통&#8217;이었다. 의대 졸업하자 마자 미국으로 가 전문의를 딴  누나의 초청으로 온 가족이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1학년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기는 머지않아 미국으로 떠난다고 입버릇 처럼 떠벌리곤 했다. 머리도 영특했던 녀석은 일찍부터 &#8216;미국 바람&#8217;이 들어 반에서 영어를 제일 잘했고, 입만 열면 미국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누나가 바다 건너 부쳐준 비틀즈, 키스(KISS), 제스로 털(Jethro Tull)의 LP 원판(Original Press)을 애지중지 자랑하곤 했다. 나중에는 내 몫까지 챙겨 공수해 주던 착한 녀석이었다.</p>
<p>1974년 여름방학 때, 우리는 웅장한 윤곽을 드러내던 국회의사당 신축 현장에 사흘간 학생 동원으로 차출되었다. 교련복을 입고 교련 선생님의 감시 아래 뙤약볕이 내리쬐는 의사당 앞마당에서 온종일 굵은 자갈을 골라내는 중노동이었다. 비 오듯 땀을 뻘뻘 흘리며 자갈을 주워 담던 민철이가 이마를 훔치며 불쑥 내뱉었다.</p>
<p>&#8220;야,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대한민국 고등학교 하루빨리 뜬다. 코리안 하이스쿨, 썩(Korean high school sucks)!&#8221;</p>
<p>등 뒤에서 교련 선생도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건지 아니면 기가 차서였는지 못 들은 척 묵묵히 지나갔다. 훗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권상우가  &#8220;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8221; 하고 절규하는 장면을 보며, 30년 전 여의도 의사당 바닥에서 거친 영어를 내뱉던 민철이 녀석이 떠올라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p>
<p>어느 날 방과 후, 여느 때처럼 재잘거리며 광장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벌판 중간쯤 자리 잡은 헌병부대 막사 앞에 난데없이 낯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야포였다. 그 부대는 중대 규모의 헌병대였는데, 군 주요 행사에 동원되거나 각급 부대 조경용으로 쓰이던 물품들의 중간 집하장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언젠가는 6·25 때 쓰였다는 훈련기가 마당 한구석에 세워져 있더니, 훗날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져 전시되는 것을 보기도 했다.</p>
<p>철조망 너머로 까치발을 딛고 들여다보며 &#8220;야, 저 대포는 대체 어떻게 쏘는 걸까?&#8221; 하고 웅성거리고 있는데, 철망 안쪽에서 한 헌병 형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p>
<p>&#8220;야, 이민철! 너 들어와서 구경하고 싶어?&#8221;</p>
<p>&#8220;네! 들어가서 보고 싶어요!&#8221;</p>
<p>명찰에 적힌 녀석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우리는 형이 열어준 철조망 사립문을 통해 신나게 부대 안으로 들어가 대포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헌병 형은 씩 웃으며 자신 가슴의 명찰을 톡톡 쳤다. 말년 병장이었던 그의 이름은 &#8216;이철민&#8217;이었다. 대낮이라 부대 안이 한산하기도 했거니와, 거꾸로 뒤집힌 이름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철민이 형이 위병 근무를 서거나 마음씨 좋은 장교들이 있는 날이면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영내에 들어가 이것저것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곤 했다.</p>
<p>대포 곁에는 큼지막한 볼링공만 한 쇳덩이 탄환도 함께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얕은 지식으로는 그 거친 포신으로 포탄을 어떻게 장전하고 쏘아 올리는지 요령부득이었다. 그런데 이번 밸리 포지 기록 영화 속에서 병사들이 화약을 다져 넣고 뇌관을 점화하는 훈련 장면을 지켜보며, 실로 50년 만에 유년의 호기심을 완벽하게 풀어낸 것이다.</p>
<p>그 시절 어린 소견에는 제아무리 무거운 쇳덩이라 한들, 흙바닥에 떨어져 쾅 하고 터질 것 같지도 않은 쇠공 하나 날아간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살상력이 있을까 싶었다.</p>
<p>그런데 다음 날 아침, 민철이가 신이 나서 두꺼운 백과사전을 뒤져 알아낸 지식을 내게 털어놓았다.</p>
<p>&#8220;야, 그 대포알은 날아가서 공중에서 터지는 게 아니래. 진짜 볼링공처럼 적군 대열 앞 땅바닥을 향해 낮게 쏘는 거야! 그럼 그 무거운 쇳덩이가 땅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면서 적군 보병들의 발목과 정강이를 모조리 부러뜨리고 지나가는 거래. 밀집 방진을 짠 군대에는 그게 제일 무서운 무기였대!&#8221;</p>
<p>듣고 보니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한 이치였다. 녀석은 대포 모형이 여의도 헌병대에 서 있게 된 내력까지 조사해 들려주었다. 미국은 1976년 독립 200주년(Bicentennial)을 앞두고 197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 미군 주둔지와 우호 동맹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펼쳤는데, 주한미군(USFK)과 한국군 지휘부 간의 군사 외교 및 친선 교류 차원에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주력 야포 축소 모형과 실물 크기 복제품(Replica)을 한국군 주요 헌병·의장 부대에 우정의 상징으로 기증했다는 것이다.</p>
<p>나중에 사료를 추적해 보니 당시의 대포는 미 육군 조병창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상징물이었다. 포신은 주철이나 청동 주물로 뜨고, 포가(포대 마차)는 단단한 참나무로 제작된 이 야포들은 미국 버지니아주 포트 리(Fort Lee)나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의 조병창 등에서 정밀하게 복원·제작하여 보급하던 것이었다. 겉 모습만큼은 밸리 포지에서 실제로 쓰였던 그 야포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p>
<p>실제로 1777년 밸리 포지의 혹한을 견뎌내던 바로 그 무렵,  피에르 보마르셰가 세운 위장 회사 &#8216;로드리그 오르탈레즈(Rodrigue Hortalez et Cie)&#8217;를 통해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프랑스의 그리보발(Gribeauval) 청동 야포들이 보스턴과 포츠머스 항으로 대거 반입되었고, 이것이 각 전선의 대륙군 포병대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은 공인된 역사적 기록이다.</p>
<p>민철이와 나는 그날 이후 미국 독립전쟁사에 흠뻑 빠져들었다. 녀석은 누나를 졸라 공수한 『The American Revolution』이라는 두툼한 영문 원서를 끼고 다니며 읽었고,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사대계』전집의 해당 단원만 달달 외우다시피 하던 내게 한껏 으스대곤 했다.</p>
<p>&#8220;거기엔 이런 생생한 디테일은 안 나오지?&#8221;</p>
<p>녀석은 잘난 체를 하며 원서 속 독립전쟁 비화들을 신나게 풀어놓았다. 당시 미국은 건국 2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온 나라가 독립 혁명의 회고 열기로 들끓던 시기였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서점가에서 대중과 독서광들의 손에 가장 널리 들려 있던 대표적 개설서로는 존 R. 올든(John R. Alden)의 명저 『A History of the American Revolution』(1969)이 있었는데, 아마도 민철이 누나가 서점에서 골라 보내준 책이 바로 그것 이었으리라 짐작된다.</p>
<p>자랑 같지만 반에서 가장 머리가 트였던 축에 속했던 민철이와 나는 마냥 어울려 다니며 분식집과 미니 당구장만 전전하던 철부지들은 아니었다. 둘 다 지적 허영심과 활자 중독으로 똘똘 뭉친 독서광들이었다. &#8220;공부는 대체 언제 하느냐?&#8221;는 부모님과 어른들의 매서운 눈총 속에서도, 우리는 일본 역사를 다룬 방대한 대하소설 『대망(大望)』과 『료마가 간다』를 탐독하며 전국시대와 메이지 유신의 흑막에 대해 아는 체를 꽤나 하고 다녔다. 지금도 가토 기요마사, 다테 마사무네, 이시다 미쓰나리 등 전국시대 장수들의 이름을 한자로 줄줄 적어낼 수 있고, 사카모토 료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풍운아적 행적을 훤히 꿸 정도다.</p>
<p>그러던 차에 여의도 벌판에서 미국 독립군의 대포를 마주하고는, &#8220;야, 일본 역사보다 미국 역사가 우리 민족의 운명에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니냐!&#8221; 하며 미국 독립사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 시절 다져진 지적 편력과 사유의 축적이, 반세기가 흐른 지금 대하역사소설 『순명』을 집필하는 펜 끝에서 도도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셈이다.</p>
<p>원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과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에 얽힌 문학사적 맥락과 당대 한국 지식인 사회에 미친 파장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굴뚝같지만, 오늘은 지면 관계상 아껴두려 한다.</p>
<p>다만 일본에서 우리의 김구 선생 못지않은 존경을 받는 사카모토 료마의 &#8216;자유롭고 호방하며 미래를 먼저 내다본 혁신가&#8217;의 이미지가 실은 시바 료타로의 유려한 필력이 빚어낸 문학적 창조물에 가깝다는 후대의 평가는 소설가인 내게 큰 용기를 주고 있다. 이 사실과  장수를 지장(智將)·용장(勇將)·덕장(德將)으로 나눌 때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인내하는 덕장이라는 『대망』식 인간학의 도그마가, 조지 워싱턴이라는 불세출의 지도자를 바라보는 내 시선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겠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27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KakaoTalk_20260901_201201175_18-rotated.jpg" alt="" width="3024" height="4032" /></p>
<p>민철이는  80년 봄이 돼서야 몽매에도 그리던 미국 행에 올랐다. 그땐 초청 이민 참 오래 걸렸다.   나는 81년 가을에 스토니 브룩 뉴욕 주립대를 행선지로 해 뉴욕에 도착 했다.  오자마자 민철이가 살고 있던 덴버 오로라로 날아가 한 달 쯤 미국을 속속들이 알겠다며 같이 쏘다녔다. 덴버 대학교 도서관을 제일 많이 갔지만, 영화관에 가서는 당시 막 도입되었던 돌비 사운드 시스템의 웅장한 음향을 만끽했고, 러브랜드였던가 스키장도 난생 처음 가보았다. 민철이의 미국인 여자 클래스메이트 집에서 열린 근사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내 미국 운전면허증의 첫 발행 주가 콜로라도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p>
<p>녀석은 명문 대에서 MBA를 하고  몇년 전 까지 다국적 미국회사 도쿄  지사장을 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소식이 끊겼다. 마지막 으로 본게 2018년 서울에서 인데 그때 종교 문제로 한참 어색한 일이 생긴 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있으면 하기로 한다. 종교가 뭔지.</p>
<p>아무튼  모래바람 날리던 여의도 벌판에서 마주했던 그 묵직한 목재 포차와 푸르스름한 포신은, 실상 250년 전 대륙군이 혹한의 밸리 포지에서 자유를 벼려내던 독립전쟁의 거대한 불씨가 머나먼 동방 한강변 소년의 가슴에 가 닿았던 기적 같은 역사적 파편이었다.  땀범벅이 된 채 국회의사당 신축 현장에서 자갈을 줍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훗날 태평양을 건너 그 역사의 주 무대 곁에서 반평생을 살아가게 될 줄이야, 헌병대 마당의 대포도, 어린 소년도 꿈엔들 알았겠는가.</p>
<p>일본의 전국시대 영웅담과 메이지 유신의 낭만성에 심취했다가, &#8220;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과 현대 문명에 실질적 좌표가 된 것은 영미권의 민주공화정 및 독립의 역사&#8221;라는 각성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그 시절의 경험은, 한 지식인이 거쳐온 시대적·정신사적 성장을 웅변하는 흥미진진한 궤적이기도 하다.</p>
<p>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천주교의 묵직한 영성, 희생과 은총을 다루는 소설 『순명』에서 미국 독립전쟁사에 찰스 캐럴이라는 걸출한 가톨릭 지식인이 바친 헌신과 위대한 공헌을 정당하게 조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독립전쟁의 격랑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독자들, 특히 미주 한인 동포들이 이 숨겨진 역사적 연결 고리에 뜨거운 찬사를 보내주셨고, 그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필라델피아의 &#8216;시티 태번(City Tavern)&#8217;에서부터 밸리 포지의 참호에 이르기까지 지면 속 시공간을 숨 가쁘게 넘나들게 된 것이다.</p>
<p>또 하나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문명사적 관점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눈부신 근대화의 이면에 &#8216;예수회의 선교 모델을 체화한 미국 주류 개신교&#8217;의 결정적 역할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이다. 마침 현재 연재 중인 순명 소설의 중제목도 「미국의 선교 본부」이다.</p>
<p>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등 구한말 한반도에 첫발을 디딘 초기 선교사들이 감정적 열광주의에 기운 오순절파가 아닌, 정통 청교도적 지성주의를 간직한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축복이었는지 모른다. 성령의 신비적 불꽃만을 앞세우다 지성적 토착화에 실패했던 일본, 필리핀, 중국의 사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p>
<p>이른바 &#8216;예수회적 적응주의(Accommodation)&#8217;와 &#8216;영미 청교도 지성주의&#8217;의 절묘한 만남이었다. 마테오 리치 이래 가톨릭 예수회가 동아시아에서 실천했던 방식은 맹목적인 교리 주입이 아니었다. 현지 언어와 문화를 깊이 존중하고, 서구의 첨단 과학기술과 근대 학문을 매개로 최고 엘리트층과 지적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p>
<p>한말 한반도를 찾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노방전도나 감정적인 개종 강요 대신, 배재학당·이화학당·연희전문 같은 근대 학교와 광혜원(세브란스) 같은 병원을 세워 인재를 길러내고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8216;제도적·문명사적 착근&#8217;을 선택했다.</p>
<p>이는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의 감정적 부흥 운동과는 궤를 달리한다. 만약 방언이나 축사(Exorcism) 같은 감정적 열광주의가 선교의 전면에 섰다면, 근대적 합리성과 주권 의식, 헌법적 자유와 권리 개념을 싹틔워야 했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기독교는 토착 샤머니즘의 또 다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었을 위험이 컸다. 실은 그 류의 병폐가 작금 나타나기는 하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겪었던 선교의 한계와 달리, 한국에서는 성경의 한글 번역을 통한 문해율 혁명,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이어진 민주공화정 담론, 그리고 여성 인권의 자각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대전환으로 직결되었던 것이다.</p>
<p>&#8220;미워하면서 닮아간다&#8221;는 역설처럼, 종교개혁의 대척점에 섰던 개신교가 가장 강성 이었던 예수회의 유서 깊은 교육·문명화 선교 방식을 흡수해 한반도의 근대적 기틀을 세웠다는 사실을 소설 속에서 깊이 있게 짚어내고 싶었다.</p>
<p>이 거대한 문명사적 맥락 속에서 찰스 캐럴의 생애는 미국 독립사와 가톨릭 교회사 양쪽에서 독보적인 상징성을 획득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자 당대 식민지 최고의 갑부였던 그가, 가톨릭 차별법(Test Acts)으로 온전한 시민권조차 누리지 못하던 메릴랜드의 가혹한 현실을 딛고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투신한 결단은, &#8216;자유와 공화정&#8217;이라는 대의가 종파의 담을 넘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웅변한다.</p>
<p>그가 사촌 존 캐럴(미국 초대 대주교) 및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목숨을 걸고 캐나다 외교 사절단으로 떠났던 여정과 식민연합 지도부를 프랑스 정 재개와 연결 시켜준 일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종교적 관용과 공화주의가 하나로 결합하는 찬란한 순간이었다. 미주 동포 독자들이 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까닭 역시 박제된 교과서식 건국 신화 너머에 살아 숨 쉬는 이처럼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역사의 진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p>
<p>그리고 이날, 밸리 포지 평원에서 내 생애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극적인 인연과 마주쳤다. 참으로 &#8220;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영혼이 찬양하네&#8221;이자, &#8220;그대의 축복을 온 누리에,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펼치라&#8221;고 노래한 거룩한 섭리의 순간이었다.</p>
<p>개신교 찬송가 중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을 꼽으라면 단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How Great Thou Art)」일 것이다. 나는  여의도의 고교 시절, 하굣길 5·16 광장에 운집한 수만 명의 인파가 노을 속에서 그 찬송가를 떼창 하던 웅장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벅찬 감동이었다. 1973년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 때 100만 한국인 신도의 유려한 떼창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 인데 그 집회는 당연 아니었고 어느 대형 기독교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주말이면 간헐적으로  절에 나갔던 불교 학생회원이었지만, 그 장엄한 멜로디에 깊이 매료되어 하굣길  평원 노을을 보면서 민철이와 둘이서 곧잘 흥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반세기가 흐른 바로 이날, 그 아련한 노래를 머나먼 미국의 밸리 포지 평원에서 다시 듣게 된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27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Washington-Memorial-Chapel-Valley-Forge-Pennsylvania.jpg" alt="" width="587" height="744" /></p>
<p>메릴랜드 민병대 동판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통나무 막사 앞을 지날 때였다. 뒤편 언덕길 저만치에서 빨간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차가 가까워지자 창밖으로 낭랑한 노랫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바로 그 곡조였다. 운전대를 잡은 금발의 미국인 남성이 창문을 활짝 열고 천천히 차를 몰며 라디오 오디오 반주에 맞춰 목청껏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유려한 영어 가사였다.</p>
<p>&#8220;세상에,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까. 그 옛날 여의도에서 소년의 가슴을 울렸던 저 찬양을, 50년이 지나 이 밸리 포지 한복판에서 이렇게 듣다니….&#8221;</p>
<p>&#8220;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8221;</p>
<p>가슴이 멍해진 채 다시  차를 타고 밸리 포지 순환로를 시계 방향으로 돌아  웨인 부대며 코네테컷 부대를 돌아 보았다. 그런데 내가 찾는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포 전시는 가운데 길로 가야만 하는 녹스 부대 앞에 있었다.</p>
<p>워싱턴 사령부 북쪽에 자리한 워싱턴 기념 예배당(Washington Memorial Chapel) 앞을 지날 때였다. 교회 안쪽에서 아까 들었던 바로 그 찬송가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개인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 성가대의 장엄한 합창 연습이었다.</p>
<p>아내와 나는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교회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주차장 한구석에는 방금 전 길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빨간 승용차가 다소곳이 주차되어 있었다.</p>
<p>옆문으로 돌아가면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연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내와 나는 교회 앞 돌계단에 가만히 멈춰 서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성가대 연습이었기에 아름다운 화음의 후렴구가 몇 차례고 은은하게 반복되었다. 밸리 포지 기념 교회는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소속인데, 성공회 전례에서도 이 복음성가를 장엄하게 부르는구나 싶어 까닭 모를 위로와 온기가 가슴에 번졌다. 하긴 내가 적을 두고 있는 펠팍의 마이클 성당이나 가끔 출석하는 우리 동네 레오니아 성당에서도 이 찬송가는 가끔 부른다. 물론 펠팍은 한국어, 레오니아는 영어,   그런데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는 안 부른단다.  교회 밖 수련회나 레지오 모임에서나 부를 뿐&#8230;</p>
<p>그 멜로디를 가만히 입속으로 따라 부르며 다시 차에 오르려던 찰나, 교회 예배당 안에서 또 다른 새로운 노래가 장엄하게 흘러나왔다.</p>
<p>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애국 찬가인 「아메리카 더 뷰티풀(America the Beautiful)」이었다. 교회에서 이 웅장한 곡을 찬송가로 부른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예배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울려 퍼지는 그 거룩한 선율을 듣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내 몰래 소매로 눈가를 훔쳐내야 했다.</p>
<p>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삶의 굽이마다 은총의 표식들을 수없이 새겨놓으셨건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 길을 지나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뒤를 돌아보며 &#8220;아, 하느님께서 이미 그때 그곳에 섭리의 표징을 심어두셨던 것이구나!&#8221; 하고 그 데자뷔에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다.</p>
<p>52년 전 여의도 모래벌판의 헌병대 마당에서 마주했던 차가운 쇠 대포, 어른들의 눈총 속에서도 독립전쟁 원서를 읽으며 가슴 뛰었던 소년의 지적 열망, 그리고 오늘날 태평양을 건너와 펜실베이니아의 거룩한 평원에서 독립의 역사를 복원해 내는 소설가의 소명까지… 내가 걸어온 그 모든 우연의 길목마다 하느님의 자애로운 손길이 섭리의 복선으로 촘촘히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축복받은 이 미국이 자신의 축복을  감사히 여기며 딴 길로 새지 않고 그 축복을 나눌 때 세상이 편해 진다는 표식을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진작부터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p>
<p>밸리 포지의 초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흰 뭉게구름은 내 가슴속에 차오르는 벅찬 감동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p>
<p>“America! America!<br />
God shed His grace on thee,<br />
And crown thy good with brotherhood<br />
From sea to shining sea!”</p>
<p>(미국이여, 미국이여!<br />
주님께서 그대에게 은총을 내리사,<br />
저 바다에서 빛나는 저 바다 끝까지<br />
그대의 선함 위에 형제애의 관을 씌워주시기를!)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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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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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04 Sep 2026 12:30:45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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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벨리포지의 봄 &#60;1&#62; 안동일 작 1778년 1월 말의 깊은 밤, 스쿠킬강(Schuylkill River)의 얼어붙은 수면을 핥고 올라온 칼바람이 밸리포지 총사령부의 덧문을 사납게 두드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강어귀에 세워진 아이작 포츠(Isaac Potts)의 2층짜리 석조 가옥은 낮게 웅크린 채 삭풍을 견뎌내고 있었다. 병사들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벨리포지의 봄 &lt;1&gt;</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1778년 1월 말의 깊은 밤, 스쿠킬강(Schuylkill River)의 얼어붙은 수면을 핥고 올라온 칼바람이 밸리포지 총사령부의 덧문을 사납게 두드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p>
<p>강어귀에 세워진 아이작 포츠(Isaac Potts)의 2층짜리 석조 가옥은 낮게 웅크린 채 삭풍을 견뎌내고 있었다. 병사들이 거처하는 수천 채의 통나무 막사에서 피어오른 눅눅한 연기가 눈보라와 뒤섞여 돌벽 틈새로 스며들었다. 1층 좁은 집무실의 벽난로 속 참나무 장작은 반쯤 재로 스러져, 방 안에는 냉기를 간신히 밀어낼 정도의 박약한 온기만 맴돌 뿐이었다.</p>
<p>낡은 군용 책상 한구석에서는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중령이 코트 깃을 바짝 세운 채 굳은 잉크병을 입김으로 녹이며 요크(York)의 대륙의회로 보낼 보급 청원 서한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쓰고 있는 똑같은 내용의 청원서인지 알 수 없었다.</p>
<p>그 맞은편,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젊은 부관 존 로런스(John Laurens) 역시 핏발 선 눈을 비비며 연대별 동상 환자 명부를 넘기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p>
<p>그들의 등 뒤, 방 한가운데 놓인 대형 작전 지도 테이블 앞에 조지 워싱턴 장군이 우뚝 서 있었다. 거인의 어깨 위로 드리운 촛불 그림자가 벽면을 짓누르듯 흔들렸다.</p>
<p>그때, 얼어붙은 마당의 눈을 바스러뜨리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멎더니, 문밖 초병의 챌린지 구령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p>
<p>&#8220;정지! 암구호를 대라!&#8221;</p>
<p>&#8220;자유(Liberty)! 대륙의회의 찰스 캐럴이다!&#8221;</p>
<p>해밀턴이 번개처럼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가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육중한 참나무 덧문이 덜컹 열리며 들어선 인영을 본 순간, 해밀턴의 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p>
<p>머리부터 어깨까지 눈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쓴 찰스 캐럴이었다.</p>
<p>눈보라에 얼어붙은 두꺼운 모직 망토를 젖히자, 말안장에서 갓 끌어내린 기름 묻은 가죽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든 그의 단단하고 결기 어린 얼굴이 드러났다.</p>
<p>&#8220;해밀턴, 로런스. 총을 거두게. 적이 아니네.&#8221;</p>
<p>워싱턴이 낮고 굵직한 음성으로 부관들을 물렸다. 불면과 고뇌로 붉게 충혈된 총사령관의 눈에 놀람과 반가움이 교차했다.</p>
<p>&#8220;캐럴 의원……! 의회 조사단이 무어 홀(Moore Hall)에 여장을 푼 것이 불과 한 시간 전이라 들었소. 날이 밝으면 참모들의 안내를 받아 공식 영접하려 했는데, 어쩌자고 이 눈보라 속에 홀로 말을 몰아 여기까지 오셨단 말이오?&#8221;</p>
<p>찰스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젖은 사슴가죽 장갑을 벗어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양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가죽 가방 두 개를 워싱턴의 작전 지도 테이블 한가운데로 올려놓았다.</p>
<p>쿵—</p>
<p>둔중한 쇳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죽 너머로 묵직하게 울리며 나무 테이블을 흔들었다. 해밀턴과 로런스의 시선이 일제히 가방으로 쏠렸다.</p>
<p>&#8220;날이 밝으면, 장군…… 날이 밝으면 나는 의회가 보낸 차가운 감찰관의 가면을 쓰고 장군을 마주해야 합니다.&#8221;</p>
<p>찰스가 가방의 단단한 황동 버클을 풀고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다.</p>
<p>&#8220;그전에, 동지로서 장군을 뵈어야 했습니다.&#8221;</p>
<p>흔들리는 촛불 빛 아래, 빽빽하게 결속된 스페인 8레알 은화(Spanish Milled Dollars)와 묵직한 금화들이 차가운 백색과 황금빛 광채를 뿜어냈다. 방 안에 메마른 쇠비린내가 확 풍겼다.</p>
<p>해밀턴이 숨을 들이켰다.</p>
<p>&#8220;이건…… 정화(Specie)가 아닙니까?&#8221;</p>
<p>&#8220;내 아버지와 필라델피아의 로버트 모리스가 사재를 털어 은밀히 마련한 군자금입니다.&#8221;</p>
<p>찰스가 테이블을 짚으며 워싱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p>
<p>&#8220;의회가 찍어낸 종이돈(대륙지폐)은 이제 체스터와 랭커스터 농부들에게 마구간 깔개만도 못한 휴짓조각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농민들은 굶주린 우리 군대를 외면하고, 은화를 쥐여주는 필라델피아의 하우에게 곡식과 가축을 몰래 팔아넘기고 있다지요. 하지만 이 스페인 은화라면 다를 겁니다. 당장 내일 새벽 웨인(Wayne) 장군의 기병들을 풀어 인근 제분소와 곡물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8221;</p>
<p>웨인은 찰스도 잘 아는 이곳 출신의 맹장 민병대장이었다.</p>
<p>워싱턴은 테이블 위의 은화들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차가운 은화 한 닢을 집어 들었다.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거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p>
<p>&#8220;캐럴 의원…… 지금 내 병사들은 짚더미에 동상 걸린 발을 묻고, 썩어가는 가죽 탄약통을 삶아 마시며 버티고 있소. 핏발 선 눈으로 &#8216;고기를 달라&#8217;고 울부짖으면서도, 내가 지나가면 누더기를 걸친 채 총을 받쳐 들고 경례를 올리는 아이들이오. 그런데 저 요크의 의원들은…… 게이츠와 콘웨이의 패거리들은 내가 무능하여 군대를 얼어 죽이고 있다며 나를 끌어내리려 사방에 독을 뿌리고 있소.&#8221;</p>
<p>워싱턴이 은화를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다. 장군의 깊게 팬 뺨 위로 촛불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p>
<p>&#8220;때로는 묻고 싶었소. 과연 이 눈밭에서 피를 토하며 꺼져가는 저 어린 영혼들이, 저들이 난로가에서 펜대로 희롱하는 &#8216;자유&#8217;라는 헛된 명분보다 값어치 없는 것인가를 말이오.&#8221;</p>
<p>찰스 캐럴이 거침없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워싱턴의 단단하고 거친 어깨를 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메릴랜드 대지주의 눈동자가 장작불보다 서슬 퍼렇게 타올랐다.</p>
<p>&#8220;흔들리지 마십시오, 장군. 의회의 소인배들은 새러토가의 요행수에 취해 군대를 모리배의 장부처럼 다루려 하지만, 이 열세 개 식민지를 하나로 묶어 세울 수 있는 영혼의 기둥은 오직 조지 워싱턴, 각하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8221;</p>
<p>찰스는 품속에서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서한 한 통을 꺼내 은화 더미 위에 얹었다.</p>
<p>&#8220;저들이 아무리 음모의 그물을 짠다 한들, 나와 내 사촌 존 캐럴 신부, 필라델피아의 모리스, 그리고 바다 건너 파리에서 프랭클린 박사와 보마르셰가 엮어낸 섭리의 사슬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면, 프로이센에서 온 백전노장 하나가 이 눈밭으로 당도할 것입니다. 보마르셰와 프랭클린이 보증한 폰 슈토이벤(Von Steuben)이라는 사내입니다. 그가 오면 이 헐벗고 굶주린 민병들을 영국 정규군조차 떨게 만들 강철의 군대로 벼려낼 것입니다.&#8221;</p>
<p>워싱턴의 메마른 입술 끝이 잘게 떨렸다.</p>
<p>장군은 찰스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혹한의 밸리포지, 고립무원의 절망 속에서 두 거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처럼 얽혀들었다.</p>
<p>&#8220;캐럴…… 귀하는 오늘 밤 은화가 아니라, 꺼져가던 아메리카의 심장을 들고 오셨소. 고맙소.&#8221;</p>
<p>문틈으로 스며든 칼바람에 촛불이 길게 누웠으나, 방 안을 가득 채운 열기는 더 이상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11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images.jpg" alt="" width="417" height="226" /></p>
<p>독립선언 직후의 흥분과 낙관론은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워싱턴이 윌리엄 하우의 영국 정규군에게 연이어 참패하고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빼앗기며 산산조각 났다. 그 후 1년 반 동안 워싱턴과 대륙군이 겪은 궤적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p>
<p>1776년 겨울,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 벌판을 가로질러 델라웨어강 너머로 쫓겨가던 대륙군은 크리스마스 밤 델라웨어강을 건너 트렌턴의 헤센 용병대를 기습하고 프린스턴에서 연승하며 기사회생했다. 이 두 개의 작은 승리는 꺼져가던 혁명의 불씨와 군대를 살려냈지만, 이는 국지적 승리였을 뿐 군대의 체급 차이를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p>
<p>1777년 여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 본진은 함대를 이끌고 체사피크만을 거쳐 혁명의 수도 필라델피아로 진격해 왔다. 워싱턴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브랜디와인 전투(1777년 9월 11일)에서 맞붙었으나 측면을 기습당해 대패했고, 의회는 황급히 랭커스터를 거쳐 서쪽 시골 마을 요크(York)로 도망쳤다. 이어 대륙군은 빼앗긴 수도를 탈환하고자 안개 속에서 저먼타운 전투(10월 4일) 기습을 감행했으나 부대 간 오인 사격과 혼선으로 또다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p>
<p>그해 12월, 영국군은 필라델피아를 점령해 따뜻하고 호화로운 겨울을 보내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서 서북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이곳 밸리포지(Valley Forge)에 쐐기를 박듯 주둔지를 정했다. 험준한 마운트 조이(Mount Joy) 언덕과 스쿠킬강을 낀 2천 에이커 규모의 천혜 요새 지형이었다. 영국군이 펜실베이니아 내륙 곡창지대를 약탈하거나 임시 수도인 요크의 대륙의회를 기습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가로막는 감시탑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p>
<p>하지만 보급선이 붕괴된 상태에서 허기진 맨몸으로 숲을 베어 통나무집을 짓고 들어가야 하면서부터, 역사상 가장 처절한 겨울이 시작되었다.</p>
<p>밸리포지의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쓰러져갈 때, 워싱턴을 가장 위태롭게 죈 것은 영국군이 아니라 망명 의회가 있던 요크에서 날아온 정치적 배신이었다.</p>
<p>1777년 10월, 워싱턴이 필라델피아를 빼앗기고 저먼타운에서 깨지는 동안, 북부 뉴욕의 새러토가에서는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의 북부 대륙군이 영국 버고인의 대군을 항복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개전 이래 첫 대규모 회전의 승리였다.</p>
<p>수도를 빼앗기고 요크로 피신해 패배감과 분노에 차 있던 일부 의원들의 눈에는 워싱턴이 &#8220;돈만 축내고 패배만 거듭하는 무능한 버지니아 지주&#8221;로 보였고, 게이츠는 &#8220;혁명을 구원할 진짜 영웅&#8221;으로 떠올랐다. 새뮤얼 애덤스, 리처드 헨리 리 등 뉴잉글랜드 급진파들이 그 부상의 선봉에 있었다.</p>
<p>이때 아일랜드계 프랑스 용병 장교 토머스 콘웨이(Thomas Conway)의 편지가 등장한다. 프랑스 육군 출신의 준장 콘웨이는 거만하고 노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규군 출신인 자신을 중용하지 않는 워싱턴에게 앙심을 품고 게이츠에게 비밀 편지를 썼다.</p>
<p>&#8220;신께서는 이 나라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지만, 무능한 장군(워싱턴)과 나약한 참모진이 그 뜻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나서셔야 합니다. 제가 돕겠습니다.&#8221;</p>
<p>이 편지를 받은 게이츠는 기고만장해졌고, 의회의 반(反)워싱턴 의원들과 결탁해 워싱턴을 총사령관직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밸리포지 군영의 중론도 자신이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떠벌렸다.</p>
<p>호레이쇼 게이츠가 당시 대륙군 안에서 영국 정규군 장교로서의 복무 경력이 가장 긴 인물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군에 입대해 7년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 당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되었다. 1755년 유명한 &#8216;모논가힐라 전투(Monongahela)&#8217;에서 흉부에 중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식민지 민병대 장교로서 영국군 패잔병을 수습해 철수를 이끈 영웅이 조지 워싱턴이었다.</p>
<p>그런데 영국군 내에서 게이츠의 주특기는 야전 지휘와 전술이 아니라 보급, 문서 처리, 병적 관리 같은 행정 업무였다. 7년 전쟁 후 영국으로 돌아가 평화 시기 소령(Major) 계급까지 올랐으나,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 승진 길이 막히자 제대 후 버지니아로 이주해 농장을 샀다. 1772년의 일이다.</p>
<p>그가 굳이 대서양을 건너 버지니아로 이주하고 애국파(독립파) 편에 섰던 이면에는 고결한 자유의 신념보다 영국 본토 계급사회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원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게이츠는 어머니가 리즈 공작부인의 가사도우미(하녀장)였고, 아버지는 세관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당시 영국 육군은 귀족 혈통이 지배하던 곳이었고, 돈으로 계급을 사고파는 매관제(Purchase system)가 성행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어가며 굴러도 평민 출신인 게이츠는 소령 계급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철저히 차별받았다.</p>
<p>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는, 게이츠가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농장 매입을 알아봐 주고 길을 터준 이웃이자 오랜 전우가 바로 조지 워싱턴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게이츠는 사석이나 의회 정객들 앞에서 은근히 워싱턴을 &#8216;경험 없는 버지니아의 젊은 촌뜨기&#8217; 취급하며 선배 노릇을 하려 드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20여 년 전 7년 전쟁 때 게이츠는 이미 영국 정규군 대위급 장교였고 워싱턴은 식민지 민병대 장교에 불과했다는 자의식 때문이었다.</p>
<p>게이츠에게는 자신을 하인의 자식이라 무시하고 출셋길을 가로막았던 영국 귀족들과 육군 지휘부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가 독립 진영에 투신한 가장 큰 동기였다. 계급이 닫혀 있던 영국과 달리, 혁명의 불길이 번진 아메리카는 정규군 경력을 가진 장교가 턱없이 부족했다. 게이츠에게 식민지 혁명군은 영국에선 꿈도 못 꾸던 &#8216;총사령관&#8217; 자리까지 넘볼 수 있는 인생 최대의 도박판이었다.</p>
<p>게이츠의 눈에 워싱턴은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8216;식민지 촌뜨기 지주&#8217;에 불과했다. 그런데 식민지 사람들은 정작 영국 정규군 소령 출신인 자신보다 정규군 계급장 하나 없는 워싱턴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워싱턴이 대륙군 총사령관 자리에 앉아 전권을 휘두르자, 게이츠의 마음속에서는 열등감과 시기심, 그리고 &#8220;내가 저 자리의 진짜 주인이어야 한다&#8221;는 비뚤어진 보상심리가 독버섯처럼 자라났고 콘웨이가 이를 부채질했던 것이다.</p>
<p>1777년 11월 말, 의회는 군정을 통할하는 전쟁위원회 의장에 게이츠를 앉히고, 워싱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웨이를 소장으로 특진시켜 군 감찰관(Inspector General)으로 임명했다. 감찰관은 총사령관 워싱턴의 지휘를 받지 않고 의회에 직보고하는 자리였다. 워싱턴의 목에 감시자의 칼을 들이댄 격이었다.</p>
<p>심지어 게이츠와 콘웨이는 워싱턴의 오른팔이던 라파예트 후작을 떼어놓기 위해 그에게 워싱턴을 배제한 독자적인 &#8216;캐나다 침공 작전&#8217; 지휘권을 제안하는 등 노골적인 분열 공작을 폈다. 하지만 라파예트는 이를 단칼에 거절하고 워싱턴 곁에 남았다.</p>
<p>게이츠의 부관인 제임스 윌킨슨이 술에 취해 대륙군 스털링 장군의 부관에게 콘웨이의 편지 내용을 떠벌렸고, 이 말이 스털링을 거쳐 워싱턴의 귀에 들어갔다.</p>
<p>워싱턴은 격노해 길게 따지지 않고, 콘웨이에게 단 한 문장의 차가운 메모를 보냈다.</p>
<p>&#8220;장군이 게이츠 장군에게 &#8216;무능한 장군과 나약한 참모진&#8217; 운운하며 보낸 편지의 내용을 내가 입수하였음을 알리오.&#8221;</p>
<p>음모가 드러나자 비겁했던 게이츠와 콘웨이는 편지를 도둑맞았느니 조작되었느니 변명하기 바빴고, 이전투구의 추태가 의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p>
<p>이 시점(1778년 1월 말), 의회는 워싱턴을 대놓고 해임하지는 못하고 군대의 실태를 직접 조사하고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8216;군사위원회(Committee of Conference)&#8217; 조사단을 꾸려 밸리포지로 파견한 것이다. 그 조사단의 핵심 인물이 바로 찰스 캐럴이었다. 찰스는 요크에서 게이츠와 콘웨이, 그리고 의회 정객들이 워싱턴을 코너로 몰아넣는 그 추악한 권력 투쟁을 생생하게 지켜보며 깊이 탄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가 눈보라를 뚫고 워싱턴의 스톤 하우스로 찾아와 건넨 말에는 수많은 함의가 담겨 있었다.</p>
<p>&#8220;요크의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펜대나 굴리며 장군을 사지로 모는 작자들을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콘웨이와 게이츠의 천박한 혓바닥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어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저로서는 천주님께 간절히 올린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8221;</p>
<p>이 말은 단순한 분노의 토로가 아니었다. 수도 필라델피아 함락, 밸리포지 고립, 게이츠·콘웨이의 쿠데타 음모, 대륙지폐 폭락이라는 절체절명의 파국을 온몸으로 막아서려는 현실 정치가이자 재력가이며 신앙인이었던 찰스 캐럴의 출사표였다.</p>
<p>캐럴과 워싱턴 두 사람은 스톤 하우스 2층 워싱턴 침실 앞에 있는 작은 전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잠깐 더 나눴다. 워싱턴이 더운 차라도 한잔 마셔 몸을 녹이고 숙소로 돌아가라고 권하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직속 참모들이라 해도 두 사람만이 나누어야 할 은밀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p>
<p>&#8220;콘웨이나 게이츠의 천박한 야심은 견딜 수 있소. 하지만…… 74년 그 여름, 시티 터반에서 함께 잔을 들었던 존 애덤스마저 요크의 의사당에서 나를 카이사르라 부르며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소. 내가 이 눈밭에서 동상 걸린 발을 자르는 아이들을 두고 카이사르의 관을 탐낸단 말이오?&#8221;</p>
<p>워싱턴은 애덤스의 변신을 가장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세인트 메리 성당(St. Mary&#8217;s Church)의 미사에 함께 참례하고, 시티 터반의 정찬에서 잔을 부딪치며 독립과 자유를 결의하면서 자신에게 대륙군을 맡으라고 등을 떠밀었던 그 존 애덤스가 어쩌다 등 뒤에서 날 선 비판을 쏟아내는 인물이 되었는지 워싱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p>
<p>애덤스는 언젠가부터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린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처럼, &#8220;승리한 군사령관이 독재자가 되어 공화정을 집어삼키는 것&#8221;을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에 대한 대중의 존경이 식을 줄 모르자 애덤스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내 아비게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골적으로 이렇게 적었다.</p>
<p>&#8220;의회조차 한 사내(워싱턴)를 신격화하고 있소. 나는 워싱턴 장군에 대한 이 천박하고 맹목적인 숭배가 역겹소. 공화국은 특정 영웅 한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는 안 되오.&#8221;</p>
<p>애덤스는 워싱턴의 &#8216;파비우스식 지연 전술(지키며 버티는 후퇴전)&#8217;을 무능과 나태, 귀족적 우유부단함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대놓고 음모를 꾸민 콘웨이나 게이츠처럼 비열한 술수를 쓰진 않았지만, 의회 안에서 워싱턴을 깎아내리고 게이츠를 띄우며 콘웨이 파벌에 강력한 &#8216;정치적 정당성&#8217;의 우산을 씌워준 인물이었다.</p>
<p>찰스 캐럴에게도 애덤스의 변심은 뼈아팠다. 메릴랜드의 가톨릭 신자로서 차별받던 자신을 인정해주고 세인트 메리 성당 미사까지 함께 가주었던 그 강직하고 뜨겁던 독립의 기관차 애덤스가, 옹졸한 원칙주의와 정치적 편견에 갇혀 워싱턴의 목을 조르는 칼날이 되어버린 현실.</p>
<p>&#8220;애덤스는 책상 위에서 이상적인 로마 공화국을 꿈꾸지만, 현실의 공화국은 관념이 아니라 피와 빵으로 지켜지는 법입니다. 천연두 고름을 살 속에 밀어 넣고 잿더미 빵을 씹으며 장군 곁을 지키는 저 3천 명의 환자들과 맨발의 병사들이야말로 진정한 공화국의 시민입니다. 애덤스의 옹졸한 원칙주의가 이들을 다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군대를 살려내야 합니다. 제가 돕겠습니다.&#8221;</p>
<p>워싱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가에 묵직한 물기가 어렸다.</p>
<p>&#8220;아직 의회 내 다수는 장군을 신임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8221;</p>
<p>그랬다. 찰스 캐럴, 로버트 모리스(밥 모리스), 존 제이 외에도 의회(요크)에서 워싱턴의 목숨줄을 지켜낸 결정적 거물들이 있었다.</p>
<p>당시 대륙회의 의장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헨리 로런스(Henry Laurens)가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존 행콕의 뒤를 이어 의장을 맡고 있던 그는 워싱턴의 핵심 부관인 존 로런스의 친부였다. 아들을 통해 워싱턴의 인품과 덕망을 익히 전해 들은 그는 익명으로 날아온 워싱턴 비방 편지(음모 문서)를 의회에 정식 상정하지 않고 은밀히 워싱턴에게 먼저 보내 대비하게 한 인물로, 의장직의 막강한 권한으로 게이츠 파벌의 의제 상정을 차단한 일등 공신이었다.</p>
<p>매사추세츠의 엘브리지 게리(Elbridge Gerry)도 존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와 같은 매사추세츠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워싱턴을 비난하던 고향 동료들과 달리 냉정하게 군대의 보급 실태를 파악하고 워싱턴의 지휘권을 적극 방어하는 데 나선 인물이었다.</p>
<p>뉴욕의 거버너 모리스(Gouverneur Morris)도 빼놓을 수 없다. 훗날 헌법을 기초하는 천재 정객으로, 찰스 캐럴과 함께 이번 밸리포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직접 파견되어 현장에서 워싱턴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인물이다.</p>
<p>다음 날 아침, 무어 홀에서 말을 타고 총사령부로 오는 짧은 길목에서 찰스와 조사위원들은 보초를 서던 어린 병사가 누더기 모포 한 장을 뒤집어쓴 채 맨발로 짚단 위에 서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목도해야 했다. 막사 굴뚝마다 번지는 냄새는 땔감 타는 냄새가 아니라 오물과 고름, 썩어가는 상처의 악취였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12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9/KakaoTalk_20260901_201201175_13-1.jpg" alt="" width="2731" height="1780" /></p>
<p>1778년 1월 말의 밸리포지는 &#8216;가난한 군대&#8217; 수준이 아니라,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집단 수용소였다. 천연두(Smallpox)가 부대를 휩쓸어 1만 2천여 명 중 무려 3천~4천 명이 전투 불능 상태였다. 신발이 없어 병사들의 발이 얼어 터졌고, 하얀 눈길 위에는 병사들이 남긴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얼어붙어 있었다. &#8220;눈 위에 남겨진 그들의 핏자국을 보라&#8221;던 워싱턴의 비통한 기록 그대로였다.</p>
<p>보급선이 끊겨 고기는커녕 소금조차 없었다. 병사들이 먹은 것은 밀가루에 스쿠킬강 흙탕물을 개어 모닥불 재 위에 그대로 구워낸 잿빛의 딱딱한 반죽 덩어리, 이른바 &#8216;파이어케이크&#8217;뿐이었다. 옷이 낡아 문드러져 사타구니와 어깨가 훤히 드러난 병사들은 담요조차 없어 대여섯 명이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짚더미에 발을 묻고 밤새 웅크렸고, 아침이 되면 그중 한두 명은 얼어붙은 시체로 실려 나갔다.</p>
<p>더 기가 막힌 것은 펜실베이니아 내륙 창고나 다른 주에는 의복과 식량이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차를 끄는 마부들에게 휴짓조각이 된 대륙지폐를 주니 아무도 운송을 맡지 않았고, 토머스 미플린 전 병참감 같은 무책임한 자들이 손을 놓아버린 탓에 &#8220;물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무능과 태만 때문에 곡창지대 20마일 밖에서 군대가 굶어 죽어가는&#8221; 기막힌 행정 마비가 벌어지고 있었다.</p>
<p>군영 내부에서도 워싱턴을 둘러싸고 충성과 시기 질투가 갈렸다.</p>
<p>친(親)워싱턴 결사 옹호파로는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소장이 첫자리에 있었다. 워싱턴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로, 며칠 뒤 찰스 캐럴의 강력한 천거로 병참감(Quartermaster General)을 맡아 보급로를 뚫어내는 주역이 된다.</p>
<p>헨리 녹스(Henry Knox) 준장은 보스턴 시절부터 충직함을 증명한 거구의 포병 사령관으로, 군영 내 장교들의 동요를 묵묵히 억누르고 있었다. 앤서니 웨인(Anthony Wayne) 준장은 &#8216;미치광이 앤서니(Mad Anthony)&#8217;라 불릴 정도로 다혈질이었다. 고향 펜실베이니아의 지리를 꿰뚫고 있어, 찰스의 은화를 쥐고 2월 중순 뉴저지 남부까지 기병대를 몰고 가 소 떼 수백 마리를 구매 반 징발 반으로 끌고 올 행동대장이었다.</p>
<p>&#8216;스털링 경(Lord Stirling)&#8217;으로 불린 윌리엄 알렉산더 소장은 콘웨이가 게이츠에게 보낸 비밀 편지의 밀담을 술자리에서 처음 포착해 워싱턴에게 알림으로써 음모를 최초로 파헤친 결정적 장군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라파예트 후작과 드칼브(De Kalb) 남작은 외국인 의용 장군들이었으나 게이츠의 회유를 단칼에 거절하고 워싱턴 곁을 지킨 충신들이었다.</p>
<p>반면 밸리포지 내 반(反)워싱턴 게이츠 추종 파벌로는 토머스 콘웨이 준장이 꼽혔다. 음모의 진원지로, 요크로 가 의원들을 꾀어 감찰관 자리를 따낸 뒤 밸리포지로 들어오려 했으나, 부하 장교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8220;콘웨이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8221;고 보이콧하자 군영에 제대로 발도 못 붙이고 겉돌다 다시 요크로 도망쳐 있었다.</p>
<p>전임 병참감 토머스 미플린(Thomas Mifflin) 소장은 펜실베이니아 정객 출신 장성으로, 보급 실패의 원흉이면서도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게이츠와 결탁해 워싱턴을 모함했다. 또 존 설리번(John Sullivan) 소장은 노골적인 반역자는 아니었으나 평소 불평불만이 많아 워싱턴의 작전에 사사건건 토를 달며 북부 파벌에 귀를 기울이던 흔들리는 인물이었다.</p>
<p>찰스 캐럴과 함께 온 의회 조사단 중 &#8216;반(反)워싱턴 성향&#8217;의 인물로는 너새니얼 포섬(Nathaniel Folsom, 뉴햄프셔)과 프랜시스 다나(Francis Dana, 매사추세츠)가 중심에 서 있었다. 포섬은 북부 뉴잉글랜드 급진파 의원으로, 요크를 떠날 때만 해도 워싱턴의 지휘 실패를 문책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눈을 번뜩이던 인물이었다. 다나는 존 애덤스의 최측근이자 엄격한 매사추세츠 법률가 출신으로, 군대가 민간 정부(의회)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며 워싱턴을 철저히 감시하겠다고 벼르던 이였다.</p>
<p>워싱턴은 스톤 하우스 앞에 나와 조사단을 맞았다. 물론 모두 구면이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일행은 스톤 하우스의 비좁은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밸리포지 캠프의 여단장급 이상 장성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조사단은 이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빙자한 일종의 &#8216;워싱턴 성토대회&#8217;를 열려는 심산이었다.</p>
<p>워싱턴이 &#8220;의회의 엄정한 조사를 위해 총사령관인 나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도리겠지요&#8221;라며 묵직하게 목례를 건네고 문을 닫고 나갔다.</p>
<p>스톤 하우스 좁은 회의실에는 장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음에도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p>
<p>너새니얼 포섬이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유도신문을 던졌다.</p>
<p>&#8220;제장들, 솔직히 털어놓으시오. 수도 필라델피아를 빼앗기고 이 지옥 같은 눈밭에 군대를 처박아둔 사령관의 전략적 무능에 대해, 야전 지휘관으로서 불만이 많을 줄 아오. 북부 새러토가에서 대승을 거둔 게이츠 장군 같은 진짜 백전노장이 이 군대를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요크에서 높은데…….&#8221;</p>
<p>이어 프랜시스 다나가 11월 말 의회가 이미 군정을 통괄하는 전쟁위원회 의장에 게이츠를 임명했다고 거들며 그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려 했다.</p>
<p>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미 급한 앤서니 웨인 준장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p>
<p>&#8220;게이츠라고요? 그 타이콘데로가에서 연필대나 굴리며 벌벌 떨던 &#8216;할머니 게이츠&#8217;를 우리 사령관 자리에 앉히겠다고요? 새러토가의 승리는 아널드의 한쪽 다리와 버지니아 총잡이들의 피로 산 것이지, 후방 막사에서 차나 마시던 게이츠의 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잉크 묻은 손가락이 아니라, 눈밭에서 병사들과 함께 짚더미를 베고 자는 조지 워싱턴입니다!&#8221;</p>
<p>&#8220;옳소!&#8221;</p>
<p>&#8220;맞는 말이오!&#8221;</p>
<p>여기저기서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p>
<p>이어 온건하고 명석한 너새니얼 그린 소장이 쐐기를 박았다.</p>
<p>&#8220;위원들께 묻겠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잃은 것이 장군의 탓입니까, 아니면 군화 한 켤레, 탄약 한 통 제때 보내주지 못한 의회의 태만 때문입니까? 만약 워싱턴 장군을 갈아치우겠다면, 내 장군 표식을 당장 이 자리에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8221;</p>
<p>&#8220;나도 그렇게 하겠소!&#8221;</p>
<p>&#8220;나 역시 마찬가지요!&#8221;</p>
<p>거구의 헨리 녹스와 스털링 경마저 싸늘한 침묵 속에 주먹을 쥐고 버티어 서자, 성토장을 만들려던 의원들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극소수였던 반(反)워싱턴 성향의 장성들도 바닥만 내려다볼 뿐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p>
<p>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차분히 지켜보던 찰스 캐럴이 서류철을 덮으며 천천히 일어섰다.</p>
<p>워싱턴 성토대회를 열려 했던 자리가 순식간에 열렬한 지지와 성원의 장으로 뒤바뀐 것이다. 무엇보다 게이츠의 진면목을 겪어본 야전 장군들이 그자는 워싱턴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외치고 있지 않은가. 조사단의 애초 목적은 첫날 첫 회의에서 이미 물거품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p>
<p>&#8220;동료 위원 여러분, 들으셨습니까. 현장의 목소리는 명백합니다. 병참의 실패를 총사령관의 무능으로 뒤집어씌우려던 요크 일부의 환상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헛소리에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사찰은 끝났으니, 당장 내일부터 이 군대를 어떻게 먹이고 입혀서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지, &#8216;재건 회의&#8217;로 전환합시다.&#8221;</p>
<p>&#8220;옳습니다! 찰스 캐럴 의원님이야말로 가장 현명하십니다!&#8221;</p>
<p>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곧 우렁찬 박수 소리가 낡은 석조 건물의 들보를 뒤흔들었다.</p>
<p>이렇게 첫날 첫 회의의 단판으로 밸리포지의 장군들은 워싱턴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을 쏟아내고 게이츠의 허상을 낱낱이 발가벗겨 버렸다. 반(反)워싱턴 조사단의 서슬 퍼런 기세는 단 하루 만에 완전히 꺾여버렸다.</p>
<p>이제 밸리포지는 허망한 정쟁의 늪을 벗어나, 찰스의 은화가 돌고, 무너졌던 군목 제도가 바로 서며 방역의 기틀이 잡히고, 마사 워싱턴 여사의 헌신적인 구호와 슈토이벤 남작의 혹독한 조련으로 이어질 거대한 &#8216;군대 재건&#8217;의 본령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릴 준비를 마쳤다. 혹한의 밸리포지에 비로소 봄의 싹이 트고 있었다.</p>
<p>(위 사진을 본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챘겠지만, 실은 며칠 전 독립군 삼각모자를 쓰고 아내와 함께 밸리포지를 다녀왔다.)</p>
<p>(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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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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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28 Aug 2026 14:42:3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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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프랭클린  그리고 전장의  워싱턴 안동일 작 벤자민 노사의 워싱턴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언사가 끝나자, 모처럼 제퍼슨이 응수를 하고 나섰다. “제가 볼 때 워싱턴 커넬(Colonel)이야말로 도덕적 결점이 없는, 참으로 흠결 없는 ‘하이 퀄리티(High Quality)’의 인물입니다.” 총사령관이 된 지금도 버지니아 시절의 습관대로 ‘커넬(대령)’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왔지만, 평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캐럴과 프랭클린  그리고 전장의  워싱턴</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벤자민 노사의 워싱턴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언사가 끝나자, 모처럼 제퍼슨이 응수를 하고 나섰다.</p>
<p>“제가 볼 때 워싱턴 커넬(Colonel)이야말로 도덕적 결점이 없는, 참으로 흠결 없는 ‘하이 퀄리티(High Quality)’의 인물입니다.”</p>
<p>총사령관이 된 지금도 버지니아 시절의 습관대로 ‘커넬(대령)’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왔지만, 평소 그의 품성을 향한 제퍼슨의 존경이 가감 없이 묻어난 표현이었다.</p>
<p>1776년 무렵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관계는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아끼던 이상적인 ‘선후배 동지’ 관계였다. 훗날 1790년대 초대 행정부 시절 알렉산더 해밀턴을 둘러싸고 벌어질 노선 갈등과는 거리가 멀었다.</p>
<p>워싱턴은 1732년생(당시 44세), 제퍼슨은 1743년생(당시 33세)으로 11살 차이의 버지니아 플랜테이션 향리 선후배였다. 제퍼슨에게 워싱턴은 젊은 시절 버지니아 의회(House of Burgesses)와 사교계에서 보아온, 말수는 적지만 행동력이 뛰어난 듬직한 맏형이었다. 제퍼슨은 사석에서 워싱턴을 두고 “성인(聖人)이자 도덕적 결점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라 부를 정도로 그의 인품과 불굴의 의지를 신격화에 가깝게 존경했다. 반대로 말을 아끼는 무인이었던 워싱턴은 후배 제퍼슨의 유려한 문장력과 사상적 깊이를 &#8216;버지니아의 보배&#8217;라며 깊이 아꼈다.</p>
<p>사실 버지니아가 보스턴(뉴잉글랜드)의 고립된 싸움에 주저 없이 발을 들이밀고 제1차 대륙회의(1774년)를 성사시킨 막후에는, 워싱턴의 묵직한 행동력과 제퍼슨의 치밀한 깃펜이 윌리엄스버그의 선술집 ‘랠리 터번(Raleigh Tavern)’에서 절묘하게 맞물린 결정적 비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p>
<p>1773년 12월 보스턴 차 사건 이후, 분노한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는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통과시켰다. 이에 새뮤얼 아담스는 식민지 전체의 연합을 호소하는 서한을 각지에 보냈다.</p>
<p>버지니아 총독 던모어 경이 이에 동조하려는 버지니아 하원을 강제 해산해 버리자, 의원들은 해산 명령 직후 의사당 건너편 ‘랠리 터번의 아폴로 룸’으로 자리를 옮겨 비밀 회합을 열었다. 1774년 5월 하순의 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서른한 살의 토머스 제퍼슨과 마흔두 살의 조지 워싱턴, 그리고 패트릭 헨리 등이 모였다.</p>
<p>그 자리에서 격론 끝에 보스턴 항구가 봉쇄되는 6월 1일을 ‘버지니아 전체의 금식과 기도의 날’로 선포하기로 결의했다. 문장가였던 제퍼슨이 유려하고 힘 있는 결의안을 작성했고, 워싱턴은 묵묵히 자신의 일기에 “보스턴을 위해 하루 종일 금식하고 교회에 갔다”고 적으며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다. 그날 회합에서 여러 사람이 열변을 토했으나, 침묵을 지키던 거구의 워싱턴이 던진 말은 딱 한마디였다.</p>
<p>“합시다.”</p>
<p>남부 최대 식민지 버지니아가 보스턴의 아픔을 ‘자신들의 고통’으로 공언하며 전 식민지 차원의 총회(대륙회의) 소집에 적극 응하게 되는 단초가 마련된 역사적 순간이었다.</p>
<p>실은 그 이전, 1773년 3월 ‘식민지 간 통신위원회(Committees of Correspondence)’의 제도화에도 두 사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새뮤얼 아담스가 매사추세츠 내부 통신망을 먼저 짰다면, 이를 13개 식민지 전체를 잇는 ‘대륙 상설 통신망’으로 확장한 것은 버지니아였다. 제퍼슨은 처남인 다브니 카(Dabney Carr), 패트릭 헨리, 리처드 헨리 리 등과 함께 랠리 터번에서 밤샘 토론 끝에 결의안을 마련해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워싱턴은 영국의 전횡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제퍼슨의 통신망 구축 안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버지니아 대지주(플랜터)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p>
<p>또한 워싱턴은 고향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조지 메이슨과 함께 영국의 과세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영국 상품 전면 보이콧을 선언하는 ‘페어팩스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워싱턴은 “보스턴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 사재로 1천 명의 군사를 모아 자비로 먹이며 진군시킬 용의가 있다”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p>
<p>새뮤얼 아담스가 불을 지피고 보스턴이 포위되었을 때, 남부의 보수적인 대지주들은 “우리가 왜 저 과격한 보스턴 장사치들의 싸움에 휘말려야 하는가?”라며 머뭇거렸다. 이때 버지니아 귀족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워싱턴의 단호한 행동력과, 제퍼슨의 빈틈없는 법리적·철학적 문장력이 결합하면서 버지니아 전체가 독립 진영의 든든한 맏형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버지니아가 움직이자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 중부 식민지도 뒤따라 움직였고, 마침내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역사적인 제1차 대륙회의가 열리게 되었다.</p>
<p>제1차 대륙회의 대표단을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의 진가는 빛났다. 제퍼슨은 대륙회의 지침서로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대한 요약적 견해(A Summary View)』를 집필해 “국왕은 지배자가 아니라 인민의 공복일 뿐”이라는 파격적인 논리로 훗날 독립선언서의 뼈대를 세웠고, 워싱턴은 군복을 입고 회의에 참석해 무력 항전의 굳은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p>
<p>“그렇지. 당신들 두 사람이야말로 버지니아의 든든한 기둥 아닌가? 새뮤얼이 보스턴에서 불을 질렀을 때 버지니아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매사추세츠는 고립되어 각개격파당했을 것이오. 랠리 터번에서 말없이 술잔을 비우던 워싱턴 장군의 묵직한 결의와 제퍼슨 자네의 날카로운 깃펜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13개 주 대륙회의도, 저 명문으로 가득 찬 독립선언서도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게요.”</p>
<p>프랭클린이 테이블 저편에 놓인 독립선언서와 제퍼슨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p>
<p>“뉴욕에서 고생하고 계신 워싱턴 장군께 저 선언서가 조금이라도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p>
<p>선언서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털어놓는 제퍼슨의 목소리에는 버지니아 선후배 간의 묵직한 의리와 함께 뉴욕 전선을 향한 애틋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p>
<p>실제로 그 선언서는 전선의 군인들에게 거대한 힘이 되었다. 7월 9일, 뉴욕 전선에 선언서가 도착하자마자 워싱턴은 전 병사를 집결시켜 이를 소리 높여 낭독하게 했다. 피 흘리는 군인들에게 제퍼슨의 문장은 그 어떤 화약보다 강력한 탄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막연히 들고일어선 저항군이나 반란군이 아니라, 당당한 대의와 탄탄한 논리에 의해 결성된 정통 부대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었다.</p>
<p>“자네들이 처음 만났을 때 나눈 결의대로, 토머스 자네가 버지니아 샬러츠빌의 쾌적한 서재와 필라델피아 하숙방에서 촛불을 켜고 우아한 문장을 다듬는 동안, 자네의 그 거구 선배는 빼어난 행동력으로 뉴욕 스태튼아일랜드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의 대포를 노려보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네 그려.”</p>
<p>프랭클린의 뼈 있는 농담에 제퍼슨이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p>
<p>“장군께서 칼로 길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면, 제 깃펜 따위는 당장 영국 놈들의 교수대 올가미가 될 뿐입니다.”</p>
<p>말수 적은 제퍼슨으로서는 모처럼 입 밖으로 낸 유려한 수사였다. 대중 앞에서는 말을 아끼던 무인 워싱턴과 의회에서 웅변 대신 침묵을 지키던 천재 문장가 제퍼슨. 두 사람이 윌리엄스버그의 선술집에서 마주 앉아 포도주잔만 기울이며 긴 침묵 속에서 눈빛으로 뜻을 통하곤 했던 그 깊은 신뢰가 시티 터번의 식탁 위로 고스란히 전해졌다.</p>
<p>모리스가 잔에 담긴 진한 마데이라 와인을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p>
<p>“워싱턴 장군도 이 마데이라 와인을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끼리만 이렇게 앉아 웃고 마시고 있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p>
<p>“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시나. 우리 모두가 통 속에 들어가 사는 디오게네스(Diogenes)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해야지.”</p>
<p>프랭클린이 짐짓 타박했으나 모리스는 멈추지 않았다.</p>
<p>“박사님, 이 와인 한 통 값이면 대륙군 병사 열 명에게 장화를 신길 수 있습니다. 지금 뉴욕에서는 대포가 모자라 나무 둥치에 검은 칠을 해 위장해 놓고 있는 판국인데… 워싱턴 장군은 요즘 절대로 이 와인을 목에 넘기지 못할 겁니다. 장군, 미안합니다…”</p>
<p>모리스는 죄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제퍼슨은 입술을 깨물었고, 찰스 캐럴과 존 캐럴 신부 역시 마데이라 잔을 내려놓은 채 깊은 침묵에 잠겼다.</p>
<p>무거운 고뇌가 방 안을 짓누를 때, 프랭클린이 소스 묻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p>
<p>“뉴욕이 무너지면 다음은 여기 필라델피아네. 내가 파리로 가겠네. 프랑스의 금고를 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와인은커녕 영국 국왕의 교수대에 목이 걸릴 걸세. 그러니 우리가 프랑스 왕의 주머니를 열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형편이 어렵다 한들 베르사유 궁정에는 이보다 더 비싼 와인이 넘쳐날 테니…”</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02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8/1-1.jpg" alt="" width="258" height="285" /></p>
<p>자연스럽게 화제는 바다 건너 프랑스의 내밀한 정세로 넘어갔다.</p>
<p>당시 프랑스는 겉보기만 화려할 뿐 속은 곪아 터져 있었다. 7년 전쟁의 막대한 부채와 베르사유 궁정의 사치로 인해 국고는 바닥나 있었다. 면세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와 귀족 대신 평민(제3신분)에게 과세가 집중되어 사회적 불만이 팽배했다. 경제 개혁과 긴축을 주장하던 재무총감 튀르고(Turgot)가 귀족들의 반발로 1776년 5월 막 실각한 상태였고, 곧 재정을 맡게 될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증세 대신 대규모 해외 차관으로 국가 재정과 전쟁 지원을 틀어막아야 하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앞두고 있었다.</p>
<p>그래도 프랑스는 7년 전쟁 패배로 북미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긴 수모를 갚고 싶어 했다. 특히 외무장관 베르젠 백작(Vergennes)은 영국의 힘을 꺾기 위해 식민지 반란군을 적극 돕고자 했다. 하지만 1774년 즉위한 젊은 국왕 루이 16세는 왕권신수설을 믿는 전제군주로서 공화주의 반란을 공개 지원하는 것에 극심한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p>
<p>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파리에 가 있는 딘의 보고 역시 그러했다. 사일러스 딘을 선발해 보낸 것도 벤자민이었고, 당초 예산이 확보되고 준비가 마쳐지면 벤자민도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산 확보는 언감생심이었고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벤자민은 하루라도 빨리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사실은 급히 간다 한들 프랑스 사정을 돌릴 뾰족한 재간은 딱히 없었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은 1775년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식민지 사절 역할을 마치고 필라델피아로 귀국했고, 귀국 바로 다음 날인 6일 펜실베이니아 의회에 의해 제2차 대륙회의 대표로 선출되어 5월 10일 개원 때부터 매일 의사당에 출석했다.</p>
<p>1775년 11월 대륙회의는 외국(프랑스, 스페인 등)과의 비밀 접촉 및 정보 수집을 위해 5인으로 구성된 ‘비밀통신위원회’를 신설했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사실상 이 위원회의 수장이자 좌장으로 활동했다. 진작부터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일이 관건이라고 인식하고 있던 이들은 이듬해인 76년 3월 2일 프랭클린, 벤자민 해리슨, 존 디킨슨, 로버트 모리스, 존 제이 등 비밀통신위원회 위원들이 모여, 사일러스 딘을 프랑스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공식 비밀 지침서(Instructions to Silas Deane)를 작성해 서명했다.</p>
<p>프랭클린은 런던 시절 구축해 둔 유럽 지인 및 과학계 인맥을 활용해 딘에게 파리 현지 유력자들에게 건넬 비밀 추천장과 암호 체계를 직접 쥐여주었다. 딘은 버뮤다를 거치는 상선으로 위장해 1776년 3월 말 신대륙을 떠나 7월 초 파리에 도착했다.</p>
<p>딘에게 지침을 주고 파리로 떠나보낸 직후 벤자민 프랭클린은 캐럴 형제 등과 함께 캐나다(몬트리올) 원정 외교 사절단으로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몬트리올에서 통풍으로 고생하다 6월에 필라델피아로 복귀해 독립선언서 위원회에도 참여했고, 통신위원회 일도 다시 관장했다.</p>
<p>대륙회의의 가장 중요한 최상위 위원회 격인 이 위원회의 창설 당시 5인 멤버(벤자민 프랭클린, 존 제이, 존 디킨슨, 벤자민 해리슨, 토머스 존슨)를 보면, 펜실베이니아의 노련한 외교가(프랭클린), 뉴욕의 차가운 법률 엘리트(제이), 펜실베이니아의 신중파 문필가(디킨스), 버지니아의 대지주 호걸(해리슨)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p>
<p>지역 안배와 계파(급진파와 신중 온건파)를 고루 묶어놓은 대륙회의 최고 수뇌부 조직이었기에, 사일러스 딘을 파견하는 결정에도 무게감과 정통성이 실릴 수 있었다.</p>
<p>그런데 얼마 후 가세한 밥 모리스야말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노련한 손길에 이끌려 들어왔다가, 결국 자신의 거대한 상선단과 금융망, 심지어 사재와 개인 신용까지 신생국의 제단에 송두리째 바치게 된 셈이었다.</p>
<p>법률가(존 제이, 존 디킨슨)와 대지주(벤자민 해리슨)가 모여봐야 대서양 너머로 밀사를 띄우고 총포를 밀수입할 현실적인 물류망이 없었다. 펜실베이니아 정가에서 오랜 친분이 있던 벤자민은 &#8220;선언서 문장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진짜 피와 화약은 장사치들이 날라야 하네&#8221;라며 필라델피아 최대 부호이자 수완가인 모리스의 팔을 끌어당겼다.</p>
<p>1775년 12월 위원회에 보강된 모리스는 &#8220;잠깐 조언이나 해주고 빠지겠다&#8221;는 심정으로 발을 들였다가, 대륙회의의 모든 비밀 무기 구매 계약, 환어음 발행, 군함 용선 계약의 총책임자가 되어버렸다.</p>
<p>&#8220;어어 하다가 다 빨렸다&#8221;고 한 모리스의 비극적 헌신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 후의 일이지만 대륙회의가 발행한 대륙 화폐가 쓰레기 취급을 받자, 프랑스나 네덜란드 상인들은 &#8220;로버트 모리스 개인의 서명이 들어간 어음&#8221;이 아니면 화약 한 포대도 내주지 않았다. 모리스가 동업자 토머스 윌링과 함께 일군 ‘윌링 앤 모리스 상사’의 상선들이 무기 밀수선으로 대거 전환되어 다수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거나 격침되었다.</p>
<p>&#8220;박사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년 겨울 저를 그 비밀통신위원회인지 뭔지에 앉혀놓으신 것부터가 박사님의 계략이었습니다. 잠깐 장부나 봐달라더니, 이제는 제 배(船)에 화약을 싣고 제 지갑을 털어 군대를 먹이게 생겼지 않습니까? 어쩌다 이 늪에 빠져 제 피 같은 돈과 배를 다 털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8221;</p>
<p>이에 프랭클린이 껄껄 웃으며 응수했다.</p>
<p>&#8220;어허, 밥!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제단에 돈을 바치는 영광을 주었는데 왜 투덜대나? 자네의 금고와 장부가 없으면 조지 워싱턴의 칼도 녹슨 쇠꼬챙이에 불과하다네. 자네의 그 털린 주머니야말로 이 공화국의 가장 든든한 초석일세!&#8221;</p>
<p>&#8220;물론 자네가 적극 천거한 사일러스 딘 군도 예일에서 법을 공부한 변호사 출신이지만, 코네티컷에서 대서양 무역을 쥐락펴락하던 일급 장사꾼 아닌가? 계산이 빠르고 물류의 길목을 아는 친구지. 펜대만 굴리는 먹물들 백 명보다, 현장에서 화약 통 가격을 후려칠 줄 아는 자네와 딘 같은 인물이 지금 워싱턴과 파리에는 백배 천배 절실한 법일세.&#8221;</p>
<p>그때 존 캐럴 신부는 혼자 속으로 &#8216;주여 저들을 굽어살펴 주옵소서&#8217; 하고 기도를 올려야 했다. 두 사람의 신바람 난 대화를 들으며, 캐럴 신부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깊은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p>
<p>&#8216;주님, 저들의 정열과 지혜를 가련히 여기소서. 다만, 저들이 이룬 모든 것이 주님의 손끝에서 나온 것임을 잊고 스스로의 힘이라 믿을까 두렵사옵니다.&#8217;</p>
<p>하지만 존 캐럴 신부의 간구는 끝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주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p>
<p>사일러스 딘과 로버트 모리스는 건국 초기 가장 위험하고 지저분한 &#8216;돈과 무기&#8217;의 실무를 도맡았다가, 훗날 옹졸한 정적들(아서 리, 토머스 페인, 존 아담스까지 이들의 편에 선다)의 모함과 의회의 무책임한 외면 속에서 파멸해 간 &#8216;미국 독립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양들&#8217;이기 때문이다.</p>
<p>사일러스 딘은 불어도 서툴고 외교 경험도 없이 단신으로 파리에 건너가, 보마르셰를 설득해 1777년 사라토가 승리의 주역이 된 프랑스 무기(머스킷 3만 정, 화약, 대포 다수)를 실어 보낸 일등공신이다. 또한 라파예트, 드칼브, 폰 슈토이벤 같은 유럽의 핵심 군사 인재들을 계약해 미국으로 보낸 것도 딘의 혜안이었다.</p>
<p>그럼에도 훗날 의회는 그가 &#8216;사리사욕을 채웠다&#8217;는 모함을 믿고 소환해 청문회로 망신을 주었고, 쓴 비용조차 정산해 주지 않아 딘은 영국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사후 수십 년 뒤에야 미 의회가 유족에게 배상하며 명예가 회복된다.</p>
<p>&#8216;독립전쟁의 금융가&#8217; 모리스는 텅 빈 국고 대신 자신의 개인 재산과 신용(Morris Notes)으로 군수 물자를 사 대야 했다. 요크타운 전투의 결정적 전비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러나 전쟁 후 연방 정부는 그에 대한 채무를 나 몰라라 했고, 무너진 재정을 수습하려다 토지 투기 실패와 맞물려 채무자 감옥(Prune Street Jail)에 3년 넘게 갇히는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독립선언서, 연합규약, 연방헌법 세 개의 중요한 건국 문서에 모두 서명한 단 두 사람 중 한 명인 독립의 일등공신을 당시 가혹한 세태는 감옥에 처넣었던 것이다.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워싱턴이 감옥으로 직접 그를 찾아가 위로했을 정도였다.</p>
<p>영혼을 들여다보는 성직자 존 캐럴 신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은 참으로 아까운 영혼들이었을 것이다.</p>
<p>&#8220;똑똑하고 정열적이나&#8230; 세상의 가장 큰 덕목인 겸손을 알게 하소서.&#8221;</p>
<p>사일러스 딘은 뛰어난 외교관이었지만,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명예욕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오만이 결국 그를 망명과 의문의 죽음으로 몰고 갔다. 로버트 모리스는 나라를 구한 대부호였으나, 전쟁 후 거대한 토지 투기 사업에 뛰어들며 자신의 재력과 수완을 과신하려 했다. &#8220;내가 세운 나라인데 이 정도 땅쯤이야&#8221; 하는 미세한 오만이 결국 채무자 감옥이라는 바닥으로 그를 끌어내린 셈이다. 어쨌든 훗날의 이야기다.</p>
<p>모리스가 좌중의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며 물었다.</p>
<p>“불과 십여 년 전 7년 전쟁 때 워싱턴 장군이나 우리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붉은 군복 곁에서 프랑스의 푸른 군복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품에 안겨 돈과 총을 달라 해야 하니, 베르사유 귀족들이 우리를 비웃지 않겠습니까?”</p>
<p>프랭클린이 냅킨으로 수염을 닦으며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p>
<p>“외교란 어제의 적에게 오늘의 잔을 건네며 ‘우리가 쏜 총알은 영국 놈들의 강요였소’라고 능청을 떠는 가면극일세. 프랑스는 우리를 사랑해서 돕는 게 아니야. 7년 전쟁 때 빼앗긴 자존심과 북미 대륙의 빚을 영국 놈들의 피로 되갚아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게지. 그 복수심에 기름을 붓는 것이 내 일일세.”</p>
<p>찰스 캐럴이 프랑스 유학 시절 익힌 귀족 사회의 생리를 떠올리며 팁을 건넸다.</p>
<p>“박사님, 베르사유 궁정의 늙은 관료들은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루이 16세는 체면을 중시하고요. 궁정의 문을 정면으로 두드리기 전에 파리의 지적 살롱들과 과학 아카데미를 먼저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파리의 귀부인들과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박사님을 ‘신대륙의 현자’로 떠받들기 시작하면, 여론에 취약한 베르사유 궁정은 스스로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p>
<p>프랭클린이 무릎을 쳤다.</p>
<p>“화려한 귀족 가발 대신 소박한 모피 모자를 쓰고, 번개를 병에 담은 신대륙의 촌로 행세를 해야겠구먼. 프랑스 귀족들은 뺀질거리는 외교관보다 미지의 숲에서 온 소박한 철학자에게 더 열광하는 법이니까!”</p>
<p>그의 작전은 맞아떨어진다. 국고가 바닥나 가던 프랑스를 불과 1년 남짓 만에 움직여 1778년 2월 &#8216;미·불 동맹 조약&#8217;을 체결케 한 프랭클린의 외교술은 인류 외교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 아닐 수 없다. 몇 차례나 말하지만 프랑스의 참전 없이 독립전쟁은 수행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p>
<p>프랭클린이 파리로 건너가면 어떤 인물과 어떻게 접촉해야 하는지 주요 인물들이 거론됐다. 사일러스 딘을 통해 보고된 인물들이 모리스를 통해 먼저 나왔고 캐럴 형제의 파리 인맥, 그리고 10여 년 전 두 차례 파리 체류 시 맺었던 벤자민 노사의 파리 인텔리 친구들도 언급됐다.</p>
<p>당연히 보마르셰와 외무장관 베르젠이 1번 주자였다.</p>
<p>“사일러스 딘이 존 신부님의 소개로 극작가 보마르셰와 손을 잡고 ‘로드리그 오르탈레스 상사’라는 무역회사를 통해 무기 구입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얘기는 들으셨을 겁니다.”</p>
<p>“사일러스 딘도 그 회사에 참여했는가?”</p>
<p>&#8220;직접 참여한 것은 아닌데 함께 일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식민지만을 위해 만든 일종의 유령회사입니다.&#8221;</p>
<p>유령이란 말이 존 캐럴 신부에게는 유난히 강하게 들렸다.</p>
<p>&#8220;프랑스와 스페인 왕실이 내놓은 비밀 자금 200만 리브르에 보마르셰의 100만 리브르가 더해져 있어 이미 화약과 머스킷 소총이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습니다.&#8221;</p>
<p>&#8220;우리 신부님이 참 큰일 하셨소.&#8221;</p>
<p>딘을 보마르셰와 연결시켜 준 주인공이 존 신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노사가 다시 한번 치하했다. 존 신부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3003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8/Benjamin-Franklin-Statue-Parisology2.jpg" alt="" width="968" height="819" /></p>
<p><strong>(위사진)  파리 시내의 벤자민 프랭클린 동상 </strong></p>
<p>&#8220;하지만 궁정의 심장부를 뚫을 진짜 황금열쇠는 따로 있습니다. 프랑스 최고 문벌인 노아이유(Noailles) 가문입니다. 그 집안의 열아홉 살배기 귀족 사위가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륙군에 참여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밀항하겠다고 난리라더군요.”</p>
<p>모리스의 말에 프랭클린의 푸른 눈동자가 번쩍였다.</p>
<p>“노아이유 공작의 사위라… 완고한 장인은 사위를 잡아 가두려 하겠지만, 그 귀공자가 이 땅에 발을 딛고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려준다면? 프랑스 대귀족 전체가 우리 대의에 인질로 잡히는 셈 아닌가. 내가 파리에 도착하면 그 집안 살롱부터 먼저 찾아가 무용담을 팔아야겠구먼!”</p>
<p>좌중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p>
<p>&#8220;참, 그 젊은 사위의 이름이 뭐라고 했나?&#8221;</p>
<p>&#8220;질베르 라파예트 후작입니다.&#8221;</p>
<p>라파예트 후작. 막대한 영지와 권력을 쥔 노아이유 공작의 사위이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최측근 인맥을 거느린 이 열혈 청년의 등장은, 프랭클린의 노회한 살롱 외교와 맞물려 베르사유 궁정을 흔들 거대한 복선이었다. 보마르셰가 뒤에서 프랑스를 흔들었다면 라파예트는 앞에서 몸으로 프랑스를 흔든 열혈 청년이다. 그런데 라파예트를 추동한 사람도 보마르셰였고, 그는 이를 존 캐럴과 찰스 캐럴에게 알려오면서 미국에 도착하면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당부한 이도 보마르셰였다. 모리스는 이 일을 찰스를 통해 듣고 있었다.</p>
<p>이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판에서 벤자민과 식민지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결정적인 프랑스 인물들의 이름이 나왔다.</p>
<p>파시(Passy)의 은인 자크 쇼몽, 지성계의 거목 볼테르, 파리 살롱의 여주인들인 브리용 부인과 엘베시우스 부인, 프랑스 최고의 육군 지휘관 로샹보 백작 등의 이름이 그러했다.</p>
<p>자크 쇼몽(원명: 자크-도나티앵 르 레 드 쇼몽 Jacques-Donatien Le Ray de Chaumont)은 프랭클린의 파리 거처 제공자이자 최대 재정 후원자였다. 파리 근교의 부유한 귀족 거상이었던 쇼몽은 파시의 호화로운 오텔 드 발랑탱(Hôtel de Valentinois) 별관을 프랭클린에게 9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했다. 벤자민은 이곳을 미국 대표부 본부로 삼아 프랑스 정·재계 인사들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뿐만 아니라 쇼몽은 사재를 털어 존 폴 존스의 군함(보놈 리샤르호) 무장과 물자 보급을 주도하다 결국 파산에 이를 정도로 헌신했다. 쇼몽을 벤자민에게 처음 연계한 이가 찰스 캐럴이었다. 참, 대륙회의는 벤자민이 파리에 있을 때 한 푼도 경비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의 공관 경비까지 떠넘겼다.</p>
<p>지성계의 거목 볼테르(Voltaire)는 유럽 여론의 물꼬를 튼 계몽주의의 상징이었다. 동맹 조약 체결 직전이었던 1778년 1월,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여든넷의 볼테르와 일흔둘의 프랭클린이 조우했다. 두 거인이 포옹하고 프랑스식으로 양 볼에 입을 맞추자 객석에서는 &#8220;솔론과 소포클레스의 포옹&#8221;이라며 환호가 터졌다. 이 상징적 만남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 전체를 미국의 편으로 돌려세운 결정타였다.</p>
<p>파리의 프랭클린은 딱딱한 관청이나 출입이 까다로운 궁정 대신 파리의 살롱을 무대로 삼았다. 브리용 부인과 엘베시우스 부인은 파리 여론과 궁정 막후를 움직인 지적 네트워킹의 중심이었다. 브리용 부인은 촉망받는 귀족 음악가였고, 엘베시우스 부인은 철학자 엘베시우스의 미망인이었다. 재기발랄한 브리용 부인과는 체스를 두며 귀족 사회의 내밀한 기류를 읽었고, 엘베시우스 살롱에서는 반(反)궁정 계몽주의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결집했다. 프랭클린 특유의 촌철살인 유머와 소탈하고 솔직한 매력이 이 살롱들을 통해 궁정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다. 또 이 살롱에서 만난 퇴역 장성 로샹보 백작은 얼마 뒤 프랑스 원정군 총사령관을 맡아 정규군 6천 명을 이끌고 건너와,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고 조지 워싱턴의 지휘권 아래 철저히 복종하며 요크타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p>
<p>꼭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인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바로 미국 독립과 양부 조지 워싱턴에게 붉은 피를 바친 청년,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fayette)이다. 그는 친미파 프랑스 대귀족의 상징이자 미 대륙 최고의 야전 영웅이다.</p>
<p>프랭클린이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 겨우 열아홉이던 라파예트는 조국의 만류를 뿌리고 사재로 배(라 빅투아르호)를 사서 대서양을 건넜다. 그의 미국행은 베르사유의 젊은 귀족들에게 독립전쟁을 &#8216;자유를 위한 낭만적 성전&#8217;으로 인식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훗날 로샹보 백작의 정규군 파병을 이끌어내는 다리가 되었다. 길버트(미국식 발음) 라파예트와 찰스 캐럴, 그리고 조지 워싱턴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 풍성하게 전하기로 한다. 알아야 할 이야기가 참 많다.</p>
<p>프랭클린이 이날 시티 터번 식탁에서 &#8220;베르사유의 밀실보다 샹젤리제의 살롱과 아카데미의 벗들을 먼저 포섭하겠소&#8221;라고 했던 말은 복선을 깔아둔 것처럼, 하늘에서 보내주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은공인들의 등장과 기막히게 맞물리게 되면서 인류사 최고의 외교 기적으로 이어지게 됐던 것이다.</p>
<p>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쯤에서 자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벤자민은 아까부터 문쪽 테이블에 서 있던 주인장 존 크래포트에게 살짝 손을 들면서 눈짓을 보냈다. 계산서를 가져오라는 제스처였다.</p>
<p>&#8220;오늘 계산은 모리스 의원님이 벌써 하셨습니다. 의원님 장부에 달아 두었습니다.&#8221;</p>
<p>&#8220;아니, 오늘은 캐럴 형제와 제퍼슨 군을 위해 내가 마련한 자리인데 자네가 그렇게 나서면 어쩌나?&#8221;</p>
<p>&#8220;아무려면 제 지갑이 박사님 지갑보다는 두껍지 않겠습니까?&#8221;</p>
<p>&#8220;다 털렸다면서?&#8221;</p>
<p>&#8220;오늘 마지막 비상금 상자를 열었습니다. 정말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오늘 계산한 만큼의 돈을 전쟁위원회 장부로 옮겨 놓겠습니다.&#8221;</p>
<p>모리스는 엄살을 떨면서도 우리끼리만 호사했다고 미안하게 여기는 좌중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었다.</p>
<p>&#8220;그래, 자네 장부에 올린다고? 그럼 마데이라 한 병 더 가져다주게, 주인장!&#8221;</p>
<p>정찬의 끝자락, 다섯 명이 일제히 마지막 마데이라 잔을 채워 들었다.</p>
<p>“박사님, 칠십 노구의 몸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일은 박사님 생애 가장 위험하고도 위대한 항해가 될 것입니다.”</p>
<p>제퍼슨의 경건한 헌사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잔을 높이 들며 화답했다.</p>
<p>“토머스 자네는 깃펜으로 자유를 선언했고, 밥 자네는 빈 금고를 채우며 군대를 먹이고 있으며, 우리 캐럴 형제분은 유서 깊은 신앙과 법리로 길을 텄네. 이제 이 늙은 인쇄공이 바다 건너가 늙은 여우들의 주머니를 털어 화약을 실어 올 차례 아닌가. 역사가 우리를 단두대에 세우든, 새 나라의 첫 페이지에 올리든… 오늘 밤 시티 터번의 이 빵과 포도주는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자, 대서양 너머의 승리를 위하여!”</p>
<p>“치어스!”</p>
<p>다섯 개의 유리잔이 맑게 부딪히는 소리가 로즈 룸의 천장을 울렸다. 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식민지의 암담한 현실을 넘어 대서양을 무대로 펼쳐질 거대한 국제정치의 서막이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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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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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0 Aug 2026 01:54:4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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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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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 안동일 작  &#8216;직책의 명칭&#8217;을 정하는 일은 단순한 이름 붙이기가 아니라 그 직책이 대표하는 단체나 기구의 성격이나 위상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의 독립국면에서 나라의 대표인 행정부 수장의 명칭을 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면서도 흥미로운 일 이었다. 입 가진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8216;직책의 명칭&#8217;을 정하는 일은 단순한 이름 붙이기가 아니라 그 직책이 대표하는 단체나 기구의 성격이나 위상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br />
미국의 독립국면에서 나라의 대표인 행정부 수장의 명칭을 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면서도 흥미로운 일 이었다. 입 가진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을 정도로 큰 관심사 였다. 복잡한 헌법 조항이나 분규 발생시의 조정 문제와는 달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안 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1787년 헌법 제정 회의 및 1789년 상원 논쟁에서도 찬반이 갈렸던 구체적인 헌법 조항 문제 보다 이 행정부 수장의 호칭을 두고 현실파와 공화파 간에 치열한 설전이 더 오래 벌어졌다.</p>
<p>공화파와 현실파라고 구분을 하기는 했는데 실은 모두들 공화정에는 찬동을 하고 있었다. 호창 문제는  &#8220;이 나라가 왕정의 변형인가, 완전히 새로운 평등 국가인가&#8221;를 가르는 시금석 이었다. 그런데 일단 평등국가 공화정에 대한 컨센서스는  광범위 하게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명칭 문제에 있어서는 왕정의 영향력과 그늘이 컸다.</p>
<p>하긴 영국 왕정이 싫다고 독립을 외치고 있는데 공화정 말고 어떤 체제를 원한단 말인가. 공화정(共和政, Republic )이란 제도는  특정 군주나 가문이 국가를 사유물로 지배하는 전제 군주정에 반대하여, 국가는 사적 소유가 아닌 &#8216;공공의 것&#8217;이며 국가의 일은 시민 모두의 공적인 일(Res publica)이라는 개념이 담긴 제도다.  공화정은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며, 권력의 독점과 부패를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을 중시한다.</p>
<p>아다시피 공화정의 직접적인 뿌리는 고대 로마다. 로마는 왕을 추방한 뒤 집정관(행정), 원로원(귀족/자문), 민회(시민)가 권력을 분점하는 &#8216;혼합정체&#8217;를 구성하여 공화정의 기틀을 마련했다.<br />
중세 및 르네상스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도시공화국에서 공화주의 전통이 부활했다.<br />
공화정 문제는 잠시후 다루기로 하고 일단 정찬 자리에서의 행정부 수장 호칭 문제 부터 매듭을 짓는다.</p>
<p>&#8220;그 자리를 뭐라고 불러야 격식과 평등을 동시에 지키겠습니까? 박사님.”<br />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자 다음 문제가 한창 여기 저기서 논의 되고 있는 정부 수반의 호칭 문제 였다. 제퍼슨이 물었다.<br />
“&#8221;호칭부터 조심하게. 수장을 &#8216;왕&#8217;처럼 부르는 순간 공화제는 끝일세. 거창한 관직명 대신 그저 회의를 이끄는 &#8216;의장(President)&#8217;쯤으로 부르며 낮춰야 하네.&#8221;<br />
프레지던트, 올바니 선언때 나온 직책이다.</p>
<p>나머지 네 명의 인물이 조금씩 각기 다른 입장이기는 했다. 이 자리에서는 논쟁으로 까지 이어지지 않았다.<br />
결론적으로 말해 5인 정찬 테이블에서는 좌장인 프랭클린 노사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프래지던트(의장)로 하기로 합의 됐다. 합의 라기 보다는 다른 의견을 냈던 모리스와 제퍼슨이 즉각 승복을 했다는 편이 맞다. 모리스는 ‘유어 하이니스’를 선호 한다고 했고 제퍼슨은 &#8216;유나이트 이규제큐티브&#8217;를 내놓았었다.  당시 영국 국왕은 ‘전하(Your Majesty)’, 귀족은 ‘각하(Your Excellency)’로 불리며 신분과 지배를 상징했다. 반면 라틴어 praesidere(앞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다)에서 온 ‘President’는 본래 대륙회의 의장처럼 ‘동등한 동료들 사이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사회자’를 뜻하는 단어였다.</p>
<p>굳이 결론을 내야 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노사의 말은 듣고 보니 상당한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승복을 했다.  다만 벤자민 노사는 그때 프레지던트를 여럿 두자고 했다. 한 사람을 뽑아놓으면 전횡하고 독재로 흐르기 쉽다는 우려 였다.</p>
<p>찰스 캐럴이 나섰다. 그 자리의 결론이었다.</p>
<p>&#8221; 박사님의 우려도 옳습니다만, 군대를 지휘하고 국가 신용을 보증하려면 결단력 있는 단 한 사람의 수장이 필수적입니다. 수장이 여럿이면 책임이 분산되어 지금의 대륙회의처럼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호칭이나 숫자가 아니라 그 수장을 견제할 법의 틀&#8217;입니다.&#8221;</p>
<p>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캐럴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정통 법학과 고전 철학을 공부한 엘리트로  몽테스키외의 &#8216;삼권분립&#8217; 사상과 영국 의회정치의 장단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카톨릭 신자로서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권력의 균형과 법치주의에 매우 예민했다.</p>
<p>&#8220;그를 왕이 아닌 행정부를 이끌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합하는 의장(프레지던트)이자 &#8216;국민의 첫 번째 봉사자(First Servant of the Republic)&#8217;*로 묶어둘 헌법이 있다면, 1인 행정관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8221;</p>
<p>그는 밥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국가 신용(Credit)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중앙 정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수장은 1인으로 하되, 그 수장이 &#8216;법의 테두리 안에서 통치하는 절제된 행정관&#8217;이어야 한다고 보았다.</p>
<p>모처럼 존 캐롤 신부가 한마디  꽤 강력하게 거들었다.</p>
<p>&#8220;왕이나 총독이 아니라, 원탁의 가운데에 앉아 토론을 이끄는 &#8216;의장(President)&#8217;의  자리&#8221;라는 점은 군주제를 거부하고 ‘섬기는 지도자’를 세우겠다는 공화정의 본질과 복음서의 평등관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8221;</p>
<p>“ 그렇습니까. 앞으로 저도 적극 찬성하겠습니다.”</p>
<p>“저도 그렇습니다, 제대로 만든 공화국 헌법이 있다는 전제 하에 행정부 수장은 프레지던트 한사람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8221;</p>
<p>“그런가? 어차피 논의가 더 필요 할 테니까  그 얘기는 이쯤에서 접도록 하세, 낳지도 않은 아기 이름 놓고이러쿵 저러쿵 하는 꼴 아닌가. 아무튼 현명하게 중의를 따르는 법의 틀이 제대로 갖춰져야 하네. 찰스 몽쉐르는 앞으로 대륙회의 내 헌법 논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8221;</p>
<p>&#8220;꼭 그렇게 하겠습니다.&#8221;</p>
<p>실제 대룩회의 내 헌법 논의는 내밀하게 계속 진행 됐지만  세간에서의 행정수반,  후일에는 국가 원수가 되는 프레지던트 호칭과 관련된 이러쿵 저러쿵은 계속 이어졌다. 권위와 품격을 따지는 이들은 &#8220;유럽 강대국들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8216;전하(His Highness)&#8217;나 &#8216;선출된 국왕(His Elective Majesty)&#8217; 수준의 무게감은 있어야 한다.&#8221;고 했다.<br />
실제 독립의 기관차 존 애덤스가 밀었던 방향이다.<br />
이에 반해  절제, 실용파들은 &#8220;왕의 냄새, 왕정의 잔재를 완전히 빼야 한다. 그저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8216;의장 (President)&#8217; 정도면 충분하다.&#8221;고 했다. 프랭클린의 선창에 따른  제퍼슨, 매디슨 등 대다수 온건 공화파 건국 주역들의 방향 이었다. 개중에  프레지던트가 너무 평이 하면 &#8216;각하(His Excellency) 정도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또  급진·평등파들은  &#8220;어떠한 거창한 수식어도 권위주의의 싹이 된다. 그냥 &#8216;아무개 시민(Citizen)&#8217;이나 직무 그 자체로만 불러야 한다.&#8221; 고 했고  &#8220;이름을 무엇이라 붙이든 결국 한 사람에게 군대와 행정을 맡기면 왕과 다를 게 무엇인가?&#8221;라며 호칭 논의 자체의 허위성을 꼬집으며 연합정부 성립 자체를 싫어했던  관조·회의파 인물들도 있었다.</p>
<p>&#8221; 새로운 나라 이름은 유나니트 스테이츠로 가는 분위기 인데 박사님 생각은 어떠십니가?&#8221;<br />
&#8220;자네들이 벌써 독립선언서에 그렇게 써 놓지 않았는가, 나로선 거기엔 별 이견 없다네&#8221;</p>
<p>그랬다. 대통령이라는 국가 수반 호칭과는 달리  미합중국 &#8216;United States of America&#8217;이라는 국명은 어느 한순간에 투표등의 절차를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독립 혁명의 긴박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안되고 문서화되며 정착되었다.<br />
이 국명 탄생의 주역은 토머스 페인과 토머스 제퍼슨  두 토마스였다. 페인은 1776년 초, 초 베스트셀러 였던 혁명 팜플렛 &#8216;상식&#8217; (Common Sense)과 언론 기고문 등을 통해 흩어져 있던 13개 식민지가 하나의 연합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명칭으로 &#8216;Free and Independent States of America&#8217;, &#8216;United States of America&#8217; 등 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각인시켰다.<br />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에 &#8220;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8221;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등장시켰다. 그때 원문에는 식민지 (Colonies)로 되어 있었으나 존 아담스가 &#8216;스테이트&#8217;로 수정 했다고 알려져 있다.</p>
<p>1777년 11월 15일 대륙회의에서 통과된 미국의 첫 헌법인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 제1조에 &#8220;이 연방의 명칭은 &#8216;The United States of America&#8217;로 한다&#8221;고 못 박으면서 비교적 일찌감치 공식 명칭이 되었다.<br />
그 이전에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다양한 대안 표현들이 쓰이고는 있었다. 위에 언급한 대로 United Colonies , 연합 식민지가 독립 선언 이전 대륙회의에서 주로 쓰이던 명칭이었다.</p>
<p>또 아메리카가 어차피 사람의 이름일 바에는 최초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 유나이트 스테이트 뒤를 컬럼비아 (Columbia) 로 하자는 의견과 대륙 고유의 지형(산맥) 이름을 따서 Appalachia (애팔래치아), Alleghania (알레게니아) 붙이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br />
또 아예 대륙 이름을 행적도 불분명한 특정인의 이름 대신&#8217; 자유(Freedom)&#8217;에서 파생된 Fredonia / Fredon (프레도니아/프레돈)으로 바꾸고 국호도 그렇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 의견을 따라 19세기 초까지도 미국인을 &#8216;아메리칸&#8217; 대신 독창적인 고유명사인 &#8216;프레도니안&#8217;으로 부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순명 독자들이라면  알고 넘어갈 만한 지식이다.</p>
<p>결국 개별 주들의 &#8216;독립성과 연합(United States)&#8217;이라는 정치적 현실과 대륙의 이름(America)을 결합한 실용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이 최종 국명으로 굳어졌고 5인 정찬 자리에서도 추인(?) 됐던 것이다.</p>
<p>그날 1776년 7월 27일 필라델피아 시티 터반 에서  캐럴 형제와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로버트 모리스, 다섯 사람이 모인 정찬 자리는 후일 따져보면 엄청난 자리였다.   가볍게 스쳐가는 말 중에서 중요한 정보와 방침이 나왔고 매우 중요한 사항이 다섯 사람 사이에  공유되고 결의 되었다.   대륙회의의 무기력함과 보급 대란을 겪으며 &#8220;이대로는 전쟁에서 이겨도 나라가 성립하지 않는다&#8221;는 통찰에 도달한  정찬 자리의 대화는 당시 미국 혁명의 가장 뜨겁고도 현실적인 고민이 드러났고 그 해법이 제시된  대화였다.</p>
<p>대륙회의를 발전시켜 연합 정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다시 이루어 졌고, 그 정부는 공화제 ,삼권분립의 정부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수장을 &#8216;전하&#8217;가 아닌 프레지던트 (의장)으로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고, 화약 한줌 생산 못하는현실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것이 프랑스의 도움 이었기에 벤자민이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가톨릭 신자 캐럴 형제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프랑스에 빨리 건너가기로 결정 했고, 조지 워싱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확인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8216;우리는 그를 지킨다&#8217;고 결의 했던 것이다.  이날 정찬 자리는 미국 독립 전쟁 국면 초기  답답하다 못해 참담한 상황의  극복 방안이 제시된 가장  중요한 자리로 자리매김 해도 손색이 없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90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8/George_Washington_at_Princeton.jpg" alt="" width="250" height="399" /></p>
<p>“ 공화국 헌법 얘기를 좀더 나누기  전에 나는 우리 찰스 몽셰르야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공화제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황과 가톨릭 교리를 따라야 하는 성직자  존 신부님이 어떻게 공화제를 찬동하는지 궁금하네 그려”</p>
<p>벤자민 노사가 화살을 존캐럴 신부쪽으로 날렸다. 실은 원려가 담긴 화살이었다.</p>
<p>&#8220;천주교는 개신교 보다 더 강력하게 교황의 권위와 국왕들의 권위를 인정 하는 편 아닌가요?&#8221;</p>
<p>노사가 한마디 덧붙혔고 신부가 즉각  대답했다.</p>
<p>&#8221; 프로테스탄트들이 17~18세기 존 로크를 인용하기 훨씬 전부터, 가톨릭 신학은 군주에 대한 저항권을 체계화해 두었습니다.”</p>
<p>&#8220;그렇습니까? 가톨릭 신학에도 강력한  저항권이 있다는 말인가요?&#8221;</p>
<p>그랬다.  찰스 캐럴과 존 캐럴 신부가 혁명에 주저 없이 투신한 배경에는 당대 가톨릭 소수파로서 마주했던  현실적 법적 억압과 함께, 가톨릭 내부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두터운 신학적 저항 이론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p>
<p>자연스레 성서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중세·근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과 복음서의 박애·평등 정신을 연결한 존 신부의 기톨릭(에수회)저항전신 신학소개가 이어졌다.  짧지만 설득력과 서사의 깊이가 뛰어난 강의 였다.</p>
<p>“ 위대한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의 폭정론이 대표적 입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연법에 어긋나는 법은 &#8220;법이 아니라 폭력(corruptio legis)&#8221;이라 규정했습니다. 공동선의 목적을 상실한 폭군에게 저항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 정당방위라는 논리입니다.”</p>
<p>모두 눈이 동그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p>
<p>“찰스와 제가 공부한 프랑스 예수회교육은  살라망카 학파의 학풍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살라망카 학파는  &#8216;권력의 인민 수탁설&#8217;을 가르쳤습니다. 신(God)은 통치 권력을 특정 왕에게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8216;인민(Community)&#8217;에게 주며, 인민이 통치자에게 이를 위임한다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통치자가 계약을 깨면 권력은 인민에게 환원됩니다.&#8221;</p>
<p>찰스와 존 캐럴에게 혁명은 세속적 반란이 아니라 이 유서 깊은 스콜라 자연법 전통의 복원이었던 것이다. 좁게는 두 사람의 향리 메릴랜드의 복원이기도 했다.</p>
<p>메릴랜드 식민지는 본래 가톨릭 영주(볼티모어 경)가 세운 종교적 관용의 땅이었으나,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메릴랜드에서도 가톨릭교도는 투표권 박탈, 공직 진출 금지, 이중 과세, 미사 봉헌 금지 등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br />
이들에게 영국의 억압은 &#8216;세금 문제&#8217; 이전의 &#8216;신앙과 양심의 자유&#8217; 문제였다. 국교가 없는 세속 공화정이야말로 가톨릭 신앙이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는 확신이 있었다.</p>
<p>존 신부는 성서를 원용해 사람들에게 더 확신을 던져 줬다.</p>
<p>“ 성서 텍스트가 왕정을 긍정하는 듯 보이는 대목,  &#8220;권세에 복종하라&#8221;는 구절이  있지만, 복음의 본질은 공화정의 가치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구약 사무엘기 상 8장 에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야훼는 &#8220;왕은 너희 아들딸을 징발하고 십일조를 거두며 결국 너희를 노예로 만들 것이다&#8221;라고 왕정의 폭력성을 강력히 경고합니다.  성서에서 왕정은 하느님의 본래 뜻이 아닌 &#8216;백성의 나약함에 대한 양보&#8217;로 묘사됩니다.”</p>
<p>“그리스도 안에서의 철저한 평등은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서(3:28)에서 선포한 &#8220;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8221;는 선언과, 마태오 복음(23:8~11)의 &#8220;너희는 지도자라 불리지 마라. 너희 중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8221;는 예수의 육성은 신분제와 세습 군주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신앙적 선언입니다.”</p>
<p>“원시 교회의 코이노니아와  사도행전의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는 권력의 위계가 아닌 형제적 나눔과 박애를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p>
<p>예수회 교육을 받은 존 캐럴과 찰스 캐럴은  수아레스와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을 통해 &#8220;폭군에 저항하여 인민이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자연법 질서의 명령&#8221;임을 지적으로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p>
<p>캐럴이 대지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고 처벌(교수형)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군주가 신민을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8216;모두가 형제로서 서로를 섬기는 공화정(Res Publica)&#8217;이야말로 복음서의 참된 실천이라 믿는  결단이야 말로 내적 영성 이었던 것이다.</p>
<p>이같은 내적 영성은 전염 되듯  나머지 세사람에게 커다란 위안과 확신을 던져 주었다. 특히 벤자민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왕과 대신들 상대하는 일이  해볼만 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또  빨리 건너가야 이모저모  승산이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p>
<p>가톨릭 저항 사상 강의에 자연스레  이어 프랑스의 왕실 사정과 보마르세라는 원군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모리스는 존 캐럴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시했다. 실은 그때 존 캐럴의 주선에 따라 1차 선적분  머스킷과 화약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이 화약이 없었다면 이듬해  사라토가 승리는 없었다.</p>
<p>&#8220;내가 당장 파리로 건너가야 겠네,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급한 일은 없어.&#8221;</p>
<p>&#8220;네 즉각 준비하겠습니다. &#8221; 모리스가 힘차게 대답했다.</p>
<p>이날 정찬에서 워싱턴에 대한 무한 신뢰를 확인하고 그를 보위 하기로 다짐한것은 역시 벤자민 프랭클린의 당부에 따른 일이었다.</p>
<p>&#8220;내가 없더러도 자네들만큼은 워싱턴 장군을 꼭 지켜내야 할 것일세. &#8221;</p>
<p>노사는 워싱턴에게 몰려드는 큰 먹구름을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노사의 이 당부는 1년 뒤 그야 말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던 워싱턴의 베리포지로 찰스 캐럴이 찾아가 그를 구원해 내고 자신이  추천해 초빙한 프랑스 군사 전문가를 통한 대륙군의 체계적 훈련이란 전화 위복으로 이어진다.</p>
<p>사나이의 첫정은 8초안에 가름 된다고 했던가.<br />
벤자민은 첫눈에 워싱턴을 알아 보았다.</p>
<p>벤자민 프랭클린과 조지 워싱턴이 본격적으로 마주한 것은 1775년 5월, 필라델피아 제2차 대륙회의의 웅성거리는 의사당 안에서 였다. 산전수전 다 겪고 일흔을 바라보던 노련한 계몽주의자 벤자민의 눈에 비친 마흔셋의 버지니아 촌뜨기 거한 워싱턴의 &#8216;첫 8초&#8217;는 아마도 숨 막히는 침묵과 직관이었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귀국한 직후 대륙회의에 합류했다. 도착 바로 다음 날,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의회에 의해 제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공식 선출됐고 5월 10일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스테이트 하우스에서 개최회된 제2차 대륙회의 첫 공식 회기에 대표 자격으로 정식 참석했다.<br />
의사당 문이 열리고, 그 거대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순간 벤자민의 반달안경 너머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br />
첫 3초는 압도적인 육체적 위압감이었다. 당시 성인 남성의 머리 하나는 족히 솟아 있는 6피트 2인치의 거구, 대장간 모루처럼 벌어진 어깨, 꼿꼿하게 곧추세운 척추. 그는 유럽의 기름진 귀족들이나 필라델피아의 약삭빠른 법률가들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서부 개척지의 진흙탕과 버지니아 황무지에서 말안장 위에 얹혀 단련된 &#8216;야성의 뼈대&#8217;가 제복 너머로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br />
다음 3초, 벤자민의 시선은 그가 입고 온 푸른색과 담황색의 버지니아 민병대 군복에 멎었다. 모두가 점잖은 프록코트를 입고 펜대와 웅변으로 주판알을 튕기던 그 위선적인 회의장에, 홀로 칼을 찰 수 있는 군복을 입고 나타난 침묵의 선전포고. 프랭클린은 굳이 그 사내의 입을 열어보지 않고도 단박에 읽어냈다.<br />
&#8216;이 자는 떠들어 온 것이 아니구나. 피를 흘릴 각오를 온몸에 두르고 왔구나.&#8217;<br />
그리고 마지막 2초, 벤자민은 워싱턴의 눈빛과 다문 입술을 포착했다. 천연두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굳은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그 아래 억눌린 채 타오르는 차갑고 위험한 불꽃. 사내의 첫정을 가늠한다는 찰나의 8초가 끝나는 순간, 프랭클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br />
&#8216;화려한 말로 대중을 현혹하는 선동가는 넘쳐나지만, 온몸의 무게로 침묵하며 역사의 벼락을 혼자 받아낼 바위 같은 사내는 오직 저자뿐이다.&#8217;<br />
런던 궁정의 온갖 모략과 음모를 꿰뚫어 보던 늙은 현자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이 바다 건너에서 화약과 총을 구해오면 이 대륙의 맨 앞에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설 &#8216;유일한 기둥&#8217;을 직감했을 것이다.</p>
<p>의사당 구석, 담배 연기와 잉크 냄새가 밴 창가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br />
마흔셋의 워싱턴에게 일흔의 벤자민 프랭클린은 런던의 추밀원을 쥐락펴락하고 번개를 병에 담았다는 전설 속의 현자였고, 벤자민에게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결혼해 거대한 농장을 일군 뒤 군복을 입고 나타난 &#8216;말수 적은 버지니아 거한&#8217;이었다.<br />
워싱턴이 먼저 허리를 굽혀 묵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장갑을 벗은 거친 손이 벤자민의 주름진 손을 감쌌다.<br />
&#8220;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버지니아의 촌부가 필라델피아의 지혜를 배우러 왔습니다.&#8221;<br />
화려한 수사도, 정치적인 칭찬도 없는 뼈마디 굵은 목소리였다.<br />
벤자민은 반달안경 너머로 푸른 제복의 가슴팍에 달린 황동 단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특유의 능청스럽고도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br />
&#8220;워싱턴 대령,  다들 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말(言)로 제국을 이겨보겠다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데…대령께서는 아예 관(棺)을 짤 치수를 재고 오셨소 그려.&#8221;<br />
워싱턴의 굳은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벤자민은 상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덧붙였다.<br />
&#8220;군복이 아주 잘 맞으시오. 런던 놈들이 총칼을 들고 올 때, 펜대 뒤로 숨지 않을 사내가 이 방에 적어도 한 사람 있어 다행이오.&#8221;<br />
그 말에 워싱턴의 굳게 다물렸던 입술 사이로 깊고 무거운 숨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나왔다.<br />
&#8220;박사님, 저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다만 맡겨진 자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킬 뿐입니다.&#8221;<br />
&#8220;그거면 족하오. 말은 이 늙은이가 바다 건너가서 얼마든지 지껄여줄 테니…장군은 그저 쓰러지지 말고 버티시오.&#8221;</p>
<p>노사도 그를 그 순간 진급 시켰다.<br />
세련된 말재주 뒤에 숨은 필라델피아의 엘리트들 틈에서, 번지르르한 칭찬 대신 자신의 &#8216;군복&#8217;이 품은 비장한 각오를 단 한마디로 꿰뚫어 본 노학자. 그리고 그 노학자의 유머 섞인 독설을 묵묵한 결의로 받아낸 무인.<br />
&#8216;부자 과부 덕을 본 농장주&#8217;라는 세상의 평판 뒤에 숨겨진 거인의 그릇을 벤자민이 알아본, 짧지만 뼈가 굵은 첫 대화였다.</p>
<p>워싱턴의 결의는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영웅적 충동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굴욕과 환멸이 ‘렉싱턴의 핏자국’을 만나 응고된 것이었다.    청년 워싱턴은 영국 국왕의 정규군 장교가 되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영국을 위해 황무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1758) 브래독 원정 때는 옷에 총구멍 네 개가 뚫리는 사선을 넘나들었다.<br />
그러나 런던의 귀족 장교들은 그를 그저 &#8216;식민지의 측량기사 출신 촌놈&#8217; 취급하며 정규군 장교 임관을 거부했다. 그때 워싱턴은 뼛속 깊이 깨달았다.<br />
&#8216;우리가 아무리 피를 흘려도, 저들에게 우리는 결코 대등한 신민이 아니다.&#8217;<br />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와 마사와 결혼하고 대농장을 일궜지만, 런던의 무역상들은 담배 가격을 후려치고 형편없는 영국산 공산품을 강매하며 그를 부채의 덫에 가두었다. 워싱턴에게 영국의 인지세와 관세는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라, &#8216;독립된 자유인을 노예나 소작농 취급하는 오만한 횡포&#8217;였다.<br />
의회에서 점잖게 청원서나 쓰던 타협의 시간은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외곽에서 끝났다. 식민지 민병대의 피가 땅에 뿌려진 순간, 워싱턴은 타협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8216;한번 피를 흘린 이상, 이제 남은 길은  반역자로 목을 매달리거나, 아니면 끝까지 싸워 자유인이 되는 것뿐이다.&#8217;</p>
<p>&#8220;박사님, 20년 전 오하이오 황무지에서 영국 장교 놈들의 비웃음을 살 때부터 알았습니다. 저들은 결코 우리를 대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렉싱턴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피가 흐른 이상 타협이란 없습니다. 목을 내놓고 반역자가 되든, 칼을 쥐고 자유인이 되든 둘 중 하나뿐입니다.&#8221;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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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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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12 Aug 2026 17:31:24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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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 정찬 테이블의 화제는 워싱턴 부대를 비롯한 각지의 대륙군에 대한 보급의 어려움으로 쏠렸다. “뉴욕의 워싱턴 부대야 그렇다고 쳐도, 다른지역은 어떻습니까?” 찰스 캐럴이 밥 모리스를 쳐다 보며 물었다. 워싱턴의 뉴욕에 대해서는 조금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캐럴은 뉴욕의 사정을 듣자마자 자신이 나서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h4>
<p>정찬 테이블의 화제는 워싱턴 부대를 비롯한 각지의 대륙군에 대한 보급의 어려움으로 쏠렸다.<br />
“뉴욕의 워싱턴 부대야 그렇다고 쳐도, 다른지역은 어떻습니까?”<br />
찰스 캐럴이 밥 모리스를 쳐다 보며 물었다. 워싱턴의 뉴욕에 대해서는 조금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p>
<p>캐럴은 뉴욕의 사정을 듣자마자 자신이 나서야 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며칠 뒤, 그리고 또 한참 뒤의 일이지만 조급해 하는 그리고 안타까와 하는 독자들을 위해 미리 살짝 일러 둔다. 실제 그는 그날밤 적잖이 와인을 마셨음에도 숙소에 돌아가 아나폴리스의 부친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다음날 부터 메릴랜드에서는 뉴욕으로 가는 마차 행렬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식량과 의복 행렬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물품은 몇대에 나뉘어 실은 스페인 은화와 금화 궤짝이었다. 찰스의 부친 아나폴리스 캐럴이 평생을 모아온 거의 전부였다. 쓰면 돌아 온다고 했던가. 이 은화 궤짝은 후일 수천배, 수만배의 가치로 캐럴가에 돌아온다.</p>
<p>훗날 미 의회의사당이 들어서게 될 캐피털 힐의  늪지대가 본래 캐럴가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가문의 토지 일부가 국가의 수도로 기증된 후, 거짓말처럼 주변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캐럴가의 부는 더욱 거대해졌다. 그리고 그 막대한 부는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학이자 막강한 재정으로 순식간에 최고 명문이 된 조지타운의 초석이 되었고, 새 땅의 명물이 된 볼티모어 대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와 장엄한 종소리로 승화되었다.<br />
정찬 자리에서 조지 워싱턴 대륙군의 비참한 실상을 들으면서 찰스는, 존 신부와 미친기지로 식탁 위에 놓인 흰빵이 너무도 송구스러웠다. 그날 밤, 붉어진 눈을 비비며 그는 도허레건 농장에 있는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썼던 것이다. 아들이 보낸 진심 어린 문장에 움직인 캐럴 옹은 메릴랜드 민병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마지막 동산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금화 궤짝들을 뉴욕의 워싱턴에게 전격 이송했던 것이다.</p>
<p>10 여년 뒤, 포토맥 강변 부지를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삼으려 할 때, 워싱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그 곤경의 밤에 금화 궤짝을 보내왔던 캐럴가와 천주의 가호로 그들의 얼이 새겨져 있는 지금은 늪지지만  전망 밝은 그 땅 이었다. 남부와 북부 정치인들 간의 격렬한 수도 유치 대립 상황에서, 워싱턴은 캐럴가의 헌신적 기여와 그들이 소유한 포토맥 강변의 광대한 토지의 미래가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확고한 신념으로 이 부지를 밀어붙였던 것이다.</p>
<p>후일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모리스의 답변으로 돌아 온다.<br />
“50보 100백보 입니다. 지금 우리 대륙군은 적군의 총알에 맞아 죽기전에 굶어 죽을 판입니다.”<br />
“그렇게나 심각합니까?”</p>
<p>“대륙회의 금고는 비어 있고 각 식민지 주 정부들은 영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br />
“참, 우리 대륙군의 전체 병력수는 얼마나 됩니까? 대외 군사비밀 사항 일테지만 어차피 제가 군사위원회 들어 갈 테니까 알려 주시지요.”</p>
<p>“그래 나도 정확히는 모르고 있는데 얼마나 되나?&#8217; 벤자민 노사도 나섰다.<br />
“ 실은 매우 지지부진 합니다. “<br />
&#8216;5만 대군이다.&#8217; &#8217;10만이 모였다&#8217; 설왕 설래가 많은 사안이었다. 당연한 과장이었다. 특히 독립파 신문들이 상황을 부풀렸다.<br />
“전환된 민병대를 포함해 서류상 기록된 숫자는 4만 7천 명에 달하지만 중복 기재도 많고 ,질병, 미복귀 등으로 인해 실제로 단일 전장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은 2만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p>
<p>담당관인  모리스의  솔직한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br />
1776년 7월 말, 독립선언이 선포될 즈음,  대륙군은 조지 워싱턴의 뉴욕 주력군 외에도 북부, 남부,  서부 국경 지대와 뉴저지 예비대  등에 약 1만~1만 5천 명 규모의  부대가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대륙군의 실제 총 병력은 정규군과 단기 소집 민병대를 합쳐 약 3만~3만 5천 명 안팎이었다.  이 중 약  60%인 2만 명이 워싱턴과 함께 뉴욕에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 40%가 각지로 나뉘어 힘겹게 영국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p>
<p>북부부대 (Northern Department) 는 뉴욕주 북부 챔플레인 호수 및 타이콘데로가 일대에 주둔해 있었는데 1775년 겨울에 감행했던 캐나다 원정(퀘벡 침공)이 참패로 끝난 후, 6~7월에 걸쳐 참담하게 남쪽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필립 스카일러(Philip Schuyler)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소장,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준장이 이끌고 있는데 병력 규모는 약 5천에서 7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전염병 및 탈영으로 실질 전투력은 극심하게 하락한 상태 였다.</p>
<p>남부부대 (Southern Department)는 찰스턴 등 사우스캐롤라이나 일대에 대륙군 정규연대와 각 주 민병대를 햡쳐 3천~ 5천 정도가 있었다. 찰스 리 소장, 로버트 하우준장,  존 물트리 대령이 지휘관이었다.<br />
7월 말 기준으로 사기 및 전과가 가장 드높았던 부대다. 1776년 6월 28일, 찰스턴 길목의 설리번 섬 전투(Battle of Sullivan&#8217;s Island)에서 야자나무 방어벽을 구축한 물트리 대령의 부대가 영국 해군과 헨리 클린턴의 영국 상륙군을 완벽히 격퇴했던 것이다.   7월 말에는 영국 함대가 남부 해안에서 철수하면서 남부 연안의 위협이 해소되었고, 찰스 리 장군은 남부 내륙 방어와 영국의 공작을 받아 은 체로키 인디언 세력 대응에 집중하고 있었다.</p>
<p>또 중부인 뉴저지 지역에는 휴 머서(Hugh Mercer) 준장이 이끄는 병력 규모  3,000명의 기동 예비대 &#8216;플라잉 캠프&#8217; (Flying Camp) 부대가 있었다. 대륙회의가 워싱턴의 뉴욕 주력군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뉴저지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 6월에 신설을 의결한 모바일 예비대(Strategic Reserve)였다.<br />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등에서 소집된 기동 민병대와 정규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퍼스 앰보이(Perth Amboy) 등 뉴저지 해안 거점에 주둔하며 영국군의 기습 측면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p>
<p>서부 국경 및 기타 지역 (Frontier &amp; Coastal Garrisons)에도 각 수백에서 수천 명 규모의 부대가 대륙군의 이름으로 펜실베이니아 피트 요새(Fort Pitt) 등에 배치되어, 영국과 결탁한 원주민 부족들의 내륙 습격을 견제 하고 있었다.<br />
뉴잉글랜드 연안에는 3월 보스턴 포위전 승리 후 주력은 뉴욕으로 빠져나갔으나, 해안 포대와 최소한의 정규군 및 주 방위대가 남아 해안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p>
<p>일견 든든해 보이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p>
<p>“ 워싱턴의 뉴욕 부대 뿐만 아니라 다른 전선의 대륙군 역시 심각한 보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보급의 총 책임은 당연히 대튝회의 이지만 아시다 시피 대륙회의는 행정력과 과세권이 전혀 없고, 권한 이래야 각 주(State, Colony)에 물자 할당을 ‘요청’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저들이 나 몰라라하면 끝 입니다.. 여기에 대륙노트의  가치 폭락과 화물 수송 체계의 부재가 더해져 전선의 보급선은 사실상 전명 마비 상태나 다름 없습니다.”</p>
<p>모리스가 마데이라 잔을 벌컥 비운 뒤  지역별 사정을 이어갔고 다른 이들은 경청 했다. 본격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이지경 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br />
찰스 형제와 프랭클린 노사가 만났던 뉴욕 타이콘데로가 일대 북부부대가 가장 보급 상황이 처참했다. 캐나다 원정 참패 후 후퇴한 이 북부부대는 보급선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기본 식량이 부족해 병사들은 야생 풀이나 겨우 연명할 정도의 굶주림에 시달렸다. 천막, 피복, 신발이 없어 수천 명이 맨발과 누더기 차림으로 지냈다. 가장 부족했던 것이 의약품과 위생 용품이었다. 천연두에 이어 , 이질, 말라리아 까지 퍼지면서  7월 말 기준 타이콘데로가 부대 병력의 절반 가량이 전투 불능 상태 였다.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8220;군대가 아니라 병원과 시체 안치소에 가깝다&#8221;고 한탄할 정도였다.</p>
<p>남부부대는 찰스턴 전투 승리 직후라 사기는 높았으나, 군수 물자의 질적 보급은 역시 극히 부실했다. 농경지인 남부 특성상 쌀과 현지 축산물 등 기본적인 식량 수급, 현지 조달은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했지만 대륙회의가 보내줘야 하는  화약과 무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찰스턴 방어 당시 병사들은 총알 하나하나를 아껴 쏴야 했다.<br />
또 꽤 많았던 이 부대 소속 뉴잉글랜드와  중부 출신  병사들은 남부의 습하고 무더운 여름 기후에 맞는 옷이나 모기장, 의약품을 전혀 공급받지 못해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시달려야 했다.</p>
<p>뉴저지 플라잉 캠프(New Jersey)는 급히 각 주에서 소집된 민병대 중심이다 보니 대륙회의의 정규 보급 목록에서 후순위로 밀렸다. 병사들은 개인 총기와 옷을 직접 가져와야 했고, 군용 천막이 없어 야외나 나무 밑에서 노숙하기 일쑤였다. 장교들은 &#8220;총도, 탄약도 없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무슨 방어를 하란 말이냐&#8221;며 항의했다.</p>
<p>서부 국경  요새와 내륙 거점들은 수송로가 험준하여 보급품 전달이 가장 늦었다. 특히 인디언 부족들과의 교전에 필수적인 화약과 납(총알 재료) 공급이 늘 바닥나 있어 현지 사냥꾼들이나 주민들의 물자에 의존해야 했다.</p>
<p>헌머디로 1776년 7월의 대륙군 보급은 &#8220;중앙의 지원은 거의 없고, 각 지역 장군들이 주 정부나 현지 주민들에게 구걸하거나 빚을 얻어 겨우 연명하던 구조&#8221;였던 것이다.</p>
<p>“참 큰일이구요, 무슨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겠군요.”</p>
<p>&#8220;정말 미쳐버릴 지경입니다.내가 무슨 팔자에&#8230;&#8221;</p>
<p>모리스가 마데이라 한잔을 벌컥 마셨다.</p>
<p>각 주(State)에 &#8220;돈 좀 내달라&#8221;고 구걸해야 하는 처지의 실무자인 그는 그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전쟁위원회 재정관을 맏고 있었다.</p>
<p>“대륙군이 창설된지 이제 1년이 넘었지요?”<br />
모처럼 제퍼슨이 입을 열었다.<br />
“정확이 1년 하고도 40일 입니다. 그런데도 자리를 영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뉴일글랜드 사람들이 비협조적입니다. 자신들이 나서서 군을 만들어 놓고는&#8230;”</p>
<p>&#8220;그럴리가 아담스 형제가 건재 한데&#8230;&#8221;</p>
<p>&#8220;아닙니다 사무엘, 존 두분 형제 빼면 특히 핸쿡 의장을 포함해 식민정부 의원들과 관리들은 온통 워싱턴 장군의 적입니다.&#8221;</p>
<p>사실 대륙군은 뉴잉글랜드 지역이 주도 했다. 아는 대로 대륙군은 1775년 6월 14일 제2차 대륙회의의 결의를 통해 창설 됐다. 그런데 그 창설을 공식 거론 하고 성사시킨 측이 매사추세츠와 뉴 햄프셔 의회 였다. 그해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간의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을 때 그 민병대는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개별 민병대 연합체(New England Army of Observation)였다. 일단 영국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포위 상황에 들어 갔을 때 매사추세츠 지방의회는 이 부대를 13개 식민지 전체를 대표하는 부대로 추인 해 달라고 뉴 햄프셔 의회와 함께 연명으로  대륙회의에 공식 요청했다. 사무엘 아담스 등 그곳 지도자들의 결단이자 원려었다.<br />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 모인 제2차 대륙회의는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민병대를 식민지 전체의 공동 방위를 위한 &#8216;대륙군&#8217;으로 공식 공인하고 전역에서 대대적인 추가 모집을 하겠다고 선언 했다. 이 날짜는 현재까지도 미국 육군의 창설 기념일(U.S. Army Birthday)로 기념된다.<br />
대륙회의는 우선 펜실베이니아에서 6개 중대,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각각 2개 중대의 전문 소총병(Riflemen)을 즉시 모집하여 보스턴으로 파병하도록 조치했다.<br />
6월 15일 군대를 창설한 바로 다음 날,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 으로 만장일치 형식으로 임명했다는 사실과 그 전후 사정은 전한 바 있다.<br />
병력은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충원됐다. 초기에는 애국심에 기반한 자원입대가 주를 이루었다. 애국 신문들이 이 분위기를 주도 했다. 모병이었기에 월급제 계약이 있었다. 하지만 복무 기간이 1년 미만이었고 남부 병사들은 바쁜 농사철이면 대거 귀향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후 워싱턴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후 복무 기간이 3년 또는 &#8216;전쟁 종료 시까지&#8217;로 연장되기는 했지만 모병제의 한계는 내내 따라다녔다.<br />
자원입대자가 줄어들자 대륙회의는 각 주(State)의 인구 비례에 맞춰 병력 할당량을 부과했다. (Drafts and Quotas): 각 주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민병대원 중 제비뽑기로 대륙군에 입대시켰고, 부유층은 대리인을 돈으로 사서 대신 입대시키기도 했다.<br />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자유 흑인 및 노예(일부 주는 군 복무의 대가로 해방을 약속), 프랑스·독일 등 유럽 출신의 직업 군인 및 자원봉사자들도 대륙군에 포함되었다.<br />
대륙군의 서류상 최대 규모는 1776년 무렵 서류상 기록된 약 47,000명에 달했지만 언급한 대로 질병, 보급 부족, 미복귀 등으로 인해 실제로 단일 전장에 동원할 수 있었던 어느정도라도 무장을 갖춘 최대 병력은 모리스가 말 처럼 약2만명 수준을 넘지 못했다. 실은 그당시 식민 대륙 전체에 주준하고 있는 영국군을 모두 합쳐도 1만 5천이 넘지 않았기에 병력으로는 크게 열세는 아니었다. 물론 영국은 군함을 동원 정규군을 계속 대륙으로 대량 보내 왔다.<br />
후일의 통계지만 전쟁 전체 기간(1775~1783년) 동안 대륙군에 한 번이라도 적을 두고 복무한 총인원은 약 23 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식민지 개별 민병대까지 합치면 약 39만 5천 으로 집계 된다.</p>
<p>대륙회의가 군의 통수권을 가졌고,  지휘 계통은 총사령관 아래로 소장(Major General), 준장(Brigadier General), 대령(Colonel, 연대장) 순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명령 체계를 민들었지만 아는대로 통솔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팽배 했기 때문이다. .</p>
<p>당시 대륙회의는 겉으로는 단결해 독립을 선언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역 갈등과 불신으로 가득 찬 화약고였다. 남부 대 북부의 뿌리 깊은 불신이 문제 였다.  버지니아 중심의 남부와 매사추세츠 중심의 북부 뉴잉글랜드 세력은 늘 으르렁댔다. 북부는 남부가 &#8220;말만 번지르르하고 군대나 군자금은 안 보낸다&#8221;고 비난했고, 남부는 북부를 &#8220;과격한 선동가들&#8221;이라며 경계했다.<br />
거기다  뉴잉글랜드 의원들 사이 에서는 &#8220;왜 우리가 어쩌다 무능한 버지니아인에게 지휘권을 주었나?&#8221;하면서 계속 총사령관 직책 결정을  번복 하려 했다.   호레이쇼 게이츠나 찰스 리를 총사령관으로 밀었던 파벌들이 워싱턴의 계속 목을 조르고 있었다.</p>
<p>&#8220;총이 없어 대륙군에게 중세 시대의 창을 쥐여주어야 할 판 인데도  북부주 의원들은 여전히 버지니아 촌뜨기 장군이라며 손가락질만 하고 자신들 민병대도 총이 없다고 딱 잡아 댑니다.”</p>
<p>&#8220;워싱턴 장군이 군수품을 달라고 매일 같이  편지를 보내온다고 호소하면 군사위원회 소속 의원들 까지도 능력이 없어서 보급 탓만 하는 것 아니냐 고 쏘아붙이곤 하는 형편 입니다.”</p>
<p>&#8221; 말씀 드린 대로 대로 이대로는 워싱턴 장군과 군대가 총에 맞아 죽기 전에 굶어 죽습니다. 강제력 있는 중앙 정부와 일사 분란하게 통솔할 그 수장이 당장 필요합니다. 지금의 대륙회의 구조로는 이 전쟁 수행 못합니다.&#8221;</p>
<p>모리스 말은  단정적이었다.  실무자인 모리스는 전쟁 물자와 자금을 대느라 속이 타들어 가는 상황에서 강력한 연합 정부의 필요성을 궤변 없이 설파했다.   당시로서 그 만큼 자신있게 소극적인 주정부나 의원들을 규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p>
<p>펜주 필라 최고 부자였던  모리스는  그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대륙회의와 대륙군에 쏟아 붓고 있었다.  &#8216;독립전쟁의 금융가&#8217;로 불리는 그는 대륙회의 재정이 완전히 파탄 났을 때, 개인 자산을 털어 국가를 구한 이 가운데  한명이었다.  국가 신용이 바닥나자 자신의 개인 신용으로 보증을 서서 대륙군에 식량과 탄약을 댔다. 그는 요크타운 전투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지막 사재 까지  쏟아부었고, 훗날 전쟁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한 개인 사업 실패로 채무자 감옥에 갇히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공공을 위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이다.</p>
<p>대륙회의  위원회가 너무 느리고  비효율이 극에 달하자, 대륙회의 의원이 아닌 단독 장관(Secretary/Superintendent) 체제로 행정 부서를 개편했을 때 그는 재무장관인 재무총감(Superintendent of Finance)을 맡아 파산 직전의 재정을 회생 시켰고 구조조정 및 대륙화폐 정리를 단행하는  실력을 보이기도 했던 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80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8/bnM_5Ls3BmDWYDNgKllvPYZhktda8zyzty-4I3gpv4_-Q6Awj94um5i9bvuTRHW3UjxEPA-kKbgY2QuHcM_dG2HN3ggrq76HTVmbWseoTIgQStQOzD_1g5Mq8HDO2wzT29xRiUvwediYqw-dGIyL_w.webp" alt="" width="778" height="487" /></p>
<p>많은 이들이 연합국가 창설은 전쟁 승리후 본격 시작 됐다고 여기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독립선언을 하면서 부터 그 주체, 새로운 정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p>
<p>대륙회의 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고 국제사회에서 승인받기 어렵다는 인식 아래 &#8220;하나의 연합된 국가&#8221;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제안은 1776년 6월 7일,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 헨리 리가 제2차 대륙회의에서 공식 안건으로 발의했다. 이를 역사적으로 &#8216;리 결의안(Lee Resolution)&#8217;이라고 부른다.<br />
매사추세츠 대표 존 애덤스가 이 안건에 재청(Seconded)하며 적극 지원했다. 리 결의안과 아담스의 동의안은 단순히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 수립을 위한 3가지 필수 과제를 동시에 제시했다.<br />
독립 선언과 외국과의 동맹을 맺기 위한 가장 실효성 있는 조치, 그리고 연합 정부 수립, 이 세가지 사안  이었다.<br />
이처럼 연합정부 수립  얘기는 초기  부터 나왔던 것이다.  아담스는 &#8220;각 주들의 검토와 승인을 위해 연합 계획(Plan of Confederation)을 조속히 작성해 배부해야한다.&#8221; 고 첫날 회의부터 강조 했다.</p>
<p>6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대륙회의 전체위원회(Committee of the Whole)에서는 이 결의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신중파들은 즉각적인 독립과 국가 선포에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등 일부 주의 대표들은 아직 본국(각 주 의회)으로부터 독립이나 새로운 연합체 창설에 동의해도 좋다는 공식 승인 지침을 받지 못한 상태라며 미온적이었다.<br />
신중파들은 &#8220;집을 짓기도 전에 지붕부터 얹을 수 없다&#8221;면서 독립 선언이야 그렇다 지만  연합체 결성 선언을 하기 전에 &#8220;외국(프랑스 등)과의 동맹 약속을 확실히 받아내고, 각 주를 하나로 묶을 헌법 체계부터 완성해야 한다&#8221;고 주장했다.<br />
반면 존 애덤스 등 강경파는 독립 선언과 연합체 결성이 선행되어야 외국도 동맹 협상에 응할 것이라고 맞섰다.</p>
<p>대륙회의는 논란 끝에 표결을 3주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휴회 기간 동안 3가지 과제를 전담할 3개 위원회를 동시에 구성하여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독립선언서 작성 위원회와 외교 조약 모범안 작성 위원회, 연합 정부 체제(헌법) 작성 위원회가 그것이다.</p>
<p>많은 이들이 선언서 작성 위원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나머지 두 위원회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외교 조약 위원회는 벤저민 프랭클린 중심으로 꾸려가기로 했고  정부 체제 적성위는 신중파였던 존 딕킨슨을 위원장으로 해서 각 주에서 1명씩 선출된 13인 위원회로 꾸려 가기로 했다.</p>
<p>독립선언서 작성위원회의 활동과 실적은 이미 전한 바 있기에 또 언급 하지 않는다. 존 딕킨슨 위원회는 1776년 7월 12일 미국 최초의 성문 헌법안 이라고 할 수 있는  &#8216;연합조항(Articles of Confederation)&#8217; 초안을 제출했다. 매우 발빠른 행보였다. (실은 각주에서 대표를 보내지 않아 존 디킨스 등 몇 사람의 견해 였다.)<br />
디킨슨 초안의 핵심 내용은 강력한 중앙정부(연방)를 구성해 많은  권한 부여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3권 분립이 이루지지 않았다. 초안은 대륙회의(연방)에 전쟁 선포 및 평화 협정, 외교 조약 체결, 통화 발행, 군대 창설, 주 간의 국경 분쟁 중재 권한을 독점적으로 부여하고 있었다. 추후 논의의 근간이 되기에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본다.</p>
<p>독자적인 사법부나 행정부 없이, 각 주에서 파견한 대표들로 구성된 단원제 대륙회의가 입법 및 국가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딘킨슨 초안은 대륙회의가 휴회 중일 때 국정을 운영하고 대륙회의의 결정 사항을 집행할 상설 행정위원회(Council of State)의 설치를 제안했다. 행정부인셈인데 이 상설 행정기구를  대륙회의 산하에 두고 있었다.<br />
이행정  위원회는 각 주에서 1명씩 선출된 대표(총 13명)로 구성되도록 했다.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행정권을 가진  국가 수반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회의 의장 (President of Congress)의 권한이 막강했다.  대륙회의 내부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문서에 서명하는 중재자 역할을 부여했다.  의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인물도 3년 기간 중 1년을 초과하여 의장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임기 제한을 두었다.</p>
<p>경제 분야 에서는 각 주가 주장하던 미개척 서부 영토의 소유권을 제한하고, 이를 연방정부 관할의 공공 토지로 지정하여 신규 주 창설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연방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각 주의 전체 인구수(노예 포함)에 비례하여 할당하도록 제안했다.  개별 주의 독자적인 외교나 무역 협정을 금지하고, 연방 법률이 각 주의 법보다 우선할 수 있는 여지를 두었다.</p>
<p>의결 방식은 각 주마다 1표의 투표권을 부여하되, 중요 사안(전쟁, 조약, 자금 조달 등)은 13개 중 9개 주의 찬성을 얻어야 결정되도록 했다.</p>
<p>그러나 대륙회의 내부의 갈등과 전시 상황 때문에 이 연합 안건은 계속 수정되다가 &#8220;각 주는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유지한다&#8221;는 점이 강조된 약한 형태의 연합정부안으로 바뀌어 1777년 11월에야 최종 통과된다.</p>
<p>77년 11월에야 수정안이 대륙회의를 통과했지만 그후에도  서부 영토권을 둘러싼 주간 갈등으로 인해 계속 실행이 미뤄지다가 1781년 3월(메릴랜드주의 최종 비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정식 연합 정부가 출범에 착수하게 되었다.</p>
<p>결국 대륙회의 시절 체결된 이 느슨한 &#8216;연합조항&#8217; 체제 역시 전쟁 수행 및 국정 운영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훗날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를 통해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U.S. Constitution)과 강력한 연방정부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p>
<p>76년 7월말 당시에도 윤곽은 나와 있는 셈이었다.</p>
<p>&#8220;연합 정부 구성 논의는 어느 정도 진전 돼가고 있습니까?&#8221;<br />
회의 내 사정에 아직은 어두운 찰스 캐럴이 물었다.</p>
<p>&#8220;지지부진 입니다. 딕킨슨안에 대해 반론이 많아요.&#8221;</p>
<p>&#8220;그래요, 삼권 분립이야 말로 공화국의 근간인데 딕킨슨 초안에는  그게 완전히 빠져 있어요.&#8221;</p>
<p>&#8220;디킨슨이 초안을 제출 하기전에 나에게 가져 왔었어요, 그때 나도 그점을 지적했는데 딕킨슨은 어차피 초안이니 논의를 촉발하는 것으로 충분 하다고 하더군.&#8221;</p>
<p>벤자민이 나섰다. 존 딕킨스 역시 필라 출신이었다.  딕킨스는 벤자민 노사가  자신과 같은 신중파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p>
<p>&#8220;행정부가 번듯해야 합니다. 대륙의 산하 행정위원회로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읍니다. 대륙회의 의장이 아니라 행정 수반이 나라의 대표자가 돼서 나라 일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대륙회의은 의회, 입법부의 역할을 맡으면 됩니다. &#8221;</p>
<p>&#8220;맞는 말일세, 모리스 자네 말대로 각 주(State)들이 각자 잇속만 차리는 이 무정부 상태를 끝내려면 하나의 집(행정부)을 지어야 하네. 하지만 고려 할게 있어요. 그 집의 주인을 한 명만 두면, 결국 우리는 영국 왕 자리를 없애고 우리 손으로 새로운 왕을 만드는 꼴이 될 걸세. 수장은 그저 위원회의 &#8220;공동의장&#8221; 혹은 &#8216;의장(President)&#8217; 정도로 족하지, 결코 &#8216;군주&#8217;나 &#8216;각하&#8217;가 되어서는 안 되네.&#8221;</p>
<p>&#8220;연합 정부 구성이야 말로 박사님 지론 아니십니까? 20년 전에 벌써 그 수장을 제네럴 프레지던트라고 명명 하셨지요?&#8221;<br />
&#8220;엣날 얘기는 쓸데 없이&#8230;그때는 영국왕이 임명하는 자리였기에 그랬어요,  지금은 달라요.&#8221;</p>
<p>프랭클린은 이미 1754년 올버니 회의(Albany Congress) 때부터 &#8217;13개 주 연합체(Albany Plan of Union)&#8217;를 주장했던 연합 정부의 원조 설계자였다.  천하의 마당발 만물박사 그의 그림자는 독립국면 곳곳에 새겨져 있다.</p>
<p>1754년 올버니 회의(Albany Congress)는 북미의 7개 주 식민지 대표들과 원주민들이 결성했던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  지도자들이 뉴욕주 올버니에 모여 개최한 역사적인 회의다.  독립 전쟁 이전 식민지들이 최초로 연합 연대를 도모하고 중앙 정부의 기틀을 논의한 핵심적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이다.<br />
1750년대 초 오하이오 계곡권의 영토 소유권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 영국 왕실은 식민 제 주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식민지 간 방어 체계를 공동 구축하고, 전통적 우방이었던 이로쿼이 연맹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코네티컷,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등 7개 식민지가 올바니로  대표단을 파견 했다.  버지니아 등 일부 주요 식민지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식민지 간 공식 협의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p>
<p>이 회의에서 펜주의 벤저민 프랭클린과 매사추세츠의 토머스 허친슨 등이 주도해 올버니 연합안이 제시됐다.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 1인과 각 식민지 의회에서 선출한 대의원들로 구성된 연합 정부 수립안이었다.<br />
인디언과의 조약 체결, 영토 확장 및 관리, 방어용 군대 창설 및 이를 위한 세금 부과 권한을 연합 정부에 부여하고자 했다.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연합 총독을 &lt; Govrernor General&gt; 혹은 &lt; President-General&gt;로 명명했고 식민지 의회에서 선출한 대의원회를 &lt;Grand Council&gt;로 부르자고 했다.</p>
<p>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이 연합안을 채택했으나, 그런데 각 식민지 의회와 영국 국왕 모두 이를 최종 거부했다. 식민지 의회들은 자치권과 과세권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고 영국 국왕은 식민지들이 단결하여 중앙 권력에 저항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올버니 연합안은 비록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20년 뒤  대륙회의와 독립 선언, 그리고 연방헌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미국 연방주의(Federalism)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p>
<p>강력한 중앙 행정부의 필요성에는 100% 동의했지만 행정부 수장에 대한 프랭클린의 생각은 매우 신중했다. 단일 수장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훗날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서도 그는 1인 의장(대통령) 대신 &#8216;3~5인으로 구성된 행정위원회(Executive Council)&#8217; 형태를 선호했다.<br />
&#8220;한 사람에게 권력을 주면 그가 아무리 워싱턴 같은 성인(聖人)이라 해도, 결국 왕의 욕망을 품게 된다&#8221;는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프랭클린은 회의 에서 &#8216;워싱턴 같은 굿맨(Good man)&#8217;이라는 표현을 사용 했다.<br />
프랭클린은 왕정의 허례허식을 가장 혐오한  실용주의자이자 공화파였다.  존 애덤스 등이 수장의 호칭을 &#8216;전하(His Highness)&#8217; 혹은 각하 등으로 부르자고 했을 때 맹렬히 비판했다.</p>
<p>정찬 자리의 화제는 새로 구성될 연합정부 수반의 명칭으로 좁혀 졌다.</p>
<p>(계속)</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8"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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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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