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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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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미주 뉴욕 뉴스 &#38; 커뮤니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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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소설 &#8211; hiny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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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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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20 Jul 2026 14:56:44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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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1 안동일 작 그날 시티 터반의 음식은 최상급이었고 마데이라는 달았다. 술이 몇 순배 더 돌았고 벤자민 프랭클린의 대륙회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물 품평이 계속됐다. 대륙회의 내 완고한 청교도 대표들과 눈치 보던 성공회(영국 국교회) 인사들의 상황을 얘기하려니 그랬다. 벤자민 프랭클린으로서는 찰스 캐럴에게 대륙회의 내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 캐럴과 대륙회의 1</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그날 시티 터반의 음식은 최상급이었고 마데이라는 달았다. 술이 몇 순배 더 돌았고 벤자민 프랭클린의 대륙회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물 품평이 계속됐다. 대륙회의 내 완고한 청교도 대표들과 눈치 보던 성공회(영국 국교회) 인사들의 상황을 얘기하려니 그랬다. 벤자민 프랭클린으로서는 찰스 캐럴에게 대륙회의 내의 복잡한 사정과 분위기를 전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은 겉으로는 사람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듯했지만, 뒷부분에서는 꼭 그의 장점과 해낸 일을 강조했다. 벤자민 노인 특유의 &#8216;앞에서 까고 뒤에서 채워주는&#8217; 노련한 처세술이 담긴 화법에, 막 대륙회의에 입성한 찰스는 짐짓 맞장구치며 경청했다.</p>
<p>&#8220;핸콕 그 친구, 옷에 금박 장식 안 하면 외출도 안 하는 허풍쟁이에 영국 세관원 속여먹던 밀수꾼인 건 맞네. 하지만 말이야&#8230; 그 친구가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마시는 이 좋은 포도주도 없었을 테고, 영국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조직도 없었을 걸세. 나이는 젊지만 의장 역할도 꽤 잘하고 있지 않은가?&#8221;</p>
<p>이런 식이었다. 벤자민 노인의 말대로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은 뉴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밀수꾼(당시 기준으로는 &#8216;자유무역업자&#8217;)이자 보스턴 최고의 자산가였다. 그가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의장이 된 데에는 결정적인 배경이 있었으니, 바로 뉴잉글랜드 독립파의 맹주 새뮤얼 아담스와 그의 사촌 동생 존 아담스의 신임이었다.</p>
<p>핸콕은 새뮤얼 아담스가 이끄는 반항 조직 &#8216;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8217;과 영국의 감시를 피하는 &#8216;통신위원회&#8217;의 유력한 자금줄이었다. 그는 돈을 쓸 줄 아는 자산가였기에 신망도 있었다. 영국 해군이 마데이라를 잔뜩 실은 그의 밀수선 &#8216;리버티호&#8217;를 압수했을 때 보스턴 전체가 들끓었고, 결국 이 일은 보스턴 차 사건과 함께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다.</p>
<p>원래 제2차 대륙회의의 의장은 버지니아 출신의 페이튼 랜돌프(Peyton Randolph)였다. 하지만 그가 버지니아 하원의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공석이 생겼다.</p>
<p>당시 대륙회의에는 남부 주(버지니아 등)와 북부 주(매사추세츠 등) 간의 미묘한 지역 갈등과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 대륙회의는 남북 지역 간의 단합과 결속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계산하에 핸콕을 선출했다. 그의 나이(37년생으로 찰스와 동갑)와 정치적 경력이 미미하다는 지적이 내내 따라다녔지만, 그의 엄청난 재산과 그에 따른 타협적·온건적 성향은 급격한 혁명을 두려워하던 의회 내 보수파와 온건파들에게도 안정감을 주어 의장으로 추대되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p>
<p>&#8220;그런데 핸콕이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고 싶어 했다는 것, 박사님도 아십니까?&#8221;<br />
모리스가 나섰다.</p>
<p>&#8220;듣긴 했는데&#8230; 아니야, 남들이 지어내는 말이지. 자신이 무슨 군사적 경험이 있다고 그 자리를 탐내겠나?&#8221;</p>
<p>그러나 모리스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구체적이었다.<br />
존 핸콕은 보스턴 민병대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전력을 들어 군사적 역할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정치적 보스인 아담스 형제들에게 넌지시 이를 알리기도 했다.</p>
<p>1775년 6월, 대륙회의에서 총사령관 지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핸콕은 자신이 지명될 것으로 믿고 의장석에 앉아 자신감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존 아담스가 발언권을 얻어 완벽한 인물의 조건을 나열한 뒤 조지 워싱턴을 전격 지명하자, 핸콕의 표정은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굳어졌다. 무기명 거수투표에서 조지 워싱턴이 반대표 없이 총사령관에 선출되면서 핸콕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그는 의장으로서 워싱턴의 임명장에 직접 서명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p>
<p>아담스 형제가 뉴잉글랜드 출신의 핸콕 대신 버지니아 출신의 워싱턴을 추천한 것은, 당시 독립 전쟁이 매사추세츠 등 북부만의 전쟁이 아닌 13개 식민지 전체의 연합된 투쟁임을 보여주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었다.</p>
<p>&#8220;그 일로 며칠간 아담스 형제와 말도 안 했다고 하던데요.&#8221;<br />
&#8220;그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겠지.&#8221;<br />
&#8220;지금은 옛 관계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워싱턴이 현장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풀었다더군요.&#8221;</p>
<p>그 무렵 프랭클린은 영국에 나가 있었기에 당시 대륙회의 내부 사정을 잘 몰랐다.</p>
<p>&#8220;아무튼 샘이 존 핸콕을 끌어들인 일이야말로 참 잘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 우마차 같은 인물이 그런 수완과 포용력이 있단 말이야. 결국 대륙회의 의장 자리도 아담스 형제가 나서서 올려준 것 아닌가?&#8221;</p>
<p>노인이 말하는 &#8216;샘&#8217;은 새뮤얼 아담스를 뜻했다. 그런데 벤자민은 새뮤얼이 &#8216;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신앙만이 참된 진리&#8217;라고 믿는 골수 청교도라고 알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8216;교황 화형식(Pope Day)&#8217; 행사가 자유의 아들들이 주도한 이벤트였기 때문인 듯싶었다. 이는 찰스가 직접 겪은 새뮤얼의 모습과는 달랐다.</p>
<p>식사 전에도 프랭클린은 붉은 펜의 무용담을 풀면서 로저 셔먼과 새뮤얼 아담스를 청교도 대표 거물로 지칭하고, 그들의 완고함을 성토했었다. 노인의 이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찰스는 자신과 새뮤얼 아담스와의 일화를 소개하기로 했다.</p>
<p>&#8220;박사님, 제가 아는 새뮤얼 아담스 선생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마차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그는 도리어 자신의 글은 우마차 같고 제 글은 체이서(Chaser) 같다며, 저를 &#8216;가제트의 형제&#8217;라 부르고 매우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매우 열린 태도를 보였고요.&#8221;</p>
<p>&#8220;그래?&#8221;</p>
<p>찰스는 새뮤얼 아담스가 초기에 자신이 머물던 이곳 시티 터반의 &#8216;캐럴 사랑방&#8217;을 자주 찾는 단골이었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특히 대륙회의 원목으로 성공회 신부를 임명할 때의 비화를 들려주었다.</p>
<p>&#8220;주변의 완고한 청교도 의원들이 &#8216;어떻게 우리를 핍박하던 영국의 국교회(성공회) 목사를 대륙회의 원목으로 세우느냐&#8217;며 거칠게 반대했었지요. 그때 새뮤얼 아담스가 나서서 &#8216;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이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성공회 신부라도 상관없다&#8217;고 결론을 내어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8221;</p>
<p>&#8220;그랬었지요. 저도 그때 놀랐습니다. 오늘 박사님이 기도하자고 하신 것만큼이나요&#8230;&#8221;<br />
모리스가 거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찰스가 새뮤얼에게 멋진 턱시도와 마차를 선물했던 이야기까지 꺼냈다. 찰스는 손사래를 치며 아버지 &#8216;캐럴 옹(翁)&#8217;의 노련한 조언에 따라 한 일일 뿐이라고 덧붙였다.</p>
<p>&#8220;오, 찰스&#8230; 자네가 그 투박한 우마차에 벌써 비단 시트를 깔아두었었군! 어쩐지 본회의에서 그 완고한 청교도파들이 &#8216;자연의 신&#8217;이라는 문구를 보고도 조용히 넘어가 주더라니. 자네의 막후 체이서 마차가 진작에 길을 닦아놓았던 게야.&#8221;</p>
<p>새뮤얼 아담스는 늘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서,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에 참석하러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주변 지인들이 민망해하며 새 옷과 마차를 선물해 주었다는 실제 기록이 있다. 그 막후의 손길이 바로 캐럴 가문의 배려였던 것이다.</p>
<p>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찰스 캐럴이 메릴랜드의 독립 논쟁 당시 &#8216;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8217;이라는 필명으로 활약했고, 새뮤얼 아담스 역시 보스턴의 언론(Gazette)을 장악했던 대표 논객이었으니, 두 사람이 서로를 &#8220;가제트 출신 형제(Gazette Brothers)&#8221;라 부르며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역사적 개연성을 품고 있다.</p>
<p>거칠고 투박하지만 선동적이었던 새뮤얼 아담스의 글을 &#8216;우마차 소리&#8217;에 비유하고, 유럽 최고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돌아온 찰스 캐럴의 정갈하고 품격 있는 문장을 &#8216;최고급 체이서 마차 소리&#8217;로 대비해 주는 이 한마디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단번에 요약해 준다.</p>
<p>제퍼슨이 나서서 자신의 경험을 보탰다.<br />
&#8220;이번 본회의에서 완고한 청교도들이 선언서의 &#8216;자연의 신&#8217; 대목을 빼버리지 않을까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습니다. 회의 당시 몇몇 사람이 &#8216;자연의 신?&#8217; 하고 의아한 눈치를 보였는데, 그때 새뮤얼 아담스 선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더군요. 그러고는 그 대목이 조용히 넘어갔습니다.&#8221;</p>
<p>&#8220;그렇습니다, 제퍼슨 선생. 새뮤얼 아담스 선생은 생각보다 속이 깊은 분입니다. 성공회 뒤셰 신부를 초대 원목으로 주저 없이 세울 때도 그랬지만, 교황 화형식에 대해서도 차마 영국 왕을 화형시킬 수 없어 대신 교황을 다루는 것이라며 제게 이해를 구하더군요.&#8221;</p>
<p>프랭클린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더 했다.<br />
&#8220;오, 찰스 몽셰르! 자네가 미리 아담스의 마음을 넓혀놓지 않았다면, 내 붉은 펜도, 토머스의 초안도 저 완고한 청교도들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을 걸세. 이번 독립선언서의 숨은 공신은 바로 자네야!&#8221;</p>
<p>&nbsp;</p>
<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387"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Kphu8dhHD3mR8ByhebIdUExRrY5z3Pe9Xg7dHHAUCjE1E3Z0xIyUhMbj4EnRGTYQNkGs6y1jAs2GvB0APbcm-g.webp" alt="" width="543" height="450" /></p>
<p>&nbsp;</p>
<p>이어 워싱턴에 대한 품평이 이어졌다.<br />
&#8220;제복만 밝히는 백만장자 같다고? 글쎄, 그 친구가 버지니아 농장 다 팽개치고 월급도 안 받으면서 군대를 이끌겠다고 나선 장본인이네. 그 훤칠한 풍채 하나만으로도 오합지졸 군인들이 기가 죽어 열을 맞추니, 장군감으로는 그만한 인물이 없지. 평소 자주 입는 제복은 자신의 결의를 나타내는 상징 아니겠는가? 두고 보시게, 사령관을 아주 잘 뽑았으니&#8230;&#8221;</p>
<p>그 무렵 워싱턴은 사석에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엄청난 재산과 결혼, 그리고 &#8216;과시욕&#8217;이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입소문은 그런 곳으로 쏠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버지니아 최고의 부유한 과부였던 마사(Martha)와 결혼해 벼락부자가 되었고, 대륙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번쩍이는 버지니아 민병대 제복을 풀 장착하고 나타나 몇몇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키가 190cm에 달해 어디서나 눈에 띄었지만, 의외로 말주변이 없고 사석에서는 다소 고집스럽고 둔하다는 평도 있었다.</p>
<p>&#8220;그런데 어떻게 아담스 형제가 남북 안배였다고는 하지만, 존 리나 커크를 제치고 잘 모르는 워싱턴을 추천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해. 두 사람, 원래 친했나?&#8221;<br />
워싱턴과 동향인 제퍼슨을 쳐다보며 벤자민이 물었다.</p>
<p>&#8220;예, 두 분 매우 절친하게 지내셨습니다. 여기 찰스 경하고 메리 성당에 다녀오고, 이곳에서 마데이라를 상자째 해치우며 정찬을 나눈 다음 부쩍 친해졌지요.&#8221;</p>
<p>제퍼슨은 자신이 우연히 합류했던 1775년 5월 시티 터반에서의 &#8216;4인 정찬&#8217;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내들은 진한 술자리를 같이하고 나면 지기가 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날 찰스는 워싱턴을 장군으로 구두 진급시켰고, 워싱턴도 못 이기는 체 &#8220;저를 전쟁터로 몰아세우시는군요. 가라면 가야죠&#8221; 하지 않았던가.</p>
<p>&#8220;와, 역사의 현장마다 우리 찰스 몽셰르의 입김이 서려 있구먼 그래!&#8221;<br />
&#8220;그 또한 제 아버지께서 조언하신 일입니다.&#8221;<br />
&#8220;내 한 번도 뵌 적은 없고 이야기만 들었지만, 자네 춘부장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신 어른이야.&#8221;<br />
&#8220;아버지는 박사님을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예전에 필라델피아 강연에서도 뵌 적이 있다고 하시고, 이번에도 박사님을 아버지처럼 잘 따르고 모시라고 하셨습니다.&#8221;<br />
&#8220;허허, 찰스 경께서 나에게 보배 같은 아들을 주시는구먼. 감사하다고 전해주게.&#8221;</p>
<p>지난번 몬트리올 여행 때도 찰스 옹은 아들과 조카에게 노인을 각별히 잘 봉양하라고 당부했었다. 아나폴리스의 찰스 옹은 1702년생이고, 벤자민은 1706년생으로 거의 동년배였다.</p>
<p>세간에는 존 아담스가 뉴잉글랜드 지역(보스턴)에 편중된 독립 전쟁을 &#8216;미국 전체의 전쟁&#8217;으로 확장하고, 식민지 중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버지니아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버지니아 출신인 워싱턴을 적극적으로 총사령관에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군사적 경력으로 보면 장군급 인사가 몇 명 있었음에도 영관급에 불과했던 워싱턴이 지목된 데에는, 찰스 가문의 심모원려가 개입해 있었던 것이다.</p>
<p>이어 존 아담스(John Adams)에 대한 뒷담화가 이어졌다. 훗날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아담스는 자타공인 &#8216;대륙회의의 싸움닭&#8217;으로 통했다. 특유의 고답성과 독설로 동료들을 몰아세우곤 했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남의 말을 안 듣고, 모든 일에 감정적으로 화를 잘 내서 &#8220;심술궂은 잔소리꾼&#8221;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똑똑하기는 엄청나게 똑똑해서 법리적으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지만, 인간관계는 빵점이라고 소문나 있었다.</p>
<p>&#8220;아담스 그 친구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네.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하지만 말이야, 모두가 영국 왕 눈치 보며 벌벌 떨 때, 홀로 총대를 메고 매일 밤낮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우리를 깨운 건 바로 그 독종이었다네. 그 친구의 그 지독한 고집이 없었다면 우린 아직도 런던에 세금 바치고 있었을 걸세.&#8221;</p>
<p>여기서도 찰스가 나서야 했다. 그가 사귀어 본 존 아담스는 막무가내 고집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p>
<p>&#8220;자신이 잘못한 것은 즉각 인정하고, 겉으로는 도도한 듯하지만 배려심이 깊은 양질의 인물입니다. 생각보다 화도 많이 내지 않고요.&#8221;<br />
&#8220;그 잔소리꾼도 몽셰르 앞에서는 귀여운 고양이가 되는 모양이구먼. 이 나라와 우리 모두를 위해 집사 노릇 잘해주게나.&#8221;</p>
<p>독한 마데이라 술이 한 순배 돌았고, 제퍼슨이 빙긋이 웃으며 프랭클린 박사에게 물었다.<br />
&#8220;박사님, 저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8221;</p>
<p>모두들 박사의 입을 주시했다. 어떤 독설이 나오려나.</p>
<p>&#8220;여보게들, 우리 제퍼슨 군이 회의장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고 비웃지 말게나. 웅변은 개나 소나 다 하지만, 이 친구처럼 사람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문장을 쓰는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이 대륙에 없네. 입은 닫고 있어도, 그가 쥔 깃펜 끝에서 영국의 왕관을 부술 천둥이 치고 있지 않은가?&#8221;</p>
<p>토머스 제퍼슨은 대륙회의 기간 동안 회의장에서 육성으로 발언한 적이 거의 없다. 심각한 무대공포증이나 대인기피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게다가 남부의 대지주이면서 &#8220;모든 인간은 평등하다&#8221;고 쓰고 뒤로는 노예를 거느리는 위선자라는 비판도 사석에서는 단골 메뉴였다.</p>
<p>&#8220;떠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못 하지만 자네의 큰 장점일세. 자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든. 단, 교만에 빠지지는 말게나. 겸손이야말로 신이 자네들같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마지막 당부니 말일세. 우리 신부님만 빼고&#8230;&#8221;</p>
<p>좌중 모두에게 던진 노익장의 간절한 당부였다. 노인은 특히 밥 모리스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p>
<p>대륙회의 보수·온건파 인사들에 대한 품평도 이어졌다.</p>
<p>먼저 벤자민이 유난히 친했던 후원자이자 추종자인 존 디킨슨(John Dickinson)이었다. 그는 &#8216;대륙회의 최고의 펜, 그러나 마지막까지 깃펜을 꺾은 사내&#8217;로 알려진 인물이다.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대지주이자 변호사로, 글을 매우 잘 써서 &#8216;식민지 농부의 편지&#8217;라는 필명으로 영국의 부당한 세금을 논리적으로 비판해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대륙회의가 독립으로 치닫자, 가장 격렬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인물이기도 했다. 영국 왕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청하는 &#8216;올리브 가지 청원(Olive Branch Petition)&#8217;을 주도하여 존 아담스 등 과격파로부터 &#8220;우유부단한 겁쟁이&#8221;, &#8220;영국 왕의 주구&#8221;라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p>
<p>&#8220;디킨슨 그 친구가 영국 왕에게 보낸 청원서를 보며 아담스는 속이 뒤집어졌겠지만&#8230; 사실 디킨슨만큼 법을 잘 알고 재산이 많은 사람 처지에서는 당장 전쟁이 나면 잃을 게 너무 많지 않겠나?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이 대륙이 피바다가 되는 걸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선비라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겠다며 대륙회의를 나가버렸지만, 전쟁이 본격화되면 총을 들고 나갈 뼈속까지 애국자가 맞네.&#8221;<br />
이 말은 후일 사실로 증명된다.</p>
<p>다음은 &#8216;뉴욕 최고 명문의 차가운 도련님&#8217; 존 제이(John Jay)였다.<br />
훗날 미국 최초의 대법원장이 되는 뉴욕 출신의 엘리트. 프랑스 위그노 혈통의 어마어마한 부잣집 가문 출신으로, 대륙회의에서 가장 세련되고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는 청년이었다. 철저한 법치주의자라 군중 폭동(보스턴 차 사건 같은)을 끔찍이 싫어했고, 어떻게든 대영제국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식민지의 권리를 인정받는 자치 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했다. 사석에서는 &#8220;차갑고 거만해서 정이 안 간다&#8221;는 평이 많았다.</p>
<p>&#8220;제이 그 젊은 친구는 얼음물로 세수를 하는지 통 감정을 드러내지 않더군. 뉴욕 부자들의 이권을 지키려고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온건론을 펴는 거지만&#8230; 저 친구의 그 차갑고 치밀한 법리적 계산이 없으면, 영국과의 외교 협상에서 우리는 뼈도 못 추릴 걸세. 나라를 세우는 데는 아담스 같은 불덩이도 필요하지만, 제이 같은 얼음송곳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8221;</p>
<p>다음은 &#8216;결국 선을 넘어버린 비운의 보수파 수장&#8217; 조셉 갈로웨이(Joseph Galloway).<br />
그는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의장이자 벤자민 프랭클린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다. 그는 영국 의회와 식민지 의회가 연합하는 &#8216;갈로웨이 연합안(Plan of Union)&#8217;을 제출해 온건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단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후 대륙회의가 완전히 독립(제2차)으로 기울자 &#8220;이건 반역이다&#8221;라며 영국 편(왕당파)으로 넘어가 버렸고, 훗날 런던으로 망명했다.</p>
<p>벤자민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br />
&#8220;갈로웨이&#8230; 나와 평생을 함께 정치를 했던 똑똑한 친구였지. 영국과 맞서되 제국을 깨뜨리지 말자는 그 친구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네. 하지만 시대의 파도가 너무 빨랐던 게지. 판이 흔들릴 때 끝까지 예전 질서만 고집하다가 결국 조국을 등진 모양이 되었으니&#8230; 참으로 안타까운 지성일세.&#8221;</p>
<p>다음은 뉴저지 프린스턴의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목사였다.<br />
뉴저지 대표이자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었던 존 위더스푼 목사는 장로교단 최고 지도자였지만, 다른 청교도들과 달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공부한 열린 지성이었다. 종교적 도그마보다 합리적 이성과 자유를 중시했기에, 제퍼슨의 종교 자유 사상을 지지해 주는 남부와 중부파의 든든한 우군이었다.</p>
<p>&#8220;위더스푼 총장이 대륙회의에 가세한 것은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셈일세. 30여 년 전쯤 내가 &#8216;빅 스피커&#8217; 조지 휫필드 목사와 신나게 어울려 다닐 무렵, 영국 런던에서 신학교 학생이었던 청년 위더스푼을 만났지. 아주 영민하고 바람직한 목사 지망생 청년이었어.&#8221;</p>
<p>위더스푼 목사에 대한 품평은 벤자민이 자신과의 개인적 인연을 소개하느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개신교가 왜, 그리고 어떻게 독립에 기여했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사례이기에 다음 호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위더스푼 목사가 미국 장로교의 초빙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것은 몇 년 전인 1768년의 일이다. 그때 마당발 벤자민 프랭클린은 장로회 인사들에게 그를 적극 추천했었다. 아무튼 몇 년 사이에 이 영국 지성인 학자는 신대륙에서 열렬한 독립지사가 되었던 것이다.</p>
<p>(계속)</p>
<p>&nbsp;</p>
<p>&nbsp;</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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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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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13 Jul 2026 03:21:55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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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데이즘과 예정설 그리고 화체설 3  안동일 작 찰스 캐럴이 토마스 제퍼슨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 채택의  뒷 얘기를 나눈 것은  향리 아나폴리스에 내려가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정식 대륙회의 대의원 직을 수락하고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7월 하순의 일 이었다. 정확히는 7월 22일 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주선해서 이루어진 시티터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데이즘과 예정설 그리고 화체설 3</h4>
<p><strong> 안동일 작</strong></p>
<p>찰스 캐럴이 토마스 제퍼슨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 채택의  뒷 얘기를 나눈 것은  향리 아나폴리스에 내려가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정식 대륙회의 대의원 직을 수락하고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7월 하순의 일 이었다.<br />
정확히는 7월 22일 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주선해서 이루어진 시티터반 에서의 작은 정찬 자리에서 였다. 벤자민은 진작 부터 존 캐럴 신부를 포함하는 캐럴 형제에게 저녁을 대접 하고 싶다고 채근 했었는데 그때야 시간이 맞았던 것이다.<br />
벤자민  노인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 하겠다고 했지만 캐럴 형제가 번거롭게 그럴 필요 있냐며 극구 사양해 시티 터반에서의 저녁으로 낙착됐고 벤자민은 찰스가 정식 대의원이 된 것을 여럿이 축하해야 한다면서 여러 사람을 부르려 했으나 캐럴 형제가 극구 말려 제퍼슨 과 벤자민의 오른팔 격인 밥 모리스가 참석하는 선에서 절충을 봤다.</p>
<p>캐럴 형제가 시티터반의 중형 파티룸 로즈 홀에 들어 섰을 때 벤자민과 제퍼슨이 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br />
“일찍들 나오셨습니다. “<br />
“귀한 손님 모시는데 일찍 와 있어야지요.”<br />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선  벤자민 프랭클린은 특별히 존 신부를 강하게 포옹해 반가움을 표시했다. 몬트리올에서 돌아온 이래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br />
존 신부도 노인의 넓은 등을 꼭 안았다.<br />
“통풍은 좀 어떠 십니까?”<br />
“신부님 덕에 많이 좋아 졌습니다. 몬트리올서 구해 주신 제수이트 나무가 특효 약 입디다.”<br />
서로 간의 반가운 인사가 끝나고 캐럴 형제가 테이블에 앉았다. 존 신부와 제퍼슨도 초면은 아니었다.</p>
<p>테이블 위에는 서류 들이 여러 장 펼쳐져 있었다. 독립 선언서들 이었다.<br />
인쇄본도 있었고 필사본도 몇 장있었다. 필사본은 완성 본이 아니라 여러 글씨체로 앞부분만 씌어 있었다.<br />
“서기국의 티모시가 어떤 글씨체가 좋겠냐고 해서 살펴보고 있던 중 이었소.”<br />
대룩회의 에서 서명용 양피지에 정서를 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역사적인 문건이기에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br />
찰스는 인쇄본, 실물 선언서를 주 의회에서 보았지만 존 신부는  처음보는 것 이었다. 그는 신문으로만 선언서를 읽었다. 지금 같으면 신문에 인쇄본의 사진을 실었겠지만 당시는 사진이 나오기 전이었다.<br />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br />
“이걸로 보시오 신부님”<br />
벤자민이 각지의 의회로 송부된 인쇄본을 건넸다. 인쇄본은 한장으로 돼 있었다.<br />
“다시 봐도 아주 좋습니다. 정말 명문장입니다. 내용도 그렇고… 제퍼슨 선생 역시 대단하십니다.”<br />
선언서를 단숨에 읽은 존 신부가 말했다.<br />
“ 다 박사님과 캐럴경이 도와 주신 덕분입니다.”<br />
의외로 제퍼슨은 겸양의 언사를 던졌다.</p>
<p>그때 찰스가 이탤릭 체로 큼직하게 쓰여있는 견본용 필사본 서문의 ‘자연법과 자연의<br />
신’ (Laws of Nature and of Nature&#8217;s God) 이라는 문구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듯  짚어가며 말했다.</p>
<p>&#8220;제퍼슨 선생, 메릴랜드에서 활자화 된  이 문장을 보고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자연의 신 천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지요, 이제 이 문서 덕분에, 여기 존 신부님이 이 땅에서 당당하게 천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 되었습니다.&#8221;<br />
&#8220;캐럴 의원님이, 메릴랜드에서 민병대를 모으고 의회를 설득하는 대업을 치르는 동안, 저는 그날 하숙방에서 의원님이 제게 건냈던 만물과 우주에 깃든 신의 섭리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뜨거운 눈빛을 기억하며 펜을 움직였습니다. 그 문장에는 의원님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8221;</p>
<p>“제퍼슨 군에게 들었습니다. 우리 몽쉐르의 정문의 일침이 큰 힘이 되었다고…”  벤자민도 나섰다.<br />
“그나저나 찰스경 께서는 신문에 공연한 말씀 하셔 가지고 제가 계면쩍게 되었지 않습니까?”<br />
제퍼슨이 찰스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그도 메릴랜드 신문을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p>
<p>대륙회의에서 독립선언서가 채택되었을 당시, 메릴랜드 가제트(Maryland Gazette)를 비롯한 식민지 각 지역 신문들은 수일에서 수주일의 시차를 두고 전문(Full Text)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보도했다.<br />
당시 신문들은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됐다.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된 공식 전단지(Dunlap Broadside)를 전령이 말을 타고 각 지역으로 배포 한 뒤에야 신문사들이 활판을 새로 짜서 인쇄할 수 있었다. 아나폴리스에서 발행되던 메릴랜드 가제트의 경우, 7월 11일 자 신문에 선언서 전문을 실었고 볼티모어에 발행되던 저널( Maryland Journal)은 하루 앞선 10일 이를 보도 했다. .<br />
당시 신문들은 편집인의 주관적인 해설이나 감상적인 헤드라인을 크게 뽑기보다는, 대륙회의에서 넘어온 선언서  전체를 지면에 그대로 싣는 방식을 취했다. 대중이  직접 읽고 판단하게 하려는 의도였다<br />
하지만 메릴랜드의 가제트와 저널은 당대 신문 중 유일하게 이 선언서의 주 저자가 &#8216;토마스 제퍼슨&#8217;이라는 사실을 명시해 보도했다.  당시 대중은 이 선언서를 의회 공동의 저작물로 여겼고 제퍼슨의 존재는 1790년대가 되어서야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는 매우 이례적인 특종이었다.</p>
<p>7월 초에 발행된 신문들에는 대표들의 명단이 없었다. 대륙회의 의장인 존 핸콕과 서기 찰스 톰슨의 이름만 인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던럽은 말미에 인쇄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밝혔다. 자기 인쇄소의 홍보이기도 했지만 용기있는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인쇄물에는 세명의 이름만 있게된 셈이었다.  그런데도 메릴랜드의 신문들은 이들 세명 이외에도 초안 작성자로 토마스 제퍼슨을 거론했던 것이다. 찰스 캐럴을 인용 한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일이다. 신문들은 정확하게 실명을 명시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 신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대륙회의에 정통한 지역 유력 인사의 전언이라고 하면서 보도했기에 조금만 유추해 보면 누가 봐도 찰스라는 것을알 수 있었다. 특히 메릴랜드 저널은 10일 자 신문 1면에 전면으로  &#8220;아메리카 13개 연합주, 독립을 선언하다&#8221;라는 문구를 화려하고 장식적인 서체로 크게 인쇄하여 독립의 극적인 순간을 강조 했다.<br />
“두 신문 발행인 들이 너무도 강하게 몰아붙히는 바람에 실토 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p>
<p>벤자민이 또 나서 상황을 정리 했다.</p>
<p>“그게 신문 발행인들의 할 일이지, 잘한 일이오, 언제 알려져도 알려질 자랑스러운 일인데, 나나 대륙회의가 나서기도 뭣했는데 찰스 몽쉐르가 잘한 일이오”</p>
<p>찰스 캐럴은 열악한 환경의 지역 신문들의 최대 후원자 였고 경영의 고문이기도 했다. 캐럴 뿐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세사람 모두 언론, 신문과 관계가 깊었고 언론자유를 종교 자유 못지 않게 강조했고 이를 구현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정부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가 “정부 없는 신문을 택 하겠다”고 까지 이야기 했을까? 이 이야기는 따로 장을 정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p>
<p>선언서 채택의 뒷 얘기가 이어 졌다. 정찬 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고 또 참석하기로 돼 있는 밥 모리스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그랬다.<br />
7월 하순의 무더운 필라델피아 시티터반의 은밀한 방. 초저녁 큰 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찰스 캐럴, 그리고 존 캐럴 신부까지 미 대륙 최고의 지성과 영혼의 지도자가 역사적인 문서의 탄생 뒷얘기를 나누는 이 장면은 , 구세계,식민지의 종교적 차별과 박해를 끝내고, 신세계 공화국이 나아가야 할 &#8216;종교 자유의 신기원&#8217;을 다짐하고 확인하는 자리였다. 뒤에 얘기 하겠지만 이날 모임은 독립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또 정립한 중요한 결정들의 씨앗이 잉태 된 자리이기도 했다.</p>
<p>찰스 캐럴의 방문 이후 제퍼슨은 보름 가까이 홀로 하숙집 랜턴 하우스의 방에 틀어 박혀 캐럴과의 대화 영감을 바탕으로 이미 자신이 썼던 버지니아 헌법 초안이나 존 로크의 철학서, 그리고 영국의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등을 옆에 쌓아두고 피를 말리며 문장을 만들고 다듬었다.<br />
6월 24일, 뼈대를 완성한 제퍼슨은 땀 범벅이 된 셔츠 차림으로 하숙방에서 초안을 들고 나와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아담스를 각각 &#8216;개별적으로&#8217; 찾아가 피드백을 구했다.<br />
제퍼슨은 훗날 이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br />
&#8220;나는 초안을 의회 보고하기 전, 작성위원이기도 한 프랭클린 박사님과 아담스 씨를 따로 찾아가 그들의 수정을 요청했다. 그들이 직접 친필로 써넣은 수정 사항은  두세 개(Two or three only)에 불과했으며, 아주 사소한 어휘 수정(Merely verbal)이었다. 그런데 정작 의회에서는…&#8221;<br />
제퍼슨은 자존심이 강한 문장가였기에 &#8220;별로 고친 거 없다&#8221;고 짐짓 덤덤하게 말했지만, 실제 역사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두 선배가 가한 수정은 꽤 많았고 모두 &#8216;신의 한 수&#8217;들 이었다. 실은 의회의 무자비한 삭제 수정에 대한 불만이 이 회고의 방점이다.<br />
역사적으로 규명된 이 단계(5인 위원회 검토 단계)에서 이루어진 수정은 총 40여 군데에 달하는데 .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벤자민 프랭클린이 붉은 펜으로 &#8220;신성한&#8221;에서 &#8220;자명한&#8221;으로 고친 부분이다. (Sacred → Self-evident)<br />
제퍼슨의 원래 문장은 &#8220;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신성하고 부정할 수 없다(sacred &amp; undeniable)고 믿는다.&#8221; 고 되어 있었는데 칠순의 노정치인이자 인쇄업자, 과학자였던 프랭클린은 &#8216;신성한(Sacred)&#8217;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독교적·종교성을 지우고 대신 수학이나 과학 법칙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당연히 알 수 있다는 뜻의 &#8216;자명한(Self-evident)&#8217;으로 고쳐 썼다.</p>
<p>벤자민 프랭클린의 또 다른 수정으로는 &#8220;피바다&#8221;를 &#8220;파멸&#8221;로 바꾼 것이 유명하다. 제퍼슨의 원래 문장은 영국 왕 조지 3세가 우리를 &#8220;피바다에 빠뜨리려(deluge us in blood)&#8221; 한다고 아주 감정적이고 격렬하게 썼다.<br />
프랭클린은 이 거친 표현을 지우고, 깔끔하게 &#8220;파멸시키려(destroy us)&#8221; 한다고 정돈해 주었다. 후배의 과한 감정을 깎아준 것.<br />
또 존 아담스의 날카로운 터치는 &#8220;식민지&#8221;를 &#8220;국가&#8221;로 (Colonies → States) 바꿨다.<br />
아담스는 제퍼슨이 습관적으로 쓴 &#8216;식민지(Colonies)&#8217;라는 단어를 배격 했던 것이다. 그는 선언서가 발표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영국의 하속이 아니라며, 이를 &#8216;국가(States)&#8217;로 과감하게 고쳤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23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430_source_1661805411.jpg" alt="" width="1057" height="1280" /></p>
<p>6월 28일 (금요일) 위원회의 검토를 끝낸 깨끗한 수정본(Fair Copy)이 마침내 대륙회의 본회의에 정식 제출되어 낭독된다. 제퍼슨이 완성한 초안은 큰 종이로 총 4페이지 분량이었다.<br />
제퍼슨은 나중에 수정될 것을 대비해 종이의 윗부분이나 여백을 넓게 남겨두었다. 현재 의회도서관에 남아있는 이 초안을 보면, 제퍼슨 특유의 정갈하고 날카로운 글씨 위로 수많은 단어가 지워지고(Canceled), 행간에 다른 단어가 끼워 넣어진(Interlined) 흔적이 가득하다.<br />
이 과정에서 제퍼슨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경험을 했다. 2일부터  4일까지 열린 대륙회의 본회의에서, 의원들이 제퍼슨의 초안을 난도질하듯 수정했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초안을 한 줄 한 줄 검토해 제퍼슨이 쓴 총 150여 개의 문장 중 무려 4분의 1에 달하는 86군데를 수정하거나 삭제했다.<br />
이때 제퍼슨은 본의회장 구석에 앉아 입을 꾹 다문 채, 자기 자식 같은 문장들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며 거의 고문에 가까운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고 훗날 회고했다. 옆에 있던 존 아담스가 언성을 높여 가며 대신 싸워줘야 했을 정도였다. .</p>
<p>제퍼슨이 크게 두려워했던 것은 뉴잉글랜드 출신의 완고한 청교도 의원들이 선언서에 &#8220;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8221;라거나 &#8220;기독교 국가로서&#8221; 같은 특정 종교의 색채를 덧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톨릭이나 타 종교인들은 독립 공화국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br />
하지만 다행히도 본회의 의원들은 제퍼슨이 심어놓은 서문의 핵심 문구, 즉 &#8216;자연법과 자연의 신(Laws of Nature and of Nature&#8217;s God)&#8217;이라는 표현만큼은 손대지 않고 원안 그대로 통과시켰다. 특정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존중하는 &#8216;정교분리&#8217;의 사상적 초석이 그대로 살아남은 것이다.<br />
다만, 의원들은 선언서의 중간과 끝부분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종교적 표현을 슬쩍 추가했다. 의원들은 선언서 중간에 제퍼슨이 신을 염두하고 쓴 ‘인류의 재판관’이라는 표현을 &#8216;세계의 최고 재판장(Supreme Judge of the world)&#8217;이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또 선언서 맨 끝 문장은 제퍼슨이 &#8220;우리의 목숨과 재산, 신성한 명예를 걸고 서로 맹세한다&#8221;고 썼는데 의원들은 그 바로 앞에, 신의 섭리에 대한 굳건한 신뢰로(with a firm reliance on the protection of divine Providence)&#8217;라는 문구를 추가했다.</p>
<p>제퍼슨은 이 수정을 두고 &#8220;의원들이 괜한 종교적 수사를 덧붙여 문장의 명료함을 흐려놓았다&#8221;며 투덜댔다지만 제퍼슨이 깔아놓은 보편적 인권과 종교 자유의 본질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br />
제퍼슨으로서는 무척 아쉬운 부분이 눈물의 노예제 폐지 조항&#8217;이었다. 제퍼슨이 온 힘을 다해 썼으나, 본회의에서 통째로 가위질당해 제퍼슨을 밤새 울게 만든 유명한 &#8216;노예무역 규탄 조항&#8217;이다.<br />
제퍼슨은 초안 3페이지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죄악 중 가장 무거운 죄로 &#8220;인간의 본성 자체를 침해하여,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잡아 와 노예로 팔아치우는 처참한 장사를 부추겼다&#8221;며 노예무역을 맹비난하는 장문의 글을 써넣었다.<br />
비록 제퍼슨 본인도 노예를 거느린 남부 지주였지만, 이 선언서만큼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문학적·사상적 결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조항은 사우스카롤라나와 조지아 등 남부 농장주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로 완전히 삭제되는데, 이때 제퍼슨은 모멸감 까지 느꼈다고 일기에 썼다.</p>
<p>“이 붉은 글씨가 프랭클린 박사님이 하신 수정이군요?”<br />
테이블 위에는 최초의 수정본도 있었다. 찰스가 붉은 펜으로 &#8216;Sacred&#8217;를 쓱쓱 지우고 &#8216;Self-evident&#8217;를 쓴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br />
“왜 몽쉐르도 불만이시요? “<br />
“아닙니다. 박사님의 붉은 펜, 이 부분은 문장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이성(Reason)의 옷을 입혀야만 온 세상의 핍박받는 영혼들이 이 문서 아래로 모여들 수 있다는 심모원려가 느껴 집니다. ‘세크리드’ 란 말을 안 봤을 때도 고개를 주억 거렸습니다.”<br />
“그렇죠? 역시 예수회 몽쉐르이십니다. 안 그렇습니까 신부님?”<br />
벤자민은 존 신부에게도 동의를 구했다.<br />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p>
<p>&#8220;토마스군이 쓴 &#8216;신성한&#8217;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뒀다간, 우리 5인 위원회의 저 꼬장꼬장한 청교도 로저 셔먼 영감이 &#8216;신성한 청교도 공화국&#8217;을 만들자고 덤볐을 걸세. 그 꼴을 보기 싫어서 내가 얼른 &#8216;자명한&#8217; 이라고 바꿔버린 거지! 셔먼 그 친구는 성경 구절이 아니면 법전도 안 믿는 친구니까 말이네, 핫핫하!&#8221;</p>
<p>그때 밥 모리스가 땀을 흘리며 로즈 룸으로 들어왔고 역시 따들레한 인사가 끝나자 정찬이 시작 됐다.</p>
<p>의외로 밴자민이 존 신부에게 식사 기도를 부탁 했다. 모리스의 눈이 둥그래졌다.<br />
“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오늘 이자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계실것을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br />
존 신부는 자리를 생각 해서 식전 기도와 식후 기도를 함께 했다. 이런 자리서 식후기도는 이루어지지 않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론 찰스만이 그 사정을 일고 있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br />
&#8216;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8217; 다음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8217;는 좌중의 신자들이 하는 대목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만 찰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짐짓 큰소리로 외쳤다. &#8220;Receive it now and forever.”. 그러면서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랐다. 그 순간 찰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이 차 올랐다.</p>
<p>&#8216; 주님 이 중요한 자리에 주님의 찬미가 이렇게 등장 했습니다&#8217;</p>
<p>정찬이 시작 되면서 전채가 나왔고 식전주가 돌려 졌다. 주종은 역시 마데이라 였다.<br />
“신부님 오늘은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와인을 따르면서 노인이 신부를 쳐다보며 말했다.<br />
“과음만 하지 마십시오&#8221; 존 신부가 찰스와 모리스를 번갈아  보며 찡긋 했다.<br />
통풍으로 고생했던 벤자민은 여행 내내 존 신부의 걱정하는 눈 때문에 딱 한잔 밖에 마시지 못했었다. 트랜튼 터반에서 반갑게 모리스를 만났을 때 였다.</p>
<p>&#8220;찰스 캐럴경의 대륙회의 정식 입성을 축하하며 건배!”<br />
“치어스”  다섯개의 잔이 챙 하고 부딪혔다.</p>
<p>첫잔을 단숨에 비운 벤자민 노인은 자신의 잔을 채우곤 다른 사람들이 잔에도 첨잔 한 뒤 또 한번의 건배를 제안했다.<br />
“존 캐럴 신부님의 숭고한 박애 정신을 위하여 건배.”  다시 잔 부딪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br />
벤자민 노인은 이날 작정을 했는지 이번에는 토마스 제퍼슨을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br />
“청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인 문건을 완성해낸 우리의 자랑 토마스 제퍼슨 선생을 위해 건배”<br />
잔이 또 부딪혔고 이번에는 존 신부 까지도 잔을 비웠다.</p>
<p>이날 메인 디쉬는  스테이크 였다.  프랭클린이 준비한 술은 마데이라 가운데 육류와 잘 어울린다는 ‘부알’ 과 ‘말바시아’ 였다. 부알은 중간 당도로 건포도, 무화과, 구운 설탕의 풍미가 특징이다. 말바시아 (Malvasia}는 풍부하고 달콤한 풀바디 스타일. 다크 초콜릿, 커피, 캐러멜 향이 특징. 부알이 먼저 나왔고 말바시아는 메인코스 때 나왔다.</p>
<p>마데이라 세잔이 커푸 들어가자 거나해진 프랭클린이 아까의 뒷담화를 계속 이어갔다.<br />
&#8220;다시 뉴잉글랜드 영감들 얘긴데, 신부님, 난 이 마데이라 마실 때 마다 그 북쪽 뉴잉글랜드 완고한 영감탱이들 생각이 난단 말이오, 마데이라 때문에 종국에는 보스턴 티 사건이란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 존 핸콕 의장도 보스턴 사람 아니오?  이들 때문에 , 때문에 내가 붉은 펜을 들 수밖에 없었지!&#8221;</p>
<p>벤자민 노인은 자신이 특정 교단 편중 방지, 천주교 인정을 위해 노력 했다는 것을 특히 존 신부에게 강조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당시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독립에는 가장 앞장섰지만, 종교 문제만큼은 타협이 없는 철두철미한 이들이었다. 프랭클린이 특별히 저격하는 인물은 두 사람이었다.<br />
먼저 로저 셔먼 (Roger Sherman)이다. 그는 코네티컷 대표로 제퍼슨, 프랭클린과 함께 독립선언서 &#8216;5인 위원회&#8217; 멤버였다! 하숙방에서 초안을 마지막 검토할 때 제퍼슨과 프랭클린 바로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인물이다. 아주 독실하고 완고한 청교도(회중교회) 신자였으며, 자수성가한 법률가답게 빈틈이 없었다.</p>
<p>그리고 사무엘 아담스였다. 무역상 출신 존 핸콕은 이들 보다는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p>
<p>&#8220;저기 매사추세츠의 새뮤얼 아담스 좀 보게나. 영국 놈들 몰아내는 데는 앞장서면서도, 가톨릭 성당 근처만 가면 아직도 로마 교황 음모의 소굴이라며 진저리를 치지 않나. 그런 완고한 청교도들의 눈초리를 뒤로 하고  대륙 전체를 하나로 묶으려면, 종교색을 뺀 이성의 언어가 필수였네.&#8221;</p>
<p>찰스 캐럴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 사무엘 아담스도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려 주려는데  그때 식당 사람들이 메인 디쉬인 스테이크를 룸으로 들여 왔다. 이집 사장 존이 웨이터 두사람과 함께 들고 왔다.<br />
손님이 손님인 만큼 터반 측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얘기였다.</p>
<p>은빛 촛대 사이로 잘 구워진 소고기 덩이가 마데이라 와인을 졸여 만든 진한 갈색 소스에 적셔진 채 커다란 접시에 담겨 놓여 졌다. 그 옆에는 프랑스식으로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내 소금을 뿌린 노란 감자 요리(프렌치프라이의 시초)가 영양의 보고 브로콜리와 함께 곁들여져 있었다.</p>
<p>18세기 후반의 스테이크(Beef Stake)는 오늘날 우리가 레스토랑에서 먹는 두껍고 정형화된 안심·등심 구이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당시에는 고기를 두껍게 굽기보다는 쇠고기 등심(Loin)이나 우둔살 부위를 다소 얇게 저미듯 썰어 석쇠(Gridiron)에 직화로 굽거나, 무쇠 팬에 버터와 함께 빠르게 지져내는(Pan-seared) 방식이 대세였다.그리고 꼭 소스를 새로 요리했다. 소스는 고기를 구워낸 팬에 남은 육즙(Brown drippings)을 베이스로 만들었다. 팬에 샬롯(Shallots)과 마늘, 타임(Thyme) 같은 허브를 다져 넣고 볶다가, 이때도 마데이라 와인을 듬뿍 부어 알코올을 날리며 반으로 졸인다. 여기에 진한 쇠고기 육수(Beef Broth)와 전분를 더해 걸쭉하게 만든 뒤, 마지막에 차가운 버터를 한 조각 떨어뜨려 풍미를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다.</p>
<p>소문난 요리사 출신 터반 사장 존이 적당한 크기로 크게 썰어 각자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벤자민에게 먼저 주려 했더니 그가 손으로 존 신부와 찰스를 가리켰다.</p>
<p>스테이크의 맛은 정말 훌륭했다.  벤자민이 잔에 담긴 붉은빛 마데이라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뒤, 소스를 얹은 스테이크를 썰어 한입 먹으며 감탄의 눈빛을  쏟아냈다. 이어 벤자민 뿐 아니라 좌중의 사람 모두 감탄의 소리를 냈다. 사이드 디시 감자요리 또한 매우 뛰어 났다.  움직이는 백과사전 벤자민 프랭클린의 음식 안목 이었다.<br />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 한때 채식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8220;건강한 대식가이자 미식가(Founding Foodie)&#8221;였다. 특히 그의 감자 사랑은 유명하다. 프랑스 대사로 가 있던 시절, 프랑스에서는 감자를 천한 음식, &#8216;한센병을 유발하는 독성 식물&#8217;이라며 기피했다. 이때 감자의 보급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던 프랑스 약학자 파르망티에(Parmentier)를 도와 프랭클린이 디저트까지 모든 코스에 감자가 들어간 &#8216;감자 만찬&#8217;을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만찬이 프랑스 궁정과 사교계에 감자를 유행시킨 결정적 계기였으며, 이것이 훗날 우리가 아는 프랑스식 감자튀김(프렌치프라이)의 대중화로 이어지는 발판이 된다.</p>
<p>요리 얘기 하다가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샜는데 이날 정찬은 요리와 와인도 훌륭했지만 그 대화 내용은 더 훌륭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존 신부의 기도대로 천주가 그 자리에 함께 있어 대화를 이끌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정도다.</p>
<p>이날 정찬 중의 대화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파리 출발이 확정되고 앞당겨 졌고, 참석자 모두가 뉴욕에서 고생하고 있는 조지 워싱턴 장군을 앞으로 누가 뭐래도  굳건하게 돕자는 결의를 했다.  대륙회의 보급 총관 밥 모리스는 캐럴 형제의 도움으로 구축된 프랑스 파이프라인을 더 세게 가동 하기로 했고,  토마스 제퍼슨과 존 케럴 신부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언론 자유,  특히 징집 대상이 될 젊은이들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더 매진하기로 의기를 투합했다.  떠들레한 벤자민 노인의 인물 품평으로 대륙회의 내부 사정과 현안을 새로이 인식한 찰스 캐럴은 이날 대화로 대륙회의 내 전쟁위원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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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9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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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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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03 Jul 2026 05:43:24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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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데이즘과 예정설 그리고 화체설 2 안동일 작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화체설 안 믿는다고 한자 적어내면 일등 시민께 시민권도 나오고 공직에도 진출 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으셨던 것을 보면&#8230;” “잘 알고 계시는 군요.” 한자 적어 내면 정도의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캐럴은 그렇게 대답했다. 앞서도 몇차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데이즘과 예정설 그리고 화체설 2</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화체설 안 믿는다고 한자 적어내면 일등 시민께 시민권도 나오고 공직에도 진출 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으셨던 것을 보면&#8230;”</p>
<p>“잘 알고 계시는 군요.”</p>
<p>한자 적어 내면 정도의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캐럴은 그렇게 대답했다.<br />
앞서도 몇차례 언급 했듯이 당시 메릴랜드에서 천주교인이 공직에 진출 하려면 개종 하고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부정해야 했다. 바로 18세기 영미권 천주교 박해 역사의 핵심을 찌르는 대목이다.</p>
<p>영국과 그 식민지였던 메릴랜드에서 천주교인의 공직 진출을 막기 위해 시행한 법을 &#8216;심사법(Test Act)&#8217;이라고 불렀다. 공직에 임명되기 전, 일종의 사상 검증 선서를 해야 했는데 그 서약의 핵심 내용이 바로 &#8220;나는 천주교의 화체설을 부정한다&#8221;는 것이었다.<br />
성공회도  빵과 포도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 의식(Holy Communion)를 하는데, 왜 하필  화체설이 천주교인을 걸러내는 완벽한 감별사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신학적 이유 말고도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p>
<p>성공회와 천주교는 영성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랐다. 천주교의 화채설 (化體說 )은 미사 중 사제가 축성하는 순간, 밀가루 빵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이 진짜 &#8216;예수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살과 피&#8217;로 완전히 바뀐다고 믿는 선언이자 믿음 이었다.  겉보기만 빵과 포도주로 보일 뿐 진짜 신의 몸과 피라는 입장이다. 13세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에서 이 실체변화론이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되었다.</p>
<p>성체성사는 아다시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에서 기원한다.<br />
그때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들고 &#8220;이는 내 몸이며, 내 피다&#8221;라고 말하며 이를 기념하라고 했다. 그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 모여 신앙을 고백하고 빵을 나누는 이른바 &#8216;주님의 만찬&#8217;을 거행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의 현존을 체험하는 전례였다.<br />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성체성사는  성당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미사의 형태로 발전했다.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어지면서 성체를 눈으로 보고 현양하는 문화가 발전했다. 미사 중 성체를 높이 들어 올리는 거양성체, 성체를 모셔두고 기도하는 성체조배,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제정되었다.<br />
“교황청이 공식화 하는데에는 이탈리아의 한 성당에서 특별한 이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br />
“어떻게 그런것을 다? ”<br />
“어렸을 때 옆집 흑인 노예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입니다. 남미 출신 히스페닉인  그녀는  성당과 신부가 없어 성체 성사를 못한다고 늘 무척이나 아쉬워 했습니다.  “</p>
<p>&#8220;그렇습니다. 성체 성사는 천주교 미사의 전부 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성사 입니다.&#8221;<br />
노예 라는 단어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인단 그렇게 답하고 캐럴은 성체와 관련된 이적에 대해 란치아노 이적 부터 간략히 설명 해야 했다. 제퍼슨이 캐럴 같은 지성인은 그런 이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기 때문이다.</p>
<p>이탈리아 란치아노의 성 롱기누스 성당의 이적은 가톨릭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성체 이적이다. 찰스 캐럴 처럼 교회사와 신학에 밝은 인물 뿐 아니라 천주교인이라면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건이다.<br />
8세기 중엽인 752년 여름, 이탈리아 란치아노의 성 롱기누스 성당에서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는 학식이 높았으나, 미사 중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성체 성사 화체 교리에 대해서는 남모를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p>
<p>그가 축별 기도(성변화 기도)를 마친 순간, 그의 눈앞에서 제대 위의 성체(빵)가 실제 인간의 살로, 포도주가 실제 인간의 피로 변화했다. 성체는 이내 다섯 개의 덩어리로 응고되었다. 당황하면서도 감격한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신자들에게 이 기적을 증언했다. 다섯개의 덩어리는 주교좌 성당과 급기야는 교황청에 까지 보내졌고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br />
단순히 한 지역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그간 의구심을 표했던 적지 않은 이들에게 주님이 직접 경종을 울린 일이라고 인식 되면서 가톨릭 전체 전례에 큰 변화를 몰고 왔던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가톨릭인들 에게는 셰례반에서 습득하는  필수 상식이었다.</p>
<p>란치아노 성체성혈 기적의 성체와 성혈은 현재 이탈리아 아브루초주 란치아노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Santuario del Miracolo Eucaristico)에 모셔져 있다. 1970년대 과학적 조사 결과, 기적의 성체는 사람의 심장 근육 조직으로, 성혈은 AB형 인간 혈액으로 확인됐다고 알려져 있다.</p>
<p>그후 성체 이적은 여기저기서 일어 닜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13세기 라테라노 공의회의 채화설 공식화 이후 일어난 볼세나의 기적이다. 이는 이적을 넘어 기적으로 표현 된다.<br />
공의회 이후 50년 쯤 지난 1263년, 프라하 출신의 바웬사 베드로 신부는 로마로 순례를 가던 중 이탈리아 볼세나(Bolsena)의 성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 역시 성체 안에 예수님이 실제로 현존하는가에 대한 신앙적 회의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공의회에서 틀림없이 변한다고 했지만 그랬다.<br />
미사 중 그가 성체를 쪼개는 순간, 성체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나와 신부의 손가락과 제대 위를 적시고, 성체 밑에 받치는 천인 &#8216;성체포(Corporal)&#8217;에 뚝뚝 떨어져 얼룩을 남겼다. 깜짝 놀란 신부는 미사를 중단하고, 당시 인근 오르비에토(Orvieto)에 머물고 있던 교황 우르바노 4세를 찾아가 전말을 고하고 불신했던 죄를 청했다.  볼세나와 오르비에토는 모두 이탈리아 중부의 중소 도시다. 구체적으로 볼세나는  라치오(Lazio)주에 위치한 호숫가 마을이며, 오르비에토는 그와 인접한 움브리아(Umbria)주의 고성 도시다. 두 도시는 주는 달리 하고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이웃 마을로 약 11마일(약 18km) 정도 떨어져 있다.</p>
<p>교황은 즉시 성체포를 거두어 조사하게 했고, 이적을 목격한 이들의 상세한 자술서를 근거 삼아 이를 공식 기적으로 인정했다. 교황의 감동은 가톨릭 교회의 전 세계적인 대축일인 &#8216;성체 성혈 대축일(Corpus Christi)&#8217; 제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지적인 성자도 이 기적을 내용으로 해서 대축일 찬미가를 지었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다.</p>
<p>피 묻은 성체포(Sacred Corporal)는 7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관되어 있으며,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성체포는 당시 우르바노 교황이 머물던  오르비에토의 대성당(Duomo di Orvieto) 내 &#8216;성체포 경당(Chapel of the Corporal)&#8217;에 안치되어 있다. 이 대성당 자체가 사실상 이 기적의 성체포를 모시기 위해 새로 증축됐다. .<br />
현재는 유물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성당 내부 경당의 대리석 감실 안에 보관되어 있다.  매년 부활시기부터 성령강림대축일 사이, 그리고 이 기적으로 인해 제정된 성체 성혈 대축일(Corpus Christi) 등 주요 전례 시기에는 일반 신례자와 관광객들이 볼 수 있도록 제대 위에 공개된다. 특히 성체 성혈 대축일에는 이 성체포를 앞세우고 오르비에토 시내를 도는 성대한 행진이 열린다.</p>
<p>과학적 조사 결과 과거에는 이 붉은 얼룩이 빵이나 천에 자라는 &#8216;붉은 누룩곰팡이(Serratia marcescens)&#8217; 같은 박테리아일지 모른다는 과학계의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2015년, 교구의 허가를 얻어 첨단 자외선(UV) 분석 등을 포함한 비파괴 정밀 과학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체포에 남은 대칭형의 붉은 자국들이 실제 인간의 혈액(혈장과 혈청 성분)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13세기 프라하의 한 신부가 품었던 의심을 거두어 주었던 그 기적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감동을 전하며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p>
<p>하지만  종교개혁이 시작된 15세기 마르틴 루터, 장 칼뱅, 특히 츠빙글리 등 개혁가들은 가톨릭의 실체변화 교리와 미사의 희생 제사적 성격을 비판하며 각자 다른 성찬론을 주장해 화체설은 신구 교를 가르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br />
그럼에도 가톨릭 교회는 이에 맞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를 통해 실체변화 교리를 재확인하고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재현하는 거룩한 제사임을 다시금 선언했다.</p>
<p>&#8220;어차피 천주교 내에서 교황과 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일이라는 인상은 지울수 없습니다. 그려&#8230;&#8221;</p>
<p>성공회에 적을 두고 있는 이신론자 제퍼슨은 그렇게 반응했다.   성공회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화채설을 &#8216;미신적이고 비이성적인 것&#8217;으로 규정한 것 처럼 .</p>
<p>저들은 영성체를 할 때 그리스도가 영적으로(Spiritually) 임재하는 것이지, 빵이 물리적인 살덩어리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성공회의 39개조 신앙 조항 제28조에는 &#8220;화체설은 성경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많은 미신의 원인이 된다&#8221;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8220;나는 화체설을 부정한다&#8221;라는 문장에 서명하라는 것은, 성공회 신자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천주교 신자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통째로 부정하고 배교한다는 뜻이 되었다.</p>
<p>영국 국왕이 교회의 수장인 성공회 입장에서, 천주교인은 단순한 종교 소수자가 아니라 &#8216;로마 교황(외국 군주)의 명령을 따르는 잠재적 반역자&#8217;였다. 이들을 공직에서 철저히 배제해야 하는데, 겉보기에 천주교인과 성공회교도는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예배 형식도 비슷하고, 읽는 성경도 비슷했고 , 영성체도 그랬다.<br />
하지만 &#8220;미사 때 쓰는 빵이 진짜 예수의 살이냐 아니냐?&#8221;라는 질문을 던지면, 독실한 천주교인은 영혼을 걸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신앙이었다. 화채설을 부정하는 선서를 하는 순간 자신을 지탱 해 주던 신앙이 떠나간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화채설 부정 선서는 천주교인의 양심을 볼모로 잡고 그들을 합법적으로 공직에서 솎아내기 위한 가장 정교한 &#8216;정치적 덫&#8217;이었다. 교황의 권위도 떨어 뜨리면서&#8230;</p>
<p>“밀가루 빵이 예수의 몸으로 변한다&#8230; 그것도 천 칠백년 전에 죽은 사람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라면 몰라도 이성적으로 어떻게 이해 되는지, 캐럴 경 같은 분은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어차피 사람이 쉽게 만든 밀빵 아닌가요?  ”<br />
&#8220;제퍼슨 선생, 우리 천주교인들에게 그 작은 빵 조각은 단순한 밀가루가 아닙니다. 영국 왕의 감시를 피해 메릴랜드 비밀 주방 구석의 뜨거운 장작불 위에서, 가문의 여인들이 숨을 죽이고 무쇠 틀로 한 장 한 장 구워내던 인내의 상징이지요. 소금 한 꼬집 들지 않아 투박하고 질기지만, 우리에게는 자유와 신앙 그 자체입니다.&#8221;</p>
<p>그랬다. 18세기 말 미국(당시 식민지 및 건국 초기)의 천주교인들이 성사(미사) 때 사용했던 제대빵(제병, Altar Bread), 즉 성체 성혈 성사용 축성 제병은 요즘 우리가 보는 아주 얇고 기계로 찍어낸 흰 전병과는 제조 과정과 형태에서 차이가 있었다.<br />
제병을 대량 생산하는 수녀원이나 전문 종교 성물 공장이 없었기에 메릴랜드의 캐럴 가문처럼 부유한 천주교 집안의 사유지 안에 있는 사설 경당이나, 순회 신부(Jesuit Missionaries)가 들르는 비밀 미사 거처(Mass House)에서의 비밀스러운 제조로 준비했다.<br />
신부가 직접 굽거나, 신부의 안전과 미사를 돕는 가문의 여성들(혹은 신뢰할 수 있는 하인들)이 극도의 보안과 경건함 속에서 침묵하며 구웠다.<br />
교회법에 따라 재료는 오직 밀가루와 물뿐이었다. 이스트(효모)나 소금, 설탕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무교병(Unleavened bread)이었다. 요즘의 성체는 새하얗고 매끄러우며 입안에서 금방 녹지만, 18세기의 제병은 훨씬 투박하고 거칠었다. 두께도 요즘 제병보다 훨씬 도톰하고 단단하여, 씹을 때 바삭하거나 질긴 빵의 식감이 남아 있었다.무쇠 판 안쪽에 십자가, 그리스도를 뜻하는 문장(IHS), 또는 희생양(Lamb of God) 같은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구워져 나오면 제병 표면에 이 문양들이 볼록하게 인장처럼 박혀 있었다.</p>
<p>&#8220;제퍼슨 선생, 성공회인들에게는 그저 상징에 불과한 빵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 영성체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인들이 위안을 얻었고 신심을 키웠는지 모릅니다. 저 만해도 일주일에 한번 이라도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온 몸에 힘과 의욕이 빠지는 것을 느낍니다.  저들은 우리의 이런  영혼의 위안을  인질로 삼아 공직과 자유를 박탈했던 것입니다.&#8221;</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9076"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7/3ktifpcyltx01.jpg" alt="" width="1001" height="1500" /></p>
<p>&#8221; 그런 위안을 느끼신 다는 것에  동의 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갑니다. 그게 신앙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 종교적 신앙을  국가의 법률로 규정해 탄압하고 인간의 양심을 시험하는 것 만큼은 천부당 만부당이지요. 저 역시 진작부터 문제의 심사법이 참으로 야비하고  야만적인 법 이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입니다. 제가 초안을 잡는 이번 선언서에는 이 부분을 꼭 담을 작정입니다;&#8221;</p>
<p>&#8220;감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감청 고소원인 일입니다. &#8221;</p>
<p>&#8220;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화채설 또한 결국은 교황의 권위에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는 군요.  교황의 권위가 신성 불가침이라는 천주교인들의 생각을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제 이성이 아직 탄탄합니다. 허허허&#8221;</p>
<p>&#8220;당장에 더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정도 만이라도 천군 만마를 얻은 셈입니다.&#8221;</p>
<p>그러면서 캐럴은 말을 이었다. 이날의 주제 였다.</p>
<p>&#8220;그런데 제퍼슨 의원, 이성만으로는 인간의 고독과 종말의 공포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종교의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특히 우리 천주교인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영국 군인들이 들이닥칠 때, 메릴랜드의 천주교 어머니들이 의연히게 버틸수 있었던 것은  차가운 논리가 아니라 전날 가슴에 받아 모신 주님의 성혈이었고   투박한 나무 구슬로 엮은 묵주였습니다. &#8221;</p>
<p>&#8220;참 캐럴 경도 묵주기도를 하십니까? 놀랄 정도로 열심히들 하던데&#8230;&#8221;</p>
<p>대뜸 묵주기도에 대해 물어왔다.</p>
<p>&#8220;물론이죠,  실은 하루에 20단을 하기로 작정 했지만 못 지키는 날이 더 많습니다. 허허허&#8221;</p>
<p>묵주기도의 역사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또한 천주교 대중화의 산 역사이기도 하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들이 매일 성경의 시편 150편을 바쳤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일반 평신도들은 이를 따라 하기 어려웠다. 대신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150번 바치며 시편 기도를 대체했던 것이 그 시작. 이때 횟수를 세기 위해 매듭을 지은 줄이나 구슬을 사용했다.</p>
<p>13세기 초, 성 도미니코 교부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이단에 맞서 싸울 무기로 묵주기도를 널리 전하라고 권고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1571년 가톨릭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서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교황 비오 5세는 모든 신자에게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청했고, 승리 후 이를 기념해 10월 7일을 &#8216;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8217;로 제정했다.</p>
<p>신자들이 묵주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영혼의 평화와 복음의 묵상에 있다.  묵주기도는 단순히 성모송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바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활, 수난, 부활에 이르는 &#8216;신비(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8217;를 성모의 시선으로 깊이 묵상하게 된다. 즉, 성모와 함께 바치는 예수님 중심의 기도다.</p>
<p>가톨릭 교회는 이 기도가 악의 유혹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고, 가정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이끄는 강력한 영적 무기라고 강조해서 가르친다.  반복되는 기도문을 조용히 읊조리며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굴리는 행위는 심리적으로도 큰 안정감을 준다. 복잡한 소음에서 벗어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는 깊은 명상의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p>
<p>&#8220;묵주 기도는 마리아에 대한 기도로 알려져 있는데&#8230;&#8221;</p>
<p>언급 했듯이 묵주기도 마리아 존숭은 개신교도들의 줄기찬  공격 대상이다. 화체설 만큼이나 마리아 공경과 묵주기도 역시 당대 천주교와 성공회(개신교)를 갈라놓는 거대한 신학적 격전지였다. 성공회 신앙 조항은 성인 및 마리아 공경, 유해 숭배,묵주 등을 &#8220;아무런 성서적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허황된 고안물&#8221;이라며 아주 단호하게 규정했다.<br />
성모송(&#8220;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8221;)을 수없이 반복하며 성모의 전구(들어가서 구해줌)를 청하는 이 기도를  성공회는  &#8216;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8217;로 보았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대고 바치는 것 자체가 신격화나 미신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p>
<p>18세기 메릴랜드나 영국에서 묵주는 단순한 기도 도구가 아니라, 발각되는 즉시 천주교인임을 증명하는 &#8216;물증’이었다. 당시 법집행관들이 천주교 비밀 신자의 집을 수색할 때 가장 먼저 찾던 것이 제대빵 틀과 바로 이 묵주였다. 성공회 국가 체제에서 묵주를 소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국왕의 종교적 수장권을 거부하는 정치적 불순 행위로 간주되었다.</p>
<p>흥미롭게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 성공회 사제들이 성모송을 제외하고 주님의 기도와 예수 기도 등으로 구성을 바꾼 33알짜리 &#8216;성공회 묵주(Anglican Prayer Beads)&#8217;를 새롭게 고안하기도 했으나, 18세기 당시에는 천주교의 묵주기도는 엄격한 타파의 대상이었다.</p>
<p>&#8221; 우리는 마리아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자식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그 거룩한 어머니에게, 이 모진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함께 울며 빌어달라고 동정(同情)을 구하는 것 입니다.  라틴어와 히브리 성서를 읽을 수 없었던 일반 신도들의 영혼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고, 가정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이끄는 강력한 영적 무기였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습니다.&#8221;</p>
<p>&#8220;그렇군요, 지난번에 캐럴경이 하셨던 천국에 올라간 영혼 들에게  가장 큰 일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 친지 들의 기도를 듣는 일이라는 말씀 매우 현실적으로 친근하면서도 강렬하게  들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8230;&#8221;</p>
<p>&#8220;어린시절 파리에서 수녀님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8221;</p>
<p>&#8220;참, 제퍼슨 선생은 영혼의 존재를 얼만큼 믿습니까? &#8221;</p>
<p>지난번 시티 터반에서는 천국의 존재를 믿겠거니 당연시 하면서 얘기를 풀어 갔기에 다시금 물었다.</p>
<p>&#8220;믿기야 하죠, 영혼이 없다고 하기에는 인간사와 세상사에 설명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8221;</p>
<p>캐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퍼슨이 부연했다.</p>
<p>&#8220;캐럴 경, 나는 인간의 &#8216;이성(Reason)&#8217;이야말로 신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 믿습니다. 사실은 일원론 적으로 영혼이 이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 할 때도 많습니다.  이성이 영혼의 양심을 일깨워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 그런데 경이  말하는 그 보이지 않는 &#8216;영혼(Soul)&#8217;은 이원론 적으로 존재 해 이성 위에 군림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저로선 그점 불만이기는 합니다.&#8221;</p>
<p>캐럴은 그랬구나 싶었다. 이 솔직한 재사에게 어떤 말을 들려 줘야 하나 싶었다.</p>
<p>&#8220;제퍼슨 선생, 순서가 틀렸습니다. 영혼은 뿌리이고, 이성은 줄기이며, 양심은 그 줄기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단순히 숨 쉬는 생명력이 아닙니다. 신의 형상을 닮은 영적 실체이지요. 그 영혼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8216;이성&#8217;입니다. &#8221; 이성은 영혼이 눈을 뜨고 세상을 관조하는 창문과 같습니다.&#8221;</p>
<p>&#8220;그렇게 이원론 적으로 생각하면 편해 지기는 하지요.  이원론을 상정할 때 마다 저는 늘 이성과 영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영혼은 언제 인간의 몸에 깃들게 되는지&#8230;&#8221;</p>
<p>제퍼슨 같은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유치하기 까지한 의문이었지만 실은  근본을 꿰 뚫는 의문이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으려는데 제퍼슨이  다시금 물어왔다.</p>
<p>&#8221; 영혼은 도대체 언제 인간의 육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까? 어머니의 태중에 처음 씨앗이 맺히는 순간(잉태)입니까? 아니면 세상 밖으로 나와 첫 숨을 크게 들이쉬는 순간(탄생)입니까?  만약 잉태의 순간이라면, 보이지도 않는 세포 조각에 온전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뜻인지요?  그렇다면  영혼도 자라기도 하는 걸까요? &#8221;</p>
<p>&#8220;우리 교회는 &#8216;잉태되는 바로 그 순간(Conception)&#8217;에 신이 각 인간에게 고유한 영혼을 직접 창조하여 불어넣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임신중인 어머니의 몸에는 두개의 영혼이 있게 되는 셈이지요.&#8221;</p>
<p>캐럴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중요한 얘기였지만 오늘은 독립선언서에 담을 이성과 양심의 기원을 확실히 해두는 바쁜 날이었기에 에센스만 말해 주기로 했다.</p>
<p>&#8221; 태중에서 발길질을 하고 어머니와 교감하는 그 생명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육신이 아무리 미미한 씨앗의 형태일지라도, 신의 시선 안에서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우주입니다. 영혼이 없다면 생명은 시작될 수 조차 없습니다.&#8221;</p>
<p>&#8220;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의 영혼과, 평생 학문을 닦고 세상을 경험한 노학자의 영혼이 같단 말씀 이신지요? 육신이 자라고 이성이 자라듯, 영혼도 시간과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까? &#8221;</p>
<p>&#8220;그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영혼의 &#8216;크기&#8217;는 자라지 않지만, 영혼의 &#8216;깊이와 광채&#8217;는 자라납니다.<br />
신이 주신 영혼은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온전하고 완전합니다. 갓난아기의 영혼이라 해서 조각나 있거나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신이라는 그릇이 아직 작고 이성의 창문이 닫혀 있어 그 영혼의 빛이 세상 밖으로 온전히 드러나지 못할 뿐이지요. 아기가 자라면서 영혼이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혼을 담은 육신과 이성이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8221;</p>
<p>&#8221; 그럼 자란다는 표현을 쓸 수 없는 것이군요&#8221;</p>
<p>&#8221; 그러나 영혼이 진짜 &#8216;자란다&#8217;고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총과 덕행,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사람이 이성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양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며, 믿기 힘든 신앙을 지켜낼 때, 그 영혼은 점점 더 투명해지고 신의 빛을 더 많이 반사하게 됩니다. 반대로 죄를 지으면 영혼은 때가 타고 어두워지지요.  그러니 제퍼슨 선생  영혼은 육체처럼 물리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해 &#8216;깊어지고 넓어지는 것&#8217;입니다.&#8221;</p>
<p>&#8221; 그렇다면 &#8216;양심&#8217;은 무엇일까요? 천주교에서는 이성과 구분해 사용 됩니까? &#8221;</p>
<p>&#8221; 양심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신이 새겨놓은 &#8216;자연법의 목소리&#8217;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영혼의 양심이 마비되면 인간은 정교한 괴물이 될 뿐입니다. 이성은 양심의 목소리를 논리적으로 해석할 뿐, 양심 그 자체를 창조하진 못합니다. 믿기 힘든 신비를 받아들이는 믿음 또한,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영혼의 가장 고결한 결단이지요.&#8221;</p>
<p>&#8220;믿기 힘든 일을 믿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음 이라는 말씀 궤변 같지만 왠지 가슴을 울리는 그 무언가 있기는 합니다. &#8221;</p>
<p>&#8221; 제퍼슨 의원 당신이 그렇게 존경 해 마지 않는 존 로크 선생이 기독교 에서의 이적 과 기적 등 신비로운 현상을 인간 이성으로 설명 할 수 있고 이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 는 사실 알고 계시오?&#8221;<br />
&#8220;금시 초문이올시다.  그럴리가&#8230; 이성을 중시한 로크 선생이 성경속의 &#8216;기적&#8217;과 &#8216;계시&#8217;를  합리적으로 해석했다니&#8230;&#8221;</p>
<p>&#8220;로크의 말년 저작인 &#8216;기독교의 합리성&#8217;이라는 책 가지고 계시지요?&#8221;<br />
&#8220;제 서가에 꽂혀 있습니다.&#8221;<br />
&#8221;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게요. 아니면 읽으셨어도 잊어 버렸거나&#8230;&#8221;</p>
<p>그랬다. 존 로크는 말년에 저술한 &#8216;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년)이라는 책을 통해 이성과 신앙은 대립하지 않으며, 성경의 핵심 메시지와 기적, 계시 모두 이성적으로 입증 가능하고 합리적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책이 기독교 사상을 비판 비난한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p>
<p>존 로크가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풀어낸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남들이 흥분만 했을 때 캐럴은 이책을 너무도 꼼꼼히 읽었던 것이다. 런던 시절의 일이었다.</p>
<p>로크는 신이 인간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인 계시 (Revelation) 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대신 이성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명확히 분류했다.<br />
그는 이성에 반하는 것(Contrary to Reason): &#8220;1+1=3&#8243;이라거나 &#8220;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한다&#8221; 같은 모순된 주장은 계시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br />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도구인 이성을 파괴하는 계시는 진짜 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p>
<p>그는  계시를 구분 하면서  이성 위의 것(Above Reason)을 상정했다. 이적과 기적이 그것이다 .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예수의 구원 등은 인간의 순수한 이성만으로는 유추해낼 수 없는 영역이다.  로크는 이를 &#8216;이성을 초월했지만, 이성에 반하지는 않는 진리&#8217;로 정의했다.</p>
<p>그러면서 검증 도구로서의 이성을 다시 상정 했다.   로크는 어떤 계시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정말 &#8216;신으로부터 온 진짜 계시인가&#8217;를 판별하는 최종 검증관은 결국 인간의 이성이어야 한다고 보았다.</p>
<p>기적(Miracle)을  해석하면서 로크는  &#8216;계시를 증명하는 합리적 신분증&#8217; 이라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이성론자들은 기적을 자연 법칙을 깨뜨리는 미신으로 보아 거부했지만, 로크는 오히려 기적을 이성위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합리적인 증거(Evidence)로 수용했던 것이다.</p>
<p>그 논지가독특했다.  평범한 인간이 &#8220;내가 신의 대리인이다&#8221;라고 주장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눈먼 자를 뜨게 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8216;기적&#8217;을 행한다면, 이성적인 인간은 &#8216;이 사람의 배후에 자연 법칙을 움직이는 신이 있구나&#8217;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는 논지였다.</p>
<p>로크는 기적을 국가의 무력이나 강요 없이, 인간이 이성적 관찰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실증적 증거라고 해석했다. 즉, 기적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이성을 설득하는 &#8216;시각 자료&#8217;인 셈이라는 얘기다.</p>
<p>그는 성경의 가치를 무한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 했다. 그의 성경(Scripture) 해석은 &#8220;단 하나의 단순하고 합리적인 핵심&#8221;이라는 말로 요약 된다.  당시 기독교는 복잡한 삼위일체 논쟁이나 난해한 신학 교리로 교파가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로크는 성경을 철저히 경험론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해석하여 교리를 단순화했다.</p>
<p>로크는 성경이 요구하는 구원의 필수 조건은 복잡한 신학이 아니라 &#8220;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임을 믿고,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참회하는 삶을 사는 것&#8221; 단 하나뿐 이라고 주장했다. 복음서를 나름대로 분석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p>
<p>다만 성경을 이성의 한계를 보완하는 지침서로 보았다는 점이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성경이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대중 들을 이성으로 끌어 들이는데 최고의 수단이기도 하다고 했다. .</p>
<p>본래 자연법과 도덕은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지만, 일상에 바쁜 대 다수의 평범한 대중(노동자, 농민 등)이 철학자처럼 심오한 사색을 통해 이를 깨닫기는 어렵다.</p>
<p>&#8221; 신이 모든 인간이 쉽게 도덕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성경이라는 명확한 텍스트 형태로 자연법을 요약 제공해 준 것.&#8221;  성서에 관한 그의 결론이다.</p>
<p>로크는 이성을 배제한 채 &#8220;신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다&#8221;며 감정적 체험만 앞세우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을 &#8216;열광주의자(Enthusiasts)&#8217;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근거 없는 영적 체험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을 기만과 오만에 빠뜨릴 뿐이며, 모든 영적 체험은 반드시 성경의 문자와 합리적 이성의 통제 하에 검증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p>
<p>이렇듯 존 로크에게 기독교는 미신이나 맹목적 복종의 종교가 아니었다. 그는 &#8220;신은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에게 결코 비이성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8221;고 믿었다.  따라서 기적과 계시는 이성을 파괴하는 현상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보완하고 인간을 합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신이 정교하게 설계한 장치로 해석했다.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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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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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24 Jun 2026 18:08:30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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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데이즘과 예정설 그리고 화체설 안동일 작   토마스 제퍼슨은  잠깐이라고 했지만 며칠 뒤 찰스 캐럴이 그라프 하우스를 찾아 성사된 두사람의 민남은 잠깐이 아니었다. 오후 내, 서너시간이나 계속 됐던 것이다.  그날 두 사람은 천부인권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 양심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고 인식을 공유했다.   자연 서로의 신관(神觀) 종교관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냉정했고 냉철했던 제퍼슨의 그것이 따뜻해 지고 유화적으로 변했다.  전통적인 유럽식 이신론(Deism)에 따라 신, 창조주를 &#8216;우주라는 정밀한 시계를 만들고 태엽을 감은 뒤 뒤로 물러선 냉담한 시계공&#8217;으로 보았던 그의 신관이  조금 더 따뜻한 &#8216;선하신 창조주&#8217; (Benevolent Creator)로 변했던 것이다.   제퍼슨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독립 선언서의 대략의 내용의 골자와 순서에 대한 구상은 끝나 있었는데 첫 번째 대목인  인간의 자유의지며 천부인권이 어디서 비롯 됐냐고 하는게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 막혀 있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찰스 경, 인간의 평등성과 자유의지가 창조주가 창조 할 때부터 그냥 주어졌다고 하기엔 뭔가 미진 하고 또 신 (God)에 의해서 주어 졌다고 하면 모든 것이 특정 신에 의해 예정 돼 있다고 주장하는 특정 계파의 손을 들어 주는 격이 될 듯 싶고&#8230; 그리고  창조주라는 표현을 쓰면 대뜸 불경스럽다고 선언문을 던져 버릴 위인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 해야 될것 같고&#8230;”  “그렇네요, 그냥 창조주 하면 나 부터도 섭섭한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 나또한 창조주 하면 불경하게 느끼는 사람 중 하나이기는 해도 제퍼슨 선생의 원려가 십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신을 상정하신 것 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 됩니다.”  “신이라고 표현은 해야 겠지요?” “ 그래야 겠지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pan dir="LTR" lang="en-US">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span></h4>
<h4><span dir="LTR" lang="en-US"> 데이즘과 예정설 그리고 화체설</span></h4>
<p><strong><span dir="LTR" lang="en-US">안동일 작</span></strong></p>
<p><span dir="LTR" lang="en-US">  토마스 제퍼슨은  잠깐이라고 했지만 며칠 뒤 찰스 캐럴이 그라프 하우스를 찾아 성사된 두사람의 민남은 잠깐이 아니었다. 오후 내, 서너시간이나 계속 됐던 것이다.  그날 두 사람은 천부인권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 양심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고 인식을 공유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자연 서로의 신관(神觀) 종교관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냉정했고 냉철했던 제퍼슨의 그것이 따뜻해 지고 유화적으로 변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전통적인 유럽식 이신론(Deism)에 따라 신, 창조주를 &#8216;우주라는 정밀한 시계를 만들고 태엽을 감은 뒤 뒤로 물러선 냉담한 시계공&#8217;으로 보았던 그의 신관이  조금 더 따뜻한 &#8216;선하신 창조주&#8217; (Benevolent Creator)로 변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제퍼슨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독립 선언서의 대략의 내용의 골자와 순서에 대한 구상은 끝나 있었는데 첫 번째 대목인  인간의 자유의지며 천부인권이 어디서 비롯 됐냐고 하는게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 막혀 있다고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렇습니다. 찰스 경, 인간의 평등성과 자유의지가 창조주가 창조 할 때부터 그냥 주어졌다고 하기엔 뭔가 미진 하고 또 신 (God)에 의해서 주어 졌다고 하면 모든 것이 특정 신에 의해 예정 돼 있다고 주장하는 특정 계파의 손을 들어 주는 격이 될 듯 싶고&#8230; 그리고  창조주라는 표현을 쓰면 대뜸 불경스럽다고 선언문을 던져 버릴 위인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 해야 될것 같고&#8230;”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렇네요, 그냥 창조주 하면 나 부터도 섭섭한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 나또한 창조주 하면 불경하게 느끼는 사람 중 하나이기는 해도 제퍼슨 선생의 원려가 십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신을 상정하신 것 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 됩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신이라고 표현은 해야 겠지요?”</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래야 겠지요. 신을 빼고 나면 이 세상이 설명 되지 않습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러시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제퍼슨이 자신의 생각을 이어 갔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8216;그런데 &#8216;God&#8217;이라는 단어만 덜렁 쓰면, 저 뉴잉글랜드의 깐깐한 칼뱅주의자들이 자기네 교파의 신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겠습니까? 선언서에 적힐 인간의 권리는 특정 종파를 넘어  보편의 이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생각 입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제퍼슨은 인간의 이성을 낮은 것으로 폄훼 하는 개신교의 예정설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반감을 표하고 있었고 반기를 들고 있었다. 찰스는 내심으로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명목상 제퍼슨은 성공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성공회도 예정설에는 고개를 흔드는 편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따지고 보면 예수회가 탄생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이른바 종교개혁 시기 당시 개혁파들이 내세웠던 것이 성서 중심의 예정설이었고 기존 가톨릭은 사람 중심으로 타락했다는 맹렬한 비난 이었다. 로욜라와 하비에르는 이에 맞서 가톨릭과 교황을 수호하기 위해 규율과 신앙 그리고 소정의 학문으로 무장된 청년들을 모아 &#8216;캄파니아 드 지저스&#8217; (예수의 동반자 전우)를 설립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천주 앞에 붙는 수식어라&#8230;” </span></p>
<p><span dir="LTR" lang="en-US">캐럴은 잠시 생각을 굴려야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사실 영어권 가톨릭 신자들도 하나님을 &#8216;God&#8217;이라고 불렀다. 다만, 미사때는 라틴어로 테오스라고 표현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향해 &#8220;너희는 성경의 하나님(God)을 믿는 게 아니라 교황을 숭배하는 이단이다&#8221;라며 &#8216;God&#8217;이라는 단어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사실 성경 원문에는 &#8216;God&#8217;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저 번역된 영어 단어일 뿐이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 성경에는  엘로힘(Elohim), 야훼(Yahweh), 테오스(Theos) 같은 단어가 쓰였고, 이를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언어인 영어로 번역하면서 게르만어 계열의 어원을 가진 &#8216;God&#8217;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쓴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영국의 청교도들과 이 땅의 개신교도들은 마치 &#8216;God&#8217;이라는 단어 자체가 자신들만의 전유물 인 양 내세우면서 자신들만 구원하기로 예정한 옹졸한 신으로 만들고 있다는 제퍼슨의 판단은 찰스에게는  천군 만마였다.  God 이라고 만 쓰면 .특정 기독교. 특히 예정설을 믿는 극단적 개신교 파벌들의 국가를 세우자는 뜻으로 오해받을까 봐 수식어에 고민 하고 있다는 제퍼슨이  찰스 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8216;신은 원래 그렇게 자연스레 홀로 존재 하셨는데&#8230;&#8217;</span></p>
<p><span dir="LTR" lang="en-US">이렇게 되 뇌이자  문득 찰스는 그들이 독점하려는 &#8216;God&#8217; 대신, 가톨릭의 전통 교부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Natural Law) 철학의  보편적 개념을 담아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프랑스 유학시절 무척이나 빠져 들었던 자연법 사상. 아리스토 텔레스가 예수를 만나면서 시작 돼 스콜라 학파로 이어져 꽃을 피웠던, 인간을 포함한 세상 자연계를 모두 만든 신이 그 자연에 그렇게 오롯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태초의, 원래의, 유일한 의미를 다 담은 내추럴(Natural), 자연 (Nature)계통의  단어는 어떨까요? 태초의 원인이자, 만물에 깃든 유일하고 근원적인 신&#8221;의 개념을 담은&#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렇습니다. 찰스경. 그거 였습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캐럴의 제안에 제퍼슨이 대뜸 무릎을 쳤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시 이신론자들과 철학자들에게 &#8216;Nature(자연)&#8217;는 단순히 풀과 나무가 아니라, &#8220;우주를 움직이는 거대한 이성과 질서&#8221;를 뜻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제퍼슨은 이내 소리치듯 말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그렇다면 &#8216;자연의 신(Nature&#8217;s God)&#8217;이 어떻겠습니까? 인간의 이성과 우주의 법칙을 만든,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거대한 창조주 말 입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거 아주 좋은 표현이오, 제퍼슨 의원”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리고 그 앞에 누그도 부인 할 수 없는 세상의 질서 자연의 법(Laws of Nature)을 적는 겁니다.  됐습니다. 역시 일등 시민 찰스 선생님이십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렇게 두 사람의 논의 끝에 등장한 것이 바로 실제 독립선언서 첫 문장에 등장하는 &#8220;Laws of Nature and of Nature&#8217;s God (자연법과 자연의 신)&#8221;이었다.  특정 종교의 경전에만 나오는 신이 아니라, &#8216;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그 속에 법칙을 부여한 태초의 거대한 신&#8221;이라는 의미로 &#8216;Nature&#8217;s God&#8217;을 쓴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제퍼슨이 책상에 놓여 있던 펜을 들어 달필로 그 단어들을 큼지막하게 쓰고 캐럴을 바라보던 순간 </span></p>
<p><span dir="LTR" lang="en-US">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서로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여담이지만  두 사람은 당시 어떻게 호칭 했을까?  둘은 동년배가 아니다. 찰스 캐럴이 제퍼슨보다 6살 위였다. 캐럴 1737년생, 제퍼슨 1743년생, 당시 기준으로 6살 차이는 꽤 큰 형님뻘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18세기 후반 서양의 &#8216;젠틀맨(Gentlemen)&#8217; 계층은 사적으로 아무리 친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8220;헤이, 토마스!&#8221;, &#8220;어이, 찰스!&#8221;라고 이름을 막 부르지 않았다. 식민지도 마찬가지.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평생을 함께 한 정치적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제임스 매디슨과 제임스 먼로조차도 사석에서 서로를 &#8220;매디슨&#8221;, &#8220;먼로&#8221;라고 성(Last Name)으로 부르거나 서신에서는 항상 &#8220;My Dear Sir(나의 친애하는 경)&#8221;으로 시작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토마스 제퍼슨을 &#8220;톰(Tom)&#8221;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세상에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본적으로 대화할 때는 서로를 &#8220;Mr. Jefferson&#8221;, &#8220;Mr. Carroll&#8221;이라고 불렀고, 대화 중간중간 대답하거나 상대의 의견을 환기할 때는 &#8220;Sir(각하, 경, 선생)&#8221;를 무수히 붙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 &#8220;Mr.&#8221;와 &#8220;Sir&#8221;를 한글 대사로 옮길 때 &#8216;제퍼슨 씨&#8217;, &#8216;캐럴 씨&#8217;라고 하면 갑자기 현대 회사원 같아지고, &#8216;제퍼슨 선생&#8217;이라고만 반복하면 너무 건조해 진다. 그래서 작가는 포에틱 라이선스를 발휘해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서로를 존중하던 격식을 살짝 빌려오기로 했다. 그랬더니 문장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부자 뻘인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캐럴 에서도 그랬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God 앞의 수식어가 내이쳐로 낙찰 된 뒤 제퍼슨이 물어 왔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캐럴 경, 네이쳐의 갓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 가운데 가장 으뜸의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끼? 저는 자유의지 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 쓰는  선언서도 내가 존경하는 로크의 자유의지 사상을 근간으로 담으려 합니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지닐 수 있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기독교를 내 안에서 폐기 했을 겁니다.  천주교와 캐럴 경은 이 자유의지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요?   ”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신론자 다운 얘기였다. 다행인 것은 제퍼슨이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이해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찰스의 입장에서 그랬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체퍼슨의 질문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 그리고 자유의지가 어디서 비롯 됐느냐는 근본적이 질문이었다. 왜 라는 의문 까지 포함돼 있는 질문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자유 의지를 그토록 강조 하시니 제가 더 반갑습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어떻습니까? 독실한 신자이신 선생은 다르게 생각 하실텐데 그 얘기를 들려 주시지요.”</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천주가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이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태초에 주신 선물이 자유의지 였다는 생각은 오래 전 부터 하고 있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찰스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자 굴레 이기도 했던 자유의지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차분히 설명 했다.</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945"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21954_35807_1228.jpg" alt="" width="933" height="445" /></p>
<p>&nbsp;</p>
<p><span dir="LTR" lang="en-US">자유 의지야 말로 어린 시절부터 찰스를 신앙에 묶어둔 교두보 였다. 자유의지에 대해 어린 찰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이는 부찬 캐롤옹이었다.  왜 전능하신 천주 께서 악을 없애시지 못하냐는 당연한 질문을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대답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린 찰스의 뇌리에는 이 자유의지와 천주의 은헤가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자유의지의 가장 바람직하고 보편적인  긍정 덕목이 이성과 양심이다.  천주교를 포함하는 기독교에서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도구이자, 죄로 인해 타락하여 구속(회복)이 필요한 영역으로 이해된다.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전적인 신뢰는 경계하는 이중적인 관점을 가진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 가운데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고유한 선물로, 진리를 탐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요한 도구다. 그런데  교만해진 이성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판단의 주인으로 삼는 오류를 범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발아된 인간의 이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겸손과 감사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날 찰스가 토마스에게 간곡히 전한 신앙적 진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성경은 타락한 이성을 맹신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8216;거듭나고 구속된 이성&#8217;을 바탕으로 성경적 진리를 깨달아 갈 것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창조주가 심어주신 보편적인 양심이 있어, 선과 악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양심 역시 죄로 인해 오염되어 마비되거나 문화와 상황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 찰스기 배웠고 그가 체화한  종교관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따라서 신앙인의 입장에서 인간의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항상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성령의 조명에 비추어 건강하게 교정되어야 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궁극적으로 천주교는  이성과 양심을 버려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귀한 능력들이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기준 안에서 다시 바로 서고 회복(구속)되어야, 비로소 참된 선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이 역사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 제퍼슨이라는 희대의 천재, 천하의 재주꾼을 한걸음 이라도 신앙의 길에 들어 서게 하려면 그 못지 않게 뛰어난  교부들이 무엇을 어떻게 고민 했는지 들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재퍼슨은 매우 흥미 진진한 표정으로 캐럴의 설명을 경청 했다. 분명코 군데 군데 아는 얘기 였을 텐데도 아는척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찰스의 온화한 목소리로 물 흐르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스펀지 처럼 흡수 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자발적 선택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으나, 시대가 흐르고 교리가 체계화되면서 &#8216;인간의 타락&#8217;이 이 세 가지 능력(선택과 책임 그리고 구원 혹은 은혜)에 미친 영향에 대한 해석이 정파마다 크게 달라졌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초기 교부 시대 (1~4세기)에는 자유의지와 이성의 옹호 경향이 컸다.  초기 교부들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과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변증해야 했다. 이들은 스토아 철학 등의 운명론(결정론)에 맞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선택의 자유를 강력히 옹호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성은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고유한 통로로 긍정되었다. 유스티누스,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등 초기 교부들은 인간이 꼭두각시가 아니며, 자발적으로 신을 따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선택권 자유의지을 가졌다고 가르쳤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신의 심판과 상벌도 불공정하다는 입장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예수를 몰랐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성 역시 신의 &#8216;로고스(Logos, 말씀·이성)&#8217;의 씨앗이 뿌려진 결과라고 보았다.  또 이방인이라도 율법 없이 마음에 새겨진 도덕적 기준(양심)을 통해 선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성경적 전통을 이어받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학적 대격돌이 일어났다. 영국의 수도사 펠라기우스와 북아프리카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논쟁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는 그 개인의 문제일 뿐이며, 인간의 이성, 양심, 자유의지는 타락 후에도 온전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죄를 짓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에 맞서 원죄(Original Sin) 교리를 정립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이성은 어두워졌고, 양심은 오염되었으며, 자유의지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보았다.타락 전 인간은 &#8216;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8217;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8216;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8217;가 되었다. 따라서 구원은 신의 주권적인 은혜(Grace)로만 가능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의 은혜가 먼저 임할 때만 회복되어 선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감정(정서, emotions)이 이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물욕이나 재물욕 그리고 육체적인 욕심에 빠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플라톤처럼, 어거스틴도 인간의 이성이 감성을 다스려야만 한다고 보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러면서 찰스는 어거스틴이 신이 전능 하다면 왜 악이 존재 하느냐면서 선신과 악신이 동등한 힘으로 존재한다는 마니교에 빠졌던 일화를 잠깐 들려 주었다. 어거스틴이 회심한 이유도 자유의지 였다고 전해 줬다. 꽤 큰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후 서방 기독교는 인간의 자율성보다 신의 은혜의 절대성을 우위에 그리고 중심에 두게된다. 신앙의 새 출발이기도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되면서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기독교 신학 체계 안에서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화두였다.  이를 중세 스콜라 철학이 추구한 이성과 신앙의 조화 라고 지칭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대표적인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는 &#8220;은혜는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8221;고 보았다. 인간의 타락으로 이성과 의지가 상처를 입었지만 전적으로 파멸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는 이성은 자연 세계의 진리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 위대한 교부 아퀴나스는 양심은 신이 부여한 도덕적 성향(신데레시스)을 지니고 있어 선을 추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이성의 판단을 따라 최고의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은혜를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고 설파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후기 중세에 오면서 아퀴나스의 이성 중심주의에 반대하여 의지의 우위를 주장하는 경향이 다시 강해 진다. 신의 의지도, 인간의 의지도 이성에 종속되지 않는 절대적인 자율성을 지닌다고 보았는데 이는 이후 종교개혁 사상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16세기에 불어 닥친  종교개혁은 단절과 연속성의 갈림길 이었다.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낙관했다고 비판하며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철저한 은혜 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창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에라스무스 이래 인문주의 에서는  &#8220;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은혜가 협동하는 것&#8221; (신인협동설)이 주류를 이뤘다면 마르틴 루터에 이르면 &#8220;인간의 의지는 &#8216;노예의지&#8217;  일 뿐이며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오직 은혜론이 대두된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마르틴 루터에 이어 장 칼뱅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했다. 칼뱅은  인간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선을 행하거나 신을 선택할 자유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신의 주권적 선택(예정론)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성과 양심 역시 왜곡되어 신령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보았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가톨릭은 이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타락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약화되기는 했으나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선언했다. 신의 은혜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동의하고 협력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트리엔트 공의회):</span></p>
<p><span dir="LTR" lang="en-US"> 17세기 이후  아르미니우스 주의에 의해 개신교 일부에서도 칼뱅의 절대 예정론에 반발하여, 신의 은혜가 선행하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8216;예지예정&#8217;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그리고는 찰스는 제퍼슨 가장 존경한다는 존 로크의 이야기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된 기독교 역사 게인 교습 강의의 피날레를 장식 하려 했다.  제퍼슨은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존 로크의 사상을 신봉했고 실제  독립선언서 전반에 그의 사상과 철학으로 채웠다. 그런데  제퍼슨이 화제를 바꿨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인간 자유의지 와 신의 권능에 관한 가톨릭의 역사가 매우 진지하면서도 현실적이군요, 그런데  </span><span dir="LTR" lang="en-US">찰스 선생은 화체설을 믿으십니까?”  제퍼슨이 뜬금 없이 이 질문을 해 왔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무슨 뜻에서 어떤 의도로 묻고 있는지는 짐작이 갔지만 캐럴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정쩡하게 답했다가는 오늘 들인 공이 수포로 돌아 가겠다고 생각 됐기 때문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물론이죠, 믿고 있습니다. 영성체 때 받는 떡은 예수님의 몸이요, 포도주는 피가 틀림 없습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천주교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은 성찬례 시 사제의 축성 기도를 통해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있으나, 그 본질(실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성체)과 피(성혈)로 완전히 변화한다는 교리다.  개신교의 예정설 만큼 논란이 많은 교리 중의 하나였다. (계속)</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81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81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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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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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Wed, 17 Jun 2026 04:10:32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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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메릴랜드 400 용사 (2) 안동일 작 1776년 8월 2일, 이날은 미국 독립과 관련 역사적인 날이었다.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 의사당(현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그해 7월 4일 독립선언 전후의 상황을 역사학계에서는 흔히 ‘7월 4일의 신화(The Myth of the Fourth of July)’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캐럴과 메릴랜드 400 용사 (2)</h4>
<p><strong>안동일 작</strong></p>
<p>1776년 8월 2일, 이날은 미국 독립과 관련 역사적인 날이었다.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 의사당(현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br />
그해 7월 4일 독립선언 전후의 상황을 역사학계에서는 흔히 ‘7월 4일의 신화(The Myth of the Fourth of July)’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8216;7월 4일에 모든 대표가 모여 엄숙하게 원문에 서명했다&#8217;는 모습은 사실 후대에 각색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p>
<p>7월 4일에 통과된 것은 우리가 박물관(정확히는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보는 화려한 필체로 서명된 그 문서가 아니었다. 7월 4일 그날은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잡고 대륙회의가 수정한 텍스트(문구)가  승인된 날이다. 이날 실제 서명한 사람은 대륙회의 의장인 존 핸콕(John Hancock)과 서기인 찰스 톰슨(Charles Thomson) 단 두 명뿐이었다.<br />
그날 최종 문구가 승인되자 선언문은 인쇄소 &#8216;던랩 브로드사이드&#8217;로 보내져 밤새 약 200장의 전단지(Broadside) 형태로 인쇄되었다. 여기에는 서명자 명단 없이 핸콕과 톰슨의 이름만 박혀 각 주의 의회며 워싱턴 사령관이 주둔하고 있던 뉴욕의 대륙군 병영등 주요 기관으로 우송되었다.</p>
<p>공식적으로 양피지에 정식 필사(Engrossing) 하자는 결정이 떨어진 것은 7월 19일이었다. 대륙회의 서기처의 명필  티모시 매틀랙(Timothy Matlack)이 작업을 마친 후, 8월 2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표들이 모여 필사본에 서명하는 서명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독립선언이 마침내 공식화 되는 순간이었다.</p>
<p>서명식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축제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 한다는 것은 영국 왕실에 대한 명백한 &#8216;반역&#8217; 이었다. 당시의 법대로라면 전 재산 몰수는 물론 교수형에 처해질 목숨을 건 서명이었다.</p>
<p>그날, 8월2일 오전. 얼마전 대륙회의 정식 의원이 된 찰스 캐럴은 회의장으로 쓰이고 있던 펜실바니아 식민의회 건물 복도끝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이미 회의장으로 들어 가 있었지만 회의 개회 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관사에서 올리던 기도를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서 였다.</p>
<p>그때 찰스 캐럴은 세인트 메리 가톨릭 성당 사제관에 머물고 있었다. 터반의 숙박비며 식비등 경비를 절약 해 메릴랜드 민병대의 군자금으로 쓰기 위해서 였다. 아직도 총독과 영국 왕실의 눈치를 보면서 독립운동에 지갑을 열지 않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시위이자 압력이기도 했다.</p>
<p>찰스 캐럴이 몬트리올에서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때는 1776년 6월 12일 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가 그때 부터 필라에 머물면서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를 했고 7월 4일 독립선언서 표결과 발표에 주역으로 나선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실제와 달랐다. 그는 필라에 도착해서 엿새 쯤 머물다 급히 향리로 달려 가야 했다. 그리고는 한달을 그곳에서 바쁘게 뛰어 상황을 정리 해야 했던 것이다.</p>
<p>당시 메릴랜드의 정세는 대단히 복잡했다. 1776년 봄과 초여름까지만 해도 메릴랜드 의회는 &#8220;영국과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8221;며 독립 선언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대륙회의에 파견된 체이스, 파카등  대표들에게도 &#8220;독립에 함부로 찬성하지 말라&#8221;는 지침을 내린 상태였다. 또 민병대 보강도 재정 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태 였다.</p>
<p>이럴 때 찰스 캐럴은 아나폴리스로 가서 뛰어난 논설과 막후 정치력으로 메릴랜드 여론과 의원들의 망설임을 돌려놓았다. 결국 6월 28일, 메릴랜드 의회는 독립 반대 지침을 철회하고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한다. 그러면서 의원들은 이번에는 캐럴이 대륙회의의 정식 대표로 자리 할것을 요청했고 캐럴도 이를 받아들여 메릴랜드 주 의회는 7월 4일 회의에서 그를 정식 대표로 위촉, 임명한다.</p>
<p>따라서 대륙회의가 독립선언문을 승인한 그날 캐럴은 필라델피아 회의장에 없었다. 독립선언 투표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날 표결은 큰 의미가 없었다. 주지하는 대로 당시 대륙회의는 1개 주당 딱 1표(One vote per colony)만 행사할 수 있었다. 즉, 뉴욕주에 대의원이 5명이 있든 8명이 있든 뉴욕주의 이름으로 던질 수 있는 표는 오직 한 표뿐이었다. 메릴랜드도 마찬가지,  메릴랜드 대표는 3명이 현장에 있었다.<br />
그리고 &#8220;영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인가&#8221;에 대한 근본적인 토론과 투표는 이미 이틀 전인 7월 2일에 끝난 상태였다. 당시 찬성 12, 기권 1 (뉴욕) 으로 독립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7월 4일에는 무엇을 토론했을까? 바로 토마스 제퍼슨이 쓴 &#8216;독립선언서의 문구&#8217;를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는 최종 수정 토론이 있었던 것이다.<br />
대표들은 문장 내용과 표현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며 제퍼슨이 쓴 원안의 약 5분의 1 가량을  편집하고 지워버렸다. 특히 남부 주들의 반발로 노예 무역을 비판하는 구절이 통째로 삭제되었고, 영국 국왕과 국민들 까지도 강하게 비난했던 감정적인 표현들도 대폭 순화되었다. 제퍼슨은 자기 글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며 회의장 구석에서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져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p>
<p>수정 작업을 마치고 최종 문안을 확정해 받아들인 행위가 바로 7월 4일의 &#8216;독립선언서 채택&#8217;이다. 당일 회의장에 있었던 인원은 45명 정도였다. 뉴욕주 대표단(8명)은  &#8220;아직 찬성하지 말라&#8221;는 지침을 받아 7월 4일 투표 당시 기권한 상태로 앉아 있었고, 일부 대표들은 개인 사정이나 질병으로 결석했다.</p>
<p>한편 찰스 캐럴은 캐럴은 정식 대표로 위촉된 뒤에도  메릴랜드 민병대를 뉴욕의 워싱턴 장군에게 보내는 일에 정열과 시간을 쏟아야 했고 7월 18일이 돼서야 필라델피아로 와서 공식적으로 대표단에 합류했다. 이제 정식 대의원 생활이 보름째로 접어드는 셈이었다.</p>
<p>그날 8월 2일, 찰스는 자신이 믿는 천주의 뜻이며 역사의 부름에 따라 기꺼이 펜을 들어 그 무거운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관사에서 조금 떨어진 대륙회의장으로 아침 일찍 서둘러 걸어 왔다. 각오와 상념 속에서&#8230;.<br />
사제 관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아침마다 주임신부의 집전 으로 미사를 올릴 수 있었다. 미사에서는 영성체 전후에 개인 기도의 시간이 있다. 이날 아침 미사에서 올린 기도는 특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륙회의장 복도 에서의 기도는 아침부터 계속된, 어쩌면 걸어 오면서도 계속 됐던 기도의 마무리 이기도 했다.</p>
<p>자신이 오늘 행할 일이 천주의 뜻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천주에게 다시한번 확인하고 자신을 가다듬기 위한 기도였다. 그가 올리는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안위를 넘어 &#8220;주님의 뜻 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 땅에 가톨릭을 비롯한 모든 소외된 신앙인들이 숨 쉴 수 있는 제단을 허락하소서&#8221;라는 절박한 참회와 간구였다.</p>
<p>그러면서 그의 기도는 관상 기도로 흘렸다. 본문은 구약 열왕기 4권의 다윗과 골리잇의 전투 상황이었다.<br />
많은 이들이 다윗의 전투 이야기는 사무엘서 아닌가하고 갸웃 할텐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천주교 성경은 개신교와 책 이름이 약간 달랐다. 개신교의 &#8216;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8217;를 가톨릭은 &#8216;열왕기 제1, 2, 3, 4권(1~4 Kings)&#8217;으로 묶어 불렀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캐럴의 성서에는  &#8216;열왕기 제1권(1 Kings) 17장&#8217;이었다.<br />
18세기 후반(미국 독립 혁명기) 찰스 캐럴과 사촌 존 캐럴 신부등 천주교인들이 읽었던 영어 성경은 &lt;두에-랭스 성경(Douay-Rheims Bible)&gt;이 유일했다. 개신교에 &lt;킹제임스 성경(KJV)&gt;이 있다면, 가톨릭에는 박해를 피해 프랑스 두에(Douai)와 랭스(Rheims)로 망명한 영국 가톨릭 학자들이 번역한 &lt;두에-랭스 성경&gt;이 있었다.<br />
당시 미국 식민지에는 천주교 인쇄소가 없었기 때문에 캐럴 가문 같은 부유한 귀족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유학길에 이 &lt;두에-랭스 성경&gt;을 고급 가죽 제본으로 들여와 가문 전래의 보물로 삼았다.</p>
<p>그럼에도 찰스 캐럴은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 개신교(또는 이신론) 배경의 건국 아버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와 철학을 논했기에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혹은 공공 문서의 뉘앙스를 맞추기 위해 개신교 성경의 표현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거부감 없이 참고했다. 퍼스트 시티즌 때도 그랬다.</p>
<p>그날 아침 관상기도를 올리는 그의 눈앞에 엘라 골짜기가 펼쳐 졌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필리스티아군은 저쪽 산 위에, 이스라엘 군은 이쪽 산 위에 맞서고 있었는데 회전을 앞두고 양군은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마주 선 형국 이었다. 찰스는 이스라엘 군 맨 앞쪽에 서 있었다. 마침내 7척 거구의 골리앗이 나섰다.<br />
“너희는 어쩌자고 나와서 전열을 갖추고 있느냐? 너희는 사울의 종들이 아니냐? 내가 오늘 너희 이스라엘 전열을 모욕하였으니, 나와 맞붙어 싸울 자를 하나 내보내 봐라.”<br />
그러자 다윗이 나섰다.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br />
골리앗이 다윗에게 “겨우 막대기 하나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다.<br />
그러면서  다윗에게 소리 쳤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러자 다윗이 맞대꾸 했다.<br />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br />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p>
<p>찰스가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려 하는데 소년 다윗의 모습이 스트래트의 모습으로 또 오브라이언의 모습으로 변했다. 골리앗의 모습은 초상화에서 보던 조지 3세 왕의 모습으로 변했다.</p>
<p>&#8216;그렇군요 주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에 나설 군인 용사 들. 우리들의 자삭들인 소년병,  이땅 다윗들의 안위 였군요&#8217;  찰스는  다시금 깨달아 주님께 고했다.</p>
<p>예수회 관상기도는 존 캐럴 신부의 기도 때도 설명 했듯이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바탕을 둔 기도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성경의 장면에 직접 참여하여 하느님과 교감하는 것이 핵심. 성경 속 사건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당시의 풍경, 냄새, 온도, 소리, 인물들의 표정까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이다.</p>
<p>아침의 상상기도는 그 순간 복사 소년들이 종을 울리는 바람에 거기서 그쳐야 했다.</p>
<p>찰스는 의사당으로 걸어 오면서도 줄곳 지금 뉴욕에 있는 메릴랜드 민병대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 영지의 청년들 이었다. 더욱이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세례 때 대부로 나섰던 청년 이었다.  찰스의 극성으로 그 똘망한 오브라이언 과 그들은 지금 워싱턴 장군의 직속 부대로 편입돼 있었다. 캐럴은 6월 말, 자신이 전적으로 비용이며 장비를 지원해 메릴랜드 민병대를 뉴욕으로 전격 파병시켰다. 당시 워싱턴은 영국 해군의 거대한 함대가 밀려오는 뉴욕(맨해튼과 롱아일랜드)을 방어하기 위해 피를 말리는 고독한 싸움, 승산없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캐럴은 워싱턴에게 &#8220;메릴랜드의 가장 용맹한 아들들을 보냈으니, 부디 전선을 지켜내 주십시오&#8221;라는 요지의 서한을 함께 보냈다.</p>
<p>이 메릴랜드 연대,  윌리엄 스몰우드 대령이 이끈 부대는 앞서 언급한대로 화려하고 근사한 유니폼을 입어 &#8216;젠틀맨 연대&#8217;로 불렸다. 이들이 보무도 당당히 맨해튼에 입성할 때, 사기가 떨어져 가던 워싱턴의 대륙군과 뉴욕 시민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p>
<p>1776년 7월 6일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은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후, 뉴욕에 있던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서한과 함께 독립선언서 인쇄본을 보냈다. 선언서를 건네받은 워싱턴 장군은 매우 흡족해 하며 이를 군대와 뉴욕 시  전체에 알리기로 했다.<br />
워싱턴 장군은 7월 9일 저녁 6시, 뉴욕시 (베터리 파크) 에 집결한 대륙군 병사들과 시민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공식적으로 낭독하도록 했다. 사기가 떨어져 있던 병사들에게 우리가 왜 영국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 명확한 명분과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군대와 군중은 열광하며 환호했다. 특히 왜 영국왕 조지3세가 타도 돼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그랬다. 선언서의 낭독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큰 자신감과 결속력을 주었다.  거기에는 찰스 캐럴의 메릴랜드 연대도 포함돼 있었다.</p>
<p>&#8220;주여 저들에게 마침내 결단의 순간이  도달하였나이다.&#8221;</p>
<p>찰스는 대륙군과 민병대원 모두에게 다윗의 힘과 지혜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 뒤 회의장으로 갔다.<br />
위더스푼 목사가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환하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br />
“캐럴 선생 기도 하시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br />
뉴저지 대표인 그는 50명 대표 가운데 유일한 목사 성직자였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80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timothy_03.jpg" alt="" width="600" height="712" /></p>
<p>이윽고 서명의 시간이 다가왔다.<br />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이 선언했다.<br />
“ 서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하고 호명 되는 의원들은 지역별로 함께 나와 서명 하십시오”<br />
당시  방을 가득 채웠던 분위기는 &#8216;엄숙함&#8217;과 &#8216;긴장감&#8217; 이었다. 그리고 &#8216;비장함&#8217;이었다.<br />
선언서의 서명은 무작위로 한 것이 아니라, 지리적 원칙(남쪽에서 북쪽 순)에 따라 구획을 나누어 진행되었다. .<br />
가장 먼저  의장 핸콕이 서명했다.<br />
그는 서명하면서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는지 &#8220;영국 국왕(조지 3세)이 안경을 쓰지 않고도 내 이름을 읽을 수 있도록 해서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을 두 배로 올리게 만들어 주겠소!&#8221;라고 외치면서  정중앙에 크고 화려한 글씨로 이름을 남겼다.<br />
오늘날 미국에서 그의 이름 &#8220;John Hancock&#8221;은 &#8216;친필 서명&#8217;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인다.</p>
<p>핸콕의 서명 아래로, 의원들은 서기의 호명에 따라 가장 남쪽에 있는 식민지 조지아 부터 왼쪽에 서명을 시작했다. 단상 앞 테이블에는  당시 구 할 수 있는 가장 고급의 깃펜과 잉크가 놓여져 있었다. .<br />
윗줄 가장 왼쪽에 조지아의 대표들이 서명했고 그 옆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들의 서명이 끝나고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차례가 되었다.<br />
당시 의사당 내부에는 잠깐 헨콕의 현상금 얘기에 작은 웃음소리가 나왔지만 그 후 계속 팽팽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8220;무겁고 두려운 침묵(pensive and awful silence)&#8221;의 시간 이었다. (서명자 중 한 명인 벤자민 러시의 회고)</p>
<p>그때 메릴랜드에 이어 서명하려 바로 뒤에 줄을 서던 뚱뚱한 체격의 버지니아 대표 벤저민 해리슨이 아직 앉아있던 깡마른 뉴햄프셔의 동료 엘브리지 게리를 돌아보며  농담을 던졌다.<br />
&#8220;게리, 자네보다 내가 유리하겠군. 교수형이 집행될 때 내 몸무게 덕에 나는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자네는 가벼워서 죽을 때까지 공중에서 몇 시간 동안 바둥거려야 할 걸세.&#8221;<br />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결코 박장대소는 아니었다.</p>
<p>이윽고 메릴랜드 차례가 되었다. 캐럴은 새뮤얼 체이스, 윌리엄 파카, 토머스 스톤에 이어 네번째로 맨 밑에 서명했다.<br />
그가 서명대에서 &#8216;Charles Carroll&#8217;이라고 이름을 적자, 곁에 있던 다른 의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체이스 의원으로 짐작 된다.<br />
&#8220;메릴랜드 식민지에 찰스 캐럴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자네는 영국 왕이 와도 누군지 몰라 무사하겠군.&#8221;<br />
이 말을 들은 캐럴은 씩 웃으며 즉시 펜을 다시 들어 이름 뒤에 &#8216;오브 캐럴턴(of Carrollton)&#8217;이라는 자신의 영지 이름을 덧붙였다. &#8216;영국 왕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하겠다&#8217;는 도발이자, 자신의 엄청난 재산과 목숨을 모두 걸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p>
<p>그러자 저쪽에서 &#8216;수백만 달러가 날아가는군&#8217;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많은 이들이 달러라는 표현을 들어 후대에 각색된 이야기가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데 당시 달러가 쓰여지고 있기는 했었다.<br />
대륙회의가 최초로 달러(Dollar) 단위를 도입해 공식 종이 화폐인 &#8216;대륙 화폐(Continental Currency)&#8217; 발행을 승인한 것은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해인 1775년 6월 22일 이었다. 당시 혁명 전쟁 비용(군대 조직, 장비 구입 등)을 조달할 재원이 부족했던 대륙회의는 통화를 찍어내기로 결정했고, 동년 7월 29일에 첫 번째 인쇄 및 발행을 구체적으로 승인했고 가치는 크게 인정 받고 있지는 못했지만 쓰여지고는 있었다.</p>
<p>캐럴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음직 하다.  &#8216;그래, 작년 6월에 우리가 승인했던 그 보잘것없는 대륙 화폐 단위를 비웃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가 걸은 것은 진짜 내 전 재산과 내 목숨이다. &#8216;<br />
버지니아에 이어 펜실바니아 대표단이 서명 했고 뉴저지 뉴욕 코네티컷 순으로 이어졌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은 서명하러 나가면서 찰스 캐럴의 어깨를 두드려 친근함을 표시했다.</p>
<p>8월 2일 당일 필라델피아에 없었거나,  새로 임명되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의원들이 제법 있었다. 대륙회의는 이를 위해 정치적·지리적 구획에 맞춰 의도적으로 공간(여백)을 비워두는 방식을 취했다.<br />
이후에 도착한 의원들은 자기 고향 식민지 대표단이 받아둔 그 &#8216;공란&#8217;을 찾아가서 이름을 채워 넣었다. 우리가 보는 독립선언서에는 총 56명의 서명이 들어있지만  8월 2일 당일 서명한 인물은 50명이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라 당일 서명자를 49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br />
나머지 6~7명의 의원들은 비워둔 공란&#8217;에 수개월에 걸쳐 나누어 서명했다. 7월 4일 독립 결의안 투표에는 참여했으나 끝까지 독립선언서 서명을 거부하고 떠난 존 디킨슨(John Dickinson) 같은 인물도 있어서, 그가 나간 자리는 공란으로 남지 않고 다음 사람으로 채워졌다.</p>
<p>독립선언서에 최종 서명한 총 56명의 대의원 중 가장 많은 대표가 서명한 주는 펜실베이니아주(9명)였고 가장 적은 대표가 서명한 주는 로드아일랜드주와 뉴햄프셔주(각각 2명)이었다.<br />
펜실베이니아주는 독립선언서가 채택되고 서명식이 열린 장소인 필라델피아(독립기념관)가 속한 주답게 벤자민 프랭클린, 로버트 모리스 등을 포함해 가장 많은 9명이 서명했다.  버지니아주는: 독립선언서의 핵심 기초자이자 훗날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되는 제퍼슨을 비롯하여 총 7명이 흔적을 남겼다. 메사스세츠주는 대륙회의 의장이자 가장 크고 화려한 서명으로 유명한 존 핸콕과  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아담스를 포함해 5명이 참여했다.</p>
<p>독립선언서 서명이 끝난 후, 조약 체결식 같은 화려한 폐회식이나 축하 행사는 전혀 없었다. 서명이 끝나자마자  의장 존 핸콕은 회의를 끝내지 않고 곧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br />
당시 가장 큰 현안인 군대에 대한 보급, 재정 확보, 캐나다 전선 보고 등 긴급한 국방 업무를 논의한 뒤 저녁 무렵에야 평소처럼 하루 회의를 마쳤다.<br />
이날 특기할 일은 찰스 캐럴이 군사 보급을 총괄하는 대륙회의 전쟁위원회(Board of War) 위원으로 위촉된 일이다.<br />
캐럴이 메릴랜드 민병대와 혁명군 대륙군에 본격적으로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대기 시작한 기점은 1774년 말, 독립 민병대들이 결성되던 시기부터 였다. 가장 집중적으로 자금이 소요되고 그의 영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캐나다 사절단 활동 및 메릴랜드 연대가 전선으로 이동하던 1776년 봄~여름이었다. 이미 그는 군자금의 보루였었지만  지금 까지 후원자 독지가의 입장 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당사자, 담당자가 되었다는 얘기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81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licensed-image-3.jpg" alt="" width="2048" height="1356" /></p>
<p>캐럴이 독립 선언으로 대륙군과 민병대의 안위가 큰 현실적 문제로 대두 됐기에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천주 앞에  다시금 다졌다고 한다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종교의 자유에 관한 사항은 독립 선언서에 어떻게 반영 되었을까? 혹시 불만은 없었을까?</p>
<p>독립선언서 자체는 통치 체제를 규정하는 헌법이 아니기 때문에 &#8216;종교의 자유&#8217;라는 명시적 조항은 없다. 대신 제퍼슨은 특정 종교(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 &#8216;자연법과 자연의 신(Laws of Nature and of Nature&#8217;s God)&#8217;이라는 보편적 표현을 사용해 모든 인간에게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있음을  천명했다.<br />
제퍼슨이 쓴 최초의 초안에는 &#8220;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신성하고 부정할 수 없다(sacred &amp; undeniable)는 것을 믿는다&#8221;라고 적혀 있었다. 다분히 종교적인 어조였다.<br />
하지만 초안을 검토하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 문구를 보고 붉은 펜을 들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랭클린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8216;신성한&#8217;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새로 적었다. 그렇게 탄생한 문장이 그 유명한 &#8220;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self-evident)고 믿는다&#8221; 라는 문장아다.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당연히 알 수 있는 진리라는 뜻으로 바꾼 것이다. 초졸 현명옹의 심모와 혜안이었다.</p>
<p>제퍼슨은 평생 자신이 이룬 수많은 업적 중 무덤 비석에 딱 세 가지만 적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중 두 개가 바로 &#8216;독립선언서의 저자&#8217;와 &#8216;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저자&#8217;였다. 그만큼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동등한 가치로 보았던 인물이다.</p>
<p>제퍼슨은 당시 영국의 국교(성공회) 강요와 종교적 박해를 영국의 폭정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특정 종교가 국가의 권력을 잡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8216;이신론자&#8217; 였다. 이 때문에 독립선언서에는 &#8216;예수&#8217;나 &#8216;기독교&#8217;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첫 문장에 &#8216;신&#8217;은 등장한다.  자연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br />
제퍼슨이 초안에 쓰고 결국 채택된  &#8216;자연의 신(Nature&#8217;s God)&#8217;이라는 표현에 대해, 독립 선언 당시 기독교 목사들의 반응은 의외로 대단히 긍정적이었으며 적극적으로 환영했다.<br />
현대 시각에서는 &#8216;기독교적이지 않은 이성주의적 표현&#8217;으로 보이지만, 당시 미국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목사들은 이 문구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목사들은 강단에서 &#8220;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권리(생명, 자유)를 침해하는 폭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뜻에 부합한다&#8221;고 설교하곤 했다.</p>
<p>&#8216;자연의 신&#8217;이라는 표현은 목사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정당한 정치·신학적 수사로 받아들여졌다. 또 이 표현이야 말로 기독교의 교파 간 갈등을 묶어줄 &#8216;신의 한 수&#8217;였다. 만약 제퍼슨이 특정 교파의 색채가 묻어나는 &#8216;원죄&#8217; &#8216;삼위일체&#8217; &#8216;구원&#8217; 같은 단어를 썼다면, 도리어 교파 간의 교리 논쟁이 촉발되어 독립 대열이 분열되었을 것 이라는 견해다.<br />
목사들은 이 &#8216;자연의 신&#8217;과 &#8216;창조주(Creator)&#8217;라는 보편적인 표현이 모든 기독교인을 하나로 통합하고 신앙적 거부감 없이 독립 의지를 다지게 만드는 훌륭한 문구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p>
<p>독립선언서가 채택된 후,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기독교 식민지 정부는 &#8220;모든 교회는 일요일 예배 시간에 이 선언서를 신도들 앞에서 낭독하라&#8221;는 지침을 내렸다. 목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강단에서 &#8216;자연의 신이 부여한 자유&#8217;를 낭독했고, 예배 후에는 독립을 위한 축도와 기도를 올렸다.</p>
<p>이 기저에 찰스 캐럴의 영향이 지대 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거나 간과 하고 있다. .<br />
시티 터반에서 제퍼슨과 캐럴이 종교적 자유에 대해 교감을 나누었다는 앞선 서사는 전한 바 있다. 예의 &#8216;자연의 신&#8217;은 찰스의 아이디어 였다.</p>
<p>6월 중순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찰스가  고향 메릴랜드의 &#8216;독립 반대&#8217; 여론을 돌리러 아나폴리스로 긴급히 내려가기 전, 필라델피아에 며칠 머물렀던 그 시간이 6월 12일~18일 사이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 집필위원으로 임명돼  하숙방 문을 걸어 잠그고 막 첫 문장을 고민하던 바로 그 칩거 초반이다.<br />
제퍼슨이 필라델피아 시장가(Market Street)와 7번가 모퉁이에 있던 3층짜리 벽돌집(그라프 하우스, Graff House)의 2층 방을 빌려 칩거하며 초안을 작성한 정확한 기간은 1776년 6월 11일부터 6월 28일까지 약 17일간이다.</p>
<p>그 때  찰스 캐럴은 서기처  직원을 통해 토마스 제퍼슨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p>
<p>&#8220;일등 시민이신 찰스 선생님, 수고스럽지만 제 하숙방으로 잠깐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나갈 수는 없고 선생의 그 해박한 유럽 법률 식견과 종교적 고뇌가 이번 선언서에 꼭 필요합니다.&#8221; (계속)</p>
<p>&nbsp;</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81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81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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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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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Mon, 08 Jun 2026 19:26:4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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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메릴랜드 400 용사 (1)   안동일 작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확정된 직후인 1784년 6월,   교황 피오 6세는 궁리 끝에 존 캐럴 신부를 미국의 첫 가톨릭 수장인 대목구장(Prefect Apostolic, 임시 대리 감목)으로 임명했다. 대목구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로서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교황대리 감목구(敎皇代理 監牧區), 그 장(長)의 정식 명칭은 &#8216;교황대리 감목구장&#8217; 이다. 교황을 대리해 교구의 주교와 같은 권한을 대목구에 행사한다는 뜻이다. 대목구는 쉽게 말해 &#8220;아직 정식 교구를 세울 수 없는 선교 지역을 교황을 대신해 다스리는 구역&#8221;으로 조선도 18세기 대목구로 지정돼 지난한 노력과 엄청난 희생 끝에 교단을 출범 시켰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교회가 창설된 후 곧 북경교구에 속하게 되었으나 많은 순교자를 내며 확산돼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朝鮮) 대목구로 설정되어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했고 초대 대목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가 임명됨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span></h4>
<h4><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캐럴과 </span><span dir="LTR" lang="en-US">메릴랜드 400 용사 (1)</span></h4>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안동일 작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파리 조약으로 </span><span dir="LTR" lang="en-US"> 미국의 독립이 확정된 직후인 1784년 6월,   교황 피오 6세는 </span><span dir="LTR" lang="en-US">궁리 끝에 </span><span dir="LTR" lang="en-US">존 캐럴 신부를 미국의 첫 가톨릭 수장인 대목구장(Prefect Apostolic, 임시 대리 감목)으로 임명했다.</span><span dir="LTR" lang="en-US"> 대목구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로서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교황대리 감목구(敎皇代理 監牧區), 그 장(長)의 정식 명칭은 &#8216;교황대리 감목구장&#8217; 이다. 교황을 대리해 교구의 주교와 같은 권한을 대목구에 행사한다는 뜻이다. </span><span dir="LTR" lang="en-US">대목구는 쉽게 말해 &#8220;아직 정식 교구를 세울 수 없는 선교 지역을 교황을 대신해 다스리는 구역&#8221;</span><span dir="LTR" lang="en-US">으로 조선도 18세기 대목구로 지정돼 지난한 노력과 엄청난 희생 끝에 교단을 출범 시켰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한국</span><span dir="LTR" lang="en-US"> 천주</span><span dir="LTR" lang="en-US">교회는 1784년 교회가 창설된 후 곧 북경교구에 속하게 되었으나 많은 순교자를 내며 </span><span dir="LTR" lang="en-US">확산돼</span><span dir="LTR" lang="en-US">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朝鮮) 대목구로 설정되어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했고 초대 대목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가 임명됨과 동시에 명의주교로 성성되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그 후 1962년 3월 10일</span><span dir="LTR" lang="en-US">이 돼서야 </span><span dir="LTR" lang="en-US"> 한국 교회의 13개 대목구가 정식교구로 승격되고 동시에 서울, 광주, 대구는 대교구가 되어 3개의 대주교 관구로 나뉘어져 </span><span dir="LTR" lang="en-US">지금의 </span><span dir="LTR" lang="en-US">교계제도가 확립되었다. 엄청나게 </span><span dir="LTR" lang="en-US">지난한 세월이 필요 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미국은 전광석화 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떤 하늘의 뜻 이었을까.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시 까지 미국 천주교는 런던 대목구 소속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의문이 </span><span dir="LTR" lang="en-US">들 만</span><span dir="LTR" lang="en-US">한 부분</span><span dir="LTR" lang="en-US">이</span><span dir="LTR" lang="en-US">다. &#8220;당시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였고 천주교를 모질게 탄압했다는데, 어떻게 영국의 천주교 교구가 미국까지 관할하고 있었지?&#8221; 라는 생각이 드는 것</span><span dir="LTR" lang="en-US">은</span><span dir="LTR" lang="en-US"> 당연하</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span dir="LTR" lang="en-US">.</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결론부터 말</span><span dir="LTR" lang="en-US">하</span><span dir="LTR" lang="en-US">면 당시 영국에 천주교 조직이 비록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존속해 있었으며, 1784년 전까지 미국 지역을 관할하던 곳은 바로 &#8216;런던 대목구(Apostolic Vicariate of the London District)&#8217;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종교개혁 이후 영국(잉글랜드)에서 천주교는 불법화되었고 기존의 교구 조직은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신자들과 숨어든 신부들은 여전히 남아있었</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교황청은 영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정식 교구(Diocese) 대신 대목구(Apostolic Vicariate)라는 임시 선교지 형태의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1688년 교황청은 잉글랜드 지역을 4개의 대목구로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8216;런던 대목구&#8217;였다.  </span><span dir="LTR" lang="en-US">런던 대목구장은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영국 내 지하 천주교 신자들을 사목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미국이 독립하기 전인 13개 식민지 시절, 미국 땅은 영국의 영토였다. 교황청은 영국의 식민지 세력 확장에 맞춰 &#8220;해외의 모든 영국 식민지 내 천주교 신자는 영국의 &#8216;런던 대목구&#8217;가 관할한다&#8221;는 규정을 제정, 적용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따라서 미국의 메릴랜드나 펜실베이니아 등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과 그곳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도적으로는 영국 런던 대목구장의 지도와 승인을 받아야 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미국이 독립 전쟁을 거쳐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면서 상황이 묘해졌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했는데, 천주교 체제는 여전히 &#8216;영국 런던&#8217;의 지휘를 받는 모순이 생긴 것.  </span><span dir="LTR" lang="en-US">당시 미국의 천주교 신부들도 &#8220;이제 막 영국과 피 터지게 싸워 독립했는데, 우리 보고 계속 영국 주교의 명령을 받으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영국의 </span><span dir="LTR" lang="en-US">첩자 </span><span dir="LTR" lang="en-US">처럼 보일 수 있다&#8221;며 교황청에 독립을 요청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하지만 당시 미국 천주교의 상황은 독립 교구가 될만큼 크지 못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미국의 교구 독립은 프랑스가 촉발한 측면이 크다. 프랑스 교계와 왕실은 독립전쟁 승리의 전리픔의 하나로 미국 천주교를 자신들의 수하로 거두려 했다. 하지만 워싱턴 쪽의 반발과 파리에 있던 프랭클린의 활약으로 프랑스의 계획은 무산 됐다. 그때 프랭클린과 보마르세가 백방으로 뛰었다는 사실은 전한 바 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실은 런던 대목구에서도 그 무렵 미국을 독립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 했었다.  당시 </span><span dir="LTR" lang="en-US">런던 대목구의  부 대목구장 이었던 찰스 월메슬리(Charles Walmesley) 주교</span><span dir="LTR" lang="en-US">가 깨인 이 였다. 존 캐럴 신부와 각별한 교분이 있었던 그는 저간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교구가 독립되지 않으면 프랑스 교계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는 고려가 큰 몫을 했던듯 싶다. 후일 월메슬리 주교는 존 캐럴의 주교 서품식에 주례 집전자로 나선다. 존 캐럴의 주교 서품식은 놀랍게도 영국에서 거행 됐다. 당시 미국과 유럽 천주교 정황을 노정하는 이 일대 사변에 대해서 다음에 자세히 다룬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무튼 여러 갈래에서의 </span><span dir="LTR" lang="en-US"> 요청이 받아들여져 1784년 6월 9일, 교황청은 미국 천주교를 런던 대목구 관할에서 공식적으로 분리</span><span dir="LTR" lang="en-US">해 독립 </span><span dir="LTR" lang="en-US">시켰</span><span dir="LTR" lang="en-US">던 것이다. 미국 천주교 로서는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미국 대목구장(Prefect Apostolic) 임명장을 받았을 때 존 캐럴(John Carroll) 신부의 심경은 고무적이거나 영광스럽기보다는, 솔직히 당혹감과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깊은 고뇌에 가까웠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1784년 당시 존 캐럴은 마흔아홉(49세)의 나이로,</span><span dir="LTR" lang="en-US"> 나름 대로는 치열하게 참여 했던 독립운동 성공의 감격과 많은 회한은 접어두고 </span><span dir="LTR" lang="en-US"> 메릴랜드 로크빌(Rockville)에 있는 어머니의 집 근처에서 조용히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그는 메릴랜드의 시골길을 마차를 타고 다니며 흩어진 가톨릭 신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주고 고해성사를 받는 소박한 순회 신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다시피 </span><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강력한 자부심을 지닌 예수회(Jesuit) 출신이었다. 하지만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예수회가 전격 해체되면서, 그는 졸지에 &#8216;소속 없는 신부&#8217;가 되어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span><span dir="LTR" lang="en-US">부</span><span dir="LTR" lang="en-US">심의 근간이었던 수도회가 공중분해 된 상처</span><span dir="LTR" lang="en-US">를 아직 </span><span dir="LTR" lang="en-US">가슴에 품고 있</span><span dir="LTR" lang="en-US">었</span><span dir="LTR" lang="en-US">던 시기였다.</span><span dir="LTR" lang="en-US"> 교황청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교황청의 전령이</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그에게 미국 천주교의 수장 직을 맡긴다는 서한을 전했을 때, 캐럴</span><span dir="LTR" lang="en-US">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반가운 마음 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고 후일 여러차례 술회 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캐럴은 직책을 맡기를 몹시 주저했다. 그는 동료 신부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하며, 이 자리가 가져 올 행정적 부담과 정치적 풍파를 두려워</span><span dir="LTR" lang="en-US">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거대하고 엄격한 교황청의 관료주의가 이제 막 자유를 찾은 미국 천주교의 정서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span><span dir="LTR" lang="en-US">가 가장 컸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또 큰 </span><span dir="LTR" lang="en-US">문제는 교황청이 준 </span><span dir="LTR" lang="en-US">미국 </span><span dir="LTR" lang="en-US">&#8216;대목구장&#8217;이라는 직책의 한계였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당시 교황청은 캐럴에게 신품성사(새로운 신부를 서품하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주교(Bishop)의 권한을 주지 않았다. 그저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행정만 관장하는 &#8216;임시 수장&#8217;에 불과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캐럴</span><span dir="LTR" lang="en-US">과 주변 인사들도 이점에 당혹해야 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독립전쟁을 거치며 아메리카 대륙에는 &#8220;유럽의 왕이나 군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8221;는 독립 정신이 뼈저리게 박혀 있었는데, 주교 권한도 없이 로마 포교성성(Propaganda Fide)의 명령만 받아 움직이는 구조는 미국 개신교 주류 사회의 냉소와 비난을 불러올 게 뻔했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8220;거 봐라, 천주교는 결국 로마 교황의 꼭두각시 아니냐?&#8221;</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하지만 캐럴 주변의 인사들은 한결 같이 </span><span dir="LTR" lang="en-US">이제 막 싹을 틔운 미국 천주교</span><span dir="LTR" lang="en-US">의 독립이</span><span dir="LTR" lang="en-US">라는 작은 불씨를 어떻게</span><span dir="LTR" lang="en-US">든 살려야 한다면서 캐럴에게 교황청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종용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당시 미국의 천주교 사정은 그야말로 &#8216;황무지&#8217;나 다름없었다. </span> <span dir="LTR" lang="en-US">가톨릭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미약했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당시 미국 전체 인구 약 400만 명 중 가톨릭 신자는 약 2만 5천 명 안팎으로,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소수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미국 전역을 통틀어 활동하는 신부는 20~3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들은 정식 교구 소속이 아니라, 대부분 예수회 출신의 은퇴하거나 흩어진 신부들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어두운 밤, 메릴랜드 시골집 서재에서 캐럴은 촛불을 켜고 로마에서 온 무거운 봉인 문서를 </span><span dir="LTR" lang="en-US">한번 더 </span><span dir="LTR" lang="en-US">내려다</span><span dir="LTR" lang="en-US">면서 펜을 들었다. 사흘 동안의 관상기도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신앙의 영역과 세속 정치가 얽히는 역사적 조류 앞에서 느끼는 묘한 영감</span><span dir="LTR" lang="en-US">과 각오가 그를 휩싸고 돌았다.</span><span dir="LTR" lang="en-US">.</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그는 그날 쓴 교황청에 </span><span dir="LTR" lang="en-US">보낸 </span><span dir="LTR" lang="en-US">편지</span><span dir="LTR" lang="en-US">에서 완곡하지만 힘있게 </span><span dir="LTR" lang="en-US">&#8220;미국의 천주교는 유럽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8221;고 주장했다. 앞으로 미국의 주교는 로마가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땅에 있는 사제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span><span dir="LTR" lang="en-US">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헌법을 만들며 민주주의를 실험하던 미국의 시대정신을 천주교회 안에도 도입하려 한  발상이었다. 실제로 교황청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5년 뒤인 1789년 존 캐럴은 미국 사제들의 투표를 거쳐 미국 최초의 정식 주교로 선출</span><span dir="LTR" lang="en-US">된다</span><span dir="LTR" lang="en-US">.</span><span dir="LTR" lang="en-US"> 그때 26명의 사제들이 참여 헸는데 24명이 캐럴의 이름을 적었다. 나머지 두표는 캐럴이 적은 필라델피아 본당의 리빙스턴 이었고 한명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아무튼 그때 캐럴의 관상 기도 속에서는 </span><span dir="LTR" lang="en-US">사라진 예수회에 대한 그리움</span><span dir="LTR" lang="en-US"> 때문인지 파리와 브르셀의 예수회 교회와 동료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고 무엇보다</span><span dir="LTR" lang="en-US"> 개신교도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화려한 제복을 입고 피를 흘</span><span dir="LTR" lang="en-US">리며 쓰러져 간 </span><span dir="LTR" lang="en-US">&#8216;메릴랜드 400 용사&#8217;</span><span dir="LTR" lang="en-US">들의 모습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신부님 이제, 우리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 </span></p>
<p><span dir="LTR" lang="en-US">매릴렌드 1연대 2중대를 맡았던 19살의 스트래트 중위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며 캐럴에게 말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인 노미네 도미니, 차아지” </span></p>
<p><span dir="LTR" lang="en-US"> 하며 적진을 향헤 달려 나가는 그의 모습이 이어 펼쳐 졌다.  그가 만든 주님의 이름으로 돌격! 이라는 라틴어와 영어의 합성 구호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파드레, </span><span dir="LTR" lang="en-US">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돌격했습니다&#8230;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던진 무기는 돌멩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 처럼&#8230; ”</span></p>
<p><span dir="LTR" lang="en-US">스트래트와 함께 도허레건 메너의 비밀 성당에서 캐럴 로 부터 라틴어 상경을 배웠던 역시 19세의  오브라이언이   피를 흘리면서 캐럴에게 말했다. 그의 표정도 온화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8220;In te, Domine, speravi&#8230;&#8221; ( 인테 도미네 스페라비,  주님, 당신만을 믿나이다&#8230;)</span></p>
<p><span dir="LTR" lang="en-US">도허레건 매너의 푸른 들판을 그리워하며 전투 직전 성모 마리아에게 간구 기도를 바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랬다.  미국에 대목구가 설치되고  캐럴이 그 수장에 임명 된것은 한마디로 미국 천주교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들의 희생이 미국인의 마음을 흔들었고 끝내는 스트레트의 환시처럼 하늘에 닿았던 것이다.  캐럴은 관상속에 확연한 모습으로 이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분연히 임시 대목구장의 일에 매진 하기로 다짐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독립전쟁 과정 초반 부터 가톨릭 신자들의 헌신과 희생</span><span dir="LTR" lang="en-US">은</span><span dir="LTR" lang="en-US"> 가톨릭에 대한 미국의 사회적 인식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식민지 시대 내내 &#8216;잠재적 배신자&#8217;나 &#8216;이단&#8217; 취급을 받던 가톨릭 교도들은 독립전쟁이 터지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피를 흘렸고, 그 정점이 바로</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메릴랜드 400용사의 브루클린</span><span dir="LTR" lang="en-US"> 전투였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1776년 8월 27일, 뉴욕 브루클린(당시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정예 장비를 갖춘 영국군과 </span><span dir="LTR" lang="en-US">독일계 </span><span dir="LTR" lang="en-US">헤센 용병들에게 포위당해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영국군이 대륙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대규모 병력으로 압박해 오면서 , 워싱턴의 본대는 맨해튼으로 후퇴할 시간을 벌지 못하면 그대로 손을 들어 항복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이때 대륙군의 후방을 지키던 메릴랜드 연대가</span><span dir="LTR" lang="en-US"> 스스로 방패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섰</span><span dir="LTR" lang="en-US">던 것이</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모데카이 기스트 소령과  다니엘 보위 대위가 이끄는 메릴랜드 청년들은 후퇴하는 동료들의 시간을 벌</span><span dir="LTR" lang="en-US">어주</span><span dir="LTR" lang="en-US">기 위해, 자신들보다 10배가 넘는 영국군 정예부대가 버티고 있는  석조 가옥 요새 (Vechte-Cortelyou)를 향해 역으로 돌격했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이들은 수적 열세 속에서도 무려 6번이나 반복해서 치고 빠지기 돌격을 감행하며 영국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가로막았다.   이</span><span dir="LTR" lang="en-US"> 결사항쟁으로 메릴랜드 선봉대원 중 256명이  전사했고, 대다수가 부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었다. 살아서 </span><span dir="LTR" lang="en-US">귀환한 </span><span dir="LTR" lang="en-US"> 수십 명에 불과했</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69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6/Battle_of_Long_Island_1858.jpg" alt="" width="1440" height="932" /></p>
<p><span dir="LTR" lang="en-US"> 건너 편  높은 고지에서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조지 워싱턴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쳤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span></p>
<p><span dir="LTR" lang="en-US"> &#8220;오 하느님, 오늘 내가 얼마나 훌륭한 부하들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요!&#8221; (Good God, what brave fellows I must this day lose!)</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이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워싱턴과 대륙군 본대 9,000여 명은  활로를 뚫어 이스트강을 건너 맨해튼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만약 이때 메릴랜드 연대가 버텨주지 못했다면 대륙군 총사령관인 워싱턴의 부대는 와해 됐고 독립전쟁은 시작하자마자 종결되었을 것</span><span dir="LTR" lang="en-US">이</span><span dir="LTR" lang="en-US">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당시 메릴랜드 제1연대를 구성하고 이끌었던 지휘관은 지역 출신 윌리엄 스몰우드 대령과 모데카이 기스트 소령</span><span dir="LTR" lang="en-US">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재미있는 점은  &#8216;브루클린 전투&#8217; 당일 현장 지휘를 맡은 인물은 대령이 아닌 소령이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연대장 윌리엄 스몰우드 (William Smallwood, 1732~1792)</span><span dir="LTR" lang="en-US">는 </span><span dir="LTR" lang="en-US">메릴랜드 찰스 카운티의  부유한 플랜테이션(대농장) 지주 가문 출신 인사였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군사 경험이 있어 1776년 1월, 메릴랜드 제1연대의 지휘관(대령)으로 임명됐다.</span><span dir="LTR" lang="en-US"> 그를 영입하기 위해 찰스 캐럴은 몇 번이나 그의 농장을 찾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브루클린 전투가 벌어진 1776년 8월 27일 당일, 스몰우드 대령은 하필  워싱턴 장군의 명령으로 맨해턴서 열렸던 군사재판(Court Martial)에 참석하느라 본대를 비운 상태였다. 뒤늦게 전투 소식을 듣고 전장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부대는 고립된 상태였고, 그는 워싱턴 장군 옆에서 자기 부대원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그는 </span><span dir="LTR" lang="en-US">후일 장군 까지 진급하여 독립 전쟁 전반에 걸쳐 활약했고, 전쟁 끝난 후에는 메릴랜드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현장 지휘관</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모데카이 기스트 (Mordecai Gist, 1743~1792)는</span><span dir="LTR" lang="en-US"> 볼티모어의 부유한 상인(Merchant)이자 지주 가문 출신 청년이었</span><span dir="LTR" lang="en-US">다. 독립 전쟁 직전 볼티모어 자원 정예병 부대인 &#8216;독립 카데트(Independent Cadets)&#8217;를 스스로 조직할 만큼 열렬한 애국파(Patriot)였다. 1776년 제1연대의 소령(Major)으로 임명되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기스트는 스몰우드 대령이 자리를 비운 탓에, 고작 33세의 나이로 현장 최고 지휘관 임무를 맡았다. 영국의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대군에게 완전  포위당하자, 기스트 소령은 </span><span dir="LTR" lang="en-US"> 본대 후방 지휘관  </span><span dir="LTR" lang="en-US">스털링 장군</span><span dir="LTR" lang="en-US">에게 </span><span dir="LTR" lang="en-US"> &#8220;우리가 시간을 벌 테니 본대는 탈출하십시오&#8221;라며  말한대로 단 </span><span dir="LTR" lang="en-US">400</span><span dir="LTR" lang="en-US">명의  병력을 이끌고  8천이 산재해 버티고 있는 적의 요새( 일명 Old Stone House)를 향해 6차례나 돌격을 감행했다.  저들이 본대를 추격하지 못하게 희생을 감수하며 치고 빠지기를  감행 했던 것이다. </span><span dir="LTR" lang="en-US">기스트 소령은 단 9명의 생존자만을 데리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이후 그 역시 준장으로 진급하며 끝까지 전쟁을 치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여기서 한가지 밝혀 둘 것은 아쉽게도 스몰우드와 기스트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다  성공회 신자였다.  </span><span dir="LTR" lang="en-US"> ‘메릴랜드 400용사</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이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이거나 찰스 캐럴의 영지에서만 뽑힌 청장년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후대에 형성된 전설적 측면</span><span dir="LTR" lang="en-US">이 강하</span><span dir="LTR" lang="en-US">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메릴랜드 주정부 아카이브(Maryland State Archives)의 고증 프로젝트인 &#8216;Finding the Maryland 400&#8217;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메릴랜드 제1연대(First Maryland Regiment)는 메릴랜드 전역(볼티모어, 아나폴리스,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 등)에서 골고루 징집된 부대였다. 성분 역시 부유한 지주 계층의 자제(장교진)부터 소작농, 장인, 아일랜드·독일·스코틀랜드계 이민자(사병진)까지 다양했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당시 메릴랜드 내에서도 이미 개신교(성공회, 장로교 등) 신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병은 개신교도였을 확률이 높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아무튼 </span><span dir="LTR" lang="en-US">당시 이들이 보여준 용맹함에 감동한 조지 워싱턴 장군은 이들을 신이 주신 </span><span dir="LTR" lang="en-US">“</span><span dir="LTR" lang="en-US">나의 오래된 정예병(Old Line)&#8221;이라 불렀고, 이는 오늘날까지 메릴랜드주의 공식 별명인  &#8216;The Old Line State&#8217; (전선을 끝까지 지켜낸 주 )로 남아있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런데 당시 워싱턴은 메릴랜드 연대의 대다수 구성을 천주교도 청년들로 인식하고 있었고 전쟁 후에도 자신의 인식을 밀고 나갔다. 끝까지 살아남아 워싱턴 주위에 있었던 당시의  연대 지휘관 스몰우드 장군이나 기스트 장군도 워싱턴의 이런 인식을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전설은 더 확산 됐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찰스 캐럴이 부대 창설과 장비 보급에 막대한 사재를 털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사실</span><span dir="LTR" lang="en-US"> 이었고 부대의 서사가 워낙 종교적이고 감동적 이었기에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순식간에 사그러들면서  </span><span dir="LTR" lang="en-US">후대 역사학자나 지역 기념사업회에서 &#8220;캐럴의 영지 출신 </span><span dir="LTR" lang="en-US">가톨릭 </span><span dir="LTR" lang="en-US">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천주의 이름 아래  혼연 일체로 싸웠다&#8221;는  극적인 서사로 알려지게 된 것</span><span dir="LTR" lang="en-US">이</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런데 400명 대부분이 천주교 청년이었다는 것은 과장 이었지만  </span><span dir="LTR" lang="en-US">다니엘 보위(Daniel Bowie) 대위</span><span dir="LTR" lang="en-US">가 이끌었던  2중대는 도허레건 찰스 영지 출신의 천주교 병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2중대야 말로 </span><span dir="LTR" lang="en-US">롱아일랜드</span><span dir="LTR" lang="en-US">(브루클린)</span><span dir="LTR" lang="en-US"> 전투에서 가장 처절하게 싸우다 전멸에 가깝게 희생된 </span><span dir="LTR" lang="en-US">중</span><span dir="LTR" lang="en-US">대다. 다니엘 보위 대위 본인도 캐럴 가문과 매우 가까운 아나폴리스 출신의 가톨릭 명문가였으며, 그를 따라 입대한 찰스 영지 출신의 젊은 가톨릭 청년 병사들이 많았다.</span><span dir="LTR" lang="en-US">  캐럴의 관상기도에 나타난 스트레트와 오브라이언이 바로 그들 중 하나다.  두 사람은 존 캐럴 로서는 아들 뻘 제자들 이었기에 더 각별하게 생각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컬러풀한  제복의 청년 두 사람이 가슴 에서  피를 철철 흘려  제복을 버려 가면서도 환한 얼굴로 &#8216;주님의 영광&#8217; (인 노미네 인도미니) 을 읇조리는 모습은 존 캐럴의 심장을 파고드는 감동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존 캐럴은 교황의 문장이 찍힌 보라색 최고급 양피지 봉투를 만지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8220;그래 이 찬란한 순교자들아,  너희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8221;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당초 매릴랜드 연대가 워싱턴 휘하의 대륙군에 합류 했을 때 대륙군 병사들은 눈이 휘 둥그래져야 했다. 저들의 차림새와 소지한 무기 때문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독립전쟁 초기,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제복은 커녕 신발도 제대로 없는 ‘누더기 부대’였다. 반면, 맨해튼에 나타난 메릴랜드 연대는 멀리서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세련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이들은 고급 양모로 만든 짙은 청색(Blue) 코트에 선명한 붉은색(Red 또는 Scarlet) 깃과 소맷단을 덧대었고, 안에는 화사한 황갈색(Buff) 조끼와 사슴가죽 바지(Buckskin breeches)를 입었다. 머리에는 각이 딱 잡힌 삼각모(Tricorn hat)를 썼</span><span dir="LTR" lang="en-US">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특히 이 부대의 장교들은 영국 정규군 장교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최고급 진홍색 코트를 입고 허리에 붉은 실크 샤시(Sash)를 둘렀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다른 주에서 온 가난한 농민 출신 대륙군 병사들은 이들의 자태를 보고 시기 어린 눈으로 &#8220;메릴랜드 마카로니(Maryland Macaronis)&#8221; 혹은 &#8220;댄디(Dandies)&#8221;라고 조롱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8216;마카로니&#8217;는 당대 유럽(특히 영국)에서 &#8216;이탈리아풍의 최첨단 유행을 쫓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상류층 청년&#8217;을 비꼬는 유행어였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민요 &#8216;양키 두들&#8217;의 가사 중 &#8220;머리에 깃털을 꽂고 마카로니라고 불렀네&#8221;에 나오는 바로 그 단어다.</span><span dir="LTR" lang="en-US">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메릴랜드 연대를 </span><span dir="LTR" lang="en-US">이처럼 멋지게 </span><span dir="LTR" lang="en-US">최고 수준으로 무장시킨 원동력이 바로 찰스 캐럴의 막대한 사재 지원이었다. </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메릴랜드가 군대를 조직할 때, 찰스 캐럴</span><span dir="LTR" lang="en-US">은 </span><span dir="LTR" lang="en-US"> 가톨릭</span><span dir="LTR" lang="en-US"> 유지들은 물론</span><span dir="LTR" lang="en-US"> 개신교 상류층 신사(Gentry)들</span><span dir="LTR" lang="en-US">을 솔선으로 추동해 </span><span dir="LTR" lang="en-US">지갑을</span><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열</span><span dir="LTR" lang="en-US">게 </span><span dir="LTR" lang="en-US">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캐럴은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의 직물상들을 통해 최고급 영국·프랑스산 양모 천을 대량으로 사들</span><span dir="LTR" lang="en-US">여 지역의 재봉사 들과 자원 봉사 부녀자들을 동원해 멋진 군복을 만들도록 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그리고 </span><span dir="LTR" lang="en-US">제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기였다. 캐럴은 병사들에게 최고급 머스킷 총과 함께, 당시 대륙군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8216;총검(Bayonet)&#8217;을 전원에게 지급했다.  바로 </span><span dir="LTR" lang="en-US">보마르세를 통해 카리브해를 거쳐 들어온 프랑스제 머스킷과 총검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메릴랜드 연대는 </span><span dir="LTR" lang="en-US">이런 </span><span dir="LTR" lang="en-US"> 지원 아래 총검술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이 총검</span><span dir="LTR" lang="en-US">술</span><span dir="LTR" lang="en-US"> 덕분에 그들은  소수 임에도 영국군 정예 보병과 6차례나 끈질긴 백병전을 벌이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찰스 캐럴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이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바요넷을 쥐여준 이유</span><span dir="LTR" lang="en-US">는</span><span dir="LTR" lang="en-US"> &#8220;가톨릭의 청년들이 이 나라의 가장 귀한 주춧돌이 될 것&#8221;임을 보여주기 위한 무언의 시위이자 자부심의 표출</span><span dir="LTR" lang="en-US">이었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span><span dir="LTR" lang="en-US"> 롱아일랜드의 진흙탕과 빗속에서, 그 화려했던 진홍색과 청색 제복이 영국의 탄환과 베요네트에 찢기고 피로 검붉게 물들어가는 처절한 항전의 순간</span><span dir="LTR" lang="en-US">은 캐럴 로서는 너무도 빨리 온 자랑스런 젊은 피들의 순명의 순간이었지만 그럴수록 워싱턴과 남은 대륙군들의 가슴에는 더 강렬하게 남았다. </span></p>
<p><span dir="LTR" lang="en-US"> 비웃음을 사던 &#8216;마카로니&#8217; 제복이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거친 후, 조지 워싱턴과 미 대륙 전체가 경의를 표하는 &#8216;가장 영광스러운 전사의 갑옷&#8217;이 되</span><span dir="LTR" lang="en-US">었던 것이다. 그</span><span dir="LTR" lang="en-US"> 아름다운 제복은, 단순한 사치</span><span dir="LTR" lang="en-US">나 과시</span><span dir="LTR" lang="en-US">가 아니라 미국 가톨릭인들이 새 나라에 바친 가장 고결한 성의(聖衣)였던 셈</span><span dir="LTR" lang="en-US">이다. (계속)</span></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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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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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Sat, 30 May 2026 15:29:5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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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6&#62; 안동일 작  혁명의 광풍 속에서 &#8216;망명자(Émigré)&#8217; 명단에 올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던 보마르세가 1796년 3월, 삐걱거리는 마차를 타고 고향 파리로 돌아왔을 때의 그 쓸쓸하고도 처량한 순간은 그의 생애를 다루면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6&gt;</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혁명의 광풍 속에서 &#8216;망명자(Émigré)&#8217; 명단에 올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떠돌던 보마르세가 1796년 3월, 삐걱거리는 마차를 타고 고향 파리로 돌아왔을 때의 그 쓸쓸하고도 처량한 순간은 그의 생애를 다루면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는 기지를 발휘 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br />
파리로 돌아온, 그는 친척집에서 눈치밥 먹으며 기거 하고 있던 부인 탕레드(Thérèse)와 금쪽같은 딸 외제니(Eugénie)를 먼저 찾아 눈물의 해후를 한 후 그들을 태우고 혁명위원회로 갔다.</p>
<p>다른 사람 같으면 지레 겁을 먹고 움추렸을 법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갈데가 없으니 옛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통보 했고 혁명위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져 딱한 듯 그러라고 했다. 기실 보마르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혁명위 초급 간부로 일하고 있는 청년 안드레 들라뤼가 진작부터 그의 편에서서 많은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br />
그가 말한 옛 집은 그가 혁명 직전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지었던 바스티일 광장 맞난 편, 생탕투안 대로(Boulevard Saint-Antoine)에 있던 그의 전설적인 대저택, &#8216;비야 보마르세(Villa Beaumarchais)&#8217;였다.</p>
<p>그의 이 저택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기괴한 명물이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정원사들을 고용해 만든 웅장한 신고전주의 풍 저택이었고, 정원에는 인공 폭포, 비밀 동굴, 중국식 정자까지 갖추어 파리 귀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곳이다.<br />
하지만 1796년, 백발이 성성하고 가는 귀까지 먹은 64세의 보마르세가 아내와 19세 방년 딸의 손을 잡고 돌아왔을 때, 그 저택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궁궐이 아니었다.</p>
<p>그가 망명한 사이 혁명 정부는 이 저택을 국가 자산으로 압류했고, 성난 군중들이 들어와 가구와 벽을 부수고 값나가는 모든 것을 약탈해 간 상태였다. 저택의 그 아름답던 창문들은 다 깨져서 쓸쓸한 바람만 통과하고 있었고, 거울과 벽지마저 뜯겨 나가 내부가 뼈대처럼 앙상했다.<br />
세 가족은  창문도 제대로 없고 가구도 다 부서진 차가운 저택의 구석 방을 치우고 들어 가 다시금 서로를 껴안고 살아 돌아왔음에 눈물을 흘렸다. 비야 보마르세의 헛간으로 쓰이던 오두막 이었다.</p>
<p>보마르세가 미국 대륙의회에 &#8220;제발 내 무기 값을 돌려달라&#8221;고 마지막 피맺힌 탄원서를 보낸 곳이 바로 이  헛간 오두막 이었다. 비가새는 오두막 이었지만 부인과 딸이 큰 힘 이었다.  보마르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는데, 마지막 아내인 마리 테레즈(Marie-Thérèse)는 그가 망명지에서 고생하는 동안 파리에 홀로 남겨져 혁명 재판소에 체포당하고 사형 직전까지 가는 감옥 고초를 겪었다. 딸 외제니 역시 아버지가 남긴 부채 때문에 빚더미 속에 사기꾼, 빈혁명분자의 딸 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가족 세 사람의 우애는 남 달랐다.</p>
<p>보마르세는 귀가 먹어 대화가 힘들었지만, 이튿날 아침 딸 외제니의 손을 잡고 폐허가 된 정원을 거닐며 &#8220;내 전 재산과 명예는 다 날아갔지만, 너희들만 곁에 있다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8221;며 특유의 낙천성으로 딸과 부인을  위로했다.<br />
보마르세는 부서진 저택을 눈물겹게 조금씩 수리해 갔으며 한편으로 딸 외제니를 번듯하게 결혼시키기 위해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 냈다.<br />
다행히 외제니의 결혼은 성사 시켰지만 결국 그는  명예회복과 배상을  이루지 못한 채, 3년 뒤인 1799년 5월 18일, 이  오두막 낡은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p>
<p>그런데 이 전설적인 저택과 정원은 1818년, 파리 시가 생마르텡 운하(Canal Saint-Martin)를 확장하고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철거됐다. 지금은 그 자리에 보마르세 대로(Boulevard Beaumarchais)가 시원하게 뚫려 있고, 인근 마레 지구에 그의 이름을 딴 호텔이나 동상만이 옛 주인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br />
화려한 궁정 음악가 얐으며 최고의 극작가이자 대담한 무기 밀수업자였던 보마르세가, 인생의 황혼기에 부서진 저택에서 아내와 딸을 껴안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장면은 애잔하기 이를데 없다.</p>
<p>그래도 그 시기 보마르세가 매운 잘한 일이 있었다. 바로 외제니를 건실한 청년 앙드레 들라뤼와 결혼 시킨일이다.<br />
무남독녀 외제니와 사위 앙드레 투생 들라뤼(André Toussaint Delarue, 1768~1863)의 결혼은 보마르셰가 말년에 행한 가장 평온하고도 훌륭한 선택 중 하나였다.<br />
앙드레 투생 들라뤼는 보마르셰보다 36살 연하였고, 외제니보다는 9살 연상이었다. 그는 혁명 정부에서 금융 관계 행정 관료(정부 금고의 행정관 등)로 일하던 전도유망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도 루이 르 그란 출신이었다.<br />
당시 혁명 정부의 &#8216;망명자 명단(Émigré list)&#8217;에 올라 재산을 압류당하고 전전긍긍하던 보마르셰 가문에게, 정부 내부 사정에 밝고 청렴한 행정가였던 들라뤼는 가문을 구원해 줄 가장 이상적인 신랑감이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 후 보마르셰의 복잡한 재정 문제와 사후 유산 분쟁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p>
<p>이 결혼을 둘러싼 에피소드에도  역시 보마르세의 글이 갑의 자리에 있다. 바로 함부르크 망명지에서 보낸 &#8216;눈물의 편지&#8217;다.<br />
1794 년 무렵, 보마르셰는 독일 함부르크 에서 비참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남겨진 아내와 딸 외제니는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풀려나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였다.<br />
이때 외제니를 지켜보며 호의를 베풀었던 청년이 바로 들라뤼였다. 보마르세 희곡의 팬 이었기에 보마르세를 흠모 하던 들라뤼는 계속해서 외제니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고, 외제니도 고맙게 받아 들이며 두 청춘 남녀는 사랑에 빠진다. 이 사정을 알게 된 보마르셰는 함부르크의 차가운 다락방에서 파리의 들라뤼에게 편지를 보냈다.<br />
&#8220;내게 남은 유일한 보물인 딸을 자네에게 맡기네. 지금은 비록 내가 알거지 신세라 딸에게 지참금 한 푼 줄 수 없지만, 자네가 내 딸의 손을 잡아준다면 훗날 내 명예와 권리를 되찾아 반드시 보답하겠네.&#8221;</p>
<p>들라뤼는 보마르셰 가문의 몰락이나 위험에 개의치 않고, 외제니에 대한 사랑과 보마르셰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 청혼을 받아들였다.<br />
1796년 초, 보마르셰가 망명자 명단에서 조건부로 제외되어 파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저간에는 사위가 될 들라뤼의 막후 노력도 큰 작용을 했다. 들라뤼는 정부 내 자신의 인맥과 행정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장인의 귀국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br />
보마르셰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추진 했고 1796년 6월 5일 마침내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당시 보마르셰는 경제사정도 그렇고 여전히 감시를 받던 처지였기에, 결혼식은 가족과 측근들만 모인 가운데 조용하지만 매우 감격스럽게 치러졌다.</p>
<p>보마르셰는 결혼식 당시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 사위에게 제대로 된 지참금을 주지 못했다. 대신 그는 들라뤼에게 &#8216;미국 정부의 거액 채권(로데리크 오르탈레즈 회사의 대금)&#8217; 서류를 넘겨주었다.<br />
당시로서는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한 유령 채권에 가까웠지만, 행정가였던 사위 들라뤼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한대로 보마르셰가 사망한 이후에도 들라뤼와 외제니 부부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법정 투쟁과 외교적 교섭, 청원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보마르셰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1835년, 미국 의회로부터 80만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장인이 준 &#8216;종이조각&#8217; 같던 지참금을 사위가 마침내 황금으로 바꿔낸 셈이다.</p>
<p>보마르셰는 사위를 얻고 난 후인 1797년,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br />
&#8220;자네는 내 딸에게는 최고의 남편이고, 나에게는 가장 충실한 아들이라네. 내 말년에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네일세.&#8221;<br />
실제로 들라뤼는 장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으며, 사후에는 보마르셰의 방대한 저작권과 가문의 명예를 완벽하게 지켜냈다. 들라뤼는 1863년, 95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8216;보마르셰의 사위&#8217;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전호에 언급 한 대로 그들의 후손은 오늘날까지 보마르셰의 혈통을 자랑스레 이어오고 있다.<br />
말년의 보마르셰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파리에서 이 정직하고 유능한 청년을 사위로 맞이한 것은, 그의 희곡 대본 속 피가로의 기지 못지않은 최고의 신의 한 수였던 것 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573"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licensed-image-1.jpg" alt="" width="2032" height="2048" /></p>
<p>지금 부터 189년 전인 1835년 3월 2일, 워싱턴 캐피털 힐 (지금의 노스 윙) 미 연방 의사당서는 행정부와 의회가 반세기 동안 부려온 억지와 &#8216;국가적 수치&#8217;를 입법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결짓는 법안 통과를 위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br />
법안 제안자 중 한사람인 에드워드 에버릿(Edward Everett, 1794~1865)의원이 단상에 올랐다.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인 그는 당대 미국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이었다. 훗날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기 바로 직전, 단상에서 2시간 동안 장엄한 서두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p>
<p>&#8220;의원 여러분! 우리가 50년 전 맨발로 눈 위를 걸으며 영국군과 싸울 때, 우리 가슴에 따뜻한 군복을 입히고 손에 화약을 쥐여준 이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파리의 시계공이자 극작가였던 보마르세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36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재무부는 &#8216;프랑스 왕이 준 선물&#8217;이라는 주불 공사 아서 리의 낡은 보고서 한 장을 방패 삼아 채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화국의 수치이자, 벤자민 프랭클린 박사가 다져놓은 대서양 외교의 신의를 우리 스스로 깨부수는 짓입니다!&#8221;<br />
그때 반대파 의원 한사람 소리쳤다.<br />
&#8220;하지만 그가 국왕에게 받은 100만 리브르(프랑의 옛 단위)의 영수증이 버젓이 존재하지 않소! 그 돈은 미국을 위해 쓰여져야 했던 돈 이었소!&#8221;<br />
에버릿 의원의 명징한 답변이 이어졌다.<br />
&#8220;그 100만 리브르는 보마르세가 제 목숨을 걸고 정보망을 가동하기 위해 프랑스 왕실로부터 받아낸 &#8216;작전 자금&#8217;이었음을 프랑스 외무부가 공식 보증했습니다. 게다가 그 돈은 바로 로마 교황청 의심의 눈을 피해 존 캐럴 신부를 미국의 초대 주교로 세울 수 있었던 막후의 자금으로 쓰여 졌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존경하는 의원 동지 여려분. 이제 이 지루하고 부끄러운 거부의 역사를 끝내야 합니다. 우리가 법안을 통과 시키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서명하는 순간, 미국은 비로소 구체제의 빚을 털어내고 도덕적 공화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대륙의 자유와 평등은 한낱 사기꾼들의 슬로건으로 전락할 것 입니다. &#8221;</p>
<p>에버릿의 웅변은 의원들의 양심을 거세게 흔들었고 압도적인 표차로 법안을 통과 시키게 했다.<br />
가톨릭 신자는 아니 었지만 존 캐럴 대주교(선종 당시)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독립의 아버지 찰스 캐럴 형제와 각별한 교분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미국 천주교의 발흥에 보마르세의 역할이 지대 했음을 굳이 거론 했다. 3년전 세상을 떠난 독립의 마지막 원로 찰스 캐럴의 유지를 상기 시키기 위해서 였다.<br />
이날 통과된 법안의 정확한 공식 법안명은 &lt;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세 유족 구제를 위한 법안&gt; (An Act for the relief of the heirs of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lt;미국 연방 법률(Statutes at Large) 아카이브, 제4권 793항 (4 Stat. 793) 제23대 하원 (23rd Congress) 세션&gt;이었다.<br />
미 의회가 특정 개인 ,그것도 외국인의 이름을 명확히 거명하면서 채택한 초유의 법안이다.<br />
에버릿 의원의 연설 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에는 정부와 의회 내에서 유족들의 편에 서서 &#8220;미국이 신용을 지켜야 한다&#8221;고 외친 당대 미국의 쟁쟁한 양심 정객, 행정가, 독립 원로, 종교계 인사 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br />
기록을 보면, 당시 국무장관 에드워드 리빙스턴이 의회에 보낸 강력한 행정부 의견서가 &#8216;마지막 스트로&#8217; 처럼 큰 몫을 했다. 리빙스턴은 과거 진작 부터 보마르세의 주장을 옹호했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계열의 법률적 시각을 이어받고 있었다.<br />
&#8220;계약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큰 돈을 선물로 제공할 만큼 당시 프랑스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또 더욱이 당시의 미국 재무부가 프랑스 국왕의 100만 리브르를 공제(상쇄)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억지&#8221;라는 강력한 행정부 의견서를 의회에 제출했던 것이다.<br />
상대적 소수였지만 반대파 의원들은 계속 “선물이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8220;여전히 사라진 100만 리브르의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8221;며 돈을 줘서는 안된다고 버텼다. 그러나 찬성파 의원들은 &#8220;당시 프랑스 대사였던 벤자민 프랭클린 박사의 장부와 프랑스 베르젠 백작의 외교적 상호 확약이 있음에도 미국이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신생 공화국의 대외적 신용과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점&#8221;이라며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br />
토론 끝에 구제 법안은 하원과 상원을 차례로 통과했고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자 최초의 흙수저 군인 출신 정치가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며칠 뒤 이 법안에 최종 서명했다.</p>
<p>당시 수십 년간의 소송 비용으로 고초를 겪던 보마르세의 사위 들라뤼와 외손자들이 이 &#8216;눈물의 삭감안&#8217;을 수용했고 실무 정산을 거쳐 1837년 최종 지급이 완료됐다.<br />
이 법안이 기념비 적이라는 것은 미국 의회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한 최초의 법안 이라는 점이었다. 19세기 미국 연방의회에는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결의안이 &#8216;단 한 건&#8217;도 없었다.<br />
당시 미국의 국가적 분위기와 법적 구조가 &#8216;사죄&#8217;라는 개념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
<p>19세기 미국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8216;명백한 운명&#8217;이라는 기독교적 예정론에 입각한 선민론이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북미 대륙을 개척하고 영토를 넓히는 것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임무라는 믿음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전쟁(미-멕시코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힌 것은 &#8216;과오&#8217;가 아니라 &#8216;문명의 진보&#8217;이자 &#8216;신의 뜻&#8217;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 한것이야 말로 &#8216;언덕 위의 하얀집&#8217;을 지으라는 신의 뜻이 었다고 믿었다.<br />
이처럼 스스로 정의롭다고 굳게 믿는 오만한 성장기 국가였기에, 과거사를 &#8216;반성&#8217;한다는 개념 자체가 의회 내부에서 싹틀 수 없는 토양 이었다.<br />
흑인 노예제와 관련해서도 19세기에 &#8216;사죄&#8217;는 없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수정헌법 제13조)될 때도, 의회의 기류는 &#8220;과거의 잘못을 사죄한다&#8221;가 아니라, &#8220;전쟁의 결과로 제도를 폐지한다&#8221;였다. 전쟁 전후로 링컨 대통령과 의회가 고려했던 것은 &#8216;노예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8217;이 아니라, 오히려 &#8216;노예를 잃어버린 남부 백인 지주들에게 국가가 돈을 물려주는 보상(Compensated Emancipation)&#8217;이었다. 국가가 인간을 재산으로 인정했던 법적 모순 때문에 생긴 일이었는데, 19세기 미국 의회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재산권 침해를 더 고민했다.<br />
법적인 이유도 컸다. 영미법계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8220;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The King can do no wrong)&#8221;, 즉 주권면책(Sovereign Immunity) 특권이다. 국가(정부)는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법정에서 기소되거나 소송을 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p>
<p>19세기 미국 정부는 의회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8220;우리가 과거에 잘못했다&#8221;고 선언(사죄)하는 순간, 그것이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수많은 소송과 천문학적인 재정적 배상 책임으로 이어질까 봐 극도로 몸을 사렸다.<br />
결국 미국의 과거사 결의안들이 20세기 후반(특히 1980년대이후)에야 쏟아져 나온 것은, 미국이 양심적인 국가로 갑자기 변해서라기보다는 &#8216;흑인 민권 운동(1960년대)&#8217;을 거치며 인권의 기준이 통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br />
민권 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원주민, 흑인, 아시아계 등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표밭(정치적 영향력)이 되었고, 의원들도 그제야 표를 얻기 위해, 혹은 달라진 국제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결의안을 내놓기 시작한 것.<br />
19세기의 침묵은 &#8216;성장과 팽창&#8217;에 눈이 멀었던 제국주의 시절 미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좌다.<br />
1835, 3, 2, ‘4 Stat. 793’이라는 메마른 법률 번호 뒤에는 미국 독립의 물질적 기초를 닦아준 한 천재 극작가에 대한 신생 미국의 뒤늦은, 그러나 전무후무한 &#8216;법적 굴복&#8217;이 숨어 있었지만 이 법안도 유쾌하게, 속 시원하게 통과된 것이 아니었다.<br />
&#8220;줄 돈은 주되, 끝까지 미국이 잘못했다는 문구는 넣지 않겠다&#8221;는 미국의 자존심과 &#8220;이 지루한 외교적 분쟁을 끝내야 한다&#8221;는 실리주의가 맞선 끝에 나온 &#8216;정치적 타협&#8217;이 법 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br />
의회는 80만 프랑(당시 미국 달러로 약 14만 4천 달러~15만 달러 선)을 예산으로 배정하면서 법안에 아주 냉혹한 독소 조항을 삽입했다. 받거나 말거나 (&#8220;Take-it-or-leave-it&#8221; 받든가 말든가) 라는 조항이 서두에 있었다. 그러면서 &#8220;이 돈을 수령하는 즉시, 보마르세 유족은 미국 정부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추가 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고 이를 최종 정산으로 인정한다&#8221;는 조건이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57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08005337.jpg" alt="" width="650" height="417" /></p>
<p>그럼에도 보마르세 배상 결의(Beaumarchais claim)는 독립 전쟁 이후 건국 초기 시기의 중대한 도덕적. ·재정적 매듭이었고 &#8216;언덕 위의 하얀집&#8217; 건설을 이심전심으로 목표했던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일이다. .<br />
언급한 대로 미 연방의회는 후일 원주민(인디언) 탄압, 흑인 노예제 및 차별, 그리고 전시(戰時) 인권 침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결의안들을 통과시켰다. 모두 20세기 후반의 일이다.<br />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국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한 대표적인 연방의회 결의안들을 간략 하게 나마 정리해 본다. 언덕위의 하얀집 모토와 관련이 많은 사안이기 때문이다.</p>
<p>먼저 원주민(인디언) 학살 및 강제 이주에 대한 사죄다. 미국 영토 확장기 동안 자행된 원주민 탄압은 미국의 가장 깊은 원죄 중 하나로 얘기된다. 하지만 2009년이 되서야 미국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죄 결의안 (Native American Apology Resolution)이 채택된다.<br />
연방정부와 의회가 과거 원주민 부족들에게 저지른 폭력, 학살, 강제 이주(눈물의 길 등), 그리고 문화적 말살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내용이다. 당시 국방법안(Defense Appropriations Act)의 부속 조항으로 슬그머니 끼워 넣어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다.<br />
더욱이 공식 사과를 하긴 했으나, 국가를 상대로 한 법적 배상 소송의 근거로 쓰이지 못하도록 &#8220;이 결의안이 법적 배상 요구의 근거가 될 수 없다&#8221;는 면책 조항을 넣는 비겁한 타협이 있어 논쟁이 됐었다.</p>
<p>다음이 흑인 노예제 및 인종차별(짐 크로우 법)에 대한 사죄다. 이 사죄 역시 세기를 넘겨 21세기인 2008년 하원, 2009년 상원의 결의안으로 채택 된다.<br />
미국 경제 성장의 어두운 기반이었던 노예제와 그 이후의 합법적 차별(짐 크로우 법)에 대한 의회의 반성인데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 노예화하고, 해방 이후에도 수십 년간 분리주의 법률(Jim Crow laws)로 흑인들을 2등 시민 취급하며 린치 등을 방관했던 과거를 공식 사죄했다. 미 의회 역사상 &#8216;노예제&#8217;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첫 결의안이었다. 상·하원이 각각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역사적 과오를 인정했다. 역시 배상은 없다는 것을 명문화 했다.</p>
<p>기실 노예 무역은 미국만의 잘못과 과오는 아니다.   가톨릭교회만 해도 과거 역사 속에서 자행된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대해 교황청 차원의 제도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특히 근자에 교황에 오른 레오 14세는 지난 5월 자신이 새로 반포한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통해 과거 교황청이 유럽 군주들의 요청에 응해 비기독교인을 노예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던 역사를 전면 인정하고 진심 어린 용서를 구했다.<br />
회칙은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와 주교들에게 전하는 최고 권위의 사목 교서로, 다른 교황 문헌인 교서·권고·담화·연설 등과 비교해 구속력이 가장 강하다.<br />
교황은 &#8220;노예제가 인간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음을 교회가 완전히 인식하는 데 수 세기가 걸렸다&#8221;고 지적하며 &#8220;기독교 기억 속의 상처&#8221;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8220;교회 이름으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8221;며 노예로 고통받은 이들의 고난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했다.<br />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3년 바티칸 공식 성명을 통해 식민지 시대 노예제와 토지 강탈을 정당화했던 교황 문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는 교황청 역사상 가장 명확한 문서적 거부 선언으로 평가되지만, 교황청 자체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br />
그러나 레오 14세는 교황청이 직접 노예화 승인 칙령을 내려 정당성을 부여했던 구조적 본질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교황청의 제도적 책임을 가장 명확히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교황은 레오 14세가 처음이다.</p>
<p>다시 미 의회의 과거사 반성 문제로 돌아오면 20세기 말에 이루진 1988년의 전시(戰時) 인권 침해 및 강제 수용에 대한 반성을 먼저 들게 되는데 이는 유일하게 배상이 이루어진 법안이다. 이 시민자유법 (Civil Liberties Act of 1988 ,일본계 시민 수용소 사죄)의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권자를 포함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몰아 강제 수용소에 격리한 것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면서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br />
단순한 &#8216;말뿐인 결의안&#8217;을 넘어 실질적인 국가 배상(Reparation)까지 이루어진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과거사 청산 사례다. 배상 받는 당사자인 일본의 힘이 작용 헸다는 얘기다. &#8216;언덕위의 하얀집&#8217;을 여러차례 강조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했다.</p>
<p>1993년에는 하와이 왕국 전복에 대한 사죄 결의안 (Apology Resolution)이 있었다. 1893년 미국인 설탕 밀농장주들과 미 해병대가 공모하여 하와이 왕국의 리리우오칼라니 여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하와이를 불법 병합한 사건에 대해, 100년이 지난 1993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과 의회가 공식 사죄한 결의안이다. 타국의 주권을 불법으로 침탈하고 전복했던 &#8216;제국주의적 침공&#8217; 행위를 미국 스스로 인정한 보기 드문 사례다.<br />
2011년 상원 그리고 2012년 하원은 중국인 배제법 사죄 결의안을 채택했다. 내용은 1882년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잔뜩 부려 먹은 뒤, 정작 이들의 이민과 시민권 취득을 원천 봉쇄했던 &#8216;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8217;에 대해 의회가 뒤늦게 공식 유감을 표명하고 사과한 결의안이다. 역시 배상은 없었다.</p>
<p>보마르세 배상 결의가 미국이 국가 형성기에 진 &#8216;도덕적·신용적 부채&#8217;를 갚은 사건이라면, 후대의 결의안들은 미국이 스스로 내세운 &#8220;자유와 인권&#8221;이라는 헌법 가치를 스스로 배신했던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 과오를 뒤늦게 수습해 나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수습이 됐고 여전히 &#8216;언덕위의 하얀집 모토는 이 미국땅에서 유효 할까? (계속)</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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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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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22 May 2026 23:46:01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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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5&#62; 안동일 작  미국 독립전쟁이 독립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보마르세의 삶의 길은,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언덕길, 아찔한 산악도로로 변하게 된다. 기실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면서 부터다. 전 호에 보마르세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5&gt;</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미국 독립전쟁이 독립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보마르세의 삶의 길은,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언덕길, 아찔한 산악도로로 변하게 된다. 기실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면서 부터다. 전 호에 보마르세와 미국 정부와의 실랑이를 다루면서 미국 독립군을 지원 하려다 빚더미에 앉았고 파산 위기에 몰렸다고 했는데 이는 과장이다. 그의 평전을 썼던 작가들이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그렇게들 썼다.<br />
독립전쟁이 끝난 1783년 이후에도 보마르셰의 재력은 상당했다. 더욱이 이듬해인 84년 피가로의 결혼의 공전의 히트로 이 작품으로 번 인세와 판권 수입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 했다 할 정도로 대단 했다. 그는 그 무렵 사비를 털어 볼테르의 금서들을 인쇄·출판하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 역시 엄청난 자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br />
또 이듬해 건축한 바스티유의 그의 저택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 중 하나로 꼽혔으며, 정원을 꾸미고 가구와 예술품을 들여놓는 데만 수십만 리브르를 아낌없이 썼다.</p>
<p>미국에 떼인 돈 약 300만 리브르가 뼈아프긴 했지만, 당장 그를 파산하게 만들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약 미국 새 정부가 의리를 지켜 1780년대 중후반에 300만 리브르를 순순히 황금이나 현물로 상환했다면, 그 돈은 몇년 뒤 고스란히 프랑스 혁명 정부의 국고로 들어갔거나 군중에게 약탈당했을 확률이 거의 100%였다는 사실이다.</p>
<p>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의 일이다. 83년 미국 독립전쟁 승리 이후 그 6년 동안 보마르세는 흔들리는 프랑스 왕정과는 달리 나름  승승장구를 계속 했고 미국과 관련 특히 존 캐럴의 주교 임명과 관련해 큰 일을 해냈다.   혁명이 일어난 직후에는  파리의 자치 정부 역할을 했던 ‘파리 코뮌 대표단(Assemblé des représentants de la commune de Paris)’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사업가이자 온건파였던 그는 곧 과격해지는 혁명의 흐름 속에서 이내 저들의 타깃이 되고 만다.</p>
<p>혁명기 과격파(자코뱅 파)가 득세 하면서 저들은 보마르셰의 바스티유 저택을 보며 &#8220;백성의 피를 빨아먹은 자의 집&#8221;이라며 분노했다. 실제로 그가 망명길에 오르자마자 혁명 정부는 그의 모든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재산을 국유화했다. 미국이 준 돈이 계좌에 있었다면 그대로 혁명 자금으로 몰수되었을 것이다.</p>
<p>물론 보마르셰 입장에서 미국 정부가 야속했던 것은 사실일 게다. 말한대로  미국은  &#8220;우리가 보마르셰와 맺은 계약은 ‘상거래’가 아니라, 프랑스 왕실이 보마르셰를 앞세워 우회 지원한 ‘비공식 원조(선물)’였다&#8221;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지급을 미뤘다. 억지였다.</p>
<p>그런데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의 이같은 모르쇠는 새옹지마가 된다.  보마르셰를 비참한 망명객으로 만들고, 아내와 딸을 감옥에 가두고, 전 재산을 몰수한 진짜 ‘가해자’는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 정치였고 미국정부의 50년이 걸린 추후 배상은 보마르세 라는 이름이 창창히 존속 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던 것이다.</p>
<p>보마르셰는 미국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피가로와 볼테르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프랑스에 소개 했다가, 그 이념이 폭주한 혁명의 부메랑을 맞아 본국에서 파멸한 자가 부르주아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정황 분석일 듯 싶다.</p>
<p>따지고 보면 보마르세는 물심 양면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 일 수 있다. 물적으로는 프랑스 왕정의 재정을 파탄나게 했고 심적으로는 피가로 라는 인물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소개해 그들을 각성하게 했기 때문이다.</p>
<p>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면서 그야말로 ‘재정적 파산’에 가까운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그에 비해 손에 쥔 지정학적·경제적 실익은 허무할 정도로 미미했다.<br />
보마르세의 간언에 설복 당한 루이왕괴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샤를 그라비에(베르젠 백작)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참전은  ‘영국에 대한 복수와 견제’라는 정치적 명분에 치우쳐 있었다. 프랑스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실익이 아닌 &#8216;심리적 만족감&#8217; 영국의 독주를 막았다는 정신승리였다.</p>
<p>1783년 파리 조약 결과,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강 유역과 카리브해의 토바고 섬, 그리고 뉴펀들랜드 연안의 어업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는 투입한 전비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한 전리품이었다.</p>
<p>20년 전인 1763년에 끝난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북미 대륙(캐나다 등)의 영토를 통째로 빼앗기는 굴욕을 당해야 했던 프랑스는 적국 영국의 가장 소중한 식민지였던 미국을 분리해 냄으로써 영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륙의 세력 균형을 되찾았다는 점에  만족 해야했다.<br />
또  프랑스 수뇌부는 참전해  승리 한다면 막대한 경제적 보상을 기대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br />
프랑스는 미국이 독립하면 영국과의 무역을 끊고 프랑스의 최대 무역국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독립 직후 부터 미국인들은 익숙한 언어, 오랜 신용 관계, 그리고 우수한 품질을 가진 영국 상품과 다시 거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막대한 차관을 대주었지만, 정작 경제적 과실은 전쟁에서 진 영국이 따먹는 황당한 결과가 벌어졌다.</p>
<p>프랑스는 캐나다나 루이지애나 등 과거 잃어버렸던 북미의 핵심 영토를 단 한 평도 되찾지 못했다. 미국 역시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 다시 거대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벤자민 프랭클린을 중심으로 한 미국 외교단의  능숙하고 노회한 외교력에 감탄 하게 되는 대목이다.</p>
<p>프랑스가 미국을 돕기 위해 보낸 육·해군 군사력과 무기, 그리고 현금 차관을 모두 합치면 당시 가치로 약 13억 리브르에 달했다. 이 엄청난 재정 지출은  프랑스 왕정에 치명타였다.  전쟁 직후 프랑스 연간 세입의 절반 이상이 미국 독립전쟁으로 진 빚의 이자를 갚는 데만 쓰였다고 할 정도다.</p>
<p>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 귀족 (특권층)에게 세금을 걷으려 했으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왕실은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5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8216;삼부회&#8217; (평민 참여)를 소집하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이 폭발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p>
<p>루이 왕은  미국 독립을 돕기 위해 왕정의 전재산을 털어 넣었으나, 그 결과로 생긴 재정 파산과 미국에서 싸우며 &#8216;자유와 평등&#8217; 사상을 배워온 귀족·군인들(라파예트侯작 등)에 의해 결국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p>
<p>한마디로 프랑스는 영국의 뺨을 한 대 때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기 집 기둥뿌리를 뽑아버린 극단적인 &#8216;상처뿐인 영광&#8217;이었다.</p>
<p>미국 독립전쟁 당시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현대 역사학자들과 프랑스 군부의 방대한 군적부 조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집계되어 있다. 프랑스는 지상군(로샹보 백작의 육군)뿐만 아니라 대서양, 카리브, 아프리카 해안 등 전 세계 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대규모 해전을 벌였기 때문에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br />
프랑스는 미국 독립을 돕기 위해 북미 대륙에 보낸 군대 중 2,112명의 전사·병사자를 냈으며, 카리브해 등 전 세계 해전까지 모두 합산하면  최대 1만 5천 명에 달하는 귀중한 청년들의 목숨을 잃었다.</p>
<p>미국 독립전쟁 전체를 통틀어, 미국 독립군(대륙군) 중 &#8216;순수 전투 중 전사자&#8217;는 약 6,800~8,000명 수준이다.  순수 전투 사망자 수는 미국인보다 프랑스인이 더 많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분석.<br />
여기에 말한대로 10억 리브르가 넘는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까지 지출하면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은 파산 직전에 몰렸고, 이는 결국 몇 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게는 가혹한 대가의 악수였던 것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42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5f317078.avif" alt="" width="863" height="575" /></p>
<p>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다. 보마르셰는 군중들이 바스티유를 철거하는 모습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지켜볼수 있었다. (맨위 삽화)   (위 사진은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 콜라쥬 전경)<br />
1789년 8월 그는 파리 코뮌(자치 위원회) 의원으로 지명된다. 피가로에 열광했던 군중들의 천거에 따른 일어었다.<br />
그러나 워낙 막대한 부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혁명 세력 내부에서 이내 &#8220;구체제의 결탁자 아니냐&#8221;, &#8220;무기를 숨겨둔 것 아니냐&#8221; &#8220;아직도 왕과 내통하고 있다&#8221;는 의심과 모함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실제로 참여 직후 인  9월 중순에  김찰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으나 예의 뛰어난 수사학적 웅변으로 무죄를 입증하고 복귀 했다.<br />
그후 3년간 분주하게 이리저리 다니며 개혁에 동참 하려 했으나 타고난 온건파 이자 사업가인 그와 혁명 수뇌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p>
<p>1792년 초  혁명 정부가 오스트리아 등 외국 세력의 침공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무기가 부족해졌다. 무기 중개상 경력이 있던 보마르셰는 명예 회복과 돈벌이를 위해 네덜란드에서 소총 6만 정을 구해오겠다며 혁명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대금 지불 문제가 게속 꼬이고 배달이 지연되자,  8월말 과격파들에 추동된 성난  군중이 &#8220;보마르셰가 루이왕과 내통해 적들에게 주려고 무기를 숨겨두었다&#8221; 며 그의 저택을 습격해 약탈하고 그를 라베이(L&#8217;Abbaye) 감옥에 수감했다.<br />
다행히 그의 빼어난 글 솜씨로 쓴 호소문이 발표 되고 묘한 친분 관계 였던   시민군 간부 여성 마뉴엘의 극적인 도움으로 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가 풀려 난 사흘 뒤, 감옥에 남아있던  죄수 수천 명이 불문곡직 학살당한 ‘9월 학살’이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천운이었다.</p>
<p>1793년, 무기 조달 임무를 완수하겠다면 어렵사리 다시 유럽 대륙으로 나갔으나, 프랑스 내부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서 그는 졸지에 &#8216;망명 귀족(반혁명 도망자)&#8217; 명단에 오르게 된다. 루이 16세 국왕이 파리 혁명광장(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1793년 1월 21일의 일이다.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전역을 뒤 흔든다.  그는 몇년 동안  영국(스코트랜드)과 독일 (함부르크) 등을 전전하며 비참하고 가난한 망명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의 대 저택과 전 재산은 혁명 정부에 압류되었고, 그의 아내와 딸 또한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br />
그는 1796년  공포 정치가 끝나고 5인 총재 정부가 들어서자 겨우  파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재산은 날아가고 청각까지 거의 상실한 비참한 상태였다. 그때 그가 매달렸던 일이 미국 정부에 대한 소송과 청원 이었다.<br />
1799년 5월  그는 소송을 완결 짓지 못하고, 파리의 쓸쓸한 오두막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67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p>
<p>그사이, 기실은 초반 상승 국면에 있던 시기.  그가 한 일 가운데 우리에게 기장 울림을 주는 일은 자신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존 캐럴을 미국 최초 주교로 만든 일이다.</p>
<p>아다시피 가톨릭은 주교를 중심으로 꾸려져 있는 교단이다.<br />
&#8220;교황도 결국 로마의 주교일 뿐&#8221;이라는 표현은  주교를 중심으로 교구의 신행과 교회행정 이 이루어지는 것을 규정한 가톨릭 교회법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다.</p>
<p>그런데 어떻게 예수회가 공중분해 된 암흑기에, 미국이라는 신대륙의 초대 주교로 예수회 출신인 존 캐럴이 임명 되었을까?  이  놀랍고도 역설적인 사건의 막후에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피에르 보마르세라는 두 걸출한 능력가가  파리에서 함께 짠 고도의 외교적 ‘체스 판’이 존재했다.</p>
<p>1783년 파리 협정으로 미국의 독립이 확정되자, 미국 가톨릭교회는 막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꽤나 충격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미국 가톨릭은 영국 런던 대목구(Vicar Apostolic)의 관할 아래 있었다. 독립한 미국이 영국의 종교적 지배를 계속 받는 것은 심정적으나  정치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p>
<p>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에게 &#8220;미국 주교를 임명하고 싶은데,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대리인을 추천해달라&#8221;고 요청했다. 사실상 프랑스 주도의 미국 교회를 만들려 한 것이다.</p>
<p>미 의회,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격분했다. &#8220;우리가 영국 왕에게서 겨우 벗어났는데, 이제 프랑스 왕이나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는 외국인 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8221;며, 미국 주교는 반드시 &#8216;미국인&#8217;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p>
<p>당시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사제는 존 캐럴이었지만, 그는 전 세계적으로 탄압받아 해산된 &#8216;예수회&#8217; 출신이었다. 프랑스 궁정과 로마 교황청 모두 예수회 출신을 미국의 수장으로 앉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p>
<p>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해 파리의 몽마르뜨르 아지트에서 프랭클린과 보마르세가 머리를 맞댔다. 보마르세는 프랑스 궁정(루이 16세와 베르젠 외무장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당발이었고, 프랭클린은 예의 친화력과 존캐럴의 감화로 언은 천주교 지식을 바탕으로  교황 대사(Nuncio)였던 도리아 팜피일리(Doria Pamphili) 대주교와 꽤 돈독한 친분을 쌓아놓은 사이였다.</p>
<p>&#8221; 피에르군 ,  로마 교황청이 캐럴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네. 그놈의 예수회 낙인 때문이지. 프랑스 국왕도 잔뜩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있고.&#8221;</p>
<p>보마르세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 했다.</p>
<p>&#8220;박사님, 신을 섬기는 자들이나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나 마음속에 두려움이 존재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교황청은 예수회가 신대륙에서 부활할까 봐 무서운 것이고, 국왕은 통제 안 되는 사제가 무서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캐럴을 &#8216;예수회의 생존자&#8217;가 아니라, &#8216;독립 미국의 성자&#8217;로 포장하는 겁니다. 베르젠 백작의 입은 제가 막을 테니, 박사님은 교황 대사의 잔에 와인을 채우십시오. 구체제가 부순 예수회의 씨앗이, 신대륙의 벌판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로 자라나는 모습을… 이 피가로가 대본을 짜 보이겠습니다.&#8221;</p>
<p>&#8220;허허 기대가 되는군, 공전의 베스트셀러 작가님.&#8221;</p>
<p>보마르세는 외무장관 베르젠을 찾아가 특유의 정세 분석으로 설득했다. 팔랑귀 국왕의 내락을 받은 후 였다.<br />
&#8220;장관 각하, 프랑스가 미국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프랑스인 주교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 영국의 개신교도들보다 더 독한 미국의 반가톨릭 정서가 폭발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 자체가 흔들립니다. 차라리 프랭클린박사가 미는 &#8216;친프랑스파 미국인&#8217;을 앉히는 게 상책입니다.&#8221;<br />
보마르세의 이 정밀한 조언 덕분에 프랑스 왕실은 미국 주교 임명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8216;불간섭 선언&#8217;을 하게 된다. .<br />
프랭클린은 파리 주재 교황 대사에게 존 캐럴을 추천하는 유명한 외교 각서를 보낸다.  이때 보마르세는 자신의 정보망을 가동해 교황청 내부의 분위기를 프랭클린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했다.<br />
보마르세는 예수회 해산령(1773년)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황청의 &#8216;예수회 복권&#8217;을 두려워하면서도 신대륙의 교세를 확장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간파했다. 그는 프랭클린에게 &#8220;존 캐럴이 예수회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8216;미국 시민이자 훌륭한 사제&#8217;라는 점을 부각해야 교황청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8221;는 출구 전략을 제공했다.</p>
<p>존 캐럴이야 말로  왕권과 이성주의자, 얀세니스트들에 의해 자신이 몸담았던 예수회가 파괴되는 피눈물 나는 역사를 온 몸으로 겪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신을 박해했던 구체제(프랑스 왕정)의 핵심에 있던 보마르세와, 이성주의자인 프랭클린의 막후 도움으로 1784년에 미국 가톨릭 고위 성직자(Superior)로 임명 됐다.   &#8216;수퍼리에&#8217;는 프랑스어 Supérieur 에서 온 말로, 가톨릭에서 특정 지역의 &#8216;상급 장상(총대리 혹은 지부장)&#8217;을 뜻한다.  그리고 마침내  1789년 초대 볼티모어 주교로 임명된다.   교회가 버린 예수회 사제를, 세속의 정치가들이 구해내  미국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것이다. 고위 성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과 평소의 신조가 마음에 걸렸지만 대의를 위해 존 캐럴은 주교직을 수락했다. 그의 주교 서품식은 의외로 영국에서 거행된다. 이 부분은 따로 전한다.</p>
<p>보마르세가 존 캐럴을 돕기 위해 분주히 뛴 이유는 개인적 친분과 미국측의 외교적 청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마르세 본인이 바로 &#8220;예수회의 제자로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 사람&#8221;이었다. 비록 해산되어 추레한 평복을 입고 있지만 그 정신 만큼은 도도했던 존 캐럴에게서, 보마르세는 구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자신의 분신(피가로)을 보았던 것이다. &#8220;억압 받고 탄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 있는 예수회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8221;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민중 극작가 특유의 오기였던 것이다. .</p>
<p>예수회 해산이라는 거대한 불행이, 신대륙 미국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주춧돌이 되는 &#8220;화가 굴러 복이 되는&#8221; 이 매혹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를  신은 어떻게 설계 했을까?</p>
<p>존 캐럴의 주교 서품과 프랑스 혁명 격동의 순간 순간의 에수회 회원 보마르세와 프랑스 천주교의 모습은 다음호에  알아 보기로 한다. 그 정중앙에 우리로서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파리 외방 전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교회만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p>
<p>다시 정산금 문제로 돌아 온다.</p>
<p>보마르세 유족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정산금을 받아낸 과정은 무려 50년 넘게 이어진 법적·외교적 공방전이었다.<br />
이 사건은 미국 정부가 대외적인 채무이자 자신들의 행정적 실책(혹은 억지)을 결국 인정하고 대금을 지급한 역사적인 첫 번째 청구권 해결 케이스 중 하나로 꼽힌다. 그게 미국 다운 일이다.<br />
지급 합의는 1835년에 이루어 졌고 정산 절차 및 최종 지급 완료는 1837년까지 이어졌다.  보마르세와 그 유족들이 원래 요구했던 금액은 이자를 제외하고도 약 300만 리브르에 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80만 프랑을 받고 모든 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는 조건(Take-it-or-leave-it)으로 합의됐다.</p>
<p>왜 지급이 50년이나 걸렸나? 우여곡절이 많았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은  종전 직후인 1783년 가을,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 백작과 정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가 1778년 조약 이전에 미국을 위해 총 300만 리브르를 지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의회에 알렸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 대리인이었던 그랜드(Grand)의 장부에는 200만 리브르만 기록되어 있었다.  &#8221; 그렇다면 나머지 100만 리브르는 어디로 갔는가?&#8221; 라는 의문이 생겼고, 이후 구버너 모리스(Gouverneur Morris)  라는 미국 외교관이 프랑스 외무부 장부에서 1776년 6월 10일, 보마르세가 국왕으로부터 수령한 100만 리브르의 영수증을 찾아냈다.<br />
미국 재무부는 즉시 태세를 전환 해 보마르세에게 타전 했다.<br />
&#8220;당신(보마르세)이  프랑스 왕에게 받은 그 100만 리브르는 우리(미국)에게 주라고 준 돈이니, 우리가 당신 에게 줄 물자 대금에서 그 100만 리브르만큼은 까고(상쇄하고) 주겠다.&#8221;<br />
이에 보마르세는 격렬히 반박했다.<br />
&#8220;그 100만 리브르는 미국에 그냥 주라는 돈이 아니라, 내가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무역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내게 준 &#8216;사업 자본금(Bounty)&#8217;이다. 나는 이미 이 돈의 사용처를 프랑스 국왕에게 완벽히 소명했다. 미국 정부가 관여할 돈이 아니다!&#8221;<br />
하지만  미국 의회는 아서 리와 헌터 등의 주도를 거쳐 1787년, 오히려 보마르세가 미국 의회에 돈을 토해내야 한다는 적반하장식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백만 리브르를 깎자고 했다가  나중에는 200만 불은 선물이었으니 그렇다는 논리였다.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계산법이다.</p>
<p>보마르세가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과 딸(Eugénie)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19세기 초 들어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마르세 유족의 편에 서서 미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8220;보마르세가 받은 100만 리브르는 미국에 준 선물이 아니며, 그는 프랑스 정부에 책임을 다했다&#8221;고 공식 보증했다.</p>
<p>그사이 미국 정치권에서도 일종의  양심 선언이 계속 나오기는 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해 법률가 출신의 미국 정객들도 &#8220;미국 재무부의 정산 방식은 법적 근거가 없으며, 국가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수치스러운 일&#8221;이라며 유족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독립의 아버지 찰스 캐럴도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신의를 위해 그 돈을 해결해야 한다고 후배 정치인 의원들을 설득했다.</p>
<p>1835년 앤드루 잭슨 행정부 시절, 미국과 프랑스 간의 해상 노획물 배상금 등 여러 외교적 채무 정산이 맞물리면서 미국 의회는 마침내 보마르세 유족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의회는 유족들에게 80만 프랑을 최종 제안했고, 수십 년간 고통받던 유족들이 이를 수용하면서  1837년 지급 완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p>
<p>이 사건은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이 국가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 신용과 외교적 압박에 밀려 자신들의 행정적 과오와 억지 주장을 사실상 철회하고 배상(위로금의 형태를 빌린 타협적 정산)을 진행한 기념비적인 첫 케이스다. 당시 프랑스의 외교적 압박이 없었다면 찰스 캐럴이나 알렉스 헤밀턴 같은 양심가의 충언이 없었다면 미국 정부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높은, 국제 정치의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45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123544_148932_3852-1.jpg" alt="" width="600" height="399" /></p>
<p>80만 프랑은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1795년 프랑스 혁명 정부는 복잡한 구체제 리브르를 폐지하고 10진법 기반의 &#8216;프랑(Franc)&#8217;을 새 화폐로 도입했다.  이때 기존의 1 리브르를 거의 1대 1 비율로 교환해 주었기 때문에, 당대 문헌이나 19세기 정산 기록에서는 리브르와 프랑을 사실상 같은 가치의 단위로 혼용해서 표정하고 있다.</p>
<p>과거의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단순 물가상승률(CPI)만 계산하는 방식과, 당시의 실질 구매력(노동 가치, 금·은 현물 가치)을 기준으로 보는 방식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크다.<br />
미국 정부가 보마르세 유족에게 지급한 80만 프랑은 당시 환율로 약 15만 달러였다. (당시 1달러 = 약 5.3프랑) 1835년의 15만 달러를 2026년 현재 미국 달러의 가치로 인플레이션만 단순 계산하면 약 5백70만 달러가 된다.<br />
하지만 인플레이션 계산기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공산품 가격이 폭락한 현대의 착시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당대인들이 체감한 &#8216;노동 가치와 생활 물가&#8217;로 환산하는 것이 역사 서술에서는 훨씬 사실적이다.<br />
18세기 후반~19세기 초 프랑스의 물가 지표를 기준으로 보면 80만 리브르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대 숙련된 석공이나 목수 같은 기술자의 하루 임금이 약 2~3 리브르였다. 80만 리브르는 기술자 한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약 800년~1,000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 당대 프랑스나 미국의 중상류층 가정이 1년 동안 하인을 두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연간 3,000~5,000 리브르 수준이었다. 80만 리브르는 자산가 가문이 대를 이어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막대한 재산이었다.<br />
보마르세가 독립전쟁 당시 미국에 쏟아부은 원금(수백만 리브르)에 비하면 1835년에 유족들이 받아낸 80만 리브르(프랑)는 일종의 &#8216;눈물의 삭감 합의안&#8217;이었지만 이 돈을 기반으로 보마르세의 후손들은 현대 프랑스의 명문가 반열에 어를 수 있었다.</p>
<p>보마르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후손들의 역사는 &#8220;미국을 상대로 한 끈질긴 법적 투쟁의 승리&#8221;이자 &#8220;프랑스 문화·정치 주류 사회로의 화려한 안착&#8221;으로 요약된다.</p>
<p>보마르세의 외동딸인 아멜리 외제니(Amélie-Eugénie)와 그녀의 후손들이 걸어간 길은  19~20세기 프랑스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보마르세에게는 세 번의 결혼이 있었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세 번째 아내인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아멜리 외제니 카롱 드 보마르세(1777~1832)가 유일했다.</p>
<p>아버지가 파산 상태로 사망하고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 재산이 압류당했을 때, 외제니는 어머니와 함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녀는 1796년 관료 출신인 앙드레 투생 들라뤼(André Toussaint Delarue)와 결혼했는데, 남편 역시 아내를 도와 평생을 미국 정부와의 채권 싸움에 바치게 된다.</p>
<p>외제니는 평생을 미국의 오리발과 싸우며 수십번 청원서를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미국 의회에서 80만 프랑 지급 법안이 최종 통과(1835년)되기 불과 3년 전인 1832년에 눈을 감았다. 결국 미국이 지급한 거액의 정산금은 그녀의 자녀들(보마르세의 외손자들)에게 돌아갔다.</p>
<p>이 시기 그  후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속권을 설득력 있게 받기 위해서 라도 &#8216;보마르세&#8217;라는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모계 성씨 계승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외손자 샤를 에두아르 (1799~1878)는 프랑스 군 영관급 고위 장교 이자 레지옹 도뇌르 훈장(Commandeur)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법원에 청원을 넣어 자신의 성씨를 들라뤼에서 &#8216;들라뤼 카롱 드 보마르세(Delarue Caron de Beaumarchais)&#8217;로 공식 확정하는 왕실 법령(1853년 나폴레옹 3세 칙령)을 받아냈다.  이로써  보마르세의 이름은 끊기지 않게 되었다.</p>
<p>그후 보마르세의 후손들은 대대로 학계, 문학계, 그리고 정·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 거족으로 성장했다.</p>
<p>보마르세는 비록 말년에 억울함과 파산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지만, 그의 아내와 딸이 미국 정부로부터 끝내 받아낸 80만 프랑의 정산금은 후손들이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재기하고 도약하는 든든한 경제적 발판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br />
그 후손들은 2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유수의 문학 가문이자, 대사(大使)를 배출한 외교 가문, 그리고 세계 최고급 와인 제국을 이끄는 명문가로 당당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 속 주인공처럼, 어떤 역경 속에서도 유쾌하게 살아남아 승리하는 보마르세 특유의 DNA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위 사진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 중에서)</p>
<p>그중 대표적인 이가  외교관  장 드 보마르세 (1912~1981)다. 그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전설적인 외교관으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에서 활약했고, 이후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 주영국 프랑스 대사 등 외교관의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외할아버지가 스파이이자 비밀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재능을 직계 후손이 그대로 물려받은 셈.<br />
장-피에르 드 보마르세 (Jean-Pierre , 1944~현재)는 오늘날 프랑스 문학계의 거두 중 한 명이다.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으로, 자신의 선조인 보마르세의 전기를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학 사전》, 《프랑스 극문학 걸작선》 등을 편찬한 저명한 서지학자이자 교수다.  게다가 장-피에르는 세계적인 부호이자 와인 명가인 무통 로스차일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가문의 여주인이었던 필리핀 드 로스차일드  남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인 줄리앙 드 보마르세 드 로스차일드(Julien de Beaumarchais de Rothschild, 1971~현재)는 현재 보르도 와인 제국의 핵심 경영자이자 예술 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p>
<p>시계공 출신 평민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이  얻어낸 귀족의 성씨 &#8216;드 보마르세(de Beaumarchais)&#8217;는 그가 위조하거나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특유의 매력과 기지로 ‘쟁취’한 것이었다.<br />
20대 초반 궁정에 드나들던 평민 미남 청년 이었던 그는  한 부유한 미망인(프랑수아 가르디)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왕실 방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땅의 이름이 바로 &#8216;보마르세(Bosc Marchais, 아름다운 숲)&#8217;였다.</p>
<p>카롱은 결혼하자마자 이 땅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8220;카롱 드 보마르세&#8221;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결혼 후 불과 10개월 만에 아내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점이다. 일부  귀족 사회는 그를 &#8220;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성을 훔친 사기꾼&#8221;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법적으로 그 이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굳혔다.<br />
귀족들은 그를 평생 &#8216;시계공 카롱&#8217;이라 비하했지만, 그는 스스로 창조한 &#8216;보마르세&#8217;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았다. 혈통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신분을 창조한  것이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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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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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15 May 2026 20:03:50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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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4&#62; 안동일 작  그런데 예수회는 몇번 언급 했듯이 1760년대 들어서  프랑스에서 부터 호된 서리를 맞는다. 프랑스 내 예수회(Jesuits)의 해산 과정은 단순히 종교적 사건을 넘어,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교황권 사이의 복잡한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4>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4&gt;</h4>
<p><strong>안동일 작 </strong></p>
<p>그런데 예수회는 몇번 언급 했듯이 1760년대 들어서  프랑스에서 부터 호된 서리를 맞는다.<br />
프랑스 내 예수회(Jesuits)의 해산 과정은 단순히 종교적 사건을 넘어,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교황권 사이의 복잡한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과정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볼테르 등)들이 주도한 반교회 정서와 절대왕정의 중앙집권화가 맞물린 결과였다. 또 예수회의 교만도 힌 몫했다.</p>
<p>프랑스에서 예수회는 강력한 교육적 영향력과 국왕의 고해신부로서 갖는 정치적 입지 때문에 오랫동안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프랑스 왕권과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갈리카니즘(Gallicanism)에 경도 돼 있던 주류 세력은 교황을 중심으로 일사 분란하게 뭉쳐있는 예수회를 &#8216;국가 속의 국가&#8217;로 간주하며 비난 하고 때로는 적대시했다.<br />
에수회 해산 명령의 결정적인 계기는 1760년에 일어난 라 발레트 선교사 사건 이었다.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예수회 선교사 라 발레트 신부의  선교회가 파산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예수회가 무오류가 아니라는 것과 과유불급,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일깨우는 사건이었다.</p>
<p>앙투안 라 발레트 신부는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예수회 선교단 책임자로,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상업 및 무역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설탕 무역, 노예 매매, 농장 경영 등 대규모 상업적 투자를 진행해 &#8216;아시엔다'( 부락형 대형 농장)를 꾸려넸다. 하지만  해적선의 준동과  7년 전쟁(1756~1763) 중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760년 초 파산을 신청하면서 그가 속한 프랑스 예수회 본회가 이 부채를 떠안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br />
예수회는 라 발레트의 개인적인 일탈이라며 채무 이행을 거부했으나, 채권자들은 이를 예수회 전체의 사업으로 보고 소송을 제기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회의 재정과 운영 실태를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예수회의 불법적인 상업 활동과 독자적인 조직 운영이 드러났다.</p>
<p>이 스캔들은 예수회를 혐오하던 얀센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명분을 주었고, 결국 1762년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자산을 압수하고 프랑스 내에서 조직을 해체하는 판결을 내렸다.   더욱이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회헌(Constitutions)을 정밀 조사했고, 이를 &#8220;왕권에 반하는 위험한 문서&#8221;로 판정했다.<br />
1762년 4월 6일 프랑스 법원은 판결문에서 예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br />
&#8220;위 단체는 문명국가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단체이다. 그것은 위 단체의 본질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모든 권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 단체는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 완성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은밀하고 사악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추구해온 단체이다. &#8230; 그리스도의 정신을 모독하고 시민사회에 유해하며 국민의 권리와 왕권을 무시했고 통치 질서를 위협하였고 국가적 소요를 조장하였으며 종교적이며 기본적인 모든 윤리를 파괴한 조직으로서 그들 가슴 속에는 극악한 부패를 담고 있다.&#8221;</p>
<p>루이 15세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고등법원의 강력한 압박과 여론에 밀려 1764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예수회의 활동을 금지하고 단체를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br />
이후 프랑스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스페인 등 가톨릭 열강들의 압력이 거세지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결국 1773년 칙서 &#8216;주님이시요 구세주&#8217; (Dominus ac Redemptor)를 발표해 전 세계적으로 예수회를 공식 해산했다.<br />
많은 예수회 신부들이 교구 신부로 흡수되거나 다른 수도회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부는 비밀리에 공동체를 유지하며 복권의 때를 기다렸다.  캐럴 신부가 추레한 평복을 입고 볼티모어 항에 내려 찰스 캐럴과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던 때가 바로 이때 였다.</p>
<p>예수회는 1814년이 되어서야 복권 재건 되는데 예수회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약 40년 동안 예수회는 전통 가톨릭 국가가 아닌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프로이센(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예수회의 뛰어난 교육 역량을 높이 평가해 교황의 해산 칙령 집행을 거부하고 예수회 신부들이 학교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보호막을 제공했다.<br />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보수 회귀적인 &#8216;메테르니히 체제&#8217;가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의 권위 회복과 교육 정상화가 시급해졌다. 교황 비오 7세는 칙서 &#8216;모든 교회에 대한 배려&#8217; (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통해 예수회의 전 세계적인 복권을 선언했다.<br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붕괴되었던 교육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예수회 신부들이 다시 초빙되었다. 이후 왕정복고기 동안 이들은 다시 강력한 교육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예수회의 일관된 목표는 교육과 선교를 통한 예수 일꾼 양성이었다. <strong>(사진 설명,  맨위 예수회와 존 캐럴이 세운 미국의 조지 타운 대학교, 가운데, 프랑스 해변의 예수회 수도원, 맨 아래, 카리브해의 아시엔다)    </strong></p>
<p>1760년대 중반 예수회의 해산은 특히 프랑스 가톨릭 교육 시스템에 공백을 가져왔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근대적인 국가 주도 공교육 체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br />
그런데 보마르세와 캐럴 형제가 비교적 자유 분방하게 활동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예수회가 해산 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선 천주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세상사는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굴러 복이 되는 법이다.</p>
<p>참, 지난번에 보마르세가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 이후에는 진학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다시 살펴 보니 그가 파리의 보베 대학(Collège de Beauvais)을 청강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회 학교들이 폐쇄 된 이후의 시기였다. 그곳 에서 그는 논리학과 수사학, 희곡 작법을 심층적으로 배웠다고 첫 희곡 외제니 (미국 발음 유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br />
보베 대학 (Collège de Beauvais)은 18세기 프랑스의 엘리트 배양소였다. 14세기(1347년)에 보베의 주교였던 장 드 도르망(Jean de Dormans)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파리 대학(소르본)의 중심지인 &#8216;라탱 지구(Quartier Latin)&#8217;에 있었다.</p>
<p>보베 대학은 파리 대학교(Universitas Parisiensis)를 구성하던 수십 개의 &#8216;콜레주(Collège)&#8217; 중 하나였다. 당시의 소르본 역시 그 콜레주 중 하나(신학 특화)였다. 1762년 예수회가 해산 추방당하면서 파리 학정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63년 보베 대학을 비롯한 파리의 수많은 소규모 콜레주들이 루이 르 그랑(당시 예수회에서 몰수되어 파리대 본부가 됨)대학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옛 보베 대학의 역사적 문서, 판화, 서적 등 수많은 아카이브는 &#8216;파리 소르본 대학교 종합도서관(Bibliothèque de la Sorbonne)&#8217;의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인 NuBIS에서 보존 및 관리하고 있다.</p>
<p>당시 보베 대학의 교육은 예수회의 교육 철학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루이 르 그랑 출신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 수사학, 논리학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당초 예수회는 파리 대학(소르본) 교수들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통합 되면서 보베의 교수진은 많은 인원이 예수회 소속 학교에서 온 이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실력과 성가는 어디 가지 않는법.<br />
수사학(Rhetoric)은 상대를 설득하고 논리로 제압하는 일종의 기술이다. 보마르셰가 훗날 법정에서 보여준 화려한 변론술이 여기서 닦였던 것이다.<br />
보베와 파리대학 동문들의 면면을 보면 보마르셰뿐만 아니라, &lt;마농 레스코&gt;를 쓴 아베 프레보, 그리고 공포정치의 대명사  맥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온건파 카미유 데물랭. 혁명의 법학자 루이 생쥐스트 등 혁명기의 거의 모든 정치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꼭 이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보마르세도 혁명 초기, 혁명위원회 위원 한자리를 차지했다.</p>
<p>한 마디로 &#8216;구체제의 학문을 배우지만, 그 학문으로 구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칼날&#8217;을 갈아주던 곳이었다.<br />
보마르셰가 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아마도 시계공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묘한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논리학 수사학을 발휘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br />
&#8220;너희는 가문을 배우지만, 나는 세상을 이기는 기술을 배운다.&#8221;</p>
<p>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이었다는 것은 보마르셰의 자유분방함과 &#8216;피가로&#8217;다운 경계인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귀족 자제들 틈에서 그들의 지식을 &#8216;훔쳐 배우는&#8217; 천재적인 시계공 아들의 모습은 바로 파가로의 모습이었다.<br />
예수회는 &#8216;세상 속의 수도회&#8217;를 지향하며 정치,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8220;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8221;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강조했다. 보마르셰가 보여준 &#8216;기지(Wit)&#8217;와 &#8216;막후 외교&#8217;는 예수회의 교육적 학풍과 매우 잘 어우러진다. 당시 프랑스의 엘리트 교육은 해산 이전에는 물론, 해산 이후에도 예수회가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br />
보마르셰가 이런 예수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8216;피가로&#8217;라는 혁명적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은 구체제의 지식을 습득해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아주 매력적인 아이러니 였다.</p>
<p>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인들의 가톨릭 신앙은 &#8216;신비주의&#8217;보다는 &#8216;사회적 계약&#8217;에 가깝다고 운위된다. 프랑스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종교는 에티켓이자 사회적 신분이었지, 금욕적인 삶을 뜻하지 않았다. 보마르셰가 수많은 연애 사건과 소송에 휘말리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것이 그 증좌다.<br />
&#8220;하나님은 경외하지만, 정치에 개입하는 교회는 혐오한다&#8221;는 반성직자주의(Anticlericalism)정서가 만연해 있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종교적 권위를 비웃는 장면들이 나오는 이유도, 프랑스인들이 신앙과 교회의 권력을 분리해서 보았기 때문이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4"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2024050921440543180_1715258645_1715146637.jpg" alt="" width="600" height="364" /></p>
<p>보마르셰는 후일 &#8220;나는 예수회의 제자로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웠고, 피가로로서 그 세상을 뒤집는 법을 실천한다&#8221; 고 기염을 토했다.<br />
존 캐럴은 젊은 보마르셰가 루이 르 그랑의 복도에서 신학교로 떠나기전의 자신과 마주치며 &#8220;존, 신을 섬기는 법과 세상을 속이는 법은 결국 한 끗 차이가 아니겠니?&#8221; 하는 깜짝 놀랄 농담을 건네는 장면을 여러 차례 회고 했다.</p>
<p>프랑스인들의 신앙관은 대로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묘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흔히 &#8216;갈리아주의(Gallicanisme)&#8217;라고 부르는데, 신앙은 로마 가톨릭을 따르되 세속적인 통치와 권력은 프랑스 국왕(혹은 국가)이 독자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아주 독특한 태도다. 그러면서 가톨릭 에서 가장 교조적이고 금욕 경건을 내세웠던 얀세니즘이 기장 발흥했던 곳도 프랑스였다.<br />
역사적으로 프랑스 출신 교황은 총 16명으로 집계된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14세기 &#8216;아비뇽 유수&#8217; 시기다. 이 시기에는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렀고, 이때 선출된 7명의 교황은 전원 프랑스인이었다.<br />
999년에 선출된 실베스테르 2세가 프랑스 출신 첫 교황 이었다. 그는 수학과 천문학에 능했던 학자 교황으로 꼽힌다. 그후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제창한 어반 2세가 프랑스 출신 교황.<br />
아비뇽 시기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까지. 이 시기는 사실상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교황권이 놓였던 시기로, 프랑스인들이 교황청을 &#8216;자신들의 것&#8217;으로 여겼던 자부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p>
<p>프랑스인들에게 가톨릭은 영혼의 구원인 동시에, 유럽의 패권을 다투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했다. 이런 &#8216;현실적인 신앙관&#8217;이 보마르셰 같은 인물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br />
보마르세의 피가로 3부작(정확히는 앞의 두 작품)이 프랑스 혁명 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얘기된다. 피가로는 보마르세의 분신이기도 하면서 당시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 했던 캐릭터다.  작가는  위트 와 기지 넘치는 저항정신 그리고 자유사상 평등 정신을 뭉뚱그려 &#8216;피가로 정신&#8217;이라고 명명 하고 싶다.<br />
실제로 역사학자들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그를 단순한 희극 캐릭터가 아닌, &#8216;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을 고한 나팔수&#8217;로 평가하고 있다.</p>
<p>피가로 정신 (L&#8217;Esprit de Figaro)은 단순히 &#8216;똑똑한 하인&#8217;의 재치를 넘어,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다. 피가로는 신분적 열세를 폭력이 아닌 오직 지력과 말솜씨로 극복한다. 위트와 기지 (L&#8217;Esprit)다.<br />
&#8220;백작님은 태어나는 수고만 하셨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지혜를 짜내야 했습니다&#8221;는 그의 독백은 특권층의 무능을 날카롭게 비웃는 피가로 정신의 정수다.<br />
그의 저항 정신 (La Résistance)은 부당한 권력에 대해 순종하는 대신, 판을 짜고 상황을 통제한다. 이는 수동적인 민중이 능동적인 주체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징한다.</p>
<p>자유와 평등 (Liberté et Égalité)을 내 세우는 그는 혈통이 아닌 능력과 노력에 따른 가치를 주장한다. 기회 균등과 &#8220;능력 위주의 사회&#8221;를 꿈꿨던 당시 부르주아와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계몽주의 사상을 에수회 적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러려니 난관도 많았다.<br />
보마르셰는 평생 수많은 송사에 휘말리며 기득권과 싸웠는데, 피가로가 극 중에서 내뱉는 울분과 논리적인 반박은 그가 법정에서 실제로 겪었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p>
<p>피가로의 결혼 제5막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독백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폭탄과도 같았다.<br />
&#8220;귀족이라니! 당신은 그저 태어나는 수고만 했을 뿐이야. 그 외에 당신이 한 일이 뭐가 있지?&#8221;<br />
(Noblesse, fortune, un rang, des places : tout cela rend si fier ! Qu’avez-vous fait pour tant de biens ? Vous vous êtes donné la peine de naître, et rien de plus.)<br />
이 구절은 피가로 정신의 핵심인 &#8216;평등&#8217;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런 노력 없이 혈통만으로 권력을 쥐는 귀족 계급의 허상을 꼬집은 것이다.  . &#8220;나는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야 했는데, 당신은 운 좋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를 지배하려 드느냐&#8221;는 일침은 당시 관객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p>
<p>&#8220;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그 어떤 찬사도 의미가 없다.&#8221;<br />
(Sans la liberté de blâmer, il n&#8217;est point d&#8217;éloge flatteur.)<br />
유명한 문장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절, 피가로(혹은 보마르셰)는 &#8216;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사회라야 비로소 그 사회가 건강하다&#8217;는 사실을 역설했다. &#8220;무조건적인 찬양은 아부일 뿐&#8221;이라는 냉철한 인식이 돋보이는 구절이다.</p>
<p>&#8220;나만큼의 생존 능력을 갖춘 하인을 백 명만 모아도, 지난 백 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던 모든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8221;<br />
피가로는 단순히 화만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알고 있었다. 실무 능력은 물론 도덕성도 없는 통치자 귀족들 보다, 밑바닥에서 구르고 깨지며 단련된 민중의 지혜가 훨씬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는 시민 사회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p>
<p>당시  공연 대본을 본 루이 16세는 &#8220;이 연극이 상연된다면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려야 할 것&#8221;이라며 격분해 상연을 금지 했다. 하지만 피가로의 이 날카로운 위트들은 이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p>
<p>&#8216;피가로 정신&#8217;은 바로 &#8220;말 한마디로 거대한 성벽을 허무는 유쾌한 파괴력&#8221;이었던 것이다.<br />
&#8220;피가로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8221; 후일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말이다.</p>
<p>오늘날의 프랑스인들도 여전히 피가로를 사랑할까?<br />
결론부터 말하면, &#8220;프랑스인의 DNA에는 여전히 피가로가 흐르고 있다&#8221;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br />
진보 성향의 르몽드와 더불어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도 일간지가 바로 &lt;르 피가로(Le Figaro)&gt;다.  &#8220;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찬사에도 의미가 없다&#8221;는 보마르셰의 대사를 제호 아래 새겨두고 있다.</p>
<p>프랑스인들은 권력에 대한 냉소와 풍자(Satire)를 지적 유희이자 시민의 의무로 여긴다. 파업이나 시위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거침없는 자기표현 방식은 현대판 &#8216;피가로 정신&#8217;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br />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 덕분에 피가로는 클래식한 이미지까지 더해져, 세대를 불문하고 &#8216;가장 매력적인 프랑스적 인간상&#8217;으로 추앙받고 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39"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images.jpg" alt="" width="259" height="194" /></p>
<p>그런데 미국에서는 너무도 다르다.<br />
보마르셰는 미국 독립전쟁의 &#8216;숨은 일등 공신&#8217;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역할을 했다. 사라토가 전투의 무기 지원은 그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br />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이 불가능했던 초기, 보마르셰는 &#8216;로드리그 오르탈레스와 동료들&#8217;을 통한 대규모 지원으로은 사라토가 전투 이후 미국 독립군의 &#8216;체계화&#8217;에 기여했다.<br />
사라토가 승리 이후 1778~1779년의 대규모 수송 으로 보마르셰는 미국이 정규군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군복 3만 벌과 신발 수만 켤레를 보냈다. 당시 미군은 맨발로 눈 위를 걷는 처참한 상황이었는데, 보마르셰의 보급품이 도착하며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br />
그는 단순히 무기만 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선진적인 포병 기술 교본을 번역해 보냈고, 유능한 기술자들을 직접 고용해 미국으로 밀항시켰다. 이는 미국 국방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br />
총기뿐만 아니라 대포, 화약, 군복, 심지어 신발과 텐트까지 보급했다. 특히 프랑스산 고성능 화약은 미군이 사용한 화약의 약 90%에 육박했다는 기록도 있다.</p>
<p>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10여 척의 대형 상선을 구입해 함대를 운영했다. 보잘것 없었던 독립군 해군력 증강의 수훈갑이다. 그의 함대에는 6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열함 &#8216;르 피에르 로드리그(Le Fier Rodrigue)&#8217;호도 있었다. 이 배들은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군수품을 실어 날랐으며, 때로는 영국함과 직접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br />
그는 슈토이벤(Steuben) 남작이나 라파예트(Lafayette) 장군 같은 유능한 유럽 장교들이 미국으로 건너 와 군사 고문 을 맡고 전장을 지휘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p>
<p>또 벤자민 프랭클린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보마르셰는 단순한 무기 상인이 아닌 정치적 조언자이자 정보원이었다.<br />
보마르셰는 스파이망을 가동해 영국 내부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를 프랭클린에게  즉각 전했다. 프랭클린이 프랑스 외교부 장관 베르젠(Vergennes) 백작의 신뢰를 얻도록 막후에서 여론을 조성한 것도 보마르셰였다.<br />
보마르셰의 화려한 저택은 프랭클린과 프랑스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미국 독립의 당위성을 논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그는 특유의 기지로 미국 독립이 프랑스의 국익(영국 견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퍼뜨렸다.</p>
<p>보마르셰와 프랭클린은 겉으로는 &#8216;극작가&#8217;와 &#8216;철학자&#8217;로 만났지만, 실제로는 영국 정보국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가짜 뉴스(Disinformation) 전략은 매우 돋보인다. 보마르셰는 프랭클린과 짜고 영국 스파이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8220;미국 독립군은 곧 항복할 것&#8221;이라거나 &#8220;프랑스는 무기 지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8221;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영국이 방심한 사이 비밀리에 함대를 출항시키기 위함이었다.</p>
<p>두 사람은 무기 대금이나 수송 일정을 논할 때 철저히 암호를 사용했다. 보마르셰는 프랭클린을 &#8220;나의 사랑하는 철학자&#8221;라고 불렀고, 프랭클린은 보마르셰의 유령 회사(로드리그 오르탈레스)를 정부가 아닌 &#8216;민간 독지가의 자선 활동&#8217;으로 포장하여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 부담을 덜어주었다.</p>
<p>1783년 협상 국면에서 그는 베르젠 백작과의 끝장 토론으로 미국의 편을 들었다. 보마르셰는 파리 협정 전후로 궁정의 루이 15세와  외무장관 베르젠을 끈질기게 찾고 또 찾아가 , 미국과의 동맹을 끝까지 유지해야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설득했다.  &#8216;비폭력적 기지&#8217;의 관점에서 볼 때, 보마르셰의 미국 독립 전쟁 참여는 &#8220;총칼보다 무서운 물류와 외교의 승리&#8221;라고 정의할 수 있다.</p>
<p>산이 깊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1783년 파리 협정으로 미국 독립이 확정되자 보마르셰는 환희에 찼으나, 곧 대륙회의의 냉담함에 직면해 너무도 당혹해야 했다. 이때 그가 프랭클린과 미 대륙회의에 보낸 서신에는 &#8216;피가로&#8217;다운 당당함과 처연함이 공존하고 있다.<br />
&#8220;나는 당신들을 위해 내 재산과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의 배들을 &#8216;선물&#8217;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기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내 가족의 생계까지 드릴 수는 없습니다.&#8221;</p>
<p>실제로 보마르셰는 미국에 약 500만 리브르라는 거액을 청구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사였던 아서 리(Arthur Lee)는 보마르셰를 &#8216;사기꾼&#8217;으로 몰아세우며 무기와 군수품 들은 프랑스 정부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조차 정치적 입장이 난처해져 보마르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우정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p>
<p>보마르셰는 폭력이 아닌 &#8216;계약과 기지&#8217;로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그 대가로 가장 가혹한 경제적, 정치적 배신을 당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희곡을 더 써냈던  그의 모습이야말로 &#8216;피가로 정신&#8217;의 가장 고결한 완성이 아닐까 싶다.</p>
<p>작가 에게는 두 장면이 유난히 떠오른다.<br />
벤자민 프랭클린이 트레이드 마크인 너구리 털모자와 어딘지 1% 부족한 화려한 귀족 복장의 보마르세의 모습이 대비되는 가운데, 두 사람이 파리 몽마르뜨르의 카페에서 체스판을 바탕 삼아 식민지 해상과 육지에거의  군대의 이동과 보급 경로를 논하는 장면.</p>
<p>그리고 미국 독립을 축하하는 파리의 센 강변의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정작 자기 배들은 압류당할 위기에 처한 보마르셰가 혼잣말로 &#8220;피가로,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농담을 하겠나?&#8221; 읊조리는 모습.</p>
<p>미국이 최종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이 신대륙에서 실현된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자신이 창조한 &#8216;피가로&#8217;가 구 체제를 비웃었듯, 미국의 승리는 왕정에 대한 시민의 승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가끔은 흔들렸던 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다시 정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br />
그런데 승리 직후, 영광의 주역들이 축배를 들 때 정작 뒤편에서 파산 위기에 몰려 빚 독촉을 받는 보마르셰의 모습은 &#8216;피가로 정신&#8217;이 가진 고독한 이면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닐까?</p>
<p>“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때 그가 외쳤던 말이 아닐까? 실제로 그의 고단한 역정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3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감미옥.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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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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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안동일 기자]]></dc:creator>
		<pubDate>Fri, 08 May 2026 02:51:29 +0000</pubDate>
				<category><![CDATA[연재소설]]></category>
		<category><![CDATA[타운뉴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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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60;3&#62; 안동일 작 &#8211; 보마르세의 &#8216;피가로의 결혼&#8217;- 작가의 생각으로는 피에르 보마르세 만큼 평가절하 돼 있는 인물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전천후의 만능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냥 다재 다능한 재주꾼, 영리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인식해 그를 폄하하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4>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h4>
<h5>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lt;3&gt;</h5>
<h5>안동일 작</h5>
<h5>&#8211; 보마르세의 &#8216;피가로의 결혼&#8217;-</h5>
<p>작가의 생각으로는 피에르 보마르세 만큼 평가절하 돼 있는 인물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전천후의 만능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냥 다재 다능한 재주꾼, 영리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인식해 그를 폄하하곤 한다. 시계공ㆍ발명가, 음악선생, 관리, 첩보원, 투기꾼, 노예상, 무기상, 출판업자, 극작가, 망명객 등 다양한 직업과 인생의 부침을 섭렵, 경험한 독특한 인물이라는 평이 꼭 따른다. 미국내의 경우 특히 그렇다.</p>
<p>그런데 그는 시계공으로서도 일류 기술자였고 음악선생으로서는 궁중 교사였으며 관리로서도 매우 유능한 수완을 발휘한 이였다. 첩보원 으로서는 프랑스를 위헤 영국과 스페인을 적절하게 요리했고 투기꾼, 노예상 이란 표현은 그를 전적으로 폄하하는 이들의 표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뿐 아니라 스페인과 서인도 제도에 방대한 부동산과 선단을 소유했고 이를 불렸던 부호이기도 했다. 무기상 으로서 그는 역사에 남는 일을 해냈다.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수세에 몰려 있던 미국 독립군 대륙군에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만큼의 다량의 무기를 제공해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p>
<p>극작가로서는 더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 저 유명한 모짜르트의 오페라 &#8216;피가로의 결혼&#8217; 과 로씨니의 &#8216;세빌리아(세비아)의 이발사&#8217;가 그의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오페라로 만들어 지기 전 희곡으로 읽혔고 연극으로 파리에서 공연 됐는데 귀족 사회의 허위 의식과 부패를 실랄하게 고발하면서도 경쾌함을 잃지 않았던 한 작품이다.  루소와 볼테르의 저작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의 밑바탕이 된 문서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대단하지 않는가?</p>
<p>그는 파리에서 1732년 시계 제조업자인 아버지 앙드레 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여섯 자녀 중 유일한 사내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시계, 특히 개인용 회중시계는 첨단의 정밀 과학 제품이었고 평민들은 구경도 못하는 고가품이었다. 때문에 보마르세의 가정은 평민 계급이었지만 부유한 편이었고.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 플루트, 하프 등 여러 가지 악기 연주법을 배웠고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0대 초반 부터 보마르셰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고 시계에도 큰 관심을 보여 틈틈이 아버지 밑에서 시계 만드는 일을 도왔다.</p>
<p>18세가 되던 1750년, 다른 학셍들보다는 두어살 많은 나이에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르 그랑은 예수회가 세운 명문으로 주로 귀족 상류층 자제들이 다녔지만 개방적인 학풍으로 평민 자제들 가운데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문호를 열었다. 보마르세가 그곳에 진학했던 것은 귀족 상류층 학생들과 교분을 갖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르 그랑을 나온 뒤 그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를 도와 시계 제작에 전념했던 모양이다.  르 그랑에서의 예수회식 교육은 그의 인생관과 문학관에 큰 영향을 끼쳐 일생을 관통하는 지침과 철학이 된다.</p>
<p>1753년 7월, 21살에 보마르셰는 더욱 정확하고 작은 시계 제조법을 발명했다. 바로 시계추의 제어장치다.  왕실로부터 특허를 받아  제어장치 시계가 궁정에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보마르셰의 신분은 점차 격상됐다. 그 발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던 국왕의 시계 기술자와 논쟁이 벌어졌지만  과학 아카데미에 의해 자신의 기술을 인정받게 되면서 보마르셰는 유명인사가 되었다.<br />
루이 15세의 애인 퐁파두르(Pompadour) 부인을 위해 반지에 장착된 시계를 만들어 왕의 눈에 크게 들었고 궁중을 자주 출입 하는 측근이 되었다.  궁정의 고급 정보를 활용, 부동산과 채권에 투자해 돈도 벌었다. 1755년 보마르셰는 연상 의 부유한 귀족 미망인 마들렌(Madeleine Catherine Aubertin)을 만나 그 다음 해에 결혼했고 마들렌 소유의 땅 이름인 ‘Le Bois Marchais’를 따서 자신의 이름을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라는 귀족의 이름으로 바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이름앞에 귀족을 뜻하는 드 자를 붙혀 부르지는 않았다. 마들렌은 결혼한 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죽었고 많은 유산이 돌아왔다. 이후에 보마르셰는 궁정에 들어가 루이 15세의 네 딸들에게 하프를 가르치게 되었다.</p>
<p>1759년, 보마르셰는 루이 왕의 최측근 재경 대신이자 부유한 사업가 뒤베르네(Joseph Paris Duverney)를 만났고 그의 지원으로 왕의 비밀 재정 비서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왕실 심장부에 진출했다. 1764년에는 왕과 뒤베르네의 사업을 도와 스페인의 식민지들에 대한 각종 독점 계약과 노예수입권을 취득하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파견된다. 그러나 사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그는 열 달 동안 스페인에 머물며  풍광을 즐기고 공기를 마시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때의 경험이  그가 쓴 &lt;세비야의 이발사&gt; 등의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p>
<p>타고난 글쟁이였던 보마르셰는 1765년 3월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 바쁜 와중에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지 희곡을 쓰는 일에 골몰 했다. 그의 첫 희곡 &lt;외제니&gt;를 1767년에 발표했고 1770년에는 두 친구(Les Deux amis)를 발표했다. 두 작품은 나름 호평을 받았다.<br />
후견인 뒤베르네가 죽자 뒤베르네의 조카인 라 블라슈 백작과 재산 문제로 소송을 벌여 패소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그 재판을 맡았던 검사 고에즈망을 다시 고소하는 한편 재판의 부패를 다룬 &lt;비망록(Mémoires)&gt;을 출판해 부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귀족 사회 풍자와 고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 이었다.</p>
<p>그 후 보마르셰는 새로 즉위한 루이 16세의 밀사로 유럽을 돌아다녔고,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며 무기를 공급하고, 저작권법 제정에 앞장서고, 볼테르 전집의 간행을 주관하고, 토목 공사를 벌이는 등 여러 가지 일에 관계했다.<br />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보마르세는 영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미국을 돕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게 되고 루이 왕과 외무장관 베르젠을 설득해 1776년 5월, 100만 리브르를 지원 받는다. 보마르셰는 이를 기반으로 가공의  무역 회사인 &#8216;로드리그 오르탈레즈&#8217;를 설립했다. 서류상으로는 스페인의 민간 무역사 였지만, 실상은 프랑스 군기고의 구식 무기를 가져와 미국에 넘기는 국가 차원의 &#8216;세탁&#8217; 작업이었다.</p>
<p>그는 단순히 자금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선박을 구하고 선원을 모집하며 무기를 검수하는 실제 물류 총책임자였다.  미국 대륙회의가 파리로 보낸 최초의 외교관 사일러스 딘(Silas Deane)이 보마르셰를 만난 것은 1776년 7월이었다. 딘은 벤저민 프랭클린, 존 캐럴 등과 연결된 인맥을 통해 보마르셰를 알게 됐다. 가톨릭 인맥을 활용한 정보망은 예수회 꾸루실료 였던 보마르세와 당시 비밀 협상의 중요한 윤활유였다.</p>
<p>보마르셰는 딘을 만난 후  존캐럴 찰스 캐럴 형제의 당부에 따라 확신을 얻고, 당초 계획했던 소규모 지원을 넘어 대규모 수송 함단을 조직했다. 1777년 초까지 그는 8척의 대형 수송선에 대포 200문, 소총 25,000정, 화약 수만 파운드를 실어 보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인 새러토가 전투(1777년 10월)에서 미군이 사용한 무기의 90%가 보마르셰가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그의 공로는 절대적이었다.</p>
<p>이때 보마르셰는 &lt;피가로의 결혼&gt; 대본을 쓰면서 동시에 무기 목록을 검토했다. 무대 위에서는 귀족을 조롱하고, 현실에서는 그 귀족(국왕)의 돈으로 영국의 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군을 지원했던 것이다.<br />
그런데 후일의 이야기지만 보마르셰는 이 사업에 자신의 전 재산과 신용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미국 대륙회의는 이를 &#8216;프랑스 정부의 무상 원조 였다&#8217;고 강변하면서 짐짓 외면했다.  사일러스 딘은 보마르셰의 손을 들어줬지만 , 후에 파견된 아서 리(Arthur Lee) 등이 딘과  보마르셰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며 대금 지급을 거절했다. 채권의 한 당사자이자 결정권자 였던  프랑스 국왕은 처형되고 없던 상황.<br />
보마르셰는 평생 이 대금을 받기 위해 싸웠고, 결국 그가 죽은 뒤인 1835년에야 미국 정부는 찰스 캐럴 등의 유지에 따라 그의 후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하며 빚을 청산했다. 그것도 당초 청구금액의 10분의 1수준에서&#8230;그래서 미국내 그의 평판은 바닥이다.</p>
<p>하지만 그사이 1775년에 보마르셰는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뒀고 1784년에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혁명 전야의 시민 정신에 부합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br />
하지만 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오히려 투옥되었고 어렵사리 외국으로 도피해  런던, 함부르크, 스위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 시기에 ‘피가로 3부작’을 이루는 희곡 &lt;죄를 저지른 어머니(La Mère coupable)&gt;(1792)를 썼다. 이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보마르셰는 1796년 집정관 시대의  파리로 돌아와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1799년에 사망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07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4/Beaumarchais.jpg" alt="" width="550" height="648" /></p>
<p>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는데 그의 희곡 작품이야 말로  지금도 최고의 성가를 구가하고 있다. 그의 희곡 작품들을 살펴 본다.<br />
피가로(Figaro)야 말로  18세기 말 이후 프랑스 최고의 캐릭터다. 보마르셰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의 주인공 이다. 극중 피가로는 순발력과 재치 넘치는 언변으로 귀족의 부패와 탐욕을 고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br />
이 희곡을 원작으로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라 폰테가 각색한 부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본 나폴레옹이 ‘피가로 야 말로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말했을 만큼 피가로는 사람들을 깨웠다. 이 오페라는 지금도 음악인들 사이에는 역사상 최고의 오페라로 꼽힌다. 라트라비아타, 마담 버터플라이를 훨씬 뛰어 넘는다.<br />
프랑스 최고(最古),최대 일간지 ‘르 피가로’지의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최고 명소의 하나였던 카페 &#8216;르 피가로&#8217; 역시 기억에 새롭다.</p>
<p>그가 작가 초기에 집중했던 것은 사실 ‘드람 부르주아(Drame bourgeois, 시민극)’라는 진지한 장르였다 초기의  작품&#8217;외제니&#8217;와 &#8216;두친구&#8217;는  평범한 시민들의 도덕적 갈등과 가정 내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보마르세는 &#8216;외제니&#8217; 서론에서 자신이 디드로의 문학관을 따른다고 적었다.<br />
문학가의 작품에는 그의 인생관이 들어 나기 마련이다.</p>
<p>외제니 ((Eugénie ou la Vertu au diséespoir, 1767)는 보마르세의 첫 희곡으로, 당시 유행하던 &#8216;눈물을 짜내는 희극(comédie larmoyante)&#8217;의 영향을 받았다.<br />
젊고 순진한 여주인공 외제니는 클라랑동 백작과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믿고 그의 아이까지 가진다. 하지만 사실 백작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꾸민 것이었고, 이미 다른 부유한 귀족 여성과 정략결혼을 앞둔 상태였다.<br />
이 사실이 밝혀지며 외제니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위기에 처한다. 외제니는 절망(Vertu au désespoir, 절망에 빠진 미덕)하지만, 결국 백작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녀를 진정한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신분 차이와 남성의 기만 속에서도 여성의 정조와 미덕이 승리한다는 도덕적 메시지를 강조했다.</p>
<p>두 친구 (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 1770)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정과 상업적 신뢰를 주제로 하고 있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인 오렐리와 세무 관리인 멜라크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어느 날 오렐리가 갑작스러운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멜라크는 친구를 돕기 위해 자신이 관리하던 공금을 몰래 꺼내어 빌려준다. 공금을 유용한 사실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면서 멜라크는 큰 고초를 겪게 되지만, 오렐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오해와 위기가 겹치지만, 결국 두 사람의 희생적인 우정이 빛을 발하며 상황이 해결된다.<br />
당시 상인 계급의 정직함과 우정을 찬양하며, 경제적 신용이 곧 인간의 도덕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p>
<p>두 작품 모두 당시에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현대에는 &#8220;너무 교훈적이고 신파적이다&#8221;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훗날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가 살아있는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셈이다.</p>
<p>그전에 보마르세는 귀족사회 고발장인 &#8216;비망록&#8217;을 써내 필명을 떨쳤다.<br />
1774년 일종의 동업 관계였던 뒤베르네 재무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조카인 라 블라슈 백작과 재산 문제로 소송이 벌어져 그는 패소했다. 그러자 그는 그 재판을 맡았던 검사 고에즈망(Goëzman)을 고소하는 한편 재판의 부패를 다룬 희곡식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lt;비망록(Mémoires)&gt;(1774~1775)이었다. 이 출판으로 그는 부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귀족 사회 풍자와 고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품 이었고 이 비망록을 쓰면서 피가로 3부작을 구상했던 것으로 여겨 진다.</p>
<p>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오늘날 로시니와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더 친숙하지만, 두 작품 모두 본래 연극용 희곡으로 쓰였고 당대에 연극으로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 들이다.<br />
세비야의 이발사는 1775년 2월 23일, 파리 최고의 극장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 졌다. 초기에는 5막짜리 구성으로 초연되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보마르셰가 단 48시간 만에 4막으로 수정하여 다시 올렸고,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프랑스 연극계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원래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 형식으로 기획되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연극 희곡으로 다시 집필한 사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집필이 진행 됐단다.</p>
<p>스페인의 도시 세비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비야의 이발사는 알마비바 백작이 아름다운 로지나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로지나의 후견인으로 그녀와 결혼하려는 늙은 의사 바르톨로가 방해한다. 길에서 우연히 자신의 하인이었던 이발사 피가로를 마주친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피가로는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로 알마비바 백작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해피 엔딩이지만 귀족 중심 사회를 비판과 풍자하는 이야기다.</p>
<p>피가로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은 9년 뒤인 1784년 4월 27일, 역시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막을 올렸다.<br />
전편에 이어 더욱 실랄해진 귀족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수년간 상연 불가 처분을 받았다. 금지가 풀린 뒤 열린 초연 날에는 인파가 너무 몰려 극장 문이 부서지고 사람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로 대흥행을 기록했다. 68회 연속 공연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나폴레옹은 이 연극을 두고 &#8220;이미 실행된 혁명&#8221;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p>
<p>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가 결혼 후 3년 뒤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발사였던 피가로는 혼인을 성사시킨 공로로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준비한다. 한편 로지나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와 결혼하게 될 하녀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백작은 이미 폐지했던 영주의 권리인 초야권(처녀가 시집가게 되면 첫날밤을 영주와 동침)을 은근히 부활시키려 하고, 하녀 마르첼리나가 피가로의 작은 실수를 들고 나와 결혼을 요구하는 등 수잔나와 피가로의 결혼에 여러 장애물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피가로는 꾀를 내어 백작부인과 수잔나와 함께 공모하여 백작을 궁지에 몰아넣고 수잔나와 결혼에 성공한다.</p>
<p>피가로의 결혼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보마르셰는 작품의 배경을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으로 하는등.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1784년 가까스로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뒀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lt;피가로의 결혼&gt;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786년 프랑스가 아닌  빈에서 초연되었다.</p>
<p>시리즈 세번째 죄지은 어머니 (La Mère coupable)는 한참 뒤인 1792년 6월 26일, 파리의 테아트르 드 마레(Théâtre du Marais).에서 무대에 올려졌는데 앞선 두 작품이 경쾌한 희극이었다면, 이 3편은 프랑스 혁명기의 암울한 분위기가 반영된 진지한 &#8216;모랄 드라마(drame moral)&#8217;였다.<br />
피가로와 수잔나가 중년이 된 시점을 다루며, 알마비바 백작 부부의 가정사 비극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렸다. 앞선 두 편만큼의 파괴력은 없었지만, 당대 관객들에게 보마르셰의 마지막 드라마로서 꾸준히 공연되었다.</p>
<p>알마비바 백작 부부는 큰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차남 레옹이 있지만 백작의 태도는 냉담다. 사실 레옹은 백작이 긴 출장을 가있는 동안 백작부인이 셰르뱅(Chérubin)과 하룻밤을 보내었을 때 임신한 아이다. 백작부인이 그들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고 셰르뱅에게 말하자 그는 전쟁으로 떠났고 의도적으로 전장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백작부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서 보냈고, 백작부인은 특별한 상자 안에 그 편지를 보관했다.<br />
백작도 레옹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해 왔지만 부인을 추궁하거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백작에게도 플로레스틴(Florestine)이라는 이름의 사생아가 있었는데 베기아르스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녀를 백작의 유일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백작부인의 비밀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br />
한편 백작 부부의 불화를 지켜보던 피가로는 여기에 모종의 사연과 음모가 있다는 것 알아차리고 수잔나와 함께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플로레스틴과 레옹이 사랑에 빠진다는 막장 요소 였다.  피가로는 이번에도 기기묘묘한 수를 써서 둘이 결혼할 수 있는 길을 튼다. 이과정에서 피가로는 생모를 찾게 된다. &#8216;죄지은 어머니&#8217;에는 얄궂게도 ‘모럴 드라마(Drame Moral)’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의 작품에는 통속 막장 요소가 잔뜩 들어 있다. 영어로는 레디컬 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아 하는지 모른다.  &#8216;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8216;이란 말처럼.</p>
<p>보마르셰가 자신의 이 연극들, 특히 앞의 두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벌였던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첩보 영화나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을 둘러싼 일화들은 18세기 프랑스의 검열 제도와 사회적 역동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br />
루이 16세는  대본을 직접 읽고 분노하며 상연을 금지했다. 하인(피가로)이 주인(백작)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지략으로 이기는 설정이 왕권과 신분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마르셰는 &#8216;게릴라식 마케팅&#8217;으로 맞섰다.<br />
공연이 금지되자 보마르셰는 파리의 유력한 귀족 부인들의 살롱을 돌아다니며 대본을 낭독했다. &#8220;왕이 금지한 금서&#8221;라는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귀족들 사이에서 &#8220;이 연극을 못 보면 유행에 뒤처진다&#8221;는 심리가 확산되었다.<br />
심지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이 연극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여론에 밀린 루이 16세는 몇 차례의 대본 수정을 조건으로 공연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말한대로 3년여의 수정 작업 끝에 상연 허가가 떨어지자 파리 시민들은 환호했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8250"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5/unnamed.jpg" alt="" width="512" height="341" /></p>
<p>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파가 몰려 코메디 프랑세즈의 철제 정문이 부서졌다. 당시 극장은 신분에 따라 좌석이 엄격히 나뉘어 있었으나, 이날만큼은 공작부인과 요리사가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br />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 극장 안의 온도가 치솟자, 여성 관객들이 일제히 부채질을 하는 바람에 극장안에 부채소리가 요동쳐 극 진행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p>
<p>보마르셰는 단순히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지적 재산권을 위해 싸운 투사이기도 했다. 당시 극단(코메디 프랑세즈)은 작가에게 정당한 수익을 배분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br />
보마르셰는 이에 분개하여 1777년에 &#8216;극작가 협회(SACD)&#8217;를 창립했다. 이는 오늘날 저작권법의 근간이 되는 활동으로, 그는 연극이 성공할수록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도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p>
<p>재미있는 점은 그가 이 연극 대본을 집필하고 수정하고 무대에 올리던 시기가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던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br />
그는 낮에는 루이 16세의 신하로서 비밀 첩보 활동(로드리그 오르탈레즈 공사 운영 등)을 하고, 밤에는 그 국왕이 금지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귀족들을 포섭했고 머리를 싸매 대본을 수정했던 것이다.<br />
연극 속 피가로가 보여주는 기만술과 변장, 기지는 실제 보마르셰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사용하던 수법들과 닮아 있다.<br />
당대 프랑스인들은 무대 위 피가로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하며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해소했다.</p>
<p>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예수회와 천주교 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대사들은 단순한 연극 대사가 아니었다. 보마르세가 존 캐럴과 함께  르 그랑을 다니면서 체득한 &#8216;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8217;와 &#8216;인간의 자유&#8217;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교감이 깊게 깔려 있었전 것이다.  당시 보마르세가 평생을 깊은 소속감을 지니고 “꾸루실료”로 참여했던 예수회가 불법단체로 지정 되면서 갈곳을 잏었던 심정이 희곡에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p>
<p>예수회의 교육 철학이 보마르셰의 문학, 특히 &#8216;피가로&#8217;라는 인물에 어떻게 투영되었을까?<br />
예수회 교육의 핵심 지침인 &#8216;라티오 스투디오룸&#8217; (Ratio Studiorum)은 학생들의 수사학적 능력과 대중 앞에서의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 학교 연극(School Drama)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br />
피가로의 그 유명한 긴 독백(Monologue)들은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청중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회 교육이 강조한 &#8216;설득의 수사학&#8217;과 궤를 같이한다.</p>
<p>&#8220;인생은 연극이다&#8221;라는 관점은 예수회 교육의 특징 중 하나였다. 보마르세가 복잡한 인물 관계와 변장, 반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그가 예수회식 &#8216;무대 중심 교육&#8217;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훌륭한 복선이다.<br />
예수회는 인간의 원죄와 함께 자유의지(Free Will)와 인간의 능력을 통한 신의 영광을 강조했다.<br />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로서 피가로는 신분이라는 &#8216;주어진 운명&#8217;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지능과 노력으로 길을 만들어갔다. &#8220;태어나는 수고만 한 귀족&#8221;에 대비되는 피가로의 역동성은 &#8220;인간의 구원에는 자신의 행동이 많은 부분 책임져야 하는 측면이 반드시 존재한다&#8221;는 예수회적 인본주의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p>
<p>예수회는 엄격한 율법주의보다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최선의 도덕적 선택을 고민하는 &#8216;결의론(Casuistry)&#8217;으로 유명했다. 피가로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발휘하고 작은 선의의 거짓말로 더 큰 정의(사랑의 결실, 약자 보호)를 이루는 모습은 이런 철학적 배경과 맞닿아 있었다.<br />
보마르세의 작품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관찰이 담겨 있다. 이는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8216;활동 중의 관상&#8217;이라는 예수회적 태도가 문학적으로 승화된 모습이다.<br />
바로 &#8216;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8217;과 내면의 탐구였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장면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행을 강조한다.</p>
<p>존 캐럴이야 말로 그 관상기도에 빠져 있었다.</p>
<p style="text-align: left;">&#8220;찰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기도실에서 기도 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어. 내 기도 속에서 펼쳐지는 갈릴리 호스가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생생한 모습은  이세상 그 어떤 것 보다도 나를 차분하면서 도 그윽한 만족감에 휩쌓이게 했었지, 그러니 내가 이 길 사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겠니?&#8221;</p>
<p style="text-align: left;"> 그랬다. 4촌 동생인 찰스 뿐 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 신부의 길을 걷게 되었느냐고 묻곤 했었다. 그때만다 존은 관상기도를 내 세웠다.   존은 기도 하면서 식민지의 현실에서 특히 자신의 고향 메릴랜드의 현실에서 천주의  가르침이 고단한 현실을 개선하고 개척해 나가는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회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고 안배였다.  그의 줄기찬 기도는 신앙은 개인차원에서 출발하지만 이내 공동체를 이루고 종국에는 그 공동체가  현실에서 천주의 일을 해나간다는 개안의 기도 였던 것이다.</p>
<p>존 캐럴이 신앙적 성찰을 통해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찾았다면, 보마르셰는 같은 교육의 뿌리에서 &#8216;인간의 평등과 자유&#8217;라는 세속적 결론을 이끌어냈고 자신이 그길에 보탬을 주는 것이 자신 존재의 이유라고 여겼던 것이다.</p>
<p>보마르셰와 존케럴은 루이 르 그랑의 복도에서 창밖을 보면서 인간의 자유를 생각했고 라틴어 고전 호메로스의 시, 키케로의 수사학 세네카의 비극을 공부하면서 역사에 대해 그리고  권력과 도덕에 대해 또 진정한 신앙에 대해 논쟁하곤 했다.</p>
<p>거기에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견하던 예수회의 특성상, 선교사 출신이 꽤 있었던 교수진의 수업에는 이국적인 문물과 정보가 넘쳤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보마르세가  대서양 건너 미국의 독립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고 존 과 찰스가 국제적 안목을 폭 넓게 가질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p>
<p>존 캐럴과 피에르 보마르세, 두 인물이 비록 나이와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교육 커리큘럼(고전 문학, 수사학, 변증법)을 거치면서  그들이 &#8216;자유&#8217;라는 가치 아래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강력한 정신적 유대감이 형성 됐던 것이다.  루이 르 그랑의 공기는 두 사람을 양 측면에서 서서히 변화 시켰지만 종국에는 하나로 굳건해 졌던 것이다. 그런점에서 보마르세가 창조해낸 독특한 캐릭터 피가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p>
<p>(계속)</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1"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hmart-top.gif" alt="" width="675" height="87"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27542" src="https://hinykorea.com/wp-content/uploads/2026/03/감미옥-1.jpg" alt="" width="1440" height="960"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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